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드디어 영화 <기생충>을 보았다. 너무 많은 기대를 했던 걸까? 우리나라 영화상이라면 차라리 이해하겠지만 세계가, 그것도 저 콧대 놓은 미국의 아카데미를 굴복시켰다는 게 기분 좋으면서도 한편으론 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긴 어느 예술가가 남자의 소변기 하나 전시장에 갔다 놓고 예술 작품이라고 우기면 다들 그런가 보다 하는 세상인데 세계적인 영화제 심사위원들이 극찬해서 뽑은 상이니 거기에 굳이 뭐라 할 필요는 없다. 주는 떡인데 왜 안 받겠는가. 하지만 개인적인 느낌은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제 심사위원들이 좋다고 따라서 나도 좋다고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영화가 재미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요 근래 본 영화 중 가장 흥미로웠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난 왠지 이 영화로 봉준호 영화의 실체를 본 느낌이 들었다. 사실 그동안은 봉준호 영화를 좋아했다. 재밌지 않은가. 유머도 없으면서 대책 없이 진지한 박찬욱 영화보다 훨 났다고 생각한다. 그것에 균열을 느꼈던 건 저 유명한 <설국 열차>에서였다. 유머를 아스라이 다 걷어내고 대책 없이 진지하기만 했다. 그것을 보고 한 없이 떨떠름했던 기억이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었다. 그 후로 봉 감독의 영화를 굳이 애써 보려고 하지 않았다. 영화 마니아도 아니고 그냥 어쩌다 운이 좋아 얻어걸리면 그때 보지 뭐 했던 게 오늘날에 이르렀다.   


영화는 좀 충격적이긴 하다. 꼭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나 의문이 남기도 한다. 물론 기존의 영화가 하층민을 어떻게 보여 주었나를 생각할 때 어찌 보면 새로운 방식으로 보여준 것 같기도 하다. 영화에서 하층민의 삶은 자본주의를 비판할 때 주로 착하고, 어리숙하며, 자주 위험에 빠지는 설정으로 그려 왔다. 그럴 때 자본주의자들은 악역을 맡고, 가난한 자를 착취 당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가난한 사람은 자신이 왜 가난하게 되었는지 알지도 못한 채 노동력을 대표하는 인물로 그려지기도 한다. 물론 가난한 하층민들에게서 기생충 같은 사람이 없으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기생충이 하층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인간은 계층과 상관없이 도처에 깔렸다. 그것을 왜 하필 감독은 계층 간의 문제로 보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기생충은 선량한 사람에게 빨대 꽂은 사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영화는 없는 사람이 있는 사람에 빨대를 꽂았다는 초반 설정은 흥미롭기는 했다. 적어도 박소담이 탐스러운 복숭아를 들고 부잣집 동네 골목을 싱그럽게 걸을 때까지만 해도. 게다가 기택의 가족들은 없이 살면서 영악하고, 연교네 사람들은 자기네들 세계 안에 갇혀 다소 어리숙하고,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못 믿어하며, 자신을 떠받들어 주는 사람들을 신뢰하려고 한다. 그게 21세기 신흥 부자의 속성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누구는 영화를 통해 자본주의 현대 사회를 비판하려는 하나의 우화라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내가 볼 때 이 영화는 기생하는 인간에 대해 잘못 설정하거나 충분히 고민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기생하는 인간은 그렇게 하층민 대 상층민이란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라, 어떤 계층이던지 간에 상대를 끊임없이 갉아먹고 이용하는 인물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택네 가족의 그런 설정이 꼭 나쁜 것이라고까지는 말하지 않겠지만 마음 먹기에 따라선 결말을 그렇게 가져가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매번 봉 감독의 영화는 어떠한 결말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채 허무하게 끝난다. 그게 봉 감독 영화의 트레이드 마크 같기도 하다. 하층민의 삶을 사는 주인공이 어떻게든 괴물에게서 빠져나와 살아 보려고 허우적대지만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괴물>에서 <마더>까지) 이젠 물에 가라앉기까지 한다. 하층민에게 일체의 희망 같은 건 없다는 식이다.    


누구는 그가 소위, 있는 집 자식이라 영화를 그렇게 그리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 정확한 건 알 수는 없고, 오히려 그 반대는 아니었을까. 그게 틀리지 않다면 가난에 대한 열등감 내지는 뭔가 모를 트라우마로 계속 계층 간의 문제를 파고드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왜 가난하고, 힘없는 자에 대해 그토록이나 통렬한 것일까. 


