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밍이네 어린 정원
고현경.이재호 지음 / 티나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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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돌아온 식물의책 타임!


n년 식물집사 답게 가끔 눈에 띄는 가드닝 책이 있으면 읽곤 한다. 물론 그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식물의 책은 누가 뭐래도 프로개님 책이긴 하지만ㅋㅋ. 그렇다고 내가 다른 가드닝 책을 안 읽는 것은 절대 아니다. 지금까지 서평했던 여러 식물의 책을 보듯, 난 프로개님이 아닌 다른 저자들의 가드닝 책도 꽤나 열씸히 읽었으니까! 뭐, 한마디로.. 오늘 소개하는 책도 식물집사라면 꼭 한번 읽어봤으면 할 가드닝 책이라는 그런 이야기!


오늘 포스팅하는 가드닝 책 「단밍이네 어린 정원」은 전원주택에 살며 정원을 가꾸는 부부의 이야기다. 그렇다. 식물집사라면 한 번쯤 꿈 꿔보았을 전원주택&정원!! 물론 실상은 아파트에 처박혀, 조그만 베란다만으로도 화분을 놓을 공간을 주셔서 그저 감사하는 배포작은 식물집사지만^_T.


이 책은 기본적으로 식물 가드닝과 정원 꾸미기가 메인으로 이뤄진 책이다. 어찌보면 식물을 좀 키워봤다(?) 싶은 사람들에 쉬울 법한 책이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댓츠 놉! 초보 식집사들을 위해 식물에 대한 기본부터 차근차근 이야기 한다. 예컨에 식물의 분류라던가, 식물의 부위별 명칭, 광합성, 비료 등 식물의 성장에 영향을 주는 모든 것을 말이다. 하지만 역시 책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건 ‘정원’이다. 따라서 실내에서 가드닝하는 식집사들에게는 조금은 부럽고, 질투나는 책일지도 모른다. 모름지기 식집사라면 알고 있는 그것! 식물들에게 제일 최고의 화분은 ‘노지’라는 사실을 우린 잘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실외에, 오롯이 나만의 정원이 있는 단밍이네가 넘 부럽다는 뭐 그런 이야기.




내가 본격적으로 식물을 키우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는지 곰곰히 생각해봤다. 아마도 유산을 경험한 당시였던 것 같다. 다른 곳에 집중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리고 위로가 필요했다. 그때 눈에 들어왔던게 집안에 있던 두어개의 화분이었다. 그렇게 본격적인 식집사 생활이 시작되었다. 초보자가 키우기 쉽다는(?) 식물들을 구입하고, 집에서 과일 먹다가 나온 씨앗을 심고, 전지작업 후 화단에 방치된 나무 가지 몇개를 집어와서 삽목을 하고. 그렇게 식물을 불리고 불리고 불리고. 그렇게 방안 곳곳에 식물들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물론... 그때 자리잡았던 식물들 중 몇몇은 지금 집에 없다. 식집사들이 으레 그렇듯(?) 여러 이유로 인해 초록별로 보냈다는 뭐 그런 슬픈 이야기랄까. 특히..............뿡뿡이 출산 & 육아 과정에서 엄청 많은 식물들을 초록별로 보냈다는 건 안비밀^_T.



뭐 여러 이유로 식물들을 초록별로 보내긴 했으나, 따지고 보면 이유는 하나다. 식물이 자라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했던 것. 예컨에 물을 제때 못줘서 말려 죽이거나(수국ㅃㅇ...), 환기를 제대로 못해줘서 자기 독성에 지 혼자 죽게하거나(율마ㅃㅇ..), 벌레 잡는다고 약+물샤워 미친듯이 하다가 과습으로 죽이거나(너무 많음^_T) 기타 등등!!! 


고로 식집사라면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한다. 식물을 키우기 좋은 환경이 어떤 환경인지를! 아, 물론 이론은 잘 알고 있음에도 현실이 따라주지 않는 경우가 더 많긴 하지만... 하하하하(내 이야기^^). 근데 여기서 또 함정이 있다면, 식물을 키우는 장소가 실내냐 외부냐에 따라 다르다. 조금 더 들어가면 화분에서 자라느냐, 노지에서 자라느냐일까나?


실내가드너로서는 정말 인정하고 싶지않지만, 노지에서 자라는 식물과 화분에서 자라는 식물들은 시작부터가 다르다. 특히 화분에서 자라는 식물들은 조금만 잘못해도, 식집사에게 반항을 하면서 죽을 꺼라는 협박을 한다는 슬픈 이야기. 


모든 생명체가 그러하듯 식물 또한 다양한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살아가기 힘든 환경에 처한 동물들이 먹이와 물을 찾아 이동하는 것과는 달리 식물은 스스로 이동할 수 없습니다. 우연히 씨앗이 떨어진 최초의 그 자리가 평생을 살아갈 자리가 되곤 합니다. 자신이 처한 환경이 불리해지더라도 그 환경을 회피할 수 없다는 뜻이지요. 식물은 그저 주어진 환경에 어떻게든 적응하며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 입니다. 가드너가 이를 알고 각 식물에게 적절한 환경을 제공하고 조절해주거나, 불리한 환경도 이겨낼 수 있도록 지원할 경우 식물은 더욱 안전하고 건강하게 자라 자신을 도운 가드너에게 빛나는 아름다움으로 보답할 것입니다. 식물이 살아가는 데 영향을 받는 환경에는 크게 온도환경, 광환경, 토양환경, 수분환경, 공기환경이 있습니다. p 052



아래에 식물이 살아가는데 아주 중요하게 영향을 끼치는 빛, 흙, 수분에 대한 내용을 책에서 발췌해보았다.




