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광희 님의 이 영화에 대한 분석을 얘기 들으며 역시 영화 평론가라 예리하기가 남다르구나!’고 속으로 감탄했지만 나는 나대로 느낀 이 영화의 감상평을 적는다.

 

 

 

  우선 이 영화의 심상치 않은 제목에 주목했다.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는 뜻은 그 자리에 있고 싶었으나 하는 수 없이 떠나야 했다는 것이라고 해석해 봤다. 그런 관점에서 이 영화는 사건의 발단이 된 메일을 봤는지 안 봤는지조차 불분명한 식물인간 여인으로 말미암아 주변 인물들 모두가 갖가지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되며 변하는데----- 이는 외견상으로는 평온했던 일상이 특정 사건으로 파열된 후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그 무엇으로 바뀌었음을 깨닫게 한다.

 

 

  이혼 절차를 밟고자 찾아온 예전 남편이 이혼의 원인이 된 사 년 전 사건 내용을 고백하려하자 여자가 그럴 필요가 없다며 거부하는 모습이 단적으로 이를 입증한다. 이미 상처를 깊이 받아버린 이상 그 상처의 출발점을 알아봤자 현실에 있어서 아무 의미가 없음을 웅변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마음의 상처들을 받기도 하는데 그 원인을 규명해 본다 해서 상처가 아물고 복원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상처 받는 순간 변하니까. 그 누구도 제 자리에 머물지 못하고 떠나야 하니까. 그것이 인간사의 숙명이 아닐까?

 

 

 

 

  이 영화의 끝부분에 이르러 남자가,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는 여자한테 자신의 독특한 향수 냄새를 맡게 한 뒤 손을 꼭 쥐어 의식이 되돌아오길 간절히 바라는 장면으로 처리하는데----- 나는 이 부분에서 관객들의 시선을 영화 마지막 장면까지, 긴장되게 끌고 가려는 기법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다. 현실적으로 식물인간이 의식을 되찾을 가능성은 거의 없으니까.

 

 

 

  사실 이 마지막 장면은 여운을 주는 결말 기법의 전형적인 경우이기도 하다. 등장인물들의 얽히고설킨 갈등으로만 이 영화를 마무리짓는다면 관객들 모두 답답한 가슴으로 극장 문을 나서겠지만----- 마지막 장면만이라도 한 줄기 희망을 준다면 그나마 조금은 밝은 가슴이 되어 극장 문을 나서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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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는 감명 깊게 보았다. 자기 음악을 사랑하고 긍지를 갖고 있으나 현실적으로 돈벌이가 되지 못해 삶의 바닥을 헤매는 가난한 뮤지션의 이야기다통속적인 줄거리가 될 수 있음에도 깊은 감명의 영화로 승화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까닭이라고 나는 보았다.

 

 

 

 

  첫 번째로 영화감독의 내밀하고 꼼꼼한 연출 능력이다 영화의 여러 장면에서 그런 능력을 확인할 수 있지만 특히 주인공이 오디션 보러 음반 제작자가 있는 먼 도시를 찾아가는데 교통비도 없어서 남의 낡은 자가용에 빌붙어 가는 그 어둡고 쓸쓸한 장면의 연출이 압권이다. 자가용에 함께 빌붙은 또다른 늙은 사내의 역겨운 모습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가운데 비도 내리는 어두운 고속도로를 달려가던 자가용. 한 가닥 생존의 지푸라기를 잡으러 찾아가는 가난한 뮤지션의 그 쓸쓸하고 애타는 심정을 그토록 잘 대변해 주는 명장면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두 번째는 눈물 나는 스토리 진행 중에 잊지 않고 등장하는 시니컬한 소재들이다. ‘당신이 내 고양이라고 갖고 온 고양이는 왜 고환들이 하나도 없어! 내 고양이는 수컷인데 말이야!’하며 교수 부인이 버럭 소리를 질러 주인공 낯을 멀쑥하게 만든다든지, 음악 카페에서 공연 후 젊잖게 정장한 사내가 밖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카페 주인의 말에 혹시나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높이 사서 찾아온 음반 제작자가 아닌가 싶어 자못 기대를 품고 나갔다가 어둠 속의 그 사내한테 매를 맞고 쓰러진다는 설정 등이 그러하다.

