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고아였을 때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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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온갖 예술, 특히 서사의 매력적인 소재로 자주 거론되는 것은 그것이 가진 반투명성에 기인한다. 기억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실제 사실을 되새김질하는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기억은 사실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망각되거나 왜곡되어 저장되기 때문이다. 기억의 빈 부분을 채우고 어긋난 자리를 바로잡는 것은 서사 문학 속 인물의 주된 과업이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한 공간이 빈 채로 온전하게 존재할 수 없는 불완전한 자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사 속에서 기억은 언제나 탐색과 나란히 놓인다. 인간은 기억을 실재보다 더 미화하려는 습성이 있다. 그래서 그 기억을 탐색하는 일은 때로 알고 싶지 않은 진실에 맞닥뜨려야 하는 것일 수 있다. 기억을 파헤칠수록 왜곡된 기억은 그 처연한 실체를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것은 모르는 채로 두는 편이 낫지 않을까?


 

가즈오 이시구로의 <우리가 고아였을 때(When we were orphans)>는 어린 시절 놓친 기억에 관한 이야기다. 이야기는 전쟁으로 전 세계에 암운이 드리워진 1930년대를 배경으로 런던과 상하이를 넘나들며 전개된다. 주인공 크리스토퍼 뱅크스는 런던에서 성공한 탐정이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늘 채워지지 않은 빈 공간이 있다. 작가는 그 빈 공간의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 인물의 과거로 독자를 이끈다. 그리하여 크리스토퍼의 유년을 이루는 상하이를 기억 바깥으로 끄집어 내는데 그것은 일인칭 화자의 인식 속에서 단편적이고 자의적으로 서술된다. 마침내 여러 상황들이 우연히 맞물려 기억에서만 존재하던 상하이로 크리스토퍼를 이끌지만, 이는 우연이기보다 필연이자 운명이다. 모든 해결의 실마리는 그것이 시작된 지점으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미결된 채 남아 있는 과거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자신이 자라난 곳으로 되돌아가는 서사는 제발트의 <아우스터리츠>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우리가 고아였을 때>는 좀 더 개인적이다. 말하자면 주인공에게 부여된 운명은 역사적 상흔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우리는 상하이로 떠난 크리스토퍼의 모습에서 기묘한 모순을 마주한다. 부모를 찾아야 한다는 개인적인 과업이 전쟁의 위기에 처한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근거없는 낙관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자신은 물론 그의 주위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크리스토퍼가 해결할 사건이 일촉즉발의 현실 문제를 타계할 힘이 될 것이라 믿는다. 이런 비논리성으로부터 크리스토퍼 자신에게 있어 개인적 결핍은 곧 온 세계의 상실과도 같은 큰 공백이라는 연상이 가능해진다. 즉 크리스토퍼는 자신의 심리적 결핍이 채워지는 동시에 이 세계도 완성되리라 믿는 것이다.


 

크리스토퍼의 결핍은 제목에서도 드러나는대로 고아로서의 삶에 있다. 이 소설에서 고아는 지시적 의미 그대로 크리스토퍼가 처한 상황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의 심리적 불구 상태를 은유적으로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오래 전부터 탐정이 되는 것 말고는 달리 생각할 수가 없었던 그에게 미결된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는 의식은 오랜 억압이었을 것이다. 사교계의 가볍고 허영에 가득 찬 삶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하고, 친구 오스본의 지적처럼 '정말로 뭘 하고 싶은지 모르'는 상태로 시간을 보내왔던 그에게 부모의 흔적을 추적해야하는 것은 숙명과도 같은 임무인 것이다. 이 책에는 크리스토퍼와 같은 심리적 결핍을 지닌 몇몇 인물들이 더 등장한다. 크리스토퍼가 운명적으로 빠져들었던 새라 헤밍턴, 운명에 대한 동질감으로 입양한 제니퍼도 심리적 결핍을 간직한 고아다. 그들 또한 자아의 불완전함을 세계의 불완전함으로 치환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삶을 산다. 크리스토퍼가 상하이에서 조우한 어린시절 친구 아키라가 남겨질 아들을 걱정하며 한 말은 그 결핍이 의미하는 바를 분명히 보여준다. "그 애가 세상의 실상을 알게 될 때 나는 그 애와 함께 있고 싶어." 그 말은 결국 세상의 불완전함에 대항하는 힘은 개인의 굳건한 내면이고 그것은 또한 상호 위로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아라는 것은 보호자의 부재라는 물리적 상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초래하는 큰 심리적 공허를 포괄한다.