▶ 빛이 식물에게 주는 영향


식물이 좋아하는 빛이 따로 있을까요? 꼭 태양빛이어야만 할까요? 집안 형광등이나 백열등 아래에서는 광합성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 점에 대해 한 번쯤 의문을 가진 적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식물은 실내의 인공적인 빛 아래에서도 광합성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내 환경에서는 부족한 빛을 보충해주는 장치들이 개발되어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p 056



빛이 강렬할수록 광합성 양은 증가하며 많은 영양분을 만들어냅니다. 일반적인 식물의 경우 밤에는 빛이 없기 때문에 광합성은 하지 못하고 호흡만 하게 됩니다. 아침에 해가 다시 뜨고 서서히 빛을 받기 시작하면서 식물들은 이산화탄소 양과 호흡을 통해 배출하는 이산화탄소 양이 같아지는 지점을 ‘광보상점’이라고 합니다. 이 광보상점 이상의 빛을 받을 수 있어야 식물들은 지속적으로 생육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빛의 세시가 점점 오후로 들어갈 수록 강렬해지고, 빛의 세기에 따라 광합석 속도 또한 증가하다가 어느 시점에 이르면 더 이상 광합성 속도가 증가하지 않는데, 이 떄의 빛의 세기를 ‘광포화점’이라고 합니다. 식물마다 광보상점과 광포화점은 다릅니다. 광보사점과 광포화점이 낮은 식물일수록 실내환경처럼 빛이 적은 조건에서도 잘 자라게 됩니다. p 058



많은 빛이 필요한 식물들: 장미, 봉선화, 백일홍, 코스모스, 선인장, 소나무 등

중간 정도 빛이 필요한 식물들: 옥잠화, 비비추, 진달래 등

적은 양의 빛이 필요한 식물들: 스킨답서스, 스파티필름, 필로덴드론, 맥문동 등


많은 식물들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일장 변화에 따라 다양한 반응을 보입니다. 이를 식물의 ‘광주기성’ 이라고 부릅니다. 많은 수의 식물들은 꽃을 피우는 혹은 피우지 않는 기준이 되지는 빛의 길이인 한계 일장을 갖고 있습니다. 한계 일장보다 긴 일장 조건이 주어지면 개화하는 식물을 장일식물, 한계 일장보다 짧은 일장 조건에서 개화하면 단일식물이라고 합니다. 한계 일장이 없어서 일장 조건에 관계없이 개화하면 중성식물이라고 분류하기도 합니다. p 059



장일식물: 페튜니아, 금어초, 과꽃 등

중성식물: 봉선화, 진달래, 옥잠화 등

단일식물: 국화, 코스모스, 카랑코에 등



▶ 흙이 식물에게 주는 영향


식물을 키울 때 사용하는 토양은 논, 밭의 흙과 같은 일반토양과 원예용 특수토양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일반토양은 암석이 풍화된 가루에 유기물, 미생물, 수분, 공기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점토 함량에 따라 사질, 점질토양 등으로 구분됩니다. 반면 원예용 특수토양은 원예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흙입니다. 상토, 용토, 배양토 등의 종류가 있습니다. p060



식물이 좋아하는 흙은 어떤 흙일까요? 좋아하는 흙이 따로 있는 것일까요? 보통 좋은 흙은 아래 조건이 충족된 흙을 말합니다. p 061



공기가 잘 드나드는 흙(통기성)

물이 고이지 않고 잘 빠지는 흙(배수성)

물을 보유하는 능력이 좋은 흙(보수성)

비료성분을 보유하는 능력이 좋은 흙(보비성)

표토가 깊고 부드러운 흙

보통 토양의 pH가 6.0~7.0의 약산성에서 중성 범위의 흙(식물마다 다를 수 있음)

병충해가 없는 흙



좋은 흙을 만들기 위한 중요 포인트! (자세한 내용은 책을 읽으시길...ㅎ)

흩알구조와 떼알구조와 유기물

흙의 pH

유효토심


▶ 수분이 식물에게 주는 영향


수분부족 현상과 그로 인한 피해는 식물에게도 발생합니다. 식물 특히 초본 식물의 경우 80~90% 이상이 수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많은 양의 수분으로 이루어진 식물에게 적당한 수분 공급은 식물이 살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p 073



식물에게 수분이란?

광합성 재료

영양분의 흡수와 이동이 이루어지게 함

대사작용을 원활하게 함

팽압을 형성하여 식물의 고유한 형태가 유지되게 함

식물의 체온을 유지함



한여름같이 건조하고 더운 날씨에는 식물들 잎과 줄기가 축 늘어지고 탄력 읽은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식물의 고유한 형태를 유지하던 수분이 부족하여 팽압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 반대로 장마철처럼 수분 공급이 지나치게 많았을 때의 가장 큰 문제점은 뿌리가 물에 잠겨 숨을 쉴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수분이 많아 땅속 산소가 부족해지면 뿌리 호흡이 원활하지 않게 됩니다. 호흡이 저하되면 식물의 정상적인 생리작용에 사용되는 에너지가 만들어지기 어려워집니다. p 074



그리고... 개인 정원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중요한 ‘정원’ 조성부터 시작해서, 정원에서는 가드닝을 어떻게 하는지, 계절별로 어떤 식물들을 심으면 좋을지 많은 정보가 이 책에 가득가득 담겨 있다. 물론 실내 가드너인 나에게는 아직까지는 필요가 없는 정보이지만, 언젠가!! 필요한 정보가 될거라 믿는다. 꼭 전원주택으로 이사가고 말리라.............




