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책을 읽다 보면 난세에 영웅난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시기가 있다. 일본은 전국시대(센고쿠시대)가 바로 그 때다. 전국시대는 무로마치 막부 권위가 땅에 떨어지기 시작할 무렵부터 시작된다. 막부 권위가 떨어지니, 기존 다이묘(슈고 다이묘)를 통제가 어려워졌다. 그러자 슈고 다이묘에 반하여 각 지역 세력자들이 들고 일어나니, 이른바 센고쿠 다이묘다.



센고쿠 다이묘들은 서로 세력다툼을 하며 영지를 넓혀가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몇몇 유명한 다이묘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전국시대 포문을 열었던, 중심에 있었던, 종지부를 찍었던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른바 천하3인이 유명하다. 한국인들은 아무래도 정권 ‘통일’이라는 관점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그런가 아닐까 싶다. 뭐, 조금 더 들어간다면 ‘임진왜란, 정유재란’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일본 전국시대를 바라본 경향도 있을거고.




하지만 천하 3인만으로 일본 전국시대를 바라보기엔 아쉬운점이 너무 많다. 전국시대는 일본 영토 곳곳에서 전투 및 전쟁이 빈번히 발생했던 시기다. 수 많은 전투, 전쟁중에 유명한 일화를 만든 장수들이 한 둘 이 아니다. 심지어 그런 장수들 개개인 서사까지 들어가면 드라마 한, 두 편은 뚝딱일 정도로 많은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일본에서 전국시대를 배경으로한 드라마가 많이 방영되기도 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전국시대를 풍미했던 인물과 굵직한 전쟁 및 전투 등 통사에 해당되지만.



통사를 벗어나서 전쟁사 관점으로 봤을 때도 일본 전국시대는 흥미로운 내용이 많다. 특히 전국시대 전쟁, 전투 방식 등은 중세 한반도에 있었던 전쟁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 많아서 알면 알수록 신기한 부분이 많다.




이 책 「센고쿠 전쟁이야기」는 전쟁사 관점으로 일본 전국시대를 이야기한다. 이름을 날렸던 장수나 일본사 통사가 아닌, 오롯이 전국시대 ‘전쟁’에 대한 이야기다. 전국시대에 운용되었던 전쟁 방식이나, 전법, 전쟁 도구에 대한 건 기본이다. 거기다 매 주제마다 일러스트 활용이 높은데, 이는 독자들의 이해를 높이기 위함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전법이나 전쟁 도구들은 일러스트가 없었으면 이해가 조금 어려웠지 않았을까 싶고. 예컨데 방어구, 특히 투구 및 마스크의 변천사랑 개인용 깃발이나 장수용 깃발 같은 전쟁도구 변천사는 정말 일러스트가 없었으면 큰일날 뻔했다.



그 뿐만인가?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야비한데?’ 라는 말이 나올만큼 독특한 전쟁 방식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방식조차 일본 전국시대에서는 전쟁 시 고려되는 수 많은 방식 중 하나라는 사실에 새삼 놀랐달까.


​​


책 내용과는 별개로 조금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이런 일본의 전쟁 방식이나 당시 일본 정세를 조선의 위정자들이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오랜기간 평화에 찌들어 바다 건너 옆나라가 어떤 상황인지, 첩보가 올라와도 듣는둥 마는둥. 전국시대가 사실상 끝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키기 직전까지도, 첩보 진위여부를 가릴 생각조차 안하던 조선 위정자들을 생각하면 열불이 터진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배경 중 실질적인 요인으로는 전국시대 온갖 전투로 인해 늘어났던, 전쟁 후에는 잉여가 되버린 남아도는 병력과, 승자 편에 붙어서 가신이 된 장수들에게 줘야할 봉토 문제가 컸으니까.



본론으로 돌아와서! 아래에 이 역사책을 읽으면서 새삼 놀랐던(!) 몇몇 내용을 발췌하였다. 일본 전쟁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역사책이 꽤나 재미있지 않을까 싶다.


​​


당시의 군마는 모두 수말이었다는 점을 이용한 기발한 계책도 있다. 하시바 이데요시가 오고성을 공격했을 당시, 허를 찔린 성주 오고 사다노리는 영지 내에서 50마리가 넘는 암말을 모아서 적군을 향해 풀어놓았다. 그러자 하시바 군의 수말이 흥분해 날뛰기 시작했고, 병사들 사이에서는 혼란이 발생했다. 이를 놓치지 않고 오고의 군대가 돌격하자 하시바 군은 패주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거세라는 관습이 없었기 때문에 성립될 수 있었던 기발한 계략이다. p 028



이가 닌자의 종가인 후지바야시 나가토노가미의 자손, 후지바야시 사무지야스타케가 저술한 『반센슈카이』 등의 인술서에는 닌구를 용도에 따라 ‘등기’, ‘수기’, ‘개기’, ‘괴기, ‘화기’로 분류하고 있다. (…) 저택이나 창고의 문을 열기 위한 도구가 바로 개기다. 가느다란 쇠붙이의 끝부분이 둘로 나뉘어 있는 자물쇠 따개나 빗장을 부수는 데 사용하는 강철제 하마가리 등이 있다. p 048


센고쿠 시대에 사용된 무기 중에서 적에게 가장 큰 피해를 입힌 것은 활, 그 다음은 철포였다고 한다. (…) 사실 칼은 다섯 번째다. 네 번째는 놀랍게도 돌이었다. 전장에서 입게 되는 상처 중에서 약 1할이 돌에 맞은 상처였다고 한다. (…) 단순히 손에 들고 던지는 것도 물론 가능하다. 하지만 전용도구를 사용한다면 더욱 멀리, 더욱 강하게 공격할 수 있다. 줄팔매는 이를 위한 도구다. p 064



센고쿠 시대로 접어들면서 무장들은 도세이구소쿠에 맞게 거울이나 검, 부채, 동식물이나 새, 병풍, 못이나 톱, 악기 등 다양한 디자인으로 자신만의 개성을 뽐냈다. 다테 마사무네의 트레이드 마크로 유명한 초승달을 본든 거대한 다테모노 역시 좋은 예이다. p 068



도세이쿠소쿠가 아무리 중무장이라해도 공격할 부분은 있다. 전투복인 이상 전투가 벌어졌을 때 착용자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된다. 따라서 백병전용의 도세이구소쿠는 움지이기 쉽게끔 필연적으로 가동부위가 많아질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상대방의 시점에서 본다면 공격하기 좋은 약점이었다. 센고쿠 시대에 탄생한 ‘가이샤 검법’은 이러한 약점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검술이지만 동시에 구소쿠를 착용한 적을 공략하기 위한 검술이기도 했다. p 078


​​


총대장은 각 우마지루시의 위치로 번선 지휘관의 움직임과 전황의 변화를 확인한 뒤 후속지시를 내렸다. (…) 시대가 지남에 따라 멀리서도 한 눈에 알 수 있게끔 화려하게 디자인된 우마지루시가 많이 쓰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우마지루시는 거꾸로 뒤집힌 금 호리병이었는데, 이는 히데요시가 이나바야마성을 함락시켰을 당시에 창끝에 호리병박을 걸었던 사실에서 유래한다. p 088



대군이 전장에서 격돌하는 센고쿠 시대에는 난전 중에 적과 아군을 구별하기 어려워지는 경우가 있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아군을 공격하고 만다. 이를 피하기 위해 각 병사들은 다양한 표식을 달아 적과 아군을 구별했다고 한다. 가장 대표적인 표식이 바로 ‘소데지루시’다. (…) 동시에 이는 적에게 소데지루시를 내보인다는 뜻이기도 하므로 난전 중에 찢겨져 나가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암호를 사용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암호를 잊어버린 탓에 아군에게 살해당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p 09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의 금표 - 우리는 무엇을 금지당했나?
김희태 지음 / 휴앤스토리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블로그 이웃이신 희태님이 오랜기간 답사 및 연구에 매진하셨던 한국의 금표. 드디어 그 결실이 나왔다. 금표라는 것이 본디 역사적 가치가 있는 문화재임에도 불구하고, 문화재로 인정은 커녕 전문가들조차도 관심을 갖지 않을 정도로 잊혀졌다. 자칭 역사더쿠라고 하는 나조차도 금표에 관심을 둔 적이 없었을 뿐더러, 유적지 답사를 가다가 분명히 마주쳤을 금표였음에도 기억하지 못했다. 혹시나 해서 답사 당시 찍었던 사진을 찾아보았더니, 세상에나. 금표 사진이 있었다. 내 손으로 사진까지 찍었음에도 머리속에서 지워진 것 보면, 그만큼 금표에 대한 관심이 없었단 이야기겠지?



금표란 금할 금(禁), 표할 표(標)에서 보듯 행위의 금지를 표식한 것이다. 주로 표셕의 형태나 바위 등에 글자를 새겼는데, 출입과 이요의 제한을 두는 경우가 많기에 금표의 분류 기준은 어떤 행위의 금지냐에 따라 달라진다. 현재까지 확인된 금표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건 산림 관련 금표로, 이 중 나무와 관련된 금표의 비중이 다수를 차지한다. p 014



금표는 특성상 소재지가 산이나 비공개 지역, 험지 및 접근성이 좋지 않은 곳에 있다. 이런 지리적 위치로 인해 문화재로서의 가치도 잊혀진 것 같고. 잊혀지지니 자연히 사람들도 문화재라 인식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어느 순간 유실되어도 유실되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을 거고. 이래저래 참 아픈 문화재가 아닐 수 없다.



아픈손가락에 더 관심을 갖고 챙겨준다는 말이 있다. 금표가 딱 아픈손가락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아픈손가락에 관심을 갖고 보듬은 이가 이 책 「한국의 금표」 저자인 희태님이 될거고. 추측이긴 한데 희태님 전작인 태실 연구도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싶..은?



