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순간들 - 박금산 소설집
박금산 지음 / 비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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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보면 소설 작법에 관한 책인가 싶기도 하다. 또 어찌 보면 '영감이 오는 순간'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반대로 수도 없이 발단만을 쓰고 완성하지 못한 어느 고독한 소설가 지망생의 습작 원고가 생각나기도 한다. 그런데 자세히 봤더니 소설집이다. 아니 그보단 둘 다를 섞어놓은 책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또는 소설 작법을 소설로 보여주는 책이라고 해야 할 것도 같고.


저자가 좀 낯설긴 한데 모 대학 문창과 교수고 그동안 몇 권의 책도 냈다. 이 책은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것은 소설의 구성 요소를 따르기 때문이다. 즉 발단-전개-절정(또는 갈등)- 결말 각 단계가 의미하는 바와 방법을 설명하고 또 그에 맞는 몇 편의 플래시 픽션(아주 짧은 소설)을 보여주고 있다.


보통의 경우 소설 작법 따로 작품집 따로 내지 않는가. 그런데 이 책은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았다. 저자의 이런 시도가 다소 엉뚱하기도 하고, 때론 야심 차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런 시도 마음에 든다. 일단 신선하지 않은가. 작품도 플래시 픽션이라고 하지만 저자 특유의 예리한 필치가 느껴져 나름 만족하며 읽었다.


특히 소설의 각 단계를 설명한 글이 심플하면서도 뇌리에 박힌다. 이렇게 깔끔하게 썼다면 굳이 두꺼운 소설작법서를 읽을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그건 그 나름의 매력과 장점이 없는 건 아니다. 아니 요즘 작법서들 정말 눈 돌아가게 잘 나와있다. 하지만 그런 책만 읽으면 정작 창작을 못할 수도 있다. 물론 도움은 되겠지만 그런 책 읽었다고 글을 더 잘 쓰는 건 아니다. 모르긴 해도 저자는 작법에 관한 설명은 최소화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동기유발을 시켜 직접 써보게끔 하려고 이 책을 낸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작가는 어디까지나 작품으로 말해야지 작법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우선 저자는 소설을 본격적으로 쓰는 일에 앞서, 9회 말 투 아웃 만루 상황을 염두에 두고 쓰는 것이 좋다고 조언한다. 알겠지만 소설을 야구 경기에 빗댄 말이다. 그러고는 발단을 서핑에 비유한다. 멋진 파도가 왔고, 그것을 잡기 위해 팔을 젓기 시작하는 것 그것이 발단이다. 지금까지 발단을 이렇게 말하는 걸 들어보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 말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평생 서핑을 타지 못했어도 이해가 된다. 훅하고 바닷바람을 맞는 것 같았다.


전개는 어떤가. 서핑은 네 단계로 이루어졌는데, 팔을 젓기, 일어서기, 파도타기, 파도에서 내려오기가 그것이다. 그중 전개는 서핑보드 위에 올라서는 과정이란다.


그렇다면 절정은 어떠한가? 짐작했겠지만 파도타기다. 하지만 중요한 건 화려하게 파도를 잡아야지 그것에 먹히면 안 된다. 소설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절정은 소설의 전부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며 좋은 절정은 다른 클라이맥스를 떠올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그것이 전부인 건 맞지만 절벽이 되어서는 곤란하다고 했다. 즉 클라이맥스를 만들겠다고 등장인물을 절벽 끝으로 몰아가는 건 좋지만 거기서 추락시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서핑으로 말하면 파도에서 나오는 방법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이다. 세상에 어떤 작가가 절정에서 등장인물 그것도 주인공을 죽인단 말인가. 그런 만큼 작가는 절정에서 결말로 가는 길을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한다.


저자는 결말은 외길이어야 한다고 했다. 아까 말하지 않았는가, 소설은 야구의 9회 말 투 아웃 만루 상황과 같다고. 그 말은 소설을 쓸 때 결말부터 생각하고 쓰라는 말이다. 이걸 또 서핑에 비유하자면, 서핑 고수는 파도에서 빠져나오면서 자기가 탄 파도를 바라보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많은 작가들이 결말부터 쓰거나 아무튼 결말을 설정하고 쓰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고 보니 글쓰기의 영원한 명제 '설명하지 말고 보여주라'는 말을 이처럼 잘 실천한 글이 또 있을까 싶다. 더구나 소설 작법을 말이다. 이만하면 더 이상 소설 작법에 관한 책은 그만 읽어도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아니나 다를까 저자는 더 이상 설명을 하지 않고 작품에서 각 단계별로 그것을 증명해 보인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그런 시도는 나쁘지 않은데 난 잘 모르겠다. 각 단계별로 나오는 짧은 소설이 각자의 포지션을 의미하고 있는지. 워낙에 짧은 소설이고 각 소설은 그 자체만으로도 완결미를 보여주고 있는데 무슨... 차라리 그럴 것 같으면 작품 하나 가지고 각을 뜨듯 보여주는 게 낫지 않을까. 마침 초단편을 쓰는 어느 작가가 그에 대한 작법을 소개한 책도 나와있는 상황이다.


그래도 책의 '소설을 잘 쓰려면'이란 제목의 소설은 위의 내용과 계속 이어 어질만해서 언급해 본다. 거듭 말하지만 소설은 야구의 9회 말 투 아웃 만루다. 그리고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완성한 소설을 누군가에게 보여줄 때 그게 누구든 간에 뭐에 관한 소설이라고 간단 명료하게 알려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궁금증을 유발해야 한다. 이를테면 '소설을 잘 쓰려면'이란 소설의 내용은 그것을 잘 하지 못해 버벅거리는 상황에서 화자의 교수에게서 도움을 받는 과정을 담담하게 보여주는 얘기다.


이때 교수는 더불어 짧게 쓸 것을 강조하기도 한다. 얼마나 중요한지 파스칼의 말을 인용하기까지 하는데 그는 어느 책에선가 '시간이 없어서 이렇게 길게 쓸 수밖에 없었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구한다'라고 썼다고 한다. 그러면서 줄여 말할 수 있어야 진정한 소설이고, 그 줄여 말한 게 재미있어야 영원한 소설이라며 그걸 화자인 제자에게 등단선물처럼 남겨준다. 이 부분을 읽는데 저자의 마음이 느껴졌다. 아직도 제대로 된 글을 쓰지 못하고 하얀 화면에 껌뻑이는 커서만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을 소설가 지망생을 시크하게 위로하는 것만 같다.


