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파동 만들기'에 두 전류 도선 사이에 작용하는 힘에 관한 앙페르의 실험을 기술하는데, 힘의 방향 설명에 오류가 있다.


  1879년 앙드레 앙페르는 전류가 흐르는 두 가닥의 전선을 나란히 놓았을 때, 전류가 같은 방향으로 흐르면 전선들이 서로를 밀쳐 내고, 전류가 반대로 흐르면 잡아당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기는 자기력을 띠었고, 자기력은 전기적이었다. 그렇다면 전자기 현상이란 양전기와 음전기를 가진 '미립자'가 자기력을 만들어 내는 작용을 말하는 것일까? (419 페이지, 밑줄 추가)


위의 글은 두 평행한 도선에 흐르는 전류가 같은 방향이면 척력, 다른 방향이면 인력이라고 기술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이다. 전류의 방향이 같으면 인력, 다르면 척력이 맞다. 두 전하 사이에 작용하는 쿨롱의 힘과 연관하여 혼동한 듯 싶다. 쿨롱의 힘은 두 전하의 부호가 같으면 척력, 다르면 인력이다. 


원문에도 같은 오류가 있다. 


  In 1879 André Ampère put two live wires next to each other and saw that when the currents ran in the same direction the wires repelled each other and when the currents went in oppsite directions the wires were attracted. Electricity was magnetic and magnetism was electrical. Was the electromagnetic phenomenon a 'molecule' on which positive and negative electricity acted to produce magnetism? (p. 281, 밑줄 추가)


번역서의 마지막 문장인 "전자기 현상이란 양전기와 음전기를 가진 '미립자'가 자기력을 만들어 내는 작용을 말하는 것일까?"는 언뜻 잘 이해가 안되는 원문을 의역한 듯 싶은데, 사실 원문을 왜곡했다. 원문의 뜻대로 번역하자면 "전자기 현상이란 양전기와 음전기가 작용하여 자기력을 만들어내는 '미립자'인 것일까?"가 맞다. 무슨 뜻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저자인 버크는 과학사와 문화사에 정통한 듯 싶지만, 과학에 대한 내용을 기술할 때 부정확해 보일 때가 있다. 위의 글이 그런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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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그 자체 - 현대 과학에 숨어 있는, 실재에 관한 여덟 가지 철학
울프 다니엘손 지음, 노승영 옮김 / 동아시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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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 다니엘손은 스웨덴의 끈이론 연구가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도발적 문장으로 책을 시작한다. 


비밀을 하나 알려드리겠다. 살아 있는 존재는 기계가 아니고, 우리 머리 밖에는 수학이 존재하지 않고, 실재하는 세계는 시뮬레이션이 아니고, 컴퓨터는 생각하지 못하고, 의식은 환각이 아니고, 의지는 자유롭지 않다. (21 페이지)


