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리컨 브리프 존 그리샴 베스트 컬렉션 2
존 그리샴 지음, 정영목 옮김 / 시공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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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品再讀은 오래 전에 읽었지만 서평을 남기지 않았던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제가 갖다 붙인 조잡한 타이틀입니다. 기억 속엔 명품으로 남아있지만 다시 읽었을 때 예전 그대로의 감흥을 전해줄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대법원 판사 두 명이 전문 암살범에게 살해당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튤레인 법대 교수인 캘러헌이 그들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물론 이번 사건의 이면에는 대법원을 보수적인 대법관으로 채우려는 백악관의 의도가 도사리고 있다고 주장하자 스무 살 연하의 연인이자 법대생인 다비 쇼는 순전히 호기심 삼아 사건에 대한 가상 시나리오를 작성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작성된 일명 펠리컨 브리프가 캘러헌의 절친인 FBI 법률고문을 통해 백악관과 유수의 기관에 배포되자 대통령을 비롯한 주요 인사들이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이후 다비의 가상 시나리오가 진실이라는 걸 입증이라도 하듯 펠리컨 브리프와 관련된 자들이 살해당하기 시작하고 다비 역시 정체불명의 인물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존 그리샴, 로빈 쿡, 마이클 크라이튼 등 대가들의 작품이 한국에 봇물처럼 쏟아진 건 90년대 초중반의 일입니다. 소설뿐 아니라 영화까지 붐을 일으킬 정도였는데, 정작 읽은 존 그리샴의 작품은 펠리컨 브리프’, ‘의뢰인’, ‘그래서 그들은 바다로 갔다등 세 편뿐입니다. 셋 다 무척 인상 깊게 읽었는데도 더 이상 존 그리샴의 작품을 읽지 않은 이유가 기억나진 않지만, 한참이 지난 후에도 간간이 개정판이나 신간 출간소식이 들리면 잠깐이나마 관심을 가질 정도로 그의 이름과 필력은 제게 깊이 각인돼있었습니다.

하지만 2010년대 들어 읽은 그의 작품들(‘속죄나무’, ‘소송사냥꾼’, ‘잿빛 음모’)은 대체로 실망스러웠고, 그래선지 여전히 작품 활동을 하는 그의 열정이 그리 곱게 보이진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명품재독이라는 계획을 세우면서 존 그리샴의 초기작들을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고, 그 첫 번째로 고른 것이 펠리컨 브리프입니다.

 

이야기 구조는 심플합니다. 자신이 작성한 대법관 암살사건에 관한 가상 시나리오 펠리컨 브리프때문에 주위에서 사람들이 연이어 살해당하고 본인마저 위기에 빠지자 다비 쇼는 워싱턴 포스트의 기자 그레이 그랜섬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 도주극을 벌이면서 진실 찾기에 나섭니다. 한편 패닉에 빠진 백악관과 정보기관들은 서로 다른 속내를 숨긴 채 다비를 쫓는 것은 물론 그녀가 작성한 브리프의 내용 중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알아내기 위해 치열한 신경전과 정보전을 벌입니다.

 

법대 교수, 변호사를 꿈꾸는 법대생, 대형 로펌 등 법정 스릴러에 필수적인 인물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정작 법정 장면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 그리샴 특유의 ‘Legal Thriller’의 묘미를 내내 만끽할 수 있으며, 거기에 덧붙여 위기에 빠진 백악관과 유수의 정보기관들이 펼치는 치열하고도 절박한 정치+정보 스릴러, 그리고 다비의 파트너인 워싱턴 포스트 기자 그레이 그랜섬이 맹활약하는 저널리즘 스릴러까지 함께 맛볼 수 있어서 그야말로 각종 스릴러의 진수성찬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펠리컨은 펠리컨이라는 새를 가리키기도 하고, 속어로 루이지애나 사람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펠리컨 브리프는 루이지애나 사람이자 장차 변호사를 꿈꾸는 다비가 멸종위기종인 갈색 펠리컨의 서식지를 파괴해가면서까지 이익을 도모하려는 세력과 정치적 이익을 위해 불법을 일삼아 온 정치인 간의 야합을 폭로한다는 복합적인 의미를 담은 제목이란 뜻입니다. 다비는 환경주의자도 아니고 진보적이고 적극적인 정의의 사도도 아니지만, 루이지애나와 펠리컨을 파괴하려는 자들이 대법관 살해라는 중범죄와 연관 있음을 우연히 포착한 뒤론 언제 살해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공포에도 불구하고 거침없이 진실 찾기에 도전합니다.

