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을 기념하라 - 카체트에서 남영동까지, 독일 국가폭력 현장 답사기 보리 인문학 2
김성환 지음 / 보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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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의 모든 국가엔 악이 자행되었다. 그리고 그 국가에는 국가가 악을 자행한 시간과 장소, 사람이 있다. 하지만 시간은 지나면 역사가 되어버리고 악을 직접 지시하고 실행한 사람은 무책임하게 죽어 사라진다. 하지만 그 장소만은 어떻게든 남는다. 그 건물이 온전하던 아니든 적어도 터는 남는다. 일각에선 이런 장소를 그대로 온존하여 악을 기억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한편에선 그 끔찍한 기억을 지워내고 싶어한다. 지워내고 싶은 자는 악에 가세했거나 옹호했기에 불편함을 느끼는 자, 혹은 그 일을 당해서 트라우마를 지우고 싶은 피해자, 혹은 혐오를 보기 싫어하는 일반의 감정이다. 하지만 저자는 과감하게 악을 기억하고 기념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기념은 아니다. 기억에 가까운데 그런 장소를 지칭하는 한국어가 마땅히 없고 기념관 밖에 없으니 이런 용어를 책전체에 걸쳐 사용하고 있다. 

 한국은 악이 많이 자행된 국가다. 굴곡진 역사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에 독립군 세력과 일반 한국인에게 일본인과 친일파가 자행한 악, 분단 후 전쟁 전 혼란기에 여수, 순천, 제주에서 행해진 악, 한국전쟁 중 양 세력에 의해 행해진 악,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의 독재정권기에 행해진 악들이 그것이다. 이 악은 당시 집권 세력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자행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한국은 악이 일어난 장소를 온존하기 보다는 없애려는 쪽에 가깝다. 대표적인 것이 김영상 정권때 있었던 조선총독부 건물 해체였다. 당시에도 논란이 조금은 있었지만 결국 대다수 여론은 그것을 없애는 것 선택했다. 저자는 이것을 온존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난 저자에게 거의 동의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선 생각이 좀 다르다. 악의 장소는 온존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맞지만 총독부는 조선왕조의 상징인 경복궁과 광화문을 너무나도 철저히 가리고 파괴했기에 그냥 두기엔 좀 그랬다. 부수기 보단 어려워도 인근으로 이전이라도 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사실 우리에게 잘 보존되어 남아 있는 악의 장소는 많지 않다. 저자는 위의 열거된 악이 자행된 시기 중 박정희 전두환 시절에 주로 주목한다. 당시 공포의 장소는 남산 중앙정보부 6국, 서빙고의 보안사 분실. 남영동의 대공분실이다. 이중 위 두 개는 사라지고 남아 있는 것은 남영동 대공분실 뿐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곳에 주목하고, 책에서 그 온존 방향을 주장한다. 

 그리고 악이 엄청 자행되었고 그랬음에도 이를 잘 보존하고 기억하며 교육하고 있는 독일의 사례를 주목한다. 독일은 2차대전 중 반나치체제인사,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유대인, 집시 등을 격리 수용하고 절멸시킨 수용소와 이를 자행한 국가폭력기구들이 많이 있었다. 저자는 이런 독일을 집적 방문해 살피고, 남영동 개발의 해법을 찾는다.  

 사람들은 2차 세계대전의 가해자로 대개 독일과 일본을 지목한다. 그들은 엄청난 반인륜적 전쟁 범죄를 저질렀는데 이후의 행보는 우리가 알듯 사뭇 다르다. 양국다 대표 지도자가 공식석상에서 피해국에 사죄를 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 횟수와 진정성에서 독일이 앞선다. 또한 일본은 사죄의 발언을 언제했나 무섭게 자국내 정치인이 그를 뒤짚는 망언을 일삼는다. 하지만 독일은 그런 면에서 일관된다. 또한 자신들이 행한 악의 장소를 철저히 인정하고 보존하는 점에서도 다르다. 일본은 하시마섬을 국제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조건으로 조선인 강제징용에 대해 기록하기로 하였는데 이런 국제상에서의 약속마저 지키지 않는 국가다. 

 양국이 이렇게 다른 길을 가게 된 이유는 뭘까. 혹자는 냉전 체제를 말하지만 저자는 단호히 아니라고 한다. 미국은 2차대전의 원흉인 독일과 일본의 전쟁 범죄자를 철저히 엄단하려 하였다. 하지만 발빠른 소련의 움직임이 장애였다. 소련은 유럽에서의 점령지를 빠르게 공산화하였고, 아시아엔선 북한과 중국이 공산화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미국은 자본주의 진영을 공고히 하기 위해 냉전의 경계선이 있던 침략원흉국가를 빠르게 정상화할 필요가 있었다. 국가의 재건을 위해선 실무를 행할 공무원과 기업인이 필수였고, 그래서 전쟁에 가담한 이들 상당수가 이렇다할 처벌을 받지 않게 된다. 우린 일본만 그렇다 생각하는데 사실 독일도 그렇게 되었다. 

 양국의 행보가 갈리는 것이 이후다. 저자는 그 차이로 시민사회의 성숙도를 꼽는다. 독일은 나치청산에 사실상 실패한 후, 거의 20년을 그대로 간다. 나치청산 문제를 다시 거론한 것은 바로 68혁명 세대다. 이들은 전쟁에 무책임하게 동조한 아버지 세대를 비방하고, 나치 청산 문제를 20여년만에 독일사회 수면으로 다시 끌어올렸다. 독일의 과거 청산은 크게 5단계로 나뉜다. 우선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68혁명, 1980년 미국에서 홀로코스트 TV방송을 계기로 일어난 반성 운동, 1980년대 역사 수정주의 논쟁, 1990년 통일 이후 동독 과거사 청산 논의다. 

 이처럼 독일의 과거사 청산운동은 2차대전 종전과 같이 완성된 것이 아니고 수십년 간 독일 시민사회의 노력과 그에 호응한 정치권의 반응으로 인해 조금씩 이뤄졌다. 책을 보다보면 기념관이 1980년대나 90년대 지어진 것도 있는데 그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또한 독일 역시 한국처럼 지방마다 정치색이 보수, 진보성향인 곳이 있기에 지역마다의 접근과 시기도 각각 달랐다. 이런 독일의 모습을 보면 결국 일본이 그렇게 되지 못한 이유를 시민사회의 미약한 힘에서 찾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반면교사로 한국 역시 시민사회의 힘이 미약하다면 우리의 악을 인정하고 온존하기 어려워 지겠단 생각을 하게 된다. 