책의 나머지는 위의 주장에 대한 그의 설명과 논증이다. 그는 '실재가 실재한다'고 생각한다. 동어반복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첫 번째의 '실재(reality)'는 우리 주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물들(사과, 사람, 개, ...)을 의미한다. 그것이 환상(illusion)이 아니라 실제로 있다는 것이 위 문장의 뜻이다. 왜 이런 말을 하냐면, 실재가 사실은 환상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바로 플라톤주의자들이다. 우리 주변의 사물들이 사실은 '이상적' 형태의 불완전한 반영이라는 것이 플라톤이 한 말인데, 현대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다. 자연 현상이 수학에 의해 설명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러므로 자연 현상보다 수학이 더 본질적이고, 어찌 보면 자연 현상은 단지 그림자(환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일군의 이론물리학자들이 그 예이다. 이런 생각(모든 것이 수학으로 설명)을 더 밀고 나가면 살아 있는 존재는 기계이고, 우리 머리 밖(이데아의 세계?)에 수학이 존재하며, 실재하는 세계는 마치 컴퓨터 시뮬레이션과 같고, 컴퓨터와 우리 뇌는 별 차이가 없으며, 그러므로 컴퓨터도 생각할 수 있고(의식이 있는 것처럼 보이고), 하지만 의식처럼 보이는 것은 컴퓨터가 만들어낸 것이므로 결국 인간의 의식도 뇌가 만들어낸 환상일 수 있다는 결론에 다다를 수 있다. 다니엘손은 이 모든 것이 표상에 불과한 수학을 실재로 착각한 오류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시간의 실재성을 주장하는 스몰린도 이런 입장에 동의할 것 같은데, 스몰린은 과학 쪽에서 그의 주장을 펼치는 반면, 다니엘손은 입장과 논증이 상당히 철학적이다. 그가 스몰린과 결정적으로 달라지는 지점은 의식을 물리학이 설명할 수 있느냐이다. 스몰린은 객관적으로 관찰이 불가능한 의식은 물리학의 영역이 아닐 거라고 얘기하는 반면, 다니엘손은 물리학은 모든 것을 포괄해야 하며, 그러므로 의식까지 포함하여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의식을 포함한 물리학이 무엇일지는 그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물리학이라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개념 오류들의 일소가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의식이 실재를 이해하는 데 있어 핵심적이라는 것은 (종교인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동의하는 부분이다. 100년 후, 또는 1,000년 후에는 과연 의식까지 포괄하는 물리학이 가능할지, 우리는 모른다. 어떤 물리학일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무척 궁금하다. 어쩌면 영원히 인간의 능력 밖인지도 알 수 없다. 


그의 관점에는 상당 부분 공감할 수 있었지만, 사실 그의 생각을 100% 이해했는지는 모르겠다. 거슬리는 번역 용어 2개가 자꾸 눈에 띄는데, 하나는 "기초 물리학"이고 다른 하나는 "환각"이다. 기초 물리학은 fundamental physics를 번역한 말인데, fundamental physics는 입자물리학이나 우주론 같이 근원을 탐구하는 물리 분야를 뭉뚱그려 부르는 말이다. 잘 사용하는 말은 아니지만 '근원 물리학'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듯 싶다. "기초 물리학"이라고 하면 basic physics가 떠오르며, 이는 원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환각"은 illusion을 번역한 말일 텐데, '환상'이 더 적절한 듯 싶다. 환각은 뭔가 약물의 영향인 듯한 느낌이 들지 않나? 


과학의 본질이나 의식의 문제에 관심 있는 분들이 읽으면 곱씹을 만한 주장이 많다. 하지만, 추천사에도 나오듯 많은 이론물리학자들은 저자와는 완전히 반대로 생각한다. 이들이 사실 물리학계의 주류이다. 


... 물리학은 그저 모든 것의 토대가 아니라 모든 것이다. 나는 물리학을 세계 자체의 모든 측면에 대한 연구로 정의한다. 우리는 유기체로서 이 세계의 일부를 이루며, 진화를 거치는 동안 서서히 자신을 영원한 잠에서 깨어난 물질로 인식하게 되었다. 물리학은 자유롭고도 독립된 관찰자가 세상 바깥을 떠다니며 멀찍이서 관찰하는 학문이 아니다. 우리의 유기체적 몸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과학적 모형을 비롯한 우리의 모든 생각은 우리가 그토록 절실하게 이해하고자 하는 바로 이 세계의 일부다. 내가 상상하는 물리학은 무엇 하나 빠뜨리지 않고 모든 것을 다룬다. 물리학은 말 그대로 생사가 걸린 문제다. (27 페이지)

  평행 세계 이론의 핵심은 무엇을 실재로 간주할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수학적 도구는 단지 우리가 예측할 때 이용하는 모형의 일부일 뿐일까, 아니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무언가에 대응하는 것일까? 이 물음에 어떻게 접근하는지에 따라 결론이 달라진다. 수학적 구조를 우리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라고 믿는다면, 파동 함수를 이 범주에 넣고 평행 세계를 인정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하지만 당신이 (나와 마찬가지로) 물질적 우주가 수학의 형식언어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실재가 하나 이상 존재한다고 믿을 이유는 전혀 없다. (70 페이지)

