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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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라고 하면 어딘지 낭만적인 느낌이 든다.

일상을 벗어나 자유롭게 어디론지 떠나고 그곳에서 찰나의 기쁨과 즐거움을 만끽하는...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인 오토 질버만의 여행은 다르다.

그에게 여행은 삶의 여유를 찾고 안식을 찾아 떠나는 게 아니라 죽음으로부터의 도피, 국가와 사람들로부터 도망이었고 그런 이유로 여행 내내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다 끝내는 내면이 무너져내린다.

이성과 도덕심을 갖춘 평범했던 한 남자가 서서히 내면에서부터 무너져내리다 끝내는 자신을 놔버리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여행자는 읽는 내내 주인공인 질버만이 느꼈던 감정의 생생한 묘사로 인해 감정이입이 되었고 그가 느꼈을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철저히 혼자라는 데서 오는 불안과 외로움에 공감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평범한 중산층 사업가였던 질버만이 어쩌다 이런 지경에 처하게 되었을까

단지 그가 유대인이었고 하필이면 독일에서 살고 있었다는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면 너무 가혹하지만 역사가 증명하듯이 그건 지울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우리도 익히 알다시피 독일에서 히틀러의 나치당이 점거한 후 사회적 분위기는 급변했다.

이웃이었던 사람도 동료였던 사람도 심지어 친구였던 사람들조차 냉정하게 그들로부터 등을 돌리고 심지어는 그가 가진 재산을 빼앗는 걸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질버만과 오랜 친구이자 자신이 어려울 때 도움을 받았고 이제는 사업의 동업자가 된 베커가 사업 계약을 위해 떠나는 장면에서 이미 이 둘의 관계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걸 깨닫게 해준다.

분명 동업자 관계이지만 사업주는 질버만인데 그의 돈을 가지고 계약을 하러 가는 베커에게 도박을 하지 말라고 사정을 하는 모습은 여느 동업자 관계와도 다르다. 게다가 질버만을 대하는 베커의 태도 역시 오만하기 그지없다.

단순한 이 장면에서 이미 질버만의 앞으로의 처지가 보이는 듯하다.

오랜 친구이자 동업자 관계였던 베커뿐만 아니다.

그가 가진 집을 사러 온 또 다른 동료는 눈앞에서 보란 듯이 가격을 후려칠 뿐 아니라 그마저도 그의 긴박한 상황을 보고 더 깎으려 한다.사방 모두가 그의 적이다.

게다가 자신의 집으로 쳐들어 와 폭력을 행사하는 나치당원들의 횡포 앞에서 아내조차 두고 빈 몸으로 도망치듯 떠나야 했던 질버만이 느낀 무력감과 억울함 그리고 폭력 앞에서 굴복하듯 도망친 자괴감을 끊임없이 자기합리화로 스스로를 위로하는 모습이 연민을 느끼게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 말도 안 되는 폭력 앞에서 자신을 지키고자 했지만 사방을 둘러봐도 그를 도와주거나 손을 내밀어 줄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데서 오는 절대적인 외로움은 그를 병들게 했다.

친구도 가족도 그에게는 우리가 아닌 그들이었고 그들에 속하지 못한 질버만은 같은 유대인에게서도 위안을 얻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그들과 자신을 다른 부류로 나눠 그들을 원망하고 가까이 오는 것을 꺼려 하며 스스로를 더욱 고립시킨다.

그는 아리아인 사회에도 속하지 못했고 유대인 사회에 속하는 것 역시 스스로 거부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택한 것이 그가 가진 돈으로 이 곳 저 곳 독일 전역을 떠도는 것이었다.마치 어디든 자유롭게 떠날 수 있다는 듯이...

질버만이 여기저기 역을 떠돌면서 느끼는 불안과 공포의 묘사도 그렇고 다양하게 만났던 사람들의 묘사 역시 그렇게 생생할 수 있었던 데에는 작가의 이력이 한몫했다는 걸 알 수 있었는데 저자 역시 독일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으며 가족과 함께 독일을 탈출해 유럽의 여기저기를 떠돌았던 이력이 있었다.