 

 

크리스토퍼가 찾아낸 진실은 모르느니만 못했던 추악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모든 일이 끝난 뒤에 그의 심리는 훨씬 안정되었고 담담하게 현실을 마주하기 시작한다. 요컨대 공백이란 그냥 두는 것보다는 어떤 식으로든 채워지는 편이 낫다. 그것이 어떤 결론을 보여주었던 간에 같은 자리에 있지 않는 것이 중요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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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란 무엇인가 1 - 소설가들의 소설가를 인터뷰하다 파리 리뷰 인터뷰 1
파리 리뷰 지음, 권승혁.김진아 옮김 / 다른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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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란 무엇인가? 책더미에 파묻혀 숨쉬는 독서가라면 작가를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선명하게 눈 앞에 펼쳐내는 마법사 쯤으로 여길 것이고, 무수한 수사 표현 따위를 공부해야하는 수험생이라면 의미 없는 일에 매달려 골치아픈 글로 두통을 유발하는 악당 쯤으로 생각할 것이다. 한편 ​글 감옥에 갇혀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줄 날을 꿈꾸는 문청들에게 작가란 듣기만 해도 설레는 연인의 이름일 것이다. 원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작가는 작품을 창조하는 사람이다. 이 책 <작가란 무엇인가>에서 이야기되는 분야로 범위를 좁히면, 작가란 말하자면 소설을 창조하는 사람인 것이다.  

자신의 독서취향이 소설에 편중된 것 같다고 개탄하는 소리가 종종 들린다. 소설을 읽는 취향은 책을 통해 재미를 추구한다는 말일 테고, 그 재미란 우리 삶에서 더 중요하고 심오한 그 무엇에 반하는 가치라는 인식이 암암리에 자리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런 이유로 보다 높은 소양을 요구받는 이 사회에서 소설 읽기란 무척 조심스러운 길티 플래져로 치부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높은 소양을 삶과는 괴리된 추상적인 관념들에서 찾으려는 시도에 비한다면 소설 읽기야말로 우리 삶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실질적인 노력임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 삶을 이루는 거의 모든 것은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소설은 제외하고라도 영화, 만화, 드라마 등 인간이 재미를 얻고자 기웃거리는 거의 모든 것들은 이야기가 핵심이다. 그뿐인가. 우리 삶 자체도 이야기다. 사회면 기사 한 꼭지 조차도 인물이 특정한 배경 속에서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따라 일으키는 일련의 사건들이 아닌가. 소설은 이러한 도처에 있는 이야기들을 실어나르는 수많은 형식 중에서도 정수에 해당한다. 심지어 올더스 헉슬리는 이렇게 말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소설을 쓰기 때문에 키르케고르보다 여섯 배는 더 심오하지요." 그런 소설을 읽는 것이 부끄럽다니!


