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우크라 헤르손철수 평가>

논자마다 그 숫자는 조금씩 다르지만 약 3만 러군이 2-3일사이에 드네프르강 서안에서 동안으로 깜쪽같이 이동했다. 장비도 다들고 말이다. 알려지기로 고철이 된 헬기 한 대와 파괴된 T90전차 한 대만 남겼다 한다. 실로 감탄을 금치 못하겠다. 철군하면서 강의 동서를 연결하던 교량 2개도 마치 가위로 오려 내듯 파괴해 마지막 마무리도 왼벽했다.

작전상 철수와 패전후 후퇴는 추격이 있는 지 여부가 결정적 차이가 아닐 까 싶다. 왜냐하면 대개 전투에서 최대의 병력 손실은 등을 보인 적에 대한 추격전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추격은 없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군사적 관점이다. 예상했던 그대로 우크와 미는 대대적인 선전전을 개시했다. 이를 역사적 승리라고 했다. 아마 제2의 부차 연출도 예상된다. 프로파만 가지고 전쟁이 결정된다면 나는 우크가 이긴다고 본다. 우크의 네오나치는 아주 숙련된 프로파 기술자들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헤르손이 어딘지도 모르는 한국언론도 따라 붙는다. 그렇다. 이게 한국언론의 사명이다.

종합적인 평가는 여전히 다른 문제다. 전쟁에서 정치적 관점과 군사적 괸점은 무엇이 우선되는가? 참으로 난제 중 난제다. 이번 헤르손철수는 정치적 부담에도 불구 군사적 합리성을 선택한 것이다. 푸틴도 당연히 동의했다.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이다. 이번 철수의 정치적 부담이 이번 전쟁의 정치적 목표달성에 그 어떤 치명적인 장애가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동의했을 거로 본다.

전쟁은 자신의 문법Grammar은 가져도,자신의 논리Logik를 갖는 것은 아니다. 클라우제비츠의 유명한 말이다. 그렇다. 이번 철수는 전쟁의 ˝문법˝에 충실한 결정이었다. 그렇다면 그 ˝논리˝는? 그 논리는 전쟁의 목표에서 나온다. 우크라 중립, 돈바스, 무장해제, 나치제거... 동남4주의 러연방가입으로 돈바스문제의 정치적 해결은 가닥은 잡았지만 아직 군사적으론 아니다. 나머지도 여전히 아니다. 갈 길이 한참 멀다. 평화는 아직 요원하다.

미국군사평론가 빅서지big serge의 평가인데 읽어 볼 만하다. 헤르손철수에 대한 네개 가설을 따져 본다. 1.러 패배설 2.러의 함정설 3.미러 밀약설 4.러 작전상 선택설 이 네가지다.

출처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pfbid0KBugo6e9ARqgSNpN2LLZgACzAo8JPSR6ewWhNyeeqpH1WBT7TVnwUnTECdTFJDuyl&id=100080442895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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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하다! 정말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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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3-07-16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B와 그 패거리들은 천안함 사건 이후 대북제재를 강화하여 남북교류를 파탄냈고,
윤석렬과 그 패거리들은 북한에 대해 ‘선제타격‘, ‘원점타격‘ 등의 거친 막말을 내뱉으며 한반도를 전쟁위기로 몰고 가고(게다가 이번에는 ‘화력격멸훈련‘을 강행하여 포천 지역민들을 전쟁공포에 떨게 했습니다!),
박그네는 개성공단을 폐쇄하여 남북 경제교류를 끊어버렸고,
황공안은 사드를 배치하여 동북아시아를 전쟁기지로 만들었다.