영화에서 계층을 통렬하게 가르는 대사는 의외로 연교네 꼬마 도령의 입에서 나온다. 신분을 세탁하고 부자 집에 입성하게 된 기택네 가족. 각자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역할을 하는데 꼬마 도령의 후각은 그것을 속이지 못했다. 그들에게서 똑같은 냄새가 난다고 흘리듯 얘기를 한다. 그 대사가 제법 예리하다. 후각은 예민하지만 동시에 우매하기도 하다. 서로 다른 사람끼리는 그것을 기막히게 가려내지만 같은 사람끼리는 거의 구분하지 못한다. 또한 그것은 사회화의 산물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사람이 김치와 마늘 냄새에 둔하고, 서양 사람이 버터 냄새에 둔한 것과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후각은 인종까지도 치고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것처럼 그 부잣집 도령의 대사는 구별 짓기 좋아하는 인간의 습성을 본능에 가깝게 포착해 보여주기도 한다. 그 구별 짓기는 향수를 쳐 바른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결말은 상당히 비극적이다. 영화를 보면서 여러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구나 싶기도 하다. 부자는 가난한 자를 결코 만만히 보거나 경계를 늦추면 안 된다던가,  오히려 계층 간의 문제를 더 조장하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하다. 무엇보다 영화가 이제까지 부자가 가난한 자를 착취한 역사에 대해 그렸다면, 이 영화는 역설적이게도 가난하고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부자를 어떻게  이용하고 역습하는가를 기생충이란 이미지를 통해 보여준다. 또한 하층민끼리의 대결을 부잣집이란 그라운드에서 보여준다는 설정도 재미있긴 하다. 하지만 이미 말했다시피 통쾌한 결말 그런 건 없다. 영화가 굳이 교훈적이거나 통쾌할 필요는 없다고 해도 봉 감독의 영화가 매번 이런 식이라면 식상하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봉 감독의 영화적 디테일에 대해 찬사를 보내고, 봉테일이란 수식어를 달아주기도 하지만 앞으로 디테일은 좋은데 스토리가 약하다는 말을 피해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영화는 또 그렇다고 쳐도 역시 (다른 건 몰라도) 왜 미국이 아카데미의 영광을 이 영화에 허락했는지는 다소 의문스럽다. 이것도 오리엔탈리즘일까? 미국의 백인주의가 결코 유색인종에게 호의적일 리가 없지 않은가. 거기엔 뭔가의 숨겨진 의도가 있어 보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자기네들이 주저하는 뭔가의 주제를 대신해 줬다면? 즉 지금까지는 자본주의에 대한 이야기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있는 자를 중심으로 다루어져 왔다. 그런데 비해 가난한 자들은 지극히 소극적으로 다뤘다. 그건 당연하다. 윤리적인 문제를 피하고 싶고, 무엇보다 영화는 자본주의의 꽃이라지 않는가. 가난한 자들의 냄새나는 이야기는 별로 안 좋아할 뿐만 아니라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들에 대해 이렇게까지 까발려 주다니. 손 안 대고 코를 푼 기분은 아니었을까. 그들은 게으르고, 능력도 없으며, 얍삽하고, 우매하다는 것을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보여줬다. 심지어 그들은 연대할 줄 모르고 서로 아귀다툼을 한다. 영화는 가난한 자가 부자를 넘보면 그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와 가난한 자를 만만히 대해줬다 오히려 큰 코 다칠 수 있다는 걸 자본주의자들을 위한 교훈으로 이만한 영화가 없다고 생각한 건 아닌지.   


그걸 인종의 문제로 해석해도 별 무리는 없어 보인다. 그동안 아카데미가 자국에게만 돌아간다는 비판이 있어왔으니 생색내기에도 좋고.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이고 추측일 뿐이다. 상은 좋은 것이다. 상은 더 넓고 웅장한 영화 제작의 세계로 가는데 확실한 발판이 되어 줄 것이다. 난 그저 봉 감독이 좀 더 좋은 작품을 만들어 주길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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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4-27 17: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엔딩 부분에서 지적해 주신 대로
아카데미의 전술적 선택이 아니었을까
뭐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비난을 피하고 생존을 위한 전략이라
고나 할까요.

그나저나...
트황상 말대로 아카데미가 세계 영화
상이 아닌 자국을 위한 영화상이라는
점은 바뀌지 않죠.

stella.K 2020-04-27 18:08   좋아요 1 | URL
이 영화를 보기 전에 한쪽에선 아카데미의 그런 결정에
비난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처음엔 미국이란 다 그렇지 뭐 그랬는데
그게 이해가 가겠더라구요.
사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나라 대종상이나 청룡영화상도
우리나라 영화 일색이잖아요.
그런 영화상을 만일 일본이나 중국 또는 제3국이 가져 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화나죠.
암튼 이번에 아카데미가 통 크게 쓰긴 했어요.
작품상이나 감독상 둘 중 하나는 자국 영화로 해도
뭐라고 안 그랬을 텐데.
그 두 개 다 주고 땅을 치고 후회하진 않았는지 감히 상상이...ㅋㅋ

수이 2020-04-30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 아직도 안 본 1인...... 봐야겠다 봐야겠다 하면서도 저는 아직까지 못 봤어요. 안 본건가;; 스텔라님 리뷰 읽으니까 얼른 봐야겠다 싶어요.

stella.K 2020-04-30 19:31   좋아요 0 | URL
ㅎㅎ 수연님도 안 보셨군요.
크게 기대는 마시구요. 뒤가 약간 충격적이어요.
그것만 감안하시면 보는데 크게 무리는 없을 거예요.
이거 그래도 소위 아카데미상에 빛나는 작품인데
꼭 남 얘기하는 것 같죠?ㅋㅋ

페크pek0501 2020-05-06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영화를 상영할 때 극장에서 봤어요. 역시 봉감독이구나 싶었죠.
하지만 큰 상을 수상할 영화로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깜놀, 이었어요.