도대체 이야기가 이런 취급을 받는 마당에 최고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려고 애쓰는 사람들, 즉 소설가란 무엇이란 말인가. 작품을 통하지 않은 거장들의 목소리에는 주저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매일 몇 시간이고 작업실에 틀어박혀 원고지나 타자기, 혹은 컴퓨터와 고통스러운 싸움을 벌이는 동안에도 그들은 소설의 효용에 대해 강한 확신을 갖고 있다. 존 치버는 소설의 중요한 요소로 '거짓'을 들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은 삶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가장 깊은 감정을 표현해주는 교묘한 속임수"라는 말로 소설의 존재가치를 역설한다. 어슐러 K. 르 귄의 말을 들어 보자. "소설은 오직 인간만이, 특정한 상황에서만 쓰는 것이죠. 어떤 목적 때문에 써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목적 중 하나는, 우리가 전에 알지 못했던 것을 인식하도록 이끌어준다는 거죠." 한편 모순이야말로 소설의 핵심이라고 하는 옴베르트 에코의 주장은 과연 설득력이 있다. "늙은 노파를 죽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윤리학 논문에서 그 생각을 표현하면 F를 받겠지요. 소설에서라면 그 생각은 '죄와 벌'이라는 산문 걸작이 됩니다." 요컨대 소설은 거짓과 모순이 허용되는 영역이라는 점에서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다 자유롭게 보여준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소설을 쓸 때보다 기사를 쓸 때 진실을 더 적게 말한'다고 하는 줄리언 반스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생각도 비슷하다. "저널리즘에서는 기사가 가짜라는 한 가지 사실만이 기사 전체에 편견을 갖게 만듭니다. 대조적으로 소설에서는 이야기가 진짜라는 한 가지 사실이 작품 전체를 정당화해줍니다." 그리고 그는 "소설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야기가 진짜라고 믿게 만들 수 있는 한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고 덧붙인다. 말하자면 저널리즘이 실어 나르는 사실 속에는 종종 진실이 결여되어 있으며, 본질적으로 거짓인 소설은 역설적으로 진실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소설은 인간을 즐겁게 한다. 필립 로스는 "소설을 읽는 것은 깊고 독특한 기쁨이며, 성(性)과 마찬가지로 도덕적, 정치적 정당화를 요구하지 않는 흥미롭고 신비로운 인간 활동"이라고 지적한다. 이러니 소설을 쓰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


누군가는 가구를 만들고 누군가는 자동차를 만들듯이, 작가는 소설을 만든다. 일관적인 메뉴얼이 있는 가구와 자동차도 생산자 혹은 소비자의 취향이나 용도에 따라 그 모양과 크기가 셀 수 없이 다양할 것인데, 인간의 인식과 감성에 호소하는 소설의 다양하기는 이루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작가가 가진 신념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 혹은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의 요구에 따라 작가들이 만들어내는 세계도 다양하다. 예컨대 가즈오 이시구로나 무라카미 하루키는 음악 속에서 이야기를 찾아낸다. 오르한 파묵은 서구에 대한 문화적 열등의식을 자신만의 개성으로 승화했고, 폴 오스터는 타인의 경험을 듣는 일을 통해 바깥 세상의 역동성을 체험한다.  표현에 있어서도 정해진 것이 없다. 밀란 쿤데라는 문학적 예술 형식을 완성하기 위한 수사적 기법에 깊이 몰두하는 모습이다. 반면 잭 케루악은 '기교'보다 '느낌'을 좋아하여 숙고를 거듭하기보다 즉흥적 문체를 사용하기를 즐겼다. 세상에는 이야기되지 않은 것보다 이야기된 것이 더 많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매번 이야기 속에서 새로움을 찾을 수 있는 이유는 수많은 작가들의 수많은 인식 속에서 어떤 것도 똑같이 묘사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살만 루슈디는 "글이란 작가가 쓴다기보다는 작가를 통과해 나오는 것"임을 강조했다. 소설은 스스로 존재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작가라는 한 타인의 전체를 거쳐 탄생하는 것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역동적인 생산물이다. 이처럼 수많은 작가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듣자면, 우리 세상을 둘러싼 이야기들의 풍요로움에 새삼 감사하게 된다. 그러니 왜 소설을 읽지 않는가 말이다.