당시 독일 사회에서 유대인으로서 받은 박해와 온갖 부당한 폭력 그리고 어디에도 손 내밀 곳 없었던 그 막막함과 두려움의 묘사를 질버만이라는 인물을 통해 참으로 생생하게 그려낸 여행자는 국가가 중심이 되어 개인들에게 가해진 폭력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 그런 폭거 앞에서 저항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준다.

우리의 역사와 중첩되는 부분이 있어 더욱 와닿았던 것 같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작품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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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직숍
레이철 조이스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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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락해가는 거리에 LP만 판매하는 뮤직 숍이 있었다.

이곳에는 자신이 원하는 음악도 혹은 제목은 모르지만 찾고 싶은 음악도 찾을 수 있지만 무엇보다 특이한 건 자신이 무슨 음악을 원하는지 모르는 사람에게조차 딱 맞는 음악을 찾아주는 주인이 있었다.

그의 이런 능력은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위안을 안겨주게 된다.

연인의 배신으로 고통받는 사람에게 쇼팽 대신 아네사 프랭클린의 음악을 권하고 육아에 지친 아내와 그런 아내를 보며 같이 힘들어하는 남자에게 아이가 들으면 쉽게 잠들 수 있는 음악을 권하는 식으로...

어쩌면 그가 하는 행위는 단순히 음반을 판매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에게 맞는 음악을 처방해 주면서 위로와 위안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프랭크는 그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귀담아들을 줄 알고 그에게 어울리는 음악을 찾아줄 수 있는 능력이 있어 그를 찾는 사람은 많았지만 시대의 흐름은 이미 LP에서 CD로 바뀌고 있었고 이를 수용하지 않는 그의 고집으로 인해 가게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 상황... 이런 틈에 이 거리를 개발하고자 부동산 개발업자까지 등장한다.

그들로 인해 거리의 사람들은 어수선해지고 개발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온갖 협박 같은 낙서 테러가 가해지지만 언제나 긍정적인 프랭크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곳 유니티스트리트에서 오랫동안 터전을 잡고 있었던 주변의 상인들과 힘을 합쳐 난관을 헤쳐나가고자 하는 의지로 가득했고 이 모든 일의 중심에는 프랭크가 있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줄 줄 알고 위로할 줄 아는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그지만 정작 본인은 사랑을 두려워해 다가오는 사랑을 거부하는 소심한 사람이라는 건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가 이렇게 사랑에 소극적인 이유는 몇 번의 아픔을 거친 탓도 있지만 그 근본에는 어릴 적부터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프랭크의 엄마는 그에게 음악을 사랑하고 음악을 이해할 수 있는 정신적인 자산을 남겼지만 본인 스스로가 누구에게도 얽매이기 싫어하는 탓에 자신의 자식에게조차 제대로 곁을 주지 않았고 어린 프랭크로 하여금 언제나 마음 한편 이 빈 듯한 외로움을 안겨주었다.

거기에 더해 자신의 잦은 사랑의 실패를 본보기로 보여줘 프랭크로 하여금 사랑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준 것이 가장 큰 잘못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이유로 자신의 가게를 찾아온 일사를 본 순간 첫눈에 사랑에 빠졌으면서도 자신의 감정을 무조건 억누르고 부정할 뿐 아니라 마침내 스스로도 그녀에 대한 사랑을 부정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을 땐 어처구니없게도 거리를 두고 짝사랑만으로 만족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그녀로 인해 하루하루가 즐겁고 그녀만 생각하면 기쁨으로 충만하면서도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프랭크

리사 또한 자신이 가진 상처 때문에 프랭크를 사랑하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머뭇거리기만 하는데 그런 둘의 모습은 요즘 연애하는 세대와는 확실히 차이가 있다.

자신의 마음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어필하는 대부분의 요즘 사람들과 달리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 서툴고 곁으로 다가가기까지 한참의 시간이 걸리는 모습은 아주 오래전 내 또래의 연애와 닮아있어 더 공감이 가기도 했다.

마치 그림을 그려 표현하는 것처럼 생동감 있게 음악을 소개하고 그 음악에 얽힌 사연을 들려주면서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그리고 있는 것만으로도 아주 따뜻하고 예쁜 이야기인데 그 속에서 피어나는 로맨스까지 곁들여진 뮤직 숍은 시대적 배경인 1988년의 분위기를 제대로 그려내 나로 하여금 마치 그 시절로 들어간듯한 추억을 되살려주고 있다.

