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이 마을에서
사노 히로미 지음, 김지연 옮김 / 문예춘추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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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이와타의 조사원인 마사키는 보육원에서 갓 독립한 소녀 마키와 함께 하토하 지구라는 부유한 마을로 향합니다. 19년 전 하토하 지구에서 살다가 자신을 보육원에 맡기곤 갑자기 실종돼버린 가족을 찾아달라는 마키의 요구 때문입니다. 얼마 전 보육원을 나오자마자 가족 찾기에 나섰던 마키는 가까스로 어머니 료코와 절친이던 변호사 이와타를 찾아냈고, 이와타는 왠지 껄끄러워 하면서도 마사키에게 마키를 도우라고 지시한 것입니다 하지만 마사키와 마키가 찾아간 하토하 지구는 외부인에게 지독히도 폐쇄적인 것은 물론 안전하고 안심할 수 있는 마을에서 실종사건 같은 건 없었다고 잡아뗍니다. 즉 마키의 가족은 19년 전 자발적으로 마을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사키와 마키가 당시 이웃이던 기모토 지하루와 접촉하면서부터 상황은 급변하고, 그때부터 두 사람을 향한 마을 전체의 불온한 움직임이 감지됩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이 작품의 세부 장르는 동조 압력 미스터리입니다. 즉 그것이 잘못된 일이나 생각임을 알면서도 동조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집단 심리에 휘둘린 끝에 심각한 오판을 저지른 자들을 다룬 미스터리라는 뜻입니다. 자신이 다니던 자동차 회사의 결함 은폐를 알면서도 가족의 생계를 위해 눈감아버렸던 마사키, 학폭 피해자가 되기 싫어서 가해자 편에 섰다가 참혹한 비극을 맞이하고 만 마사키의 딸 에리, 업계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진실 찾기를 포기했던 변호사 이와타, 그리고 죽은 아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집에서 계속 살기 위해 이웃의 비극에 눈감았던 기모토 지하루 등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 대부분이 이른바 동조 압력의 피해자들이자 동시에 공범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크게 두 개의 축으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현재의 이야기로, 19년 전 벌어진 마키 가족의 실종을 조사하는 마사키의 행보이고, 또 하나는 과거의 이야기로, 22년 전 유치원생 아들 다카유키가 납치 살해된 시점부터 19년 전 마키의 가족이 옆집으로 이사 온 뒤 실종되기까지의 사건들을 1인칭 시점으로 설명하는 기모토 지하루의 고백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현재 시점의 하토하 지구에서 벌어진 또 하나의 사건으로 이어집니다.

22년 전의 유치원생 납치살해, 19년 전의 일가족 실종, 현재의 사건 등 모두 세 개의 사건이 등장하는데, 이 사건들은 하토하 마을에서 벌어졌다는 공간적 공통점뿐 아니라 실은 모두 동조 압력이라는 집단 심리에 의한 것이라는, 즉 크게 보면 하나의 사건으로 볼 수 있는 비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작품 속 하토하 지구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기이한 마을입니다.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진 남편, 전업주부이자 현모양처인 아내, 자녀는 둘 이상!”이라는 입주조건은 말할 것도 없고, 방범대를 조직하고 외부인에게 철저히 배타적인 것은 물론 마치 집단 세뇌에 걸린 사람들처럼 획일적인 사고와 행동을 거리낌 없이 자행하기 때문입니다. 마을의 지향점에 동조하지 않는 자에겐 노골적인 왕따를 퍼부어 굴복시키거나 떠나게 만들기도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유로든 이 마을에 남아 살아가는 자들은 이런 기이함을 당연한 일인 듯 받아들이며 안전하고 안심할 수 있는 마을에서의 삶을 긍정적으로 누리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맹신과 동조가 마을 내부에서 벌어진 잘못된 일마저 오판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을에 납치살해범이 있을 리 없다!” “우리 마을에서 실종사건 같은 건 절대 벌어질 리 없다!”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20여 년에 걸친 끔찍한 비극들이 양산된 것입니다.

