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폭풍 - 1945년 8월 9-16일, 소련의 만주전역 전략 공세
데이비드 M. 글랜츠 지음, 유승현 옮김 / 길찾기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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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시작된 독소전쟁은 1941622일부터 나치독일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 하는 194558일까지 대략 4년간 전개되었던 참혹한 전쟁이었다. 대략 4년간의 전쟁에서 소련의 붉은 군대는 대략 1000만 명 이상의 군인을 잃었고, 1600만 명 이상이나 되는 민간인이 나치에게 학살당했으며, 대략 2600만 명의 사망자를 냈다. 이 책과 <독소전쟁사: When Titan Clashed How the Red Army Stopped Hitler>의 저자인 데이비드 글랜츠(David M Glantz)가 항상 지적해왔듯이, 서방세계에 알려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의 이미지는 만슈타인이나 하인츠 구데리안과 같이 나치 독일 측 장군들이 가지고 있던 이미지다. 따라서 서방세계가 인식하던 소련군은 군사적으로 체계적이지도 못하고 오직 인해전술식 작전을 고수하며 돌격밖에 모르는 군대였다. 여기에는 독일 장군들이 소련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오리엔탈리즘적 사고관도 반영되었다.

 

이와 같은 편견은 서방에서 만든 대중매체에도 잘 드러난다. 2001년 미국에서 제작한 영화인 에너미 엣더 게이트(Enemy at the Gate)2011년 태극기 휘날리며의 감독으로 유명한 강재규 감독의 마이웨이(My Way)를 보면 소련군들은 아예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돌격하는 장면이 나오고, 전술적으로 굉장히 비효율적인 군대로 묘사된다. 미국인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FPS 게임인 콜오브듀티(Call of Duty)에 나오는 소련군 또한 언급한 영화들과 다를 게 없는 모습이다. 2003년에 제작된 콜오브듀티1에서의 첫 소련군 미션은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배를 타고 전선에 도착한 알렉세이 이병(게임 주인공)은 소련군 정치장교로부터 고작 5발의 총알을 받은 채 돌격하고, 모신나강 소총이나 탄약을 나눠주는 정치장교는 총이 없는 사람은 총을 든 사람을 따라가라. 그리고 그자가 죽으면 총을 주워서 적에게 사격하라라는 막장스러운 연설을 한다. 그리고 진격하다 보면 후퇴하는 병사를 정치장교가 기관단총이나 기관총으로 총살한다.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 참전자들이 이와 같은 서방 매체를 접했을 때, 그들은 서방이 만들어낸 이미지에 매우 분노했고, “자신들은 그 정도로 열악하지 않았고, 굴라그에서 석방시켜 만든 형벌부대도 후퇴한다는 이유로 즉시 처분하는 일은 없었다라고 하며 이에 항의했다.

 

이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서방세계가 만들어낸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소련군의 이미지는 반공주의와 러시아에 대한 오리엔탈리즘 그리고 기독교주의가 결합된 편견 그 자체다. 미군에서 복무하며 소련군에 대해 연구해온 군사학자 데이비드 글랜츠는 이와 같은 서방의 역사 왜곡에 항상 반대했고, 비판해왔다. 이번에 필자가 매우 흥미롭게 읽은 책인 8월의 폭풍<August Storm>은 서방의 학자들과 매체가 만들어낸 신화적 허구를 소련 측 문서를 기반으로 하여 이를 반박한다. 데이비드 글랜츠의 독소전쟁사를 읽어본 독자라면 아는 사실이겠지만, 1941년부터 1942년까지의 소련군은 절망과 후퇴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1943년 대규모 전차전인 쿠르스크 전투의 승리를 기점으로 소련군은 군의 개편과 전략 전술의 개편 전차를 중심으로 한 제병협동 전술의 발전을 이루어냈고, 그 이후의 전투와 작전에서 체계적인 전략 전술을 통하여 독일군 종심 방어선을 돌파함으로써 붕괴시켰다. 19454월부터 있던 베를린 공방전(Battle of Berlin 1945)에서 50만 명의 붉은 군대가 76만 명의 독일군을 손쉽게 격파했던 역사적 사실에서 우리는 소련군 또한 굉장히 체계적인 전략 전술을 구사하는 훌륭한 군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4558일 나치독일이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한 이후 소련군은 또 다른 전쟁을 준비했다. 그 전쟁은 추축국 중에 마지막까지 저항하고 있던 일본을 상대하는 것이었다.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부터 태평양 전역에서 일본과의 전투를 치러오던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소련의 스탈린에게 대일전의 참전을 여러 차례 요구했었다. 마치 스탈린이 루스벨트와 처칠에게 제2 전선을 형성할 것을 요구했듯이 말이다. 그러나 1945년 오키나와 전투(Battle of Okinawa)를 치르던 미군은 예상보다 많은 미군 전사자가 속출한 것에 당황했고, 소련군의 참전도 두려워하게 됐는데, “소련이 조기에 참전하면 태평양에서의 미국 패권에 큰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는걱정 때문이었다.