이제는 웬만한 음악은 전부 음원으로 듣는 요즘 LP를 듣다 점점 CD로 변화했을 때 느꼈던 그 당시의 느낌이나 추억이 생각나게 했다.

프랭크가 손님들에게 들려주는 음악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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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 스톡홀름신드롬의 이면을 추적하는 세 여성의 이야기
롤라 라퐁 지음, 이재형 옮김 / 문예출판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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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재벌가의 상속녀가 괴한들에게 납치되고 감금당한지 얼마 후 그들과 함께 은행을 터는 강도의 모습으로 나타나 모두에게 충격을 준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은 이 이야기는 1974년에 실제 있었던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소설 17일은 당시 납치되었던 재벌가의 상속녀 퍼트리샤 허스트를 중요하게 다루면서도 그녀 당사자를 직접 등장시키기 보다 그녀 또래의 다른 여자를 통해 패트리샤가 납치 피해자인 연약한 여성에서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타니아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재벌가의 상속녀에서 좌파 무장단체 SLA의 일원이 되어 은행을 터는 사건을 일으키게 되는 시간은 납치된 시점으로부터 불과 두 달 남짓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부정하고 그렇게 무모하고 위험한 짓을 자행하도록 했을까 하는 의문은 그 당시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졌을 의문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것이 그녀의 온전한 선택이었을까 아니면 납치된 동안 좌파 무장단체에게 세뇌당한 결과인 걸까 하는 것인데 그녀가 체포되고 난 후 퍼트리샤의 변호인단은 재판을 유리하게 하고자 세뇌당했다는 주장을 하지만 그동안의 그녀의 행적은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가 쉽지 않다는 걸 증명해 준다.

그런 이유로 변호인단에게서 의뢰를 받고 퍼트리샤가 SLA에게 납치당한 동안 그들의 주장에 세뇌당했음을 증명하기 위해 모든 기록과 자료를 조사하게 되는 진 네베바와 그녀가 프랑스의 작은 도시에서 그녀의 일을 돕기 위해 고용한 여학생 비올렌이 퍼트리샤의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 게 이 소설 17일의 주요 골자이며 당연한 얘기로 세 명의 여자들이 주인공인 셈이다.

먼저 재벌가의 상속녀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부족함이 없이 자란 퍼트리샤는 좌파 무리들에게 납치당하면서 인생이 극적으로 바뀌게 된다.

이제껏 자신의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몰랐었던 퍼트리샤는 그들을 통해 주변의 빈곤문제와 인종차별 등 부자로 있었을 땐 알 수 없었던 문제들에 대해 깨닫게 되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지면서 자신의 누렸던 온갖 혜택과 특혜가 올바르지도 않고 공정하지도 않다는 걸 알게 된 순간 연약한 희생자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전사로 태어난다.

퍼트리샤의 형량을 줄이기 위한 대책으로 투입된 진은 학문적으로도 높은 교양과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는 당시의 보수적인 사회에서 진취적이고 베트남전쟁 반대 투쟁에 뛰어들 정도로 비판의식이 강하다.

그녀는 재벌가의 상속녀로 곱게 자란 퍼트리샤가 단 두 달 만에 급진적인 정치활동을 스스로의 판단으로 할 수 있다 믿지 않았기에 그녀가 세뇌당해서 저지른 일이라 믿었지만 퍼트리샤의 행적을 조사하고 그녀의 주장을 검토하면서 조금씩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퍼트리샤와 비슷한 연령인 비올렌

그녀 역시 진의 일을 돕기 시작할 때만 해도 진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가진 평범한 그 시대의 여학생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지 말라는 일은 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원칙에 어긋나는 건 생각조차 하지 않는 그런 착한 여학생

하지만 진과 작업하면서 누군가의 주장이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아닌 스스로 생각하고 자신의 주장과 의견을 조금씩 이야기할 수 있게 변하면서 퍼트리샤의 주장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렇게 하나의 사건으로 인해 서로 다른 세 명의 여자들이 현재 자신의 발 디디고 살았던 세계를 외면하고 새로운 삶을 바라보고 살아가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는 17일은 세 명의 여성들의 입을 통해 그 시대의 부조리함을 이야기하고 있는듯하다.