 

사회파 미스터리를 무척 좋아해서 다양한 작품들을 만나왔지만, 동조 압력이라는 쉽지 않은 소재를 여러 가지 사건과 잘 엮어냈다는 점에서 누군가 이 마을에서는 오래 기억에 남을 개성 넘치는 작품입니다. 서론이 다소 길어 보였고, 하토하 마을의 비현실성이 자꾸만 발목을 잡은 점 때문에 별 1개를 빼긴 했지만, 이것저것 생각할 여지를 많이 남긴 점도 이 작품의 미덕이라는 생각입니다. “만약 내가 하토하 마을에 살았더라면, 또 만약 내가 동조 압력의 부담을 이겨내지 못한 여러 인물들의 처지에 있었더라면 과연 나는 어떤 선택과 행동을 했을까?”라는 자문이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도 계속 뇌리에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노 히로미는 한국에는 처음 소개된 작가지만 후속작이 출간된다면 꼭 찾아서 읽어보려고 합니다. 이왕이면 마사키-이와타 콤비가 다시 한 번 활약하는 사회파 미스터리라면 좋겠지만 다른 주인공의 이야기더라도 나름 기대되는 바가 큰 작가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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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여름
소메이 다메히토 지음, 주자덕 옮김 / 아프로스미디어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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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키 마모루는 지방도시의 사회복지사로 근무 중인 26세의 공무원입니다. 생활보호대상자를 선정하고 부정수급자를 가려내는 고된 업무를 근근이 이어나가던 마모루는 어느 날 큰 충격에 빠집니다. 선배 사회복지사 다카노가 약점을 지닌 여성 생활보호대상자를 협박하여 육체관계는 물론 돈까지 뜯어낸다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한편 도쿄에서 사고를 치고 지방도시로 쫓겨난 야쿠자 가네모토 역시 다카노의 비리를 알게 되는데, 그는 다카노를 이용하여 큰돈을 벌 계획을 세웁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사태가 벌어지면서 가네모토의 계획은 어그러질 상황에 처하고 마모루의 운명 역시 급격한 혼란에 휩싸이고 맙니다.

 

일가족을 살해한 18세 살인범의 도주극을 그린 정체’(한국 출간 2021)를 통해 한국 독자와 처음 만났던 소메이 다메히토가 37회 요코미조 세이시 미스터리 대상우수상 수상작이자 자신의 데뷔작인 나쁜 여름으로 다시 한국 독자를 찾았습니다.

정체를 읽고 쓴 서평에 정갈하고 정성이 깃든 문장들과 인물 하나하나에 공을 들인 작가의 진심이란 표현을 썼을 정도로 마음에 쏙 들었던 터라 그의 데뷔작을 꼭 읽고 싶었는데, 역시 이번에도 기대한 만큼의 만족스러운 책읽기가 됐습니다.

 

다소 극단적인 사례 같기는 해도 사회복지, 특히 생활보조금을 둘러싼 갖가지 사건과 사고를 다루고 있어서 정통 사회파 미스터리로 분류되겠지만, 소메이 다메히토는 거기에다 소네 케이스케의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을 연상시키는, 웃을 수도 찌푸릴 수도 없는 희비극이자 폭주에 가까운 군상극의 미덕을 섞음으로써 독특한 장르물을 완성시켰습니다.

