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노이치인법첩 인법첩 시리즈 (소설)
야마다 후타로 지음, 김소연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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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5,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공격으로 오사카성이 함락되고 도요토미 가문이 멸망하기 직전, 명장 사나다 유키무라는 시나노 닌자술을 구사하는 다섯 명의 쿠노이치(여자 닌자)에게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후손을 임신할 것을 지시합니다. 그리고 히데요리의 아내이자 이에야스의 손녀인 센히메의 시녀가 되어 어떻게든 살아남아 아이를 출산할 것을 당부합니다. 후일 도요토미 가문의 부흥을 도모하려는 최후의 비책입니다. 이에야스의 손녀지만 남편 히데요리를 사랑한 나머지 스스로를 도요토미 가문의 사람으로 여기는 센히메는 전쟁 와중에 이에야스 측 장수에 의해 구출되지만 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쿠노이치들을 보호하기 위해 할아버지 이에야스와 대적할 각오를 공공연하게 밝힙니다. 밀정을 통해 이 정보를 얻은 이에야스는 이가(いが) 닌자의 정예 다섯 명을 불러들여 쿠노이치들을 죽이고 센히메를 데려올 것을 지시합니다.

 

일본 대중소설의 거장으로 불리는 야마다 후타로의 인법첩 시리즈는 장편과 단편을 포함하여 수십 편에 이르는 이른바 닌자 소설입니다. 2023년에 AK커뮤니케이션즈에서 모두 다섯 편의 작품을 출간했는데, 소재나 줄거리 모두 눈길을 끌어서 그 가운데 한 편인 쿠노이치인법첩을 먼저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히라가나와 가타가나가 섞여 있긴 하지만 쿠노이치의 일본어 표기는 くノ입니다. 한자 를 해체한 표기로 여자를 의미하는 닌자의 은어라고 합니다. 즉 이 작품의 제목은 여자 닌자의 기술을 기록한 책이란 뜻입니다. 제목과 줄거리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작품을 끌고 가는 주인공은 할아버지 이에야스와 적대시하면서까지 도요토미 가문의 부흥을 도모하는 센히메와 그녀를 지키며 히데요리의 자식을 출산하려는 다섯 명의 임신한 쿠노이치입니다. 그리고 이에야스의 지시를 받고 쿠노이치를 제거하려는 전통적인 닌자 가문 이가(いが)의 다섯 명의 정예가 상대역으로 등장합니다.

 

말하자면 남녀 닌자가 팀 배틀을 벌이는 셈인데, “()의 극치에서 펼쳐지는 처절하고 기발한 닌자술 전쟁이라는 출판사 소개글대로 열 명의 닌자가 지닌 각각의 특별한 능력은 대부분 성과 관계된 것이라 이 작품이 19금 판정을 받았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관능적이고 적나라하고 폭력적으로 묘사됩니다. '쿠노이치 화장(化粧)', '천녀패(天女貝)', '관 말리기', '인조(人鳥)끈끈이' 등 명칭부터 묘해 보이는 닌자술은 상대방의 몸과 마음을 지배하고 욕보인 뒤 목숨을 빼앗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야말로 상대방의 정()과 혈()을 남김없이 파괴하고 메마르게 한다고 할까요? 단순히 은밀한 움직임과 뛰어난 칼 재주로 상대를 죽이는 기술을 넘어 신비한 마술사의 능력까지 지닌 게 이 작품 속 닌자의 특징입니다.