생각해보면 난 가드닝 책은 꽤 많이 읽었기에, 솔직한 말로 이론은 빠삭한 편에 속한다. 뭐든 시작하기전에 책보며 공부하고 시작하는 스타일이기도 하고. 근데 가드닝만큼 이론과 현실의 갭이 큰 것도 흔치 않다T_T. 뭐, 그 갭 덕분에 더 많은 실전을 경험하며 식물들을 여러 방법으로 키우는 도전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예컨에 식물은 오롯이 흙에서만 키워야한다고 생각했던 옛날과 달리, 물속에서도 식물을 잘 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수경재배’라고 하면 흔히들 접하는 몬스테라, 연화죽, 상추 같은 것들 말고도 말이다. 물 관리와 양액관리만 잘 해주면, 커피나무 같은 유실수도 수경재배로 키울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터득했다. 물론 수경재배는 흙에서 키우는 거에 비하면 더더욱 번거로운 가드닝이기도 하지만..하하.



그래도 뭐 확실한건 식물에겐 힘이 있다. 나를 위로하는 힘이. 매일 지긋지긋한 벌레와 사투를 벌이게 한대도 말이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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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군복의 역사 에이케이 트리비아북 AK Trivia Book
쓰지모토 요시후미 지음, 쓰지모토 레이코 그림, 김효진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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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 권, 두 권 모으고 있는 세계사책이 있다. 시리즈물은 단연코 아니다. 다만 분류가 같다. 바로 ‘전쟁사’. 전쟁사 관련 책을 모으기 시작한 건, 아마도 임용한 교수님 책이 시작이었던 것 같다. 의도한건 아니었는데, 어느 순간 보니 전쟁사 관련 책들이 여러권 보이길래, 책장 한켠에 따로 자리를 마련했다. 물론 그 모든 책을 다 읽지는 못했지만 ^_T. 이쯤에서 돌이켜보면, 난 정말 책을 읽는 것 보다 모으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인 게 확실한 것 같기도. 뭐 여튼, 오늘 포스팅하는 세계사책은 여러 권의 전쟁사 책 중 하나인 『전쟁과 군복의 역사』 라는 전쟁사 세계사책이다. 



이 책 『전쟁과 군복의 역사』는 제목에서도 보이듯 ‘전쟁’과, 전쟁과 당대 시대상에 따라 발전한 ‘군복’의 역사를 소개한다.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짚고 넘어가자면, 우리가 현재 입고있는 옷이나 군복은 모두 서양에서 출발한 의류이기에,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전쟁과 군복의 역사도 당연히 서양 즉, 유럽을 중심이다. 즉, 동양이나 아시아 전통 군복(?)이 왜 없는가에 대한 의문은 애초에 해당이 안된다는 것!




내 나름대로는 역사더쿠라 세계사에서 비중있는 전쟁들은 꽤 알고 있는 편이다. 여러 세계사책으로 읽기도 했고, 임용한 교수님의 《토크멘터리 전쟁사》 라는 프로그램을 즐겨보기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전쟁사란, 어디까지나 ‘전쟁’에 대한 것이다. 전쟁에 따른 정치, 문화, 사회의 변동 이런 느낌이랄까? 오로지 그런 것들만 머리속에 넘처날 뿐, 군복의 역사는 진심 1도 관심이 없었다. 아! 굳이 굳이 군복의 역사에 대해 아는 것을 찾자면, ‘버버리 코트가 군복에서 시작되었다’와 ‘세일러복이 해군에서 시작되었다’ 이 정도 랄까. 하하하.



즉, 군복의 역사는 제대로 아는 것이 진짜 1도 없었기에, 이 세계사책 『전쟁과 군복의 역사』는 나에게 신문물(?) 이었다. 제일 놀라웠던건, 군복의 역사가 신사복의 역사와 궤를 같이했다는 점이랄까. 넥타이부터 시작해서, 구두, 투피스(정장), 쓰리피스(정장) 등 각종 패션의 산물이 군복에서부터 시작한거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인지! 세계사 속 전쟁에 대해선 나보다도 엄청 많은 지식을 자랑하는 우리 신랑조차도 이런 내용이 처음이었다고 한다면 정말 말 다한듯 싶다.



물론! 군복의 역사가 신사복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고 해서, 고대 부터 그러했는가? 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또 당연히 NO 다. 고대야 뭐, 동양이고 서양이고 군복이라 말하기 민망할정도로 헐벗은(?) 옷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 최초로 통일된 군복이 등장한게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라고 하니, 와. 이건 놀랄 노짜다. 하긴, 생각해보면 입고 있는 옷이 다 다르면, 싸울 때 니편인지 내편인지 알 수 없을테니 군복을 통일하는 건 정말 중요한 문제이긴 하다.



중세시대의 군복은 전쟁에서 얼마나 실용적인지도 중요하지만, 비전쟁시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편리한가에 중점을 두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왜그런고 하면, 당시의 기사들은 한마디로 ‘작위’를 받은 귀족이나 왕족이었다. 즉 ‘기사’ 이기 이전에 귀족, 왕족들이었기에, 일상생활에서 편하게 활동할 수 있던 일상복이 당시의 군복으로 고스란히 이어졌다나 뭐라나. 뭐, 이때까지만해도 냉병기를 주로 사용하던 시대였으니 크게 문제가 없었겠지만, 전쟁에서 열병기가 주로 사용되면서는 귀족을 위한 군복도 당연히...빠이빠이!



또 신기했던 점이 ..... A국가와 B국가가 전쟁을 벌여서, A국가가 이겼다다고 치자! 그럼 이긴 A국가의 군인들이 입은 군복이 전 유럽적으로 유행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이쯤되니 군복도 확실히 패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말 전쟁과 군복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가 가득 담겨있는 책이다보니, 전쟁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을 정도다.