 

엇비슷한 상황들이 반복되면서 중반부에 살짝 늘어지는 점이 유일한 아쉬움이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존 그리샴의 진짜배기 스릴러를 만끽할 수 있어서 반가운 시간이었습니다. 언젠가 의뢰인그래서 그들은 바다로 갔다도 다시 읽어볼 생각이고, 존 그리샴의 초기작들 중 못 읽은 작품들도 검색해보려고 합니다. 시간이 되면 줄리아 로버츠와 덴젤 워싱톤이 주연을 맡은 동명의 영화도 찾아볼 생각인데, 그 무렵 최전성기를 달렸던 줄리아 로버츠의 풋풋한 법대생 모습도 사뭇 기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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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의 비극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문승준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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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하카마 시의 새 시장은 ‘I(출신지와는 다른 지역으로의 이주) 프로젝트’, 6년 전 유령 마을이 된 미노이시(蓑石)를 부활시키기 위해 외지에서 이주자를 모집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모집과 관리를 담당할 소생과(蘇生課)라는 전대미문의 부서를 만듭니다. 엘리트 코스를 밟던 공무원 만간지 구니카즈는 자신이 왜 이런 황당한 부서에 배치됐는지도 이해가 안 됐지만 칼퇴근에만 진심인 니시노 과장과 학생 티를 못 벗은 신입 간잔 유카까지 단 세 명이 미노이시를 관리해야 한다는 사실에 경악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12가구를 유치했지만 프로젝트는 시작부터 삐걱거립니다. 쉴 새 없이 크고 작은 사건이 벌어지는 것은 물론 무사히 정착하기를 바랐던 이주민들이 한두 명씩 미노이시를 떠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인구감소와 지방소멸은 더 이상 낯선 뉴스도 아니고 남의 나라 이야기도 아닙니다. 간혹 한국과 일본의 지방 가운데 성공적으로 인구가 늘어나고 경제가 회복된 곳들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은 있지만 기적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미미한 숫자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구감소와 지방소멸의 문제는 어떻게 대처해야 현명할까요? 대처라는 것 자체가 가능하긴 할까요? 요네자와 호노부는 미노이시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통해 이 어려운 질문들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미 6년 전에 소멸된 미노이시에 적잖은 예산을 투자하여 이주자를 정착시키겠다는 프로젝트는 언뜻 바람직하고 진취적인 정책처럼 보이지만, 엘리트 공무원 만간지의 눈에는 기적을 바라는 정치 쇼로 보일 뿐입니다. 하지만 막상 이주가 마무리되고 본격적인 관리가 시작되자 본성 자체가 성실한 공무원인 그는 본연의 역할에 충실한 것은 물론 후배 간잔과 함께 이주민들을 위해 야근도 마다하지 않는 생활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연이어 사건과 해프닝이 벌어지고, 이주민들 사이에 갈등과 충돌이 일어나자 크게 당황합니다.

 

서장과 종장을 제외하고 6편의 연작단편으로 구성돼있는데, 각 단편은 이주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일상 미스터리를 그립니다. 물론 해결사는 만간지를 비롯한 소생과 직원들입니다. 하지만 각 사건의 해결이 해피엔딩, 행복한 미노이시로 이어지진 않습니다. 오히려 어렵게 구한 입주민들을 떠나게 만들거나 소생과 직원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곤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과연 ‘I턴 프로젝트가 누구를 위한 정책인지, 현실성이 있는 계획인지, 이런 식으로 부활시킨 유령 마을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인지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대두됩니다.