그렇지 않아도 저자가 서문에서 이 책을 내는 의도를 무려 8 가지로 밝혔는데 좀 울컥했다. (지면상 다 밝힐 수는 없고 책에서 직접 확인하길) 저자가 정말 소설에 진심이구나 싶었다. 실제로도 작품을 읽어보면 정말 열심히 꾹꾹 눌러가며 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원고를 들고 편집자를 찾아갔을 때 편집자가 그런 말을 하더란다. 백일장에서 1등 먹은 소설 같다고. 한마디로 잘 쓴 작품이라는 소리다. 이런 말을 읽고 질투든 자존심에 스크래치든 궁금증이든 뭐든 느끼는 사람이 글을 쓸 것이다. (저자가 밝히진 않았지만 이게 제9의 의도는 아닐까. 아님 말고.)


솔직히 나는 작법에 관한 책을 내는 작가들은 특별할 수는 있어도 존경하지는 않는다. 또한 한때 열심히 작품을 썼으나 이러저러한 문학상 심사위원으로나 후학양성으로 자리를 옮겨 앉거나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작가에 대해서도 아쉬움이 있다. 난 사람들이 읽든 안 읽든 여전히 글을 쓰는 작가를 존경한다. 궁극적으로 그런 작가가 있기 때문에 그의 뒤를 보고 쫓아가는 후배 작가가 있는 거지 그런 '빨간펜 선생님' 때문에 있는 건 아닐 것이다. 물론 그런 선생이 자신의 작품도 꾸준히 내고 있다면 더 이상 말할 것도 없고. 이제 소설 작법 그만 봐라. 빨간펜 선생님도 그만 만나라. 양을 이기는 질은 없다. 많이 보고, 많이 쓰는 것 그것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지금은 자신의 작품을 쓸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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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4-05-16 06: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연장전으로 이어지는 야구 경기를 소설로 비유하면, 결말이 있어도 작가가 더 쓸 내용이 남았다고 볼 수 있겠죠? 그러면 연장전 게임은 ‘연작 소설’이겠군요. ㅎㅎㅎ

stella.K 2024-05-16 10:02   좋아요 0 | URL
ㅎㅎ 그럴수도 있지. 그래서 중편 정도되는 걸 장편으로 늘리기도 하니까. 근데 저자는 결말을 알고 쓰라는 뜻인데 저자도 너와 같은 생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드네. ^^
 
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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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난 몇 년 전 동명의 작품을 영화로 봤다. 영화와 원작이 다를 수 있음에도 난 영화를 봤다는 이유만으로 원작을 볼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영화나 책이나 거기서 거기지 별 건가? 이 말은 영화가 별로였다는 말도 된다. 영화가 좋으면 책으로도 읽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와 책의 협업은 긴밀하다. 그런데 이 작품 책으로 안 읽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그래도 내가 전에 작가의 작품을 즐겨 읽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이 책은 여전히 나에게 봉인된 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작가들이 한 번쯤 가족 소설을 쓰긴 한다. 그건 또 가부장을 중심으로 한 고전적 면서도 감성에 호소하는 작품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천명관 작가 역시 이 작품을 통해 가족 소설을 썼는데 그의 주무기인 레트로한 감성과 그 특유의 익살과 입담이 잘 버무려져 역시 이번에도 실망시키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영화감독 일을 하던 인모가 영화를 실패하고 설상가상으로 아내도 자신을 떠나 꿀꿀하던 차에 자살이나 해 볼까 하다가 그것도 실패한다. 뭐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는 그때 엄마에게서 닭죽 먹으러 오라는 전화에 살 의욕은 없는데 식욕은 당겨 결국 먹다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는 말도 있으니 죽 한 그릇 먹고 죽자했다. 하지만 역시 그도 실패. 이번엔 아예 엄마 집에 눌러 살게 되면서 벌어지는 가족 이야기다.


엄마 혼자 사는 집에 잠시 얹혀사는 게 뭐 문제가 되겠는가? 잠시 창피한 일이지. 문제는 그 비슷한 시기에 형 한모와 동생 미연이도 같이 살게 되었다는 게 문제지. 심지어 형 한모가 인모보다 먼저 들어와 있기도 했다. 그야말로 오 마이 갓이다. 둘의 관계가 좋으면 또 무엇이 문제겠는가? 어렸을 때 좋던 관계도 머리 크면 견원지간이 되던데 이 형제들 딱 그짝이다.


그의 동생 미연과도 오누이 지간이지만 좋지 않은 건 마찬가지다. 더구나 비록 이혼은 했지만 미연이 중학생 딸까지 있다. 엄마까지 이들 다섯 식구의 나이를 합치면 족히 200살은 될 것이다. 그래서 제목을 그렇게 지은 걸까? 아니면 나이 들어 한 지붕에 살게 된 것을 조소하기 위함이었을까? 아무튼 제목이 그렇다.


그런데 이상한 건 엄마가 그렇게 된 걸 별로 싫어하지 않았다는 것. 아니 더 좋아하는 것 같다. 늘그막에 자식 끼고 살게 되었다고 분통을 터뜨려도 아무 소리 못하는데 오히려 환영의 의미로 한 달 내내 고기를 먹인다. (영화도 그렇지만) 이들의 고기 먹는 모습은 꽤나 이기적이다. 문득 우리 집 옛 풍경과 왠지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는 이들처럼 한 달 내내 고기만 먹지는 않지만 먹기 위한 노력은 좀 치열했다. 물론 우리 4남매를 먹여 살리느라 부모님도 어지간히 힘드셨을게다. 그걸 생각하면 좀 먹는 것 앞에서 겸손하고 신사적이 될 수도 있을 텐데 그게 잘 안 됐다. 무조건 먼저 먹고, 빼앗아 먹고, 훔쳐 먹는 게 집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러다 엄마한테 뒈지게 혼나기도 했지만 먹는 거 앞에 본능적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어쩌다 먹을 것을 여축해 놓고 나중에 먹는다? 그런 감짝한 생각은 있을 수도 해서도 안 된다.