희태님은 이 책을 쓰면서 금표에 대한 역사성을 살리고자 남아있는 사료들 교차 검증 및 금표가 세워진 배경이나 사건도 같이 조명했다. 역사책이다보니 왜곡, 축소 및 과장을 주의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다행히도 희태님은 ‘아는건 아는대로 쓰고 모르는건 모르는대로 남겨둔다’는 모토 아래 책을 집필하는 분이라,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 하다.



무엇보다 이 책에 제일 큰 장점은 사진자료라는 것! 모든 금표 사진 자료는 물론 역사적 배경 및 사건 설명에 대한 사진자료까지 전부 실려있다. 접근하기 쉬운 장소부터 시작해서, 접근하기 어려운 험지까지 모든 사진자료가 다 있다. 이를 보다보면 현장을 답사한 희태님이 금표 연구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했는지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다.


오죽하면 역사더쿠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름 이도학 교수가 추천사에 이런 말을 썼을까?


한국인 가운데 ‘금표’를 들어 보기라도 한 이가 몇 명이나 될까?

김희태가 고산준령을 넘고 들판을 누비고, 관련 문헌을 뒤적일 때

문화재 전문가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한국의 금표」 이도학 교수 추천사



책 말머리에 따르면 현재까지 전국의 금표를 조사, 연구를 진행한 이는 단 한명도 없다고 한다. 물론 개별 금표에 대한 논문등이 나온 적은 있으나, 이는 연산군 시절 금표라던가 산림청에서 발표한 산림금표 같은 특정한 금표에 한해서다. 한마디로 이 역사책 「한국의 금표」는 전문가들 그 누구도 하지 않았던, 아니 어쩌면 방대한 양에 눌려 하지못했던 일에 대한 결실이다. 이 역사책 「한국의 금표」는 한국 금표 연구에 대한 기초자료로써도 손색이 없다.




왕실금표: 왕릉 금표, 태실 금표 및 화소, 왕실 관련 장소 금표


왕실금표는 말 그대로 왕실과 관련된 능원이나 태실, 왕의 거주지 등 왕실과 관련된 장소에 세워진 금표다. 다만 지금까지 확인된 유일한 왕릉 금표는 이 책의 저자인 김희태님이 발견한 화성 외금양계비가 유일하다. 태실 금표도 많이 유실되긴 했지만 보은 순조 태실, 영월 철종 원자 용준 태실, 홍성 순종 태실 등에서 일부가 확인되었다.


현 융릉과 건릉의 규모는 과거와 비교해 많은 차이가 있는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화소(火巢)’와 ‘외금양(外禁養)’에 대해 알아야 한다. 화소란 능이나 태실로 불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경계 지점에 불에 타기 쉬운 나무와 잡풀 등의 발화요인을 제거한 일종의 완충지대다. 『정조실록』과 『일성록』을 보면 현륭원 바깥으로 외금양을 두었는데, 금양 지역으로 설정되면 나무의 벌채와 농지의 개간, 무덤 조성 등이 금지되었다. p 064




단종의 복권은 유배지였던 영월에도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데, 이를 잘 보여주는 흔적이 청령포에 세워진 금표비다. (…) 청령포에 금표비가 세워진 이유는 단종이 왕으로 추복되면서, 청령포는 더 이상 유배지가 아닌 왕이 거처했던 장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p 107



전주성의 남문 이름이 풍남문이며, 객사의 명칭은 풍패지관이다. 풍남문의 풍(豊)과 풍패지관의 풍패(豊沛)는 한 고조 유방의 패현 풍읍 출신인 것과 관련있다. 즉 제왕의 출신지에 붙여진 요엉로, 이는 전주가 조선왕실의 발상지인 것과 관련이 있다. 전주 자만동 금표가 세워진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자만동 금표는 자만동 벽화마을 내 골목길에 있는데 (…) 이목대가 있는 자만동 일대를 보호하기 위해 금표를 세운 것으로, 언제 세운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조경단이 정비되던 고종 때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p 121




왕의 거주지 금표로는 단종이 노산군 시절 거주했던 영월 청령포에 세워진 금표와, 조선 왕실의 시조인 전주 이씨 조상 묘역을 보호하기 위한 전주 자만동 금표가 있다.



이 두 금표는 여러 의미로 많은 역사적 이야기를 포함한다. 단종은 모두가 알듯, 삼촌인 세조에게 쫓겨나 노산군으로 강등당해 죽은 비운의 왕이다. 즉 죽었을 당시만해도 왕이 아닌 ‘노산군’이었다. 따라서 단종이 죽기전까지 살던 영월 청령포도 그저 죄인이 살던 곳이었다. 하지만 숙종 때 그 지위가 복권되면서, 청령포도 덩달아 왕이 살던 곳으로 지위가 급상승했다.


전주 자만동 금표는 또 어떠한가. 조선 후기 족보찾기 열풍이 나라를 휩쓸고 있었다. 인조 때 부터 찾기 시작한 전주 이씨 시조묘 찾기 열풍은 후대 왕들을 거쳐 고종 때 까지 간다. 하지만 당연히 시조묘는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러자 고종은 시조묘(가묘)를 조성하고, 시조를 위한 제단을 만들었으니 그게 바로 전주에 있는 조경단이다. 뿐만 아니다. 전주 이목대는 고종이 이성계의 5대조 이안사의 출생지라고 명한 곳이다. 저자의 말처럼 자만동 금표는 정확하게 언제 조성되었는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이 일대가 고종 때 정비되었다는 점을 미루어 봤을 때 금표 역시 고종 때 세워진 것이 아닐까.


조선 왕실의 권위를 위해 어떻게든 시조묘를 찾고자 혈안이 되었던 고종이니 만큼, 조선 왕실을 이끄는 전주 이씨의 탄생지와 조선 건국자 이성계의 흔적이 있는 일대를 보호하기 위해 금표를 세우지 않았을까.



산림금표: 황장금표, 향탄금표, 삼산봉표, 기타


산림금표는 크게 구분할 때 금강송(황장목)을 보호하기 위한 황장금표, 향/참나무(향탄목)을 보호하기 위한 향탄금표, 밤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율목봉산, 산삼을 보호하기 위한 산삼봉표 등이 있다. 나무를 보호하는 금표라고 하면, 지금 기준에서는 ‘자연보호’는 당연한 일이라지만 금표까지는 너무했네?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조선 소나무들의 잔혹사를 모른다면 말이다.


‘금산’은 조선 초기 산림의 보호와 이용을 위해 특별히 사인의 출입과 이용을 제한하기 위해 지정된 산을 뜻한다. 금산의 목적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송금(松禁) 정책인데, 송금은 나라에서 정한 삼금 중 첫번째였다. 그랬기에 소나무를 보호하고, 무단으로 벌채하는 행위를 엄금했으며 이러한 조치들은 금산의 증가로 이어졌다. p 036



산림의 사적 소유가 늘어나면서 그나마 남은 공유지로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때문에 공유 자원이 고갈되고 황폐해지는 악순환이 계속 되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산림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정책적으로 산림에 대한 보호가 필요했다. 그 결과 송금정책을 시작으로 금산, 봉산 등의 제도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또한 산림의 훼손과 황폐화를 그대로 두고 볼 수 없기에 국가차원에서 나무를 심고 무단으로 베어낼 경우 처벌을 강화하는 등의 대첵을 세웠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산림은 백성들에게 생존수단이었기 때문이다. p 046


조선 백성들에게 소나무는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다. 집을 지을 재료가 되고, 난방을 위한 뗄깜이 되며, 어부들이 타는 어선을 만드는 재료였다. 흉작일 때는 껍질을 달여먹기도 했고, 송화가루는 약재로 사용되었다. 백성 뿐만인가? 조선 정부에서도 소나무는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다. 궁 및 사찰 건설 재료였고, 해군이 타는 병선 재료였으며, 제사에서 쓰는 향과 숯의 재료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조선의 소나무는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그 누구에게도 필요하고 중요한 생활자산이었다. 더군다나 나무가 있는 조선의 산은 공유지였으니, 너도나도 들어가서 벌목을 하기 바빴다. 조선 산림 황폐화는 예견된 수순이었다. 오죽하면 조선 문인들 기록속에서도 ‘민둥산’이라는 표현이 확인될까.


심지어 조선이 망하고,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쳐 조선의 산지는 완전 초토화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 눈앞에 보이는 푸릇푸릇한 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다름아닌 박정희 정부 때 산림법이 제정 및 산림청이 신설되면서 시작된 것이다. 이 때 우리나라 환경에 맞는 개량 소나무를 심기 시작했고, 그린벨트가 지정했다. 우리가 아는 식목일 지정 및 식목일에 나무심기 행사가 시작된 것도 이 즈음이다.



조선도 정부에서 금표를 지정하고 어떻게든 보호하려고 했지만, 결국엔 실패했다. 하지만 대한민국 산림살리기는 성공했다. 이게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다름아닌 생활 자원의 변화였다. 석탄 대중화로 나무 뗄감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고, 시멘트 대중화로 주택 건설 재료가 변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울창한 산림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함정이라면 내 눈 앞에 있는 산은 울창하지만, 내 눈에서 벗어난 산들은 지금도 훼손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산에서 불을 사용하는 무개념들로 인해 산불이 나거나, 도시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산이 깎여나가는 형태로.