 

이런 상황들 때문에 주인공 만간지는 수시로 딜레마에 빠집니다. 불평을 하면서도 미노이시의 성공을 위해 분투하는 바람직한 공무원만간지의 모습이 딜레마의 한쪽이라면, 나머지 한쪽은 개선될 여지가 없는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는 합리주의자만간지의 모습입니다. 즉 구급차나 소방대가 도착하는 데만 40분이 걸리고, 한정된 예산 때문에 마을을 지탱하기 위한 필수 시스템 구축마저 어려운 상황은 만간지를 숱한 고민 속에 몰아넣습니다. 특히 도쿄에 사는 동생이 미노이시의 프로젝트를 깊은 늪이라고 비난했을 때 만간지의 고민은 극에 달하고 맙니다. (다 읽은 뒤 가장 인상 깊게 남은 단어도 바로 이 깊은 늪이었습니다.)

 

고백하자면, 초반부터 제목이나 주제에 비해 다소 가벼워 보이는 일상 미스터리가 전개돼서 무척 의외였습니다. 꽤 무거운 이야기가 아닐까 싶었는데, 만간지와 소생과 직원들 캐릭터도 어딘가 만담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고, 이주민들 가운데 상당수도 진지하게 새 거주지와 삶을 고민하는 모습보다는 왠지 뜨내기나 오타쿠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의외의 설정들은 마지막 챕터인 종장에서 뜻밖의 반전과 함께 그 의미가 드러납니다. 그리고 무겁게 전개됐더라면 오히려 현실감이 떨어졌을 이 작품의 주제가 요네자와 호노부 특유의 가볍지만 선명한 이야기 덕분에 더욱 생생하고 진정성 있게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지금껏 인구감소와 지방소멸에 관한 뉴스나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무심결에 어떻게 하면 저곳을 되살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한 게 사실인데, ‘I의 비극은 그런 저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은 작품입니다. 정의감, 동정심, 이상주의 같은 감상적인 태도로 접근할 게 아니라 지독히도 현실적이고 냉정한 관점이 필요한 문제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장을 덮은 뒤 만간지의 고뇌와 갈등이 고스란히 공감되듯 느껴지는 것은 비단 저만의 경험은 아닐 것입니다. 미노이시는 과연 깊은 늪일까요? 아니면 재도전의 가치가 있는 미완의 프로젝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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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념 - 다무라 도시코 작품선 에디션F 9
다무라 도시코 지음, 유윤한 옮김 / 궁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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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념당차게 세상을 움직여온 여성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한 출판사 궁리의 에디션F 시리즈 중 한 편입니다. 다무라 도시코(1884~1945)는 일본 근대 여성소설과 페미니즘 소설의 개척자로 불리는 작가로 그 자신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을 뿐 아니라 소설가로서도 파격적인 행보를 남겨서 지금도 일본문학 전공자들이 연구대상으로 삼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미스터리와 스릴러에 대한 편식이 심한 편이지만, 근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라면 국적과 장르를 불문하고 무척 좋아해서 한눈에 단념을 발견하곤 곧바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단편인 구기자 열매의 유혹’(1914), ‘태워 죽여줄게’(1914)와 중편 단념’(1910)이 수록됐는데, 성폭력, 가정폭력, 불륜, 여성과 일, 동성애 등 당시의 여성작가가 선택하기 힘든 민감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100여 년이라는 시간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록작 속 여성들의 현실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여러 장면에서 공감과 공분을 느낄 수 있었는데, 성폭력 피해자가 오히려 비난받는 세태라든가 여성의 사회진출을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는 사회, 경제적 자립능력이 없어서 부당한 처지를 감내하며 남성의 그늘 아래 머물러야만 하는 여성의 현실, 동성애에 대한 빗나간 호기심과 편견 등이 그것입니다.

