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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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우선 소설가의 스테레오타입을 내던진 작가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 치중한다. 이를테면 '비주류 작가'의 소설과 삶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라면 비주류이기는 커녕 일본 작가를 떠올릴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작가라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의 행보는 애초에 제도적 문단에서 요구하는 것과는 달랐다. 이른바 일본내 주류파 순문학계의 강한 비판을 받아왔고, 문학계의 아웃사이더로서 하루키는 줄곧 자기만을 문학을 해 왔다. 그가 소설을 쓰게된 동기는 어디까지나 소설 쓰기의 즐거움 때문이다. 그는 소설에 대해 공부한 적도 없고 문학계의 흐름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정말로 쓰고 싶은 글을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 당연히 비판도 많았지만, 그 결과는? 그의 열렬한 독자이든 아니든 그가 이루어 낸 성과에 대해서는 누구도 토를 달지 못할 것이다. 


무라카미의 소설 쓰기는 제도화된 문단과 무관하게 이루어졌지만 그는 대중성에서도 작품성에서도 보기드문 성취를 이루어냈다. 이는 소설을 쓰고 읽는데 있어서 개인의 영감과 꾸준함, 치열함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는 기성의 순수문학에 걸맞지 않는다는 세간의 평에도, 이쿠타가와상을 받지 못한 작가라는 한계에도 굴하지 않고 꾸준히 창작활동을 했다. 오히려 일본 순문학계의 외면은 그가 해외 시장에 눈을 돌리는 계기가 되어 하루키를 국제적 작가로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런 독자적인 행보는 우리의 문학계 현실에 대해서도 많은 질문거리를 던져준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는 소설 작법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고, 기성 문단이 요구하는 적절한 기준에 맞는 글을 써서 등단할 수 있는 비결을 알려주는 책도 아니다. 역으로 이 책은 우리가 제도 문학 속에서 기획되고 만들어지고 검수된 작품만을 접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자신이 쓰고 싶은 소설을 치열하게 쓰라는 것이 이 책의 요지인데, 달리 말하면 세상에는 쓰고 싶은 것을 쓰지 못하는 소설가들이 많다는 말이 되겠다.


냉정하게 말해서, 한국 소설이 재미있는가? 대부분이 '소설에 따라서'라고 하겠지만, 내 대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잡으면 손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외국의 장편소설들에 비해 우리 소설은 그저 한국어의 아름다운 문체와 유려한 쓰임에 대한 것을 제외하고는 볼 것이 없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읽다가 멈춘 뒤에 다시 손이 가게 하는 강력한 힘을 가진 스토리텔러가 상대적으로 우리나라에는 너무 없다. 적어도 문학상 수상으로 화제가 된 작품들이나 어떤 이유로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장기간 유지하고 있는 소설만 보면 그렇다. 소설이 스토리텔링이 전부가 아니고 일종의 언어 예술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그 본질은 역시 스토리텔링에 있다. 한국 소설에는 이것이 너무 철저하게 빈약하다. 장편소설이라고 나오는 작품들을 보면 대개가 단편의 장면들을 확장해서 장황하게 늘려놓았다는 느낌이 들 뿐, 단편에 비해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분명 작가들의 역량이 부족하고 쓸 거리가 한정되어 있어서는 아닐 것이다. 우리 문학을 좌지우지하는 제도 어느 한 구석에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는 무언가가 버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품은 독자의 손에 닿기 전에 그 무언가에 의해 엄중한 평가를 받기 때문에 독자가 볼 수 있는 글은 한정되어 있다. 그 '체'에 걸리지 않기 위해 작가들은 재미있는 글 같은 것은 애초에 쓸 생각을 않는다. 독자는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만을 수용하게 되어있기 때문에 소설은 '재미없는 것' 이 되어버린지 오래다.