정말 책의 내용이 풍부하기도 풍부하지만, 그 내용을 뒷받침하는게 있으니 바로 삽화다. 정말 수 많은 역사책을 읽어봤지만 이렇게 삽화가 많은 책은 처음인듯;; 그것도 올 컬러 삽화로 말이다. 아무래도 군복이다보니, 문자로만 풀어내면 ‘딱!’하고 떠오르지 않을 수 있어서 그런 것같다. 덕분에 문자로만 읽고, 흐리멍텅하게 머리로만 상상(?)하는 일 없이, 어떤 군복인지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게 꽤나 마음에 들었다.



아래는 책의 일부 내용을 발췌하였다.



군복이란 무엇인가



제네바 조약 및 헤이그 육전 조약의 규정에 의하면 군복을 입은 자는 교전 상대국에 사로잡혀도 포로로서 보호를 받는다. 사복을 입은 자는 간첩, 테러리스트로 간주해 처형될 가능성도 있다. 군복이란, 국가가 군율로 정한 복제로 법적인 근거하에 지급하는 피복이다. 조약상 ‘멀리서도 알 수 있는 명확환 휘장’을 부착해야 한다. 장교 등이 관급품이 아닌 개인적으로 주문해 구입하는 경우에도 그 국가의 제복에 준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p 010



제복학에서 특히 중요한 것이 군복의 규정을 조사하는 일이다. 각국에서 복장 규정을 정하게 된 것은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이다. 이후 몇 년부터 몇 년까지 그 군복이 이용되었는지를 밝히는 것이 중요한데 근거가 되는 명문 규정이 있는 경우는 그 규정을 최대한 찾아내야 한다. 예컨대, 프랑스 육군은 1661년 무렵, 영국 육군은 1706년에 처음 군율이 제정되었다. p 011



※군복의 아이템: 정모(관모), 견장, 넥타이, 훈장, 견식, 스트랩슈즈



넥타이가 군장 특유의 아이템이라고 하면 놀라는 사람도 많을 테지만 실은 넥타이야말로 틀림없는 군복용 아이템이라고 할 수 있다. 목에 감는 스카프형 장식의 원형은 고대 로마 군단의 병사가 목에 감았던 포칼레로 오늘날 신사복 역사의 정설로 정착했다. 당시 로마군의 투구는 목을 감싸듯 돌출된 형태로, 목덜미의 접촉이나 마찰을 완화하기 위해 감았을 것으로 보인다. p 021



훈장은 고대 로마 군단에서 탄생했다.​ 백인 대장급 장교가 팔레라 라는 금속제 원반을 가슴에 다는 관습이 1세기 때 이미 존재했다. 그 사람의 전력을 나타내는 것으로, 지금의 종군휘장과 같다. 그러므로 훈장의 원조는 로마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십자군 시대인 12세기경부터 기독교 수도회의 기사단이 문장을 제정하게 되었다. 기사단은 십자군을 지지하는 군사적 단체로 각 기사단을 상징하는 문장을 서코트나 방패에 그려넣었다. 이 문장이 기사단 유니폼의 시초로 ‘훈장’ 제도의 기원이다. p 025~026



마지막 아이템은 구두이다. 단순한 신사화라고 생각하겠지만 이것도 군에서 유래된 형식이다. 스트랩 슈즈 자체는 일찍이 5,000년 전 유럽의 추운 지방에서 등장했다. 하지만 기후가 온난한 그리스나 로마에서는 샌들을 주로 신었으며 로마 군단의 병사들은 바닥에 징을 막은 군용 샌들 칼리가를 신었다. p 033




근대식 군복 이전의 역사


인류 최초의 군복은 언제 탄생했을까. 인류 최고의 메소포타미아 문명기, 고대 수메르의 도시국가에 이미 군대가 존재했으며 통일된 제복이 등장한 것으로 여겨진다. 인류는 문명의 개화 이래 군대를 조직하고 군복을 제정한 것이다. p 036




고대 그리스에서는 시민권을 가진 자만이 군인이 되어 나라를 지키는 명예를 얻을 수 있었다. 노예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일이었다. 시민들은 각자 창과 방패, 투구와 갑옷 등을 마련해 중장 보병으로 군무에 종사했다. 각자 말을 사육해야하는 기병은 부유층이 종사하는 병종으로, 자격 심사도 엄격했다. 해군은 직접 군함을 건조한 거부가 선주가 되어 조직했다. 즉, 하나부터 열까지 일반 시민의 기부와 봉사로 국방이 성립했던 것인데 당시는 군무나 공직에 얼마나 기부를 했는지 혹은 사회 공헌을 했는지가 평가의 기준이었던 사회였다. p 037



명확한 국가의 군대로서 장비품을 지급한 증거가 남아 있는 것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끌었던 마케도니아군으로, 도검과 갑옷 등 통일적인 규격품을 양산해 병사들에게 지급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을 지탱한 것은 국가의 군수 보급 시스템을 바탕으로 조직된 군대였던 것이다. p 039



(로마)기원전 107년 실시된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을 거쳐 직업 군인으로 조직된 정규군의 군단제를 시행하면서 통일적인 군장을 지급했기 때문에 이것도 국가의 군복이라 할 수 있다. 제정 시대 병사들에게 지급된 로리타 세그멘타타라고 불리는 갑판은 고대 세계의 최첨단 장비였다. 또 로마 군단의 군장은 오늘날 텍타이의 기원이 된 포칼레와 종군 기장의 원형인 팔레라 등 놀라운 첨단성을 갖추고 있었다. p 040




