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을 위하여
사샤 세이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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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주 독실한 무신론자다...... 이것은 새로운 종류의 종교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축제 없는 삶은 여인숙 없는 기나긴 길과 같다.

- 데모크리토스


사샤 세이건. 칼 세이건과 앤 드리앤의 딸이다. 극문학劇文學을 전공하고 글을 쓴다. 이 책은 그의 에세이 모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위의 '들어가는 말'에 나오는 인용문이 책의 내용을 잘 요약해 주고 있다. 저자는, 과학--이성--을 통해 바라보는 우주, 지구, 그리고 우리의 삶이 얼마나 놀라운지, 그리고 이러한 삶에서 의미를 찾기 위해 종교적 의식ritual이 있어야 함에 대해 여러 주제--태어남, 봄, 매일의 의식, 성년, 여름, 결혼, 섹스, 가을, 죽음 등--을 논의하며 생각을 나누고 있다. 그의 종교에 대한 생각은 종교학자인 카렌 암스트롱의 의견과 일맥상통하는데, 종교의 기능은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의식'에 있으며, 우리는 '무엇이 됐든' 종교적 의식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불가지론자-무신론자조차도 그렇다.


이 책이 "부모님 앤 드루얀과 칼 세이건에게 바치는 찬사이자 러브레터"라고 그는 마지막 '감사의 글'에서 밝히고 있는데, 매우 합당하다. 읽으며, 세이건과 드리앤이 어떤 부모였는지, 그 가정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책날개에 저자가 "인버스미디어그룹이 뽑은 '2020년대에 선한 영향력을 미칠 50인'으로 선정"됐다고 나오는데, 공감할 만하다. 옆에 이런 친구가 있다면 매우 기쁠 것 같다. 


평에서 별을 하나 뺀 것은, 책에 나오는 사례들이 너무 미국적이기 때문이다. 본인의 삶에서 찾은 사례를 인용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하겠지만... 매우 개인적인 평이다.


다음은 책의 몇 구절이다.

  "마루하[사샤의 유모]는 죽으면 천국에 가고 천국에는 하느님이 있고 천사들이 하프를 연주한대. 그런데 엄마 아빠는 죽음이 영원히 꿈꾸지 않고 자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잖아. 누구 말이 맞아?"

  부모님은 입을 맞춘 듯이 바로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건 아무도 몰라!"

  그냥 그렇게 말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마치 그게 정말 좋은 일이라는 듯이 활짝 웃으며 열띤 목소리로 즐겁게 말했다.

  이 대화가 나에게는 정말 큰 깨달음을 주었다. 죽음이라는 미스터리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지는 않았지만 삶의 본질을 엿보는 창을 얻은 것 같았다.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불확실성은 실제로 존재한다. 얼버무리거나 덮어버릴 필요가 없다. 최대한 많이 알려고 애쓰는 도중이라도 불확실성이 있음을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 (96~97 페이지)

  아버지는 1996년에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휴대전화를 쓴 적이 없다. 이메일 주소도 없었다. 가끔 아버지한테 스마트폰을 보여주는 상상을 한다. 이 작은 직사각형 기계 안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스물 몇 권, 셰익스피어 전집, 세계지도가 통째로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하는 장면을 상상한다. 이걸로 듣고 싶은 노래 전부 들을 수 있고 읽고 싶은 책 전부 읽을 수 있다고. 이 기계가 날씨도 알려주고, 뉴스 속보도 알려주고, 알바니아어나 우르두어로 대화할 수 있게 해준다고. 몇 번 두들기기만 하면 세계 곳곳에 있는 사람들의 의견을 듣거나 휴가 사진을 구경할 수도 있다고. 아버지는 틀림없이 좋아하셨을 것이다. (107 페이지)

  "사실 우리도 시간여행을 하는 거야." 아빠는 말하곤 했다. "일 초씩 미래로!" (154 페이지)


세이건 부부가 함께 쓴 글의 인용도 있다.