과연 퍼트리샤는 이제껏 알려진 대로 스톡홀름 신드롬의 주인공인 걸까?

가부장적 시대에서 여성들이 제 목소릴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17일... 길지 않은 글이지만 솔직히 읽기가 녹록지 않은 작품이었고 그 속에 담긴 철학적인 메시지는 심오하지만 한 번쯤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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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 인류의 재앙과 코로나를 경고한 소설, 요즘책방 책읽어드립니다
알베르 카뮈 지음, 서상원 옮김 / 스타북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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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읽은 책을 다시 읽을 때면 예전에 읽었을 때와 그 느낌이 사뭇 다를 때가 많다.

특히 고전문학이 그럴 때가 많은데 아마도 예전의 감성이랑 한창 세월의 때가 묻은 상태에서 읽은 감성과의 차이 탓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책 페스트 역시 예전에 읽었을 때와 그 느낌이 사뭇 달랐는데 특히 지금 코로나 시대와 맞물려 더 그렇게 느껴진 것 같다.

예전에는 그저 페스트 혹은 흑사병으로 불린 전염병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치명적이었구나 하는 느낌과 함께 그 전염병과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에 대해 연민을 가지기만 한 채 읽었다면 이번에 읽었을 때는 휠씬 더 그 사람들이 느꼈을 공포와 무력감이 와닿았던 것 같다.

속절없이 퍼져가는 전염병 그리고 뚜렷한 치료 약이 없어 눈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아이가 쓰러져가는 걸 그저 바라만 봐야 하는 무력감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카뮈는 이런 사람들의 심리와 그들이 느꼈던 공포와 무력감을 제3자의 시선으로 덤덤하게 그리고 있다.

게다가 지금의 우리 상황과 오버랩되어서인지 그들이 느낀 절망감과 무력감, 공포 같은 게 훨씬 더 와닿는 느낌이었다.

어느 날 문득 우리 곁으로 다가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코로나처럼 페스트 역시 시작은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였다.

알제리의 오랑시에 살고 있는 의사 리 외는 자신의 집 앞에서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쥐를 발견하게 된다.

처음부터 심상치 않았던 쥐의 행태는 이내 여기저기서 발견되고 사람들이 수군거릴 즈음 온 거리는 죽은 쥐의 사체로 덮이지만 누구도 페스트라는 걸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라 치부하고 싶어 하나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는 곧 현실이 되어 사람들마저 하나둘씩 쓰러지고 사망자가 급증하자 시 당국은 오랑시를 전면적으로 봉쇄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지난 1년간 우리가 겪은 모습과 거의 흡사해서 왜 지금 이때 다시 이 책이 주목받게 된 건지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처음 쥐들이 죽어나가고 사람들 사이에서 전염병이 돌지만 이를 책임지는 사람은 없을 뿐 아니라 눈앞에 뻔해 보이는 진실마저 덮고자 소극적인 자세로 대처하다 끝내 자신들이 감당하기 어렵다 느낄 즈음 손쉽게 봉쇄령을 내려 오랑시의 사람들을 공포로 몰고 가는 작태가 21세기의 우리의 모습과 무엇이 다른가

처음 봉쇄령이 내려졌을 때 사람들의 태도 변화 역시 흥미롭다.

의연하고 침착하게 현실을 받아들이다 점점 더 늘어가는 사망자 수에 공포를 느끼며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어떤 사람은 이 모든 것이 신이 내리는 벌이라 생각하고 종교에 몰두하고 어떤 사람은 이곳에서 탈출하고자 모든 노력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공포와 두려움이 잠식하고 있는 이 도시에서 의연하게 맞서 싸우고자 노력한다.

의사 리 외와 신문기자 랑베르가 후자의 경우지만 공포로 잠식해버린 이성 앞에서 의연함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런 혼란이 계속되고 눈앞에서 새로운 혈청의 실험대상인 어린아이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흩어졌던 사람들이 합심하고 이 고난을 넘고자 노력하면서 점점 희망의 빛이 보이면서 이야기는 끝난다.