 

-나치 수용소의 역사와 유대인 절멸정책

독일은 1차대전 후 바이마르 공화국이 생겨난다. 전쟁의 책임으로 황제는 퇴위하고 공화국이 들어선 것이다. 당시 사회주의 세력와 우파세력의 갈등이 극심했기에 바이마르 공화국은 극단적 입장을 배제하고 국민의 의사가 제대로 반영되도록 정치체제를 설립했다. 그래서 공화국을 유일 체제로 삼고, 의회의 권한을 세웠고, 비례대표제를 운영했으며 복지제도와 사회보장제를 도입했다. 또한 평소엔 의회우위의 정부를 운영하면서도 당시 시국이 어지러웠기에 비상시국엔 대통령에 비상대권을 갖춰 혼란을 수습케 하였다. 

 이처럼 바이마르 공화국은 좋은 정치를 시도하였지만 대내외 조건이 좋지 않았다. 그들은 베르사유조약에 서명했기에 거액의 전쟁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또한 패전의 책임으로 상당 부분의 영토도 상실하였다. 여기에 1920년대 세계 경제공황이 불어닥치며 민심이 급격히 이반되었다. 이 때 나치당이 등장한다. 이들은 베르사유조약에 서명한 바이마르 공화국을 매도하고, 사회주의 세력이 1차대전에 찬성한 것을 공격하여 이들에게 전쟁의 책임을 뒤집어 씌웠다. 결국 1930년 내각은 붕괴하고 대통령 비상대권체제가 들어선다. 당시 대통령인 힌덴부르크는 다수당인 나치당의 당수 히틀러를 총리로 지명한다. 히틀러는 이를 수용하자마자 대통령을 가두고 공산당, 사민의원을 체포한다. 그는 입법권을 히틀러 행정부에 위임하는 악법도 통과시킨다.

 그의 이런 과감하고 위험한 행보에 긴장을 느끼는 독일인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한 번 더 시국이 그를 도왔다. 국회방화사건이 일어난 것인데 사실 일탈 개인의 소행이었지만 히틀러는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한다. 사회주의자 유대인의 일로 꾸민 것이다. 대대적 사정이 이뤄졌다. 전국에 걸쳐 공산당직자, 공산, 사민의원을 체포했고 그 수가 무려 8천에 달했다. 히틀러는 경찰력 뿐만 아니라 개인 친위대인 SA를 활용하였고 이들은 훗날 그 악명높은 SS가 된다. 

 한편 수용인원이 많아지자 전국의 유치장이 부족해진다. 나치당은 유대인이 운영하던 공장을 무단 압류하여 수용소로 개조하였는데 이것이 훗날 독일 전역의 유대인 절멸 수용소가 된다. 이 수용소는 나치 초기 공산당, 사회주의자를 가두는 용도로 쓰였고, 격리와 노동력 착취가 주 목적이었다. 나치는 수감자를 식별하려고 여러 색의 역삼각형을 썼는데 유대인은 유독 노랑색의 정삼각형을 썼다. 그러다보니 유대인이면서 사회주의자면은 별 모양의 식별표를 갖게 되었는데 이게 악명 높은 다윗의 별 수감자 식별표식이 된다. 나중엔 거의 죽음을 의미하는 모양처럼 여겨지게 된다. 당시 핍박받고 처형된 의원수는 무려 96명이었다. 민주주의의 완전한 파괴였다.

 히틀러는 수용소를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대규모 시설로 격상하고자 하였다. 그런 임무를 맡긴 자가 히믈러였다. 히믈러는 또 아이케를 등용한다. 아이케는 전국의 수용소를 총 관리하였는데 그는 작센 수용소를 먼저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모델로 삼았기에 이후 나치의 수용소는 하나같이 비슷한 양태를 띄게 된다. 

 나치는 이후 수용소를 운영하면서 1941년 이후 유대인 절멸 정책으로 전환하였을 때 존더 코만도를 유대인중 선발했다. 이들은 건장한 자들로 하는 일이 동료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인도하고 죽은 뒤 시신을 소각장으로 운반하는 것이었다. 이들의 임기는 고작 6개월로 이후엔 그들도 같은 운명이었다. 잔혹하고 슬프게도 이들은 그 6개월 간의 상대적으로 나은 대우를 위해 이일을 도맡았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동유럽에서 가장 잘 자행되었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대해서는 의도주의와 기능주의가 독일 학계에서 충돌했다. 의도주의는 히틀러의 중앙정부 지휘하에 학살이 일사분란이 일어났다는 것이고 기능주의는 기존의 반 유대주의와 더불어 학살이 각 지방에서도 나치의 직접적 명령없이도 자율적으로 집행되었다는 것이다. 현재의 학계는 양자를 절충하는 것으로 나치의 직접 시행과 이에 자극받고 호응하는 지방조직의 자율적 자행이 같이 일어난 것으로 파악한다. 

 동유럽에서 유대인 학살이 잘 행해진 것은 당시 동유럽 사람들의 반감 때문이었다. 이들은 전쟁 이전 소련의 강제병합과 침공으로 반소주의 반공주의가 강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전 유럽에 퍼진 반 유대주의도 있었다. 나치는 해방군처럼 여겨졌고 이들이 선전하는 공산주의자가 곧 유대인, 유대인이 곧 공산주의자라는 슬로건은 아주 잘 먹혔다. 동유럽에서 유대인을 살해하는 일반적 방법은 이들을 숲으로 끌고가 땅을 파게한 후 일렬로 무릎끓려 총살 한 후 다시 묻는 형식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손이 많이 가자 나중엔 이동한다고 버스를 타게 한 후, 밀폐시켜 배기가스를 다시 집어넣어 일산화탄소로 죽게하는 방식이 사용되었다. 

 이후 청산가스가 발명되자 버스안에서 가스를 사용하게 되었고 수용소에서도 가스를 이용한 집단 학살이 일반화하였다. 유대인들은 씻는 다는 목적으로 샤워실에 들어섰는데 이후 문이 밀폐되고 가스가 새어나왔다. 가스는 무거워 아래부터 찼다. 그러다보니 가스실에선 죽음의 피라미드가 형성되었다. 가장 약한 아이와 노인들이 위로 오르지 못하고 깔려 가스를 마시고 죽었다. 가스를 피해 그 시신 위로 올라간 여성이 죽었고, 마지막은 그 시신 더미로 올라간 건장한 젊은 남성차례였다. 이렇게 죽음을 맡게 되니 가스실에는 사람이 켜켜이 피라미드처럼 쌓인 죽음의 피라미드가 생겨나게 되었다. 정말 끔찍한 정면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기념해야 하나

저자는 독일의 사례를 살펴보며 기념관에는 조성에 장소성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사건이 일어난 곳이 무엇보다 기념관으로 가장 적합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건물도 보존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픔을 아픔 그대로 드러내어 타인이 그것을 자신의 아픔으로 공감할 수 있을 때 사회적 치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새로 짓고, 치장하는 것은 공감을 약화시킨다는게 저자의 생각이다.