 

1939년 노몬한 전투에서 게오르기 주코프(Georgy Zhukov)가 이끄는 소련군은 일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적이 있었다. 그 바람에 일본은 극동지역을 팽창하는 것에서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지대로의 영토 팽창으로 나가게 되었고, 일본은 19414월 소련과 일소 중립조약을 체결했으며 그 이후에는 만주에서 방어선을 만들었다. 하지만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이 보다 격해지면서 일본의 대본영은 만주에 있던 상당수의 관동군을 중국 지역과 동남아시아 그리고 태평양 지역으로 배치하게 되었는데, 이는 만주지역에서 전략상의 공백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만주지역 관동군은 1945년 소련군의 공격이 있기까지 대략 70만 대군을 갖춘 대규모의 군대였고, 명실상부 만주지역의 주력부대였다.

 

히틀러의 제3제국을 멸망시킨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은 19456월부터 유럽에 있던 소련군을 시베리아 열차를 통해 극동에 배치했다.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Aleksandr Vasilevsky)가 후에 있을 만주 진공 작전을 지휘하게 되었다. 소련군은 크게 3군데에서 만주 전역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따라서 배치되는 군대도 크게 3개로 나뉘는데, 첫 번째는 소만 국경지대와 몽골 만주 국경지대에 배치된 자바이칼전선군이었고, 그다음은 연해주 지역과 블라디보스토크 쪽에 배치된 제1극동전선군이었으며, 마지막은 만주 샤오싱안링 산맥을 향해 공격하게 될 제2극동전선군이었다. 소련이 계획한 이 작전에는 150만 이상의 병력과 5500대 이상의 전차와 자주포, 27000문 이상의 야포와 박격포 및 3700대 이상의 항공기가 동원되었다.

 

194589일 소련군이 만주전역에서 공격을 가하자 일본군은 소련군의 예상과는 달리 손쉽게 전선이 무너지고, 방어선이 붕괴되었다. 크게 3군데에서 진격한 소련군은 사막 지역과 늪지대 그리고 산맥을 손쉽게 돌파하며, 거침없는 진격을 계속했다. 그들 중 일부는 만리장성까지 가기도 했고, 치스차코프 휘하의 소련군은 대략 35년간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반도로 진군했다. 그리고 제2극동전선군 중 일부는 1905년 러일전쟁 때 일본에게 빼앗겼던 사할린 이남에 입성했다. 일본 천황이 항복선언을 하기 3일 전 대본영은 일본군에게 저항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지만, 만주의 일부 일본군 부대는 815일 일본 천황의 항복 방송 이후에도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822일까지 소련군의 진격에 저항했던 후터우 요새의 일본군들이 그러했다.

 

일본군의 저항은 8월 말까지 계속되었지만, 소련군의 진격작전은 1주일만인 816일에 끝났다. 즉 단 1주일 만에 소련군은 만주전역으로 진군했고,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를 쟁취했다. 굉장히 신속한 승리였고, 소련군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마지막 테스트를 멋지게 성공시켰다. 저자 데이비드 글랜츠는 만주 진공 작전 당시 소련군의 승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리고 있다.

 

만주 전역의 소련군 지휘관들은 모든 방면, 모든 단위부대에 걸쳐 큰 위험을 감수하며 대담한 작전을 실시하고, 자유롭게 계획을 수행했다. 소련군이 작전 초기에 실증했던 엄청난 유연성은 작전 전구의 특정한 요구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소련군 지휘관들의 전반적 지휘력 상승과도 연관되어 있다. 전쟁은 새루운 세대의 야전군, 군단, 사단, 여단, 연대 지휘관을 잉태했으며, 그들의 전문성은 최대 4년에 걸친 전투의 산물이었다. 이 세대의 지휘관들은 만주 전역이 기나긴 전쟁의 마지막 단계임을 깨달았고, 따라서 전역을 단기간 내에, 성공적으로 종결지으려 했다. 평화를 되찾으려는 의지는 전쟁에서 마지막으로 격렬하게 싸울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소련군은 외과수술처럼 정밀하게 전투를 수행했고, 11일에 걸친 싸움 끝에 치열한 전쟁을 종결지었다.”

 

출처: 8월의 폭풍 p.147

 