 

생활보호대상자를 선정하고 부정수급자를 가려내는 사회복지사, 말도 안 되는 변명과 핑계를 대며 부정하게 생활보조금을 타내면서도 조금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인간망종들, 그리고 사회복지시스템의 작은 균열을 이용하여 범죄를 저지르는 야쿠자 등 나쁜 여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생활보조금의 이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동시에 실제로 복지의 혜택이 필요한 사람들이 정작 사각지대로 밀려나는 모습이라든가 정책 자체는 훌륭하더라도 그것이 현실에서 얼마나 왜곡될 수 있는지를 묘사한 대목들은 그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본 적 없는 독자에게 꽤 큰 경종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매력은 사회복지라는 거창한 주제가 아니라 서로 속고 속이는 것을 넘어 이기심을 위해서라면 최악의 선택도 마다하지 않는 인간망종들의 먹고 먹히는 쇼에 있습니다. 아마 영화로 만들면 숨 쉴 틈조차 없을 정도로 폭주하면서도 흥미진진한 B급 영화의 미덕을 만끽할 수 있는 명품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일본 영화감독 소노 시온의 지옥이 뭐가 나빠를 아는 독자라면 어떤 느낌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막판 클라이맥스는 피와 흉기가 난무하는 끔찍한 비극의 현장임에도 불구하고 (웃는 것까지는 어렵더라도) 왠지 희극의 냄새가 더 강하게 풍기는 묘한 감정을 느끼게 만듭니다.

 

정체나쁜 여름모두 적잖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작품이지만 소메이 다메히토는 비중이 적은 단역이나 조연조차 독자에게 그 존재의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해주고 이야기 속에 확실히 녹여냅니다. 자칫 우왕좌왕할 수 있는 복잡한 구도를 개성 넘치고 명확한 캐릭터를 지닌 인물들을 통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컨트롤한다고 할까요? 그래선지 다음에 만날 그의 작품 역시 희극이자 비극이면서 통렬한 군상극이기를 바라게 됩니다. 일본에서는 모두 8편의 작품을 출간했는데, 그의 나머지 작품들도 머잖아 한국에 모두 소개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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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죽인 여자들
클라우디아 피녜이로 지음, 엄지영 옮김 / 푸른숲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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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사르다 가족의 막내딸 17살 아나가 토막 난 채 불에 탄 시신으로 발견됐습니다. 단서 하나 찾지 못한 가운데 경찰은 불특정 성범죄자의 소행으로만 여겼고 금세 미제 사건으로 처리하고 맙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사르다 가족은 산산조각 났고, 둘째딸 리아는 아나의 죽음에 조금의 의문도 품지 않은 채 종교적 허식으로 종결지으려는 가족들을 향해 자신은 무신론자라는 폭탄선언을 한 뒤 스페인으로 떠나버렸습니다.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해준 아버지 알프레도와만 연락을 주고받으며 지냈지만, 리아는 알프레도가 지난 30년 동안 아나의 죽음의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홀로 싸워온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태어났다는 사실밖에 몰랐던 조카 마테오가 자신을 찾아와 알프레도의 편지를 전하자 큰 충격에 빠집니다.

 

아르헨티나의 대표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클라우디아 피녜이로는 2023엘레나는 알고 있다신을 죽인 여자들을 통해 처음으로 한국 독자와 만난 작가입니다. 주로 범죄소설을 집필해왔고 신을 죽인 여자들의 경우 그해 가장 뛰어난 범죄소설에 수여되는 대실 해밋 상을 만장일치로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범죄소설은 일반적인 미스터리나 스릴러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입니다. 며칠 전 읽은 엘레나는 알고 있다는 파킨슨병 환자인 어머니가 딸의 죽음의 진상을 파헤치기 위해 겪은 만 하루 동안의 여정을 그리고 있지만, 여성, 성역할, 종교사회의 억압, 가부장적 문화, 자기결정권 등 묵직한 주제가 서사의 중심입니다. ‘신을 죽인 여자들은 상대적으로 미스터리 본연의 서사가 좀더 강하긴 하지만 역시 여성과 종교라는 주제가 더 도드라져 보이는 작품입니다. 대실 해밋 상 수상소감에서 나는 이것이 투쟁의 결과라고 느꼈다. 책과 나, 그리고 수많은 여성들이 오랫동안 싸워온 것에 대한 상이다.”라고 밝힌 걸 보면 이 작품의 경향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인물들은 종교에 관한 한 다소 극단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종교적 해석으로 귀결 짓는 광신도에서부터 종교 자체를 부정하는 무신론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30년 전에 벌어진 사르다 가족의 비극의 이면에는 이 바로 이 종교적 갈등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작가는 그 갈등이 여성에게 더욱 가혹하다는 점, 그리고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종교를 이용하여 자신을 합리화하거나 진실을 숨기는지를 ‘30년 전 사건의 진실 찾기 여정을 통해 적나라하게 폭로합니다.