 그리고 한국엔 이런 대표적인 장소가 있는데 바로 4.19기념장소다. 원래 4.19이후 정부는 기념장소를 서울시청앞과 남산에 조성하려 하였다. 그곳이 대표장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쿠데타로 집권했지만 이런 민주적 혁명을 부정하기도 옹호하기도 어려웠던 박정희 정부는 장소를 아무 상관없는 수유리로 옮겨버린다. 여기에 조형물도 교체해버렸는데 김경승이 만든 애도상과 수호자상은 남여로 매우 비한국적인 우람한 체격의 사람들이 조각되었다. 이런 장소성과 당대 한국인과 아무 상관이 없는 모습은 기념관을 피상적이고 공감이 어려운 장소로 만들어버렸다.

 서대문 형무소도 마찬가지다. 서대문 형무소는 악이 역사적으로 자행된 곳으로 일제와 독재정권이 모두 사용했다. 하지만 싹 새로 만들어버렸고 시기도 특정지어버렸다. 지금의 서대문 형무소는 주로 일제의 악을 드러내는데 사용된다. 또한 새로 제작한 고문 도구 및 마네킹을 사용함으로써 오히려 역사성을 훼손하였다. 

 저자는 남영동에서만큼은 이런 일이 일어나선 안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남영동은 보존되어야 하고 새로 신축할 필요가 있다면 지나치게 현대적이고 외양이 색달라 본래 공포건물의 아우라가 훼손되어서는 안된다. 또한 기념관은 피해자를 기억하나 그 범죄를 기획하고 조직, 실행한 사람과 그것을 가능하게 한 정치, 상황도 잘 설명하고 드러내야 한다. 한국은 이런 범죄에 대해 피해자만 기억하는 경우가 많은데 가해자와 그 정치상황에 대한 기억은 필수적이다. 즉, 현장과 피해 기록을 잘 보존하고 국가폭력이 자행된 정치, 사회적 맥락을 기념관을 잘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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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지만 없는 아이들 - 미등록 이주아동 이야기
은유 지음, 국가인권위원회 기획 / 창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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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제목 '있지만 없는 아이들'이 도서관에서 확 눈에 띄었다. 아마 소외된 아이들을 다루는 책일 것이라 생각했고, 대충 맞았다. 이 책은 한국에 존재하는 미등록 아이들에 관한 책이다. 미등록 이주 아동은 이주자 부모를 따라 한국으로 이주했거나 혹은 그들이 한국에서 낳은 아동으로 부모가 체류자격이 없거나 상실 된 경우, 또는 난민자격신청 실패 등 다양한 이유로 체류자격이 결국 없는 아이들을 지칭한다. 한국 정보는 이들을 사실상 있지만 없는 아이 더 나아가서 범죄자 취급하곤 하는데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은 매우 온당하다. 

 한국의 미등록 이주 노동자의 수는 정확한 통계는 없으나 20-30만 정도로 추산되며 당연히 그 아이들인 미등록 아동도 2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한국에 이주 노동자가 유입된 시기는 1988년으로 거슬러 간다. 당시 관광을 목표로 비자관리를 느슨히 한 결과 상당수의 외국인이 관광 비자로 입국해 이 나라에 눌러앉았다. 그리고 1990년대부터 대학 진학률이 높아지고 국내에 3D 업종을 기피하는 현상이 심해지면서 이주 노동자의 유입이 본격화한다. 

 정부는 부랴부랴 대책에 나서 1991년 해외투자기업 산업기술 연수생 제도를 만든다. 이들은 법의 명칭처럼 연수생 신분이라 노동자로서의 권익을 보호받지 못했다. 이들은 장기간 노동, 저임금, 위험한 작업환경에 내몰렸고 현대판 노동제도로 불린 이 악법은 2007년이 되어서야 폐기되었다. 하지만 장기간의 운영으로 인해 한국 사회 전반에 외국인 노동을 마구 부려도 된다는 악습을 짙게 남기게 디었다. 

 현재 한국은 전문직 기술 종사자의 경우 가족과 함께 이주하여 생활하는 것을 허락하지만 고용허가제를 통해 들어오는 노동자에게는 유독 한국에서 수십년을 일해도 가족 동반 비자를 허용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외국인의 입국과 정착을 통제하려는 강한 정책이지만 인도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저출산 고령화로 인구부족과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는 나라 형편을 생각한다면 오래가지 못할 제도로 보인다. 

 미등록아동은 처음엔 문제가 아니었다. 가족 동반 이주를 허용하지 않았기에 미등록 이주민 노동자들은 그들 자체의 문제 해결에 바빴으면 국내 지원 세력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이 오래 체류하면서 자연히 아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미등록 아이들 문제도 발생하게 되었다. 놀랍게도 2000년대만 해도 미등록 아동들은 학교 입학도 쉽지 않았다. 한국은 유엔아동권리 협약에 따라 미등록 이주 아동일지라도 학습권이 주어지는 고교까지 진학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 기간에는 불법체류임이 밝혀져도 추방할 수 없다. 하지만 문제는 이후이다. 고교 졸업후엔 바로 추방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한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선진국은 부모가 모두 외국인이어도 해당 국가에 장기체류하면 부모는 물론이고 아이에게까지 체류자격이나 국적 취득의 자격을 부여한다. 하지만 한국은 이런 것들이 전무하다. 대부분 추방해버리며 언론을 통해 사정이 알려지거나 이슈화되었을때 일부에 한해서 선처하는 것이 고작이다.