  뉴턴은 중력이 있다고 말하고 아인슈타인은 없다고 말한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뉴턴 역학이 거둔 성공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채 더 정확한 예측을 내놓는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무엇보다 GPS로 정확한 위치를 계산하는 데 필수적이다. 미래의 물리학자들은 더욱 효과적인 이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법칙과 수학이 발전하고 달라질 수 있는 이유는 그것들이 우리 머릿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뉴턴의 머릿속에, 아인슈타인의 머릿속에, 그리고 당신의 머릿속에. 자연은 사과가 어떻게 떨어지는지 계산하기 위해 물리학과 수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과는 그냥 떨어진다. 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우리의 기술은 시간에 따라 발전하고 개선된다. (84 페이지)

  실재론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과학자들에게 특히 인기 있는 것은 우리의 의식 바깥에 우리의 생각과 선입견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세계가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은 단 한 가지뿐이다. 이것이 많은 과학자들이 천명하는 믿음이다.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실재론의 진짜 의미 아닐까? 대안이 있을 수 있을까? 실은 대안이 있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실재론은 '형이상학적 실재론metaphysical realism'이라는 별도의 이름으로 불린다... 이 입장은 우리의 직관에 반하며, 우리가 일상적 현실을 바라보고 관계 맺는 방식과도 어긋나지만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세계가 실재로 존재하는 방식이 하나뿐이라면, 그 세계의 형태는 (물리학의 주장에 따르면)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입자들의 덩어리일 수밖에 없다. 형이상학적 실재론은 실재를 바라보는 대안적 관점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기초 물리학의 기술은 예외적으로 예외를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 주변에 보이는 모든 거시적 물체는 알고 보면 임의적 구성물에 불과하다. 내가 지금 앉아 있는 의자와 당신이 지금 앉아 있는 의자(지금 앉아 있다면), 내가 <세계 그 자체>를 쓰고 있는 컴퓨터와 당신이 손에 들고 있는 책, 내 몸과 당신의 몸도 마찬가지다. 형이상학적 실재론에 따르면 이 가운데 무엇 하나도 실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이 세계에서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이 세계는 우리가 만들어 낸 환각일 뿐이다. (108~109 페이지)

... 객관적 세계를 인정하면서도 그 세계에 대한 주관적 표상을 만들어 낼 가능성을 인정하는 철학적 모형은 없을까? 그런 것이 있다. 퍼트넘은 그런 모형에 '내재적 실재론internal realism'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내재적 실재론의 요점은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세계를 받아들이면서도 그 세계를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방법이 하나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퍼트넘은 세 종류의 물체들로만 이루어진 세계를 예로 들었는데, 여기에 살을 붙여보자. 이해를 돕기 위해 세 물체를 사과, 오렌지, 바나나라고 하겠다. 이것들이 우리가 쓸 수 있는 유일한 구성 요소다. 이 세계가 세 종류의 물체들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은 필수 불가결한 사실로 보인다. 과연 그럴까? 이것만이 이 작은 세계를 정의하는 방법일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우리는 과일을 둘씩 셋씩 짝지어 또 다른 구성 요소로 간주할 수 있다. 이 논리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일곱 가지 구성 요소가 생기는 셈이다. 이제 사과, 오렌지, 바나나 말고도 사과-오렌지, 사과-바나나, 오렌지-바나나, 사과-오렌지-바나나가 생겼다.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이 체계로 표현되고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구성 요소는 3개일까, 7개일까? 그것은 당신에게 달렸다. 하지만 당신이 한 체계를  선택하고 고수하면, 그 안에는 세계에 대해 객관적으로 참인 진술들이 존재하게 된다. 

