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록 살인사건
니시무라 교타로 지음, 이연승 옮김, 박진범 북디자이너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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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락객들로 붐비는 긴자 거리에 난데없이 나비 떼가 나타난 직후 성경 구절을 새긴 팔찌를 찬 청년이 독극물로 자살한 채 발견됩니다. 청년의 신원을 알 수 없어 답답해하던 경찰은 1주일 후 또 다른 자살 사체와 마주치는데 이번에는 1주일 후의 자살을 예고하는 메시지 - “우리 동지가 항의하기 위해 분신자살을 할 것이다.” - 가 남겨져있어 초긴장상태에 빠집니다. 서로를 동지라 부르는 자들의 정체는 물론 누구에게 무엇을 항의하겠다는 건지도 알 수 없어 경시청 수사1과의 도쓰가와 경부를 포함한 경찰은 당혹스러울 뿐입니다. 그러던 중 자살한 자들의 동료로 보이는 한 남자를 찾아내면서 수사는 급진전되지만 그들 배후에 사이비 종교단체가 자리하고 있는 걸 알게 된 도쓰가와 경부는 큰 충격에 빠집니다.

 

묵시록 살인사건202292세의 나이로 타계하기 전까지 무려 700편에 가까운 작품을 남겨 일본의 국민 미스터리 작가로 불렸던 니시무라 교타로의 작품으로 1980년에 출간됐습니다. 한국에선 80~90년대에 소개된 작품까지 포함해도 출간작 자체가 10편도 되지 않아 미지의 작가나 다름없었는데, 요 몇 년 사이 살인의 쌍곡선’, ‘화려한 유괴에 이어 묵시록 살인사건까지 출간되면서 한국 독자들에게도 더는 낯선 이름의 작가로 여겨지진 않는 것 같습니다.

 

연이은 자살 사체가 발견되는 와중에 도쓰가와 경부를 혼란스럽게 만든 것 중 하나는 죽은 자들이 남긴 미소입니다. 독극물로 인한 고통 속에서 어떻게 웃으며 숨을 거둘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타살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건가? 이런 의문에 사로잡혀 고민을 거듭하던 도쓰가와 경부는 세 번째 자살 사체에서부터 사건성을 감지하기 시작했고, 운 좋게 포착한 자살자들의 동료 한 명을 조사하면서 조금씩 사건의 실체에 다가갑니다. 유일한 심증은 자살한 자들의 팔찌에 새겨진 여러 가지 성경 구절들입니다. 분명 특정 종교단체가 개입했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들이 무슨 이유로 자살하는지, 누구에게 항의하는 것인지는 좀처럼 밝혀지지 않습니다.

 

사이비 종교단체를 다룬 미스터리나 스릴러를 여러 편 읽었지만 묵시록 살인사건처럼 거의 돌직구 스타일로 서사를 전개하는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절망에 빠진 젊은이들의 정신을 장악하고 자신의 욕망을 구현하기 위해 서슴지 않고 죽음을 조종하는 사이비 교주의 행태라든지 교주와 교리에 세뇌된 채 세상의 상식과 등을 저버린, 그래서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자살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겁니까?”라는 말을 태연히 내뱉는 신도들의 언행은 그야말로 사이비 종교 서사의 교과서처럼 읽힐 정도입니다. 성경을 인용한 대목이나 교리를 설파하는 장면이 적지 않아서 가끔 머리가 무거워지곤 했지만 큰 무리 없이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또한 단서 하나 없는 막막한 상태에서 사소한 조각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로 수사를 벌이는 도쓰가와 경부와 그의 동료들 역시 아날로그 시대의 경찰의 진면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막다른 벽에 수없이 부딪히면서도 그들의 탐문은 거듭되고, 상상에 불과한 추리라도 기어이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밤낮없이 매진합니다. 물론 이런 수사 과정은 요즘의 독자에겐 답답하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1980년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며 읽다보면 각종 문명의 이기에 의지하며 수사를 벌이는 현대의 경찰이나 탐정에게선 느낄 수 없는 제대로 된 진정성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클래식 미스터리만의 정수라고 할까요?