 한국에서 태어나거나 어려서부터 자란 미등록 아동들은 당연히 고초를 겪는다. 그들의 부모는 매우 바쁘기에 마땅히 이중언어자가 되어야 할 이 아이들으 거의 대부분 한국어만을 하게 된다. 때문에 추방당하는 경우 대처가 쉽지 않다. 어려서부터 한국에서 자라 한국어를 익히고 이 나라의 문화속에서 자라나 생긴 것만 빼곤 모두 한국인이기에 모국으로의 추방은 사실상 모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미등록 아이들은 등록이 되어 있지 않아 우리의 주민번호에 해당하는 외국인 등록번호가 없기에 어릴적부터 많은 문제에 봉착한다. 우선 아파도 병원에서 의료보험 혜택이 적용되지 않는다. 때문에 이들은 저소득에도 항상 많은 병원비를 부담해야 한다. 그리고 자라면서 각종 시험을 볼 수 없다. 태권도와 한국사에 관심이 많아도 단증 시험과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 응시할 수 없다. 등록번호가 없기 때문이다. 더 크면 운전면허는 물론이고 특성화고에 진학해도 기술 취득을 통한 각종 자격시험도 보지 못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대학진학에 필수적인 수능시험 응시도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미등록 아동들은 어릴 적엔 성실히 학습해나가다가도 중학교 이후 자신의 미래가 한국에선 더 이상 없음을 깨닫고 갑작스레 학교생활에 불성실해지거나 학업을 놓아버리는 경우도 많다. 공부를 열심히 해온게 무용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미등록 아이들은 집안에서도 애 어른으로 자라난다. 부모는 바쁘고 일에 시달리기에 한국어를 학당등을 통해 한국어를 학습할 기회를 잘 갖지 못한다. 또한 어른이 되서 왔기에 한국어가 발전하는데도 한계가 있다. 하지만 아이들은 사실상 한국인과 같은 수준으로 한국어를 구사하기에 부모가 언어의 한계로 겪는 다양한 문제들을 아이들에게 떠넘기게 된다. 사장에게 월급을 독촉하는 일, 은행 계좌를 만드는 일, 분실한 핸드폰을 찾는 일등 이 모든 잡다한 일들이다. 이로 인해 미등록 아이들은 보호받아야 할 나이에 어른을 오히려 보호하게 되고 빠르게 조숙해진다.

 아이들은 졸업 후에도 한국에 남으려 한다. 하지만 대학을 가지 못하고 자격취득도 못하기에 열악한 직장에 주로 취업하게 딘다. 법무부의 단속에 걸리게 되면 바로 범죄자 취급을 받는다. 수갑을 차게 되고 출입국 관리 사무소로 연행 된 후 개인 사정 정리가 끝나면 평생 한번도 가보지 못한 모국이란 곳으로 추방이다. 사실상 귀양가는 기분이 아닐까 싶다. 

 그나마 다행히 법무부는 2021년 4월 국내 출생 불법체류 아동 조건부 구제대책을 시행했다. 이는 한국에서 출생 한 후 15년을 체류한 아동이 자격대상이다. 조건이 너무 까다롭다. 한국에서 15년을 넘게 살았지만 모국에서 출생하고 한국에 부모와 함께 온 경우, 그리고 이 긴 15년을 못 채운 경우는 자격 대상이 되지 못한다. 저자는 외국처럼 한국도 보편적 출생 등록제도를 실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에서 태어나면 국적까지 아니더라도 등록을 해주고 체류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미등록 아동은 모국에서도 한국에서도 버림 받는 경우가 많다. 한국 정부는 당연히 등록을 해주지 않고 모국에서 이를 해줘야 하나 그곳들도 외국에 나가있는 불법체류자로 골머리가 아파 이를 잘 해주지 않는다. 이런 경우 엄연한 한 인간임에도 어느 나라에도 속해있지 않은 지구촌 난민 신세가 되고 마는 것이다.

 저출산 고령화 시대이고 다문화를 무척 강조하는 사회다. 하지만 그에 걸맞는 문화적 다양성과 포용성을 없다. 법무부가 이렇게 경직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국민 여론이 무엇보다도 불법 체류 외국인에게 호의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국내의 어려운 노동조건도 한 몫 할것이다. 외국인과 경쟁을 하며 그들에게 없는 자리 마저 내어주는 경우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처우도 좋아져야 한국의 노동조건도 좋아 질것이다. 사회의 최소자리를 높여야 전반적 수준이 경제적이든 사회적이든 문화적이든 향상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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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직 도시 - 기업과 공장이 사라진 도시는 어떻게 되는가
방준호 지음 / 부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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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추석엔 군산여행을 갔었다. 군산을 선택한 이유는 서해금빛열차 때문이었다. 아이들도 나도 기차를 좋아하고  좁지만 기차 방안에서 가족들이 이야기와 다과를 즐기며 풍경을 바라보고 편히 갈 수 있다는 게 매력이었다. 서울에서 출발한 그 기차의 행선지가 군산이었기에 자연히 그곳이 여행지가 되었다. 가면서 살피니 군산은 일제 강점기 주요 항구였고 그래서 일제 잔재 문화재가 남아있고, 짜장면으로 유명하며, 이성당 빵집이 유명하다는걸 알게 되었다. 은파호수공원도 있었고, 새만금에 고군산군도, 철길마을도 관광지였다. 

 4-5시간이 걸려 군산역에 도착했다. 평소라면 자가용으로 이동했겠지만 기차여행이었기에 택시를 이용했다. 택시 기사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도시의 쇠퇴를 이야기하며 걱정하고 있었다. 이 책을 읽기 전엔 인구가 줄어드는 모든 지방 도시 쇠퇴의 일반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니 군산은 커다른 두 변화가 있었다. GM대우와 현대중공업 조선소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2000년대 군산에 자리 잡은 두 기업은 고작 10년 정도를 머물렀다. 현대중공업 군산 조선소는 2017년에 문을 닫았고 지엠 군산 공장은 2018년 문들 닫았다. 이 두 대공장에는 무려 군산 사람 1/4가 생계를 걸고 있었다. 

 그 이전 군산은 버림받은 도시나 다름 없었다. 인구가 26-7만으로 전라북도 제2의 도시이지만 수도권에 가져다 놓으면 신경도 쓰지 않을 중소도시 규모에 불과하다. 한국의 산업개발은 수도권과 영남 중심으로 이뤄졌기에 호남 지역은 산업발전이 미미했고 이렇다할 기업체도 없었다. 그러다 90년대가 되었고 중공이 중국이 되면서 서해안 시대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게 된다. 그리고 한국 굴지의 기업 대우가 있었고 그 대우가 군산에 자동차 공장을 만들게 된다. 