소설가의 인생과 사상, 창작 방법과 작업 스타일에 대한 밀도 깊은 인터뷰는 단순히 한 개인에 대한 이해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 작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자칫 표현론적 관점의 문학 해석을 강요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은 크게는 작가 개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그들의 생산물로 귀결된다. 작품이 탄생하기까지의 각자의 방식들을 여러 각도에서 보여줌으로써 그 작품의 존재 가치와 의미를 상기시킨다. 그러니까 작가는 결국 그들의 작품을 통해서만 이야기되는 존재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롤리타'가 유명한 것이지 제가 유명한 게 아니지요. 저는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을 가진 무명의, 그것도 전혀 알려지지 않은 소설가에 불과하지요." 작가가 없으면 작품이 없는 것이 자연법칙에 따른 선후관계지만, 예술적 진리에 따르면 이는 반대다. 작품이 없다면 작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한 사람의 작가가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내던지는 작업에 몰두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의 이야기를 탄생시키기 위함이다. 인종주의의 억압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토니 모리슨의 삶도, 최악의 전쟁을 체험했던 커트 보네거트의 삶도 그들의 인생을 관통한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된다. 작가적 정체성과 정치적 입장 사이의 미묘한 긴장의 줄타기를 벌여야 했던 오르한 파묵이나 살만 루슈디 같은 작가에게 있어서도 그 삶의 굴곡은 결국 소설을 통해 말해진다. 작품이 없다면 개인의 경험이나 나아가 민족적, 국가적, 전인류적 현상에 대한 문제제기는 시작될 수 조차 없을 것이다. 헉슬리는 "작가는 우선 관찰하는 사실에 질서를 부여하고 삶에 의미를 불어넣고자 하는 갈망을 가진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결국 작가란 세상으로부터 취한 온갖 것을 끌어 안고서 자신의 작품에 그 모든 것을 내어준 뒤 그 뒤에 숨어 모습을 감추어 버리는 순교자와 같은 존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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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봄
심상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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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영화 <빌리지>는 자신과 마을의 근원도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그들이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는지도 모르고 그들만의 문화, 그들만의 전설, 그들만의 금기를 가지고 살아간다. 외부 세계에 대한 호기심은 마을에 전해오는 설화적 상상력에 의해 통제된다. 심상대의 <나쁜봄>은 영화 속 마을을 연상시키는 '우리고을' 이야기다. 다른 고을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곳은 그냥 '우리고을'이다. 그 곳에는 소유도 다툼도 번민도 없고, 그들만의 문화와 전설, 금기만이 사람들 사이에 말로 전해진다.


작가는 '우리고을'을 통해 인류가 수없이 반복해 왔을 질문을 던진다. 완전한 유토피아란 존재하는가 하는 물음. 모든 인간을 만족시키는 이상적 사회에 대한 꿈은 어떠한 형태로 나타나는가 하는 문제를 소설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그려낸다.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은 현실 사회의 병폐에서부터 출발한다. 그 병폐를 정의하는 관점이 유토피아의 성격을 규정짓는다. 한국적이고 토속적인 이상향 '우리고을'은 모든 사람이 미남미녀로 태어나고 200세에 가까운 수명을 가지고 살아간다. 해마다 '정씻기술'을 마셔 기억과 감정을 지워버리고 '새낭군맞이'를 통해 새로 부부의 연을 맺을 수 있는가하면 하는 일과 사는 일도 해마다 바꿀 수 있다. 우리를 위협하고 우울하게 하는 경쟁도 없고, 속박하는 가족도, 미추의 개념도 사라진 곳이 <나쁜봄>이 그리는 유토피아다. 모든 증오와 번민이 사라진 곳에 일년에 단 한번 봄마다 '광증'을 띠는 젊은이들이 출몰한다는 위협요소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해마다 큰보름날과 한식(寒食)에 치러지는 화형식을 통해 광인을 처형하고나면 일년 동안 마을의 안녕은 유지된다.


이러한 섬뜩한 집단살인 행위가 정당화되고 미화되는 지점에 이 유토피아가 지닌 허구성이 드러난다. 화형에까지 이르게 하는 이른바 '광증'의 징조란 대개 이런 것이다. 아름다움을 예찬한다거나 자신이 낳은 자식에 대한 애착을 드러내는 것, 신을 믿거나 사랑에 빠지는 일 등. 말하자면 모든 인간다운 가치가 '광증'이라는 용서받지 못할 죄목으로 분류된다. 어떤 것은 봄이라는 계절이 가져다주는 일시적인 혼란으로 치부되지만 어떤 것은 치명적인 위험요소로 여겨진다. 그 중 '우리고을'이 가장 경계하는 광증은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는 모든 행위다. 이야기를 만들어서 들려주는 일과 무언가를 알고 싶다는 욕망은 살인보다도 더 위험한 행위다. 그것은 이 고을의 평화가 인간의 모든 호기심과 상상력을 통제함으로써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상상력의 통로인 '말'이 통제되어야함은 당연하다. '우리마을'이 이름을 가져서는 안되는 것도 '신, 아버지, 어머니'와 같은 말들이 알려져서는 안되는 것도 근원에 대한 단서가 공동체의 조화를 위협하는 상상의 통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다'라는 말이 없는 세상에는 '바다'가 없다. 그래서 '우리고을'은 아버지의 존재를 기억하지 않기 위해 그 말을 없앤다.