그런데 부모님은 이상했다. 딥다 해 먹일 때는 언제고 화가 나면 늬들은 쳐 먹는 것만 안다고 역정을 냈다. 어쩌라고? 그럼 먹을 걸 해 주질 말든가. 그래놓고 이런 우리들을 남에게 말할 땐 자라느라 한창 먹을 때라고 호호한다. 우리 부모님의 위선도 알아줄만했다. (물론 커서 자식이나 그 비슷한 존재를 키워보니 알겠다만.)


이런 집의 특징은 오사박하고 다정한 비둘기 집 같지는 않다. 그건 또 어찌 보면 당연하다. 정도의 차이만 있지 어렸을 때부터 서로 먹을 걸 두고 으르렁거리며 싸우며 자라고 서로 볼 꼴 안 볼 꼴, 있는 인간성 없는 인간성 다 보며 심지어 앞으로 어떻게 살게 될지 훤히 보이는데 바라는 게 뭐가 있다고 그 앞에서 우애 있는 척 고상을 떤단 말인가. 그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철저한 보복과 응징만 있는 것 같다. 그런 집에 화목은 고물상에 팔아먹은 지 오래다.


그런데 이 가족이 좀 독특하긴 하다. 무엇보다 이 집엔 가부장이 빠져있다. 아버지는 일찌감치 죽어 과거로만 기억될 뿐이다. 아버지가 없어도 이 집에 가부장이 이어지려면 남자의 보수성과 경제력이 있어야 하는데 한모와 인모는 경제력은 집에 들어올 때부터 바닥이었고, 그런데 비해 엄마와 미연 심지어 미연의 딸 민경까지 경제력 꽤나 행사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또 그들이 그것을 발휘하면 할수록 한모와 인모 형제는 쪼잔한 인물이 된다.


엄마의 집에서 당장 할 일이 없는 인모는 집을 떠날 때도 하지 못했던 가족에 관한 연구를 하기 시작한다. 우선 새롭게 안 사실은 미연이 20대부터 아는 언니와 함께 지낸다는 건 사실은 룸살롱에서 일하며 가족들을 부양했던 것으로 판명 났다. 하지만 이 사실을 가족들이 정말 모르고 살았을까? 그건 아니다. 단지 모른 척하고 있었을 뿐이다. 알면 뜯어말려야 하는데 그러기엔 대신 감당해야 할 짐이 있었기 때문에 그냥 모르는 척했을 뿐이다.


또한 이들 삼 남매의 출생의 비밀도 이때 밝혀지기도 한다. 삼 남매는 혈통이 같지가 않다. 즉 한모는 아버지가 바깥에서 낳은 자식이고, 그런데 비해 미연은 엄마가 남자를 방에 끌어들여(?) 낳은 자식이다. 오직 인모만이 정상적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이만하면 콩가루 집안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아버지와 엄마의 전적이 셈셈이다. 그러므로 서로를 원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엄마가 이 모든 것을 모성이란 넓은 치마폭으로 감싸 안는다. 그래서 이들 삼 남매는 외풍은 있을지언정 비교적 안정적으로 자랐다.


하지만 인모는 어머니가 제일 이해가 안 갔다. 그건 엄마의 집에 들어와 살게 되니 엄마에 대한 불온한 기억들이 살아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중 가장 이해 못 할 건 시시때때로 물어보는 밥 먹었냐는 질문이다. 이해 못 하다못해 넌덜머리를 낸다. 엄마는 그 질문 밖에 못하는 걸까? 가방끈이 짧고 할 줄 아는 건 밥해 먹이는 재주밖에 없으니 그런가 싶기도 했을 것이다. 하긴 늬들이 모성을 알아?


하지만 엄마가 마냥 밥만 해 먹인건 아니다. 나중에 엄마는 누구와 살까를 고민하다 미연의 아버지와 합치기로 한다. 인모가 어렸다면 무조건 반대하며 반항했을지 모르지만 그럴 나이는 이미 한참 지났다. 좋고 말고 할 입장이 아니다. 물론 이건 두 사람의 합의에 의한 것이지만 거기엔 엄마의 주도적인 선택이 더 많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엄마에게 이런 당당함이 있다니. 하지만 미연에 아버지 역시 죽은 아버지만큼이나 집에선 존재감이 없다. 그런 것을 보면 앞으로 가족 형태는 어떻게 변화될지 모르겠지만 전통적인 가부장이 아니라 모계를 중심으로 한 모성이 좌우할 수 있음을 이 작품은 예시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그것은 어머니의 "밥은 먹었니?"란 질문이 상징적이면서도 압축적으로 보여 주기도 한다. 초반에도 자살하려는 인모를 살린 건 하필 울린 엄마의 전화에 밥 먹었냐는 질문 아닌가. 그 질문은 그렇게 위대하다!


하긴 엄마들은 왜 하나같이 이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다. 좀 다른 질문을 하면 안 되나 싶기도 하지만 이것만큼 모성을 드러내는 원형적인 질문이 또 있을까? 그래서일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독 밥을 먹었는가 안 먹은 가로 인사를 하며 만남을 풀어 가려는 경향이 많다. 그도 알고 보면 어머니에게서 받은 영향이 아닐까.


어떤 이는 '언제 한 번 밥 먹자.'라는 공수표 날리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도 하는데 난 아직 이 인사가 좋다. 그런 인사조차 하지 않는다면 세상이 얼마나 삭막할 것인가. 헤어질 때 하는 인사 안녕계세요나 잘 지내란 말은 그냥 잘 지내기를 바라는 거지만 언제 밥 먹자는 말은 약속이 있는 인사로 밥 한 끼 정도는 내가 살 수도 또는 너의 외로울지도 모르는 식사에 함께해 주겠다는 말도 포함되어 있는 거 아닌가. 그런 인사를 할 수 있는 정도면 공수표를 날릴 리 없다.