비가 오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죠. 상류층에선 어린 아들이 마당에 텐트를 치며 노는 반면,
하류층에선 변기에서 물이 넘치고 길거리에 물이 넘쳐 개고생을 하잖아요. 극명한 대비가
인상적이었어요. 한쪽에선 비가 낭만적 분위기를 풍기는데, 다른 한쪽에선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죠.
다시 한 번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스텔라 님이 쓰신 글 유익했습니다.

stella.K 2020-05-07 15:19   좋아요 0 | URL
ㅎㅎ 그러게 말이어요. 큰 상을 받을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전 트럼프 진짜 마음에 안 드는데 그가 오스카를 이 작품에 준 것에
투덜거렸잖아요. 일견 이해는 가더라구요.
트럼프로선 절대 이해 못하죠.
암튼 주는 상 일부러 거부할 필요는 없지만 의외이긴 해요.ㅋ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처음엔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내가 평소 그의 영화를 좋아해 볼 마음을 먹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영화를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기에 보려고 했던 거다. 그런데 웬걸 그의 영화가 아니었다. 아마도 감독의 이름과 영화 제목이 어딘가 모르게 닮았다고 생각해 착각을 불러일으켰나 보다. 그렇게 멋모르고 보기 시작한 영화가 완전 빠져들고 말았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토니 타키타니. 하지만 그의 그림을 보는 사람마다 그람은 잘 그리지만 영혼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을 듣는다. 그것을 반증이라도 하듯 성인이 되어 어느 여인의 가슴을 그리는데 정교하지만 느낌이 없다. 그냥 인형의 가슴을 그리는 것만 같다. 그런 것을 보면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아버지는 악단의 연주자로 그의 곁에 있지 않았던 이유 때문은 아니었을까. 고독은 그의 친구다. 늘 조용하고 표정 없는 얼굴이다. 결국 그는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고 우연찮게 한 여인을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까지 하게 된다. 고독이 그의 친구였기 때문에 이런 것은 그의 생애 없을 줄 알았다. 그는 너무 많이 외로웠기 때문에 이젠 아내가 없으면 불안하다.


아내는 너무 사랑스럽다. 하지만 사랑스럽다는 건 사랑하기에 완벽하다는 것이 아니다. 아내에게 한 가지 흠이 있었으니 그건 옷을 사랑해도 너무 사랑하는 쇼퍼홀릭이라는 것. 화구 외에는 살 것이 없는 토니와 옷이 자신의 빈 영혼을 채워준다고 믿는 아내 에이코와의 결혼은 처음엔 완벽해 보인다. 그러나 그녀가 사는 옷과 신발은 집에 그득하다 못해 포화상태다. 결국 그는 가볍게 아내에게 옷 사는 것을 자제해 줄 것을 부탁하고, 아내는 노력해 보겠다고 답한다. 그러나 아내는 남편의 말에 허물어지고 극단적 선택인지 아니면 우발적 사고인지도 모를 사고로 죽고 만다.


        

다시 홀로 남게 된 토니는 아내의 유품을 정리하며 그 흔적을 지워야 하지만 차마 그럴 용기가 나지 않는다. 결국 그는 아내를 처음 만났던 방법 그대로 자신의 일을 도와줄 비서를 구하는데, 아내와 똑같은 사이즈와 발 크기를 가진 여자를 구한다. 그는 새로 온 비서에게 유니폼 삼아 아내의 옷을 입고 일해 주길 바란다. 그것을 통해 아내를 잃어버린 자신의 마음을 위로받고 싶은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 정말 빠져들게 만든다. 무엇보다 미장센이 갑이다. 영화는 처음 시작부터 어떤 공간을 보여주기보단 큰 창을 자주 보여준다. 어린 토니의 집 주방 창문, 성인이 돼서 그가 일하는 사무실 창문, 결혼한 후 신혼집 주방, 침실도 온통 큰 창문이 보인다. 시점은 (거의 대부분)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듯한 구도다. 관객의 관음증을 최대한 만족시키겠다는 전략인 걸까. 그게 또 호퍼의 도회적이면서도 쓸쓸한 이면을 보여주는 그림을 연상케도 한다. 입체적인 공간감을 일부러 배제하고 회화적 느낌을 극대화 시켰다. 또한 주요 등장인물이 등장할 때는 멀리서 슬로모션으로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와 등장한다. 그리고 간간히 보여주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숲. 일단 그런 것만 유심히 봐도 감독이 뛰어난 미술적 감각이 느껴진다. 


