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들이 하는 소리 99.9%는 개소리고 구라며, 새빨간 거짓말이라 생각한다. 국정원에서 써주는 연극 대본을 앵무새처럼 읆는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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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3-07-16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특히 친일반민족언론의 대명사 조선일보(조센닛뽀)와 TV조선(테레비조센), 동아일보(도아닛뽀)와 채널A(챤네루A)는 극우 탈북자들의 주장을 여과 없이, 사실확인도 없이 보도하는 ‘반민족 기레기언론‘의 대명사죠.
 

내가 아는 페친이 있는데, 이 친구가 개인적으로 SNS로 연락하는 러시아 친구가 있음. 이 친구 할아버지가 고려인이고, 우크라이나 돈바스 출신임. 그 친구는 현재 러시아에서 살고 있고, 돈바스 내전때 러시아로 피난옴. 07년생인 그 친구는 7살때 우크라이나 돈바스에서 살았는데, 본인 고모가 우크라이나 네오나치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시신 토막내는걸 직접 봤다고 한다. 그런 테러와 학살을 피해서 러시아로 왔다고. 이런 얘기 들으니 우크라이나 지지한다는 우뽕들에게 분노를 느낀다.

https://matomehub.jp/ukraine/page/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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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3-07-16 2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요. 우크라이나 네오나치들이 온갖 반인륜적이고 악랄한 만행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고 있는데, 언론은 침묵하고 있어요!
 
붉은 혈맹. 평양, 하노이 그리고 베트남전쟁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총서 모노그래프시리즈 11
도미엔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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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폭격>의 저자로 유명한 김태우 교수가 집필한 신간 한권이 있다. 책의 이름은 <냉전의 마녀들>로 한국전쟁 당시 북한 사회에서 반파시즘 연대운동을 벌였던 국제여맹의 활동을 재조명했다. 1951516일부터 527일까지 북한 전 지역을 돌아다니며 조사를 벌였던 국제여맹의 조직원은 총 18개국으로부터 온 21명의 외국인 여성으로 구성되었었다. 이들 중에는 놀랍게도 베트남 출신의 여성도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 , 국제여맹이라는 조직은 반파시즘 반식민주의 차원에서 쿠바, 아르헨티나, 튀니지, 알제리, 중국, 베트남과 같은 소위 제3세계로 불릴 수 있는 국가의 인물들과도 교류를 했던 것이다.

 

<냉전의 마녀들>에선 자세히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비슷한 시기 전개되었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프랑스-베트민 전쟁) 당시 호치민(Ho Chi Minh) 정부는 미국과 전쟁을 치르던 중국 북한과 연대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4.27 시대에서 출간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을 보면, 1960년대 당시 북한이 쿠바와 베트남 그리고 이집트 등과 같은 반제민족해방투쟁에서 연대와 지원을 한 것으로 나온다. , 북한과 베트남의 반제국주의 연대 차원에서의 관계에 대한 나의 관심은 이 두 권의 책이 제법 자극제를 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놀랍게도 2022년 올해, 아주 흥미로운 책 한권이 출간된 것을 확인하게 됐다. 그 책이 바로 베트남 연구자인 도미엔(Do Mien)씨의 저서 <붉은혈맹: 평양, 하노이 그리고 베트남 전쟁>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저자의 박사논문을 책으로 간추린 것으로, 베트남 전쟁 당시 북한과 북베트남의 동맹관계를 재조명한 책이다. 아주 흥미로운 주제이며, 올해 들어 정말 흥미롭게 읽은 책이 됐다. 사실 한국 사회는 이승만 시대부터 뿌리 깊게 자리 잡은 극단적 반공주의(Anti-Communism)이 아직도 남아있는 사회다. 따라서 북한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모종의 잘못된 행위로 간주되는 이상한 분위기가 일반인들에게 아직도 남아 있는 사회다. 그런 사회에서 그것도 베트남 전쟁 시기 북한과 북베트남의 공동연대의식을 조명했다는 점은 한국 사회에서 건드리기 다소 힘든 점을 용기 있게 조명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 도미엔씨는 북한과 베트남의 연대의식의 시작점은 제2차 세계대전 전후로 양국이 경험했던 식민주의 제국주의적 비슷한 경험의 공통성으로부터 비롯됐다고 주장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베트남은 호치민이 독립을 선포하자마자 얼마 되지 않아 프랑스의 침공을 받아 8년간 전쟁을 치렀다. 북한 또한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수립 이후 불과 2년 만에 한국전쟁을 통해 미국과 전쟁을 치렀다. 그리고 놀랍게도 양국의 전쟁에는 미국이 개입되어 있었으며, 미국은 이 두 전쟁을 반공주의의 논리로 접근했다. 당시 미국 사회에는 중국의 공산화와 소련의 핵개발에서 비롯된 매카시즘이 사회 곳곳에 퍼져 있었고, 그러한 반공주의는 반제국주의·반식민주의적 성격을 가진 전쟁을 오로지 반공주의적 논리로 접근하게 만든 것이다.