아는 사람이 슬픈 일을 당하거나 안 좋은 일을 당하면 그럴수록 잘 먹고 든든히 있어야 한다고 다독이곤 한다. 물론 정신이 무너지면 육체도 무너지지만 육체를 먼저 돌보면 정신도 세움을 받기도 한다. 그 모든 것엔 엄마의 밥 먹었냐는 말을 듣고 자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소설 맨 끝에 인모가 이런 말을 한다. 헤밍웨이가 아기였을 때 완벽한 문장으로 처음 한 말은 '나는 버펄로 빌을 몰라요.'라는 말이었다고 한다. 또한 작가 그레이엄 그린이 처음 했던 말은 '개가 불쌍해요.'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역시 비범한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며 자신은 무슨 말을 처음으로 했을까를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을 말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인모의 엄마는 그렇게 미연의 아버지와 살다가 홀연히 죽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건 물어볼 필요도 없다. 그건 당연히 "맘마"였을 테니까.


그러자 작가의 의도를 알 것도 같았다. 이 작품은 모성에게 바치는 작가의 헌사였던 것이다. 집(가정)은 머물기 위한 곳이기도 하지만 떠나기 위한 곳이기도 하다. 엄마가 해 주는 맘마 먹고 힘을 내 둥지를 박차 오르는 새처럼 떠나는 곳이 집인 것이다. 맘마는 곧 엄마다. 거기에 가족들의 진실을 파헤치려고 하는 건 의미가 없다. 그냥 함께 있어 온기를 서로 나눠 주면 또 알아서 자기 길 간다. 그 집에 엄마가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위로인가.


그러니 성질 나쁜 가족이라도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낫다. 비록 집에선 악다구니를 써도 필요할 때 방패막이가 되어주는 게 가족이다. 또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해 줘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가정을 가지고 있지만 그 가정에서 소외되어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정에 할 일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가정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래야 그 가정이 나를 지켜준다.


작가는 후기에서 이 작품은 아는 동료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다 착상이 되어 썼다고 한다. 역시 작가는 언제 어디서고 소설의 순간을 잡아내는구나 싶다. 그러니 작가는 얼마나 예리하고 예민한 족속인가. 작가의 수고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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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2-09 01: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신이 처음으로 한 말이 뭔지 아는 사람 많을지, 적을지... 엄마나 아빠라는 말 같기도 합니다 엄마가 먼저일 때가 많겠군요 부모는 늘 자식을 걱정하겠습니다 그러니 밥 먹었냐고 물어보겠네요 잘 먹고 지내라는 뜻도 있겠습니다

stella.K 님 명절 편안하게 보내세요 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24년 건강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희선

stella.K 2024-02-09 12:58   좋아요 1 | URL
저도 첨으로 했던 말이 뭘까 생각해 봤는데 알 수는 없고 맘마나 엄마였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맙습니다. 희선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명절 잘 보내십시오. ♡~

호시우행 2024-02-09 09: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특히, 소설가들의 감수성과 창작능력은 놀랄만 하지요.

stella.K 2024-02-09 13:03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부러울 때가 많아요. ㅋ
이책 정말 재밌는데 표지는 맘에 들지는 않더군요. 그래서도 더 더욱 읽을 생각이 없었죠. 좋은 소설 읽으면 밥 먹은 것처럼 든든해요.ㅎ

cyrus 2024-02-09 1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밥은 먹었니?’만큼이나 어머니가 자주 하는 말이 ‘너, 어디 갔다 왔니?’가 있어요. ㅎㅎㅎ

stella.K 2024-02-09 13:11   좋아요 0 | URL
아직도...? ㅎㅎ
글에 쓰진 않았지만 그 질문은 이제 내가 울엄마한테 많이하지. 내가 울집에서 밥순이거든. 밥 안 자시냐는 말도 내가 더 많이하고. 울엄마 내가 밥 차리면 꼭 TV 앞에 앉아 계시거든. 누가 차려주는 밥상 좀 받아 보고 싶은데 요양원이나 들어가야 하나 싶다. ㅋ

물감 2024-02-09 17: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상하게도 이번 리뷰는 문체에서 천명관 작가의 냄새가 나는데요. 천명관 작품의 리뷰라서 그런가ㅋㅋㅋ 분명 진지한 회상 풍의 글임에도 어째선지 킬킬거리며 읽어버렸습니다. 늬들이 모성을 아느냐!!
그렇군요. 모성에 대한 헌사로 다시 읽는다면 색다른 느낌일지도 모르겠어요^^ 설 잘보내세요!

stella.K 2024-02-09 17:25   좋아요 1 | URL
캬~! 역시 물감님은 저의 글을 알아주시는군요. 근데 천명관 따라가려면 아직도 멀었죠. 전 천명관 좋아합니다. ㅋ
아, 그러고보니 중요한 걸 잊고 있었군요.
물감님도 새해 복 많으시고 명절 잘 보내세요!^^
 
사소한 취향 - 교유서가 소설
김학찬 지음 / 교유서가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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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작가의 작품집이다. 작품을 읽으면서 유머와 위트도 있지만 나름의 노련미 내지는 능청스러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보통 작가들이 작품집을 내면 표제 작을 쓰지 않나. 나는 당연 '사소한 취향'이란 작품이 이 책 어딘가에 수록되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없다. 이 제목은 '프러포즈'란 작품에 나오는 말이다. 순간 살짝 한 방 먹은 느낌이었다. 이건 교란이라면 교란이다. 거기에 넘어가다니. 독자와 두뇌 싸움이라도 하자는 건가 싶기도 하다. 독자는 작가가 한없이 친절해 주길 바라고 있는데 말이다. 


​또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좀 애매한 느낌을 갖게도 한다. 이를테면 말했던 작품 초두에 그런 말이 나온다. '소설가가 등장하는 소설은 질색이'라고. 물론 그것은 화자의 취향이다. 하지만 그 말은 화자가 처음은 아니며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고.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하면서 실제로는 소설이나 영화에서 작가는 심심찮게 등장하곤 한다. 왜? 멋있으니까. 이 작품도 봐라. 화자는 그렇게 말하고도 버젓이 등장시키고 있지 않은가. 그것도 화자 자신이 작가다. 


그것도 부족해, '모든 소설가는 자신의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공리다. 그러나 자신을 팔아먹는 작가는 상상력아 고갈된 자다(138p).'라고 쓰고 있다. 사실 그 말은 틀리기도 하고 맞기도 하다.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팔아 작가가 된다는 걸 모르는 사람도 있을까? 어느 정도 작가로서 노련미를 갖추면 이걸 슬쩍 변형시키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자신의 이야기만 우려먹으려 한다면 말 그대로 상상력이 고갈된 작가가 맞다. 하지만 자신이 경험을 글로 쓰려고 하면 평생을 써도 다 못 쓴다는 말도 있다. 심지어는 그렇게 해서 노벨문학상까지 받은 작가도 있지 않은가.