일반적으로 영화엔 가급적 내레이션을 안 쓰는 것이 좋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는데, 이 영화는 굳이 그걸 지킬 생각이 없어 보인다. 내레이션은 보통 등장인물의 생각이나 감정을 설명할 때 또는 낯설게 보기를 유도할 때 사용되겠지만, 이 영화는 연극에서의 방백처럼 등장인물이 직접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말하기도 한다.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쇼핑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아내가 토니의 말 한마디에 허물어지는 것을 보면서, 또 그런 아내를 사랑하는 토니를 보면서 우리가 사랑하는 건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 보게 된다. 우린 어쩌면 그 사람의 영혼을 사랑할 줄 모르고 그 사람의 옷이라고 하는 빈껍데기를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 죽어야 비로소 부재에서 오는 고독과 공허를 통해 그 사람의 영혼을 깨닫게 되는 인간의 비극성. 무엇보다 토니는 아내와 같은 사이즈의 여인을 구해 옷을 입게 하므로 위로를 넘어 광적으로 변해 가려고 하는 자신을 자각한다. 그런데 비해 졸지에 고급스러운 옷과 신발을 입게 된 토니의 새로운 비서는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왜 울었을까? 뭔가 압도된 듯하다. 이 화려하고 멋진 옷을 두고 간 나오코는 어떤 여자였을까? 감히 상상할 수가 없다. 그런 것처럼 감독은 현대인의 물질만능주의를 꼬집으려 했던 건 아닌지. 또 그것은 영화 초반 영혼이 느껴지지 않는 토니의 여자의 가슴을 그린 것과 뭔가 연관성이 있어 보이기도 하다.


그런데 묘하게도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누군가를 떠올리게도 한다. 그렇다.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다. 하루키 마니아라면 영화 제목에서부터 알아봤을 것이다. 하지만 난 하루키를 딱히 싫어하는 것도 아주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영화를 보기 시작했을 때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겠지. 개인적으로 하루키 원작의 영화를 본 건 이번이 두 번째다. 언젠가 <상실의 시대>을 본 적이 있는데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봐서 그런지 꽤 괜찮았다. 그땐 꽤 괜찮다는 표현을 썼지만 이 작품은 가히 좀 놀랍다 싶다. 보통은 원작을 영화화하면 잘해야 본전이란 선입견이 있기도 하지만, 내가 볼 때 이 영화는 하루키의 원작을 200% 끌어올린 작품은 아닐까 한다.


누구는 하루키는 장편에 강한 작가라고 하는데 그것에 반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나 같은 경우는 오히려 단편에서 감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치즈 케이크 모양을 한 나의 가난'이란 단편은 정말 도시에서의 가난을 위트 있게 그린 작품으로 그 이미지가 잊히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루키의 단편집 <렉싱턴의 유령> 중에 나오는 이 작품은 어디서 영감을 얻었을까? 소소하게도 한 장의 티셔츠라고 한다. 마우리 섬에서 '토니'라는 서양식 이름에 '타키타니'라는 성이 붙은 기묘한 이름이 쓰인 1달러짜리 티셔츠를 구입한 하루키는 그 셔츠를 입을 때마다 토니 타키타니라는 인물이 자신에게 뭔가를 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이에 착안해서 이 이야기를 완성했다고 한다.  


감독은 또 그 작품을 보면서 머릿속에서 하나하나의 영상적 이미지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게다가 전편에 흐르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은 뭔가 고독하면서도 불안해하는 현대인의 심리를 잘도 표현해 주었다. 이쯤 되면 무라카미 하루키는 모든 예술인들의 뮤즈는 아닐까? 이제 마니아뿐만 아니라 예술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필히 하루키를 알아야 하는 하나의 문예 사조를 이룬 것만 같다. 하긴, 그는 언젠가 오리지널리티를 얘기했었다.    


사람들은 인간은 어차피 고독한 존재니 고독을 벗 삼으라고 한다. 고독은 스스로 있는 존재임을 확증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의 고독은 늘 누군가를 그리워하게 만들고 누군가를 향하게 되어 있다. 고독한가? 당신의 고독 끝에 누가 있는지를 직시해 보라. 그렇다면 그가 자신이 사랑해야 할 존재인지도 모른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랬다고 그 영혼은 바스러지기 쉬운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아무리 사랑해도 꽉 끌어안으면 쉽게 깨지는 크리스털 술잔 같은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하기보다 차라리 고독하기를 선택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또 어쩌면 하루키를 읽으며 자신의 고독을 위로하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문득 오랜만에 하루키의 소설이 읽고 싶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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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28 14: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20-02-28 18:11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같이 있으면 외롭지 않아 좋지만 어딘가 모르게 불편하기도 하죠.
그게 인간인 걸 어떻게 하겠습니까?^^

페크pek0501 2020-02-29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키의 작품을 상실의 시대를 비롯해 네다섯 권 읽었는데 썩 좋다할 것은 없었는데
신간이 나오면 또 사고 싶은 묘한 작가예요. 가끔 반짝이는 문장을 쓸 줄 아는 작가라서
그런지... 작가의 명성도 한몫 하겠지요.

stella.K 2020-02-29 15:15   좋아요 0 | URL
저랑 같으시네요. 이 작품 때문에 <렉싱턴의 유령>을 보고 싶기도 한데
영화가 훨씬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그럼 굳이 읽을 필요가 없는 것 같은데 읽고 싶단 말이죠.ㅋ
 

요즘 영화를 드문드문 보고 있어 별 기대 없이 봤는데 의외로 몰입도가 좋다.

나 역시 IMF를 거쳐 왔지만 그것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것을 영화는 상당히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다. 마치 다큐멘터리 극영화를 보는 듯하다. 영화는 그 시절 매스컴은 IMF를 어떻게 보도하고 있는지 편집해 보여주기도 하는데, 문득 그것을 보도한 당시의 공중파 앵커와 아나운서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궁금하다.