이처럼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소련군은 체계적인 전략 전술을 바탕으로 상대방을 궤멸시키는 군대였고, 특히나 만주 지역에서 이를 아주 훌륭히 해냈다. 따라서 서방측이 만들어낸 소련군에 대한 이미지는 사실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소련군이 멋지게 성공시킨 만주 지역에서의 진격작전은 왜 서방세계에서 잊혀진 것일까? 그 이유는 같은 시기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는 핵무기 경쟁시대를 알리는 냉전의 신호탄이자 일본의 항복과 바로 연결되다 보니 소련의 만주 공세는 잊혀지기 십상이었다. 거기다 냉전시기 소련과 경쟁했던 미국이 이를 홍보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따라서 그동안 잊혀졌던 소련군의 만주 공세를 재조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책 저자인 데이비드 글랜츠에 대해 소개하자면 그는 1942년에 태어나 1963년 미군 포병 장교로 입대했고,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베테랑이었다. 그는 서방 군대의 상징 NATO에서 정보장교로 근무했었고, 웨스트포인트 미 육군 지휘참모대학 등에서 소련군과 소련 군사사에 대해 연구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소련군에 대한 서방의 편향된 시각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며, 이를 입증하기 위해 소련군과 소련 군사사를 소련의 입장에서 연구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작품 중 하나가 ‘8월의 폭풍이다. 사실 이 책은 1980년대 데이비드 글랜츠가 쓴 논문이기도 하다. 그가 이 논문을 완성하던 시기가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이 반공주의를 강화하던 시기였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그의 행동은 참으로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소련의 만주 진공 작전은 우리 역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다. 이 책에서도 언급되는 내용이지만, 1극동전선군에 있던 치스차코프 휘하의 제25군은 작전 당시 한반도 이북을 해방했던 군대이기 때문이다. 당시 한반도에 입성한 소련군은 한반도 이북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치렀고,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하지만 우리 역사에서 이런 중요한 사실을 깊이 가르쳐오지 않았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이 이를 막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이런 역사를 알아야 하고, 공정한 평가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그 말을 좀 더 일반화하자면, 기존에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이 강요해오던 일방적인 반공주의적 시각과 관점에서 벗어나 역사를 좀 더 폭넓게 보고, 공정하게 평가를 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런 공정한 역사적 평가를 해야 할 한국 근현대사 사건 중 하나는 소련의 만주 진공 작전도 포함된다. 필자는 소련군 만주 진공 작전 일인 89일에 맞춰 이 책을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반공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이런 훌륭한 연구 서적을 집필해준 저자 데이비드 글랜츠 교수님과 이 책을 번역하느라 고생해주신 유승현 역자님 그리고 이 책의 출판을 위해 많은 도움을 주신 대한민국의 주은식 장군에게 깊은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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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현 2019-09-03 15: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늦게 서평을 확인해서 죄송합니다. 서평 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ㅠㅠ

NamGiKim 2019-09-03 15:08   좋아요 0 | URL
괜찮습니다.^-^
 
진실이 밝혀지다 - 쏘련 역사에 대한 거짓말, 제3판 노동자 교양문고 3
마리오 소사 지음, 노사과연 편집부 옮김 / 노사과연(노동사회과학연구소)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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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운동권 단체인 노동사회과학연구소(노사과연)에서 번역한 마리오 소사(Mario Sausa)의 책인 진실이 밝혀지다를 읽었다. 국내에 출판된 소련이나 사회주의에 대한 서적은 대체로 소련이나 스탈린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들이 대다수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권 국가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소련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는 필자로선 이 책의 부제목이 끌려 읽고 싶었었고 이번 기회에 읽게 되었다.

 

책의 내용은 목차에 나와 있는 것과 같이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1편은 수용소 군도의 저자인 솔제니친이나 로버트 콘퀘스트같이 반공주의적 입장에서 소련에 대해 비판해온 사람들의 주장을 반박한 것이다. 대략 600만 명이 스탈린에 의해 의도적으로 굶어 죽은 것으로 알려진 홀로도모르(Holodomor)에 대한 반박과 대략 1200만 명이 수용되었다고 알려진 소련의 굴라그(Gulag) 수감자 수치에 대한 반박이 주를 이룬다. 2편은 스탈린 대숙청기 희생당한 사람들과 그 수치에 대한 반박이 담겼다. 이 책의 마지막인 3편은 영국 보수주의자이자 군사 전문가인 앤토니 비버(Antony Beevor)가 쓴 <스탈린그라드:Stalingrad>에 대한 비평이다.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2편의 경우는 필자의 주관과는 분명 다른 점들이 많았던 것 같다. 즉 책에서 내린 결론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책에서 얘기하듯이 대숙청기 희생당한 사람들의 수치과 서방에 의해 과장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 생각한다. 3편에서 다른 스탈린그라드 비평은 필자가 아직 그 책을 읽어보지 않아서 그 내용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앤토니 비버라는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를 감안했을 때, 서구식 반동주의를 경계해야 할 필요는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는 영국군인이자 보수주의자이기에 당연히 소련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아마 필자가 이 책에서 가장 많이 공감했던 파트와 가장 많이 호감을 표했던 파트는 제1편이었던 것 같다. 이 책에 따르면 홀로도모르는 절대로 이오시프 스탈린의 의도적인 학살이 아니었고, 소위 쿨락이라 불리는 부농들과의 계급투쟁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또한 다른 나라에 비해 열악한 소련의 농업 조건도 한몫했다. 거기다 1918년에서 1921년까지는 제국주의 세력에 맞서 내전을 치렀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서방 학자들이 출처로 사용하는 우크라이나 대기근 사상자 수치는 사실 1930년대 나치 독일의 선전선동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즉 나치 독일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악마화의 일환으로 우크라이나에서 최소 600만 명이 아사했다는 주장을 하곤 했는데, 반공성향이 강했던 영미권 언론에서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 마치 1990년대 북조선이 고난의 행군을 겪으며 대다수의 아사자가 생겼을 때 미제와 서방 언론들이 300만 명이 아사했다는 날조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듯이 말이다. 따라서 이런 맥락에서 판단했을 때, 우크라이나 대기근의 아사자 수치는 과장됐고, 의도적인 학살이 아니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또한 소련의 까다로운 농업 조건도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1편에서 지적한 소련의 굴라그 수감자 수치도 마찬가지다. 솔제니친과 로버트 콘퀘스트를 비롯한 반공주의자들은 굴라그 수감자가 대략 900만에서 1200만 명 혹은 많게는 2000만 명이나 된다는 주장을 하곤 한다. 하지만 진실은 달랐다. 스탈린시기 가장 많은 수감자 숫자는 최대 250만 명이었다. 이는 순수히 굴라그 사용자만 포함된 것이 아닌, 감옥 및 교도소 그 외의 잡범들이 수용된 수치를 얘기한 것이다. 쉽게 말해 소련 인민의 30%가 굴라그에 수용됐다느니 하는 것은 명백한 과장이고 날조라는 것이다. 굴라그를 언급하며 1990년대 미국의 교도소 및 감옥 수감자의 수치를 보여준다. 책에서 제시한 FLT-AP 통신의 단신 기사에 따르면 1996년에 미국에서 감옥에 갇혀있는 수감자 550만 명이나 되는데, 이는 소련에서의 최대 굴라그 및 감옥 수감자 숫자보다도 300만 명이나 더 많은 수치였다. 책에선 언급 안 했지만, 필자는 스탈린 시기 굴라그에 대해 비판하는 미국의 반공주의자들에게 묻고 싶다. 미국 남북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남부 흑인의 대부분을 노예로 삼았고, 이후에도 KKK같은 인종 혐오 단체들이 미국을 돌아다니며 유색인종에게 무차별 테러를 일삼으며 산사람을 산채로 태워 그 유골을 기념품으로 갖는 린치 따위 행위를 20세기까지 남부에서 하도록 방조한 미국 정부가 과연 굴라그에 대해 비판할 자격이 과연 있는지 말이다??