또 봐라. 화자는 출판사를 하는 선배로부터 하루키를 취재해 오라는 지시를 받고 한때 잠시 좋아했던 출판사 직원과 함께 일본으로 취재를 간다. 그럼 독자인 나는 또 잔머리를 굴리게 된다. 언제 작가가 정말 하루키를 취재한 적이 있었나? 아니면 일본을 여행하면서 하루키를 만난다면 어떨까를 상상하며 쓴 것일까 생각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냥 작가가 상상하는 제3의 인물이면 고민할 필요도 없겠는데 하루키라지 않는가. 이만하면 작가는 독자 머리 꼭대기에서 놀겠다는 심산이군 싶다. 


원래 소설은 허구고, 작가와 작품을 동일시하면 안 된다지만 뭔가 믿고 싶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물론 그만큼 작가가 글을 잘 쓴다는 말도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가는  글빨 하나는 인정해야 할 것 같긴 하다. 수록작 중 가장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하지만 왠지 다음번에도 이런 식이면 별로 읽고 싶지는 않을 것 같다. 분명 작가는 독자 보다 나아야 하지만 이렇게 독자를 헷갈리게 만드는 작가는 솔직히 별로다. 하지만 다른 작품들은 시의성도 있고, 형식미도 있어 나쁘진 않았다. 


작가는 '고양이를 찾'이란 작품에서 뭔가 유기견 대신 유기묘로 대치하고 그것을 데려다 키우는 과정과 애환을 그리기도 했는데, 지금까지 개를 키워봤어도 고양이와는 그다지 인연이 없던 나는 고양이에게 이런 면도 있나 새롭기도 하면서 왠지 쓸쓸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책 어디쯤 읽게 되면 비둘기를 삶아 죽이는 장면도 있던데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그건 솔직히 좀 충격적이기는 하다. 물론 비둘기가 88올림픽 때 요긴하게 쓰였던 것도 알고 있고 이후 애물단지가 되었다는 말은 들어보긴 했는데 천적이 없는 걸까 그렇게 해서 개체 수를 줄이려고 하다니. (하긴 백숙도 끓여 먹는데...)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부터 동네 공원의 비둘기가 없지는 않은데 눈에 띄게 줄었다 했는데 그게 그런 이유 때문인가 의문을 갖게 만든다.      


문체가 힘이 있고 톡톡 튀기도 하는데 전반적으로 읽고 나면 묘한 쓸쓸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또한 제목은 '개인적 취향'의 다른 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나에겐 뭔가 과유불급의 작가는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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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3-11-16 22: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상상력이 고갈된 작가들은 ‘앎‘이 멈춘게 아닐까 합니다. 저는 모든 글들이 알고자 하는 마음에서 만들어진다고 보거든요. 아무리 우려먹는 글이라도 다른 시각과 통찰의 변형으로 얼마든지 신선해질 수 있는데 말이에요.

stella.K 2023-11-17 20:07   좋아요 2 | URL
와우, 어떻게 이런 근사한 말씀을...!
맞습니다. 매우 동의합니다!!
생각이 멈추면 작가로서의 생명도 끝인거죠.

페크pek0501 2023-11-17 15: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영화나 소설에 작가가 나오면 흥미로워 좋아합니다. 일부러 그런 영화를 찾아 보려고 했던 적이 있을 정도로요. 작가는 늘 저의 관심 대상이거든요. 작가들이 궁금합니다...

stella.K 2023-11-17 20:11   좋아요 1 | URL
맞아요. 흥미롭죠.
언니 혹시 TV 드라마로 나왔던 도스토옙스키 보셨나요?
작년인가 언제 보고 페이퍼 올린 적있었는데.
암튼 작가가 나오는 영화 좋아하시면 그거 추천합니다.
일 포스티노도 좋구요.^^

레삭매냐 2023-11-18 09: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옷 왠지 땡기는 책이네요 :>

근처 중고서점에 있으면 사볼라고
했는데 아숩게도 없네요.

내일 도서관에 가니 함 빌려다 볼
까 합니다.

stella.K 2023-11-18 20:48   좋아요 0 | URL
찾아 보시고 없으면 말씀해 주세요.
보내드릴 수도 있어요.^^
 
레테의 사람들
민혜 지음 / 디멘시아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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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멘시아 문학상이라는 상이 있다고 한다. 벌써 5회째를 맞이했고, 이 작품은 대상을 받은 작품이다. 이 문학상은 치매로 인해 고통받는 환자와 보호자들의 사회적 이해와 공감을 촉진하기 위해 지난 2017년에 처음 제정되었다고 한다. 


이런 문학상이 있다니 좀 놀랍기도 했고 반갑기도 하다. 문학이 해야 하는 역할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사회의 외지고 그늘진 면을 밝히는 것도 그중 하나가 아닌가. 하지만 막상 이 책을 읽으려니 마음이 좀 무거웠다. 아무리 문학의 역할을 운운해도 내용 자체가 유쾌한 건 아닐 테니. 그래도 염려한만큼 그렇게 무거운 건 아니고 생각할 거리가 있기도 하다. 엔딩도 그만하면 희망적이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치매 당사자 보다 그를 돌봐야 하는 가족을 대변하는 작품으로 읽힌다.


난 아직 가족이나 친척 중 치매에 걸린 사람은 없다. 이렇게 말하는 것엔 상대적 개념이 수반될 것이다. 이를테면 치매에 걸릴만큼 오래 살지 못하거나 가까운 사촌 이내엔 아직 알려진 바가 없다는 게 좀 더 정확한 말이 될 것 같다. 아는 사람의 누가 걸렸다는 소식은 간혹 듣기는 한다. 하지만 그렇게 많다는 치매 환자를 실제로 본 적은 없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우리나라는 치매 환자에 대한 관리를 잘하고 있어 그런 건가? 