독서 인구가 낮다고 한탄하는 말이 많이 들린다. 다른 국가와 독서량을 비교해 놓은 수치에서 우리나라는 항상 꼴찌다. 국민의 문화적 수준을 탓하는 말도 들린다. 그러나 세상에 새로운 이야기,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 세상은 온통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우리가 향유하는 문화는 대체로 이야기에 기반하고 있다. 제도 문학의 검증을 거치지 않은 수많은 이야기들이 인터넷 공간을 떠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글을 읽고 즐거워한다. 이야기의 매력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좋은 이야기만 있으면 사람들은 언제든지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좋은 이야기를 생산하는 통로는 무언가로 꽉 막혀버렸다. 독서 인구 수치에 대해서 독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간단히 말해 재미가 없으니 안 읽는 것이다. 독자 이전에 그 생산의 매커니즘에 문제가 없는지 고민해볼 일이다. 누구나 소설을 쓸 수 있고 잘 쓴 소설은 평론보다 독자에 의해 평가받을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독자는 재미있는 소설을 향유할 기회를 일정부분 박탈당하고 있으니 읽을 소설을 고르는 안목도 역시 무뎌졌다. 그래서 '수상작'이거나 '베스트셀러' 따위의 문구에 현혹되어 그것이 훌륭한 소설인냥 받아들이게 된다. 훌륭해 보이지 않고 간혹 이해되지 않는 구석이 있더라도 그것은 내 교양의 일천함이나 수준 낮음 탓이지 책이 잘못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작품의 생산 통로가 막혀 있으니 우리가 읽는 작품은 우리를 세뇌시킨다. 훌륭한 작품에 대한 기준을 제멋대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아쿠타가와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아쿠타가와상 수상작품이라는 말에 훌륭한 책이라고 판단하고는 책을 집어든다.


문학이란 창의적인 영역이다. 작가는 자신의 '오리지낼리티'를 발현하여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어내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등단이라는 예술발전을 저해하는 기형적인 제도가 있어 자신의 '오리지낼리티'는 깊숙이 감추어 놓아야 작가가 될 수 있는 환경에 놓여 있다. 신춘문예나 이런 저런 문학상에는 그것이 요구하는 틀이 있고 그에 맞지 않으면 비난받고 '정식'으로 작가가 될 기회가 차단된다. 가장 창조적이어야 할 직업에 모범답안이 있는 참으로 기이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작가가 정신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면 우리 문학은 영원히 우물안 개구리 신세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하루키는 이러한 기성 제도를 뛰어넘어 자신만의 '오리지낼리티'를 발현해 냈다. 자신이 쓰는 소설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기존의 평가에 초연할 수 있었다. 오히려 답답한 제도 문단을 해외 프런티어를 개척하는 계기로 삼았다. 우리는 너무나 견고한 기성 체계의 틀을 깨고 자신의 작품을 써내는 작가가 없거나, 지나치게 외면당하고 있다. 아마도 작가 지망생들의 서재 서랍 속에는 수많은 놀라운 이야기가 먼지가 소복히 앉은 채 쌓여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영원히 독자의 평가를 받을 일이 없을 것이다. 창작할 자유도 향유할 자유도 제도라는 틀 속에 갇혀 사라져 버렸다. 우리도 하루키처럼 치열함과 확신으로 가득찬 외골수가 어디선가 튀어 나오기만을 가만히 앉아서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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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평에 대한 논평.
    from 별처럼님의 서재 2017-03-18 17:26 
    한 블로거의 서평에서 전재. <그의 행보는 애초에 제도적 문단에서 요구하는 것과는 달랐다. 이른바 일본내 주류파 순문학계의 강한 비판을 받아왔고, 문학계의 아웃사이더로서 하루키는 줄곧 자기만의 문학을 해 왔다. 그가 소설을 쓰게된 동기는 어디까지나 소설 쓰기의 즐거움 때문이다. 그는 소설에 대해 공부한 적도 없고 문학계의 흐름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작품의 생산 통로가 막혀 있으니 우리가 읽는 작품은 우리를 세뇌시킨다. 훌륭한 작품에 대한
 