 

사이비 종교문제를 다룬 정통 사회파 미스터리이자 진한 땀 냄새가 진동하는 경찰소설이면서 동시에 본격 미스터리의 향기까지 품고 있는 묵시록 살인사건은 자주는 아니더라도 간혹 고전만의 독특한 맛을 맛보려는 독자에게 잘 어울리는 작품입니다. 소재 자체 때문에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지만 마지막 장까지 한 번에 달리게 만드는 서사의 힘이 워낙 묵직해서 일단 읽기 시작하면 소재에 대한 우려나 비호감은 금세 잊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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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치백 - 2023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이치카와 사오 지음, 양윤옥 옮김 / 허블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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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 기관절개 호스를 꽂고 등뼈는 S자로 심하게 휜 미오튜뷸러 미오퍼시(근세관성 근병증)’, 흔히들 꼽추라 부르는 중증 척추 장애인으로 살아온 지 30년이 된 40대의 이자와 샤카. 부모에게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과 함께 중증 장애인 그룹홈 건물을 보유하고 있는 그녀는 남들 앞에선 성실하며 과묵한 장애여성으로 지내지만 동시에 필명으로 포르노에 가까운 소설과 기사를 쓰는 익명 작가이기도 합니다. 그녀의 간절한 두 가지 소망은 다시 태어나면 고급 창부가 되고 싶다.”임신과 중절을 하고 싶다.”입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을 혐오하는 간병인 다나카에게 놀라운 제안을 합니다. “내가 임신하고 중절하는 걸 도와주면 1억 엔을 줄게요.”

 

2023년 상반기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인 헌치백은 두 가지 면에서 화제가 됐습니다. 하나는 최초로 일반적인 글쓰기가 불가능한 중증 장애인 수상자가 나온 점이고 또 하나는 작품 자체의 파격성입니다. 100페이지가 채 안 되는 짧은 분량이지만 장애인 당사자가 쓴 충격적이고도 깊은 여운을 남기는 장애인 서사의 묵직함과 애틋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장애인이 쓴 장애인 서사라고 하면 대부분의 독자는 차별을 비판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지레짐작하겠지만, ‘헌치백은 그와는 거리가 먼 작품입니다. 물론 작가가 어째서 2023년에 이르러서야 중증 장애인이 최초로 수상하게 됐는지 모두가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라는 수상소감과 함께 종이책 중심의 출판계를 비판하면서 전자책과 오디오북 추가 보급 등 독서 배리어 프리를 호소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장애인 차별을 고발하는 사회소설 혹은 특정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목적성이 짙은 작품으로 읽히진 않았습니다.

 

고급 창부가 되고 싶고 임신과 중절을 해보고 싶다는 건 장애인인 자신의 처지를 자학하거나 비관해서도 아니고 일부러 꾸며낸 위악도 아니며, 오히려 평범한 여자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샤카가 당연히 꿈꿀 수 있는 바람으로 보였습니다. 임신, 중절, 매춘 등 자신의 몸이 절대 이뤄낼 수 없는 일들에 집중된 주인공 샤카의 욕망은 부도덕하거나 음탕하다는 식의 잣대로 판단해선 안 되며 오히려 평생 인공호흡기와 담을 빼내는 흡인기를 끼고 살아야 하고 식사와 목욕도 누군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며 섹스 자체는 아예 불가능한 그녀만의 소중하고 절실한 욕망으로 봐야합니다. 간병인에게 내가 임신하고 중절하는 걸 도와주면 1억 엔을 줄게요.”라고 제안하는 장면에선 누구나 놀랄 수밖에 없겠지만 그와 함께 한없는 애잔함을, 그럴 수밖에 없겠다는 절실함을 느끼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기 쉽지 않은 혼자만의 내밀한 욕망, 그러니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품고 있는 그런 욕망을 작가 역시 오랫동안 품어왔던 게 분명하고, 그것들을 파격적인 설정과 문장, 그리고 샤카라는 인물을 통해 풀어낸 것뿐이라는 생각입니다. 책머리에 실린 이 작은 목소리, 삐딱한 주인공에 부디 큭큭큭 웃어주시기를 바랍니다!”라는, 공개석상에서라면 듣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을 게 분명한 작가의 말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일 겁니다. 이 작품이 장애인 차별을 고발하는 사회소설로 읽히진 않은 건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입니다.