  우리가 현실 세계를 파악하려 할 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세계 자체는 원자와 진공 같은 물리학적 구성 요소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도 있고, 의자, 책, 사람 같은 일상적 사물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도 있다. 근본적 의미에서는 동일한 세계이지만(우리는 실재론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내재적으로, 즉 의식 안에서 우리는 세계를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분명 근사한 일이다. (110~112 페이지)

  그런데 이 중에서 더 나은 방식이 있을까? 당연하겠지만, 그것은 당신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어떤 목적을 가졌는지에 달려 있다...

  내재적 실재론의 이점은 실재하는 세계와 그 세계에 대한 기술을 구분한다는 것이다. 과학의 목표는 세계 자체에 대한 유용한 예측을 내릴 수 있는 효율적이고 신뢰할 만한 모형을 내놓는 것이다. 각각의 모형은 잠정적이며, (정량적 예측뿐 아니라 개념적 실증 면에서도) 언제나 개선의 여지가 있다. 앞서 보았듯 뉴턴 역학에서 일반 상대성이론으로의 전환이 그 예다. 뉴턴은 사과의 낙하와 달의 공전이 중력에 의한 것임을 간파했다. 아인슈타인은 중력의 존재를 깡그리 부정하고 모든 것이 휘어진 시공간의 결과라고 주장하여 뉴턴 역학을 송두리째 뒤엎었다. 이런 종류의 개념적 혁명을 고려하면 과학의 발전은 그때까지 쌓아 올린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과정처럼 보인다. 적어도 당신이 형이상학적 실재론자라면 그렇다. 틀릴 때마다 원점으로 되돌아가라. 거듭거듭 그렇게 하라. 뉴턴은 틀린 것으로 드러났고 아인슈타인이 그의 자리를 차지했다. 말하자면 과학은 결코 믿을 것이 못 된다. 하지만 내재적 실재론자의 생각은 달라서, 과학이 정확히 제대로 작동된다고 말한다. (112~113 페이지)

  요점은 과학을 수학적 논리에 기반한 체계로만 본다면 과학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나 같은 연구자들이 이론을 가지고 하는 일도 형식화된 규칙에 따라 기호를 조작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의미가 생겨나는 것은 이 기호들이 현실 세계에, 더 정확히 말해 우리가 선택하고 추상화하는 현실의 일부에 연결될 때뿐이다. 문제는 여기에 중요한 단계들이 있다는 것인데, 이 단계들은 사소한 것으로 오인되며 의도적으로 외면당한다. 고상한 관념들과 비루한 자연계 사이에는 연구자 자신의 체화된 의식이 놓여 있다(이것이야말로 과학의 본질이다). 수학과 논리라는 추상 세계와 우주 사이에 객관적이고 외부적이며 독립적인 연결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연결은 언제나 피와 살로 이루어진 뇌에서 이루어진다. (132 페이지)

순수한 형식언어로 수학의 본질을 포착할 수 없듯 현대물리학은 물질이 어떻게 유기체적 존재를 통해 의식을 만들어 내는지 알지 못한다...

  물리학자들은 곧잘 두 가지 기본적 함정이 빠진다. 첫 번째 함정은 모형을 세계 자체로 혼동하는 것이다. 모형은 수학으로 정식화되므로, 세계 자체를 수학과 동일시하는 실수를 저지를 법도 하다. 두 번째 함정은 괴델의 결론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완전히 기계적인 수학이라는 힐베르트의 헛된 꿈을 좇는 데서 비롯한다. 이렇듯 세계를 수학과 동일시하면, 세계 자체가 어떤 의미론도 필요로 하지 않는 무의미한 구문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는 수많은 기이한 결론을 낳는다. 이를테면 모든 것이 의미 없는 형식언어에 불과하다면 시뮬레이션과 현실 세계 사이에는 어떤 차이도 있을 수 없다. 이것을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우리가 컴퓨터에서 돌아가는 한낱 프로그램일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전적으로 합리적이다. (168~169 페이지)