 
 
지금이니까 인도, 지금이라서 훈자
박민우 글.사진 / 플럼북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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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에서 비행기의 도착과 호텔 도착 사이의 여백을 무수히 많은 순간들로 채우면서, 여행 책자의 추상적 이미지가 여행의 전부일 수 없다고 강조한다. 무릎을 쳤다. 여행은 추상화된 이미지가 전복되는 순간에 흥미로워진다. 만약 이 책이 인생의 터닝포인트에서 자아를 되돌아 보기 위해 인도행을 결심하게 되었다는 식의 장황한 서문으로 시작했다면 (샀으니 읽기는 하겠지만) 읽는 내내 '퍽이나, 잘도' 따위의 추임새를 동반한 뒤틀린 시선을 자제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인도에 대한 많은 책들이 천편일률적으로 혼돈 속에서 깨닫는 영혼의 자유 같은 식의 환상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 탓이 크다. 인도는 그런 곳이 맞을지언정, 여행은 그런 것이 아니다. 여행은 개인과 장소가 우연히 만나 일으키는 예상 밖의 화학 작용까지를 포함한다. 가령 편도 20만원이라는 에어아시아의 계시를 받은 가난한 여행자가 인도와 만나는 우연한 순간 같은.


박민우의 인도 파키스탄 여행기 <지금이니까 인도, 지금이라서 훈자>는 역시 기대를 져버리지 않는다. 시작부터 지지리 궁상이 따로 없다. 모처럼 크게 투자한 비행기 프리미엄 좌석 이벤트는 어이없는 해프닝으로 마무리되고, 매대의 염가 판매 등산화는 빼도박도 못하게 파키스탄행을 제 스스로 결정지었다. 첫 도난 사고는 공항을 빠져나와 숙소로 향하는 순간 벌어지고 만다. 이렇게 상처받은 베테랑 여행자의 자존심을 달래주는 것은 인도의 이국적이고 웅장한 풍광이 아니라 빨간 토마토로 속을 채운 촉촉한 오믈렛이다. 작가는 여행 베테랑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휘몰아치듯 연이어 벌어지는 사기 사건과 습하고 뜨거운 날씨에 항복하고 만다. 그런데, 글은 생지옥을 묘사하지만 글을 읽는 사람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황당함의 극치에 배를 잡고 웃게 된다.  


그래서 작가는 인도가 싫어졌을까? 여행은 언제나 최악의 순간에 뜻밖의 반전을 내어 놓는다. 함피의 풀냄새와 값싸고 당도가 높은 포도 한 송이는 까칠한 여행자의 마음을 무력하게 한다. 사진기 앞에서 훌륭한 모델이 되어 주는 사람들, 조미료를 잔뜩 넣은 짭짤한 볶음면, 한 밤에 영롱하게 빛나는 황금 사원 같은 것들은 연이어 여행자의 경계심을 무너뜨린다. 폭력적인 더위로 인한 불면의 밤은 오히려 메헤랑가르 성이 어렴풋이 보이는 옥상에서의 황홀한 잠을 선사한다. 그렇게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저도 모르게 찾아온다.