 

, 이러한 상황에서 양국에 형성된 반제국주의·반식민주의적 의식이 1954년 제네바 협정 이후 베트남의 남북분단 상황과 미국의 남베트남 군사고문단 파견 그리고 베트남 침략에서 보다 구체적인 양국의 반미의식으로 확대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2019년 북미정상회담이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서 개최되자, 당시 북한과 북베트남의 관계를 얘기하는 국내 기사들이 제법 나왔었다. 특히나 베트남 전쟁 당시 전사한 조선인민군 공군조종사의 묘가 베트남 박장 성에 있다는 사실도 기사화됐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 당시 이들의 연대의식이 기원이 과연 어디인지 얘기하는 기사는 없었다. 그러한 점을 이 책이 충분히 채워줬다고 나는 생각한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의 명장인 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의 자서전인 <디엔비엔푸(Dien Bien Phu)>를 몇 년 전에 읽은 적이 있다. 길찾기 출판사에서 번역한 잡 장군의 책에는 디엔비엔푸 전투 10주년을 맞아 그가 쓴 디엔비엔푸 대첩과 동춘 승리의 궁극적 의의라는 글도 같이 실려 있는데, 그 글에서 잡 장군은 제국주의자들이 당황하고 낙담한 반면, 우리의 승리에 대한 소식은 전 세계의 진보적인 인민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모든 사회주의 국가들은 디엔비엔푸에서 거둔 승리의 기쁨을 함께 나눴다. 이는 억압받던 인민들의 자랑거리였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알고 있던 국가 해방을 위한 세계적인 운동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썼다.

 

잡 장군이 1964년 글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이 내용이 정말 사실이었다는 것을 1950년대 북한의 김일성 위원장의 연설을 통해 알 수 있다. 아래는 김일성 위원장의 연설 문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사실은 전 세계 피압박 인민들에게 민주진영의 적극적인 지지 밑에 자기 조국의 해방을 위하여 전 민족이 단결하여 일떠서 싸우면 어떠한 제국주의도 물리칠 수 있다는 신심을 굳게 하여 주었습니다. 실례로 지금 이란, 애급, 윁남, 말라이를 비롯한 여러 나라 인민들이 조선 인민의 투쟁에 고무 되여 민족해방투쟁의 불길을 더욱 높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전을 요구하며 그 실현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꼭 정전이 된다고만 생각하고 장기전에 대처할 준비를 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출처: 붉은혈맹 p.59

 

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북한과 베트남은 중국과 더불어 소위 반제국주의 연대를 구축했던 것으로 드러난다. 책을 읽으면서 놀란 것이 또 있다. 그것은 바로 한국전쟁 시기 북한을 돕기 위해 참전한 중공군 중에는 중국 군사학교에 간부 및 군인으로 파견된 베트남인들도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책에 따르면 19506월까지의 통계에 따르면, 북베트남인 3,000명가량이 중국에서 군사훈련 및 정치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이것이 무슨 얘기인지 이해하기 위해선 당시 정세를 볼 필요가 있다. 1949년 중국이 마오쩌둥의 주도로 통일이 되면서, 아시아에서의 냉전진영은 극적으로 소련에게 유리해졌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베트남은 호치민의 지도하에 1946년부터 프랑스의 침략에 맞서 싸웠고, 침략자 프랑스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그러던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중국 공산당은 프랑스에 맞서고 있던 호치민 정부를 지원했는데, 이 과정에서 일부 베트민 병력이 중국에서 군사 및 정치훈련을 받았고, 더 나아가 일부가 한국전쟁에 참전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한국사회에서 한국전쟁에 대한 입장은 김일성은 침략자이기에 나쁜 놈이다라는 이미지가 유난히 부각되며 사회적으로 강조된다. 그러나 책에 나온 사실을 포함한 여러 가지 사실들은 그러한 하나의 사실관계만으로는 한국전쟁을 파악할 수 없음을 입증한다고 할 수 있겠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한참이던 19504월부터 9월까지 중국은 베트민에게 다량의 군수품과 일반물품을 원조했다. 그것은 14,000자루의 소총과 조종사, 1,700자루의 기관총과 무반동총, 150문의 박격포, 60문의 포, 300개의 바주카포뿐만 아니라 탄약, 약품, 통신 재료, , 음식 2,800톤을 포함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원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한국전쟁과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중국의 영향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양국에 대한 중국의 지원은 당시 미국의 대아시아 반공정책과 연관이 있다. 아래의 인용문을 보도록 하자.

 

중국의 베트남과 북한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은 당시 사회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의 갈등에 대한 마오쩌둥의 신념에 바탕을 두었다. 마오쩌둥은 한국전쟁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프랑스에 대규모 원조를 제공한 미국의 움직임을 한반도-대만-인도차이나 세 방향에서 중국을 포위-침공하는 전략을 실행한 것으로 판단했다. 그리하여 그는 3국의 상황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으며, 만약 미국이 한반도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면 중국과 아시아의 혁명이 거대한 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거시적으로, 마오는 중국의 한국전쟁 및 항불전쟁 참여가 세계와 아시아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 및 반제국주의 혁명 수행을 지원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출처: 붉은혈맹 p.45~46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제네바 협정에 따라 베트남이 남북분단이 되자, 미국은 제네바 협정에서 약속한 총선을 거부했다. 미국이 자신들의 꼭두각시로 내세운 응오딘지엠은 과거 항불 투쟁하던 이들에 대해 탄압과 구금 그리고 학살을 자행했다. 이것이 결국 1960년 베트콩 창설에 큰 이유를 제공했다. 응오딘지엠이 전직 베트민 투사들에 대해 탄압과 학살을 자행하던 1957년 호치민은 대략 5일간 북한을 방문하여 대미행장에 힘쓰기 위해 북한·북베트남 연대를 강화하자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호치민은 북한과 북베트남의 분단문제에서 미국의 책임을 언급하고 다음과 같이 양국의 단결을 호소하는 연설을 했다.

 

미 제국은 조선 및 베트남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군사기지를 늘리며 긴장상태를 일으키고 있고 사회주의 진영을 공격하려고 합니다. 미 제국의 전쟁도발 음모에 당면했기에, 선두에 선 소련과 중국, 그리고 사회주의 형제 국가들은 인류의 평화문제와 사회주의 업적에 책임을 인식하여 단결심을 강화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바탕으로 서로 협력을 증진해야 합니다.”