한반도의 평화통일은 커녕 남북관계파탄과 전쟁을 좋아하는 전쟁광 MB, 윤석렬, 박그네, 황공안 등 탐욕스런 뉴라이트 수구세력들과 그들의 물적토대 국짐, 조선일보 등이 있는 한 한반도에 평화도 통일도 없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끝난 지 이제 대략 1년이 흘렀다. 20019.11 테러에 대한 분풀이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미국은 20년간 이 나라에서 전쟁을 전개했고, 궁극적으로 패전했다. 전쟁 말기 이른바 2,000페이지에 달하는 아프가니스탄 페이퍼가 세상에 공개되면서, 미국 지도부가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전쟁을 진행했다는 것이 폭로됐다. 1971년 대니얼 엘스버그가 폭로한 펜타곤 페이퍼처럼, 아프가니스탄 전쟁도 베트남 전쟁처럼 미국의 거짓과 기만 그리고 위선 속에서 시작된 침략전쟁이었던 것이다.

 

미국의 항구자유작전(Operation Enduring Freedom) 이후 몇 개월 동안 사망한 아프가니스탄 민간인 숫자는 2만 명을 돌파했고,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막대한 자금과 병력을 투입했다. 2010년에는 최소 500명 이상의 미군이 전사했고,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병력을 10만 명을 돌파했다. 미군은 이른바 최신식 무기인 드론(Drone)을 이용하여,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일대를 폭격했으며, 그로 인해 수많은 민간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아프가니스탄 민간인 사망자 추정치는 5만 명에서 많게는 10만 명 정도인데, 이러한 숫자를 합쳐 도합 24만 명의 아프가니스탄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수치가 정확한 추산은 절대 아니다. 지난 2021SBS에서 인터뷰한 탈레반 대변인 수하힐 샤힌은 아프가니스탄 국민 수십만 명이 미점령군에게 살해당했고, 미군 폭격기와 드론 공습에 맞아 죽은 비극적인 사연이 아주 많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미국의 현 대통령인 조 바이든은 전쟁이 끝날 무렵 2001년부터 20년 동안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최소 1조 달러(한화 1,170조 원) 정도에 달하는 비용을 썼다고 말했다. 반면 미국 국방부에서 2020년에 발간한 전쟁 비용 보고서에는 8,147억 달러(한화 995조 원)을 사용했다고 나오며, 여기에는 각종 무기와 파병 부대 운영비, 작전 비용 등이 포함되어 있다. 반면 미국 브라운대학교 전쟁비용프로젝트 통계에 따르면 대략 20년간 미국은 전쟁비용으로 총 22,610억 달러(한화 2,653조 원)을 사용했다고 나온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미국이 사용한 전쟁 비용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이 사용한 전쟁비용을 상회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사용한 전쟁 비용은 6,700억 달러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미국이 사용한 전쟁 비용을 상회하는 사례는 제2차 세계대전 뿐이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를 침략하여 천문학적인 전쟁비용을 사용했음에도 전쟁에서 패배했다. 미군은 2,500명이 전사하고 2만 명이 부상당했다.

 

미국이 이러한 전쟁비용을 들어가면서 아프가니스탄에 세운 정부는 말 그대로 썩어빠진 정부였다. 미국 정부가 임명한 아프가니스탄 친미 대통령인 하미드 카르자이는 아프가니스탄을 세계 최대의 아편 공급 국가로 만들어 놓은 잔인하고 부패한 군벌 들 및 부패한 관료들과 손잡고 통치했다. 당연히 민주주의 같은 이상은 전혀 없었으며, 여성들은 여전히 탈레반 치하 못지 않게 탄압 받았다. 2004년 기준으로 아프가니스탄은 세계 아편 수요의 87%를 공급했으며, 2009년 당시 아프가니스탄의 세계 부패지수는 2위를 기록했다. 따라서 탈레반이 적잖은 아프간인들의 지지를 받은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 탈레반의 억압성은 친미정부의 부정부패와 폭력으로 인해 옛날 일이 되고 만 것이다.