 

다른 인법첩 시리즈는 안 읽어서 모르겠지만 쿠노이치인법첩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그의 손녀 센히메를 비롯하여 실존했던 인물들이 등장하는 팩션(Faction)입니다.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였기에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이 작품의 배경인 1615년 오사카 전투에 관해 조금만 검색해보면 작가가 역사적 사실을 얼마나 정교하게 픽션과 연결시켰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도쿠가와 가문에서 태어나 7살에 도요토미 가문으로 시집을 갔고, 이후 할아버지 이에야스가 멸망시킨 도요토미 가문을 위해 분투하는 센히메는 일본 대하드라마나 여러 가지 픽션에서 다양한 캐릭터로 그려질 만큼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남편 히데요리를 살려달라고 이에야스에게 간절히 부탁했지만 거절당했다.”라는 게 역사적 사실로 보이는데 이 한 줄을 이용하여 이토록 강렬한 캐릭터를 만들어낸 건 그저 대단해 보일 뿐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무협지라는 걸 읽어본 적이 없지만 인법첩 시리즈닌자가 활약하는 무협지라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중독성이 강한 오락물이라 취향이 맞는 독자라면 시리즈를 모두 탐독할 것 같은데, 다만 (다른 작품들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폭력성과 선정성이 심하고 잔혹한 묘사들이 많아서 미리 참고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사족으로, 이 시리즈의 대부분은 일본에서 1960년대에 출간됐습니다. 개인적으론 원작의 맛을 잘 살린 듯한 고어체 번역이 무척 좋았는데, 독자에 따라 살짝 낯선 느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읽다 보면 고어체 특유의 매력을 맛볼 수 있으니 익숙해질 때까지 조금만 참아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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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 이야기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비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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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소개글을 인용하면 가을비 이야기비가 내리는 가을의 스산한 날씨를 배경으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농락당하고 고통 받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낸공포 기담집입니다. 모두 네 편의 단편이 실렸는데 각각 전생과 현생, 꿈을 꾸는 중에 벌어지는 순간이동, 초절기교의 여가수가 남긴 희귀 음반의 비밀, 그리고 동전을 이용해 귀신을 불러내는 주술 고쿠리상 등 독특하고 개성 넘치는 소재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귀의 논

사원여행에 온 미하루는 평소 관심 있던 아오타와 함께 새벽 산책에 나섭니다. 괜찮은 스펙을 가진 그가 지금껏 연애를 한 번도 못해봤다는 말이 믿기지 않지만, 그 이유를 들은 미하루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건 아오타의 전생 이야기이자 지옥에 떨어진 아귀에 관한 것입니다.

 

푸가

종적을 감춘 작가 아오야마 때문에 화가 난 편집자 마쓰나미는 그의 비서로부터 미완성 원고 푸가를 전달받습니다. 그것은 아오야마가 겪은 실화를 기록한 것으로 꿈을 꾸는 중에 벌어지는 순간이동에 관한 것입니다. 마쓰나미는 원고를 읽을수록 극도의 공포에 휩싸입니다.

 

백조의 노래

20세기 초 단 한 장의 사제 앨범만 남긴 채 요절한 일본계 소프라노 미쓰코 존스에게 반한 사가 헤이타로는 미국 음반계의 거장을 통해 그녀의 발자취를 조사할 탐정을 구합니다. 인간의 목소리라고 믿을 수 없는 절대고음과 초절기교는 물론 동시에 두 가지 목소리를 내는 능력을 지녔지만 그 능력 뒤엔 미쓰코 존스가 겪어야 했던 불행과 공포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고쿠리상

18년 전, 다쿠야를 포함한 네 명의 초등학생은 자신에게 닥친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심령 스폿인 폐병원에서 이른바 고쿠리상 어둠의 버전을 실행합니다. 고쿠리상의 조언 덕분에 무사히 살아남은 그들은 18년이 지난 후 다시금 고쿠리상 어둠의 버전을 실행해야 하는 상황에 처합니다. 하지만 이번에 받은 고쿠리상의 조언은 모두를 충격에 빠뜨립니다.

 

네 편의 수록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 같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지독한 절망과 불운에 사로잡혀있습니다. 누군가는 모든 걸 포기하고 체념하지만, 누군가는 발버둥치거나 헤어나기 위해 전력을 다합니다. 하지만 절망과 불운에 이어 그들을 덮친 극한의 공포는 논리나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인데다 마치 태어나기 전부터 부여받은 업보와도 같아서 어떤 식으로 대응하든 비극적인 결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또한 그 결말을 더욱 서늘하게 만드는 (매 수록작마다 수시로 등장하는) 가을비는 마치 기분 나쁘게 들러붙은 이세계의 유령처럼 느껴질 뿐입니다.