 

출처: 붉은혈맹 p.65~66

 

이러한 호치민의 연설에서 알 수 있듯이, 항불전쟁과 한국전쟁 시기 식민지 경험과 반식민지 투쟁에서 형성된 양국의 연대의식은 양국의 남북분단이라는 현실 속에서 반미주의적 연대의식으로 보다 구체화됐다. 즉 이러한 과정에서 북베트남과 북한은 미국이라는 제국주의에 맞선 연대의식을 강화해나갔고, 이것은 1960년대 미국이 침략으로 일어난 베트남 전쟁 속에서도 나타난 것이다. 양국의 문화 및 정치도 교류를 통해 서로에게 소개되기도 했으며, 1964년에는 로버트 맥나마라를 암살하려다 체포당해 총살당한 베트남의 독립운동가 응우옌반쪼이(Nguyen Van Troi)가 북한에서 소개되기도 했다. 놀랍게도 북한은 응우옌반쪼이 정신을 강조하기도 했으며, 응우옌반쪼이의 이름으로 생산력 강화를 주장하며 공장의 생산력 증진 및 북베트남의 지원을 강화하기도 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60년대 베트남 전쟁 당시 북한의 공군 조종사 파견은 한국 언론에 보도되었을 정도로 제법 유명하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 당시 북한이 북베트남에게 얼마나 많은 무상지원을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도미엔씨의 논문은 이러한 점을 아주 잘 집고 있다. 북베트남에 대한 북한의 무상지원은 1965년부터 시작되어 1973년까지 지속됐다. 이러한 지원의 규모는 결코 작지 않았으며, 초기 지원은 북한이 요구한 것 보다 1.5배나 많기까지 했다. 북한의 지원은 단순히 공군 조종사 100명과 심리전단 인원뿐만 아니라 무상지원도 있었다는 사실을 같이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베트남에 대한 북한의 무상지원은 1965년에 시작되었다. 해당 문서에는 1965~1973년에 이르는 동안 연도별 북한의 지원액에 대한 정확한 통계가 나와 있다. 북베트남 정부는 북한의 지원을 4년 단위로 나누어 총 2단계로 파악하고 있다. 1965년부터 1968년까지의 4년이 1단계, 1969년부터 1973년까지는 2단계이다. 1960년대 중후반 북한북베트남 관계의 진전을 잘 보여준 북한의 베트남 무상지원 1단계 양상이 <3-1>에 제시되어 있다. <3-1>에서 보듯 1965년의 지원 금액은 1,200만 루블이었다. 1965~1968년의 지원 금액은 3,000만 루블에 이르렀는데, 북베트남 정부는 이를 높은 지원 수준으로 평가했다. 북한의 북베트남 무상지원은 1970년대까지 진행되었으나, 전체 연도를 놓고 봤을 때 1965년의 1,200만 루블이 가장 고액이었고, 해당 연도가 1965~1968년 총지원액인 3,000만 루블에서 40%를 차지하고 있다. 다시 말해 1965년 지원액이 베트남 전쟁기 북한이 베트남에 지원한 최고 지원 금액이었다.”

 

출처: 붉은혈맹 p.163

 

북한과 북베트남의 연대와 양국의 협력의식은 놀랍게도 1968년 베트남의 구정 대공세(Tet Offensive)를 기점으로 다소 약화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러한 저자의 근거는 당시 북베트남에 대한 북한의 지원액의 감소와 1969년 전투기 조종사의 철군 등과 같은 여러 근거에 입각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양국의 연대의식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며, 1975년 통일 이후 양국의 약간의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미국에 맞서 승리한 베트남의 승리에 대해 환영해주긴 했다.

 

그러나 1975년 이후 북한의 중국에 가까운 노선을 걷고 베트남이 소련에 가까운 노선을 걸으면서, 양국의 갈등이 있었다. 특히나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을 빌미로 중국이 베트남을 침공하자, 북한은 베트남에 대해 비판 성명을 냈다. 그러한 배경이 1990년대 북한과 베트남 관계의 냉각 기류에 영향을 주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거기다 1992년 베트남은 대한민국과 수교했고, 1994년 미국과 수교를 했다. 1986년부터 추진한 개혁개방 정책인 도이모이의 영향이었다. , 그러한 점은 당시 북한이 베트남과 거리를 두었던 이유일 것이다. 그래도 양국의 관계는 2000년대 들어 다시 회복세로 진입했으며, 오늘날의 관계까지 이어졌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번에 도미엔씨의 책을 읽으며, 내가 많이 궁금해했던 주제를 많이 공부할 수 있어서 기뻤다. 지금껏 알지 못했던 여러 사실을 가르쳐준 저자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낀다. 물론 나는 이 책 내용에 100%까지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주 훌륭한 연구 자료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베트남인 연구자이기에 베트남측 문서를 많이 활용한 것이 눈에 들어왔으며, 한국 사람들이 정말 알기 쉽지 않은 최근 베트남 역사학계의 동향까지 알려준 것도 정말 의미가 있었다. 예를 들면 책에 나온 다음과 같은 예시를 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최근 베트남에서 이루어진 연구는 이미 1967년부터 소련이 북베트남에 미국의 협상 조건을 전달했고, 북베트남에 협상에 들어갈 것을 권유했음을 드러냈다. 1960년대 말 베트남 전쟁에 대한 소련의 관점은 현상 유지였기 때문이다. 즉 소련은 미국의 북베트남 폭격 중단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그다음에 남베트남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남베트남에서의 미군 철수 및 군사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그다음에 정치 및 통일을 해결하자는 것이다.”