책은 치매에 걸린 노모를 돌보는 비혼의 어느 나이 많은 여성의 고단한 삶과 애환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너무 사실적이어서 처음엔 혹시 작가 자신의 이야기인가 했다. 읽고 있으면 남 얘기 같지가 않다. 나도 이미 고령에 접어든 노모가 있고 언제부턴가 걱정할 때가 많아졌다. 아직 비교적 건강하신 편이긴 하지만 언제 건강에 적신호가 켜질지 모르고, 나 역시 더 이상 젊지는 않으니 내가 노모를 제치고 먼저 치매에 걸릴지 알 수 없다. (글을 노트북으로 쓰고 있는데 올해 유난히 오타가 심해졌다. 치매일까. 예전에 비해 총기도 떨어지고.ㅠ)


우리나라는 아직도 유교적 전통이 남아 있어 치매에 걸린 부모를 시설에 맡기는 걸 부담스러워한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게 몇 년 전 기사였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핵가족화 되어가고 있고, 자식에게 짐되는 거 싫다고 오히려 시설을 선호하는 부모도 늘어나고 있지 않을까. 


작품에도 나오지만 고대 로마에선 노인을 '데폰타니'라고 불렀다고 한다. 모시기 힘들어진 부모를 다리 위에서 떠민다는 의미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고려장의 또 다른 의미인 것 같다. 어떻게 부모를 그럴 수 있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당시는 효나 윤리 이전의 시대라면 또는 사회 복지를 논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니라면 아무 죄책감 없이 행해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그 시절엔 치매라는 용어도 없지 않았을까. 


노모가 다쳐서 병원에 입원하게 되자 주인공도 노모가 죽기를 바라지 않던가? 도덕과 윤리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이게 솔직한 인간의 마음이다. 짐승도 무조건 새끼를 위하지 않는다. 흠이 있거나 병약하면 둥지 밖으로 밀어낸다. 하물며 짐승도 그러는데 사람 그것도 자식이 그런 생각을 갖는 건 당연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더 잘 모시라고 무조건 효자라고 떠드는 건 그 사람을 두 번 상처 입히는 일이 아닐까. 


치매뿐만 아니라 가족 중 누군가가 아프면 당사자도 그렇지만 이를 돌봐야 하는 보호자의 삶의 질도 함께 떨어진다. 더구나 현대 사회는 모든 사람을 경제활동으로 내몰고 있기 때문에 예전처럼 24시간 함께해 주는 가족은 없다. 그럴 바엔 간병인을 쓰거나 시설에 맡기는 것이 맞는 것 같다. 당장 나부터도 내가 아프면 가족의 도움을 받는 거 별로 안 좋아한다. 감기나 어딘가 다쳐서 잠시 도움을 받는 거라면 모를까 나을 기미가 없는 병에 가족을 볼모로 잡는다는 건 나 자신이 용서를 못 할 것 같다.


사실 그렇더라도 가족이라고 마음이 편할 리는 없다. 그냥 치매에 걸린 가족을 시설에 맡겼다는 것뿐이지 어찌 마음이 편할 수 있겠는가. 주인공이 어머니를 병원에 입원시키고 내친김에 간병인을 쓰고 누리는 그 며칠 간의 자유란 과연 어떤 느낌일까 감히 상상할 수가 없다. 누군가는 이런 자식을 두고 치매 걸린 부모가 병원에 누워 있는데 집에서 어떻게 자유를 만끽할 수 있냐고 나무라는 보수적이다 고지식한 남의 집 노인이 있을까. 모르긴 해도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문학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분야가 아니다. 실존의 문제를 다룰 뿐이다.  


치매 환자와 보호자의 삶을 보여주는 것도 좋지만 이들을 보는 제삼자의 태도도 중요하다고 본다. 나는 모녀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오히려 주인공을 걱정하고 위로해 주려고 하는 외삼촌과 주인공의 친구(선자?)와 (껄떡대는) 초등학교 동창에 마음이 갔다. 이런 사람이 있는 한 보호자는 지쳐 쓰러질지언정 나 몰라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책에 이런 말이 나온다.


"사람 몸과 정신은 정말 복잡하고 신비해요. 치매란 끔찍한 병 같지만, 실은 가면을 벗겨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감춰진 인간의 본래의 모습이 드러나서 그렇게 놀랍고 당혹스럽게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죠. ...... (중략) 치매란 인간이 삶으로부터 느끼는 공포나 긴장, 괴로움 등에서 벗어나는 길이기도 하니까요.(170p)" 


나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치매에 대해 너무 몰랐고 막연하게 두려웠다. 나를 잃어버리는 병 아닌가. 분명 치매 환자를 돌본다는 건 힘들고 어려운 일인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수도 있겠구나 싶다. 그렇다면 현재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위로와 응원을 보내줄 수도 있지 않을까. 모르긴 해도 그런 소통과 이해가 어디선가는 하고 있을 거라고 본다. 


수상 소감에서 저자는 공모 소식을 듣고 마감 두 달을 앞두고 글을 썼다고 한다. 무조건 써야겠다는 충동에 의해서.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작가는 늘 정해진 루틴에 의해서 글을 쓴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런 강한 충동은 또 그런 루틴에 의해서 나오는 거라고 생각한다. (육감이 그런 거 아닌가.) 그럴 땐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난 그런 저자의 대담한 글쓰기가 부럽다. 


이 작품은 주인공의 이유를 알 수 없는 후각과 출생의 비밀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치매를 다루려는 시도는 좋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경장편이어서일까? 조금 더 치밀하고 복선이 더 많이 깔렸으면 하는데 뭔가 서둘러 마무리되는 것 같아 약간의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이 문학상은 다른 문학상에 비해 좀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문학성을 지향하는 여타의 문학 상보단 치매를 알리고자 하는 공공의 목적이 더 강하지 않나 싶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충분히 그 목적을 이루었다고 본다. 앞으로 이 문학상이 어떤 행보를 보여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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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3-11-06 00: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식 중 비혼인 자녀가 부모와 계속 살아가는 경우가 많아 나중에 부모가 병들면 돌보야 할 경우가 많아요.
일단 비혼인 저의 언니가 그렇고, 제 친구도 그런 경우가 많거든요 ㅠㅠ
요즘 평균 수명이 늘어가고 노인 인구가 많아지니 앞으로 이런 종류의 글이 많이 나올 것 같아요.
만약 제가 레테의 강과 같은 상황이 오면 어떻게 될지 생각만 해도 힘들어요^^

stella.K 2023-11-06 11:35   좋아요 1 | URL
맞아요. 이제 돌봄을 사적으로만 둘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공적인 영역으로 확장시키고 함께 돌보는 그런 시스템으로 가야할 겁니다.
저도 그 상황은 싫긴 하지만 가족들을 힘들게 할까봐 그게 더 걱정되요.ㅠ