 

네 편 모두 명백한 현실믿을 수 없는 비현실이 조합된 이야기들인데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이 세상에선 절대 벌어질 일 없는 픽션 속 호러가 아니라 지극히 사실적이고 얼마든지 현실에서 일어날 것만 같은 미묘한 인상을 남깁니다. 동시에 뭐라 말할 수 없는 불쾌감과 끈적거림도 느끼게 되는데 굳이 비유하자면 마리 유키코의 이야미스의 뒷맛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읽는 내내 기시 유스케의 검은 집이 수시로 떠오르곤 했는데, 오래 전에 읽어서 서평도 남기지 못한데다 내용도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 그때 뇌리에 각인된 사실감+불쾌감이 이 작품을 읽는 동안 갑자기 활성화된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취향의 호러는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으스스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어서 꽤 흥미로운 책읽기가 됐습니다. 책장에 방치된 채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는 기시 유스케의 작품이 몇 편 있는데, ‘가을비 이야기덕분에 새삼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연이어 읽는 건 곤란할 것 같지만 가끔 특별한 간식이 생각날 때마다 한 편씩 구출해줘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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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과 살인귀
구와가키 아유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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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야시 미오는 10년 전 묻지마 살인으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마저 집을 나간 뒤로 삶 자체가 고통과 불행으로 점철됐습니다. 그런 미오에게 이번에는 동생 히나마저 살해당하는 비극이 닥칩니다. 하필 아버지를 죽인 소년범이 만기 출소한 시점에 히나가 살해당했다는 사실에 미오는 그저 두려울 뿐입니다. 더 큰 문제는 히나의 과거를 캐던 언론이 그녀에게 보험 사기범 또는 살인범이라는 낙인을 찍으려 한다는 점. 미오는 히나의 무고함을 밝히려 애쓰지만 파견직으로 대학 행정실에서 일하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그때 저널리스트를 꿈꾸는 대학생 나기사가 미오를 돕겠다고 나섭니다. 의도가 의심스럽긴 했지만 미오는 그와 손을 잡습니다. 하지만 사태는 점차 악화되고 괴한들의 습격을 받기에 이릅니다.

 

위의 줄거리는 사실 이 작품의 초반부를 요약한 것에 불과합니다. 구도 자체가 워낙 복잡하게 설계된데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반전이 거듭되면서 이야기가 살아있는 생물처럼, 그것도 제멋대로 뻗어나가는 바람에 일목요연한 줄거리 정리가 아예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동생 히나의 무고함을 입증하기 위해 의문의 대학생 나기사와 함께 진실 찾기에 나선 미오의 분투가 초중반부를 장식한다면, 아버지를 살해한 소년범이 만기 출소 후 종적을 감춘 시점에 히나가 살해당한 게 우연이 아니라고 여긴 미오가 어쩌면 자신이 다음 목표물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져 그 소년범의 정체를 확인하려는 게 중반부 이후 엔딩까지의 주된 이야기입니다. 거기다가 10년 전 아버지가 살해당하기 직전의 어린 미오와 히나의 과거 속에 숨어있는, 왠지 불안한 폭탄처럼 느껴지는 미스터리와 함께 사이코패스 소년범의 잔혹무도한 독백들이 막간극처럼 곳곳에 배치돼 있어서 내내 독자의 오감을 긴장 상태로 몰아넣습니다.