 

출처: 붉은혈맹 p.216~217

 

그 외에도 헝가리 연구자의 문서와 윌슨 센터 자료, 기존 국내에 나온 연구와 북한 자료 및 베트남 자료를 고루고루 사용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러한 자료들 중에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최신의 자료도 제법 많이 담고 있다. 이러한 점은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 또한 은연중에 언급한 민족해방전쟁론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사실 한국 사회에서 베트남 전쟁을 호치민의 민족해방전쟁으로 보는 관점은 <전환시대의 논리> 저자인 리영희 교수에 의해 나온 관점이다. 이러한 관점에 대해 일각에서는 낡은 관점으로 치부하며, 도리어 정통성이 없던 남베트남에 대한 옹호의 흐름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흐름은 서방학계 일부의 흐름일 뿐, 전반적인 진실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제3세계적 흐름을 쉽게 무시하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책의 저자 또한 베트남 전쟁을 통일전쟁이자 민족해방전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 또한 베트남 전쟁은 기본적으로 민족해방전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이 자료도 입증하고 있듯이, 북한과 북베트남의 연대뿐만 아니라, 미국이 내세운 나라 남베트남의 정통성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응오딘지엠 정부가 과거 독립운동을 하던 베트민 투사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탄압하고 학살했던 역사에서 입증 된다고 생각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베트남 전쟁은 기본적으로 호치민과 북베트남 공산당의 민족해방전쟁적 성격을 가진 것이다. 책 초반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하겠다.

 

베트남 전쟁은 제국주의와 식민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사회주의 진영 내부의 갈등이 복잡하게, 뒤얽힌 복합전쟁이었다. 물론 베트남 전쟁은 기본적으로 통일전쟁이고 민족해방전쟁이었다.”

 

출처: 붉은혈맹 p.8

 

그 외에도 다음과 같은 책의 내용을 통해 저자가 베트남 전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한편, 베트남 전쟁의 성격과 그 의미는 전쟁의 발생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검토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따라서 그 역사적 기원을 현대사에서 찾는다면,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발생한 베트남의 ‘8월 혁명일 것이라는 설명이다. 19459월 베트남민주공화국 수립과 함께 호찌민이 선언한 베트남 민족의 독립과 베트남 통일을 당시 국제사회가 승인했다면, 특히 구식민지 종주국인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 대한 지배 의지를 갖고 있지 않았다면, 그 후 30년에 걸친 프랑스, 그리고 미국과의 전쟁은 발발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 후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프랑스와의 전쟁), 2차 인도차이나 전쟁(미국과의 전쟁)은 연속적인 반제국주의 항쟁인 것이다.”

 

출처: 붉은혈맹 p.29~30

 

이 책의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베트남 전쟁 당시 북한의 공군 조종사들이 얼마나 많은 전투기를 격추했고, 또 얼마나 많이 전투에 기여했는지에 대한 내용이 빈약하다는 점이다. 그래도 이 책이 아주 잘 쓴 명저라는 점은 너무나 분명하고 이 책을 통해 정말 많은 것을 공부할 수 있었다. 그 점에서 다시 한 번 저자에게 깊이 감사함을 표하고 싶다. 사실 이 책은 저자 논문의 절반 부분을 책으로 낸 것이다. 저자 논문의 절반 부분이 북한과 북베트남의 관계를 조명한 것이라면, 나머지 절반 부분은 남한과 남베트남의 관계를 조명한 것이다. 이 나머지 부분이 책으로 나올 것을 저자는 머리말에서 암시하고 있다. 그 점에서 나머지 절반 부분도 많이 기대가 된다. 나는 북한과 베트남에 대해 관심이 많은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일독을 권하고 싶다. 앞으로 더 좋은 연구 성과가 이 책을 시작으로 더 많이 등장할 것이라 기대하며 긴 서평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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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권인가 생존인가 - 미국은 지금 어디로 가는가
노암 촘스키 지음, 황의방 외 옮김 / 까치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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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왜곡 그리고 프로파간다로 점철된 미국의 패권주의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이었던 우고 차베스(Hugo Chavez)가 유엔연설을 하며 전 세계 사람들에게 소개한 책 한권이 있다. 차베스는 유엔연설에서 미국의 제국주의적인 패권정책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책 한권을 소개했다. 바로 미국의 언어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인 노엄 촘스키(Noam Chomsky)가 쓴 <패권인가 생존인가(Hegemony or Survival)>이다.

베네수엘라의 진보 대통령 우고 차베스는 21세기에 사회주의를 꿈꾸던 인물이었다. 그는 베네수엘라를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고 싶어했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전쟁기계는 자신들의 점령지역인 라틴 아메리카에서 사회주의가 성공하지 못하도록 온갖 제재와 악행을 일삼았다.

혁명가 차베스는 제국주의의 실체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미국이라는 신제국주의 국가가 얼마나 이분법적이고, 여론조작의 달인이며, 파괴본성을 버리지 못했는지 너무 잘 알았다. 그런 차베스가 많이 공감한 책이 바로 촘스키의 저서 <패권인가 생존인가>였다.

책은 2003년 미국이 시작한 이라크 전쟁에 대한 논의부터 시작한다. 그러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추구했던 패권정책의 추악한 이면을 들춰내며, 이들의 전략이 얼마나 많은 국가들을 빈곤과 파괴 죽음으로 내몰았는지를 얘기한다.

소련이 해체되던 시점에 발발한 1991년 걸프전쟁을 예로 들어보자. 미국은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했다는 이유를 들어, 다국적군을 편성하여 중동에 대규모 병력을 투입했다. 이는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국이 주도한 대규모 군사 작전이었다. 전쟁의 결과는 연합군 300명이 죽을 때, 이라크군 수만 명이 죽는 수준으로 미국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걸프전쟁 이후 미국은 이라크에 대한 적대적인 정책을 해제하지 않았다. 미국은 유엔을 동원하여 이라크에 대한 대대적인 경제제재를 가했다. 그 결과 이라크의 아이들 50만 명을 포함하여 125만 명이 아사했다. 의도적으로 죽음을 만들어 놓은 미국은 이것을 가치있는 희생이라고 미화했다. 네오콘인 매를린 울부라이트는 방송에 나와서 ˝이라크 사태는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미국의 이런 제재를 통한 살인은 엄밀히 따지면 범죄다. 그러나 미국은 제대로 규탄받은 적이 없다.