 

독자에 따라 헌치백은 무척이나 파괴적이고 공격적이며 상대의 마음에 확실히 꽂히기를 바라고 쏘아댄 작가의 화살처럼 읽힐 수도 있겠지만 그건 지금까지 비장애인이 창조했던 장애인 서사에만 익숙했던 탓에 정작 장애인인 당사자가 지나치게 솔직할 정도로 털어놓은 고백에 깜짝 놀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당사자성이야말로 헌치백이 품은 가장 큰 미덕이라는 생각입니다.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이면서 중증 장애여성의 임신과 중절을 다룬 작품이라고 해서 관심을 갖게 된 작품이지만 지금껏 만나보지 못한 특별한 이야기를 읽은 것 같아 그 여운이 꽤 오래 갈 것 같습니다. 사실 한 번 읽는 것만으로는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언젠가 지금 느끼고 있는 여운이 희미해질 때쯤 다시 한 번 읽는다면 조금은 더 샤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치카와 사오가 비슷한 아류작을 낼 리는 없겠지만 언젠가 당사자성을 다시 한 번 맛볼 수 있는 작품을 내놓는다면 꼭 찾아서 읽을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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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경계
야쿠마루 가쿠 지음, 남소현 옮김 / 북플라자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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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세 여성 하마무라 아카리는 묻지마 살상범 케이치가 휘두른 흉기에 십여 차례나 찔리지만 범인을 막아선 중년남자 아키히로 덕분에 목숨을 건집니다. 그는 숨을 거두기 직전 아카리에게 약속은 지켰다고전해 줘.”라는 말을 남깁니다. 사건 이후 거대한 트라우마로 인해 심신은 붕괴되고 가족들과도 충돌을 거듭하던 아카리는 다시금 삶을 살아나가기 위해 스스로 강해지기로 다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구해준 아키히로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무연고 묘에 매장된 그의 모든 것을 알아내기로 결심합니다. 한편 잡지 기자 미조구치 쇼고는 범인 케이치에 관한 뉴스를 보다가 개인적으로 그를 취재할 계획을 세웁니다. 자신과 꼭 닮은 불행한 유년기를 보낸 케이치에 대해 흥미 이상의 관심을 갖게 됐기 때문입니다.

 

매 작품마다 묵직한 주제와 정교한 미스터리, 그리고 예상치 못한 반전을 통해 사회파 미스터리의 진수를 보여온 야쿠마루 가쿠가 이번에는 묻지마 살인, 학대와 폭력, 갱생과 회한, 범죄피해자의 고통 등 더욱 더 현실적이고도 무겁기 그지없는 소재들로 채워진 미스터리를 선보였습니다. 특히 인간이라면 결코 넘어선 안 될 죄의 경계에 대한 야쿠마루 가쿠의 일성은 그 어떤 논픽션이나 연설보다도 피부에 와 닿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첫 번째 화자는 범죄피해자 아카리입니다. 불면과 우울, 폭음과 거친 언행 등 평소엔 찾아볼 수 없었던 태도로 주위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 만큼 아카리의 삶은 사건 이후 철저히 파괴됐습니다. 그 어느 미스터리에서도 이처럼 사실적이고 디테일하게 범죄피해자의 고통을 다룬 걸 본 적이 없는데, 그래선지 다시 살아가기 위해, 더 강해지기 위해 발버둥치는 아카리의 모습은 공감을 넘어 응원하고 싶을 정도로 절절해 보였습니다. 트라우마와 정면으로 마주하기로 한 아카리의 첫 번째 과제는 자신을 살리고 숨진 아키히로에 관해 알아내는 것. 또 그의 유언을 전달 받을 상대가 누구인지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족은 없고 친척들은 시신 인수를 거부한 탓에 무연고 묘에 매장된 아키히로의 삶을 추적하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리고 지난한 여정 끝에 아카리가 알아낸 사실들은 그녀를 충격과 연민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또 한 명의 화자는 잡지기자 쇼고입니다. 어머니로부터의 학대와 아동시설에서 보낸 유년기라는 공통점을 지닌 묻지마 살인범 케이치에게 관심을 갖게 된 그는 구치소에서의 면회를 통해 논픽션 책을 출간할 것을 제안합니다. 범행의 원인이 된 잔혹했던 유년기를 대중에게 알리고 싶다는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인 것도 놀랍긴 했지만 케이치가 동의한 또 다른 목적을 들은 쇼고는 적잖은 충격에 빠집니다. 물론 쇼고 자신도 단순한 돈벌이 이상의 의도를 품고 있었지만 말입니다.