 

온갖 위험한 사람을 등장시켜 보려고 했습니다.”라는 작가의 말대로 이 작품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 가운데 평범한 사람(제 기준으로는) 한두 명밖에 없습니다. 미오는 자신에게 닥친 거듭된 불행으로 인해 세상이 고통을 주는 쪽고통 받는 쪽으로 양분됐다고 여기게 됐고, 자신과 가족들은 어떻게 해도 타고난 운명을 바꿀 수 없는 고통 받는 쪽의 사람들이라 체념하며 살아왔습니다. 작가는 자신의 의도대로 등장인물 거의 대부분을 고통을 주는 쪽’, 즉 위험한 사람들이라는 캐릭터로 포장했고 그들이 미오의 삶을 어떻게 파괴했는지 또 파괴하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고통 받는 쪽의 무력감에 빠진 미오의 절망은 시간이 갈수록 깊어지고 동시에 아버지를 살해한 소년범이 히나에 이어 자신을 살해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 극도의 패닉상태에 빠집니다.

 

쉴 새 없는 반전들은 말할 것도 없고, 독자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희롱하는 듯한 트릭의 향연도 대단합니다. 사건은 물론 캐릭터마저 반전의 대상으로 삼은 작가의 정교하고 빈틈없는 설계에 몇 번이나 혀를 내두르며 페이지를 넘길 수밖에 없습니다. 초반부만 해도 기대했던 것에 비해 다소 밋밋한 이야기가 아닐까 우려를 했는데, 읽는 도중 그런 구성마저도 실은 작가의 계획이었음을 깨달으면서 어느 한 줄도 허투루 읽을 수 없게 됐습니다.

물론 독자에 따라 이 복잡하고 정교한 설계가 지저분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설정된 위험한 사람들역시 다소 작위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고통 받는 쪽이라 스스로를 규정하며 불안한 심리를 내보이는 주인공 미오의 캐릭터가 비현실적으로 읽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사건과 인물과 심리를 지저분하지도, 작위적이지도, 비현실적이지도 않게 잘 직조한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일본에서 23만부를 기록한 판매고가 조금도 과장되지 않게 보인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한국에는 처음 소개된 작가지만 후반부에 실린 해설에 따르면 구와가키 아유의 작품은 대부분 잔혹한 사건이나 정상이 아닌 등장인묾의 심리를 다루고 있고, 작가 스스로도 앞으로도 놀랍고 소름 끼치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라고 밝힌 바 있어서 후속작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해설에서 거론된 처음 만난 사람달궈진 못이라는 작품이 특히 궁금해졌는데 레몬과 살인귀가 좋은 성적을 거둬 이 작품들도 조만간 만나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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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의 방 나비클럽 소설선
홍선주 지음 / 나비클럽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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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다섯 편의 단편이 수록된 미스터리 소설집입니다. 한 편을 제외하곤 2020년부터 2022년에 걸쳐 계간 미스터리에 실렸던 작품들인데, 마지막 수록작 자라지 않는 아이계간 미스터리 2021 겨울호를 통해 읽은 적이 있지만 (미안하게도) 작가의 이름이 기억에 남아있진 않았습니다. 수록작을 읽던 도중 기시감이 들어 예전에 써놓은 계간 미스터리 2021 겨울호서평과 요약해놓은 줄거리를 보고서야 이미 짧게나마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작가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발표됐던 작품들을 모은 소설집이라 그런지 일관된 주제의식과 작가의 목소리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작가 스스로도 “‘어떻게?’보다는 ?’를 좇으며, 기억이 인간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우연과 운명의 드라마로 풀어내고자 했습니다.”라고 했고, 후반에 실린 작품 해설에서도 “(사연의 세계, ) 동기의 문제에 천착하는 예외적인 미스터리 작품집이라고 지칭했듯 수록작 대부분은 사연과 동기, 그리고 그것들이 촉발시킨 심리적 불안정과 동요를 잔혹한 범죄 혹은 안타까운 죽음을 통해 그리고 있습니다.