미국은 타국 지도자에 대한 악마화에도 뛰어나다. 이집트의 초대 지도자 가말 압델 나세르가 제3세계 진영에 들어가자, 미국은 나세르를 히틀러에 비유했다.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가 제3세계 진영에 있으며 반미노선을 걷자, 마찬가지로 그를 히틀러와 같은 존재로 악마화했다. 미국의 이런 악마화는 카다피, 김정일, 차베스, 모랄레스 등의 지도자들에게도 전가됐다. 이 지도자들이 미국과 다르게 타국을 침공하지 않았지만, 미국에게 이들은 그저 악의 축으로 규정되어야할 대상이었다.

언론 보도들 또한 조작과 편향이 넘친다. 미국은 제국주의적이고 극단적 민족주의인 시오니즘을 추구하는 이스라엘을 자신들의 우방으로써 지원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스라엘은 아랍 국가들을 대상으로 온갖 폭력과 범죄행위를 저질렀고, 특히 팔레스타인에서는 지금도 인종청소가 자행되고 있다.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 제국주의에 맞서 저항할때마다 미국은 팔레스타인 급진주의 운동을 테러리즘에 자주 비유했다. 물론 팔레스타인 급진주의 운동이 테러를 안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들이 한 것은 미국에 의해 여론조작되어 과장보도 되었다. 반면에 이스라엘 정규군이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폭격하고 탱크로 밀어 거기 있던 장애인이 죽자, 미국은 이를 절대적으로 침묵했으며 보도가 전혀 되지 않았다.

미국의 이러한 조작과 프로파간다는 1857년 영국 제국주의자들이 인도 세포이 항쟁을 진압할 때 사용하던 논리와 일치한다. 인도에서 세포이 항쟁이 일어나자, 영국의 언론들은 ˝야만적이고 잔혹한 인도인들이 무고한 영국인들을 괴롭히고 죽이고 학살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정작 영국 지배자들은 이 항쟁을 진압한뒤, 저항에 참가한 인도인들의 씨를 말리기 위해 온갖 잔혹행위들을 저질렀다. 무수히 많은 인도인이 영국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학살당했지만, 영국 지배층은 이를 폭동진압으로 미화했다.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하던 여론조작은 현재 미국이 패권유지를 위해 사용하는 방법이다. 미국은 무수히 많은 타국 민간인을 죽였다. 한국전쟁 당시 공중 폭격으로 북한은 초토화 되었고 대략 100만 명이 폭격으로 죽었다. 베트남 전쟁에서도 비슷한 인명이 미군의 폭격으로 희생됐다. 2003년 일으킨 이라크 전쟁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점에서 미국의 패권주의는 파괴의 본능을 가지고 있다.

2004년 노엄 촘스키가 집필한 이 책은 무수히 많은 한국인들이 외면하는 미국의 추악한 패권정책의 민낯을 밝힌 책이다. 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부자연 스러운 번역투와 철자오류들이 다소 존재한다는 것이다. 나중에 개정판이 나왔으면 좋겠다. 이런 단점이 있지만, 그래도 읽어볼만한 명저인 것은 분명한 일이다.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이 있다. 2022년 미국은 다시한번 자신들의 패권을 위해 대규모 군사 개입을 할까? 앞으로 더 지나봐야 알겠지만, 분명한 것은 미국은 그런 위험한 도박을 자신들의 자본축적과 이윤생산을 위해 할 수 있는 나라라는 사실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제국주의가 종식되야 하는 것이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미국이 보이는 위선을 이해하고 싶은 이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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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러우전쟁이 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서구 인터넷에서 한 유튜브 동영상이 논란이 되었다. 그 동영상은 붉은 별이 달린 모자를 쓴 미국인 남성이 러시아군의 기갑 행렬 앞에서 촬영한 영상이었다. 영상에서 이 미국인은 우크라이나의 해방자들과 함께 전선에 있다고 말하며, 우크라이나의 좋은 사람들을 돕고 나쁜 사람들을 박살낼 것이라고 말한다. 유튜브의 친러시아 동영상 검열에 따라 곧바로 삭제되었지만, 트위터 등을 통해 여러 커뮤니티로 퍼져나갔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로, 2014년 돈바스 전쟁이 발발했을때, 여러 나라에서 돈바스 주민들의 항쟁을 도와 마이단 정권에 맞서 싸우기 위해 우크라이나로 떠난 사람들이 있었다. 심지어 서유럽 국가들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돈바스로 간 자원자가 있었는데, 그가 오늘 소개할 미국인 사회주의자 러셀 벤틀리이다.


러셀 벤틀리는 텍사스 출신으로, 1960년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보수적인 동네인 텍사스에서 자란 부잣집 아들이지만 그는 성장하면서 점차 사회주의에 빠져들었다. 그는 호치민과 체 게바라의 저작들을 읽으며 베트남 전쟁은 베트남인들이 외국 침략자들에 맞서 싸운 것이고, 피델과 체의 혁명은 쿠바를 도박장이자 매음굴로 만든 외국인들을 몰아낸 정당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벤틀리는 중학교를 중퇴한 뒤 검정고시를 보고, 미군에 입대해 독일에서 복무하다 전역한 후 텍사스 해안으로 돌아가 가족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일하고 록 밴드 활동을 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 1990년대 중반 쿠바로 여행을 가게 되는데, 거기서 그는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롤링스톤지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벤틀리는 쿠바에서 쿠바군 장교를 만났는데, 그 장교는 벤틀리에게 "공산주의자는 사회주의를 위해 기꺼이 싸우는 사람"이라고 말했고, 그 말을 들은 벤틀리는 "나는 겁쟁이로 사는 것을 그만두고 사회주의자가 될 것이다. 나는 공산주의자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공산주의자가 된 벤틀리는 정치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면서 다사다난한 삶을 살았다. 1996년 미네소타에서 대마초 합법화 운동을 하다 대마초 밀수 혐의로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다가 1999년 탈옥하기도 했으며, 이후 워싱턴 주에서 살며 시애틀에서 열린 반세계화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 밖에 걸프전 반전 운동, 이민자, 여성, 동성애자의 인권 신장 운동에도 참가했다. 그러다 2007년 재수감되어 2012년에 석방되었다.