쇼고의 캐릭터가 관심을 끈 건 그는 한때 죄의 경계를 넘었던 적이 있지만 현재는 마치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살아가는 이중적인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죄의 경계 양쪽에 있는 케이치와 아카리를 관조하는 듯하면서도 언제라도 다시 그 경계를 넘어설 것만 같은 시한폭탄 같은 인물이란 뜻입니다.

 

야쿠마루 가쿠 특유의 사회파 미스터리지만 죄의 경계는 소설적 미덕보다는 논픽션에 가까운 돌직구 같은 구성과 전개를 지닌 작품입니다. 물론 거듭되는 반전과 굴곡이 심한 스토리가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고, 범인-피해자-기록자 등 각기 다른 입장에 처한 인물들의 심리와 감정을 지독할 정도로 상세히 묘사한 대목들은 가슴을 울렁이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작과 함께 범인의 정체와 동기가 공개되고, 관련자들의 과거를 훑어가는 과정이 이야기의 중심이다 보니 그의 전작들과 비교하면 논픽션의 서사가 강하게 느껴지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장과 흥분을 놓칠 새가 없는 것은 물론 수시로 울컥하게 만드는 픽션의 힘을 만끽할 수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요약하자면 죄의 경계는 그만의 사회파 미스터리의 미덕과 함께 죄에 관한 묵직한 질문을 던져준 작품으로 기대 이상의 여운과 만족감을 남겨줬습니다.

 

신간 소식이 들리면 덮어놓고 구해 읽는 작가 중 한 명이 야쿠마루 가쿠입니다. 아직 책장에 방치해놓은 채 못 읽은 작품도 몇 편 있지만, 2024년에는 그의 신작 소식이 좀더 자주 들려오기를 기대해봅니다. (검색해보니 20234월에 출간된 最後를 포함하여 아직 한국에 출간되지 않은 그의 작품이 모두 다섯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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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범죄전담팀 라플레시아걸
한새마 지음 / 북오션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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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어선에서 어린아이들이 잔인하게 살해된 사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강시호는 광역수사대 3팀장이 된 지금도 당시의 범인을 찾기 위해 전력을 다합니다. 유일한 단서는 범인이 강시호의 등에 새겨 넣었던 라플레시아, 일명 시체꽃 문신입니다. 비슷한 문신의 소유자들은 꽤 있었지만 산스크리트어로 꽃잎을 채운 진짜 시체꽃 문신은 아직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한편 고급 아파트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맡은 강시호와 3팀은 여러 사람을 용의선상에 올리지만 확실한 증거를 찾지 못해 고전합니다. 그러던 중 피살자가 과거 사이비 종교에 몸담았던 사실이 밝혀지고, 그 부분을 추적하던 과정에서 강시호는 충격적인 사실과 직면합니다.

 

그동안 여러 편의 앤솔로지나 수상작품집에서 이름만 눈여겨보곤 했던 한새마의 첫 장편입니다. 아쉽게도 읽은 작품이 없어서 성향이나 장점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장편을 통해 처음 만나게 됐습니다.

이야기는 크게 두 갈래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강시호와 광역수사대 3팀이 수사하는 고급 아파트 살인사건이고 또 하나는 12년 전 인생의 밑바닥을 살던 김민서가 우연히 만난 또래 여성을 통해 종교에 입문하며 겪은 미스터리한 일들입니다. 이에 덧붙여 시체꽃 문신 살인마를 쫓는 강시호의 개인적인 수사가 간간이 끼어들면서 그리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하고 풍성한 서사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관 없어 보이던 세 개의 미스터리는 생각지도 못한 지점에서 한줄기로 묶이면서 강시호에게 큰 충격과 시련을 안깁니다.