 하지만 군산에겐 불행하게도 그 대우가 외환위기에 무너지게 된다. 결국 2002년 지엠이 대우차의 승용차 부분만을 인수하였고 상용차 부분은 1년 후인 2003년 인도의 타타 자동차가 인수한다. 이후 자동차 산업이 자리 잡고 조선업이 활황을 타며 군산의 전성기가 오게 된다. 한국의 조선 산업은 2003년 일본은 제친 후 상당한 호황을 누렸고 2008년엔 급기야 최초로 반도체와 자동차를 넘어서 한국 수출 비중 1위를 차지하게 된다. 조선업은 자동차와 다른 점이 있는데 자동화가 어려워 인간의 숙련도에 상당히 의존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업은 비정규직 위주로 꾸려진다. 

 반면 자동차는 숙련도에 대한 의존도가 덜하지만 정규직 위주로 산업이 꾸려진다. 그리고 많은 협력업체를 요구한다. 그리고 자동차 같은 제조업은 상당히 비슷한 생활 수준과 문화를 영위하는 표준적 연대가 가능한 노동자 집단을 형성한다. 그래서 군산 지엠의 노동자들은 매우 힘들고 어렵게 일했지만 괜찮은 급여를 받고 집 한채 정도는 가질 수 있을 정도로 살아가게 된다. 2008경제 위기가 닥치자 모기업엔 지엠은 세계 각지의 공장을 정리한다. 하지만 군산 공장은 무사했다. 당시 고유가로 마티즈, 라셰티 등의 자동차가 유럽에서 잘 팔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엠은 결국 유럽 시장에서 철수하고 그 파장은 군산 공장으로도 밀어닥치게 된다.  

 결국 군산에서는 조선소와 자동차가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군산을 떠났다. 28만에 가깝던 인구는 26만대로 주저않았다. 지엠 공장 폐쇄로 종업원 2044명과 164개 협력업체 직원 1028명이 실직했다. 조선소 가동중단으로 종업원 760명과 협력업체 직원 4099명이 실직했다. 제조업이 일자리가 사라지자 지방 상권도 주저 않았다. 또한 조선소 인근의 원룸들도 자리를 잃었다. 조선소는 비정규직 위주로 일꾼이 꾸려지기에 원룸이 잘 되는 편이기에 군산에도 많이 생겼던 것이다. 

 그리고 군산은 정부에 의해 고용위기 지역으로 선포되었다. 위기 지역은 구직 급여 수급기간이 길어지고 훈련 연장 급여도 제공되며 생활 안정자금 대출도 크다. 하지만 재취업은 쉽지 않다. 한국에서 긴 기간 길러진 노동자의 숙련도와 그에 따른 나이와 경력은 오히려 걸림돌에 가깝다. 한국은 이들의 경력과 기술을 후대로 이을만한 사회적 체계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이들은 어려운 것을 알면서도 퇴직금을 털어 자영업에 뛰어들게 된다. 그게 아니면 기다리고 있는 것은 경비나, 사회복지 직업 등이다. 오랜 기간 제조업 직장에서 나름 높은 자리를 차지했던 이들에게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이 책은 한겨레 기자가 어려움에 처한 군산에 6주간 머물며 조선소와 자동차 공장에서 일했던 사라들의 이야기를 엮어 만든 책이다. 그래서 제조업 노동자로서 그들이 갖고 있던 정체성과 그것의 무너짐.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애환등을 잘 느낄 수 있다. 한국에 제조업에 다시 살아나길 어려울 것이다. 너무 많은 제3세계의 저렴한 노동력, 그리고 4차산업혁명의 엄청난 자동화는 20세기 존재하던 두터운 제조업 노동자들의 형성을 구조적으로 막을 것이다. 플랫폼 노동자나 서비스업 노동자로 전락한 사람들은 경험이 다르고 연대하기 어렵다. 다시 노동의 시대가 오기 쉽지 않아 보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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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전쟁과 신세계질서
이해영 지음 / 사계절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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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은 역사학자 얀 모렐리의 전시 프로파간다 기본 원칙으로 시작한다. 

1. 전쟁을 원한 건 우리가 아니다.

2. 전쟁의 책임은 오로지 적에게 있다.

3. 적장은 악마나 흉악범의 얼굴이다.

4. 우리는 오직 대의를 위해 싸울 뿐 작은 이익도 탐하지 않는다.

5. 우리는 의도치 않게 잔혹행위를 저지를 수 있으나 적은 고의로 그런다.

6. 적은 금지된 무기를 사용한다.

7. 우리의 피해는 미미하나 적의 피해는 대단하다.

8. 예술가나 지성인은 우리의 명분을 지지한다.

9. 우리의 대의는 신성하다.

10. 우리의 선전을 의심하는 자는 반역자다.


 벌써 개전 1년을 맞이한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도 위 프로파간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젤렌스키와 푸틴은 이미 양 진영에서 악마화 되어 있으며 서로가 서로의 잔혹 행위를 고발하고 자신들의 승전을 과장한다. 전쟁의 책임은 놀랍게도 침략국과 피해국 양쪽 모두 주장하는데 러시아의 나토의 동진으로 인한 자국 변경 보호와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인 보호가 전쟁의 이유이며 우크라이나는 서구 자유 진영의 논리와 민족주의가 전쟁의 이유다. 

 이 전쟁은 갑작스러워 보이지만 한국전쟁이 그러했던 것처럼 상당한 조짐이 있었다. 전쟁은 동계올림픽이 끝남과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는데 이미 몇 달 전 서구 언론에서는 전쟁이 날 것을 경고하는 목소리가 상당히 있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는 이미 2021년 전 병력의 절반인 12만 5천 명을 러시아의 주 목표 지역이 될 돈바스 지역에 집결시킨 상태였으며 서구는 2014년 이후 우크라이나 군을 상당히 훈련시켜 놓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전쟁이 상당 부분 러시아의 성공으로 진행된 것은 서구, 나토와 미국의 무능,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무능, 상대적인 러시아의 전쟁수행능력의 우수함을 입증한다.

 우린 이미 서구에 속해있기에 이 전쟁과 관련하여 우리가 듣는 논리와 가치 소식은 서구 중심적이다. 한국 정부 역시 철저히 그런 입장에 서있다. 여기서 러시아는 상당히 악마화 되어 있으며 그 중심이 푸틴이고 이미 국가 자체가 비정상 국가 취급을 받고 있다. 또한 그들은 자국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21세기에 반인권적 침략을 저지른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러시아는 나름대로 전쟁의 논리를 갖고 있다. 시계를 크게 거슬러 올라가 냉전의 막바지를 살펴보면 소련은 1990년 붕괴를 맞이한다. 붕괴 당시 소련의 수장은 고르바초프 였으며 그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 동독을 내어주는 상황에 봉착하고 있었다. 동독의 상실은 서구 열강의 동진이었고 이는 무너져 가는 소련입장에서도 안보상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었다. 미국와 소련은 나토가 동진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독일의 통일에 합의한다. 이는 당시 미국부장관 베이커가 고르바초프와 구두약속한 것으로 정식문서는 아니자만 이런 구두합의사실이 문서로 남아 있다. 