양양문화원에 따르면 사진으로 남은 장리 금표의 명문은 ‘연자산 북계칠십리’로 확인된다. 하지만 지난 2002년 태풍 루사의 내습 당시 유실되었다. 원일전리 금표 역시 2008~2009년 사이 새 농촌건설 하천 정비사업 당시 훼손되었다. 마찬가지로 탁본으로 남은 어성전리 금표의 명문은 ‘금표십리’로, 해당 금표도 1984년 군도 확장공사 과정에서 매몰되어 행방을 알 수 없다. 또한 사진으로 남은 법수치리 금표의 명문은 ‘금표’로 학인되고 있으며, 지난 1997~1998년 사이 법수치리 용화사 입구 다리 공사과정에서 파괴되었다고 한다. p 132



원주 비로봉 황장금표는 지난 2016년에 발견되었는데, 바위에 ‘황장금표’가 새겨져 있다. 한 장소에서 3곳의 금표가 발견된 사례는 치악산이 유일하며, 과거 치악산 일대가 황장봉산으로 지정되었음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p 136



그렇게 현대에 들어 야금야금 산림이 훼손되면서, 덩달아 남아있던 산림금표들도 유실되었다. 아주 간혹 사람들 발길이 닿지 않은 곳에서 새로운 산림 금표가 발견되기도 하지만.



사찰금표: 장묘 금지 금표, 왕실 관련 사찰, 사찰 내 행위 금지


유교의 나라 조선, 억불숭유가 기본이었던 조선에서 어떻게 사찰을 보호하는 금표를 세웠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아이러니 하게도 조선 왕실 사람들은 사찰을 좋아했다. 왕 또는 왕비에 따라 불교를 진흥한 경우도 있었다. 무엇보다 왕릉 및 태실을 만들 때, 왕릉을 수호하는 원당사찰이나 태실을 수호하는 태실수호사찰을 꼭 지정했다. 사찰금표는 그러한 왕실 관련 사찰이나, 해당 사찰 내에서 행위를 금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졌다.



안동 봉정사 금혈비는 일주문의 좌측 숲속에 있는데, 기존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과 『디지털안동문화대전』 등에 봉정사 금혈비의 존재와 위치를 정확히 언급하고 있다. 지난 2019년에 금혈비로 추정되는 현장을 찾았을 때 비신이 뒤집힌 채 방치되고 있었다. (…) 이번에 금표 고나련 조사를 진행하기 위해 연구소 회원들과 함께 현장을 찾았는데, 3년 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 과정에서 비석의 명문을 확인하기 위해 뒤집혀 있는 비석을 들자 전면에 새겨진 명문이 눈에 들어왔다. 비석의 명문을 한자씩 확인하다 ‘금혈’ 부분에서 시선이 멈췄다. 봉정사 금혈비인 것이 명확해진 순간이었다. p 201



보은 법주사 일주문을 지나 걷다 보면 속리산사실기비 옆에 두 기의 비석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벽암대사비’와 ‘봉교비’다. 이 중 봉교비를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조선시대 법주사 지위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 ‘봉교’란 임금이 내린 명령을 받는다는 의미로, ‘금유객제잡역’은 법주사 일대에서 노는 행위를 금지하고 잡역을 면제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p 210



왕이 거주했던 곳도 금표를 세우는 나라였으니, 왕실사찰 역시 금표를 세울 수 있다. 그런데 사찰 내 행위를 제한하는 금표는 무엇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역시나 억불숭유가 기본이었던 조선시대를 이해해야 한다.



조선 선비들은(그러니까 유학자들^^) 유람을 자주 떠났다. 가끔 명승지에서 조선 문신들이 글을 세긴 바위를 볼 수 있는데, 이게 바로 놀러온 김에 왔다간 흔적을 남긴 경우다. 뭐 여튼, 이렇게 유람하는 선비들은 근처에 사찰이 있으면 찾아가서 행패를 부르는 경우가 잦았다. 오죽하면 사찰을 부시고 그 자리에 서원을 만들 정도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백운동 서원이다. 최초의 사액을 받아 소수서원이 된 그 서원이다. 원래는 ‘숙수사’라는 사찰이 있던 곳이다.



이러한 사례가 많다보니 왕실 사찰의 안전도 보장하기가 힘들어졌을테고, 사찰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금표를 세운 것이 아닐까.




종교/신앙금표


종교/신앙금표는 사찰금표를 제외한 종교나 민간신앙관련 지역에 세워진 금표다. 단군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참성단이라던가, 무속에서 제일로 취는 최영장군 사당이라던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에서 수입된 관왕묘(관우사당)에 세워졌다.



제주 추자도 신묘금지비는 최영 장군 사당에서 봉골레산으로 이어진 제주 올레 18-1코스 구간에 있다. 이곳에 최영장군 사당이 있는 이유는 1323년(공민왕 23년) 제주에서 원 목호인 석질리 등이 난을 일으킨 것과 무관하지 않다. p 247



최영이 반란으로 토벌하러 가는 길에 풍우를 만나 잠시 추자도에 정박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때 최영은 이곳 주민들에게 어망편법과 고기잡는 방법등을 가르쳤다고 하며, 이에 주민들은 최영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사당의 동쪽에는 신묘금지비가 있는데, 이 비석은 최영 장군의 사당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금표의 일종이다. p 248



목호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최영장군이 제주도로 내려간 사실은 알고 있었는데! 이야. 제주도로 내려가서 목호들을 토벌하기 전 과정에 이런 일화가 있을 줄은 몰랐다. 개인적으로는 아래 관왕묘를 보호하는 금표보다는, 이렇게 최영사당을 보호하는 금표가 훨씬 가치가 있다고 본다.



숙종시기부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숙종은 관왕묘로 친히 시를 지어 보내고, 심지어 직접 찾아 친제를 행했다. 또한 지방에 있는 안동 관왕묘 정계를 넓히고, 성주 관왕묘를 이건했다. 이후 영조와 정조, 순조, 철종 등을 거치는 동안 관왕묘는 왕이 친제를 행했던 중요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이처럼 관왕묘 위상이 변화했던 건 당대 명분인 대명의리의 상징적인 공간으로 인식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 관왕묘에도 금표가 확인되고 있어 주목되는데, 바로 금잡인 표석이다. “잡인의 출입을 금지한다.” 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p 258



현재까지 확인된 금잡인 표석은 ▶서울 공관왕묘 ▶강화 동관제묘 ▶강화 남관제묘 총 3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p 260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관왕묘는 서울, 강화도, 안동, 남원, 완도에 있다. 우리 역사를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도 관우를 신격시 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헌데 왜 관왕묘가 이 땅 곳곳에 있을까? 그 이유는 임진왜란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선조가 명나라에 구원요청을 하고, 명나라는 원군을 보냈다. 조선에 도착한 원군들은 자신들이 믿는 관우사당을 한반도 곳곳에 만들었다. 심지어 명나라 군은 선조에게 관왕묘 참배를 요구하기까지 했다. 조금 놀라운건 임진왜란의 승리가 명나라 덕분이라고 명을 떠받치던 선조조차도 관왕묘 참배 만큼은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런데! 선조도 하지 않은 걸 숙종이 했다. 심지어 관왕묘 지위를 한껏 높여주었다. 이 배경에는 중원의 패자가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바뀌고, 청나라가 조선을 공격한 병자호란이 있었다. 이때부터 조선은 망해버린 명나라를 드높이는 이상한 생태를 보이기 시작했다. 더 이야기하면 길어질 뿐더러 분노가 치솟을 것 같으니 각설!!




장소/행위 금지 금표: 사산금표, 사패지금표, 행위금지 금표, 기타


장소 관련 금표는 특정한 장소에 대한 보호를 위해 세운 경우로, 대표적으로 한양도성을 둘러싼 4개의 산(백악산, 목멱산, 낙산, 인왕산)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사산금표’가 있다. 행위 금지 금표로는 연산군 시대 사냥터를 만들기 위해 세운 금표가 대표적이다.



은언군의 묘는 철종의 즉위와 함께 그 위상이 달라졌다. 이유는 은언군의 가계에서 찾을 수 있는데, ‘사도세자-은언군-전계대원군-철종’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철종이 즉위한 뒤 은언군과 전계대원군 추숭이 이루어졌고, 이 과정에서 은언군 묘에 제각이 만들어지고 석물이 세워졌으며, 철종이 직접 은언군 묘소를 전배했다. p 273



조금 놀랐던 점은 은언군 묘역 사패 금표다. 은언군은 모반죄로 강화에 유배되었다가, 천주교 박해당시 사사된 정조의 이복형제다. 죄인으로 죽었던 은언군 묘를 지키는 금표. 이는 단종이 노산군으로 죽었다가 복권된 것과 비슷한 케이스다.



은언군의 손자는 강화도령 이원범. 안동 김씨에 의해 왕이 된 자, 철종이다. 왕이 된 손자는 아비와 조부를 추숭했고, 그 과정에서 은원군 묘에 금표가 세워진 것이다.



기타 금표: 한글 금표, 목적을 알 수 없는 금표



지금까지 금표는 금표라는 문구가 한자로 세겨진 금표였다. 보통 조선시대 세워진 비석은 한자를 세기니 당연한 일이다. 헌데! 한글로 세겨진 금표도 남아있다.


서울 이윤탁 한글영비 위치는 이윤탁과 고령 신씨의 묘 옆 비각 안에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한글이 새겨진 비석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기에 한글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다. 해당 비석에서 중요한 부분은 옆면으로, 영비 아래 한글로 30자가 새겨져 있는데, 안내문에 기록된 해석은 다음과 같다.