 

일단 강시호라는 주인공 캐릭터가 가장 눈길을 끕니다. 20년 전의 참혹한 사건은 강시호의 몸과 마음에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당시 희생된 아이들 중엔 여동생도 있었기에 강시호의 트라우마와 복수심은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날것처럼 생생합니다. 범인이 등에 새겨 넣은 끔찍한 시체꽃 문신을 일부러 지우지 않은 것은 강시호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단서입니다.

20년 전의 참극에서 살아남은 뒤 최연소 광역수사대 팀장이 되어 문신 살인마를 쫓는다는 설정도 매력적이고, 다혈질이지만 필요할 때마다 냉정과 이성을 되찾는 점이나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대단한 폭력 재능과 함께 뛰어난 추리능력까지 겸비하고 있어서 미스터리 주인공의 필수 스펙은 빠짐없이 장착한 인물입니다. 문신 살인마에 집착한 나머지 잔혹한 살인사건이라면 자청해서 맡는 강시호 덕분에 3팀이 잔혹범죄전담팀이라는 별명을 얻은 설정도 흥미로웠습니다. 만약 이 작품을 기점으로 잔혹범죄전담팀 시리즈가 이어진다면 그건 전적으로 강시호라는 캐릭터 덕분일 것입니다.

 

다만 재미있게 읽긴 했어도 아쉬운 점이 몇 가지 있었는데, 가장 큰 건 짧은 분량에 세 개의 미스터리를 담다 보니 서사의 깊이나 밀도가 얕고 옅어 보인 점입니다. 고급 아파트 살인사건은 막판에 여러 차례의 반전을 거쳐 진범이 드러나긴 하지만 메인 사건이라고 하기엔 전개나 해법 모두 다소 가볍고 급해 보였습니다. 장편보다는 단편에 어울리는 소재였다고 할까요?

12년 전 김민서가 종교에 입문하며 겪은 미스터리는 고급 아파트 살인사건은 물론 강시호의 개인적인 수사와도 접점을 이루는 중요한 이야기지만 왠지 그 접점을 위한 도구처럼 느껴진 게 사실입니다. 접점에 자리 한 인물이나 사건 모두 필연적이라기보다는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인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딱 떨어지는 쾌감을 이끌어내지 못한 느낌입니다.

강시호의 개인적인 수사 역시 그녀가 20년을 짊어졌던 죄책감과 복수심에 비하면 너무 쉽게 마무리됐습니다. 물론 그녀의 수사는 완결되지 않았고 후속작에서 계속 이어질 거라는 떡밥이 남겨지긴 했지만 뭔가 개운치 않은 찜찜함이 남은 게 사실입니다.

 

국적을 불문하고 인물, 사건, 심리(감정) 묘사가 가볍거나 수박 겉핥기식으로 듬성듬성 이뤄지는 미스터리에는 좀처럼 몰입하기가 쉽지 않은데, ‘잔혹범죄전담팀 라플레시아걸역시 그런 인상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강시호의 트라우마와 고통이 진심으로 전해지지 않은 점도, 고급 아파트 살인사건의 발단이 된 안타까운 사연에 공감하기 어려웠던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강시호의 두 번째 이야기는 지금보다 100페이지 이상 분량이 늘어나도 좋으니 좀더 디테일하고 깊이 있는 서사와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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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
나가사키 타카시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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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스펜스 만화가를 꿈꾸며 유명 만화가의 보조로만 5년을 보낸 야마시로 케이고는 그림 실력은 뛰어나지만 천성이 착한 나머지 악한 캐릭터를 창조해내지 못해 만화가 데뷔에 번번이 실패하고 맙니다. 그런 그가 한 저택을 스케치하러 갔다가 일가족 네 명이 살해당한 현장을 목격합니다. 범인과 마주쳤음에도 충격 때문에 그 얼굴을 기억해내지 못한 야마시로는 용의자로 몰리기도 하지만 알리바이 덕분에 겨우 풀려납니다. 얼마 후 단골 펍에서 만난 분홍머리 남자가 살해현장에서 마주쳤던 범인과 똑같은 목소리를 내자 야마시로는 그대로 얼어붙습니다. 하지만 그가 떠난 뒤 그의 얼굴을 스케치해본 야마시로는 드디어 찾아낸 악의 캐릭터에 환호합니다. 그리고 그 캐릭터를 등장시킨 만화로 야마시로는 데뷔와 함께 대박을 터뜨립니다. 문제는 그 만화를 그대로 본 딴 듯한 4인 가족 살인사건이 연이어 벌어진다는 점입니다.