 

이야기는 여섯 명의 인물이 한 챕터씩 화자를 맡아 전개됩니다. 동생 아나의 죽음을 계기로 무신론자임을 선언하곤 가족과 조국을 떠난 둘째딸 리아, 할아버지 알프레도의 영향으로 종교의 허상을 내다버린 뒤 그가 남긴 세 통의 편지를 들고 스페인에 사는 이모 리아를 찾아가는 마테오, 절친인 아나가 목숨을 잃을 당시 함께 있다가 기억 장애를 겪게 된 마르셀라, 30년 전 초짜 법의학자로 유일하게 아나의 죽음에 의심을 품었던 엘메르, 리아와 아나의 언니인 카르멘을 아내로 둔 훌리안, 그리고 사르다 집안의 장녀이자 카리스마로 똘똘 뭉친 광신도 카르멘이 그들입니다. 마지막 에필로그는 딸의 죽음의 진실을 30년 동안 추적해온 알프레도의 편지로 장식됩니다.

 

여섯 명의 인물은 사건이 벌어진 30년 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겪은 일을 마치 참회록 또는 고해성사처럼 털어놓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나의 죽음의 진상이 하나둘씩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누가, 왜 그토록 잔혹한 방식으로 아나를 살해하고 토막 내고 불태웠는가, 라는 미스터리가 독자의 눈길을 끌긴 하지만 서사의 핵심은 앞서 언급한대로 여성과 종교입니다. 왜 아나는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는가? 그녀를 죽음으로 이끈 자들은 누구이며 그들에게 물어야 할 죄는 무엇인가? 그녀의 죽음에 종교는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쳤는가? 이런 주제의식이 워낙 강렬해서 그런지 이 작품의 번역 제목 신을 죽인 여자들대신 신이 죽인 여자들이 더 어울려 보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의 원제 ‘Catedrales’대성당이라는 뜻으로 레이먼드 커버의 동명 단편소설에 따왔다고 합니다.)

 

다 읽고 첫 페이지를 다시 보니 처음엔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웠던 헌사가 새롭게 읽혔습니다. “하느님 없이, 저들만의 대성당을 짓는 이들에게라는, 종교적 허상과 맹신을 향한 조소 섞인 헌사는 이 작품을 통해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을 절묘하면서도 진정성 있게 함축해놓은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을 종교, 여성, 도덕 등 좀더 넓은 의미의 사회적 문제와 모순을 다루는, 문학성이 깃든 사회파 미스터리라고 부르고 싶은데, 이 헌사야말로 그에 걸맞은 상징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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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의의 형태
홍정기 지음 / 서랍의날씨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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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래동화를 모티브로 삼은 엽기적이고 잔혹한 미스터리 단편집 전래 미스터리와 트릭에 반전의 묘미까지 갖춘 호러 단편집 호러 미스터리 컬렉션으로 주목받은 홍정기의 세 번째 단독 작품입니다. 그동안 수상작품집이나 계간지, 앤솔로지를 통해 활발하게 활동해왔지만 아무래도 단독 작품에 대한 기대가 더 크기도 했고, 무엇보다 살의의 형태라는 제목에서 풍기는 본격 미스터리의 향기 때문에 이번 새 작품은 더 반갑게 느껴졌습니다.