 

샤를 페로의 동화 푸른 수염의 변주라 할 수 있는 푸른 수염의 방은 복수극이라는 비교적 선명한 미스터리 서사를 지니고 있지만 가해자와 피해자의 심리를 집요하게 그림으로써 짧은 분량에도 내내 긴장감을 유지하는 작품입니다. 역시 동화 푸른 수염을 모티브로 한 제인 니커선의 푸른 수염의 다섯 번째 아내가 떠올랐는데 그와는 달리 홍선주만의 새로운 설정이 가미돼서 무척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작가의 등단작인 ‘G선상의 아리아는 어려서부터 폭력과 착취에 길들여진 소년이 사이코패스에게 지배당하다가 스스로 괴물이 돼버리는 이야기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작품입니다.

 

앞선 두 수록작이 미스터리 혹은 스릴러의 성격이 도드라졌다면, 나머지 세 편은 살짝 결이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연모는 사이코패스로 불리는 한 여고생과 그녀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낀 교생이 9년 만에 재회하여 벌이는 로맨스 심리극으로, 요약하자면 사이코패스의 사랑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최고의 인생 모토는 세태를 꼬집는 블랙 코미디로 다른 수록작들과는 톤 자체가 다른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수록작 자라지 않는 아이는 제목에서 감지할 수 있듯 무겁고 애틋하고 여운이 길게 남는 이야기로, 행복이라곤 찰나의 순간밖에 경험해보지 못한 채 평생을 불운과 불행에 짓눌려 살아온 한 여자와, 첫 만남부터 그녀의 애증의 대상이 됐던 한 아이의 비극적인 사연을 그립니다.

 

시작과 함께 가해자와 피해자, 혹은 비극의 주인공이 독자에게 공개되기 때문에 누가 범인?’ 스타일의 사건 중심 미스터리를 기대했다면 다소 아쉬울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론 별미를 맛본 듯한 기분 좋은 책읽기였습니다. 규격화된 미스터리 서사에서 벗어나 사건 이면의 사연과 가해자의 동기와 비극의 민낯을 담담하면서도 힘 있는 문장으로 풀어낸 작가의 필력도 만족스러웠습니다. 이런 주제나 소재를 다룰 때 억지로 무게와 난해함을 앞세운 문장에 기대는 경우가 있는데, 스스럼없이 재미와 반전을 추구한다고 밝혔던 작가는 조금의 위화감이나 거부감이 들지 않는 매력적인 문장들을 구사하여 독자를 편안하게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검색해보니 두 편의 장편이 나오는데, 제목부터 관심을 끄는 나는 연쇄살인자와 결혼했다POD 출판이라 구하기 어려워 보이는 반면, ‘푸른 수염의 방과 거의 동시에 출간된 장편 심심포차 심심 사건은 제목 자체가 제 취향과 거리가 너무 멀어 아무래도 찾아 읽을 자신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여러 앤솔로지와 계간지를 통해 탄탄한 필력을 입증 받은 홍선주의 장편이 기대되는 건 분명합니다. 비록 다섯 편의 단편밖에 읽지 못했지만 나름 깊은 인상과 믿음을 갖게 됐기 때문입니다. 조금은 독하고 센 이야기를 홍선주 특유의 재미와 반전을 담아 장편으로 펴낸다면 주저하지 않고 반가운 마음으로 찾아 읽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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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 도쿄 하우스
마리 유키코 지음, 김현화 옮김 / 하빌리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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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방송국 개국 60주년 특별기획으로 ‘1961 도쿄 하우스라는 리얼리티 쇼가 제작됩니다. 1961년의 생활상을 그대로 구현한 집합주택 단지에서 불편함을 무릅쓰고 3개월을 살아내기만 하면 500만 엔이라는 거금의 출연료가 주어집니다. 원래는 가난해도 희망과 웃음이 흘러넘치던 살기 좋은 옛 시대를 만끽하는 리얼리티 쇼였지만, 제작회의가 거듭되면서 자극적인 구도와 갈등 조장 등 시청률을 위한 설정들이 가미됩니다. 치열한 경쟁을 뚫은 두 가족 나카하라, 고이케 은 이름과 성격까지 바꿔달라는 제작진의 기이한 요구를 수용하며 집합주택 단지로 이사합니다. 그리고 카메라에 둘러싸인 채 3개월간의 불편한 옛 생활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출연자 한 명이 살해된 채 발견되면서 리얼리티 쇼는 파국을 맞이합니다.