 

읽은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작가의 작품이지만 눈길이 끌린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띠지에 적힌 소설-만화 동시 발행이라는 문구였고, 또 하나는 인터넷서점에서 나가사키 타카시라는 이름으로 30편의 작품이 검색되는데 그중 28편이 만화라는 점입니다. 소설을 모방한 살인사건이라는 소재는 익숙하지만 만화를 모방한 살인사건은 들어본 적이 없어서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주인공 야마시로 케이고의 딜레마는 서스펜스 만화가를 꿈꾸면서도 너무도 선한 성격 탓에 인기를 끌만한 악한 캐릭터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런 그가 참혹한 살인사건 현장을 목격하고 그 범인과 마주친 뒤로 그토록 그려내지 못했던 악한 캐릭터를 창조해낼 수 있었다는 건 역설적이면서도 운명적인 설정입니다. 재미있는 건 악한 캐릭터를 창조한 바로 그 순간 야마시로 자신의 캐릭터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지고 비틀어졌다는 점입니다.

 

‘34’라는 제목의 야마시로의 데뷔작에 등장한 악한 캐릭터는 대거라는 이름의 무차별 살인귀입니다. 그리고 행복해 보이는 4인 가족만을 골라 참혹하게 살해하는 역대급 사이코패스입니다. 독자는 대거에게 열광했고 야마시로는 데뷔작부터 초대박을 터뜨립니다. 문제는 연재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돼 그의 만화를 그대로 모방한 4인 가족 살인사건이 일어난 점입니다. 그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대거의 실제 모델인 분홍머리 남자가 눈앞에 나타나자 야마시로는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만화를 포기할 것인지 연쇄살인의 공범이 돼서라도 어렵게 이룬 만화가의 꿈을 이어갈 것인지를 결정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캐릭터라는 제목에 걸맞게 이 작품은 선한 캐릭터의 만화가 지망생이 세상에 유래가 없는 4인 가족 연쇄살인마 캐릭터를 창조함으로써 만화가의 꿈을 이루지만 그로 인해 자기 자신의 캐릭터까지 망가지고 마는 비극을 다루고 있습니다. 또한 만화 속 살인마 대거의 실제 모델인 분홍머리 남자, 만화 오타쿠이자 연쇄살인을 수사하는 카나가와 현경 수사1과의 세이다 슌스케, 망가진 야마시로 때문에 절망하는 연인 나츠미 등 등장인물 모두의 캐릭터를 미스터리 못잖게 디테일하게 그려냅니다. 그래선지 소설보다는 만화에 적합한 서사로 보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현실적이고도 정교한 미스터리를 설계한 뒤 그 안에 악과 마주하는 여러 인물들의 다양한 캐릭터와 감정을 함께 불어넣음으로써 한 번에 마지막 장까지 읽게 만드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들어냈습니다.

 

막판의 흥미로운 반전과 클라이맥스에서는 다분히 만화적인 설정이 등장하긴 하지만 앞서 탄탄하게 쌓아온 서사 덕분에 아주 약간의 위화감 외에는 무난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 약간의 위화감 때문에 별 0.5개를 뺀 건 무척 아쉽게 느껴지긴 했습니다.

스토리와 캐릭터의 힘 모두 정통 미스터리보다는 만화 계열의 미스터리에서 성장한 작가의 이력이 제대로 발휘된 덕분이란 생각인데, 혹시라도 이 작품이 만화나 애니로 만들어진다면 꼭 찾아보려고 합니다. 소설 속에선 야마시로가 그린 만화 장면이 대사로만 설명되는데, 만화나 애니라면 소설과는 달리 매력적이면서도 충격적인 비주얼을 만끽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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