4. 100만 명 1500만 명의 죽음

 

19641, 다나 댈림플(Dana Dalrymple)쏘련 연구(Soviet Studies)‘1932년에서 1934년의 쏘비에뜨 기근이란 제목의 논설을 실어 출간했다. 그는 그 당시에 550만 명이 죽었고, 스무 번이나 여러 번 개산(槪算, estimate)을 했다고 주장했다.

 

즉시 한 질문이 떠오른다: 이 교수가 사용한 개산의 출처는 어디일까?

 

라이나로 유명한 여행을 했던 토마스 워커였는데, 댈림플에 의하면 그곳에서 그는 아마도 러시아어를 말 할 수있었을 것이다.

 

다른 출처는 니콜라스 프리초드꼬(Nicolas Prychodko)로서, 그는 키예프(Kiev)에서 나찌가 통제한 문화 교육 장관을 위해 일했던 나찌의 협력자였다. 프리코드코는 나찌가 우끄라이나에서 후퇴하는 동안, 그들에 의해서 서방으로 탈출하였다. 그는 700만 명의 사망자 수치를 제공하였다.

 

다음으로 오토 쉴러(Otto Schiller)를 꼽을 수 있는데, 그는 나찌가 점령한 우끄라이나에서 농업의 재조직을 책임진 나찌 관리였다. 1943년 베를린에서 출판되어 750만 명이 죽었다고 주장하는 그의 책은 댈림플에 의해 인용되었다.

 

그 다음 출처는 나찌인 이왈드 아멘데였는데, 그는 1922년 이후 러시아에 머물지 않았다. 19347월과 8월에 뉴욕타임즈(New York Times)에 실린 두 통의 서신에서 아멘데는 750만 명의 죽음에 대해 언급했고, 그 해 7월 키예프 거리에서 인민들이 죽어가고 있다고 조작했다. 며칠 뒤에 뉴욕타임즈특파원인 헤럴드 데니(Harold Denny)는 아멘데에게 거짓말을 한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고 했던 지난 7, 당신의(뉴욕타임즈역자) 특파원은 여기 키예프에 여러 날을 머물렀지만, 이 도시에도 심지어 주위의 농촌 지역에도 굶주림의 기색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몇주 뒤에 데니는 기근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기근에 대해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었습니다. 지역의 공개시장에는 빵을 비롯해 음식이 있습니다. 농민들은 웃고 있었고, 식료품에 대한 인심이 후했습니다.’라고 보도하였다.15)

 

그리고 다음, 프레드릭 비첼(Frederick Birchall)1933년 기사에서 400만 명 이상이 죽었다고 하였다. 그 당시에 그는 베를린에 있었고, 히틀러 정권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최초의 미국인 기자였다.

 

여섯 번째부터 여덟 번째까지의 출처는 윌리엄 H 챔벌린(William h. Chamberlin)에서 두 번, 그리고 유진 라이온(Eugene Lyons)에서 한 번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반공주의 기자였다. 전쟁 이후에, 이 둘은 자유 라디오로 더 잘 알려진, “볼셰비즘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아메리칸 위원회(AMCOMLIB)”의 주요 회원이었다. AMCOMLIB의 자금은 자유를 위한 십자군에서 조달되었는데, ‘자유를 위한 십자군은 자금의 90%CIA로부터 조달받는다. 챔벌린은 처음에 400만 그리고 두 번째에서는 750만이 죽었다고 추정하였고, 두 번째 수치는 우끄라이나에 거주는 외국인들의 추정치를 기초로 한 것이었다. 라이온의 500만의 죽음 또한 소문과 풍문의 결과이며, ‘모스끄바에 있는 러시아인들과 외국인의 추정치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가장 많은 수치(1000만 명)가 상세한 설명 없이 허스트의 친나찌 출판물에서 리차트 스탈렛(Richard Stallet)에게서 나왔다. 1932년 우끄라이나 인구는 2500만 명이었다.16)

 