결론은 해피앤딩. 이 가난한 여행자는 서문에서 30만원도 채 안되는 돈으로 한 달을 살면서도 행복하다고 고백하는데, 이 생고생 이야기를 읽으면 그것이 사실임을 별수 없이 인정하게 된다. '전세 자금이 억이 넘는데, 그 돈이 없으면 돈이 없어?란 말을 들어야 한다.' 작가는 더 많이 갖고 더 높이 올라가기를 강요하는 우리 사회의 깊은 병을 무덤덤히 꼬집는다. 우리는 200원도 안 하는 포도 두 송이에도 행복해 할 수 있는 존재인데, 사람들은 그런 것에서 행복을 찾지 않는다. 여행사에서 제공하는 낭만적인 이미지 사진들보다 이 구질구질한 체험담이 더 마음을 울리는 까닭은 도처에서 만나는 작은 것들의 소중함을 문득 깨우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책에는 타지마할의 수려함에 대한 감탄사도, 갠지스 강가에서 깨닫는 삶과 죽음에 대한 심오한 성찰도 없다. 이 책은 여행자와 장소와의 궁합, 사람과의 만남에 대해 고도로 디테일하게 이야기한다. 알랭 드 보통이 언급했던 '현실은 기대와는 다르다'는 점은 바로 이런 생생한 여행기를 통해 증명된다. 그리고 이 여행기는 여행이란 개별적인 사람과 개인적인 경험, 그리고 각자의 느낌을 담은 철저한 자신만의 영역임을 역설한다. 몇몇 화려한 이미지 몇 점과 광활한 진공으로 채워진 여행기를 읽을 바에는 '론니 플래닛'을 읽겠다. 진짜 여행기는 이미지 사이의 공백을  체험으로 촘촘히 채워 놓은 글이다. 그것이 지나치게 개별적이라도 별 수 없다. 여행은 그렇게 개별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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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16-09-14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석 잘 보내세요~~~
 
성난 군중으로부터 멀리
토머스 하디 지음, 서정아.우진하 옮김, 이현우 / 나무의철학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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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하디의 초기 출세작이며 '최초의 페미니스트 문학'이라는 찬사를 등에 업은 <성난 군중으로부터 멀리(Far from the madding crowd)>는 19세기 영국의 농촌을 배경으로 한 전원 소설이다. <테스>를 기억한다면 목가적인 풍경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와 함께 인물의 운명에 대한 치밀한 탐구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웨식스 소설'의 계보를 이루는 작품인 만큼 전원의 낭만이 한껏 느껴지는 묘사가 일품이다. 농부들이 낡은 선술집에 모여 싸구려 술을 걸치며 몸을 녹이는 모습이나 구슬픈 피리 소리가 퍼지는 해질녘의 서쪽 하늘의 쓸쓸한 풍경이 눈에 들어올 듯 서정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배경이 소설의 분위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이 소설은 무엇보다 인물에 집중한다. 소설은 <테스>와 마찬가지로 주체적인 여성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주인공 밧세바 에버딘과 그녀를 둘러싼 세 남자의 사랑이야기라는 플롯을 가진 이 책은 인물의 성품을 묘사하는데 유독 공을 들인다. 흥미로운 것은 밧세바와 그녀를 둘러싼 세 명의 남자가 오늘날까지도 러브 스토리 속에 꾸준히 반복되는 인물의 전형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밧세바를 사랑하는 세 명의 남자는 지금도 텔레비전을 켜면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전형성을 뚜렷하게 띤다. 이는 시간의 내압에도 살아남은 고전의 힘을 다시 확인시킨다.