“신령한 비다. 쓰러트리는 사람은 화를 입을 것이다. 이를 한문을 모르는 사람에게 알리노라.” p 303



포천 인흥군 묘계비는 인흥군 묘로 들어가는 길에 있었다. 인흥군은 선조와 정빈 민씨의 소생으로 이름은 영(瑛)이다. 인흥군 묘계비에서 주목해볼 점은 앞선 이윤탁 한글 영비의 사례처럼 한글로 새겨진 경고문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비기 극히 영험하니 생심도 사람이 건드리지 말라.” p 304



영남 남송리 금표는 인곡마을에서 쌍계사지로 가는 길에 있는 감나무밭에 세워져 있다. 길쭉한 형태의 자연석 전면에 ‘금표’ 두 글자만 새겨져 있다. 추가 명문이나 기록들이 확인되지 않기에 해당 금표가 어떤 목적으로 세운 것인지는 알수가 없다. 다만 위치상 국사봉으로 올라가는 길에 있는 쌍계사지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p 30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 - 그들은 왜 칼 대신 책을 들었나 서가명강 시리즈 14
박훈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본사를 읽다보면 개인적으로 읽을 때마다 상대적인 분노(?)를 느끼는 구간이 있다. 그게 바로 일본에 흑선(쿠로부네, 서양 증기선)이 상륙했던 시점부터 메이지유신 직후까지다. 분명 임진왜란 이후에는 조선에 통신사를 요청해서, 조선의 문물을 배워간 일본이었다. 하지만 저 시기를 기점으로 일본은 급격하게 근대화 노선을 타기 시작했고, 성공적으로 근대화에 이르렀다. 반면 조선은 발전의 시계가 더 뒤로 갔다. 주 권력층이었던 민생을 생각하기는 커녕 노론들은 권력 싸움하느라 바빴다. 그 과정에서 가렴주구한 행태가 빈번히 나타났다. 조선 후기 잦은 민란이 발생한 이유다.



당시 일본 지배층은 도쿠가와 막부 및 사무라이였다. 쉽게 보면 조선의 왕과 신하(양반)들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조선의 양반네들처럼 도쿠가와 막부 하 사무라이들도 백성들을 부려먹으로 가렴주구 했을 것 같지만, 놀랍게도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도쿠가와 막부 하에서 피지배층인 농민들이, 지배층인 사무라이보다 경제적으로 풍족했다.

지속적인 경제 발전으로 인해 상인들이 부를 축적했다. 농민들도 생산력이 높아지면서 부를 축적했다. 농민들이 부를 쌓으니, 막부에서 세금을 조금이라도 더 걷을라 치면 바로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당시 일본의 농민들은 그정도로 단합이 잘 되어 있었다. 반면에 신분상으로는 지배계층인 사무라이들은 피지배층인 농민, 상인보다 실질적인 생활수준은 매우 낮았다.

당시 일본은 계층에 따라 거주지가 제한되어 있었고, 병농이 분리되어 있었다. 농민들은 농지(대충 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고, 상인은 시장에서 가업을 이어가며 살았으며, 사무라이들은 번주가 부르면 즉각 행동할 수 있도록 도시에서 살았다. 농민들은 농사만 지을 수 있었고, 상인들은 상업만 할 수 있었으며, 사무라이들은 오로지 번주를 지키는 무업이 숙명이었다.

농업 및 상업 활동을 하며 실질적인 부를 챙긴 농민, 상인들과는 달리 사무라이는 주군에게 받는 봉급 외에는 소득이 없었다. 심지어 도시에 거주하다보니, 경제발전으로 오르는 물가상승에 엄청난 타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물론 농촌에서 농사를 짓는 농민이되, 남의 땅에서 농사를 짓는 임노동자들도 경제적 상황이 안좋은 건 매한가지였다.

여기까지가 도쿠가와 막부 당시 일본 상황이다.


보통 사회적인 불만을 가진 계층이 늘어나면, 그 계층에서 개혁이 시작되기 마련이다. 다만 피지배층에서 시작된 개혁은 보통 실패하거나 성공해도 오랜 기간 진통을 앓는다. 하지만 일본 근대화 개혁인 메이지 유신은 달랐다. 안정적으로 시행되었고, 짧은 시간안에 자리를 잡았다. 그 이유는 단 하나다. 개혁을 주도한 계층이, 다름아닌 지배계층 사무라이라는 것!

칼 차고 싸움질만 하던 사무라이들이 어떻게, 그 어려운 근대화 개혁을 성공했을까? 그 이유는 다름아닌 거주지 제한에 있었다. 그들은 거주지 제한으로 인해 돈이 없어도 어쩔 수 없이 도시에 살아야만했다. 도시에 살다보니 자연스레 교육을 받을 기회가 늘어났다. 실제로 19세기에 이르면, 이미 많은 사무라이들이 유학(주자학)을 배우거나, 이미 배워서 그 수준이 꽤 높았음을 여러 사료를 통해 알 수 있다. 한마디로 19세기 당시 사무라이는 허리에는 칼을 차고, 책을 읽는 ‘독서하는 사무라이’ 였다.

이뿐만 아니다. 도시에 살다보니, 격변하는 정세를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수많은 세계 정보가 도시로 몰려들었다. 제일 큰 변화는 함선과 대포로 무장한 서구열강 증기선이 일본 항구에 나타난 사실이다. 무인이였던 사무라이들은 느꼈을 것이다. 서구와 싸웠을 때, 자신들에겐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심지어 일본에는 해군도 없었다. 이는 개인의 생명 문제가 아니었다. 서구열강이 쳐들어보면, 지금으 일본이라는 나라는 지도상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근본적인 위기였다.

서구열강을 향한 위기감을 느낀 ‘독서하는 사무라이’들. 그들은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본을 근대화 시키는데 앞장섰고, 성공시켰다. 그게 바로 메이지 유신이다. 메이지 유신까지 이르게 한 ‘왕정복고(대정봉환)’ 도 역시 ‘독서하는 사무라이’들이 주도했다.

중세를 살던 사람들이 한 순간에 근대를 살아야 하는건 엄청난 변화다. 하지만 일본은 이토록 거대한 변화를 충격없이 받아들였다. 이유는 단 하나다. 앞서 언급했듯이 개혁을 주도한 ‘사무라이’가 지배계층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혁으로 인해 사회질서가 무너질 일이 없고, 처음부터 지배계층이서 시작된 개혁이니 피지배계층은 기존 처럼 수긍하며 따랐던 것이다.

이 책은 메이지 유신을 이야기 함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4명에 대해 설명한다. 그들의 이름은 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일본사 또는 일본 드라마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적어도 1~2명 정도는 들어봤을 그들의 이름이다.

요시다 쇼인

‘병학사범’ 쇼인은 이제 검술로는 서양을 상대할 수 없음을 간파하고 해군 육성을 재촉한 것이다. 뒤에 나오겠지만 사카모토 료마도 이 무렵 고향의 난학자에게서 해군의 중요성을 배우게 되고, 이어 일본 해군 탄생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가쓰 가이슈의 제자가 된다. 사무라이는 원래 해군과는 무관한 존재들이다. 창검술, 기마에 대한 이들의 집착은 거의 중교적인 것이었다. 그만큼 해군 육성이라는 발상의 전환은 용이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쇼인도, 료마도 이런 오랜 전통과 관례를 끊어버리고 해군 양성의 절박성을 바로 간파했다. p 063

요시다 쇼인은 어려서부터 신동이었다. 10대 때 아편전쟁에 대륙이 패배했다는 사실은 인지하는 것은 물론 서양관련 서적을 탐독하였다. 그가 19세 나이에 번에 올린 「수륙전략」은, 그가 얼마나 서양에 대해 공부해왔는지를 알 수 있다. 심지어 일본에서는 있을 수 없는, 본인조차 땅에 발을 디디고 검을 사용하는 사무라이였음에도 그는 ‘해군’ 양성의 중요성을 간파했다. 이는 전국시대 당시 총검술을 버리고 조총을 선택했던 오다 노부나가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엄청난 발상의 전환이었다.

동시간대 조선은 어땠을까. 강화도령 철종이 즉위하던 무렵이었으며, 세도정치가 한창인 시기이자,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한 행태로 농민들은 죽거나, 도망가거나, 죽지못해 살거나 였다.

그는 옥중에서 죄수들을 상대로 『맹자』를 강의했다. 이 강의는 1855년 12월 보석으로 풀려난 후에도 친족과 찾아오는 청년들을 상대로 자택에서 1857년 6월까지 계속되었고, 그 내용은 저 유명한 『강맹차기』로 정리되었다. (…) 숙부 중 한 명인 다마키 문노신이 이전부터 송하촌숙이라는 사숙을 열고 있었는데, 쇼인의 학생이 날로 늘어나자 그가 이것을 인계했다. 쇼인 송하촌숙의 탄생이다. p 068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근대 일본의 정계에서 이토 히로부미와 쌍벽을 이루던 인물이다. 이 두 사람은 송하손축에서 같이 공부하던 사이인데 훗날 정적이 되었다. 이토가 온건파라면 야마가타는 강경파다. (…) 늘 대외강경 노선을 걷던 야마가타는 한국병합에 대해서도 다르지 않았다. 이토 한국통감이 보호국하에서 병합으로 나아가는 걸 주저하고 있을 때 그와 가쓰라 내각은 한국병합을 향한 움직임을 강화해나갔다. 이토도 결국 거기에 동의했다. p 099

요시다 쇼인의 일생은 여행 및 감옥으로 갈린다. 당시 막부 하에서는 자신이 속한 번을 떠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나라를 떠나는 건 더욱 그랬다. 하지만 쇼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써서 여행을 다녔다. 여행을 다니며 더 넓은 세상을 배우고, 해외 정보를 수집했다. 여행이 끝나면 여행을 떠났다는 이유로 또는 너무 급진개혁파인 이유로 감옥에 들어갔다. 다만 감옥이라고는 해도 사무라이다보니, 옥중에서도 어느정도 생활을 보장받았다. 심지어 쇼인은 옥중에서 죄수들을 상대로 강의를 했고, 출옥한 이후에는 정식으로 사숙을 열었다. 우리말로 바꾸면 대충 서당 또는 서원 느낌인 교육기관이라고 보면 된다.