 

그동안 계간지 등을 통해 이미 소개된 작품들까지 포함하여 모두 여섯 편의 단편이 수록돼있습니다. 각각 무구한 살의’, ‘합리적 살의’, ‘보이지 않는 살의’, ‘백색 살의’, ‘영광의 살의’, ‘시기의 살의라는 제목대로 다양한 종류의 살의와 살인사건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범인이 설계한 정교한 트릭, 그 트릭을 부수는 주인공의 활약, 그리고 단편이지만 마지막 한 페이지의 즐거움을 배가시키는 반전이 매 수록작마다 매력적으로 그려졌습니다.

 

제목에서 풍기는 본격 미스터리의 향기는 여러 작품에 다양한 형태로 배어있습니다. 사건 현장을 완벽한 밀실로 설정한 경우도 있고, 교과서적이고 고전적이면서도 나름 새로움을 부여한 트릭과 반전도 눈에 띕니다. 개인적으로는 역대급 소시오패스의 싹이 엿보이는 초등학교 3학년생이 등장한 무구한 살의와 너무나도 참혹한 사건이지만 막판에 드러난 진실이 웃지 못 할 블랙 코미디 혹은 무자비한 희비극처럼 느껴져서 인상적이었던 영광의 살의가 가장 기억에 남았습니다. 또 작가의 분신인 작가 홍은기가 등장하는 보이지 않는 살의는 호러와 본격 미스터리가 잘 조합된 작품이라 살짝 작위적인 트릭임에도 불구하고 재미있게 읽혔습니다. 세 작품 모두 비주얼도 좋아서 B급 정서가 충만한 단편영화로 만들어진다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여섯 편의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주인공은 천안 동남경찰서에 근무하는 10년 차 형사 오영섭입니다. 아내와 두 딸이 있는 30대 중반인 그는 전형적인 대한민국 가장이자 형사로서 무척 현실감 있는 캐릭터입니다. 좀더 카리스마 있는 인물이었다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사소한 단서에서 출발하여 예리한 추리를 통해 범인들의 트릭을 부수는 대단한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여섯 편 가운데 한 편을 제외하곤 범인의 범행동기를 모두 개인적인 차원으로 설정했는데, 다음 작품에서는 현실을 반영한 장편 사회파 미스터리를 기대해보고 싶습니다. 두 편의 전작을 읽고 쓴 서평에 공통적으로 다소 가벼워 보인 문장과 서사가 아쉬웠다.”라고 평한 적 있는데, 이번 작품은 묵직한 장편 서사를 기대해도 좋을 만큼 탄탄해 보였고, 몇몇 수록작을 통해 사회파 미스터리의 가능성도 충분히 엿봤기 때문입니다. 물론 홍정기 특유의 호러 코드가 곁들여진 사회파 미스터리라면 더욱 환영하게 될 것 같습니다.

 

재미있게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점 만점을 주지 못한 건 누군가에게 강력추천하기에는 조금씩 모자란 부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의 매력, 트릭의 완성도, 좀더 무게감이 필요한 서사 등이 그것입니다. 물론 주인공도, 트릭도, 서사도 실은 각 수록작의 내용에 걸맞게 잘 설정돼있긴 합니다. 오히려 가벼운 이야기와는 좀 거리가 있는 제 취향 때문에 느끼는 아쉬움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 기준으로 누군가에게 강력추천을 하려면 뭔가 하나는 특별해야 된다는 생각입니다. 그 특별함을 더욱 기대한다는 의미에서 만점을 주지 못한 것이니 별 4개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독자는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양성과 개성을 갖춘 일본 미스터리나 스케일과 무게감이 남다른 영미권 스릴러에 길들여진 독자에겐 한국의 장르물이 종종 성에 차지 않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잘 찾아보면 개성과 매력을 갖춘 한국의 장르작가도 적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신간이 나오는지 늘 관심 있게 지켜보는 한국 장르작가가 꽤 있는데 홍정기 역시 그 중 한 명입니다. 여러 편의 단편을 통해 필력을 인정받은 그가 이제는 자신만의 장기를 쏟아 부은 장편으로 독자와 만나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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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마물의 탑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
미쓰다 신조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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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침략전쟁에 대해 참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던 모토로이 하야타는 1945년 패전 후 국가 재건을 위한 노동의 최전선에 몸담기로 결심합니다. 처음 향했던 곳은 탄광이었지만 노동의 보람을 느끼기도 전에 끔찍하고 기괴한 연쇄살인사건을 겪은 탓에 이내 행로를 바꿉니다. 그의 선택은 항로표식 직원, 즉 등대지기입니다. 나름의 사명감을 갖고 등대정신을 실천하던 하야타의 두 번째 부임지는 험준하기로 소문난 고가사키 등대. 그런데 도착과 동시에 하야타는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길함을 감지합니다. 등대 앞의 바다에 솟아오른 거대하고 날카로운 바위, 하얀 마물을 닮은 듯한 등대, 그 등대 앞에 배를 대기 두려워하는 어부, 그리고 등대 위에 서있던 사람을 닮은 기이한 존재 등 모든 것이 불온해보였기 때문입니다.