댈림플의 학문적작품에 있는 스무 가지의 출처 가운데, 세 개는 허스트의 친나찌 출판물들에 실린 반쏘련 기사에서 나왔고, 다섯 개는 맥카시 시대(19491953)의 극우 출판물에서 나왔다. 댈림플은 두 명의 독일 파시스트 작가, 전직 우끄라이나인 협력자, 러시아 출신 우익의 망명자, 두 명의 CIA 협력자, 그리고 히틀러를 좋아했던 기자의 말들을 이용했다. 많은 수치들은 확인되지 않은 쏘련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가장 낮은 두 수치는, 1933년이라고 날짜가 기록된, 모스끄바에 있던 미국 기자들의 것이다. 그들은 전문성으로 잘 알려진, New York Herald Tribune의 랄프 바네즈(Ralph Barnes)New York Times의 왈터 듀란티(Walter Duranty)이다. 랄프 반네즈 100만 명, 월터 듀란티는 200만 명이 기근으로 숨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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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맥카시와 연관된 책(A book from McCarthy)


수천 명의 우끄라이나 나찌 협력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미국 입성에 성공했다. 맥카시 시기 동안 그들은 ‘공산주의의 야만성12)’의 희생자로서 증언하였다. 그들은 기근―대학살이라는 신화를 다시 조작하여 ≪끄레믈린의 음흉한 행위들(Black Deeds of Kremlin)≫이란 두 권으로 된 책을 만들었고, 미국에 거주하는 “러시아 공산주의 폭력의 우끄라이나 희생자 협회”와 “쏘비에뜨 체제에 의해 한때 박해당한 우끄라이나인들의 민주 협의체”에 의해, 1953년과 1955년에 출판되었다. 콘퀘스트가 소중히 여기며, 정기적으로 인용하는 이 책은 1918년에서 1920년의 수만 명의 유대인 대학살에 책임이 있는 페트리우라(Petliura)에 대한 찬양을 담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나중에 우끄라이나 반란 부대(Ukrainian Insurgent Army, UPA)가 된 나찌가 조직한 나이팅게일 대대(Nachtigall Battalion)의 파시스트 지휘관인 슈케비치(Shukhevych)에게 경의를 표한다.


≪끄레믈린의 음흉한 행위들≫은 또한 1932년과 1933년 사이의 기근―대학살을 보여주는 일련의 사진을 포함한다. 그 사진들은 모두 위조된 것들이다. 정교한 위조 사진이다. 한 사진은 ‘작은 식인종’이란 제목이 붙는다. 이 사진은 ‘자포로제(Zaporozhe)에서 온 식인종: 그의 누이를 먹다’란 원래 제목으로, 1922년 러시아 구호 국제 위원회의 ≪Information≫ 22호 공보에 실렸다. ≪끄레믈린의 음흉한 행위들≫ 155쪽에는 여러 명을 막 처형한 네 명의 군인과 한 명의 장교 사진이 있다. ‘꿀락들의 사형집행’이란 제목이 붙었다. 세부 내용: 군인들이 짜르 군복을 입고 있다! 따라서 짜르주의자의 사형 집행은 ‘스딸린의 범죄’의 증거이다.13)


이 책의 제1권의 저자 중에 한 명은 알렉산더 헤이-홀로우코(Alexander Hay-Holowko)였는데, 그는 서부 우끄라이나에 있었던 우끄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Organization of Ukrainian Nationalists)의 반데라(Bandera) ‘정부’에서 선전 장관이었다. 이러한 파시스트 도당이 잠시 (우끄라이나에—역자) 존재하는 동안, 민족주의 폭도와 우끄라이나인들의 지원 군대(Ukrainian auxiliary troops)는 리보프(Lvov) 지역의 수천 명의 유대인, 폴란드인, 그리고 볼셰비끼들을 살해했다. 지금은 벤쿠버(Vancouver)에 살고 있는 헤이-홀로우코 또한 나찌 친위대(SS)로서 복무했다.


책의 후원자로 언급된 이들 중에는 아나토레 비로체르끼스키(Anatole Bilotserkiwsky)가 있는데, 그의 별명은 안톤 슈파크(Anton Shpak)로, 빌라 체르끄바(Bila Tserkva)에 있는 나찌 경찰의 관리로 근무한 적이 있다. 목격자들과 문서에 따르면 슈파크/비로체르끼스키와 그리고 다른 이들이, 주로 유대인 시민들 2000명의 사형집행에 참여했었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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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히틀러와 연관된 책(A book from Hitler)