                            

 

영화는 국가 부도의 날 네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함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한시현(김혜수 분)을 중심으로 어떻게든 국가의 부도를 막아 보려고 노력하는 부류다. 또 하나는 부도가 날 것을 예상하고 한몫 단단히 챙기는 즉 위기는 기회라는 걸 몸소 보여주는 윤정학(유아인 분). 그런 위기의 순간에도 어떻게든 성실하게 일하면 잘 살 수 있을 거란 막연한 희망을 품고 살다 희망에 배신당하는 갑수(허준호 분). 그런 국가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관료적인 태도를 버리지 않는 재정국 차관(조우진 분)과 그에 편승하는 일파들. 그들은 그 시대가 그랬던 것만큼 한시현을 향해서도 여성 비하적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갑수를 보면서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이 났다. 아버지는 IMF가 있기 훨씬 오래전에 돌아가셨지만 내가 중학교 땐가, 전날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시고 들어오셔서 다음 날 술병이 나서 출근을 못하셨다. 뭔가 일이 일어나도 크게 일어난 모양인데 어리다는 핑계로 차마 여쭤 보지 못했다. 하지만 가장의 무게, 조그만 사업체지만 대표로서의 무게가 얼마만 한 건지 조금이나마 알 것도 같았다. 갑수를 보면서 IMF 그 시절에도 살아계셨다면 똑같이 힘들어하셨겠지 짠한 마음이 들었다. 착하고 성실함만으로는 살 수 없는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게 또한 서글펐다. 국민의 대다수가 갑수 같은 삶을 살지 않을까?         


하지만 반대로 갑수 같은 부류가 잘 살게 되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들은 원래 자기네들이 목표한 것이 그것인 양 산다. 즉 남한테 피해 안 주고, 가장으로 가정을 건사 잘하고, 자녀들이 성장할 때까지 아프지 않고 잘 살아주는 것. 경제에 관해선 그다지 아는 바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한시현이 보여주는 캐릭터도 나쁘지 않다. 어떻게든 최악의 사태는 막으려고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정의의 사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번번이 관료적인 재정국 차관과 그 일파들과 갈등을 겪는다. 하지만 똑똑하고 지혜로운 부류는 단연 아무도 믿지 않겠다던 윤정학이다. 경제라는 것, 자본이라는 건 언제나 그냥 있어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든 여러 모양으로 그 모습을 바꾸는 도깨비 같은 것이다. 그것의 흐름을 알고 그것 위에 군림했을 때 엄청난 국가적 재앙에서 살아남았다.


국가 부도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IMF 구제 금융은 신청하지 않을 거라고 언론을 하나 같이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 같이 실천되었다. 언론과 정치를 믿으면 안 된다. 그래 놓고 국민들의 금 모으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국민의 저력이라며 한껏 띄워 주기도 한다. 물론 그건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겠지만, 왜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나라가 어려울 때 국민과 백성은 호구가 되어야 하는가. 뭐 그것까지도 좋다고 치자. 정치지도자들 눈에 우리는 개 돼지로 비치기까지 하지 않는가? 솔직히 영화를 보면서 좀 화가 났다. 영화는 영화로 보는 게 좋은데 그때를 너무 리얼하게 다루고 있으니 그냥은 봐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영화가 보여주는 대로 관료주의자들에 대하여 분노만 하면 안 된다. 


나아가 어떻게 애국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그렇게 나라가 어려울 때 금이나 털컥 내주는 것만으로 애국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의 애국은 좀 더 공동체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관객들은 영화가 보여주는 네 부류의 사람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다수가 윤정학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물론 나쁘지 않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윤정학 같은 사람이 된다면 관료주의자들만큼이나 위험하다. 이 세상엔 갑수 같은 사람이 훨씬 많고, 갑수의 삶이 꼭 나쁘다고 할 수도 없다. 근면 성실하게 사는 게 뭐가 잘못인가. 하지만 그들 역시도 등 따습고 배 부르면 나태해질지 모른다. 그리고 관료주의자들은 비로 이런 점을 들어 개 돼지라고 표현했던 것이 아닌가. 그러나 저 네 부류의 사람은 역사적으로 그 모습을 달리하면서 항상 있어왔다. 그렇다면 그들은 상호 작용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사실 관료들도 정신만 차리면 나라에 큰 일을 할 사람들 아닌가? 


분명한 건 국가 운영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우린 분명 지나간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보면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배우들의 연기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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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보기를 좋아하지만 가끔 우연히 본 영화가 마음을 사로잡을 때가 있다. 이 영화가 그렇다. 한국전쟁이 있던 그해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을 재구성한 영화다. 그동안 들어보긴 했지만 구체적으로는 몰랐다. 영화를 보면서 부끄러웠다. 우리나라에 이런 역사적 사건을 왜 난 여태 몰랐을까.