그레나다 침공, 유고내전 개입, 아프간과 이라크에서의 전쟁 등을 겪으며 조국 미국에 대한 벤틀리의 실망과 분노는 점점 커져갔다. 그러다 2011년 미국의 개입으로 카다피 정권이 붕괴했을때, 그는 반미주의자가 되었다. 그러던 중 2014년 우크라이나에서 마이단 쿠데타가 일어났다. 벤틀리는 이 쿠데타를 미 국무부와 CIA가 배후에 있는 색깔 혁명으로 바라봤고, 오데사 학살 사건으로 반 마이단 시위대들이 마이단 폭도들에게 살해되는 것을 보며 친러 분리주의를 동정하게 되었다.


그렇게 마이단 정권이 들어선 후 돈바스 전쟁이 발발하게 되면서, 도네츠크와 루간스크는 우크라이나 군대의 무차별 폭격을 당하게 되었다. 벤틀리는 루간스크 시가 우크라이나군의 미사일 공습으로 파괴되는 동영상을 보게 되었다. 롤링스톤 지의 인터뷰에서 벤틀리는 공습으로 다리가 잘린 채 죽어가는 여성을 언급하며 이렇게 회상했다. "그녀가 나에게 질문하는 것 같았다. '이걸 보고 어떻게 할 것인가? 손을 잡고 평화를 외치며 미국을 횡단할 건가? 아니면 쿰바야(아프리카 영가)를 부를 것인가?' 그리고 나는 '아니, 난 이런 짓을 한 놈들을 죽이러 갈 것이다.'라고 답했다." 그리고 벤틀리는 그의 다짐을 곧바로 행동에 옮겼다.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직장을 그만두고,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한 뒤 러시아 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그는 도네츠크로 간 후 이탈리아 출신의 자원병을 만났고 그를 통해 도네츠크 민병대에 입대하게 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54세 였고 러시아어도 할 줄 몰랐지만, 선량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우크라이나군과 싸우기 위해 민병대에 입대했다고 한다. '텍사스'라는 호출부호로 불리며 도네츠크 공항 등 격전지에서도 싸웠고 "자유 돈바스 라디오"라는 팟캐스트를 운영하고 유튜브에도 동영상을 업로드 했다. 벤틀리는 자신은 자원병이며, 아무에게도 돈을 받지 않는다고 밝혔다. 2017년 그는 도네츠크 인민 공화국 시민권을 받았고, 2020년에는 러시아 시민권도 얻었다.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벤틀리는 전쟁에 대해 "빌어먹을 미국 정부가 8년 전에 시작한 전쟁을 러시아가 끝내기 위해 개입한 것이다"라고 평하며, 푸틴에 대한 지지와 젤렌스키에 대한 부정적 의견을 내비쳤다. 그는 젤렌스키를 "그는 광대, 꼭두각시고 약쟁이다. 말그대로 마약중독자다. 그는 포로셴코처럼 훈련받은 원숭이다. 워싱턴의 주인들이 시키는대로 하지 않는가. 젤렌스키는 포로셴코보다 더 한심한 아첨꾼이다."라고 평했다.


스푸트니크와의 인터뷰에서 서구 언론의 러시아군이 고전하고 있다거나 우크라이나군이 이기고 있다고 주장하는 보도(당시는 4월 1일)들에 대해서는 러시아의 진격이 느린 것은 우크라이나 군과 그들의 나치 부대가 민간인들을 방패로 삼으며 러시아군이 집집마다 확인하도록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인간 방패는 우크라이나군의 전략 중 하나이고 그들은 믿을 수 없고 비겁한 자들이라고 비난했다. 우크라이나에는 나치가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우크라이나의 나치 대대들은 진짜 나치들이다. 스와스티카 문신을 하고 '하일 히틀러'나 '반데라 만세'를 외치고 다닌다. 반데라는 나치 협력자이자 끔찍한 전범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돈바스 주민들에 대해 "지구의 소금이자, 인간성의 정수"라고 극찬하면서 교양적이고 개방적이고 관대하며 친절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벤틀리는 8년째 미국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사실상 미국을 적으로 두고 싸우고 있지만 가족들과는 계속 연락하고 있으며, 미국이라는 나라 그 자체에는 여전히 믿음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미국의 이념을 사랑한다. 나는 미국인과 미국에 있는 내 가족들과 친구들을 사랑한다." "나는 어디에서나 좋은 사람들에게 나쁜 일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는다. 하지만 현재 미국은 파시스트 정권이 지배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으로 돌아갈 의사는 없음을 밝혔다. 그는 "내가 미국으로 돌아갈 때애는 여기서 하는 것처럼 미국을 해방하는 러시아 전차에 타고 있을 것이다. 만약 내가 맨몸으로 미국으로 돌아간다면 내 남은 여생을 감옥에서 보내게 될 것이다."라며, "난 미국에 돌아갈 필요가 없다. 난 DPR 여권을 갖고 있고, 도네츠크 인민 공화국의 시민이고, 러시아 시민이기도 하다. 난 작은 집과 큰 마당, 아름답고 똑똑하고 강한 훌륭한 아내가 있다. 그녀는 3개 국어를 하고 90%의 미국인보다 더 많은 교육을 받았다." "여기 말고 살고 싶은 곳은 없다."라고 도네츠크에서 남은 인생을 보낼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이 러셀 벤틀리의 일생으로, 롤링스톤과 뉴스위크, 스푸트니크의 인터뷰를 참조했다. 본래 롤링스톤의 기사 전문을 번역하려 했지만 서구 주류 언론인 롤링스톤답게 벤틀리를 미치광이 음모론자로 묘사하고, 기사 중간중간에 우크라이나에는 나치가 없다는 주장을 끼워넣고, 도발, 조롱이 목적인 질문도 서슴치 않는 내용이라 번역하기엔 불쾌감이 느껴져 벤틀리의 일생 부분만 참조하고 거기에 뉴스위크와(여기도 부정적인 논조지만 롤링스톤보단 온건함) 스푸트니크의 기사를 참고해서 작성했다.