요시다 쇼인의 강의를 듣기위해 많은 사무라이들이 각지에서 몰려왔다. 그렇게 요시다 쇼인의 제자가 된 사람들 중 일부를 보자. ‘구사카 겐즈이’, ‘다카스기 신사쿠’, ‘시나가와 야지로’,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노무라 야스시’, ‘이리에 구이치’. 흡사 훗날 메이지 정부의 내각 진용을 그대로 복사-붙여넣기 한 느낌이다. 특히 이들 이름 중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름도 있으니 바로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모두 메이지 정부 내각총리 출신이며, 이토 히로부미는 경술국치 이후 초대 조선통감이었고,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조선통감부 부의장이었다. 이들 뿐만 아니라 요시다 쇼인의 제자였던, 메이지 정부 요인들은 과거 쇼인이 구상했던 해외팽창을 착수해나갔다.

쇼인의 해외팽창 구상을 들어보자. 북으로는 만주, 훗카이도, 더 나아가 캄차카반도와 오호츠크해, 서로는 조선, 남으로는 류큐, 대만, 필리핀까지 일본의 수중에 넣자는 것이다. “조선을 옛날과 마찬가지로 공납하도록 촉구”하자는 말은 고대에 진구황후가 신라를 정벌했다는 『일본서기』의 전설 같은 얘기에 기초한 것인데 당시에 크게 유행했었다. 여기까지도 황당무계하고 무모한 발상인데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류큐, 필리핀을 넘어 오스트레일리아까지 머릿속에 들어와 있다. 그 장대한 구상에 한편으로는 놀라게 되기도 하지만, 무모하다고밖에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생각이다. p 077

▶대동아 공영권

일본·중국·만주를 중축(中軸)으로 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타이·말레이시아·보르네오·네덜란드령 동인도·미얀마·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인도를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의 정치적·경제적인 공존·공영을 도모하는 블록화하는 정책.

이는 요시다 쇼인이 생전에 구상하던 해외팽창 계획이자, 요시다 쇼인 사후 메이지 유신을 성공한 쇼인의 제자들이 진행한 프로젝트다. 실제로 일본은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정책하에 조선을 비롯한 여러 동남아시아 국가를 식민지배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물론 미국 건드리는 바람에 대차게 패배했지만.

​​

이 책의 저자 박훈 교수는 프롤로그에서 이런 말을 했다.

세계에서 일본을 무시하는 것은 한국 사람들뿐이라는 말이 있다. 실제로 서양인들은 일본 사회를 조금 이상하게 보기는 해도 무시하지는 않으며, 중국인들은 꽤 미워하지만 그렇다고 깔보지는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일단 무시하고 본다. 꼭 알아야 할 지점에서 눈을 감아버린다. 그래서는 안된다. 혹여 전 세계 사람들이 다 일본을 무시한다 해도 우리만큼은 일본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반대로 전 세계 사람들이 다 일본을 존경한다 해도 우리만큼은 그럴 필요가 없다. - 들어가는 글 中

한일관계는 가위바위보도 지면안된다. 이 말 하나로도 알 수 있다. 우리는 일본을 무시하고 미워한다는 사실을. 문제는 ‘알려하지 않고’ 무작정 미워한다는 것이다. 반일이건, 극일이건 일본을 알아야만 가능한 것인데, 일단 우리 기본 전제는 ‘무시’다. 일본 따위를 왜 알아야 하느냐는 전제가 깔린 것이다. 근데.. 과연 그럴까? 정말 일본을 모른채 무작정 미워하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더군다나 과거사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지금에 말이다.

역대 정권들을 보면 정당에 따라 한 쪽은 무작정 반일, 또 한 쪽은 무작정 친일이었다. 한창 반일이 치솟을 땐 일본의 매우 몰염치한 행위가 있었다. 물론 그에 동조하는 국내 친일세력도 있었다. 심지어 일본의 몰염치는, 정확히 일본 정부의 몰염치는 지금도 진행중이라는게 함정이다. 예컨데 과거사 문제라던가, 자라나는 어린 학생들에게 왜곡된 역사관을 심어주는 것도 그렇고. 이런 일본의 몰염치한 행위 때문에, 일본을 알아야된다는 생각이 더욱 사라지는 것 같기는 하다만. 근데 또 우리나라 현재 정권은 역대급 친일이라 당황스럽다. 이건뭐 냉탕, 온탕도 아니고 정권마다 이렇게 차이가 있어서야 원.

뭐 여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을 알아야한다. 빡치면 빡칠수록, 저놈들이 대체 왜그러는지 알아야만 그에 맞는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정답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조금더 바라는게 있다면, 정권 따라 대일관계 기조가 극심하게 바뀌는 일도 없었으면 좋겠고. 다른나라는 그렇다치더라도 대일관계에 있어서는 좀 체계적인 방식으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적어도 지금처럼 정당따라 난 친일! 난 반일! 이러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 - 서울대학교 최고의 ‘죽음’ 강의 서가명강 시리즈 1
유성호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금은 TV를 못본지가 1년이 넘었지만, 아기가 태어나기 전까지만해도 나는 TV를 자주 봤다. 주로 시사, 교양, 다큐를 시청했다. 그러다보니 스브스에서 방영하는 《그것이 알고싶다(속칭 그알)》 라는 프로그램도 매주 본방사수했다. 그알에는 법의학자들이 자문을 위해 자주 출연한다. 자주 출연하는 법의학자 중 한 명인 유성호 교수님은 서울대에서 ‘죽음’과 과련된 교양과목을 강의하시는데, 이 과목이 워낙 인기가 많아서 수강 신청이 어렵다고 한다. 어떤 강의인지 정말 궁금했었는데, 한 예능에 출연한 유성호 교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이야. 인기가 많을 수 밖에 없겠더라.




하지만 일개 직장인이자, 심지어 지금은 몸이 열개라도 부족한 워킹맘은 그런 강의를 들을 방법도 없을 뿐더러 애초에 시간도 없다. 그나마 유성호 교수님의 강의를 살짝 엿볼 수 있는 방법이라곤, 시간이 날 때마다 교수님이 쓰신 책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간다』를 읽는 정도다. 생각해보면 이 책을 산 지는 꽤 오래되었다. 신간 발매 당시 샀으니 어휴. 몇 년을 책장에 묵혀둔건지! TV를 못보고, 1분 1초라는 찰나의 시간마저 아쉬워하는 지금에서야 읽게되었다.



책을 읽고나니 알겠다. 왜 20대 대학생들이 유성호 교수님 강의를 듣고자 하는지! 법의학자 유성호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싶지만, 여의치 않은 20대들이여!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간다』 을 읽어보길 추천한다.





그알에서 얼핏 보았던 법의학자들. 그들이 하는 일은 정확히 무엇일까? 죽음을 맞이한 시신을 검시하고, 죽음에 이르게 된 원인과 사망 종류등을 정의한다. 무엇보다도 법의학자들이 시신 검시를 함에 있어서, 대다수는 검찰청, 경찰, 보험회사 등 여러 기관의 의뢰에 기인한 경우가 많다. 이들 기관이 의뢰하는 시신들은 대체로 사건, 사고에 휘말려있는 시신들이고, 그 시신들의 신원 확인이 필요하다거나 혹은 어떻게 죽었는지를 명확하게 파악해야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나는 법의학자로서 월요일마다 검시를 한다. (…) 검시란 시체에 대한 조사 행위를 총괄해서 이르는 말인데, 검시는 다시 검안과 부검으로 나뉜다. 검안은 그야말로 시체를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눈으로 확인해서는 사망 원인이나 사망 종류를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부검이 필요한데, 부검은 해부를 통해 종합적으로 사인을 규명하는 작업을 말한다. 이러한 검시에서 가장 우선적인 일은 시신의 신원 확인이다. p 024



신원을 확인한 뒤 검시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사항은 ‘왜 죽었는가?’다. 즉 의학적인 사망 원인을 밝혀내는 것이다. 의과대학에서 배운 수많은 질병명이 사망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다음으로는 ‘어떻게 죽었는가?’하는 죽움의 방식, 즉 사망 종류를 가려낸다. 사회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었던 ‘백남기 농민사건’에서 의학적인 사망 원인은 아마도 고칼륨혈증, 신장부전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그전에 그러한 질환을 유발한 근본적 원인이 무엇인지, 어떻게 죽었는지를 살폈을 때 머리의 경막하출혈이 원사인으로 기재되었다면 외인사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말이다. p 026



법적 및 의학적인 의미의 죽음은 사망 원인과 사망 종류를 통해 정의된다. 이 두가지는 분명 다른 것인데 일반인들은 이를 헷갈리기 쉽다. 우선 사망 원인은 의사의 진단명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위암이다, 간암이다 하는 것은 사망 원인이다. 추락사로 사망했으면 그것이 사망 원인이 되는 것이다. 사망 종류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자연사, 즉 병사다. 두 번째는 외인사, 즉 외적 원인에 의한 사망이고, 여기에 알 수 없는 원인에 의한 불상이 포함된다. (…) 외인사는 크게 자살과 타살, 사고사로 구분하는데 한 사람의 죽음이 이 중 어디에 속하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된다. p 028




생명의 시작, 인간의 시작 그리고 죽음



인간의 시작은 언제부터일까? 자궁에서 정자와 난자가 만났을 때? 아니면 태아의 형태가 만들어졌을 때? 그도 아니면 온전한 팔, 다리등이 생성된 태아일때? 그도 아니면 엄마 뱃속에서 나왔을 때? 놀랍게도 인간의 시작에 대한 정의는 개인(또는 집단)의 가치관에 따라, 보는 시각에 따라 달랐다. 심지어 대한민국인이라면 지키고 따라야할 ‘법’에서 조차도, 어떤 법이냐에 따라 인간의 기준이 달랐다.