가브리엘 오크는 뛰어난 배경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재능이 있고 성실하다. 강한 남성성에 어필하지는 못하므로 처음에는 늘 히로인으로부터 외면당한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마다 안팎으로 큰 도움을 발휘하며 조금씩 신뢰를 쌓는다. 이러한 성실함과 우직함으로 마지막에는 사랑을 쟁취하고야마는 대기만성형 인물이다. 혹은 사랑을 끝내 쟁취하지 못할 때는 그 애틋함으로 인한 동정이 히로인에 대한 비난으로 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는 영향력 있는 인물이다. 트로이는 가브리엘 오크와는 대척점에 놓인 나쁜 남자의 전형이다. 근사한 배경과 외모 때문에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 편이고, 강한 남성성을 보인다. 이성으로서 치명적인 매력이 있어 히로인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제격인 인물이다. 이러한 인물은 그 사랑이 진실할 경우 많은 지지를 얻지만, 대개는 '나쁜 남자'라는 오명대로 여자를 불행으로 몰아가는 경우가 많다. 볼드우드 같은 경우는 여자 앞에서 서툰 쑥맥의 이미지를 가지는데, 그 때문에 여자에게 휘둘리기 쉽고 한번 사랑에 빠지면 망상과 집착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 인물은 유약함이라는 결점 때문에 결코 히로인을 차지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성난 군중으로부터 멀리>는 이처럼 뚜렷한 성격을 보여주는 세 유형의 남자들이 한꺼번에 등장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차례대로 등장과 퇴장을 반복하며 소품처럼 소모되고 있지는 않다. 소설은 히로인을 둘러싼 구애와 거절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이들 간의 얽힌 관계는 단조로운 사랑 놀음에 그치지 않고, 인물들이 적재적소에 부각되어 역동적인 플롯을 완성한다. 한 여자를 둘러싼 각기 다른 남자들의 구애는 여자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장치 이상으로 기능한다. 사랑이라는 큰 주제 아래에 욕망과 질투, 체념과 인내 등의 인간 감정을 두루두루 보여주고 있으며 그 일련의 감정들이 개연성있게 흘러가며 스토리를 유기적으로 조직한다. 성격과 환경이 하나의 상황을 만나 어떻게 운명을 이끌어 가는지에 대한 치열한 탐구가 드러난다.


고전이 그리는 세계는 낡고 오래된 것이 아니라 현실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오히려 신선하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 가치를 이야기하는 책들이 결국 살아남는다. 그것은 다양하게 변형되고 변질되기 이전의 모습을 담고 있어서 그 형태를 더 분명히 드러낸다. <성난 군중으로부터 멀리>는 일견 바람직한 배우자상에 대한 진부한 논점을 드러내는 것 같지만 그 가치가 오늘날까지도 유효하다는 점에서 상당한 진보성을 보여준다. 과연 거장의 작품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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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15-07-11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전이 그리는 세계는 낡고 오래된 것이 아니고 현실을 새로 그린다는 말 정말 감동이네요 :) 이말 밑줄 안 그어도 잘 기억될 거 같습니다.
책도 장바구니에 넣어봅니다.
 
2015 제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정지돈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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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조중균이라면, 무엇이든 빨리 변하고 쉽게 잊혀지고 깊이보다 속도에 치중하는 이 사회에 지쳐 있을 것입니다. <조중균의 세계>는 포장보다 진정성에 대해 질문하고 있습니다. 김금희 작가님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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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친구들 1
줄리언 반스 지음, 한유주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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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친구들(Arthur & George)>은 추리소설의 플롯을 부분적으로 취하고 있어 흡사 셜로키언의 구미를 생각한 팬픽을 보는 것 같은 착각마저 일으킨다. 그 유명한 셜록 홈즈 대신 그의 창조주가 위대한 탐정의 역할을 맡고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말이다. 영국의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소설가 중 한 명인 줄리언 반스가 셜록 홈즈의 창조주에게 바치는 이 헌사는 그의 삶을 일대기적으로 늘어놓기 보다, 그의 일생이 다른 한 인물과 만나는 특별한 지점을 부각시키면서 소설적 완성도를 꾀한다. 그래서 소설의 원제는 '아서(Arthur)'가 아닌 '아서와 조지(Arthur & George)'다.