그간의 많은 유토피아가 첨단 과학 기술을 토대로 형성되었던 것과는 달리 <나쁜봄>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대부분 일차산업에 종사하며 전통 문화와 관습을 고수하며 살아간다. 묘사되는 고을의 풍경과 삶의 방식은 마치 시대물을 보는 것처럼 예스럽지만 소설에 설명되는 배경을 되짚어 따라가보면 이들이 살고 있는 시대는 오늘날과 일치한다. 이 고을만이 인류 역사의 흐름에서 홀로 정체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유토피아가 지닌 고립성을 더 뚜렷하게 드러낸다. 말의 통제와 시공간의 고립으로 인해 유지되는 이곳에는 어떠한 개인적 판단도 개입할 수 없다.


개인의 생각이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는 이 고을에 미와 추의 속성을 동시에 갖고 있는 뱀의 출몰이 상징하는 바는 크다. 유토피아에 대한 무한 낙관주의는 무너져 내리고 사람들은 유폐된 감정을 불러들인다. 그해의 '봄'은 다른 때보다 더 '나쁜' 모습이다.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예찬하기 시작하고 사랑의 감정에 겨워 춤을 추는가 하면 질투라는 욕망에 자신을 오롯이 내어준다. 이 '나쁜봄'은 인간의 정념이라는 불꽃이 마음껏 활개치는 계절이다. 혼란과 무질서가 극대화되는 이 시기는 개인의 욕망과 개성이 가장 뚜렷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유토피아가 평화와 안녕의 방법으로 억압한 것이야말로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이 자명해지는 순간이 이 고을에 해마다 찾아드는 '나쁜봄'이다.


모든 유토피아의 출발 지점이 결국 유토피아의 종언을 야기한다. 감정이 통제되는 곳에서는 결국 감정의 과잉이 평화와 안녕을 위협하게 되어있다. 완전한 유토피아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유토피아를 유지시키는 기제가 '억압'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유토피아는 개인적 차원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닌데, 인간의 행복은 개성의 발현에서 출발한다. 아무리 이상적으로 계획된 사회라도 반드시 개인의 욕망과 충동하게 되어있다. 통제되고 억압된 정념이 불타오르는 매년 봄은 '우리고을'의 허구성을 해마다 드러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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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14 0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깐짜나부리 2015-04-19 13:44   좋아요 1 | URL
좋은 책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허구적 유토피아 공동체의 모습이 지역과 시대를 넘어 비슷한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참 흥미로운 주제 같습니다.
 
두번의 자화상
전성태 지음 / 창비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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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글 잘쓴다는 작가들이 유려한 문체에 휘둘려 흔히 빠지기 쉬운 감상이 이 책에는 아예 없다. 대신 생활에서 건져 올린 투박한 말과 실감나는 현장감이 페이지를 가득 메운다. 기사식당 백반처럼 멋대가리는 없지만 감칠맛 나는 소박한 풍미가 있다. 전성태의 <두번의 자화상>에 실린 열두 편의 소설이 그리는 세계는 근간에 만연해 있는 주지주의적 경향을 벗어나 실감나는 삶의 현장에 주목한다. 그러나 기술적(記述的) 내러티브에 의존한 르포르타주 같은 생생함을 상상해선 안된다. 각각의 소설들에는 단조로운 삶에 대한 응시가 돌연 활력을 머금은 이야기로 돌변하는 순간들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집은 주변에서 들을 수 있을 법한 세간의 이야기를 펼쳐 놓지만 작품들이 주목하는 세계는 몇 가지 경향으로 수렴된다.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한국 현대사의 상흔과 현실의 부조리를 짐짓 드러내는 능청스러움이다. <로동신문>, <성묘>, <망향의 집>은 작가 자신이 '휴전선을 여행하며 궁리한 소설들'이라고 밝힌 것처럼 분단과 이산의 상처를 넌지시 드러낸다. 또 광주의 상흔을 그린 <국화를 안고>와 이주노동자 문제를 통해 오늘의 한국 사회를 조망하는 <배웅>과 같은 작품도 국가적 정체성을 뚜렷이 보여준다. 이 소설들은 진지하게 묵직한 얘기를 해보자는 자세로 무게잡는 대신, 그 문제를 한발짝 물러서서 조망할 수 있는 인물들을 등장시켜 우회적으로 접근한다. 또 배경 또한 그것이 얘기되고 있는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벗어나 있다. 이야기가 벌어지는 곳은 한 임대아파트의 경비실이거나 가장 한국답지 않은 인천공항같은 곳이다. 작가는 시계추를 되돌리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평범한 인물들의 삶을 그려냄으로써 과거를 응시한다.