갑옷의 진화가 남성의 복장 전반에 변화를 촉진하기도 했다. 13세기까지 사슬갑옷이 주류였다가 14세기가 되면서 전신을 장갑판으로 감싸는 신형갑옷인 판금갑옷이 등장했다. 백년 전쟁에서 영국군의 장궁이 사슬갑옷을 간단히 관통하자 방어력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다. 백년 전쟁 초기에 큰 활욕을 보인 영국의 왕태자 에드워드는 ‘흑태자’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한데 그가 입었던 초기 판금 갑옷의 표면이 검은색이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p 041




전신에 밀착되듯 감싸는 신형 갑옷이 등장하면서 남성의상의 길이가 짧아졌다. 그로인해 남성의 다리가 드러났다. 중세 유럽의 신사라고 하면 흔히 타이즈 차림을 떠올리는데 그 배경에는 군사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또 갑옷 안에 입는 솜옷에서 유래한 더블릿이라는 풍성한 상의가 유행했다. (…) 이처럼 군장과 일반 신사복 사이에는 커다란 연관성이 있다. 당시의 지배 계층인 왕후가 귀족들이 기사가 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일상적인 복장이 갑옷으로 규정된 면이 있다. p 042




르네상스 시대부터 17세기 초, 국가의 군대가 봉건 기사단에서 근대적인 정규군으로 변천한는 동안 정장을 지배한 것은 용병들이었다. 그들은 용병대장의 뜻에 따라 일정 장비를 통일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복장과 장비는 각자 마련했다. 단, 용병산업을 제도화한 스위스 용병은 특별한 경우인데, 저명한 종군 기록 작가 디볼드 실링의 『루체른 연대기』를 보면 적어도 각 지역 부대마다 색조나 양식을 통일한 제복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p 044



1477년 낭시 전투로 로렌공국을 공격한 부르고뉴 공국의 군주 용담공 샤를은 로렌 공작 르네2세가 고용한 스위스 용병대에 의해 전사했으며 (…). 낭시 전투 이후 스위스 용병들은 전투로 찢어진 옷 안에 샤를의 본진에서 약탈한 화려한 옷감을 채워 넣고 개선했다고 전해진다. 그 찢어진 옷 사이로 드러난 천 조각이 눈길을 끌면서 전신에 슬래시를 넣는 기묘한 패션이 탄생해 17세기 중반에 이르는 200년 남짓 유럽의 신사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p 045



30년 전쟁 - 스웨덴군과 ‘근대식 군복’의 등장


(스웨덴 왕)구스타프 아돌프는 초기의 징병제인 선택 징병제를 제정했다. 당초 피복 자재의 조달과 제조는 각 연대별로 이루어졌으며 징병되지 않은 시민들에게 피복비를 징수했다. 1620년 제정된 법령에 의하면, 병역의 의무가 있는 15세 이상의 남성은 지역 집회소에 10명 단위로 정렬하게 되어 있었다. 군 징병관이 그중 한 명을 선택했으며, 그를 위한 피복비와 징비품 비용은 선택받지 못한 나머지 9명이 내는 일률 징수금으로 충당하는 제도였다. p 049



스웨덴군은 덴마크식으로 군기의 색으로 구분한 4개의 연대가 있었다. 이들은 본국의 징병제에 의해 구성된 스웨덴인 연대가 아니라 외국인 지원병으로 구성된 직업 군인들의 보병 부대로, 스웨덴군 외정 부대의 실질적인 주력이었다. ‘황색 연대’는 국왕 직속 근위 연대로 왕궁 연대 또는 호위 연대라는 통칭도 있었다. 그 밖에 ‘청색연대’, ‘적색연대’, ‘녹색연대’가 존재했다. 이들 연대의 장교는 스코틀랜드인이 많았으며 영국에서 온 병사도 다수 존재했다. 황색, 청색과 같은 색명은 당초 군기의 색을 나타낸 것에 불과했지만 1625년을 경계로 군복의 색도 통일한 것으로 보인다. p 051



전쟁이 한창이던 1626년, 구스타브 아돌프는 메웨 전투에서 당시 세계 최강으로 불리던 폴란드 기병 부대를 머스킷 총을 활용해 격퇴했다. 이듬해 8월 디르샤우 전투에서 경부를 피격당한 이후로는 갑옷을 입을 수 없게 되었다. (…) 국왕이 갑옷도 입지 않고 진두에 선 모습을 본 기병이나 보병들은 더더욱 무거운 갑옷을 꺼렸을 것이다. 당시의 화승총은 성능이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에 견고한 갑옷으로 어느 정도 방어력을 확보할 수 있었기 떄문이다. 이처럼 군복이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총기의 보급과 갑옷의 퇴장이 있었다. ‘근대 군대의 아버지’라고 불린 구스타브 아돌프가 근대 군복의 창시자가 된 것도 필연적인 일이다. 갑옷의 폐지는 다양한 군복색의 통일과 채용으로 이어졌다. p 053



루이 14세의 전쟁 - 태양왕과 ‘페르시아풍’ 군복



루이 14세는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외모에도 굉장히 신경을 썼다. 다만 신장은 160cm 정도로 17세기 당시 남성의 신장으로 볼때 작은 편이라고 할 수 없지만 결코 장신은 아니었다. 본인도 그 점이 신경 쓰였는지 하이힐을 착용했다. 그가 신은 뒷굽을 빨간색으로 칠한 궁정용 하이힐은 금세 가신들 사이에 유행했다. 루이 14세의 궁정에서 하이힐은 남성들이 맵시를 뽐내기 위해 신는 구두였다. (…) 또한 프릴과 레이스를 이용한 리본 장식을 가득 배치한 매우 여성적인 복장을 즐겼다. 그는 화려한 의상을 유행시켜 국내의 산업을 진흥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모자 차양에 깃털을 가득 장식하거나 랭그라브 라고 하는 큐롯 스커트 형태의 반바지를 입고 발레 동작처럼 우아한 자태로 활보하는 모습은 중성적인 그의 미의식과 기호를 반영했다고 할 수 있다. p 066