 

 

 

 

 

  지난 60년대, 가난한 뮤지션의 삶을 아주 적나라하게 그려낸 이 영화는 당연히 수작이다. 그리고 그런 가난한 예술가들은 수 십 년이 지난 현재도 여전히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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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은 원래 대학교 4학년 때인 1973년 5월에 쓴 것이다. 당시 이 작품을 '그리고'문학회지(3집)에 실을 때 출판비를 대는 학예부장 녀석이 벌벌 떨며 내게 말했다.

이 작품 때문에 나까지 어디 끌려가 고생하는 거 아니니? 내용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거든.”

당시는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치하였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철저히 짓밟혔다고 기록되는 시대다. 학예부장 녀석이 벌벌 떨던 게, 이제야 이해가 된다. 우리나라에서 자유수호를 위한다고 참전한 월남전이 막바지에 달한 그 즈음에 반전사상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소설을 떡하니 문학회지에 발표하겠다니 말이다. 잘못되면 모처에 끌려가 고생바가지를 쓸 것 같은 공포감에 그 녀석은 내가 이 작품의 원고를 알아서 스스로 철회하기를 바라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원체 무심한 성격의 나는 이렇게 답했다.

괜찮아. 실어.”

    

솔직히, 지방 대학의 문학회지에 이 작품이 실렸기 망정이지, 만일 서울 한복판에 있는 대학교의 문학회지나 교지에 실렸더라면 분명 문제를 일으켰고 죄없는 학예부장 녀석과 나는 함께 경쳤을 테다.

 

오랜 세월이 지났다.

내가 퇴직 후 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할 때 한 친구가 자네가 대학 시절에 글을 잘 썼다는데 좀 보여줄 수 없냐?’고 부탁했다. 그런 연유로 세상의 빛을 제대로 받게 된 소설이숨죽이는 갈대밭이다. 그 친구가 다 읽어보고는브라보!’라고 벅찬 감동을 한 줄 메일로 적어 보냈다. 현재 쓰는 소설들보다 몇 십 년 전 대학 시절의 이 소설이 훨씬 낫다는 전화통화를 나중에 했다. 놀란 나는 이번에는 모 시인께 보였다. 그분 역시 다 읽고 나서 친구와 같은 반응을 보이며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제목을 바꾸게. 다 좋은데 지금 제목은 어째 마음에 안 드네.”

초원의 빛이란 원제 대신 숨죽이는 갈대밭이란 제목으로 바뀐 연유다. 가깝게 지내는 봉명산인이란 분도 이 작품을 읽고 극찬했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 아들 또한 이 작품을 보고 아빠가 대학시절에 이렇게 소설을 잘 썼다니!’하고 감격했다.

 

그래서 올해 여름에 생애 처음으로 작품집을 낼 때 수록한 12편에 이 작품을 포함시킴은 물론이고 작품집의 표지 제목으로까지 삼았는데…… 생각만큼 독자들의 반응이 나오지 않아 왜 그럴까?’하고 나 혼자 유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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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현대인의 소외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됐었다급격한 도시화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서로 대화 나눌 시간조차 갖지 못한 결과라면서 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런 얘기가 슬그머니 사라져버렸다 .

왜서일까?

나는 휴대폰의 폭발적인 보급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우리나라만 해도 거의 전국민이 휴대폰을 갖고 있으며 수시로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다이젠 대화 부족이 아니라 대화 과잉을 걱정해야 될 듯싶다 . 한창 공부해야 할 청소년들의 휴대폰 애용은 정도가 지나쳐 사회문제화됐으니 더 말하여 무엇하랴.

 

그렇다면 현대인의 소외 문제는 과연 끝난 것일까?  글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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