1935년, 이왈드 아멘데(Ewald Ammende) 박사가 ≪압제 러시아의 기근 (Muss Russland hungern?)≫ (1936년 영문판 제목: ≪러시아에서 인간의 삶≫) 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이 책의 근거 자료는 독일 나찌 출판물, 이탈리아 파시스트 출판물, 우끄라이나 망명집단 출판물, 그리고 ‘여행가들’과 ‘전문가들’에게서 나온 것으로, 구체적으로 인용하지는 않았다. 그는 ‘러시아의 실체를 보여주는 가장 핵심적인 사진들’을 썼다고 주장했다.9) 또한 디트로프(Ditloff) 박사가 가지고 있는 사진도 실었는데, 그는 1933년 8월까지 북 코카서스에서 독일 정부의 농업 허가권의 감독관― Drusag ― 이었다. 디트로프는 1933년 여름에 그 사진들을 찍었고 ‘이 사진들이 기근 지역의 상황을 입증한다’고 주장했다.10)


디트로프가 당시 나찌 정부의 관리라면, 어떻게 코카서스에서 우끄라이나로 자유롭게 다니며 사진을 찾아낼 수 있었을까? 디트로프의 사진들 중에서, ‘개구리 같은 자세의’ 아이 사진을 포함해서, 7장의 사진 또한 워커에 의해서 출판되었다. 또 다른 사진은 두 명의 해골 같은 소년들 사진이었으며, 그것은 1933년 우끄라이나의 기근을 상징한다. “러시아”라는 제목을 가진, 피터 유스띠노프(Peter Ustinov)의 텔레비전 연속물에서 똑같은 사진이 방영되었다: 이 사진의 출처는 1922년 러시아 기근에 대한 기록영화였다! 아멘데가 제시한 사진 중 또 다른 것이 나찌 당 기관지인 ≪민족의 관찰자(Volkischer Beobachter)≫지에 실렸는데, 1933년 8월 18일이라고 날짜가 기록되어 있다. 이 사진 또한 1922년의 책자에서 발췌한 사진으로 밝혀졌다.


아멘데는 1913년 볼가(Volga)지역에서 일했다. 1917년에서 1918년의 내전 동안 그는 에스토니아(Estonia)와 라트비아(Latvia)의 친독일 반혁명 정부 편이었다. 그리고 그는 1918년 3월, 독일 군대에 의해 우끄라이나에 설립된 스코로파드스키(Skoropadsky) 정부와의 연락관으로 일했다. 그는 1921년부터 1922년의 러시아 기근 동안 인도주의적 구호 활동에 참여했다고 주장하는데, 그래서 그 기간의 사진들에 정통하다. 여러 해 동안 아멘데는 나찌당과 친밀한, 쏘련에서 망명한 집단을 포함하는, 소위 유럽 민족 회의(European Nationalities Congress)의 총 서기장이었다. 1933년 말에 아멘데는, 러시아 기근 지역에 대한 “제종파 공동의 국제적 구호 위원회”의 명예 서기장으로 임명되었으며, 그 단체는 비엔나의 친-파시스트 인사인 인니체르 추기경(Cardinal Innitzer)이 이끌었다. 따라서 아멘데는 나찌의 반쏘비에뜨운동과 밀접히 관련되었다.


레이건(Reagan)이 1980년대 초에 반공성전을 시작했을 때, 하버드 대학의 교수인 제임스 메이스(James E. Mace)는 아멘데의 책을 ≪러시아에서 인간의 삶≫이란 제목으로 재편집하여 재출간 할 적절한 때라고 생각했다. 그때가 1984년이었다. 그래서 워커의 우끄라이나에 대한 허위 보도를 포함하여, 모든 나찌의 거짓말과 위조된 사진 상의 증거가 하버드의 명성과 결합하여 ‘학문적 지위’를 부여받았다.