당시는 남성 귀족이나 군인도 모두 장식을 달고 하이힐을 신었는데 솔직히 이런 차림은 전쟁에 적합하지 않았다.​ 리본이나 프릴 장식이 나부끼는 전쟁은 당시로서도 위화감이 컸다. 당시 프랑스군에도 제복이라고 부를만한 복장이 존재했다. 가장 유명한 것이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삼총사』로 널리 알려진 왕실 근위 총사대의 제복이다. p 068




영화나 TV에 등장하는 다르타냥과 삼총사는 하나 같이 파란색 타바드를 입고 있다. 하지만 루이 13세나 리슐리외의 시대를 반영한 것이라면 고증적으로 문제가 있다. (…) 실제 ‘파란색 타바드’가 채용된 것은 1657년으로 프롱드의 난이 종결된 이후 루이 14세가 치세하던 시대였다. 푸케를 체포할 당시의 다르타냥은 이 제복을 입고 있었을 것이다. 1665년부터는 길이가 더 긴 캐속이라는 상의로 진화했다.1665년 이후 총사대의 캐속에는 루이 14세의 빨간색 태양 문장이 추가되었다. p 069



촌스럽다고 생각되던 긴 상의가 1660년대 이후에는 최신 패션으로 둔갑해 프랑스군에 널리 유행한다. 이 상의는 ‘페르시아풍’ 또는 ‘동양풍’이라고 불리었다. 상의만 보면 폴란드나 리투아니아 부근의 ‘동유럽풍’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페르시아풍 복장은 아비 안에 상의와 비슷한 길이의 소매가 긴 옷을 한 벌 더 입었다. 이것을 베스트라고 불렀다. 그 후, 베스트의 소매를 없애고 길이도 짧아졌는데 이것을 프랑스에서는 길러라고 불렀다. 즉, 상의와 베스트 조합으로 중세 더블릿 시대에 탄생한 ‘스리피스’가 유럽에서 부활한 것이다. 오늘날 스리피스 정장의 직접적인 원점이라고 할 수 있다. p 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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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仁祖 1636 - 혼군의 전쟁, 병자호란
유근표 지음 / 북루덴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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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군주가 세 명 있다. 첫번째는 선조(임진왜란), 두번재는 인조(이괄의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마지막은 고종(아관파천). 셋 모두 조선의 혼군 중의 혼군이라 말할 수 있지만(내 개인적으로는 최악의 왕들이라고 손꼽기도 하지만), 이 세 명의 왕 중에서도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횟수에 대해 우위를 따지자면, 단연코 ‘인조’ 다. 도망간 횟수가 장장 세 번이나 되기 때문이다. 이정도면 도망의 고수 중의 최고수랄까.




나는 인조에 대한 포스팅을 꽤 여러번 올렸다. 관련 역사책 서평, 인조와 관련된 유적지 답사, 인조와 관련된 인물에 대한 유적지 답사 등 말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인조를 조선 최고의 혼군으로 손꼽을 정도로 정말 싫어하지만, 싫어하는 것과는 별개로 인조에 대해 공부를 했다는 이야기다. 어떠한 사람을 싫어하는 것도, 그 사람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야만 가능한 일이니까!



고로.. 그 연장선에서 최근 읽은 책이 「인조 1636 - 혼군의 전쟁, 병자호란」 이다. 병자호란을 떠나서 인조 대의 이야기는 명치 끝이 꽉 막히고, 고구마 오백만개는 먹은 만큼 답답해지지만 그래도 어찌하겠는가. 엄연히 우리의 역사이니. 그것도 아주 제대로 알아야하는 역사이니. 여러 포스팅에서 언급했듯, 나는 빛나는 역사도 중요하지만 어두운 역사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 말이다.



이 책은 ‘병자호란’이라는 줄기를 기준으로 인조라는 인물에 대해 세 부분으로 나뉘어 설명한다. 병자호란 전, 병자호란 중, 병자호란 후 이렇게 말이다. 오롯이 인조에 대한 설명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동아시아 정세까지 같이 포함해서. 그도 그럴 것이, 병자호란은 후금(청나라)과 조선이 치룬 전투이자 패배한 전투이다. 심지어 병자호란에 앞서, 똑같이 후금이 처들어온 정묘호란이 있었다. 또 정묘호란이 일어나기 약 30여년 전에는 일본과 7년간 싸워온(명나라도 참전한), 그 유명한 임진왜란(정유재란)이 있었다. 즉, 병자호란을 설명하기 위해선 당시 한/중/일 정세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 아, 뭐 -.. 인조대에선 일본의 정세는 대충 임진왜란 정도만 알면 되긴 하다.




이 책의 저자는 서문에 이런 글을 남겼다.


병자호란을 일으킨 주체가 청나라이므로 그 1차적 책임은 전쟁을 주도했던 청 태종, 홍타이지에게 돌려야 맞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앞뒤 정황을 살펴보면 인조를 정점으로 한 서인 정권에서 자초한 측면이 강하게 드러난다. 오늘날 일부 학자들 간에는 병자호란 발발의 책임이 청 태종에게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이 책은 전란의 책임이 인조에게 있다는 관점하게 기술하고 있다. 전란 발발의 책임을 인조에게 물은 것은 왕권 국가에서는 강토와 백성 모두가 국왕의 소유물로 여길 만큼 왕의 권한이 적대적이기 때문이다. p 008



나 역시도 병자호란 발발의 전적인 책임은 인조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서문부터 완전 공감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읽게되었달까 뭐랄까.