 하지만 당시 소련은 냉전의 사실상의 패전국이었으며 단극화한 미국의 주도로 나토는 결국 동진한다. 러시아는 이를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서방은 유고를 침공했으며 1997는 러시아는 나토의 확장을 수용하는 기본 조약에까지 서명하게 된다. 결국 러시아는 2007년 푸틴의 뮌헨 선언으로 나토 및 미국의 동진을 더 이상 수용하지 않기로 결정하며 조지아 전쟁을 계기로 이를 확실히 보여준다. 또한 이후 힘을 키워 크림 반도를 합병하고 시리아 내전에 개입하였으며 군비를 강화하고 내정간섭을 차단하기 위해 노력한다. 중국과도 오랜 숙원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를 맞아 동맹을 강화한다. 2021년 러시아는 나토의 확장을 중단하는 최후통첩을 했으며 나토가 이를 무시한 결과가 우크라이나 전쟁이다. 

 또한 우리는 우크라이나가 단일한 민족세력으로 민주주의 국가로 서방의 일원이 되어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국가로 생각하지만 이는 사실과 거리가 멀다. 우크라이나는 기본적으로 세 종족으로 구성된다. 우선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는 우크라이나 인으로 주로 서부와 중부에 거주한며 이들이 다수를 구성한다. 두 번째는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우크라이나 인으로 중남부와 동부에 거주하며 러시아에 대한 적대감을 없다. 세 번째는 우크라이나에 거주하는 러시아인이다. 우크라이나는 소련으로부터의 독립 이후 두 개의 민족 국가상이 등장해 대결을 펼쳤다. 하나는 갈리시아(민족주의)패러다임으로 단일민족 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동우크라이나 모델로 다종교, 다민족, 다문화 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한다. 이 양 모델은 생각보다 크게 대립하지 않았으며 2014년 이전까지 이렇다할 충돌이 없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의 독립이후의 역사는 서부 갈리시아와 동부 돈바스의 서로 다른 정체성과 역사, 러시아에 대한 방향성을 둘러싼 지리적 대립과 정치적 투쟁의 역사였다.   

 2004년 서구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세력은 빅토르 유센코가 친러 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에게 대선에서 패하자 키예프에선 반대와 시위가 일어나 오렌지 혁명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친러성향의 돈바스 지역을 이를 쿠데타로 규정한다. 돈바스 지역은 우크라이나 중앙정부에서 벗어나 고도의 연방제를 요구했으며 2014년 마이단 쿠데타가 일어나자 반 러시아 반 러시아인 프로파간다가 우크라이나에세 집중 전개되었다. 마이단 반대 및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에 대한 도전은 살해협박과 탄압, 피살로 이어졌다. 이런 극단의 대립에 대한 화해정책으로 당선된 젤렌스키는 권력 장악 후 민족주의로 급선회해 동남부 지역에 더한 배신감을 안겼다. 때문에 지금의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은 사실상 2014년 마이단에서 시작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번 전쟁에서 러시아의 육군 편성은 포병중심이다. 전투차량은 많지 않으며 포병위주의 공격을 감행했다. 러시아 군은 부가 남부 지역이 공략에서 야포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는데 북부 지역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가 강해 포격을 가할 경우 강한 저항이 우려되어서이고 남부는 친러시아 지역이기 때문이다. 반면 동부는 철저히 포격했는데 이는 우크라이나 군을 빠르게 무력화하고 사상자수를 늘려 항복을 유도하기 위해서여다. 실제로 우크라이나 군 상당수는 러시아 군의 포격에 의해 희생되고 있다.   

 서구와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침공목표를  수도인 키예프의 점령으로 보았다. 하지만 러시아의 목표는 우크라이나의 극단적 민족주의 세력 및 동남부 지역의 해방이었다. 그래서 러시아군은 전면적을 감행하는 수준보다는 지역 수준의 전쟁을 다루는 규모로 편성되었다. 러시아는 벨라루스를 거쳐 키예프를 공격하여 우크라이나 군의 주력을 이곳에 묶어두고 동남부 지역을 상대적으로 쉽게 공략했다. 마리우폴 전투 후 전장은 우크라니아 동부에 형성되었는데 포파스나라는 도시 전체의 가옥이 지하요새로 연결된 지역을 러시아가 점령한다. 그래서 현재 러시아는 이곳을 거점으로 사방으로 진격이 가능한 상태다. 

 서구 언론은 러시아의 전쟁수행능력에 의심을 포하며 전황을 과대 포장한다. 하지만 러시아는 자급자족 국가이고 전쟁으로 인한 서구의 경제제재에도 불구하고 서구 이외의 다른 지역을 통해 충분한 경제활동을 하고 있다. 더군다나 일년 이상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내 푸틴의 지지는 아직도 80%에 이른다. 푸틴에 대한 러시아인의 애착을 고려해도 자국내 상황이 전쟁으로 정말 견디기 어렵다면 이런 지지는 나오기 쉽지 않다. 오히려 버티기 힘들어 보이는 것은 우크라이나와 서구다. 우크라이나는 60세 이하의 남성을 총동원한 상태이며 새로 징집한 이들은 떼죽음을 당하고 있다. 곧 여성을 징집한다는 이야기도 나올 정도로 인력이 부족하며 재정적으로 파산상태로 전비로 매일 10억달러가 지출된다. 즉, 서구의 지원이 멈춘다면 전쟁도 파탄난다는 이야기다. 전쟁으로 힘든 것은 서구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오래전 제조업을 포기하고 금융 및 기술자본으로 변모하였기에 이번 재래식 전쟁에서 무기 생산능력이 크게 떨어졌음을 보기고 있다. 이는 평화에 젖어든 나토의 다른 국가들도 마찬가지인 상태다. 덕분에 한국이 폴란드에 방산수출로 큰 이득을 보았고 이런 미국의 유약함을 본 산업자본 공장국가 중국은 또 다른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이다.