영화는 러닝타임이 비교적 짧다. 한 시간 반이 채 안 되는데 구성도 좋고 잘 만들었는데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난 6.25 세대가 아니기 때문에 그때를 생각하면 모든 사람들이 일시에 고향을 버리고 다 피난했을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특히 남쪽 지방일수록 피난의 필요성은 별로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설혹 피난을 염두했더라도 그전에 전쟁이 빨리 끝나 주길 바랐을 것이다. 또 그런 만큼 피난엔 시간차가 있었다.


전쟁이 나던 그해 7월만 해도 충청도의 노근리 마을은 정말 전쟁이 일어났나 싶게 평화로웠다. 어느 날 마을에 인민군이 쳐들어 올 것이니 주민들은 빨리 피난을 하라는 통고를 받는다. 긴가민가하는 마음으로 마을 사람들은 피난길에 오르지만 피난을 도와주겠다던 미군은 노근리 사람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하고 마을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죽음을 당한다는 내용이다. 영화는 그때의 마을 사람들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묘사한다.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순박했는지, 얼마나 평화로웠는지, 정말 피난을 가야 하는지 가지 말아야 하는지 갈등하다 결국 다수의 뜻에 따라 너도 나도 피난을 떠나는 형국을 실감 나게 그린다. 언제나 그렇듯 그 가운데 반드시 대열에서 이탈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과연 그 가족들은 학살을 피해 살아남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대열에서 이탈했다고 해도 그들에게도 복불복의 상황은 마찬가지 아닐까.


그것을 보니 문득 영화 <타이타닉>이 생각나기도 했다. 침몰하는 배 속에서 우왕좌왕 살려고 바둥거리는 가운데서도 처절하게 살아남으려고 하느니 우아하게 죽겠다고 선실 자신의 방에서 평안히 두 손을 맞잡은 노부부 말이다. 물론 어차피 죽음을 맞이하지만 이렇게 사람은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을 유지하는 마음이 있다는 게 새삼 놀랍다. 그런 것처럼 그 피난 대열에서 이탈한 그 가족도 그런 마음 아니었을까? 살면 다행이고 이탈한 대가로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러라지 하는 마음. 그 장면은 아주 짧게 보여주고 지나가지만 저런 순간에 나라면 어떻게 할까를 생각해 본다. 그때그때 달라요가 되지 않을까? 순간 살고자 원하면 나도 이리저리 뛰고 구를 테고, 사람이 살고 주는 건 전적인 하늘의 뜻이라면 끝까지 우아하려 하지 않을까.   


영화가 인상적인 건 양민학살도 학살이지만 사람들이 얼마나 순박한지, 이들의 일상이 얼마나 평온했는지를 충청도 특유의 사투리를 듣는 청각적 효과와 함께 어느 국민(초등) 학교 어린이 합창에서 극대화시켰다는 것이다. 또 그와 대비되게 이들이 얼마나 살고자 했는지는 철길에서의 아수라장과 굴다리에서 스스로 미쳐가는 상황을 보여줬다. 그리고 그해 가을 그렇게 한바탕 폭풍을 치르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었냐 싶게 하나둘씩 마을로 돌아오지만 역시 옛날의 그 풍경은 아니라는 것.


(내가 영화를 잘못 봐서일까) 영화는 이 양민학살이 왜 일어났는지가 명확하지 않다. 그래서 좀 얼떨떨했는데 찾아봤더니 미군이 북괴군이 잠입한 줄 오인하고 학살했다는 것이란다. 그럴 수도 있을까 싶다가도 좀 어처구니가 없다. 어떻게 양민을 북괴군으로 오인할 수 있단 말인가? 미군이 북괴군인지 양민인지 식별도 없이 작전을 펼쳤단 말인가? 이 영화가 아쉬운 건 마을 사람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것에서 끝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영화는 나름 노근리 사건에 관심 끌기에 성공한 듯도 하지만, 그 후 이 사건을 두고 어떤 진상 규명과 재판 과정이 있었는지 자막으로만 간단히 보여주고 말아 궁금하다. 예상하긴 했지만 미군은 그 사건에 대해 함구했고 지금도 해결이 안 되고 있다고. 과연 아직도 역사 속에 묻힌 해결되지 않은 과거사가 얼마나 많은 건지 알 수가 없다.   


영화는 특별히 누가 주연이랄 것도 없이 출연 배우들 모두가 주연이라면 주연이고 조연이라면 다 조연이다. 그 밖에도 알만한 배우들이 카메오로 출연했다. 특별히 박광정 배우가 눈에 띄어 좀 놀랐다. 이미 고인이 된 줄로 아는데 왜 여기에 있는 거지 했다. 그만큼 필름 상태가 좋았다. 알고 봤더니 상영 연도가 2010년이다. 그가 죽은 건 2009년이고. 그러니까 이 영화는 그의 마지막 유작이었다. 아까운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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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19-09-30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근리, 아주 오래 전 진보 언론들이 집중 조명했던 주제지요. 그게 영화로 나왔군요. 가슴아픈 비극이긴 한데, 그 어느 매체에서도 왜 그런 비극이 일어났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던 것 같네요. 무슨 이유를 대긴 댔지만 납득하지 못헀던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 인종차별이 없었다면,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stella.K 2019-10-01 20:25   좋아요 0 | URL
아, 그런가요? 그래도 오래 전 방송에서 했던 것 같기도 한데
그때 관심있게 보지 못한 게 후회되더군요.
아시겠지만 우리나라 근현대사가 암울한 게 많잖아요. 보면 막 화나고 그래서...
근데 제가 아주 잘못 보지는 않았네요.
영화를 보면서 내내 미군은 우리나라를 도와주러 왔다면서
왜 저렇게 무차별로 죽였을까 그랬거든요.
이 페이퍼에 넣진 못했지만 노근리를 다룬 책이 몇권있긴 하더군요.