저자의 말대로 조선은 왕권 국가였으며, 강토와 백성 모두가 국왕의 소유물이었다. 즉 왕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강토와 백성이 평안하게 사느냐, 죽어나가느냐가 달려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인조는 어떤 왕이었을까? 대체 어떤 왕이었기에 인조는 무려 세 번이나 강토와 백성을 버리고 도망을 갔던걸까? 대체 어떤 왕이었기에 정묘호란, 병자호란 두번의 외침을 받았던걸까? 대체 어떤 왕이었기에 병자호란의 끝을 모욕적인 ‘삼배고구두례’로 끝냈던걸까? 대체 어떤 왕이었기에 자기 아들이자, 세자였던 소현세자를 비롯한 그의 일가를 죽음으로 몬 것일까? 



하.. 인조라는 인물이 참 다채로운 인물이다보니(^^),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수많은 질문들이 생성된다. 



나야 이곳저곳 인조와 관련된 유적지를 다녀왔고, 인조/병자호란과 관련된 역사책을 꽤 많이 읽었기에 내 나름대로 저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았다. 하지만 아직 답을 찾이 못한 사람들이 있다면, 이 역사책 「인조 1636」을 추천하고 싶다. 인조를 향한 수많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데, 이만큼 최적인 역사책이 또 있을까?




이 포스팅에선 이 책의 ‘병자호란 전 인조’ 챕터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써보려 한다.



우선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능양군이었을 적을 보자. 


일본과의 참혹한 7년 전쟁, 임진왜란 당시 재위했던 왕 선조. 그에게는 아들이 여럿 있었는데, 인조와 관련된 인물만 이야기하자면 광해군과 정원군이다. 광해군은 선조의 뒤를 이어 다음 왕이 되었다. 정원군은 인조의 부친이다. 뭐, 임진왜란 이야기나, 광해군의 외교나, 정원군의 조선 최고의 싸이코패스였다는 이야기는 생략하고. 광해군 재위 말, 당시 능양군이었던 인조는 반정을 일으켰고 그렇게 광해군 다음으로 조선의 왕이 되었다. 



인조 반정은 인조의 공보다는, 엄연히 신하들의 공이 월등히 컸다. 공신들도 어마어마했다. 근데 공신들끼리도 알력다툼이 꽤나 있었는데, 결과론적으론 그로 인에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이괄이 무서웠던 인조와 그 외 공신들은, 도성을 버리고 공주로 도망갔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 이 때는 임진/정유재란이 끝난지 약 40여년도 채 흐르지 않았던 시기다. 오롯이 나라 재건에 힘써야 했던 시기다. 하지만 인조를 비롯한 조선의 위정자들은 나라 재건은 개뿔, 권력 다툼으로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반면에 대륙에선 명나라가 쇠퇴하고, 누루하치의 후금이 세력을 확장하는 등 하루하루 상황이 급변하고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인한 상처가 채 아물지 못한 조선이었기에, 만약을 위해서라도 명과 후금 사이에서 적절한 외교를 펼쳐야했으나, 슬프게도 인조는 그럴 생각이 단 한개도 없었다. 무엇보다 인조는 전 왕이었던 광해군과 1부터 10까지 반대로 행동했으니 말이다(이건 작금의 정치와도 크게 다른게 없어서 더 없이 슬픈 모습). 



인조는 죽으나 사나 친명배금을 외쳤다. 그 결과 후금이 조선으로 쳐들어오니, 바로 정묘호란이다. 인조는 이 때, 강토와 백성을 버리고 두번째 도망을 간다.


적군이 의주를 함락하고 곧 안주에 이를 것이라는 치계가 조정에 당도한 것은 1월 17일 이었다. 치계를 접한 인조와 중신들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했다. 명과의 의리를 지키고 오랑캐 나라인 후금을 배척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반정을 일으킨 인조정권이었다. (…) 인조는 도체찰사로 임명한 이원익과 좌의정 신흠을 포함해서 26명의 배정관을 하여금 세자를 따르게 하고, 이원익의 후임으로는 부체찰사로 임명했던 김류를 승진 임명했다. 세자에게 분조를 맡긴 인조는 종묘의 신주와 종실 가족들을 이끌고 강화도 몽진을 결정했다. p 104



노량나루에서 배를 탄 인조의 몽진 행렬은 양천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이튿날 통진에 도착한 인조는 김포에 조성된 자신의 생모 ‘연주부부인’이 잠들어 있는 육경원을 참배하느라고 이틀을 머문다. 인조의 생모는 정묘호란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1626년 1월 14일에 사망했다. 이때 인조는 한성부의 방민 1,200명을 뽑아 산역꾼으로 보내고, 여기에 더하여 도성 백성들 중 귀천을 가리지 않고 매 호당 1인씩 차출한 여사군(상여꾼)만도 4,700명에 달했다.(…) 인조는 자신의 생모가 왕후를 지내지도 않았을뿐더러 몽진 중임에도 불구하고 참배를 강행했다. 그 후 후금과의 강화가 이루어지고 나서 귀환길에 인조는 또다시 육경원 참배를 강행했다. p 105



정말 대단한 왕 나셨다. 백성을 두번이나 버리면서도, 도망중에 자신의 모친 무덤은 굳이 찾아가서 참배하는 왕이라니. 생각해보면, 그렇다. 제대로 된 명분 따위 없이 왕이 된 인조다. 나라 꼴이 처참하든 말든 그저 전 정권이 추진하던 일은 무조건 반대로만 하던 인조다. 그런 인조가 어떻게든 쥐꼬리만큼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단 한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충,효가 중요한 주자학의 나라 조선에서 인조가 그나마 내보일 만한건 다름아닌 ‘효’.