가톨릭교회 등에서는 사람의 시기를 수태된 때부터라고 보지만, 법적으로는 이와 다르다. 법적으로는 크게 민법과 형법이 있는데 형법에서 적용하는 대표적인 학설은 진통설이다. 형법은 어떠한 행위의 범죄 처벌 여부와 그 처분의 정도나 종류를 규정한 법으로, 진통이 있다면 그때부터 사람으로 보아 법을 정용할 수 있다. 만약 진통 전의 태아를 사망하게 하면 살인죄가 아닌 낙태죄를 적용하게 된다. 그러나 진통이란 여성의 자궁 경부가 열리면서 아기가 머리를 내밀기 전에 이미 시작된다. 따라서 만일 그 때 누군가가 아기를 살해했다면 살인죄가 되는 것이다. p 107



민법에서는 또 다르다. 민법은 사람의 권리와 의무를 지우는 법이다. 예를 들어 언제부터 내가 내 손자나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줄 수 있는지는 민법에 따라 결정한다. 민법에서는 아기가 자궁 경부를 통해 완전하게 신체를 노출했을 때부터를 사람으로 본다. 이처럼 민법과 형법에서 적용하는 학설은 약간 다르며 관련 학설 또한 진통설, 일부노출설, 전부노출설, 독립호흡설 등 여러가지다. p 108



수정된 정자와 난자의 움직임은 유튜브 영상으로도 확인해볼 수 있는데 일주일을 두고 자궁으로 천천히 움직이면서 2개, 4개, 8개, 이렇게 반반씩 쪼개지면서 수정란이 되고 그다음에 자궁에 딱 붙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자궁벽에 잘 붙지 못하고 그냥 쓰러지는 수정란이 절반이 넘는다. 이렇듯 임신이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다. 수정이 되어 자궁에 붙은 후에도 임신 초기에 자궁벽에서 떨어져 그냥 쓸려나가는 경우가 더 많다. 결국 임신 8주정도 까지는 유산 가능성이 높아서 여성 스스로도 임신한 줄 모르고 있다가 유산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우리 모두의 생명은 사실상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태어난 것 자체가 그렇다는 말이다. p 109



인간을 시작을 어떤 기준으로 보느냐를 떠나서, 일단 엄마 배속에서 무사히 자리를 잡고 열달 내 건강하게 있다가, 무사하게 세상 밖으로 태어나는 것 그 자체는 그야말로 신비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나 임신 과정 내 어떠한 이벤트가 있을지 모르는 일이고, 그로 인해 유산이 되는 경우도 종종 일어나기 때문이다. 나 역시 한 번의 유산을 경험한 적이 있어서 그럴까. 뿡뿡이가 내 뱃속에서 무사히 있다가, 건강하게 세상 밖으로 나와준 일이 얼마나 기적같은 일인지를 몸소 깨달았다.



TMI이긴 하지만, 이렇게 기적같이 태어난 아이들을 학대하는 인간들은 정말 쓰레기만도 못하다. 이 책에는 저자가 검시한 시신들의 여러 사례가 있었는데, 그 중에 유독 유아 살해 사건은 정말. 말 못하는 짐승들도 제새끼는 보호하는 세상인데, 어찌 그럴 수 있는지!



다들 알았으면 좋겠다. 무사히 태어나서, 지금까지 별 탈 없이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 마저도 기적이라는 사실을.



배아상태는 분명 생명이기는 하지만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사람을 죽인 것과 같은 죄를 묻는다는 것이다. 황우석 박사 사태 당시에도 문제가 되었던 것이 배아의 생명성이었다. 당시 연구팀은 건강한 여성의 난자와 정자를 합친 수정란을 만들어 스템셀이라고 부르는 줄기세포를 얻어냈다. 그들은 이를 어디에 쓰려고 했을까? (…) 만약 줄기세포로 장기를 키울 수 있다면, 그 장기를 이식할 수 있다면 너무 좋을 것 아닌가. 내 몸에 맞춤한 장기를 쉽게 얻을 수 있으니 이것은 거의 기적의 의술이 되는 것이다. 만약 허리를 다쳐서 겆디 못하는 상태인 사람에게 줄기세포 이식을 하면 줄기세포는 엄마 배 속의 수정란처럼 무엇으로도 다 문화가 되므로 척추가 새로 자라나게 되며, 이로써 일어나서 걸을 수 있는 희망을 가졌던 것이다. 줄기세포 연구는 그러한 목적으로 진행되었다. p 111



종교에서, 법에서 인간의 시작이 어디서부터인지 기준을 정했다. 그렇다면 인간과 생명은 같은 의미로 볼 수 있을까? 임신 8주 이전의 상태인 배아는 생명체이며, 인간이라 볼 수 있을까? 초음파 사진을 본 사람은 알겠지만, 임신 8주 이전은 아기집만 겨우 보일 뿐이다. 최소 2주 이후가 되야, 기껏해야 몇 mm 정도의 쥐콩만한 태아가 보인다. 배아, 임신 초기 태아, 중 후기 사람의 모습을 갖춘 태아. 어디서부터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반대로 이를 인간이 아니라고는 할 수 있을까? 어려운 문제다.



무엇보다 지금은 의료기술 발달로 과거라면 죽었을 환자를 살릴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 밑바탕에는 수많은 연구가 있었다. 앞으로의 의료기술 발달은 어떻게 될까? 책에서 말하는 황우석 박사 사태는 엄청난 이슈였고,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사례중 하나다. 현재 의료기술 발달을 위한 연구를 보면 질병을 낫게하는 선을 넘어서 생명 복제, 유전자 편집 등을 아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아주 당연히 인류를 위한다는 명목이다.



자, 그렇다면 인간은 인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어디까지 연구를 할 수 있을 것이며, 연구 범위에 있어서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연구를 위해서 인간은 생명의 기준을 어느 시점부터 잡아야하는걸까? 이는 지금까지도 명확한 해답이 나오지 않은 난제다.



죽음은 생명의 대척점에 있는 용어지만 그 실체를 설명하거나 입증하기는 어렵다. 여러 종교나 철학적 사유에서 이를테면 영혼 등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를 육체와 영혼의 결합과 분리, 즉 삶과 죽음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이는 객관적으로 임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가설과 검증에 익숙한 과학자의 입장에서는 매우 곤혹스러울 때가 있다. 따라서 죽움은 다만 살아 있지 않은 상태로 표현되거나 증명될 수밖에 없다. p 120



많은 경우 죽음은 보통 어떤 순간에 일어나는 사건으로 표현되나, 사실은 어느 기간에 발생하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다만 사회적으로나 법률적으로는 편의상 어느 순간, ‘몇 날 몇 시 몇 분’에 일어난 사건으로 이해한다. (…) 그리고 법의학자는 이러한 사람의 죽음을 세포사, 장기사, 개체사, 법적 사망의 단계로 분류한다. p 121



법의학 중 특히 법의병리학의 역할은 사망 원인과 사망 종류를 판단하는 것이다. 사망 원인이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 질병, 병적 상태 또는 손상’이다. 세계보건기구는 1977년 죽음을 초래했거나 죽음에 기여한 모든 질병, 병적 상태 또는 손상, 그리고 그러한 손상을 일으킨 사고나 폭행을 사망원인으로 정의했다.


사망원인은 막연한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생물학적 또는 의학적인 구체적 개념으로 의학적으로 검토되고 과학적으로 타당한 결정이어야 한다. 특히 법의학적으로는 사망 원인의 결정에 죽음에 대한 법적 책임의 유무 또는 책임의 경중 등이 걸려 있어 매우 중요하다. p 125



자연스러운 죽음은 무엇인가


내가 처음 마주했던 죽음은 7살인가 8살이었나? 꽤 어렸을적, 할아버지의 죽음이었다. 당시 부모님은 할아버지가 위독하시니 얼른 내려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학교를 조퇴하고 시골에 내려갔다. 할아버지는 안방에 누워계셨고, 다른 어른들은 이미 와계셨던 걸로 기억한다. 노환에다, 지병도 있으셨다. 다들 할아버지의 죽음을 예견했고, 미리 준비했고, 그렇게 할아버지는 집에서 돌아가셨다. 이게 내가 처음 마주했던 죽음이자, 마지막으로 마주한 ‘자연스러운’ 죽음이었다. 할아버지 장례도 시골에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질병으로 인한 생의 ‘말기’적 증상에는 다음과 같은 신체적 징후가 수반된다. 당연히 통증이 이을 것이고, 피곤하고, 힘이 없고, 입이 마르고, 손발이 저리고, 가렵고, 어지러운 증상들을 겪게 된다. (…) 이외에도 환자가 사망하는 과정에서 가장 흔하게 겪는 일반적인 징후는 졸음이다. 굉장한 졸음 때문에 환자는 혼미한 그로기 상태에 빠져 깨워도 계속 존다. p 031



그런데 의학 기술의 급속한 발달로 현대에는 죽음을 판단하고 대처하는 데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바로 연명의료다. 의학과 의료의 발전으로 그동안 생각하지도 않던 문제가 논쟁의 대상으로 떠오른 것이다. 중환자 의료의 발달로 치명적인 상황에 빠진 환자를 상당수 살려낼 수 있게 되었으나, 이면에는 더 이상의 의료가 소용없는 경우 이를 중지하고자 할 때 그 절차와 시기가 명확하지 않다는 문제를 함께 가져왔다. 즉 이제는 자연스럽게 죽음으로 가는 단계라고 보는 졸음의 단계, 혼수상태를 무한정 연장할 수 있다. p 033



할아버지 죽음 이후 마주한 두번째 죽음은 내가 성년이 된 이후다. 정정하셨던 외삼촌이 갑자기 급성 백혈병에 걸렸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돌아가셨다. 어렸을 적 할아버지의 죽음과는 달리, 외삼촌의 죽음은 나에겐 꽤 무겁게 다가왔다. 젊었고, 건강했고, 무엇보다 외가에서 스타나 다름없던 다정했던 외삼촌이었다. 그런 외삼촌이 하루아침에 병을 얻게 되었고, 갑작스레 돌아가신거다.