책이란 얼마나 놀라운 물건인가. 나무로 만든 납작하고 잘 휘어지는 물건인데 그 안에 검은색 선이 꼬물꼬물 우스운 모양으로 찍혀 있다. 그런데 그 물건을 한번 들여다보면 어느새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게 된다. 그 사람은 수천 년 전에 죽은 사람일 수도 있다. 저자가 수천 년의 세월을 넘어 조용하면서도 또렷한 목소리로 당신의 머릿속에서 말을 건다. 글은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일 것이다. 서로를 모르는 사람들, 멀리 떨어진 시대에 사는 사람들을 하나로 이어준다. 책은 시간의 굴레를 벗어난다. 책은 인간이 마법을 부릴 수 있다는 증거다. (156 페이지)


이렇게 칼 세이건을 추모한다. 나만의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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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페이지, "지구가 생겨난 지는 4억 5천만 년 이상 되었다."의 구절에서 "4억 5천만 년"은 45억 년의 오역으로 보인다. 32 페이지, 빅뱅이 일어난 시기 "13억 8천만 년 전"도 오역이다. 138억 년 전이 맞다. billion은 10억임을 착각한 모양.

[**] "For Small Creatures Such as We"의 원 제목을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을 위하여"로 매우 잘 번역했다. 책 표지도 너무 예쁘다. 원서 표지보다 훨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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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제713호 : 2021.05.18
시사IN 편집국 지음 / 참언론(잡지)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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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좋은 기사가 많은 '시사인'. 요즘 많이 언급되는 '집단면역'에 대해 다룬다. 좋은 언론의 모범을 보여준다. 다음은 '11월에 마스크를 못 벗어도 너무 절망하지 말기, 왜냐면...' 기사의 일부분이다.


 지난 4월12일 백악관 코로나 19 대응 언론 브리핑에서 CBS 한 기자가 물었다. “현재 백신 주저율을 감안할 때 미국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예방접종을 하지 않고도 집단면역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앤서니 파우치 미국 국립알레르기·감염병연구소 소장은 대답했다. “집단면역에 관해 다시 말씀드리자면, 저는 정의하기 매우 애매한(elusive) 것을 언급하는 이 개념에서 사람들을 벗어나게 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집단면역에 도달하는 인구 내 백신 접종 비율, 감염 회복 비율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70~85% 사이 어디쯤으로 추정하지만 우리는 사실 모릅니다. 그래서 파악하기 어려운 숫자에 집중하는 대신 가능한 한 빨리 많은 사람들에게 예방접종을 하도록 합시다.” 4월26일 브리핑에서 파우치 박사는 집단면역을 ‘움직이는 표적(moving target)’이라고 표현했다. 목표는 목표이되 고정돼 있지 않은 목표, 실시간으로 지점이 바뀌고 변수에 따라 움직이는 목표가 바로 ‘집단면역’이다. (12 페이지)

  펑! 하고 퍼지는 마법의 초대형 면역우산은 없다. 각자 자기 머리 위를 가리는 개인의 작은 우산이 모일 뿐이다. 하지만 그 우산들이 모이면 공동체의 우산이 된다. 몸이 아파서, 어려서,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우산을 펼치지 못하는 약한 사람들도 모여든 우산 아래에서 비를 피할 수 있다. 하나의 큰 우산이 펼쳐지지 않아도 서로가 젖지 않게끔 도와줄 수 있고, 좀 더 빨리 좀 더 많이 우산을 펼칠수록 모두가 안전하고 자유로운 세계에 한 걸음씩 더 가까워질 수 있다.

  ‘11월 집단면역 달성’ 목표는 이루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곧 실패는 아니다. 지금 우리는 한 명씩 우산을 펼쳐 드는 아름다운 ‘집단면역 과정’에 있다. (17 페이지)


이번 호의 시사인 만화는 요새 화두 중의 하나인 반도체 얘기다: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4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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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05-15 13: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움직이는 표적이란 표현이 실감나게 다가옵니다.

blueyonder 2021-05-15 13:59   좋아요 2 | URL
네, 그렇지요. 아직도 우리는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그래도 백신을 개발해 이렇게 대응하는 것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은 바이러스와 함께 살았고 앞으로도 함께 살 것이라는 사실이 정말 실감 나는 요즘입니다.

기억의집 2021-05-16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리스피가 온다라는 책 읽어보셨어요?? 저는 그 책 읽고 진짜 미국이나 유럽은 세상의 물음에 답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라는 것을 뼈져리게 느꼈네요 작가가 rdna를 기초적으로 설명하는데.. 그 구조를 완벽하게 꿰뚫고 있었어요. 그리고 나서 코로나 터지면서.. 어쩜 백신 미국이나 유럽에서 나올 수 있겠다 싶었는데.. 우리나라 대학 시스템 개편 진짜 해야 된다고 봐요. 위기가 닥칠 때 연구자료가 부족해 미국이나 유럽만 못 하잖아요. 그나마 정은경 본부장이 있는 게 신의 한수 였어요!!!

blueyonder 2021-05-16 19:44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 책 <크리스퍼가 온다>는 아직 못 읽어봤습니다. 읽어보고 싶네요. 우리나라가 코로나 19 대응을 비교적 잘 하면서 어깨가 으쓱한 점도 있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대학도 그렇고 초중고 교육도 문제가 많은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요...
 