니르바나 2023-11-06 12: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이 사회현상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치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위해 제정된 디멘시아 문학상의 취지에 공감이 됩니다. 경증이냐 중증이냐 차이는 있겠지만 오늘날 치매 환자의 수가 갑자기 늘어난 이유는 의학의 발전과 병원의 치료로 수명이 대폭 연장된데 따른 자연적인 현상일겁니다. 그만큼 우리 주위에 치매환자가 많다보니 오래 전에 무거운 마음으로 치매환자를 바라보던 시각도 이제는 많이 완화된 편입니다. 최근에 정신병 질환자들을 대하던 시각과 같은 셈이지요. 이게 다 오래 살다보니 생기는 일 아닙니까. 그러니까 스텔라님 마음 건강에 해로우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stella.K 2023-11-06 20:16   좋아요 1 | URL
오랜만이십니다. 평안하시죠?
그러게 말입니다. 나이들수록 건강염려증만 늘어가는 것 같습니다. ㅋ
하루하루 건강하게 사는 것만도 복인데...
이젠 우리도 말씀하신 것처럼 나가야죠.
개인이나 사회나 모두 건강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물감 2023-11-06 13: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처음 듣는 문학상이네요. 새로운 거 알아갑니다!
딴지 거는 건 아니고, 이제 ‘치매‘는 없는 단어라네요. 치매의 뜻이 너무 나빠서 ‘주요신경 인지장애‘로 바뀌었답니다. 근데 전혀 입에 붙지를 않네요.

stella.K 2023-11-06 19:44   좋아요 1 | URL
아, 정말요? 이거 국제 표준어된 용어인가요?
근데 진짜 어렵네요. 이름 하나 바뀌었다고 뭐가 달라지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전문적 용어같네요. 치매도 좋은 이름은 아니지만...

레삭매냐 2023-11-07 2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디멘시아 문학상이 있는 지도
미처 몰랐네요.

자신이 사랑하는 부모님이 연세가
드셔서 자식조차 몰라 보시게 된
다면 정말...

나를 잃어 버리는 병, 정말 무섭지
싶네요.

stella.K 2023-11-08 20:13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저는 지난 달 아는 지인을 만났는데 얼마 전 집 비번에 생각나지
않더라며 딸에게 전화해서 묻고 치매가 아닌가 했다더군요.
남 얘기 같지 않아요.
예방 차원에서 책이라도 꾸준히 읽어둬야 할 것 같아요.
 
조선 청소년 이야기 온 가족이 함께 읽는 이야기 3
김종광 지음 / 교유서가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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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각색에 관심이 있긴 하지만 이 책은 정말 각색을 통하지 않으면 못 읽을 것 같다. 조선의 고소설을 원문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공자가 아니면 읽기가 어렵지 않을까. 물론 그것을 현대어로 풀어서 쓸 수도 있겠지만 각색은 그보다 더 나아가 작가의 상상력과 등장인물에 더 많은 비중을 두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일까? 요즘의 언어 감각을 최대한 살리면서 등장인물을 더 적극적이면서 실존적으로 그렸다는 생각이 든다. 


난 처음에 이 책을 읽지 않으려고 했다. 아무래도 책 제목도 그렇고 나 같이 청소년기를 지나도 한참 지나 온 사람이 과연 읽을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막상 읽어 보니 모처럼 무슨 동화 모음집을 읽듯 산뜻하고 편안한 느낌이어서 좋았다.


이 책은 특징이 있었다. 민담이나 설화 전기 등에서 뽑았는데 모두가 화자 내지는 주인공이 청소년이라는 것이다. 하긴 옛날엔 청소년이 따로 없었다. 대충 15,6세만 해도 혼례가 가능했으니 당시론 젊은이들을 위한 교훈 집 정도가 되지 않았을까.   


좀 놀라웠던 건, 조선사회라면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해 있을 텐데도 작가가 지나치게 부풀린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여자를 적극적이고 실존적으로 그렸다. 이쯤되니 내가 조선사회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모르고 있었나 의문스럽기까지 했다. 각색이란 것도 원문을 바탕으로 했을 것이니 나 같이 귀가 얇은 사람은 과연 그런가 싶기도 하다. 12편 다 얘기할 할 수는 없고 몇 편만 소개해 보면, 


첫 번째 수록작 '내 남자는 내가 선택한다'는 <<이조 한문 단편집>>의 '정기룡'을 다룬다. 정기룡은 실존했던 인물로 관노비였지만 훗날 훌륭한 육군 장수가 되었고 아이들 사이에서는 "바다에는 이순신, 육지에는 정기룡!"이란 노래가 있을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그의 운명의 시작은 어느 노인에게 무예를 배워 군대에 징집되면 시작이 되는데, 이야기는 또 어느새 전주 관아에 이방의 딸의 이야기로 바뀌어 정기룡을 사모하여 결혼하게 된 과정을 전하고 있다. 조선의 봉건 사회에서 딸은 당연히 부모가 맺어준 사람과 혼인해야 하는데 참 당차다 싶다.


두 번째 수록작은 <<동야휘집>>에 '채교거랑 책귀자(한자는 이 책에서 확인할 것)' 즉 신행 온 부인이 행랑에 앉아 귀한 아들을 꾸짖다란 뜻으로, 몰락한 양반의 어린 신부가 자신의 할아비 뻘 되는 양반집에 시집을 가게 된 사연을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늙은 신랑은 무슨 이유에선지 장인의 집에서 초야를 치르고 다음 날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소박을 맞은 것이나 다름없는 어린 신부는 귀신이 되어도 남편의 집에서 귀신에 되야겠으니 아버지의 힘을 빌려 꽃가마를 타고 늙은 남편의 집으로 간다. 그러고는 남편의 집에서 전처의 두 아들을 다짜고짜로 꾸짖는다. 자신이 비록 그들의 서 모이긴 하지만 그들의 어미가 됐음을 가르치며 권위를 세우기 위함이었다. 다소 황당할 수도 있겠지만 어린 나이에도 한 집안의 안주인의 역할을 잘하고자 하는 당찬 의지가 엿보인다.