 

검은 얼굴의 여우이후 3년 반 만에 출간된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시리즈 첫 편이 탄광을 무대로 괴담이 가미된 미스터리를 다뤘다면 하얀 마물의 탑은 등대와 그 일대를 무대로 한 정통 호러물에 가까운 이야기입니다. 미쓰다 신조의 작품 중에서도 특히 호러와 미스터리가 적절히 조합된 경우를 좋아해서 도조 겐야 시리즈노조키메같은 작품을 손에 꼽는 편인데, 전작인 검은 얼굴의 여우가 다소 밋밋한 호러 설정 때문에 아쉬움을 남긴 반면 하얀 마물의 탑은 미쓰다 신조의 장기가 제대로 배어있어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거친 파도와 짙은 안개와 험준한 지형 때문에 더 위압적으로 보이는 고가사키 등대가 주 무대지만, 초반 1/3은 그곳에 도착하기까지 하야타가 겪는 기이하고 믿을 수 없는 괴현상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무슨 이유에선지 등대 앞에 내려주기를 거부하는 어부, 등대까지의 길안내를 약속해놓고 사라져버린 마을사람, 밀림을 방불케 하는 숲을 지나는 동안 하야타의 뒤를 따라오는 듯한 하얀 마물, 그리고 인적 하나 없는 숲속에 자리한 기괴한 분위기의 오두막 등 하야타는 등대에 도착하기도 전에 숱한 괴현상들을 체험합니다. 가까스로 등대에 도착하지만 하야타는 숲에서 목격한 하얀 마물 때문에 마음을 놓지 못합니다. 하야타를 더욱 놀라게 한 건 고가사키 등대를 책임지고 있는 등대장 이사카 고조가 20년 전 자신과 똑같은 경험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굳이 비율로 따지자면 호러가 80%, 미스터리가 20% 정도로 배합돼있습니다. 20년의 시차를 두고 하야타와 이사카가 겪은, 우연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똑같은 경험들의 실체를 파악하는 미스터리가 깔려있긴 하지만, 서사의 중심은 제목 그대로 하얀 마물이며 마지막 반전에 이르기까지 호러의 미덕에 충실한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해운산업의 부흥을 위한 근대적 시설인 등대와 아직도 전근대적인 기운이 만연해있는 등대 주변 지역의 분위기가 충돌하면서 호러의 농도가 더욱 짙어지는데, 그런 면에서 1950년대 초반이라는 시대적 배경 자체가 이 작품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슷한 시대적 배경에 아날로그 감성과 호러의 매력이 철철 넘쳤던 도조 겐야 시리즈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혹시 검은 얼굴의 여우에 아쉬워했더라도) 그 이상의 감흥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2021년에 시리즈 세 번째 작품 赫衣’(붉은 옷의 어둠)까지 출간된 상태입니다.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이후 10년째 소식이 없는 도조 겐야 시리즈에 대한 미련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지만, 모토로이 하야타의 새로운 이야기라면 그 미련을 조금은 접어둘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2024년에 도조 겐야와 모토로이 하야타를 모두 만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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