살아 있는 유기체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새롭게 한다. 우리를 이루는 물질은 대부분 교체된다. 기계의 동일성은 물질적 부분, 궁극적으로는 낱낱의 원자에 깃들어 있지만 살아 있는 유기체에 대해서는 결코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없다. 기계가 본질적으로 닫힌계closed system인 데 반해 유기체는 들락날락하는 흐름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열린계open system이기 때문이다. (193 페이지)

  세계 자체를 평범한 컴퓨터에서 시뮬레이션할 수 있고 자연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모든 계산을 튜링 기계에서 수행할 수 있다는 생각은 흔히 '물리적 처치-튜링 가설physical Church-Turing hypothesis'이라고 불린다... 말하자면 우주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고성능 컴퓨터로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즌에 따르면 생명계는 스스로를 떠받치는 고리가 필요한데, 이런 고리는 시뮬레이션이 불가능하다. 처치-튜링 가설이 적용되는 세계에는 오로지 기계만 있을 뿐 생명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로즌이 옳다면 처치-튜링 가설은 틀렸으며 살아 있는 유기체는 이 가설에 어긋나는 물리계의 첫 사례다. 따라서 생명계를 완벽하게 기술하려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컴퓨터의 정보처리 능력을 뛰어넘는 모형을 동원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계산 불가능한 수학이다. (19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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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인력(중력)으로 인해 물체는 가속되며 지구로 떨어진다. 지구 표면에서 중력으로 인한 가속도는 잘 알려져 있듯이 9.8 m/s^2이다(이 중력가속도를 g라는 문자로 종종 나타낸다). 가속도는 속도(m/s)의 1초당 변화율이므로 단위가 m/s/s 즉, m/s^2이다. 이 가속도는 32 피트/s^2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1 피트가 약 0.3 m이므로 32피트는 거의 9.8 m와 같다.) 책 214페이지에서는 갈릴레이가 경사면 실험을 통해 "'1초의 제곱당 32피트'의 법칙"을 발견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정지해 있던 물체가 일정한 가속도로 가속될 때, 물체가 운동하는 거리는 시간의 제곱에 비례하여 증가한다. 물체가 정지해 있다가 자유 낙하할 때 이동한 거리 s는 다음의 식을 만족한다: s = (1/2)gt^2. g는 중력가속도이고 t는 초(s)로 잰 시간이다. 식 앞의 1/2은 속도가 일정하게 증가하며 운동(등가속 운동) 하기 때문에 들어간 것이다.


그럼 물체가 정지해 있다가 자유낙하할 때 처음 1초에 떨어진 거리는 얼마인가? (1/2)(9.8 m/s^2)(1 s)^2 = 4.9 m이다. 또는 16 피트이다. 이걸 염두에 두고 다음을 읽어보자.


  뉴턴은 상호 인력이 행성들 사이의 거리에 따라 작용한다는 케플러의 생각에 동의했다. 그는 그 힘이 거리에 반비례한다는 이론을 만들어 냈다. 지구 반경의 60배 거리에 있는 달의 경우, 지구 인력의 크기는 그 인력의 1/60^2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갈릴레이가 초당 32피트라고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지구는 32/60^2, 즉 초당 0.0088피트(0.00268미터)의 비율로 달을 관성 경로로부터 공간상으로 잡아당긴다. 달의 경로를 초 단위로 재면 뉴턴이 옳았음이 입증된다. (239 페이지)


위의 글은 달이 1초에 얼마나 지구로 떨어지는지를 추론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달의 위치에서는 지구 표면에서보다 인력이 1/60^2 = 1/3600이므로, 1초에 떨어지는 거리는 16피트/3600, 즉 0.0044 피트(0.14 센티미터)가 된다. 위의 문장은 등가속운동으로 인한 1/2을 누락해서 값을 2배로 잘못 나타냈다. 사실 원문을 찾아보면 0.0044 피트로 제대로 나오는데, 역자는 저자가 오류를 저질렀다고 생각해서 고치려다가 원문에는 없는 오류를 냈다[*].