엄청난 비극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공포와 절망 그리고 무력감에 대한 묘사를 통해 죽음 앞에 한없이 약한 존재가 인간임을 표현하고자 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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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 오브 걸스 - 강렬하고 관능적인, 결국엔 거대한 사랑 이야기
엘리자베스 길버트 지음, 아리(임현경)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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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마시고 사랑하라의 작가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신작 시티 오브 걸스는 1940년대 뉴욕의 뒷골목이자 화려한 무대 뒤를 자신의 재능 하나로 믿고 헤쳐나갔던 여자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편지로 들려주면서 시작하고 있다.

시대적 배경이 전쟁 전후였던 만큼 여자들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압력은 억압적일 수밖에 없었지만 소설 속에 나오는 뉴욕의 여자들은 그런 시대의 압력을 벗어나 자유롭게 연애하는 화려한 면면을 보이면서도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는데 그런 한중간의 중심을 살았던 비비안이 순진했던 소녀에서 당당히 자신의 삶을 사는 여자로 성장해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부잣집 딸로 자란 비비안은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당시 부유층 소녀들이라면 당연히 다니는 대학에서 쫓겨나면서 부모님의 눈밖에 난다. 이런 점에서 보면 그녀에게는 반항의 기질이 벌써부터 내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런 그녀에게 있어 뉴욕행은 그런 기질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뉴욕에 사는 고모에게로 쫓겨나지만 비비안에게 있어 그것은 새로운 세계로 눈뜨는 계기가 된다.

뉴욕의 쇠락한 극장을 운영하는 고모는 비비안이 어떤 일을 하던 자유롭게 놔두었을 뿐 아니라 그녀 스스로 자유롭게 연애하고 어떤 규제도 없이 멋대로 살아가는 히피 같은 기질이 있어 비비안이 방탕을 즐기는 데 제약이 되지 않았고 그 덕분에 처음 맛보는 화려한 세계에 흥분한 비비안은 고향에서라면 생각지도 못한 일탈을 일삼는다.

하지만 매일매일 술에 취한 채 낯선 남자들을 만나 자유롭게 즐겼던 젊은 날의 방탕은 이내 그녀의 발목을 잡고 깊은 상처와 함께 교훈을 남기게 되는데 이 경험이 그녀의 삶을 뿌리부터 바꿔놓는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

자유롭게 남자들을 만나고 성적으로도 자유롭게 살면서 즐기는 중에도 할머니로부터 받은 자신의 재능 즉 바느질로 무대의상을 손보며 화려한 무대에 손을 보태는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비비안은 그토록 동경하던 베스트 프렌드를 자신의 어리석음과 사소한 오해로 잃어버리고 자신의 커리어마저 엉망진창으로 더럽힌 후 모든 것을 버린 채 고향으로 도망쳐 와 의기소침한 생활을 한다.

그 경험은 비비안으로 하여금 자존감을 떨어뜨렸을 뿐 아니라 오빠로부터는 경멸을 받고 깊은 내면의 상처를 주지만 그런 그녀의 실수를 고모와 올리브는 감싸주면서 새로운 비비안이 태어났다.

다시 뉴욕으로 돌아온 그녀를 기다리는 건 예전의 화려하고 반짝이던 뉴욕이 아니었다.

전쟁의 포화속에서 사랑하는 가족을 전쟁터로 보내고 깊은 우울에 빠진 뉴욕에서 다른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기쁘게 하기 위해 열심히 무대를 올리는 비비안과 극장 사람들

그리고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운 우정을 쌓아가는 비비안은 운명의 짝꿍이자 이민자 출신인 마조리를 만나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면서 새 삶을 시작한다.

전쟁이 끝나고 모든 사람들이 결혼하기 위해 안달이 나던 그때... 여자는 그저 결혼해 주부로 사는 게 행복한 삶이자 옳은 삶이라 생각하는 그 시절 결혼을 거부하고 자유롭게 연애하며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위해 열정을 불태우던 비비안은 진짜로 자신이 원하는 게 어떤 삶인지를 알았고 그런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녀가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던 건 그녀의 큰 실수도 사랑으로 용서하고 그녀를 믿은 사람들과 자신이 저지른 실수로 무너지거나 포기하지않고 그걸 교훈 삼아 새롭게 인생을 살아갈 줄 알았던 그녀의 용기와 자신의 재능을 믿고 결정적인 순간의 결단이 있었기 때문이란 걸 그녀의 전생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시티 오브 걸스

한 여자의 강렬하지만 아름다운 인생을 보여주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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