 

물론 필자는 굴라그에 수용된 사람들과 대숙청 시기 희생된 사람 중에는 분명 무고한 사람도 적잖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스탈린과 소련에 대한 서방의 악마화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이유는 전혀 없다. 책을 보면 스탈린 집권 시기 8시간 노동제를 1930년대 초중반까지 실행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스탈린은 인민대중의 복지를 챙겼다는 사실이다. 필자가 항상 지적해왔듯이 이는 박정희 정권과 차이가 나는 행보다. 당연히 굴라그에 수감된 사람들은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스탈린이 대다수 인민대중의 복지를 챙긴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는 1930년대 소련의 대학진학률과 극적인 문맹률 감소 그리고 노동자 연금 제도가 입증한다.

 

아무튼 흥미로운 독서를 할 수 있었다. 특히나 소련의 입장에서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뭔가 큰 의의가 있었던 것 같다. 소련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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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경

 

독소전쟁사에 있어서 1941년과 1942년까지는 독일군의 거침없는 진격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1941년 10월에서 1942년 1월까지 전개된 모스크바 공방전(Battle of Moscow)과 1942년 8월부터 1943년 2월까지 스탈린그라드 전투(Battle of Stalingrad)에서 소련군에게 패배했고,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하여 더 이상 소련 영토를 향해 진격하지 못하게 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한 독일군은 전황을 다시 한번 바꾸기 위해서 또 다른 공격 작전을 준비했는데, 그게 바로 쿠르스크에서의 대반격이었다.

 

2. 양측의 전투 준비

(쿠르스크 전투 당시 평원에 있는 전차들)

 

그리하여 독일군 총사령부는 1943년 4월부터 대대적으로 전투를 준비하며 작전명 ‘성채’를 계획하기 시작했고, 1943년 7월 독일군은 쿠르스크 지역의 북쪽과 서쪽 양 방향에서 중앙부대와 남쪽 부대를 중심으로 대략 43만이나 되는 군대를 집결시켰다. 독일군의 준비가 길어지면서 소련군은 보다 세련되고 정교한 방어 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역시 소련군 진지의 중핵은 대전차 방어에 있었고, 독일군과 대치하는 소련의 모든 전방 중대는 적어도 3문의 야포와 9문의 대전차포 및 1대의 전차 혹은 자주포가 할당되었으며, 방어 구역 내에 전투 공병 소대가 배속되었다.

 

소련군의 자료에 따르면 쿠르스크 전투 이전에 소련 중부 전선군과 보로네시 전선군에는 대략 100만 이상의 병력과 13000문 이상의 야포와 박격포 및 3200대 이상의 탱크와 자주포가 일선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에 비해 독일군은 43만 명의 병력과 9960문 이상의 야포와 박격포 그리고 탱크와 돌격포 3155문을 전선에 배치해 놓았다. 이 상황에서 소련은 추가적으로 44만 명의 병력과 6500문의 야포와 박격포 그리고 1500대의 전차와 자주포를 배치했고, 그 결과 소련군은 쿠르스크 전투에서 병력에서는 3 대 1, 주요 장비 면에서는 1.5 대 1의 우위를 점했다. 하지만 독일군에게는 앞으로 치르게 될 전차전에서 또 다른 우위를 점할 수 있었는데, 88밀리미터의 포를 장착한 신형 전차 포르셰 티거가 투입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3. 쿠르스크 전투의 전개

 

1943년 7월 초, 쿠르스크의 독일군과 소련군은 이미 대열을 정비하고 전투를 치를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독일군의 공격 시간은 최종적으로 1943년 7월 5일 아침으로 결정되었다. 소련군 지휘부는 이미 정찰 보고서를 통해 몇 시 몇 분에 공격할지까지 파악하고 있었고, 따라서 소련군은 독일군이 공격하는 시간보다 30분 앞서서 독일군의 모든 집결 예정지를 향해 선제 포격을 개시했다.