 미국의 대러시아 제재는 사실상 실패했다. 우선 이 정책은 중러는 밀착시켜서 거대한 경제블록을 형성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의 기본 정책은 러시아를 동진시켜 중과 대결하게 만드는 구도인데 정반대의 상황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미국이 냉정 이후 완성한 글로벌 자본주의는 이번 제재로 사실상 종말을 맞이했다. 향후 세계 경제는 과거 냉전 시대처럼 두 개로 쪼개져 서방의 금융자본주의와 중, 러의 산업 자본주의의 대결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 마지막으로 이번 제재로 서방은 러시아의 외화자산을 압류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미국의 주 기득권인 달러패권을 붕괴시킬 수 있는데 러시아는 바로 중국 중심의 결제시스템으로 이동해버렸고 중과 러가 대규모로 미국의 달러 및 국채를 정리하여 막대한 적자에도 달러를 마구 발행하는 미국의 기본입지가 흔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대러 제재로 고생하는 것은 유럽연합도 마찬가지다. 2022년 5월 기준 상품가격지수 중 비료가격이 250으로 올랐으며 콩기름 및 식품, 곡물가는 170, 에너지는 160에 달한다. 기준 100은 2010년의 수치다. 이처럼 인플레이션으로 유럽연합 각국은 크게 고통을 받고 있으며 러시아 시장을 상실해 무역수지도 25억 달러 적자로 돌아섰다. 이는 유럽연합 창설 이후 최대치이며 고물가로 인해 가계들의 부담을 나날이 커지고 있으며 저성장도 심화하고 있다. 반면 러시아는 자국내에서 철수 할 수 밖에 없는 서방의 알짜 기업을 덤핑 가격에 인수하여 이득을 챙겼고 오히려 해외 수출이 급증해 루블화가 폭등하여 이득을 보고 있다. 미국은 유럽연합의 이런 위기에도 트럼프 관세를 적용하여 이들의 산업을 위축시키고 미국의 군산복합체가 전쟁으로 거둔 거대한 이익으로 인해 유로화와 파운드 화가 절하하여 유럽 연합내의 에너지 식량부분 적자를 심화시키고 있다.

 즉, 미국은 자신의 이익을 위한 전쟁에 유럽연합을 가담시켜 자신의 경제적 이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이들에게 상당한 경제적 고통을 안기고 있는 셈인 것이다. 러시아산 에너지를 수입하지 못하는 유럽연합의 국가들은 미국의 에너지에 의존하고 있으며 미국은 이 과정에서 폭리를 취하고 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은 현재 1년이지만 향후 미국의 전쟁수행의지 및 미와 서방 중러간의 대결구도, 타이완 등의 향배에 따라 그 예후가 정해질 것이다. 전쟁은 생각보다 길어질 수 있는데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통해 러시아를 약화시키는 효과가 충분하다고 생각하면 지속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고 판단되면 쉽게 중단될 수 도 있다. 참고로 미국이 수행한 아프간 전쟁이나 베트남 전쟁은 거의 10년의 세월 간 지속되었다. 

 전쟁 후 세계는 정치군사적으로는 중러 동맹에 기초한 양극화,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브릭스의 전면화를 통한 다극체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 WTO나 IMF처럼 미국중심의 단극체제에서 발생한 국제지구는 힘을 잃고 UN역시 무력화할 가능성이 높다. 우크라니아 전쟁은 한반도에도 영향을 미칠 것인데 우선 1994년 우크라이나 비핵화 모델이 한반도 비핵화모델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어 북의 핵보유 명분이 강화될 것이다. 또한 남북과 미중러일이 참여하는 6자회담이 사실상 실효성을 잃게 될 것이고 한미일 대 북중러의 동맹대결이 더욱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 즉, 평화적 통일 보다는 과거 냉전시기처럼 대결의 전초기지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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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 Z (Z세대) - 디지털 네이티브의 등장
로버타 카츠 외 지음, 송예슬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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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Z세대 혹은 포스트 밀레니얼은 글자처럼 2000년대 이후 출생한 세대를 칭한다. 이들은 인터넷이 등장한 1995년 이후 출생하여 이전 세대와는 달리 인터넷 이전의 세상, 즉 아날로그 시대를 경험하지 못했다. 책 Z세대는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이들 세대를 연구한 책이다. 디지털 플랫폼와 인터넷 공간에서 이들이 사용한 언어와 심층면접으로 연구를 구성하였는데 그래서 좀 더 흥미롭다. 물론 영미권 연구이기에 한국의 Z와는 또 다른 측면도 많다.

 Z세대는 자신의 정체성과 소속을 말할 때 새로운 어휘를 사용한다. 이들은 열심히 공부하면서도 개인의 행복과 자기돌봄을 중시한다. 또한 탈위계적이면서도 협력적 방식으로 사회를 운영하려고 한다. 이들의 경험은 상당히 역설적이고 모순적인데 과거 어느 세대보다도 디지털 도구의 등장으로 발언권(유튜브, 밈, 틱톡 등의 SNS)의 수단이 많으면서도 현실 세계에선 자신의 힘이 위축되었다고 느낀다는 점이며 실제로도 그렇다는 것이다. 

 이들은 자기 세대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그 해결을 낙관적으로 바라보나 윗세대에게서 물려받은 문제들, 그러니까 기후위기, 폭력, 젠더문제, 인종차별, 정치체제의 실패와 부유해질 가능성의 낮아짐에 대해서는 심히 비관적이다. 

 Z세대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그들은 선명한 자기 정체성을 지니고 원치 않는 압박과 요구에 그 선명한 정체성을 이용해 자신을 규정한다. 이들은 개인의 정체성, 목적의식, 그리고 공동체 또는 그것을 지지하고 정교하게 만드는 공동체에 소속된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위계질서를 거부하고 평등과 협업을 바탕으로 목소리와 권력이 고르게 배분되는 수평적 리더쉽을 지향하고 확고한 가치관을 갖는다. 