그 전 해에, 미국에 있는 극우 우끄라이나 망명자들이 ≪우크라이나의 대기근: 알려지지 않은 대학살≫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더글라스 토틀은 이 책의 사진들에 1921년과 1922년 사이의 날짜가 찍혀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책 표지 사진은 난센 박사(F. Nansen)의 “러시아 구호를 위한 국제 위원회”의 간행물 ≪Information≫, 22호, 제네바, 1922년 4월 30일자, 6쪽에서 따온 것이었다.11)


전 세계의 신(新)나찌 수정주의는 역사를 ‘수정하여’, 무엇보다도, 공산주의자와 쏘련에 대한 파시즘의 야만적인 범죄를 정당화시켰다. 첫째, 그들은 본인들이 유대인에게 저질렀던 범죄를 부정한다. 신나찌는 수백만의 유대인들이 살해당했던 유대인 학살 수용소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런 다음 그들은 공산주의자들과 스딸린 동지가 저질렀다는 가상의 ‘대학살’을 날조한다. 이러한 거짓말로, 그들은 나찌가 쏘련에서 저질렀던 잔악무도한 범죄를 정당화한다. 이러한 반공투쟁에서의 역할로 인해, 수정주의(신나찌 ― 역자)는 레이건, 부시(Bush), 대처(Thatcher) 그리고 (CIA 같은 ― 역자) 첩보기관(company)에게서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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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역사학자이자 벨기에 노동당 당수였던 루도 마르텐스(Ludo Martens)가 쓴 스탈린 전기인 <스탈린 바로 보기(Another view of Stalin)>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예전에 노동사회과학연구소에서 번역한 글을 그대로 옮긴겁니다.)


1. 집산화에 대한 거짓말은 쏘련에 맞선 부르주아계급의 심리전에서 항상 강력한 무기였다.


우리는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거짓말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는데, 그것은 스딸린이 우끄라이나 인민들에게 저지른 가상의 대학살이다. 이러한 상당히 정교한 거짓말은 히틀러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1926년 그의 책 ≪나의 투쟁(Mein Kampf)≫에서 그는 우끄라이나가 독일의 ‘국민생활권(lebensraum)’에 속한다고 이미 지적하였다. 우끄라이나에서 볼셰비끼의 ‘대량 학살’에 대해, 1934년에서 1935년 동안 나찌가 벌인 모략은, 우끄라이나의 계획된 ‘해방’에 대해, 인민들의 마음을 준비시키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 거짓말이, 그것을 만든 나찌들보다 오래 생존해서, 미국의 무기가 된 이유를 알아볼 것이다. 지금부터 ‘스딸린주의에 의한 수백만 명의 희생자’가 어떻게 날조되었는지 알아보겠다.


1935년 2월 18일, 미국의 허스트(Hearst)의 출판물은 토마스 워커(Thomas Walker)가 쓴 일련의 기사를 싣기 시작했다. (허스트는 언론계의 거물이었으며 나찌의 지지자였다.) 위대한 여행가이자 기자라는 워커는 몇 년간 쏘련을 종횡하였다고 한다. 2월 25일 ≪Chicago American≫지에는 이러한 제목(헤드라인)이 실렸다. ‘쏘련에서 기근으로 600만 명이 사망: 농민들의 수확물은 몰수, 그들과 그들의 가축들이 굶어 죽다.’ 그 면의 중간을 보면, 또 다른 제목(헤드라인)이 보인다. ‘기자는 기근을 보여주는 사진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걸다.’ 그 면의 아래 부분에는 ‘기근 — 인간성에 대한 범죄’라고 쓰여 있었다.1)


그 당시에 루이스 피셔(Louis Fisher)는 미국 신문 ≪The Nation≫지의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완전히 무명인 동료가 낸 이러한 특종은 그에게 상당한 흥미를 자아냈다. 그는 몇 가지 조사를 했고, 그가 알아낸 것들을 신문의 독자들과 공유했다:


‘우리의 정보에 의하면, 워커 기자는 1934년 봄인 “지난 봄에 러시아에 입국했다.” 그는 기근을 봤다. 그는 그 희생자들의 사진을 찍었다. 그는 비통해 했고, 직접 기근의 참화에 대한 기사를 썼다. 이제 러시아의 기근은 “큰 화젯거리” 뉴스(``hot'' news)다. 어째서 허스트 씨는 이렇게 놀라운 기사를 10개월이나 보관한 뒤 보도했을까?...’