(쿠르스크 전투에 투입되었던 티거 전차. 당시 티거 전차는 소련군의 주력 전차인 T-34를 혼자서 10대를 격파하는 일도 있었다.)

 

선제 포격으로 독일군의 공격을 잠시나마 지연시키긴 했지만, 7월 6일 저녁이 되자 독일군이 북쪽과 남쪽 양 방향에서 소련군의 제1 방어선을 돌파했다. 하지만 5일 뒤인 7월 12일 소련군 병력은 독일군의 진격을 막아냈다. 쿠르스크 전투가 진행되던 1943년 7월 10일 영미 연합국이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섬에 상륙하면서 독일군에겐 또 다른 부담이 생겼고, 소련도 7월 13일 쯤에는 영미 연합군의 시칠리아 상륙 소식을 전해 들었다. 또한 히틀러는 폰 만슈타인에게 ‘성채 작전’을 중지시켰고, 제2 SS 기갑 군단을 전선에서 이탈시켜 시칠리아에 상륙한 영미 연합군을 상대하기 위해 이탈리아에 보냈다.

(보병과 함께 진격하는 소련의 T-34 전차)

 

1943년 7월 12일 소련군은 세심하게 준비해 왔던 전략적인 공세를 개시했다. <쿠투조프>라는 작전명으로, 우선 쿠르스크 돌출부 바로 북쪽에 해당하는 오룔 돌출부에 대한 반격이 시작되었고, 서부 전선군과 브랸스크 전선군, 최종적으로 중부 전선군까지 동원된 이 공세로 인해 독일군은 균형을 잃고 말았다. 이에 따라 독일군은 7월 14일부터는 실질적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7월 12일에 공세를 게시한 소련군은 결국 오룔에 들어갔고, 오룔에 들어간 제3 근위 전차군은 8월 5일에, 브랸스크 전선군은 8월 5일까지 자신들의 이름에 해당하는 도시로 접근해서 독일군 방어 병력을 일소했다.

(포화속에서 진격해나가는 소련군)

 

돈바스 지역을 목표로 진군하는 소련군에 위협을 느낀 독일군은 오룔에서의 남쪽으로 이동하여 돈바스 지역의 북쪽으로 이동했다. 독일군은 소련군을 꺾기 위해 반격을 시도했지만, 쿠르스크 전투에서의 소련군은 예전의 소련군이 아니었다. 투입된 독일군이 8월 6~7일 사이에 한 것은 소련 제40군이 가한 주공 방향 서쪽의 제2차 공격을 저지한 것 정도였다. 1943년 8월 11일에는 소련군 전차 군단이 독일 SS 기갑 사단과 보고두호프 일대에서 격돌했다. 여기서 대규모의 전차전이 벌어진 것이다. 8월 13일에서 17일 사이에 독일군은 후퇴 작전을 위해 전투를 감행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결국 1943년 8월 23일 소련군이 하리코프 지역을 되찾으면서 쿠르스크 전투는 소련의 승리로 끝났다.

 

4. 결과 및 의의

 

쿠르스크 전투는 독일군이 처음으로 소련군의 돌파 부대를 격파하지 못했던 전투이자, 독일이 동부 전선에서 전략적인 주도권조차 가지지 못하게 되는 전투이다. 쿠르스크 전투는 소련군에게 있어서 그런 기회를 제공했고, 스탈린과 게오르기 주코프 로코솝스키 등의 지휘관들이 더 체계적으로 군사 전략을 만들 수 있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독일군의 마지막 반격을 막아냈다는 점에서 의의가 매우 큰 전투다.

(쿠르스크 전투를 묘사한 그림)

 

물론 소련이 이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치른 대가는 매우 컸다. 양측 합쳐서 대략 1만 대 이상의 탱크와 3만 대 이상의 대포 그리고 5~6천 대 이상의 항공기가 총동원되었던 쿠르스크 전투에서 소련군의 탱크 손실은 독일군의 5~6배를 능가했었다. 독일군의 탱크 손실이 1000대 이상이었던 데에 비해 소련군은 7000대 이상이나 되는 탱크를 전투에서 잃었다. 그 이유는 포르셰 티거(혹은 6호 전차)와 같은 독일의 신형 전차가 투입되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독일군의 티거는 혼자서 소련군의 주력전차인 T-34를 10대 이상 격파할 정도로 강력했다.

 

그러나 소련군이 이루어 낸 ‘피로스의 승리’는 절대 헛된 승리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위에 상술했듯이 쿠르스크 전투 이후 독일은 동부전선에서 전략적인 주도권을 상실했고, 더 이상의 대규모 공격 계획을 소련군을 상대로 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중앙 러시아의 광대한 지역이 소련군의 수중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즉 쿠르스크 전투가 있었기에 소련군은 1944년 레닌그라드 포위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고, 1944년 6월에서 8월에는 바그라티온 작전을 감행하여 동부 전선 전역에서 독일군을 무찌를 수 있었다. 따라서 쿠르스크 전투는 독소전쟁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전투고, 스탈린과 게오르기 주코프 로코솝스키 그리고 수많은 소련의 병사와 인민들이 쟁취한 위대한 승리였다.