아래부터는 2018년 좌파 유튜버 'TheFinnishBolshevik'가 인터뷰한 내용 중 돈바스의 사회주의에 관한 문답 일부를 번역한 것이다.


질문 5: 당신은 이전의 많은 인터뷰에서 자신이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해왔다. 당신과 당신의 조직인 'Essence of Time'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무엇으로 정의하며, 이것이 노보러시아에 어떻게 적용되는가? 서구의 많은 공산주의자들은 사유 재산과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의 기본적 구조들이 여전히 돈바스에서 작동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답: 솔직히 말해서, 나는 서방의 대부분의 "공산주의자"들을 비웃는다. 그들 대부분은 위선자, 겁쟁이, 얼치기들로, 그들의 공산주의는 아마존에서 체 게바라 티셔츠를 사는 것, 그리고 아마 끝없이 인용할 수 있는 한두권의 책을 읽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서방에 앉아서 우리를 비난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완벽한 예다. 그들은 실제 파시스트와 싸우는 것 보다 동지를 비판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쏟는다. 서구의 아무 "공산주의자" 그룹에게 실제로 나치를 죽였는지 물어봐라. 난 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의 천 배를 더 한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 말고는 하는게 없는 사람들은 경멸할 가치도 없다. 내가 1995년 쿠바에 갔을 때, 쿠바 육군 대위와 아주 계몽적인 토론을 했다. 나는 내가 사회주의자라고 말하자, 그녀는 자신은 공산주의자라고 말했다. 내가 둘이 무슨 차이가 있냐고 묻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공산주의자는 사회주의를 위해 기꺼이 싸우는 사람이다." 기꺼이 싸우겠다는 것은 기꺼이 죽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기준으로 볼 때 서방에는 공산주의자가 별로 없다. 하지만 나와 'Essence of Time'의 내 동지들은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라고 부를 자격을 얻었다. 서구, 특히 미국에서 자신을 "공산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그렇게 할 때가 되었다.


DPR에서 의료와 교육은 무료다. 식품, 에너지, 주택, 교통과 통신비는 서방보다 훨씬 저렴하지만, 질은 더 좋다. 이것은 좋은 시작이다. 이것이 우리가 싸워서 이긴 사회주의이다. 이것과 동일하거나 더 뛰어난 일을 한 사람들은 우리를 비판하거나 조언을 할 자격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일이나 하러 가라.


질문 6: 위키피디아같은 일반적인 인터넷 자료를 통해 돈바스 전쟁을 조사해 보면, 노보러시아 군대에서 싸우는 부대 목록에 민족볼셰비키, 러시아 국민 연합, 세르비아 체트니크 같은 대부분의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격렬히 반대할 극우 부대들이 있다. 이것은 서방의 많은 좌파들에게 도네츠크와 루간스크의 투쟁을 지지하는 것에 관심을 잃게 하는 것이다. 서구 맑스주의자 대부분은 우크라이나에 나치가 있는건 사실이지만, 노보러시아쪽에도 나치와 국수주의자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 우익 부대들이 어느 정도까지 운영되고 있으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을 이 인터뷰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으로 볼 것이다.


답: 전쟁 초기 노보러시아 군대에 "민족주의자"들이 일부 있었고, 그들은 모두 외국인이었다. 지금은 모두 사라졌다. 나와 함께 전선에서 싸운 사람들은 나치 문신이나 나치의 관점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싸우지 않을 것이다. 노보러시아 군에는 카자크나 심지어 왕정주의자까지도 있지만 그들은 파시스트나 국수주의자는 아니다. 그들은 진짜 공산주의자들 옆에 서서 나치와 싸우는 전우들이다.


돈바스 공화국을 위해 싸우는 나치나 국수주의자들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바보이거나, 거짓말쟁이거나, 둘 다이다. 그건 "공산주의는 나치만큼 나쁘다"라고 말하는 것 만큼이나 멍청한 말이다. 그들은 이것을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공산주의적이고 진보적인 혁명적 운동 중 하나를 지지하지 못한 것에 대한 변명으로 사용한다. 비겁함과 위선의 반복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실제로 파시즘과 싸워 이긴 사람들에게 부적절하고 자격 없는 비난을 한다.