이때 비로소 깨달았다. 태어남에는 순서가 있지만, 죽음에는 순서가 없다는 걸. 더군다나 이제는 죽음을 앞둔 사람과 인사하는게 어려워졌다는 걸.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죽음을 판정할 수 있는 사람은 의사인데, 의사만이 정확히 그 사람이 몇 시 몇 분에 사망했는지를 판정할 수 있다. 나 또한 죽음을 판정하고 시체 검안서를 작성할 때 가족에게 기일을 언제로 하면 좋을 지 여쭤본다. 왜냐하면 밤 12시 전후로 돌아가시면 날짜가 바뀌니 가족들이 원하는 날로 하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당시 의사는 그 시간에 맞춰 마지막 숨을 불어넣었던 인공호흡기를 떼고 사망 진단을 했다. 그리고 그 즉시 여섯 명의 환자에게 최요삼 선수의 건강한 장기가 이식되었다. p 140



이 숭고한 미담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의사가 1월 3일 0시 1분을 기다려 사망 진단을 했다는 것이다. 즉 의사가 마음만 먹었으면 1월 3일이 아니라 더 길게 끌 수 있었다는 것이다. 뇌사자의 심장을 한정 없이 계속 뛰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은 누구라도 뇌사를 인정하는 분위기다. 그리고 뇌사가 자연스럽게 죽음으로 인정된 오늘날 새롭게 등장한 논쟁거리가 생명의 자기 결정권 문제다. 의사 조력자살 또는 의사조력사망 문제 등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결정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현재 우리 사회의 첨예한 논쟁거리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p 141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땐 다들 죽음을 예견했고, 죽음을 앞두고 할아버지와 인사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외삼촌의 죽음은 달랐다. 몇 번의 고비를 넘기셨지만, 마지막 한 고비를 넘기시지 못했다. 호흡기를 달고 계셨고, 주로 눈을 감고 계셨다. 외삼촌과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는 시간은 이미 진작에 사라진터였다. 그렇게 외삼촌은 돌아가셨고, 의사는 사망진단을 내렸다.



지금은 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처럼 노환으로, 지병으로 집에서 자연스레 생명을 다하는 경우는 없다. 무조건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틀에 박힌듯 연계된(또는 계약된) 장례식장으로 시신을 옮기고 장례를 치룬다. 행여나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남은 가족은 무조건 경찰을 불러야 한다. 죽음을 맞이하는 상황이 이렇게 바뀌어버린 건, 빠르게 발달한 의료기술과 최근 20여년 간 일어난 죽음을 둘러싼 수많은 의료 법적 분쟁에 기인한다.



연명치료 거부라는게 있다. 2018년 연명의료결정법 시행으로 생겨난 제도다. 말그대로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받지않고, 인간답게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이야기다. 이 역시 수많은 의료 법적 분쟁을 거쳐 시행된 제도다. 뇌사자 장기기증 역시 오랜 논쟁을 거쳐서 비교적 근래에 만들어진 제도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다.



아마 이후로도 죽음과 관련된 여러 법정 분쟁이 생길 것이다. 사람의 일생에 있어서 탄생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죽음이니까. 오히려 이런 제도가 너무 늦게 마련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과거에는 죽음을 터부시하고, 언급하기를 꺼려했기에 어쩔수 없었겠지만. 그로인해 죽음을 대하는 제도 마련이 미진했고, 오랜기간 시행착오를 겪게 된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가 사는 지금 죽음의 형태는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 그렇기에 지금이나마 죽음과 관련된 논쟁이 지속되고 제도가 생기는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포르투갈 셀프 트래블 - 2024~2025 최신판 셀프 트래블 가이드북 Self Travel Guidebook 24
송윤경 지음 / 상상출판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믿고보는 여행책 시리즈 셀프트래블 신간이 나왔다. 이번 편은 서유럽 포르투갈이다. 셀프트래블 시리즈는 여행을 계획중인 사람이나 여행중인 사람에게 여행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전해주는 더할나위 없는 책이다. 심지어 주기적으로 개정판이 나오고, 최신 정보를 전달해주는 만큼 정말 믿고 볼 수 있는 여행책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셀프트래블 시리즈는 실제 여행을 가지 않고, 눈으로 간접여행을 하고 싶은 사람들까지도 포용할 수 있는 여행책이기도 하다. 특히 나처럼 육아로 인해(?) 장거리 해외여행을 못가는 사람들에겐 이만한 책이 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서유럽 포르투갈로 여행을 떠나본다♬

※셀프트래블 시리즈는 책 말미에 미니책자가 있어서, 여행시 휴대하기 편리하다.


포르투갈, 서유럽에 속한 나라이자 과거 대항해시대 포문을 연 나라이기도 하다. 우리가 세계사 시간에 배웠던 15세기 아프리카/인도 항로를 개척하고 희망봉을 찍고 온 ‘바스코 다 가마’가 바로 포르투갈 사람이다. 또한 이 시기를 기점으로 19세기까지 아프리카, 아시아 일대가 유럽 식민지로 바뀌며, 식민지 무역이 활발해진 것 역시 포르투갈이 포문을 연 대항해시대에서 기인한다.

소금 가득한 바다여

얼마나 많은 그대의 소금이 포르투갈의 눈물인가.

그대를 건너기 위해 얼마나 많은 아들들이 헛된 기도를 하고

어머니들이 눈물을 흘렸는가.

얼마나 많은 처녀들이 신부가 되길 기다리며 죽었는가.

그대가 우리의 것이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 속에서, 바다여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가? 분명 가치 있는 일이다.

만약 영혼이 작지 않다면 말이다.

곶 너머로 항해하려는 자라면

누구나 두 배는 슬퍼해야 한다. 도망칠 곳은 없으니.

위험과 심연은 신께서 바다에게 주신 것이니

그럼에도 바다를 천국의 거울로 만든다.

-페르난두 페소아의 서사시 『메시지』 중에서



포르투갈 여행 Q&A

  1. 포르투갈 여행은 언제 떠나야 할까? 포르투갈은 지중해성 기후로 온화하고 사계절이 뚜렷하다. 세로로 길게 뻗은 지형으로 인해 날씨 차이가 있어서 여름에는 북부, 겨울에는 남부를 여행하면 좋다.

  2. 패키지와 자유여행, 어느 쪽이 더 효율적일까? 패키지라면 역사나 음식, 패션, 소도시 투어 같은 특화된 여행사를 이용하자. 자유여행이라면 내가 짠 여행에 현지 패키지를 추가하면 좋다. 동네 이야기를 들려주는 워킹투어나, 전문가 동반 역사유적지 당일 투어도 많다.

  3. 포르투갈에는 소매치기가 많다는데, 어떻게 예방해야할까? 포르투갈 소매치기는 특히 리스본 트램에서 많이 발생한다. 트램이나 지하철에서 안전한 곳은 제일 뒤 칸 벽면이다. 벽면에 몸을 기대고 가방을 안고 있으면 가져가기 힘들고, 출입문과 떨어져 있는 것이 좋다.

  4. 소매치기를 당하면 어떻게 해야하나? 여행보험을 들었다면 보상받을 수 있다. 가까운 경찰서로 가서 폴리스 리포트를 작성한다. 여권 또는 여권 사본이 있다면 들고 가자. 경찰관의 사인, 도장을 찍고 사본을 받은 뒤 한국으로 돌아와 보험사에 제출하면 된다.


포르투갈은 대항해시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나라다. 뿐만 아니라 세계가 놀란 문화유산도 있고, 성모 마리아가 발현한 성지 ‘파티마’가 바로 포르투갈에 있다. 음식은 말해 뭐해! 일반적인 서유럽 음식과는 달리, 그 양이 아주 푸짐하다. 특히 와인 산지가 유명한 만큼, 포르투갈에서는 와인 한 모금도 필수!

포르투갈 식당 방문시 주의할 점이 있으니, 바로 ‘코우베르트’라는 우리에게는 매우 낯선 문화다. 포르투갈은 우리나라와 달리 식전 사이드 음식이 유료다. 당연히 주는 거라 생각하고 먹었다가는, 추가요금이 나오니 주의! 원치 않으면 식전 음식을 빼준다고 하니, 직원에게 말하면 된다.


포우자다는 옛 성주들의 고성이나 수도원, 대부호의 저택을 국가에서 개조해 만든 국영 호텔이다. 포르투갈 내 35곳에 자리한 포우자다는 5성급 호텔 정도의 가격으로 비싼 편이나, 독특한 문화 체험 덕분에 항상 예약이 꽉 차있으므로 몇 달 전에 예약하는 것이 좋다. 성의 고전적인 인테리어는 그대로 두고 시설만 현대적으로 개조해 불편함이 없으며, 휴양에 딱 맞게 리조트처럼 꾸민 호텔도 있다. 비싼 숙박료가 부담스럽다면 식사만 즐기는 것도 좋다. 포르투갈 고유의 맛을 낸 전통요리와 현지 와인, 서비스 철학을 고수하고 있어 특별한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 중세로 시간여행을 떠나 유럽 귀족이 되고 싶다면 하루 쯤 투자해보자. p 050

무려 포르투갈에 있는 고성이 국영호텔로 변모했단다. 심지어 내부는 현대적으로 개조해 사용에 불편함이 없다고! 어렸을 때 디즈니 만화를 보면서, 공주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나만 그랬나ㅋㅋㅋ). 포르투갈 포우자다에서 숙박하면, 어렸을 때 완전 드림스컴투르★. 실질적으로 내 인생 통틀어서 포르투갈 여행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_T.

아래는 내 기준(!) 포르투갈 여행지 픽 이다.