 

5. 참고 문헌


독소전쟁사, 데비이드 글랜츠 저, 권도승 역, 2007

러시아사, 맥세계사편찬위원회 저, 느낌이있는책,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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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 독재자의 새로운 얼굴
올레그 V. 흘레브뉴크 지음, 유나영 옮김, 류한수 감수 / 삼인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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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에 대한 평가는 대한민국의 박정희 처럼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극명하게 갈린다. 스탈린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는 1920,30년대 공업화 시절의 경제개발과 2차대전에서의 승리 기여 대한 호평과 1930년대 그가 단행한 대숙청과 공업화 도중 생긴 우크라이나 대기근 혹은 홀로도모르에 대한 혹평으로 나눌 수 있다.

1928년 그가 당내투쟁에서 승리한 이후 거창하게 단행한 경제개발 5개년은 눈부신 성장 및 소련이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발걸음이 되었다. 물론 그와중에 무자비하게 실행한 강제집단 농장으로 인하여 홀로도모르라고 불리는 대기근이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했고, 전국적으로 최소 300만 이상이나 되는 아사자가 속출했으며, 1934년 세르게이 키로프 암살을 시작으로 전개된 대숙청으로 인하여 1936년 부터 1938년(혹은 1939년)까지 대략 75만명이 3년 동안 처형당했다. 또한 연해주에 살고 있던 수십만명의 고려인들이 카자흐스탄과 같은 중앙아시아지역으로 강제 이주 당했다.

오직 대숙청과 홀로도모르 그리고 개인 독재만 가지고 스탈린은 평가하면 그는 히틀러 못지 않은 독재자이자 폭군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스탈린 집권 시기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시기 소련이 미국과 견줄 수 있는 강대국의 위치로 올랐고 1938년 시점에는 경제 규모로만 보면 2위까지 성장했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는 그 이전의 러시아 현대사를 안다면 실로 경이로운 성장이라 할 수 있다.

1920년 제국주의자들의 침략과 백군 반혁명 세력이 일으킨 적백내전을 겪은 사회주의 러시아는 매우 심각한 경제난에 시달렸었다. 그 시기 러시아에선 전국적으로 수백만명의 아사자가 속출할 정도였다. 즉 그러했던 소련이 스탈린의 집권기를 거치면서 엄청난 경제성장을 한 것이다. 거기다 미국, 영국을 비롯한 서구국가들이 경제 대공황을 겪으며 휘청거릴 시기였음에도 스탈린의 소련은 매년 10%가 넘는 경이적인 경제성장률을 기록했고, 대략 90%를 넘던 문맹률은 1%까지 줄어들었으며, 중공업 위주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소련 사람들이 혜택을 받기도 했다. 스탈린은 일반 노동자들에게 주거와 의료, 교육을 보장해주었다. 그 당시 스탈린이 만든소련의 복지제도가 매우 훌륭했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는 1970년대 자본가와 대기업 위주로 성장을 주도하며, 일반 노동자들에게 기본적인 복지마져 제공치 않던 박정희하고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다. 예를 들어 소련에는 여성 노동자들에게 월경휴가가 제공되었지만, 박정희 정권 시기 노동자들에겐 아니었다. 따라서 스탈린 소련의 복지 정책은 매우 훌륭했다고 할 수 있다.

1930년대 소련은 엄청난 강대국이 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엄청난 인권탄압과 억압 그리고 착취가 있었던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위에서 상술한 대숙청 시기 있었던 무자비한 숙청이나, 정적탄압은 보편적인 도덕적 가치관을 가지고 보았을때 당연히 비판받아야 하고 할 수 있지만, 그것과 더불어 시대적인 상황도 감안하고 봐야할 필요도 있다. 스탈린이 경제개발 5개년을 실행하던 1931년 일본은 만주 사변을 일으켰고 1933년 독일에서는 아돌프 히틀러가 등장했다. 1938년에는 노몬한과 하산호에서 일본군과의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고 히틀러는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면서 유럽 정복에 대한 야욕을 들어냈다. 이처럼 소련의 안보는 위태로웠다고 볼 수 있다. 즉 그런 상황에선 그의 공업화 정책은 불가피 했던 측면이 있고, 그 공업화 정책은 히틀러 파시스트의 침략을 무찌르는데 이바지 했다. 여기서 우크라이나 대기근에 대해 얘기하자면, 이오시프 스탈린의 의도적인 학살은 아니었다. 쉽게 말해 일부러 죽인 것이 아니다. 1950년대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과 하등 다를게 없다. 우크라이나 대기근 혹은 홀로도모르는 농업 조건이 매우 열악한 소련 상황에서 일어났고, 서방 제국주의자들의 고립속에서 소위 쿨락이라 불리는 부농세력들을 탄압하면서 일어났다. 기본적으로 농업 생산력이 매우 열악한 소련이 공업화를 추진하여 생존하려고 하다보니 일어났던 것이다. 우리가 경신 대기근을 가지고 효종을 대학살자로 몰 수는 없듯이 이오시프 스탈린에게만 책임을 묻는 것은 바람직한 평가라 할 순 없다.