제임스 버크의 글은 문화사적, 과학사적 의의를 잘 짚어주는데, 가끔씩 과학적 설명이 부족하거나 너무 어렵게 쓰여져 있는 경우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

[*] 원문에서는 제곱을 나타내는 위 첨자가 제대로 표시되지 않아 60^2이 아니라 그냥 602로 인쇄되는 오류가 나온다. 원문: Newton agreed with Kepler that the mutual attraction operated in relation to the distance between the planetary bodies. He theorised that the force would work at a ratio inversely proportional to their separation. In the case of the moon, at a distance of sixty times the earth’s radius, the strength of the attraction of the earth should be 1/602 of the attraction, which Galileo had shown to be 16 feet per second. The earth should therefore be attracting the moon away from her inertial path out into space at a rate of 16/602, or 0.0044 feet per second. Examination of the moon’s path second by second showed Newton to be right. (원서 p. 160) 다음처럼 번역한다면? 뉴턴은 상호 인력이 천체 사이의 거리에 따라 달라진다는 케플러의 의견에 동의했다. 뉴턴은 이 인력이 둘 사이의 거리 제곱에 반비례한다고 추론했다. 달은 지구 반지름의 60배 거리에 있으므로 달이 느끼는 지구 인력은 지구 표면에서 인력의 1/60^2이 되어야 했다. 갈릴레이는 지구 표면에서 물체가 1초에 16피트(4.9미터) 떨어진다는 것을 보였으므로, 이는 관성에 의해 궤도의 접선방향으로 달아나려는 달을 지구가 1초에 16/60^2 피트, 즉 0.0044피트(0.14센티미터)씩 잡아당김을 의미했다. 달의 궤도 관측은 뉴턴이 옳았음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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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이론에 대해 연구하는 스웨덴의 이론물리학자 울프 다니엘손Ulf Danielsson의 260페이지 짜리 얇은 책이 번역됐다. 띠지에 "하나의 유령이 온 과학을 떠돌고 있다. 플라톤주의라는 유령이."라는 문구는 공산당선언에 나온 문구를 패러디했다. 그래서 이 책이 뭔가 선언문 같은 느낌을 준다. 자연에 대한 기존 물리학의 관점에 반기를 든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가 이런 관점을 가지기에는 특이한 끈이론을 연구한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카를로 로벨리를 잇는 또 하나의 스타가 될까? 


본문 일부를 다음에 옮긴다.


  수학은 우주를 다스리지 않는다. 수학은 우리가 우주에서 발견한 것을 기술하는 수단일 뿐이다. 자연법칙도 마찬가지다... 자연법칙은 우주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을 우리 나름대로 요약하는 방법에 불과하다. 생물학적 유기체로서 우리는 자신이 경험하는 것을 최대한 이해하고자 애쓰지만 자연은 자연일 뿐이다.

  모형을 실재와 동일시하는 이러한 오해의 바탕에는 인간의 의식이 세계 자체보다 우월하다는 이원론적 존재론이 깔려 있는데, 여기에는 역사적 뿌리가 있다. 우리는 필멸하는 물질을 다스리는 영원하고도 초월적인 영역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고는 한다. 과학이 우주에 대해 많은 것을 밝혀냈음에도, 우리는 사실상 종교적 세계관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지 못한 것이다. 우리의 개념과 비유는 계속해서 우리의 사고를 오염시키고, 물리학은 물질을 지배하는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존재를 상정한 채 아름다운 수학적 법칙을 발견하는 과학을 표방한다. 단순함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방법론은 많은 경우에 성공을 거두었지만 여기에는 위험도 따른다. 우주가 근본적 의미에서 아름답거나 단순하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22 페이지)


위의 글은 리 스몰린의 관점과도 일맥상통한다. 이러한 관점에 동의하는 물리학자들도 나름 많이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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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문화사, 과학사를 논하는 제임스 버크의 매우 흥미롭고 재미있는 책이다. 근대의 과학혁명에 대한 부분에서 갈릴레이의 업적을 논하는 부분을 읽고 있는데(5장), 부정확한 기술이 있다.