소설은 처음부터 아서와 조지라는 두 인물의 아무런 접접도 없는 각자의 삶을 끈기있게 추적한다. 두 개의 삶은 그것이 시작된 환경에서부터 각자의 신념과 가치관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특징도 공유하지 못하는 별개의 삶인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알려진대로 셜록 홈즈를 창조한 아서 코난 도일의 삶이고, 다른 하나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는 조지 에들지라는 인물의 삶이다. 이 두 개의 삶이 하나의 이야기로 만나기까지 오랫동안 계속 이어지는 각자의 삶은 상당한 끈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이 오랜 과정을 통해 작가는 이야기의 연결고리를 치밀하게 쌓아올린다. 상상력과 에너지가 넘치는 아서는 단조롭지만 평온한 삶을 보장하는 성직자의 삶을 거부하고 자신이 선택한 길을 걸어간다. 그는 실리적이고 야망도 있지만 상상력이 풍부하고 무엇보다 친화력이 뛰어나다. 이런 그의 성격은 미천한 성장 환경에서도 아서를 성공적인 사회의 일원으로 만들어준다. 반면 인도 파르시 출신인 목사 아버지 밑에서 금욕적인 생활을 해 왔던 조지는 정반대의 성향을 지니고 성장한다. 그는 영특하고 논리적이지만 다소 내성적 기질을 가지고 있다. 그의 유년은 부족함이 없으면서도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는데 작가는 조지의 운명이 꼬이는 지점을 그의 환경과 성격을 통해 암시한다.


마침내 조지와 아서의 삶이 만나는 지점에서 우리는 하나의 익숙한 역사적 사건을 떠올리게 된다. 19세기 말 프랑스를 들썩이게 했던 드레퓌스 사건이 그것인데, 그 본질의 유사성을 발견하는 순간 조지를 둘러싼 영국 사회의 부당한 분위기를 비로소 깨닫게 된다. 유대인에 대한 프랑스인의 증오가 만들어낸 어처구니 없는 드레퓌스 사건에서처럼, 순혈 잉글랜드인이 아니었던 조지는 영문도 모른채 어느날 갑자기 큰 시련에 맞닥뜨리게 된다. 소설은 그 과정에서 편견과 증오를 교묘하게 포장해 진실을 왜곡시키는 집단적인 광기를 드러내 보인다. 또한 법이라는 가장 합리적인 도구마저 무력하게 하는 뿌리 깊은 편견과 위선 앞에 한 개인이 어떻게 좌절하는지 보여준다. 조지와 아서는 각기 다른 이유로 이러한 위선과 맞서 싸우게 된다. 아서는 드레퓌스 사건 당시 에밀 졸라가 그랬듯이 눈 먼 사람들을 각성시키고 사회의 정의를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아서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편견과 차별에 대항하는 정의는 끝내 지켜지지 않는다. 그러나 비록 사회의 정의를 바로잡는 일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는 개인의 명예를 지켜냈다. 조지는 부적절한 대우의 대가로 아무 것도 얻어내지 못했지만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인사의 결혼식에 친구의 자격으로 초대됨으로써 잃은 명예를 되찾게 되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명예에 대한 문제는 여러번 부각된다. 이들이 살았던 시대는 종교적 신념에서 사생활에 이르기까지 모든 행위와 생각이 명예라는 가치에 직결된다. 아서가 갈등하는 것은 매번 명예의 문제이고 조지가 위협받는 것 또한 다름 아닌 명예다. 작가는 봉건의 잔재가 남아 있는 빅토리아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참다운 명예란 무엇인지 아서의 삶 전체를 통해 질문한다. 기사 작위에 거부감을 느끼고, 청교도적 정신에 반하는 신념을 지녔으며, 아내를 두고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사람에게 명예로운 삶이 가능한 것일까. 아서에게 있어 조지 에들지 사건은 작위, 종교, 전통적인 도덕관에 매여있는 허울 뿐인 명예가 아닌 참된 의미의 명예를 탐색하는 과정인 것이다.


조지 에들지 사건은 드레퓌스 사건 만큼 역사에 회자되지는 않지만 오늘날 영국의 상고법원이 있게 된 배경이 되었다. 줄리언 반스는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사실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피조물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작가 아서 코난 도일의 숭고한 삶을 들추어냈다. 영웅적 인물의 활약상이라는 매력적인 이야기를 추리적 기법으로 통쾌하게 풀어냈을 뿐만 아니라 그 시대 정신을 소설 속에 담아냈다. 21세기의 위대한 작가가 바치는 19세기 위대한 작가에 대한 오마주는 능숙한 문학의 기법과 어우러져 뛰어난 성취를 이루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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