필자는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해 평가할때 업적과 과오를 보려고 하는 쪽이다. 필자 또한 과거에는 이오시프 스탈린을 매우 싫어했지만, 최근들어 다시 공부하면서 나름 긍정적으로 평가하게 되었다. 그런 차원에서 읽은 전기가 올레그 흘레브뉴크가 집필한 ‘스탈린: 독재자의 새로운 얼굴‘이다. 책은 제작년 12월에 읽었다. 우선 책에 대해 얘기하자면 냉전이후 공개된 동구권 기밀자료들을 많이 참고했고 주로 새로 나온 자료들을 참고하려 노력했다는 점은 나름 높게 평가할 만 하다. 그러나 저자는 현재 러시아 사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스탈린과 그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평가에 대해 비판적으로만 보려했다. 따라서 저자는 스탈린 신화를 비판하기에만 급급했고, 이오시프 스탈린의 최대 업적이라 할 수 있는 공업화와 2차대전 승리 기여에 대한 최소한의 긍정적인 평가를 단 1% 조차 하지 않았다. 차라리 영국의 반공적인 보수학자 로버트 서비스가 집필한 스탈린 강철 권력이 스탈린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 처럼 보일 정도로 이 책은 스탈린에 대해 비판적이다. 이런 점은 이 책을 읽을때 매우 주의해서 읽어야할 부분이다. 예를 들면 반공학자인 서비스도 그의 공업화가 소련 생존에 필요했고, 나름의 업적이라 인정하는 것과는 달리 이 평전은 그마저도 없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주의깊게 읽은 부분은 1930년대 소련이 2차대전으로 가는 상황과 독소전쟁 (특히 독소전쟁에서 모스크바 공방전 과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 바그라티온 작전 그리고 베를린 전투까지)파트였다. 물론 이 책에선 2차대전 당시 스탈린의 행적을 비판하는 쪽에 초점이 맞춰졌기에, 그의 공로를 인정하는 필자로선 읽기 불편했던 점이 적지 않다. 분명한 것은 스탈린에겐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공로가 확실히 있다.

이 책은 과거 소련시기 만들어진 스탈린의 신화와 그의 행적을 비판하는 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렇기에 어느정도 주의해서 읽을필요가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동지들 중엔 필자의 의견과 맞지 않는 동지들도 분명 적잖게 있을 것이다. 스탈린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든 비판하든 간에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자라면 필자는 얼마든지 환영한다. 하지만 필자는 그의 최대 업적인 공업화와 반파시즘 전쟁 승리기여를 무조건 부정만 하고 보는 사람들의 주장(특히 2차대전 공로를 부정하려는 자)에 1도 동의 할 수 없으며, 이를 뼈속부터 친일 앞잡이이자 천하의 간신배인 박정희 따위하고 동일선상에 놓고 평가하려는 입장 또한 동의할 수 없다.

따라서 필자는 이 책을 당연히 부정적으로 읽을 수 밖에 없고, 다른 책을 추천해줄 수 밖에 없다. 지금까지 국내에 출판된 스탈린 전기로는 추천해줄 것이 없다. 따라서 필자가 적극 추천해주고 싶은 책은 데이비드 글랜츠의 독소전쟁사다. 글랜츠의 독소전쟁사는 2차대전 당시 스탈린과 주코프 같은 명장들 그리고 소련의 공로가 얼마나 많은 지 알 수 있고, 소련군이 히틀러 파쇼무리들의 침략에 맞서 어떻게 영웅적으로 투쟁했는지 알 수 있는 명저다. 물론 글랜츠 또한 미국인이기에 아주 약간은 서방식 논리가 책에서 보이긴 하지만, 소련군의 공로를 재조명 했다는 점에서 분명한 명저다. 스탈린을 알고 싶으면 먼저 독소전쟁사를 읽은 다음에 로버트 서비스의 스탈린 전기를 읽고 그 다음으로 이 책을 읽기를 추천한다. 앞으로는 스탈린에 대해 좀 더 균형 있는 책이 출판되길 기대하며 다시쓰는 서평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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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네im 2019-07-10 01: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놈아 이를 뼈속부터 친일 앞잡이이자 천하의 간신배인<<< 일제시절 일본군지원??
나라를 빼앗긴 원인 군사력의부재를 몸으로 익혀 민족의자산이 되었으면 되었지
훗날 여기서 배운 군사학으로 북한군동향 확인해 남침한다는 보고서 작성을
주도한 애국자였어

재임시절로 따지면 더더욱 일본이 싫어하는 결과를 만들었어
65년에 일본에 받은 5개국(월남.인도네시아.미얀마.필리핀.한국)중에서
가장 최고로 잘 썼다는 평가를 받으며(대외경제연구원 연구결과)
선진 일본기업들의 기술-자본을 들어오는데
일본인 기술자들 초빙해 지도를하고 수출공업화에 촉진하게해
오늘날 포스코-삼성 등이 50년전에 전수해준 일본기업들 추월한 극일을 이룩한
초일류 애국자였어

국가경영능력과 리더쉽의 결과가 낳았으며 너놈이 3만달러시대에 키보드질하는것이야

오히려 되도않는 위안부타령해 도가지나친 반일을 고취시켜 경제제재나 받으며
적국인 북-중과 맞서야하는 구도인데 지나친 반일로 미국은 미일안보조약 없애고
자국의 부담을 덜수있을정도로 중국에 맞서는 군사강국으로 리미터해제를 하게 만들었어
오버지면은 핵무장까지 허용 할 수 잇어
이건 중국탓이 근본적이지만 문재앙이가 부채질한거야
폐허에서 40년만에 미국과 동등한 선진국에 진입하게 한
김성주와 함께 최악의 뼛속까지 친일간신배 아니던가