‘나는 모스끄바로부터 입수한 공식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는 쏘비에뜨 당국에 조언을 구했다. 토마스 워커는 쏘련에 한 번 다녀왔다. 그는 1934년 9월 29일 런던 주재 쏘련 영사관에서 통행 비자를 받았다. 1934년 10월 12일, 그는 폴란드에서 기차를 타고 네고레로예(Negoreloye)를 통해 쏘련으로 입국하였다. (그가 말한 것처럼 1934년 봄이 아니었다.) 그는 10월 13일에 모스끄바에 있었다. 그는 13일인 토요일부터 18일인 목요일까지 모스끄바에 머물렀고, 그 다음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1934년 10월 25일에 시베리아-만주 접경지역에 도착했다.... 10월 13일부터 10월 18일의 5일이라는 시간은, 워커 기자가 직접 경험을 하고 “묘사한” 내용의 1/3을 다루기에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나의 추측은, 그가 모스끄바에 오래 머물면서, 그의 위조된 기사를 그럴 듯하게 하는 데 필요했던, 우끄라이나 “지방의 고유한 특성”을, 분개한 외국인들로부터 수집했다는 것이다.’


피셔에게는, 1934년 초에 우끄라이나를 방문했던 린드세이 패롯(Lindsay Perott)이라는 미국인 친구가 있었다. 그는 허스트의 출판물에 언급된 기근에 대해서 어떠한 흔적조차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1933년은 풍작이었다. 피셔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허스트 신문과 나찌가 점점 더 긴밀하게 일을 꾸미기 시작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패럿(Mr. Parrott)이 번영하는 쏘비에뜨 우크라이나에 대한 이야기를 썼지만, 이것을 허스트 신문이 실었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다. 패럿은 허스트의 모스크바 특파원이다.’2)


작은 소녀와 ‘개구리 같은 자세의’ 아이 사진 아래에, 워커3)는 이렇게 적었다.


‘소름끼치는 ― 하르호프(Kharhov)(원문대로4)) 남쪽에, 전형적인 농민의 오두막에 더러운 바닥, 짚으로 이은 지붕 그리고 가구 한 점, 벤치가 있고, 아주 야윈 소녀와 그녀의 두 살 반 된 남동생(위에 보인다)이 있다. 이 남동생은 마치 개구리처럼 마루를 기어 다녔고, 그의 가냘픈 몸은 영양 부족으로 기형으로 사람 같지 않았다.’5)


캐나다 노동조합원이자 기자인 더글라스 토틀(Douglas Tottle)은 1934년으로 (워커의 기사에서 ― 역자) 기록되어 있는 ‘개구리 같은 자세의’ 아이 사진과 동일한 사진을, 1922년에 발행되었던 그 해 기근을 다룬 기사에서 발견했다.


또 다른 워커의 사진은 제1차 세계 대전 때, 죽은 말 옆에 있는 오스트리아 기병대 군인의 사진으로 판명되었다.6)


야비한 워커: 그의 기사는 거짓이었고, 그의 사진도 거짓이었으며, 심지어 그의 이름마저 가짜였다. 그의 본명은 로버트 그린(Robert Green)이었다. 그는 8년의 금고형 중, 2년간 수감된 뒤 콜로라도(Colorado) 주립 감옥에서 탈출하였다. 그런 다음 그는 쏘련에 가서 거짓 기사를 썼다. 미국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체포되었고, 법정에서 우끄라이나에 결코 간 적이 없다고 시인하였다.


억만 장자인 윌리엄 란돌프 허스트(Wiliiam Randolph Hearst)는 1934년 늦은 여름에 히틀러를 만나, 독일이 허스트 소유의 International News Service사(社)의 국제 뉴스를 구매하겠다는 계약을 맺었다. 당시에 나찌 출판물은 이미 ‘우끄라이나 기근’에 대한 흑색선전을 시작하고 있었다. 허스트는 그의 위대한 탐험가 워커 덕분에 재빠르게 이 기회를 포착했다.7)


기근에 대한 다른 비슷한 기사가 허스트 신문에 보도되곤 하였다. 예를 들면, 프레드 빌(Fred Beal)이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노동쟁의 이후 20년 금고형을 선고받은 미국 노동자인 그는 1930년 쏘련으로 도망갔으며, 2년 동안 하르코프 트랙터 공장에서 일했다. 1933년에 그는 ≪쏘비에뜨  트랙터 공장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Foreign workers in a Soviet Tractor Plant)≫이란 제목의 소책자를 썼는데, 여기서 쏘련 인민의 노력을 우호적으로 묘사했다. 1933년 말에 그는 실직과 감옥행이 예정되어 있던 미국으로 돌아왔다. 1934년 그는 우끄라이나 기근에 대해서 쓰기 시작했고, 곧 그의 금고형은 극적으로 줄어들었다. 1935년 6월에 그가 ‘실제로 목격한 이야기’가 허스트에 의해서 출간되었을 때, 5년 동안 동일한 하르코프 공장에서 일했던 우리넥(J. Wolynec)이라는 또 다른 미국 노동자가, 빌의 책 전체에 걸쳐있는 거짓말들을 폭로했다. 비록 빌이 많은 대화를 들었다고 했지만, 우리넥은 그가 러시아어 우끄라이나어 어느 것도 구사할 줄 모른다고 지적했다. 1948년에 빌은 맥카시 위원회(McCarthy Committee) 앞에서 공산주의자들에 맞선 증인으로서 극우주의자들에게 봉사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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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업적을 요약한 글입니다.)