 

2009년 기준으로 아프가니스탄은 세계 5위의 최빈국이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인 1인단 GDP426달러였으며, 빈부격차는 극심했고, 전체 인구의 68%는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깨끗한 식수를 마실 수 있는 아프가니스탄인은 전체 인구의 23%였다. 평균 수명은 43세였으며, 인구의 76%가 문맹이었다. 특히 여성의 문맹률은 86%였고, 전쟁 10년째 되던 2011년 학교에 다니는 아프가니스탄 소녀는 전체 비율의 30%도 안됐다. 즉 미국은 이처럼 열악하기 그지없는 상황에서 연간 최소 1,000억 달러 이상의 군사비용을 지출했다. 이 중 아프가니스탄 지역 개발에는 20억 달러 밖에 사용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싱크탱크 미국진보센터는 소련도 아프간 재건에 미국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썼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친미정부 하의 아프가니스탄의 여성들은 여전히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미국 정부는 대다수 가난한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에게 교육할 기회를 전혀 부여하지 않았다. 친미정부 하에서도 유아사망률과 산모사망률은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2009년 기준으로 아프가니스탄은 여전히 남녀평등지수 최악의 국가 2위를 기록했다. 사실상 탈레반이 통치하는 것이나 친미정부가 들어선 것이나 여성들의 처지는 큰 차이가 없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은 미군의 군사작전 과정에서도 인권을 보장받지 못했다. 미군은 탈레반에 대한 소탕전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친미정부 군대와 함께 민간인들의 대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이 닥쳤으며, 이는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에서 민간인들에게 했던 짓과 일치했다. 또한 미군의 드론 공습으로 적잖은 민간인이 사망했으며, 드론이 투하한 폭탄은 비극적이게도 탈레반 소탕을 빙자하여 민간인을 노렸다. 뿐만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의 지방경찰들은 보호 대상인 시골 주민들을 강간하고 살해하기도 했으며, 국립경찰 또한 구금자들에게 조직적으로 고문했다는 정황이 유엔 아프가니스탄지원단에 의해 확인되기도 했었다. 아프가니스탄 친미 정부가 자국 국민에게 자행한 고문은 상상을 초월했으며, 당연히 인권유린이 무수히 많이 벌어졌다.

 

이러한 사실을 보더라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여성해방도 민주주의도 그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으며, 미국의 침략 명분은 말 그대로 거짓과 위선으로 점철되었을 뿐이다. 지난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탈레반이 승리하자, 국내 언론들은 자극적으로 여성인권을 갑자기 걱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탈레반의 문제점과는 별개로 아프가니스탄 친미 정부가 아주 썩어빠진 정부이며, 인권은 1도 존중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국내 언론은 전혀 주목하지 않았고, 그저 미국이 써주는 선전문구를 옮기기 급급했다. 현재 탈레반 정부는 분명 반동적인 정부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미국과 친미정부에게 어떻게든 좋은 명분을 주려는 이들의 모습은 그저 한심할 따름이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그 시작부터 잘못된 미제국주의의 침략전쟁이었으며, 미국의 탈레반 여성인권 운운은 한 마디로 핑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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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4-05-11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서는 언급이 잘 되어 있지는 않지만 미국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1979-1989) 시기 ‘소련에 의한 공산화를 막겠다‘는 명목으로 무자헤딘과 탈레반으로 대표되는 ‘이슬람 극단주의‘ 조직을 후원한 적도 있습니다. 반면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사회주의정부를 지지했죠.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 밖에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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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체 게바라 평전
시드 제이콥슨 외 지음, 이희수 옮김 / 토트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20세기 위대한 휴머니스트 체게바라

체게바라(Che Guevara)!