세계대전에서 이길수있는 기반을마련한 공업화긍정을 넘어가도
국가전복가담자에 타살당한 22세 고액연봉자 어쩌고 지랄터더니
최소한 수백만명 아사하고 수많은 농촌인들을 제정러시아를 오래도록
좀 먹은 농노제를 부활해 무수한이들 빈곤으로 몰고간 새키를
자칭 사회주의자로서 더욱 높이 평가하는것은 앞뒤가 안맞는 모순아닌감

국내 토착좌빨들의 끊임없는 국가전복시도검거 간첩검거에
적장이 파견한 자객에 부인을 잃고 남북간 총격전이 매일 벌어지던 비상전시상황에서도 국회의원선거가 지속되어 야당이 40%이상 차지해 뚜렷한 정치세력으로 존재한 개발도상국으로선 의회민주주의가 어느정도 지켰어 72년 유신개헌때 그는 장제스나 중국처럼 완벽하게 국회를 장악하는 일당제를 하였는데도 국민의사를 존중하였다는 것이지

이런 악조건속에서 연평균 10%경제성장으로 물가반영된 실질소득이 4배증가해
사회가 완전한 뒤바뀐 기적적인 성과를 이룩 가히 이런조건에서 성공한 리더는 없었어

붉은까마귀 2021-08-13 2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탈린 시기 공업화의 부정적인 부분은 ‘처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이라는 책을 읽으시면 잘 알 수 있습니다
 

(Welfare system of Soviet Union)

1. 소련의 교육체계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소련에서는 공부를 하는 동안 학생들간의 경쟁이 없다. 왜냐면 자기 능력에 따라 자기가 되고 싶은 게 되니깐. 교육시스템은 10년간 무상이고, 대학교를 가더라도 대학 교육도 무상이고 대학 다니는 동안에 일종의 수당같은 것을 국가로부터 지급 받는데 한 달에 40루블씩 지원받는다. 이 금액이 얼마냐면 대학 기숙사 비용이 1년에 24루블이다. 24루블만 내면 모두 공짜로 이용할 수 있는데, 그만큼 많은 돈을 수당으로 지급받았다. 대학이나 직업학교를 졸업하게 되면 무조건 모두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 졸업 후 3년 동안은 같은 직장에서 일해야 하고 3년 지나면 자유롭게 원하는 직장으로 이동할 수 있다.

2. 소련의 노동과 복지

노동에 대해서 어떤 개념을 가지고 있었냐면 노동은 의무이자 권리였다. 누구나 일을 해야 하고 또 누릴 수 있는 권리이기도 했다. 연금 수급 연령은 여성 55세 남성 60세, 주5일 주40시간이었고. 모성보호도 있어서 임신 여성은 야간 노동이 안되고. 아파서 일을 못하게 되는 경우도 유급이었다. 광산노동 등 힘든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퇴직을 좀 더 일찍 할 수 있었다.

출산휴가도 보장되어 있는데 유급으로 18개월 보장돼 있다. 출산휴가 끝나면 당연히 원래 하던 일로 복귀가 가능했다. 임금도 노동자, 관리직, 기술직의 구별 없이 비슷하게 지급받았다. 야간, 휴일노동은 강제로 하는 경우가 없고, 하겠냐고 요청 받고 동의해야만 하고, 할 경우에는 정당한 댓가를 받게 된다. 야간은 50%, 휴일노동은 2배 임금을 받는 시스템이었다.

노동조합도 있었다. 근데 자본주의 사회의 노조랑 차이가 있는데. 노조의 기능이나 역할이 뭐였나고 하면, 현장에서 노동조건을 감시하거나 아니면 의료공제라는 걸 자체적으로 하거나 아이들을 모아서 여름캠프 보내거나 상조조합을 운영하거나 하는 형태였다.

가장 중요한 건 사회적 구분이 없었다는 점이다. 어떤 공장에 관리자나 청소노동자나 똑같이 존중 받고, 똑같은 구내식당을 이용하는 형태였다. 큰 회사의 경우 사택 같은 걸 지어서 모든 노동자들에게 주택을 제공하는데, 노동자들은 임금의 3~4%를 지불하고 모든 것들을 공짜로 이용했다. 중요한 건 회사에 일하는 동안 거주를 할 수 있는 곳이지 주택을 팔거나 타인에게 양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회사 안에는 스포츠시설도 있어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고 자체적으로 농장을 운영해서 구내식당 식재료로 공급했다.

일이 끝나면 노동자들이 다양한 활동을 하는 것이 가능한데 엔지니어가 관리자가 되고 싶다면 그룹을 지어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노동자들이 새로운 걸 발명하도록 장려 받았는데 카피라이트 시스템과 다르게 여러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새 기술을 발명하면 각 공장끼리 교류하고 공유하면서 더 발전해 가는 시스템이었다.

보건의료도 무상이었고 약도 국가보조금이 나와서 매우 쌌고, 약국뿐만 아니라 많은 부분에 대해서도 지급됐는데. 아이들 의복에 대한 보조, 대중교통에 대한 보조도 있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린아이 의복비가 어른들 만큼 나가는 거 보고 매우 놀랐다.

출처: http://www.redian.org/archive/58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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