 

한국에 소개된 마리 유키코의 작품이 모두 일곱 편인데, 2016년 처음 소개된 고충증을 제외하고는 모든 작품을 읽었으니 나름 팬이라 자처할 만하지만, 실은 신간이 나오면 빨리 읽고 싶어 안달 나는그런 팬이어서가 아니라 읽고 나면 불쾌해져서 더는 읽고 싶지 않은데 왠지 모르게 자꾸만 끌리는탓에 읽다 보니 어느 새 대부분의 작품을 읽어버린, 좀 이상한 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크 미스터리의 여왕혹은 이먀미스의 여왕이라 불리는 그녀의 마력에 속수무책으로 끌렸다고 할까요?

 

시작부터 어둡고 음울한 게 마리 유키코의 특징인데, ‘1961 도쿄 하우스는 리얼리티 쇼라는 소재 때문인지 전작들과는 달리 가볍고 경쾌하게 출발합니다. 혹시나 마리 유키코의 전혀 다른 스타일을 맛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했지만 초반을 벗어나자마자 리얼리티 쇼 이면에 자리 한 갖가지 탐욕과 일그러진 감정들이 슬쩍슬쩍 그려지면서 예의 불길함과 긴장감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이 리얼리티 쇼를 준비하는 제작자들 일부에게서 다른 의도가 감지됐고, 쇼의 무대인 재건축을 앞둔 쇼와 시대의 집합주택 단지자체도 뭔가 어두운 과거를 숨기는 듯한 인상을 발산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실제 1961년에 이 단지에서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졌다는 정보가 독자와 일부 등장인물에게만 노출되면서 그 사건이 이 리얼리티 쇼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무척 궁금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예상치 못한 살인사건이 벌어지면서 쇼는 일단 중단됩니다. 하지만 진짜 쇼는 그때부터 시작되고 거듭되는 사건과 연이은 반전이 폭죽처럼 터집니다. 독자 입장에선 은밀한 의도를 가진 채 이 리얼리티 쇼를 이용하려는 진범이 누굴까 짐작해보게 되는데, 문제는 챕터가 바뀔 때마다 그 짐작이 여지없이 빗나간다는 점입니다. 또한 쇼를 기획하고 준비했던 일부 인물, 그러니까 모든 걸 알고 있어야 할 인물들조차 예상치 못한 전개에 진심으로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곤 해서 독자로선 진범의 진짜 시나리오가 무엇인지 도무지 가늠하기 어렵게 됩니다.

 

마리 유키코의 전작들이 미스터리 자체보다는 지독하리만치 불편하고 어두운 감정과 심리를 그리는데 주력했다면 ‘1961 도쿄 하우스누가, ?”에 충실한 정통 미스터리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거듭되는 사건과 반전들은 평소 마리 유키코와 담을 쌓았던 독자들도 좋아할 만큼 흥미진진하고 매력적으로 구축돼있어서 그녀에 대한 선입관을 확 바꿔놓을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그녀 특유의 다크 미스터리와 이야미스는 여전하지만 말입니다.

 

외면하고 싶으면서도 미지의 힘에 이끌려 꾸역꾸역 찾아 읽은 작품들이라 그런지 그동안 읽은 마리 유키코의 작품에게는 모두 별 4개만 주고 말았는데, 이번에는 미스터리의 만족도가 무척 높았던 덕분에 0.5개를 더했습니다. 몇몇 애매모호한 설명 때문에 만점을 주지 못한 건 아쉽지만 그래도 마리 유키코의 새로운 진면목을 발견한 것 같아 꽤 만족스러운 책읽기였습니다. 아마 다음 신작 소식을 듣게 되면 그때는 조금의 주저도 없이 그녀의 작품을 집어들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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