여성의 권리와 지위가 철저히 무시되던 공고한 남성 중심사회에서 이런 민감한 주제들이, 그것도 여성작가에 의해서 집필됐을 때 어떤 반향을 일으켰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태어나면서부터 부여받은 성적 특권과 보잘 것 없는 완력을 휘두르는 남성들을 향해 자신의 의지와 미래를 주장하는 주인공 여성들의 모습이 당시의 남성 독자들을 얼마나 당황하게 만들었을지도 익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다무라 도시코에게 일본 근대 여성소설과 페미니즘 소설의 개척자라는 타이틀이 붙은 건 아마도 이런 이유들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만 문학사적인 가치와 의미에 비해 소설적 재미는 좀 떨어지는 편입니다. 다무라 도시코 특유의 글쓰기 스타일 때문인지 번역의 문제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소 불친절한 전개와 모호한 문장들 때문에 쉽고 편하게 읽히지 않았습니다. 묵직한 주제 속에 색채와 풍경에 대한 집요한 묘사와 탐미적인 정서가 농밀하게 녹아든 건 매력적이었지만, 정작 인물들의 말과 행동과 감정에 대해선 지나치게 생략되거나 거꾸로 갑자기 비약하는 경우가 많아서 여러 번 당혹감을 느끼곤 했습니다.

또한 가장 기대가 됐던 표제작 단념의 경우 분량에 비해 너무 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그만큼 많은 주제를 동시에 다루고 있어서 좀처럼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굳이 평점으로 총평하자면 소설 외적인 가치와 의미에 별 5, 소설적 재미에 별 3개 정도라고 할까요?

 

에디션F 시리즈 가운데 역시 일본 근대소설의 개척자로 불리는 히구치 이치요의 해질녘 보랏빛이 있는데, 재미있게 읽었던 아사이 마카테의 연가에 간접적으로 등장한 작가이기도 해서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단념에서 느낀 아쉬움 때문에 읽을지 말지 주저하게 된 게 사실입니다. 도서관에서든 서점에서든 첫 수록작만이라도 읽어보고 마음을 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족이지만, 에도시대~근대를 배경으로 한 일본소설 가운데 장르를 불문하고 베스트로 꼽은 작품들이 있는데, 그쪽으로 관심 있는 독자라면 아래 포스트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s://blog.naver.com/memories226/222642030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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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나이프 밀리언셀러 클럽 98
야쿠마루 가쿠 지음, 김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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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品再讀은 오래 전에 읽었지만 서평을 남기지 않았던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제가 갖다 붙인 조잡한 타이틀입니다. 기억 속엔 명품으로 남아있지만 다시 읽었을 때 예전 그대로의 감흥을 전해줄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커피숍 점주인 히야마 다카시는 4년 전 3인조 강도에게 아내 쇼코를 잃은 상처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채 지금은 4살이 된 딸 마나미와 살아가고 있습니다. 당시 범인들은 금세 체포됐지만 13세라는 나이 때문에 제대로 된 처벌 없이 보호시설로 옮겨졌고, 히야마는 이 부당한 조치에 격분하여 국가가 벌을 내리지 않는다면 제 손으로 직접 범인을 죽이고 싶습니다.”라는 인터뷰까지 한 바 있지만 결국 아무 보상도, 사과도 받지 못한 채 4년이란 시간을 허망하게 보내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3인조 중 한 명이 히야마의 커피숍 인근에서 살해된 채 발견됩니다. 4년 전 쇼코의 죽음을 수사했던 형사가 찾아와 자신의 알리바이를 묻자 겨우 억눌렀던 히야마의 분노와 증오는 다시 폭발합니다.

 

천사의 나이프는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한 야쿠마루 가쿠의 데뷔작이자 그의 이름을 한국에 처음 알린(2009) 작품이기도 합니다. 일본 미스터리에 입문하고 3년쯤 지났을 때라 기성과 신인을 구분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읽던 시절인데, 생소한 이름이긴 해도 황금가지의 밀리언셀러 클럽작품이라 무작정 장바구니에 담았었고, 지금까지도 대략의 줄거리가 생각날 정도로 무척 인상 깊게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이후 야쿠마루 가쿠의 찐팬이 됐는데, 지금까지 한국에 출간된 그의 작품 19편 중 15편을 읽게 된 건 천사의 나이프가 남긴 첫 인상이 진심으로 강렬했기 때문입니다.