  갈릴레이가 자신의 몰락을 가져올 24쪽짜리 논문을 쓴 곳이 바로 피렌체였다. 그보다 한 해 전에 그는 리페르헤이라는 네덜란드인이 '보는 도구looker'라는 것을 새로 발명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1611년 가운데 무렵까지 그 보는 도구, 즉 망원경의 배율을 천 배로 높여 사물을 30배나 가깝게 볼 수 있도록 개선했다. (218 페이지, 밑줄 추가)[1]


밑줄 친, 배율이 1,000배가 되면 사물이 30배 가깝게 보인다는 것은 잘못된 설명이다. 본문은 배율의 제곱근에 따라 사물이 가깝게 보이는 것처럼 잘못 기술하고 있다(1,000의 제곱근이 약 30). 하지만 배율은 크기(길이)를 통해 정의되며, 배율이 30배라면 길이가 30배 크게 보이는 것이고 30배 가까운 거리로 사물을 가져오는 것이다[2]. 본문은 배율이 마치 면적으로 정의되는 것처럼 기술했는데(물체를 30배 가까이 가져오면 면적은 1,000배 커진다), 이는 오해이다. 갈릴레이가 사용했고 요즘에도 아마추어들 천문가들이 종종 사용하는 굴절식 천체망원경의 배율은 대개 30~100배 정도이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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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문: It was there in Florence that Galileo wrote the twenty-four pages which were to begin his downfall. In the previous year, he had heard of a new 'looker' invented by a Dutchman called Lippershey. By mid-year he had developed it to the point where his looker-telescope would magnify a thousand times and make things appear thirty times closer. (원서 p. 147) 원서에서도 마찬가지의 오류가 보인다(밑줄 친 부분). 한편, 번역문의 오류도 보이는데 "By mid-year"를 1611년 가운데 무렵까지"로 번역한 것이다. 여기서 "By mid-year"는 "그보다 한 해 전"의 중반까지를 말하며 문맥을 보면 "그보다 한 해 전"은 갈릴레이가 피렌체로 간 1610년의 한 해 전인 1609년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올바르다: "갈릴레이가 자신의 몰락을 가져올 24쪽짜리 논문을 쓴 곳이 바로 피렌체였다. 1609년에 그는 리페르헤이라는 네덜란드인이 '보는 도구looker'라는 것을 새로 발명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해 중반까지 그 보는 도구, 즉 망원경의 배율을 높여 사물을 30배 가깝게 볼 수 있도록 개선했다."

[2] 좀 더 엄밀히 말하면 배율은 각도를 통해 정의된다. 

[3] 렌즈를 추가해서 배율을 100배 이상으로 만들기도 한다. 이렇게 하면 사물의 크기는 그만큼 더 커지지만 망원경의 흔들림에 매우 민감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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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yonder 2023-09-04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굴절식 천체망원경의 원리: https://brunelleschi.imss.fi.it/esplora/cannocchiale/dswmedia/esplora/eesplora2.html

cyrus 2023-09-04 20: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과학 도서를 읽으면서 발견한 건데, 갈릴레이가 피사의 사탑에서의 낙하 실험을 했었다는 내용이 있었어요. 갈릴레이가 실제로 피사 사탑에서 실험하지 않았다는 진실이 밝혀진 지 꽤 됐는데도 가끔 그런 내용을 언급한 책이 있어요. ^^;;

blueyonder 2023-09-05 08:59   좋아요 0 | URL
말씀처럼 아직도 잘못된 여러 일화들이 사실처럼 종종 언급되는 것 같습니다. ^^;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