고달프고 부조리한 어른들의 생활 속에 병들어 가는 아이들의 애환을 그린 작품들도 눈에 띈다. <낚시하는 소녀>에 그려진 어른의 삶은 누추하고 비루하다. 그 비참한 세계 속에서도 순수와 동심은 지켜져야할 소중한 가치인 것처럼 그려진다. 그러나 소설은 그 환상을 가차없이 무너뜨린다. 아이의 관음적 욕망을 통해 비춰지는 어른들의 남루한 삶은 그 비극성이 더욱 부각된다. 황순원 작 <소나기>의 모티프를 가진 <소녀들은 자라고 오빠들은 즐겁다>는 그러나 <소나기>의 순수 세계를 비웃는다. 세계는 아이들에게 어떠한 타협도 허용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이어져온 삶의 냉혹함을 고스란히 견뎌낼 수밖에 없게 된다. 두 작품은 현실에 무너져 가는 동심의 세계를 어떤 감상과 페이소스도 개입시키지 않은 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또한 시종 기억의 이야기를 끄집어 낸다. 소설집의 첫 작품 <소풍>에서의 장모와 <지워진 풍경>의 아내, 마지막 작품 <이야기를 돌려드리리다>의 어머니는 모두 기억을 잃어가는 존재들이다. 별개의 작품이지만 이들의 행위 양식을 볼 때 그들이 동일한 인물이리라는 혐의가 짙다. 특히 <이야기를 돌려드리리다>의 일인칭 화자는 자전적 색채를 보다 강하게 하며 위의 세 인물들에 대한 작품 외적 세계를 짐작케 한다. 기억의 문제는 이야기로 치환된다.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살아온 이야기들을 통째로 잃어버리는 것이며, 이야기를 잃는다는 것은 육체만 빈 껍데기로 남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에게 있어 기억, 즉 이야기는 거의 모든 것이다. 기억의 상실은 이야기를 잃어가는 우리 세계에 대한 은유나 마찬가지다. <이야기를 돌려 드리리다>에서 기억을 잃어가는 어머니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화자의 모습에는 이 소설집의 이야기들을 독자에게 내미는 작가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소설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세계는 가볍지 않다. 그러나 이야기되는 방식은 발랄하다. 소설 속에는 번득이는 위트와 허를 찌르는 전개가 도처에 자리한다.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웃음이 터진다. 머리가 아프다며 은나노 팬티를 머리에 뒤집어 쓴 아내가 바가지를 긁는 모습(성묘)이나 개밥그릇 하나를 얻기 위한 교묘한 연기가 제 발등을 찍게되는 상황(밥그릇)은 이 책의 해학성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또 국가적 이념과 사상에 대한 담론이 한순간에 은밀하고 개인적인 경험의 차원으로 전복되는(로동신문, 망향의 집) 반전은 소설의 묘미를 더해준다.


<두번의 자화상>에 현대 소설의 하나의 경향이 되어버린 인물들의 실존적 고뇌같은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서사가 자의식 속에 갇혀 있지 않고 세상 밖으로 뛰쳐나와 활개친다. 여항의 이야기들을 옮겨낸 듯 이야기들은 사실적으로 움직이고, 세계를 반추하는 삶의 단편은 절묘하게 포착된다. 오늘날 보기드문 이 리얼리즘 서사가 '새로움'이라는 매너리즘에 빠진 한국 소설의 처방전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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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의 자화상
전성태 지음 / 창비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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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나는 한국 사회를 담은 리얼리즘. 도처에 널려 있는 삶의 모습을 그대로 지나치지 않고 세밀하게 들여다보며 우리 사회의 오늘날을 투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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