 

일본 미스터리 가운데 촉법소년 문제를 다룬 작품은 무척 많습니다. 최근까지도 그 기세가 이어지는 걸 보면 일본 내 촉법소년 문제는 여전히 심각한 상황인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도 법을 조롱하듯 고의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촉법소년이 급증하고 있어서 엄벌만이 효과적인 억지력라는 주장과 갱생과 보호가 우선이라는 주장이 팽팽하게 부딪히고 있는데, ‘천사의 나이프2005년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나 지금도 충분히 논쟁거리가 될 수 있는 화두를 던지고 있습니다.

 

아내를 살해한 3인조 중 한 명이 살해당하고 자신이 용의자로 취급되자 히야마는 나머지 두 명의 범인을 직접 만나보기로 합니다. 하지만 그의 진짜 목적은 아내를 살해하고도 기껏 보호시설에서 몇 년을 지내다 사회로 돌아온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갱생이란 게 가능하긴 한 건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히야마는 엄벌파보호파로 갈린 여러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데, 한때 범인들을 직접 죽이고 싶다고 공표했던 그 자신 역시 이제는 무엇이 옳은 길인지 확신하지 못한다는 걸 깨닫고 맙니다. 복수가 능사가 아니라는 것도, 이제 와서 범인들에게 억지 사과를 받아도 달라질 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도 히야마를 무력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3인조 중 남은 두 명마저 습격당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뜻밖에도 아내 쇼코가 숨겨온 비밀까지 알게 되자 히야마는 3인조를 공격하는 진범을 알아내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야 쇼코의 죽음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야기의 적잖은 부분은 가해자인 촉법소년에게 한없이 자비롭기만 한 사법 시스템에 대한 히야마의 분노를 그리고 있으며 가해자의 참회만이 유족을 진정으로 위로할 수 있으며, 피해자의 용서만이 가해자의 진정한 갱생을 완성시킬 수 있다.”는 주제의식을 거듭 강조합니다. 하지만 야쿠마루 가쿠는 아내를 죽인 3인조가 4년이 지난 현재 누군가에게 차례로 습격 받는 사건을 설정하고 그 진상을 알아내는 역할에 히야마를 배치함으로써 그의 분노와 작품의 주제의식을 더욱 강렬하게 부각시킵니다. 그리고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전매특허나 마찬가지인 막판의 불꽃 튀는 연속 반전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여 독자의 혼을 쏙 빼놓는 것은 물론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의 여운을 더욱 깊고 묵직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받은 대로 갚아 주는 복수의 쾌감을 좋아해서 고백이나 그리고 숙청의 문을처럼 복수의 대상이 미성년자임에도 불구하고 카타르시스를 느낀 작품들도 있지만, 촉법소년의 처벌과 갱생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정교한 미스터리 속에 풀어낸 야쿠마루 가쿠의 방식은 돌직구 스타일의 복수극과는 또 다른 차원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듭니다.