바다를 향한 영원의 꿈

리스본 & 리스본 근교

리스본은 포르투갈의 수도라고 설명하기엔 한없이 모자라다. 화려하거나 세련된 건물이 없다. 사람들은 척박한 일곱 언덕에서 카페의 문을 열고 비카를 마시며 정어리를 손질하고 농담을 주고 받는다. 이 평범한 도시에 가면 설렌다. 그것은 이상향을 느낀다고 하는 애매모호한 것 처럼 분위기라는 알 수 없는 끌림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리스본 사람들은 최고의 부를 경험했고, 바다로 나간 이를 그리워했으며, 최악의 재앙을 함께했다. 그들은 여행객을 영혼으로 대하고 숨겨 높은 미소를 내민다. 리스본은 포르투갈어로 ‘매혹적인 항구’라는 뜻. 당신은 홀린 듯이 리스본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p 055

일단 외국을 가면 그 나라 수도는 꼭 가봐야한다. 고로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은 무조건 가야된다는 것! 특히 리스본에 있는 성당 중 솔로를 위한 성당이 있다는 게 너무 매력적이다. 넘 반전이잖아?! 가톨릭 성인이 가난한 사람이나 고아, 임산부 수호하는 건 뭔가 당연한데, 거기에 더해 결혼을 장려하는 성인이라니. 반전매력이 어마어마하다.

그리고! 리스본 외곽에 있는 헤갈레이라 별장도 눈여겨 볼만한 관광지다. 이 별장 주인이 ‘프리메이슨’ 단원이라고!!! 심지어 이 별장에서 프리메이슨 입단식이 열렸다고!!!! 아, 참고로 프리메이슨은 중세시대 비밀결사로도 유명한 비밀단체다. 헤갈레이라 별장에 있는 입회식 우물이 정원 상부 부터 지하까지 나선형 계단으로 9층까지 나있는데, 이곳 바닥에 프리메이슨 표식인 나침반이 있다고 한다. 여기가 프리메이슨 입단식이 열리는 장소. 거기다 나선형 계단 중간 층에 가짜 돌문이 있는데, 이 돌문을 빌면 원통형 탑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아 진짜 여긴 꼭 가고 싶다.


*산토 안토니우 성당

리스본 수호성인 안토니우가 태어난 지 3세기가 지난 뒤 지은 성당이다. 성인 안토니우는 가난한 사람과 고아, 임산부 그리고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주는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그래서 리스본에서 소매치기당한 여행자들은 경찰서 다음으로 이곳을 찾는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또한 결혼을 장려하는 성인으로 유명해 미혼 자식이 있는 집에선 안토니우 사진이 담긴 액자를 둔다고 한다. 신랑감 신붓감을 찾아준다는 이야기 때문이다. p 084

*헤갈레이라 별장

포르투 상인 가문인 헤갈레이라 자작부인이 소유하던 별장이다. 1892년 브라질 커피 무역으로 거부가 된 카르빌류 몬테이루가 사서 여름 별장으로 재단장했다. 당시 화재가 된 건축 도안은 이탈리아 크레마 시립박물관에 있다. 무대 연출가를 겸한 루이지 마니니는 입구를 숨겨놓거나 비밀통로로 연결되는 등 장치를 설치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듯하다. p 158



대서양 입구의 영원한 항구

포르투

국명의 어원인 포르투는 부두를 뜻하는 ‘port’에서 유래되었다. 도우루 강 하구에 위치한 항구도시 포르투는 이웃 나라와의 교역을 통해 일찍이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대항해시대를 연 엔리케 왕의 출생지이자 포르투갈의 오래된 도시로 다양한 건축양식의 진화를 살펴볼 수 있다.

낭만의 도시라 하면 프랑스에는 파리, 체코에는 프라하를 떠올리듯이 포르투갈에는 포르투가 있다. 동 루이스 1세 다리 아래로 도우루 강이 흐르고 그 위로 크루즈가 지나간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히베이라 지구의 건물은 파스텔 빛이 바랜 빈티지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산지의 포도가 무르익으면 빌라 지 노바 가이아의 와이너리에서는 빈 오크통을 채운다.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클레리구스 탑의 종이 울리고 노을을 닮아 오렌지빛 지붕 위로 새가 날아 오른다. 당신만 있다면 이곳은 완벽한 포르투가 된다. p 171

‘포르투갈’ 이라는 국가 이름 어원이 된 도시 ‘포르투’. 국가 이름이 된 도시이니만큼 포르투도 꼭 들러봐야 하지않을까 싶다. 특히 ‘대항해시대’를 연 엔리케 왕의 흔적이 남아있는 도시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대항해시대고 뭐고, 오로지 렐루 서점!!!!! 해리포터 쳐돌이라면 무조건 가봐야 할 렐루 서점!!!!!!!!!!!!

*동 루이스 1세 다리

어느 도시에서나 지역을 나타내는 랜드마크가 있는데, 포르투는 동 루이스 1세 다리가 그렇다. 도우루 강 하류에 있는 6개 다리 중 하나로 포르투 올드타운과 와이너리가 즐비한 빌라 노바 지 가이아를 연결한다. 포르투 주요 명소인 만큼 평일과 주말 상관없이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많다. ㅗ루 공원이나 세하 두 필라스 수도원에서 보는 노을과 야경도 좋지만, 북적대는 인파가 고민이라면 이곳으로 가자. 긴다이스 푸니쿨라 정류장 인근에 있는 두키 지 롤레 주차장이다. 세하 두 필라르 수도원과 마주한 절벽에 있어 시야가 확 트인다. 위치 상 해가 지는 모습은 볼 수 없지만 일몰 분위기와 야경, 웅장한 수도원과 활기찬 모루 공원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p 185

*렐루 서점

종이냄새가 주는 편안함과 책이 주는 느긋함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서점처럼 좋은 곳이 없다. 1881년 렐루 형제의 서점은 포르투의 일반 건축물에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해 아르누보 양식의 이국적인 외관으로 꾸며졌다. 렐루 서점은 ‘해리포터 서점’이라는 애칭을 가지고 있다. 『해리포터』 시리즈를 지은 조앤 K.롤링 작가는 신혼을 포르투에서 보냈고 해리포터가 다니는 마법 학교의 계단을 렐루 서점의 계단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p 192



성모발현의 순례지

파티마

이탈리아 바티칸 시국 다음으로 많이 찾는 세계적인 가톨릭 순례지다. 1917년 성모 마리아가 세 명의 목동 앞에 나타난 곳이기 때무니다. 성모 마리아의 발현은 가톨릭을 믿는 포르투갈 대부분의 국민에게 희망을 주었다. 마음이 아픈 자와 몸이 고통받는 자들이 파티마로 찾아왔다. 나았다는 사람도, 안식을 찾았다는 사람도 있으나 분명한 건 이곳을 찾은 여행자는 무언가 깨달음을 마음에 담고 간다는 것이다.

성모발현일인 5월 13일이 되면 어마어마한 광장이 발 디딜틈도 없이 꽉 찬다. 이때 여행하게 된다면 저녁에 있는 촛불미사와 행렬이 장관을 이루니 놓치지 말자. p 266

‘파티마 기적’은 꽤 유명한 일화라 잘 알고 있는 내용이긴 했는데, 파티마가 포르투갈인지는 몰랐다. 분명 파티마가 포르투갈이라는 정보까지 같이 보았을 테지만, 일화 속 중요한 내용은 ‘성모 발현’과 ‘목동들’, ‘예언’ 그리고 발현 시점이 무려 꽤나 가까운 과거였던 1917년이다보니, 내 머리속에는 그닥 중요하지 않은 정보였던 ‘포르투갈’이라는 국가 이름은 사라졌었나보다.

아니 근데 진짜로 성모 발현이 1917년이라는게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고대 사회야 뭐 전설이니 뭐니 하면서 이야기하겠다면, 1917년이면 너무 가까운 과거가 아닌가. 근데 심지어 마을 사람은 말해 뭐해,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7만명이 봤어! 와. 거기다 목동 중 한명인 루시아 수녀는 2005년에 선종. 이건 진짜.

난 종교는 없지만, 그럼에도 국내에 있는 역사적인 종교시설 답사를 주구장창 다녀온 사람으로써!! 파티마 만큼은 꼭 한번 가보고 싶다.


*파티마의 기적

1917년 5월 13일 파티마의 목동들 루시아와 프란치스쿠, 프란치스쿠의 동생이자 루시아의 사촌인 히야친타는 현재 망령들의 예배당 위치에서 성모 마리아의 발현을 목격했다. 성모는 기도를 많이 하고, 매달 같은 날에 같은 곳으로 나오라고 했다. 목동들은 6월과 7월에 이를 행했으나 8월에는 그럴 수 없었다. 정부관리가 목동들을 감옥으로 데려가 고초를 겪었기 때문이다. 약속한 날의 6일 후 다른 곳에서 발현을 목격했고 9월이 지나 10월에는 약 7만 명의 사람들 앞에서 발현하는 기적을 보였다. 일명 ‘태양의 춤’이라 불리는 이 기적은 움직이며 굴곡이 지는 태양을 모든 사람들이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고 한다. 목동 중 프란치스쿠와 히야친타는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으로 죽고 루시아는 수도원으로 들어가 수녀로 살았다. 성모는 파티마의 비밀 3가지를 루시아를 통해 전하였다. 토요일에 가톨릭 미사의 예식 중 하나인 성채를 하고 죄인을 위해 기도하며, 묵주기도를 계속하면 러시아는 회개하여 평화가 올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종교를 박해하고 교황은 고통받으리라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 러시아는 공산주의에서 벗어났고 요한 바오르 2세는 암살에서 살아남았다. 몸에서 나온 총알은 파티마 성당 성모상 왕관에 봉헌하였다. 다음 해 요한 바오르 2세는 파티마로 순례를 왔고 이를 기념해 광장에는 그의 조각이 남아있다. p 26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