 먼저 정체성을 살펴보다. 디지털 시대에 정체성은 개인의 여러 특성이 복잡 다단하게 얽힌 혼합물이자 신중한 탐색의 결과물이 된다. Z세대에게 정체성이란 거대한 사회집단 내에서 스스로 주장하고 개인적으로 형성해야 할 사회적 개념에 가깝다. 그래서 이들의 정체성은 고유하고 미세한 조각들로 구성되며 유연하고 심지어 교차적이다. 또한 형성과정에서 인터넷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들의 정체성이 매우 복잡하고 유연하며 교차적으로 나타나는 대표적인 것이 성정체성이다. Z세대의 성정체성은 매우 다양하다. 논바이어리(남성, 여성 정체화 거부), 시스젠더(태어난 성과 일치하는 성정체성), 트랜스(남성, 여성 어디도 아니며 심지어 논바이어리도 아님), 젠더 비순응자(젠더의 표현과 정체성이 남성, 여성, 양성을 오감), 젠더 플루이드(남성, 여성쪽으로 확실한 정체화가 아님, 양자를 오감), 젠더 퀴어(사회적 범주로서의 젠더를 부정)가 그런 것들이다. 물론 이것도 범주화 한 것이며 이것조차 오가는 경우도 있으며 실제 양상은 더 복잡다단하다. Z세대의 정체성 중 성이 유독 복잡한 것은 민족, 인종개념 등은 거의 주어지고 스스로 탐험할 여지가 적은 반면 성정체성은 그렇지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인종과 민족 정체성의 이면과 다문화주의, 인종 간 관계, 개인의 고유한 정체성을 존중하려는 욕구가 고도화하면서 이조차도 점점 미세하게 구분하고 있다. 또한 Z세대의 대부분은 종교를 거부한다. 그러나 이것을 정체성과 관련지어 받아들이면서 자신들의 유산, 문화나 민족정체성의 한 부분으로 탐험할 만한 가지 정도는 있다고 본다. Z세대는 이처럼 남들과는 달리 매우 세분하여 자신의 정의하는 미립자 정체성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며 이 정체성은 남에게 진정성 있고 솔직하게 전달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디지털 기술이 중요하게 작용하는데 디지털 도구들이 개인의 어떤 삶은 디지털 플랫폼에 공개할지 신중하게 선택하게 하기 때문이다. 

 한편 디지털 기술 때문에 이들의 정체성은 도전 받기도 하는데 디지털 플랫폼에 자신의 정체성이 공개되고 진정성을 요구 받기에 이를 지켜나가고 실천해야 하는 압박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실제 정체성과 디지털 플랫폼의 다른 사용자들이 요구하는 정체성이 다른 경우 양자의 경계선이 흐려져 진정성이 도전 받는 경우도 생겨난다. 

 Z세대 두 번째 특성은 조립식 소속감이다. Z세대는 안정성과 사회적 정착을 원하면서도 한 집단에 모든 정체성을 투사하거나 평생 한 집단에 메이지 않는다. 인터넷은 정체성의 경우처럼 자신이 속할 수 있는 집단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려준다. 심지어 없다면 자신이 만들어 낼 수 도 있다. 모든 SNS 플랫폼들은 저마다의 거품방울 아래로 고유한 하위문화와 언어를 생성하여 여러 유형의 조립식 소속감을 갖는 작은 공동체를 형성해낸다. 

 Z세대는 조립식 소속감을 실천하며 새로운 사회 실험을 시작한다. 저마다 고유한 조합으로 구성되고 복수의 커뮤니티에 소속됨으로써 표출되는 이들의 정체성은 고유함을 그대로 간직하면서도 각자에게 다층적인 사회적 지지를 제공한다. 이들의 소속감은 본질적으로 유연하며 비공식적이고 담화적이다. 

 Z세대의 마지막 특성은 위계의 거부와 평등성이다. Z세대는 부모세대와는 다르게 기성세대, 전문가들과 교훈적 진리, 그 밖에 전통적 형태의 위계적 권위를 경계하고 불신한다. 위선을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며 진정성에 집착하는 이 세대는 종교처럼 물려받은 가치와 관행의 상당수를 거부하거나 변형하여 수용한다. 그래서 전통적 제대에 대한 충성심이 매우 옅다. Z세대는 과거 제도에 의존하여 지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본다. 스스로의 힘으로 정답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많으며 그래서 자급자족, 자기의존, 자기의지를 선호한다.

 Z세대는 남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그룹을 위해서 기꺼이 책임지려는 수평적이고 헌신적인 리더를 선호한다. 그들에게 리더는 더 잘난 사람이 아니라 남을 위해 헌신하려는 의지가 강한 사람이며 리더십은 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다수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지시보다는 영향력을 행사하며 길을 안내하는 것이다. 

 이들은 협업을 매우 중시하는데 기존 세대는 위계 구조에서 시키는 대로 해왔기에 모든 것을 협업하려는 이들의 등장이 모든 사회조직에서 당황스럽다. 협업과 가벼운 리더쉽을 선호하는 경향을 이 세대의 지향성과 가치, 특히 개인 정체성과 다양성에 대한 존중과 공동체, 공정에 대한 열망과 관련이 깊다. 협업을 지향하면서도 개인의 자율성도 함께 보장해주는 사회구조의 새로운 탄생이 어쩌면 Z세대의 과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많은 사회학자들은 이들의 동료생산 방식이 새로운 사회 위계구조를 대체할 수 있을지 바라보고 있다. 

 Z세대는 이렇게 당차면서도 불안하고 의존적인 면도 있다. 우선 이들은 생각보다 부모세대의 이존한다. 경제적 위기로 인해 부모 세대는 자식들의 성공을 위해 Z세대가 어려서 부터 프로젝트 관리자처럼 일상의 문제를 세심하게 계획하고 적극적으로 개입해 왔다. 이에 의존해온 이 세대는 이런 문제로 인해 경제적, 정신적 독립심이 생각보다 부족하다. 또한 이들은 이전 세대보다 정신건강문제가 좋지 않다. 수천수만가지의 커뮤니티가 존재하고 관계의 가능성이 무한해 보이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선택이 더 어렵고 여기서도 소속되지 못하면 더욱 큰 고립감과 외로움에 시달린다. 또한 이들은 급격한 사회변화와 포격, 갈등, 경제성장에 대한 불신, 정치불안정을 바라보며 자라났기에 정보 과부하와 스트레스성 뉴스에 시달렸다. 이들은 사회와 어른을 믿지 못하기에 이런 정서적인 문제해결은 자신(45%)과 또래집단(25%)에 상당히 의존한다.

 이처럼 Z세대는 많은 사회 문제를 양산하고 중첩시켜 악화시킨 이전 세대와 근본적으로 다르며 수평적 리더십과 협력, 민주시민성으로 이를 해결할 가능성을 보여주는 세대다. 하지만 의외로 취약한 면이 있으며 전통의 의지하지 않기에 정체성이나 소속감도 쉽게 흔들리기 쉽다. 이런 이들은 기성세대가 잘 이해하고 사회에 잘 안착시켜주는 것이 인류의 미래를 위해 중요하다. 이들은 향후 100년을 살아가며 기후위기 문제, 미중갈등, 경제위기, 민주주의 실패, 정치갈등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마주하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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