 

소련의 지도자였던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은 서방 사회에서 가장 많은 비판 내지는 비난을 받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서방의 주류학계를 포함하여 스탈린에 대한 대부분의 시각은 잔혹한 독재자 혹은 학살자라는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당장 유튜브에 가서 스탈린만 검색하더라도 숙청’, ‘학살과 같은 수식어가 항상 붙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스탈린에 대해 심층적으로 이해한 것이라기보다는 서방의 전통주의적인 시각이 투영된 느낌이 강하다. 스탈린이라는 인물은 단순히 그런 것으로만은 해석하기에는 복잡한 인물이며, 단순히 악인으로만 보기에도 무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서방이나 국내에서 내리는 평가와는 달리, 스탈린이 통치했던 러시아나 과거 구소련 연방에서 내리는 스탈린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인 것 보다는 긍정적인 시각이 제법 적지 않다. 물론 1932년에서 1933년에 대기근을 겪었던 우크라이나나 1940년 소련 영토로 편입되었던 발트3국의 경우는 다르지만, 대체로 그가 부정할 수 없는 공로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편이다. 그렇다면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업적은 무엇일까? 나는 스탈린의 업적으로 크게 3가지를 보고 있다.

 

1. 공업화의 성공

 

러시아 현대사를 보면, 러시아는 19세기부터 산업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서구 유럽국가들에 비해 많이 낙후된 국가였다. 1905년 러일전쟁과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러시아 제국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흔들렸는데, 이것은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이어졌다. 1차 세계대전으로 경제상황이 열악했던 레닌의 혁명 정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을 받았고 적백내전을 치러야 했다. 그 결과 혁명 러시아 정부는 소비에트 연방 즉 소련을 탄생시켰지만, 경제적으로 상황이 더 안 좋아졌다. 이에 따라 1921년부터는 네프(NEP)라 하는 신경제정책을 실행하여 경제상황을 일정부분 회복했으나. 공업화라는 과제가 남아있었다.

 

1924년 레닌이 사망한 이후 볼셰비키에게는 공업화라는 과제가 남았고 이 과제를 실행한 사람이 바로 이오시프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1929년부터 제1차 경제개발 프로그램을 진행하여, 소련의 경제를 회복시키고 빠른 속도로 건설했다. 이 과정에서 무상의료와 무상복지와 같은 노동자 위주의 정책도 실행되었으며, 이는 서구 사회에도 영향을 주었다. 당시 스탈린의 소련은 1929년 미국발 경제 대공황 속에서도 생산력이 상승하고 경제가 발전했으며, 일부 미국인들이 소련에 와서 취업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공업화 시기 소련의 경제지표는 자신들 기준으로 연 20%이상의 성장률을 보였는데, 서방의 통계로도 연 14~15%의 성장률이었다. 그 과정에서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일부지역에서 대기근이 발생했는데, 사실 이것은 의도적인 학살이 아닌 자연재해에 가까운 참사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공업화 도중에 단행된 집산화는 이후 소련 경제의 높은 식량생산률과 농업생산률의 근간이 됐다. 확실한 건, 이 공업화를 통해 소련은 1930년대 당시 경제 규모로만 세계 2위였으며. 이런 과정속에서 무상의료 무상복지, 사적소유 철폐와 같은 진보적인 성과물을 만들어 냈다는 사실이다.