그나저나 지난 주일 tv에서 뵙고 반가웠습니다.ㅎㅎ

2019-10-02 0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프리쿠키 2019-10-04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리카 돼지열병의 바이러스 매개체를 박멸하기 위해 그 지역의 돼지 전체를 도살하듯이, 암의 환부를 정상세포까지 폭넓게 잘라내듯이..
그 당시엔 누구나 노근리 주민이 될수 있었지 않았을까요.
반대로 압록강까지 연합군이 밀고 올라갔다가 38선까지 후퇴했을 때 북한지역에서도 엄청난 양민학살이 있었다합니다. 슬픈 일이네요.

stella.K 2019-10-04 16:10   좋아요 1 | URL
헉,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전혀 몰랐네요.
정말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모르는 한국전쟁이 얼마나 많을까요?
우린 또 얼마나 피상적으로 한국전쟁을 알고 있으며...ㅠ
 

지금까지 영화 <만추>는 세 번 만들어졌다. 

최초의 <만추>는 1966년 이만희 감독이 고 강신성일과 문정숙을 주인공으로 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필름이 유실되어 볼 수가 없다. 그보다 더 오랜 필름도 보존되어 있는데 왜 이 작품은 유실이 되었던 걸까? 복구는 불가능한 걸까? 그나마 1981년도에 김수용 감독이 김혜자와 정동환을 주인공으로 해서 만든 두 번째 필름은 아직 건제하다.


        

                      


현빈과 탕웨이가 나온 <만추>를 언젠가 본 적이 있다. 감독이 워낙에 영화를 잘 만들기로 유명하기도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현빈과 탕웨이 그리고 미국의 어느 안개 낀 도시를 보는 것만으로도 눈 호강하기엔 충분한 작품이다. 더구나 멜로 아닌가? 이번에 김수용 감독의 영화를 보면서 다시 한번 보았더니 비교해서 보는 재미가 꽤 남달랐다. 

  

이야기의 기본 틀은 같다. 우발적으로 남편을 살해한 여자가 어머니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시한부 석방으로 풀려난다. 우연히 기차 또는 버스 정류장에서 낯선 남자를 만나 사랑을 하게 되고 다시 교도소로 돌아간다. 돌아가면서 2년 후 석방되면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한다는 것이 기본 틀이다. 하지만 영화로서 보여주는 방식은 사뭇 다르다. 보여주는 방식이 얼마나 다르냐에 따라 감독의 역량도 다를 것이다. 또한 그때마다 감독은 선배 감독에게 경의를 표했을 것이다.


왜 감독들은 세대를 달리하면서 <만추>를 만들까? 가끔 그런 영화가 있다. 유명한 건 아닌데 오래도록 기억에 남고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는 보석 같은 영화. 이를테면 <길>이나 <파이란> 같은 영화 말이다. 그런 것처럼 감독들 사이에서도 나라면 이 영화를 어떻게 만들까 오감을 간질이는 영화가 있을 것이다. 그게 김수용, 김태용 감독에겐 이 영화였는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영화감독이라면 생애 한 번쯤은 정말 괜찮은 멜로 영화 만드는 게 로망 아닐까? 그런데 <만추>만 한 작품이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해 아래 새것은 없으니.  


분명 김수용 감독의 작품도 당시로선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김태용 버전을 보니 확연한 차이가 느껴진다. 마치 똑같은 작품을 소설과 영화로 보는 것만큼이나 다르다. 김수용 버전은 인물 보단 이야기 구조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이야기를 규모 있게 전달해 줄 것인가에 초점을 맞췄다면, 김태용은 캐릭터에 더 많은 초점을 맞춘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래서 각각의 캐릭터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의 최대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앞의 작품은 다소 평면적인 느낌인데 반해, 김태용 버전은 상당히 입체적이란 느낌이 든다. 보여줄 것도 많고.    

                                         

                                   

 

사실 지난 세월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재를 사는 사람이 옛날 영화를 보기란 쉽지 않다. 그때 당시에는 꽤 세련된 연출을 구가한다고 해도 지나면 빛을 바라고 어딘지 모르게 촌스럽고 어색하다. 그건 요즘의 세련된 영화도 같은 운명을 지니게 될 것이다. 앞으로 10년만 지나도 어떤 평가를 받을지 알 수가 없다. 좀 미안한 말인데, 김수용 감독이 영화를 만들었을 그러니까 30년 전만 해도 영화에서 시나리오의 중요도가 얼마였을까 의문 스스러워졌다. (이미 했던 말이긴 한데) 영화판에선, 잘 쓴 시나리오를 연출에서 말아먹는 일은 있어도, 못 쓴 시나리오를 연출에서 살려내는 법은 없다는 것이 정설로 되었는데 왠지 이 말이 그 당시엔 별로 신빙성이 없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가 감독을 위한 예술이었던 만큼 제왕처럼 군림하고 시나리오가 연출보다 앞서는 것을 경계했던 것은 아닐까. 그랬다면 작품 자체로선 불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옛날 영화의 평점이 높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왜 관객들은 제작자의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낮은 평가를 하는 것일까? 생각해 보면 그건 확실히 퀄리티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퀄리티를 높이기 위해 투자를 해야겠지만 투자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는 것이다.