토성의 고리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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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토성의 고리라는 SF적인 제목과 어느 소설가의 추천사 때문에 읽을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10년이 지난 이제야 다 읽었다. 10년의 세월 동안 나는 해체에 좀 더 가까워졌고, 그래서 해체와 몰락의 이야기인 이 글을 좀 더 읽을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독일인인 화자는 영국 동부를 도보여행 하며, 만나는 장소에 얽힌 현실인지 소설인지 모를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죽은 이들, 그리고 퇴락하는 것들도시, 건물, 가문에 대한 이야기이다. 온갖 이야기가 다 나온다. 2차 세계대전부터 서태후, 양잠까지... 영국으로 이민 와서 사는 한 복잡한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 본 느낌이 든다.

 

토성의 고리라는 문구는 본문 어디에도 나오지 않고 제일 앞의 인용구에서만 언급된다. 토성의 고리가 토성의 인력에 의해 부서진 위성의 잔해라는 구절인데, 이 글의 주제인 부서져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상징이 아닐까... 무엇이든 결국은 해체된다. 인간은 물론이고, 여러 세대에 걸친 가문도, 문명도, 그리고 심지어는 자연조차도... ‘불멸의 원자라는 표현이 있는데, 원자조차도 영원히 불멸은 아닐 것이다. 영원은... 상상할 수 없다. 수학은 논리로 무한을 다루지만.

 

모든 죽어가는 것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냥 주어진 대로 사는 일, 그리고 때때로 제발트처럼 애도하는 일. 또는 시인의 말처럼 사랑하는 일. ‘생명이란 위대한 것이다. 사라짐으로, 또 다시 태어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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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메모수첩 2021-05-10 08: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얼마 전 제발트의 현기증 감정들을 읽었어요. 카프카 문학에 대해 말해보라면 한 마디도 못할 제가 카프카 좋아하는 것처럼 제발트의 그 단편소설집에 대해 말해보라면 한 마디도 못하겠지만 그 책이 너무 좋았어요. 토성의 고리도 곧 읽을 예정이어서 반가운 리뷰였어요. 잘 읽었습니다.

blueyonder 2021-05-10 18:1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사실 일반적 소설은 아니어서 술술 읽히는 스타일은 아닙니다. 글이 뭔가 아련합니다.
 
시사IN 제712호 : 2021.05.11
시사IN 편집국 지음 / 참언론(잡지) / 2021년 4월
평점 :
품절


모병제, 백신 권고 등 시의적절한 주제에 대해 깊이 있는 기사를 싣는 주간지의 장점을 다시 한 번 발휘한다. 굽시니스트의 만화 등 즐겨 읽는 연재들이 풍성함을 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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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yonder 2021-05-15 13: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번 호의 굽시니스트 만화: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4537
영국 항모 ‘퀸 엘리자베스‘의 아시아 태평양 순방에 맞추어, 20세기 초 미국 ‘대백색함대‘ 얘기가 나온다.
 
인간의 대지 펭귄클래식 9
생 텍쥐페리 지음, 윌리엄 리스 해설, 허희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6월
평점 :
절판


사실 아무것도, 결코, 죽은 동료를 대신할 수는 없다. 오랜 친구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무것도 우리가 공유했던 그 많은 추억, 함께 힘겨워했던 그 수많은 시간들, 그 많은 불화와 화해, 그 많은 마음의 동요라는 보배만큼 값지지 않다. 이러한 우정은 다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떡갈나무를 심고 그 그늘 아래서 쉬어보려 하지만 헛된 일이다.
그렇게 인생이 흘러간다. 우리는 우선 우리 자신을 충실하게 다지며 여러 해에 걸쳐 나무를 심었다. 하지만 시간이 이러한 작업을 망치고 그 나무들을 베어버리는 세월이 온다. 동료들이 하나둘 우리에게서 자신들의 그림자를 빼내어 간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우리의 슬픔에 ‘늙어가는구나.‘라는 남모를 회한이 뒤섞인다.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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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12 2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15 14:5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