난 이 이름을 듣기만 해도 가슴이 뛴다. 예수와도 같은 얼굴을 한 이 인물은 정말 예수처럼 남을 위해 자신을 철저하게 희생한 혁명가였다. 미국의 포악한 독점자본이 착취와 유린을 일삼던 라틴아메리카에서 체는 억압받고 고통받는 민중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체는 한손에는 총과 다른 한손에는 의약품을 들고 혁명에 투신했으며, 그의 삶은 1967년 10월 볼리비아에서 마감됐다. 그의 마지막 혁명은 분명 실패였다. 혁명가를 두려워한 제국주의 앞잡이와 미국은 그를 총살했고, 시신은 묘비도 세우지 않은 채 비밀리에 매장됐다. 하지만 체는 전설이 됐고, 오늘날까지도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1968년 프랑스 파리와 독일의 베를린에서 68혁명이 일어났을 당시, 젊은이들은 체게바라와 호치민의 사진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호! 호! 호치민! 체! 체! 체게바라!˝를 외쳤던 젊은이들은 이들의 위업을 받들어 미제국주의의 폭력성을 규탄했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에서 파괴적인 살육전을 전개하고 있었고, 무고한 베트남 민간인들이 미군의 최신식 화력과 무기에 대량학살 당하고 있었다. 이런 제국주의의 폭력성에 반기를 들고 저항한 인물이 바로 베트남의 호치민과 쿠바의 체게바라였던 것이며, 실제로 서구의 젊은이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체게바라가 총을 들게 된 이유는 분명하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의대생 체는 라틴아메리카를 여행하던 도중 제국주의가 저지른 폭력과 억압을 두눈으로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연합과일회사를 비롯한 미국의 독점 기업들은 자국의 초과이윤을 위해 라틴아메리카 민중을 개처럼 취급했고, 미국에 협력한 부르주아 계급들은 민중을 착취하며 호의호식했다.

뜨거운 심장을 가진 체는 바로 그걸 묵과할 수 없었고, 사회주의 혁명만이 라틴아메리카 민중을 해방시킬 수 있는 길이라 굳게 믿게 됐다. 그가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 쿠바 혁명에 동참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사회주의 혁명 이전의 쿠바는 미국의 식민지였다. 마약과 매춘, 부정부패가 창궐했고, 소수의 자본가들만이 미국의 자본가들과 더불어 부를 독점했다.

쿠바 혁명은 그런 제국주의 체제를 종결시킨 혁명이었으며, 혁명에 성공한 카스트로는 미국 제국주의가 소유한 생산수단을 국유화했다. 가난한 이들에게 무상으로 교육시키고, 치료시키며 집을 주었다. 쿠바의 사례가 성공했듯이, 체는 이러한 혁명을 라틴아메리카 전역으로 확산시키고 싶어했다. 그래야만 미국의 제국주의에 맞서 저항할 수 있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랬기 때문에 미국은 볼리비아에 체게바라가 잠입했다는 소식을 듣자, CIA와 육군 특수부대 그린베레를 투입하여 어떻게든 체를 죽이고자 했다. 미국은 체게바라를 죽였지만, 그의 순고한 혁명 이념까지 억압받고 유린받던 민중들의 마음속에서 지우지 못했다.

이번에 읽은 책 <만화 체게바라 평전>은 인간 체게바라가 낡은 오토바이를 타고 혁명가가 되는 과정부터, CIA가 동원한 토벌대에 의해 사살되는 최후까지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중간 중간에 국제정세에 관한 설명과 더불어, 체의 인간적인 심오한 고민을 만화의 형태로 잘 담아낸 것이 이 책의 특징이다.

내가 체게바라를 처음 읽은 건 6~7년 전 군대가기전에 했던 일반휴학 시절이었다. 그때 읽은 <체게바라 자서전>과 어록, 평전 그리고 감상한 영화와 다수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숭고한 신념을 가진 그를 존경하게 됐다.

체게바라가 꿈꾸던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이 이루어졌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자면, 아직은 아니다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있다. 체가 가졌던 그 원대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싸우고 투쟁하는 수많은 체게바라가 라틴아메리카에 있다는 사실은 현재 그곳에 확산되는 반미 반자본주의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또한 체가 목격한 억압받는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은 현재 진행형이다. 따라서 체게바라의 혁명적 위업과 신념은 여전히 유호하다.

라틴아메리카에 진정한 해방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며 서평을 마치도록 하겠다.

˝사회주의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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