질문 7: 돈바스 지역은 사회주의 이념과 반파시스트 정신의 풍부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스타하노프 운동이 탄생한 곳이며, 2차 대전 동안 돈바스는 나치 독일에 영웅적인 저항을 했고, 최근까지 오데사는 수백개의 다양한 민족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매우 다문화적인 도시로 알려져 있었다. 당신은 노보러시아 사람들이 소련 시절의 향수나 민족적 자부심을 제외하고 사회주의에 어느 정도 열광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답: 도네츠크도 세계에서 가장 다문화적이고 국제적인 도시 중 하나이다. 1869년 존 휴즈가 이곳에 제철소와 탄광을 지었을 때, 그는 전세계에 이곳에서 좋은 일자리와 정당한 보수를 받을 수 있다고 홍보했다. 100개 이상의 국가들에서 사람들이 도네츠크로 이주했고, 그 후 "유조브카"(도네츠크 시의 옛 이름)라고 불렸다. 돈바스 지역은 역사적으로 소련에서 가장 굳건한 공산주의적 지역 중 하나였다. 이 곳 사람들은 진정한 공산주의자가 되기 위한 이론과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 그들의 투쟁, 희생, 승리의 역사, 사회주의의 보상과 자본주의와 파시즘의 폐해에 대한 현실의 경험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싸워야 할 때 기꺼이 싸울 것이다. 나는 돈바스 공화국이 그 결점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공산주의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의 선두이자 가장 좋은 예시라고 말하고 싶다.


질문 8: 우리는 돈바스의 몇몇 공장들이 국유화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국유화가 얼마나 퍼져있는지, 이것이 경제의 다른 분야로도 확산되고 있는지 알고 있나?


답: 몇몇 공장과 기업체들이 올리가르히로부터 몰수되어 국유화되었다. DPR의 경제는 일반적으로 부유층을 부유하게 하지 않고 사회 전체에 이득이 되도록 조정된다. 그것은 진행중인 과정이다. 나는 이곳에서 일반 노동자들의 삶의 질이 미국이나 심지어 유럽연합 대부분보다 높다고 생각한다. 정부가 인민의 뜻에 부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질문 9: 돈바스가 국교(동방 정교회)를 믿는 것과 공산주의 원칙을 어떻게 조화시키나? 냉전기 소련과 대부분의 동구권 국가에서 종교는 권장되지 않았다. 당신은 이것이 실수였다고 생각하나? 해방신학에 대한 견해는 어떤가?


답: 예수 그리스도는 최초의 공산주의자였다. 그는 자신이 가진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신전에서 채찍으로 환전상들을 쫓아내고, 자신이 믿는 것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나는 이곳에 정교회 사제인 친한 친구 3명이 있다. 그들 모두 DPR군에서 군인으로 복무했다. "참호에는 무신론자가 없다"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현대사에서 가장 위대한 반파시스트들 중 일부는 성직자다. 디트리히 본회퍼, 오스카 로메로, 베리건 형제, 그리고 하산 나스랄라.


'Essence of Time'은 소련의 반종교적 측면이 가장 큰 실수 중 하나였다고 여긴다. 나는 공산주의와 종교 사이에 모순이 없다고 본다. 비록 나는 조직된 종교를 의심스럽게 보긴 하지만, 러시아 정교회가 기독교의 주요 종파 중 가장 부패하지 않고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교회는 "국교"가 아니다. 이곳에 국교는 없다. 도네츠크에는 유대인, 개신교도, 무슬림들이 있으며 예배 장소도 있다.


질문 10: 당신은 돈바스에 오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만든 동영상에서 일자리가 부족하다고 말했다. 만약 돈바스에서 실업자가 된다면 미국과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처럼 길거리로 쫓겨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가? 돈바스에선 직업이 의무적인가? 아니면 직업을 가질때까지 국가가 돌봐주는가? 돈바스에는 노숙자가 어느정도 존재하나?


답: 돈바스 인민공화국에는 노숙자가 없다. 말그대로 없다. 모든 사람들에게 국가가 살 곳을 준다. 전기세를 내지 못해도 전기가 꺼지진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국가에 고용되어 거리를 청소하거나 공공 정원을 가꾼다. 꼭 필요한 일은 아니지만, 모든 사람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켜주고, 임금은 적지만 먹고 살기엔 충분하다. 다시 말하지만, 이곳에서 노동자들의 삶의 질은 서방의 어느 곳보다 좋고, 계속해서 개선되고 있다. 포위된 상황에서도 이렇게 하고 있다.


질문 13: 돈바스 지역의 반군의 통제가 러시아 제국주의의 증거라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반박할 것인가? 그리고 러시아에 대한 당신의 견해는 어떠한가? 러시아는 1990년 초부터 자본주의 국가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당신은 그들을 제국주의자로 보는가?


답: 다시 말하지만, 바보와 거짓말쟁이들만이 "러시아 제국주의"를 말한다. 돈바스 사람들은 외국에 의해 세워진 파시스트 정권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고 있다. 러시아는 우리를 돕는다. 러시아는 많은 결점들이 있지만 제국주의는 그 중 하나가 아니다. 소련은 그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든 곳의 삶의 질을 향상시켜줬지만 그 장소들을 식민지로 만들고 이익이나 자원을 착취하지 않았다. 오늘날 돈바스도 마찬가지로, 러시아 연방은 돈바스를 지원하는 대가로 받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준다. 러시아의 시리아 지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러시아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지만, 전반적인 삶의 질은 서방보다 낫고, 러시아에서는 삶의 질이 계속해서 향상되고 있지만 서방에서는 계속 낮아지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참고자료


https://www.rollingstone.com/politics/politics-features/russell-texas-bentley-putin-propaganda-ukraine-interview-1315433/ 롤링스톤 기사


https://www.newsweek.com/russell-texas-bentley-interview-pro-russia-donbas-ukraine-1684450 뉴스위크 기사


https://sputniknews.com/20220401/nazism-is-disease-texan-came-to-donbass-to-protect-people--tell-the-truth-about-8-year-long-war-1094369347.html 스푸트니크 기사


https://mltheory.wordpress.com/2018/08/31/interview-with-russell-bentley-american-communist-in-donbass/ 인터뷰 전문


원출처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kpd&no=131032&s_type=search_subject_memo&s_keyword=%EB%8F%88%EB%B0%94%EC%8A%A4&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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