'노래가 좋다'는 우리가 한 번쯤 들어봤을 <<어우야담>>의 '명창 석개'의 일대기를 다룬 이야기다. 석개는 굉장히 못생긴 노비다. 너무 못생겨 친구하겠다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노래를 접하고 그때부터 실성한 사람처럼 자신을 사로잡아 버린다. 그때부터 그녀는 뭔지 모르게 노래만 들으면 넋이 나가 자주 일하던 손 놓을 정도가 되어버린다. 못생긴 외모 덕분에 온갖 핍박과 설움을 당하지만 굴하지 않고 특별한 선생을 만나 명창이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사랑은 공부다'는 <<계서야담>>에 나온 이야기로 계서 이희평이 편찬한 것아라고 한다. 세창은 양반의 자제로 과거 시험을 앞두고 있고, 자란은 기생의 딸로 이들은 어려서 친구처럼 자라다 이성으로 발전한다. 세창은 자란과의 인연을 끊고 과거 공부에 매진하지만 그럴수록 자란에 대한 그리움만 커져간다. 어느 날 자란이 너무 보고 싶어 있던 곳을 탈출하여 자란을 만나러 오지만 그녀의 엄마에게 문전 박대를 당한다. 그 과정에서 사랑도 공부해야 하는 것임을 깨닫는다는 내용인데 얼핏 '춘향전'이 생각나기도 한다.


그 시대에 여자가 뜻을 펼칠 기회가 얼마나 되겠는가 싶기도 하지만 어떤 모양과 형식으로든 그런 이야기가 보존되어 있다는 게 놀랍고 신기했다. 무엇보다 조선 후기 사회의 모습도 간간이 볼 수가 흥미롭다. 어느 시대나 사람 사는 모습은 다 비슷해 보인다. 


그중 가장 흥미로운 건 마지막 수록작 '우울증을 이겨내는 방법'이다. 이것은 연암 박지원의 청소년 시절을 다룬 자서를 소설 형식으로 풀어낸 이야기로, <<방경각 외전>>에 나온 이야기를 토대로 썼다고 한다. 연암이 열두어 살 때 쥐젖을 알았다고 한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쥐젖이란 사마귀 같은 것이 살에 돋아나는 피부병이다. 그는 이 때문에 우울증에 걸릴 정도라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사람들의 사는 이야기가 귀에 들려오기 시작한다. 알다시피 조선은 계급 사회이니 상놈은 상놈대로, 평민은 평민대로, 노비는 노비대로 할 얘기가 제각각이고 흥미로웠다. 그는 그것을 조금 조금씩 글로 쓰게 되고 나중엔 아예 대놓고 글을 써 우울증을 극복하게 됐다는 내용이다.


사실 글 쓰는 과정은 쉽지 않다. 오죽하면 사망률에 높은 직업군에 작가가 들어가 있겠는가. 하지만 연암은 오히려 글쓰기를 통해 우울증을 극복했다. 그것도 어린 나이에. 이는 작년인가 올 초에 연암에 관한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이 이야기는 새롭게 안 사실로  역시 연암이다 싶기도 하다. 


요즘 청소년들 어른이 뭐라고만 하면 무조건 꼰대라는 말부터 하던데 이 책 보고 꼰대를 넘어 고리짝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기엔 나는 너무 편하고 즐겁게 읽었다. 안 읽으면 손해란 생각까지란 생각도 든다. 특히 여자 청소년들은 더더욱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물론 조선시대에 비하면 지금은 여자들이 훨씬 더 많은 기회들이 있지만 말이다. 작가가 너무 여성을 의식한 것 같기도 하고. ㅋ 글자도 다른 책에 비해 큰 편이어서 편하다. 머리 식힐 겸 한 편씩 읽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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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르바나 2023-10-03 22: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0월의 좋은 책 리뷰로 추천합니다.
추석 잘 보내셨죠. 스텔라님^^

stella.K 2023-10-04 10:59   좋아요 1 | URL
네. 니르바나님도 잘 지내셨죠? 고맙습니다.^^

얄라알라 2023-11-11 02:04   좋아요 1 | URL
니르바나님의 선견지명!

축하드립니다. stella.님^^

stella.K 2023-11-11 18:43   좋아요 1 | URL
얄라님, 고맙습니다. 사실은 니르바나님은 장강명믜 소설가란 이상한 직업인가? 그것 좋다고 하셨는데 저도 이게된 거 보고 좀 의아했어요. ㅎㅎ

yamoo 2023-10-04 06: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스텔라 님이 각색에까지 관심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저는 각색의 각자고 몰릅니다요..ㅎㅎ

이런 책도 있었네요. 이야~~

stella.K 2023-10-04 11:01   좋아요 1 | URL
ㅎㅎ 저는 뭐 어찌어찌 하다보니 관심이 생긴거고 창작이든 각색이든 그 세계는 다 어려운 것 같습니다.ㅠ

페크pek0501 2023-10-06 15: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쓰기가 치유의 힘이 있긴 해요. 속 답답한 일이 있을 때 일기를 쓰고 나면 마치 그 일이 해결된 것처럼 속시원해지거든요. 글로 고민을 풀어낸 듯한 느낌이에요.
독서도 기분전환에 도움이 되는 것 같더라고요. 뭔가에 몰입해서인지 기분이 나아져요.^^

stella.K 2023-10-06 19:13   좋아요 0 | URL
그러니 독서와 글쓰기의 유익성을 모르는 사람은 얼마나
안타까워요? ㅎㅎ
그런데 이게 또 직업이되면 적잖은 스트레스죠.
뭐든 다 그렇잖아요. 취미로 하면 좋은데 업이되면 부담스러운 거.ㅠ
근데 박지원이 10대 초반에 그 사실을 알았다는 게 정말 놀랍더라구요.

2023-10-11 2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0-12 1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0-11 2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0-12 1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