개인적으론 엄벌파이자 복수파에 가깝지만 오랜만에 다시 읽은 천사의 나이프덕분에 결론 없는 화두를 놓고 잠시나마 고민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정통 미스터리에 촉법소년이라는 사회파 서사를 제대로 녹여 넣은 참맛을 만끽하고 싶은 독자라면 야쿠마루 가쿠의 데뷔작인 천사의 나이프를 꼭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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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질은 부드러워
아구스티나 바스테리카 지음, 남명성 옮김 / 해냄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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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인 바이러스로 지구상에서 동물이 사라진 이후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몇몇 정부는 제한적인 인육 소비를 허가했습니다. 수의사의 꿈을 접고 지금은 인육 가공 공장의 2인자가 되어 인육의 도축과 유통 과정에 깊이 관여하고 있지만 마르코스 테호는 인육을 절대 먹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릴 적 아버지와 자주 갔던, 하지만 지금은 폐허가 된 빈 동물원에 가서 견디기 힘든 비참한 현실을 잠시나마 잊으려 애쓰곤 합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고기용 인간을 사육하는 업자가 최상급 암컷 한 마리를 선물합니다. 기르든 도살하든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지만 마르코스는 그 암컷을 헛간에 두고 보살핍니다. 갓 태어난 아들이 숨진 뒤 아내와 별거 중이던 마르코스는 어느 날 암컷에게 미묘한 감정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특수설정 미스터리로 유명한 시라이 도모유키의 인간의 얼굴은 먹기 힘들다역시 이 작품과 마찬가지로 동물이 사라진 뒤 인육을 소비하는 세상을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그 작품에서 인간이 소비할 수 있는 인육은 오직 자신의 체세포로 생산된 식용 클론뿐입니다. 하지만 육질은 부드러워에는 끔찍한 방식으로 생산되고 도축되는 진짜 인육이 등장합니다. 고기용 암컷과 수컷 간의 인공수정을 통해 태어난 뒤 사육업자에게 길러지는 최상급 인육부터 심각한 범죄를 저질러 도축형을 선고받은 자들, 사고나 병으로 사망한 자들, 외국에서 수입된 고기용 인간 등 진짜 인간의 몸이 동물성 단백질의 원천으로 이용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니라 개체, 고기, 제품, 암컷, 수컷으로 불리는 그들은 우리에 갇힌 채 물과 사료로 키워지며 때론 신속한 대량생산을 위해 성장 촉진제를 투여받기도 합니다. 그들 중엔 돈 많은 사냥꾼들의 수렵장에 끌려가 인간 사냥감이 되거나 생체실험 연구소에 팔려가 갖가지 실험에 이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히려 가장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건 도축 대상이 되는 건데, 도축된 그들의 몸은 무엇 하나 버려지는 부위 없이 완벽하게 소비됩니다.

작가는 식인이 합법화된 세상에서 인육이 어떻게 길러지고 소비되는지를 다큐멘터리처럼 보여주는 한편, 사육업자, 육류가공업자, 가죽가공업자, 인간사냥꾼, 생체실험 연구소, 성매매 업소 등 이른바 고기용 인간들을 자신의 이익이나 욕망에 이용하는 다양한 군상들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기도 합니다.

 

피와 살이 난무하는 잔인한 장르물을 어지간히 읽은 편이지만 사육-도축-가공-소비로 이어지는 식인의 일련의 과정에 관한 상세한 묘사에는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비위가 약한 독자라면 나름 큰 각오를 하고 읽어야 할 작품입니다.

다만 흥미 위주의 식인 이야기를 기대해선 안 됩니다. 또 채식주의자인 작가가 육류 소비를 비난하기 위해 쓴 작품도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를 먹어 치우며 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현대 자본주의의 폐해와 끝을 알 수 없는 인류의 탐욕을 그린 작품에 가깝습니다.

주인공 마르코스 테호는 인육을 권장하는 TV광고가 난무하는 미친 세상에서 거의 유일하게 인간성을 유지하고 있는 인물인데, 작가는 그와 그 주변사람들 - 과거 도축업자였지만 동물이 사라지고 인육이 등장하자 치매에 걸려버린 아버지, 아이가 돌연사한 뒤 패닉 상태에 빠진 채 친정으로 돌아가버린 아내, 어느 날 갑자기 마르코스의 집안에 머물게 된 최상급 고기용 암컷’, 그리고 괴로움 속에서도 마르코스가 매일 같이 만나야만 하는 비인간적인 인육 관련업자 등 - 을 통해 헤어날 수 없는 디스토피아의 비극을 절절하게 그려냅니다.

 

내용과 장르를 불문하고 디스토피아 스토리의 엔딩은 언제나 궁금증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암울한 상황에서도 작은 희망을 남긴 채 마무리될지, 마지막 장을 덮은 독자에게 한없이 무겁고 암담한 여운만 남겨 놓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인데, ‘육질은 부드러워의 경우 설정 자체가 작은 희망조차 남길 여지가 없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상치 못한 엔딩 때문에 여운의 무게와 암담함은 더욱 무겁고 진하게 느껴졌습니다.

 

동물은 절멸시키되 인간만 살려놓는 바이러스가 존재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만에 하나 육질은 부드러워의 세상이 도래한다면 과연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마지막 장을 덮고 표지를 다시 들여다보며 그런 의문을 떠올려보니 책을 읽을 때보다 더더욱 착잡해지고 암울해질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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