현빈과 탕웨이가 나오는 <만추>는 확실히 시야가 깊고 넓다. 한마디로 <만추>의 글로벌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중 배우가 나온다는 것부터도 그렇고, 장소 역시 한국을 넘어 미국이란 나라다. 시나리오를 누가 썼는지 모르겠지만 상당히 잘 썼다. 언어의 유희를 극대화했다. 솔직히 어떻게 보면 영화는 여자 주인공 애나가 복역수이고 72시간 후면 교도소로 돌아간다는 사실 외에 진실은 하나도 없어 보인다. 영화 속 거짓말은 의도되거나 일부러 가공된 것이기도 하다. 더구나 남녀 주인공은 영어란 공통어가 아니면 상대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언어는 그들이 서로 사랑하는데 방해되고 오해하게 만드는 것 같은데 오히려 사랑을 완성시켜 준다. 물론 영화니까 가능하겠지.


또한 등장인물이 구사하는 대사를 보면 뭔가 불온하고 불안해 보이기도 한다. 사실 요즘 드라마 작가들 어떻게 하면 시청자의 귀에 걸릴까 고민을 참 많이 하는데, 사각의 브라운관을 앞에 놓고 그렇게 귀에 걸리는 대사를 듣는 맛이 없다면 우리가 왜 드라마를 보고 영화를 보겠는가. 하지만 실제 우리의 삶은 그렇지 않다. 뭐하나 딱 떨어지는 것이 없고 이건가 싶으면 저것 같고, 저것 같으면 이것 같다. 내가 내뱉고도 이것이 진실을 말하는지 거짓을 말하는지 알 수가 없다. 바로 그런 불완전성을 잘도 포착해 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시나리오가 완벽한 것은 아니다. 어느 부분은 친절해야 할 것 같은데 그냥 넘어가 나중에 뒤통수를 맞는 기분이었다. 예를 들면, 남자 주인공 훈이 애나와 헤어지는 마지막 순간에 내연녀를 살해한 피의자라는 것이 드러나는데 영화를 되돌려 봐도 훈이가 내연녀를 살해했다는 단서가 보이지 않는다. 나중에 내연녀의 남편이 내 아내를 죽인 피의자 아니냐고 하는데 그렇게 우겨서 될 일은 아닌데 좀 불친절해 보인다.

 

사실 <만추>는 김지헌 작가가 1966년에 쓴 작품이다. 그는 평안남도 출신으로 해방이전에 서울로 이주해 경동중학교를 다니면서  영화 예술에 눈을 떴다고 한다. 그는 프랑스 시나리오들을 탐독하며 작가의 꿈을 키웠다고 하는데 좀 놀랐다. 솔직히 우리나라 작가들은 소설 아니면 시를 탐독하면서 작가의 꿈을 키우지 않는가? 그런데 시나리오를 읽으며 꿈을 키웠다니. 게다가 얼핏 그 시기가 3,40년대였을 텐데 그 시절에 읽을 시나리오가 있었을까? 우리나라 영화판은 얼마나 척박했을까? 꿈꾸기 어려운 시대에도 꿈을 꿨다. 그런 걸 보면 이제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다며 우린 너무나 쉽게 꿈을 접는 것은 아닐까 반성해 본다. 

 

 더구나 그의 시작은 1956년 미당 서정주의 격찬을 받으며 시로 등단을 했다고 한다. 195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에 <종점에 피는 미소>가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가 생활을 했다고 한다. 시작이 이러다 보니 유럽 예술영화의 시적 리얼리즘을 국내에 토착화시키면서 한국영화의 수준을 한 단계 고양시켰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각 시대 감독들마다 작업에 탐낼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만추>가 지금까지 세 명의 감독에 의해 세 번에 걸쳐 만들어졌다. 다음은 또 어느 감독이 똑같은 제목의 작품을 만들겠다고 나올지 모르겠다. 그런 감독이 있다면 미리 박수로 응원을 보내주고 싶다. 나는 기꺼이 봐줄 마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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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9-13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추>현빈과 탕웨이 영화 봤는데 기억이 가물가물~명절 입니다 건강하게 보내소서!

stella.K 2019-09-14 13:27   좋아요 1 | URL
ㅎㅎ 저도 그랬어요. 그런데 이번에 보니까 좋았고
김태용 감독이 확실히 영화를 잘 만드는구나 싶더군요.
고맙습니다. 카알님도 남은 연휴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blanca 2019-09-14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만추가 이렇게 세 번이나 만들어졌는지 몰랐어요. 재미있게 잘 읽고 갑니다.

stella.K 2019-09-14 13:28   좋아요 0 | URL
이만희 감독이 만든 영화를 볼 수 없어 아쉽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