 

2. 2차 세계대전에서의 승리

 

공업화가 진행되는 와중에 스탈린은 군의 현대화도 추진했다. 이를 통해 소련은 탱크와 장갑차 중심의 기계화된 대규모 병력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소련이 미국과 군사적으로 경쟁할 수 있던 토대가 되었다. 물론 1936년 스페인 내전이나 1938년 노몬한 전투에서는 큰 효력을 못 보았고, 1939년 이른바 겨울전쟁에서도 붉은 군대는 열악한 측면이 있었다. 1941년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했을 당시에도 소련군은 초기에 후퇴를 거듭했고, 수십만의 병사가 독일군의 포로로 붙잡히는 신세이기도 했다.

 

초기 전화에서 소련군이 밀렸지만, 스탈린은 1941년 모스크바 전투와 1942년 스탈린그라드 전투 1943년 쿠르스크 전투 등에서 독일군을 패퇴시키는데 큰 공로를 세웠다. 무엇보다 그의 연설과 노력을 통해 수많은 소련민중이 조국을 방위하겠다는 일념으로 파시즘에 맞서 싸웠고, 그는 주코프나 바실렙스키 등과 같은 인물들과 잘 타협하여 이들이 군사적 지휘를 잘 할 수 있도록 지도력을 보였다.

 

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은 2,700만이라는 엄청난 희생을 치렀지만, 이 참혹한 전쟁을 끝내고 소련을 승리로 이끌었던 지도자는 바로 스탈린이었다. 물론 수많은 인민의 희생이 있었지만, 영국의 역사학자 제프리 로버츠(Geoffrey Roberts) 교수의 주장처럼 스탈린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가장 유능했던 전시 지도자였다. 스탈린의 군대는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쿠르스크 전투를 시작으로 바그라티온 작전과 동유럽 해방 그리고 베를린 전투까지 승리에 승리를 거듭했고, 이것은 19458월 만주진격 작전에서 불과 1주일 만에 만주와 중국 일부, 사할린, 한반도 북부를 해방시키는 혁혁한 군사적 성과를 만들어 냈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승리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

 

3. 냉전시기 국제적인 사회주의 세력의 상징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간의 냉전은 내전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는데, 스탈린은 당시 사회주의권에서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일각에서는 소련이 당시 혁명을 지원하지 않았던 것처럼 얘기하지만, 지원을 아예 안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이 개입한 그리스 내전만 하더라도 지원이 많지는 않았지만, 소련은 불가리아 국경을 통해서 물자를 지원했고, 중국 국공내전에서도 마오쩌둥의 홍군에게 지원했다. 1950년 일어난 한국전쟁의 경우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적잖은 무기와 물자를 지원받았다.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고 있던 베트남의 호치민 정부의 경우 크게 지원을 받지는 못했으나, 1950년에 들어서 소련으로부터 공식적인 국가로 인정받았고, 그 시점부터 중국을 통해서 소련의 물자지원도 크지는 않지만 분명히 있었다. 당시 적잖은 사회주의 세력들이 소련에서 혁명과 공업화가 성공한 것을 보고,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맞서는 투쟁을 전개했다. 중국이나 북한 베트남 그 외의 라틴아메리카의 좌파세력들이 그러했다. 1970년 국민투표로 정권을 잡은 칠레의 아옌데만 하더라도, 1953년 스탈린이 죽었을 당시, “스탈린은 인류의 진보와 휴머니즘을 위해 투쟁한 상징이라고 극찬했을 정도였다.

 

일각에서는 냉전시기 소련이 동유럽 국가를 위성국화 했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 할지라도, 동유럽 국가의 사회주의 체제 건설은 단순히 소련의 영향 때문만은 아니었으며, 소련이 그 국가들에 군대를 주둔시켰던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파시즘과의 투쟁에서 얻은 전유물이라는 개념으로 봐야 한다. 동유럽에 있던 좌파세력들이 소련의 지원을 받으면서도 자체적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하려 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되고, 이들이 행동한 이유에는 스탈린이 건설한 소련 사회의 진보적 가치의 영향력도 있었다는 사실도 잊어선 안 된다.

 

그리고 이런 과정속에서 소련은 빠르게 전후재건에 나서서 1947년에는 배급제를 영국보다 7년이나 앞서서 폐지했고, 제국주의 국가 미국과 경쟁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 지금까지 스탈린의 업적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눠보았다. 나는 이러한 점이 스탈린의 가장 큰 업적 세 가지라고 생각하며, 이러한 이유에서 스탈린이 분명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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