뭐, 여튼 그렇게 인조는 강토와 백성을 내던지고 두번째 도망을 갔다. 백성들이야 죽든 말든, 자기 몸 하나 살기 위해서 말이다. 그럼 인조 밑에 있던 신하들은 어땠을까? 두 부류로 나뉘어졌다. 곧죽어도 명나라에 사대하며 오랑캐랑은 강화하지 않겠다는 척화파와, 허울뿐인 명분은 버리고 강화하자는 주화파로.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정묘호란 당시 척화파와 주화파, 인조가 탁상공론을 펼치고 있는 와중에도 백성들은 아주 참혹하게 유린되고 있었다.



최명길을 비롯한 몇몇 중신들은 강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강화를 반대하는 척화파들은 조선 땅을 침범하고 죄 없는 백성을 살해안 오랑캐들과 화해 운운하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일이라고 열을 올렸다. 반면에 강화를 찬성하는 주화파 측에서는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백성들은 어육이 되고 있는 마당에 허울뿐인 명분만 내세울 거냐며 맞받아쳤다. p 107



“지금 이후로 조선과 후금국 중 누구라도 맹약을 어긴다면 이와 같이 피와 골이 나오게 될 것”이라 낭독하고, 모든 참석자들이 술과 고기를 먹는 것으로써 대미를 장식했다. 1627년 3월 3일 조선과 후금 사이에 강화협상을 맺은 내용은 ‘조약’이라는 말 대신 ‘약조’라는 문구를 사용하는데, 그해가 정묘년이므로 ‘정묘약조’라 부른다. 4개 조항으로 된 정묘약조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첫째, 화약 후 후금군은 즉시 철병한다.

둘째, 후금군은 철병 후 다시 압록강을 넘지 말아야 한다.

셋째, 양국은 형제국으로 정하되, 후금이 형이 되고 조선이 아우가 된다.

넷째, 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되, 명나라와 적대하지 않는다. p 109



결국 조선은 후금에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애초에 질 전쟁이었다. 아니, 전 정권이었던 광해군 처럼 외교에 조금이나마 신경을 썼다면 애초에 일어나지도 않을 전쟁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후금은 생각보다 조선을 후하게 대접해주었다. 후금이 바라는건 조선과의 ‘형제국’, 그리고 ‘자신들과 명나라 싸움에 끼지 말것’ 이었으니까. 뭐, 이 외에도 후금이 요구한 건 자잘자잘하게 많긴 하지만 전쟁의 승자와 패자로 보았을 땐 그러한 요구는 어쩔수 없는 것들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정도면 과거 몽고가 고려를 대접한 것보다는 조금 낮지만, 그럼에도 꽤나 후한 대접이었다.



하지만...



인조는 “우리 조선은 200년 넘게 명을 부모지국으로 섬겨왔고, 임진왜란 때에는 재조지은까지 입었는데, 어떻게 부모의 나라를 치는데 협조하겠느냐”며 그들의 요구를 정면으로 거부했다. 당시 인조가 저들의 요구를 노골적으로 거부한 것은 그의 용기라기보다는 평소에 지녔던 숭명사상이 그 척도였다. 그러나 숭명 사상의 척도를 떠나 그 무렵 조선의 재정 상태는 파탄 직전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최악이었다. 이런 저런 사정이 겹처 조선에서는 날이 갈수록 배금 사상만 높아지게 되었으니, 그것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이었다. p 120



즉위식에 참석한 패륵들과 대신들은 물론 만주인, 한인, 몽골인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빠짐없이 새 황제에게 삼궤고구두를 행하고 만세를 불렀으나, 유독 조선의 춘신사 나덕헌과 이확만은 이를 거부했다. 이들의 머릿속에는 하늘 아래에는 오직 한 분의 황제, 즉 명의 숭정제만이 황제였을 뿐 그 외 다른 사람들이 황제를 칭하는 것은 하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라 여겼다. 나덕헌과 이확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던 청의 관료들은 격분했다. p 127



명은 망했다. 후금이 대륙의 주인이 되었고, 국호를 ‘청’으로 바꾸며 황제국이 되었다. 하지만 인조는 시종일관 숭명배금을 고수했다. 하지만 그동안 인조가 한 일 이라고는 자신의 생부 정원군을 추존왕으로, 생모 구씨를 추존왕비로 만드는 것이었다. 다시한번 언급하지만 정원군은 실록에도 언급될 만큼 많은 사람을 죽인, 싸이코패스중의 싸이코패스다.



아니, 다 떠나서 싸이코패스일 지언정 자신의 부친이니 효를 다하기 위해 왕으로 추존했다고 치자. 하지만 친명배금은 왜? 이쯤되면 무능의 끝판왕이라고밖에 할 수가 없다. 아무리 자기가 끌어내린 광해군과는 반대로 간다한들, 이미 명은 망했고, 대륙은 청나라의 손에 넘어갔다. 이쯤되면 명은 손절하고 청나라에 잘 보여야하는게 맞다. 더군다나 조선은 이미 정묘년에 청의 아우국이 되기로 약조하였던 전적이 있다. 그 약조만 잘 지켰어도, 중간을 갔을텐데 인조는 기어이 스스로 파국을 불러들였다.



인조는 3월 1일 팔도에 내린 ‘절화교서’를 통해 “오랑캐와의 관계가 파국에 이르러 조만간에 전쟁이 발생할지도 모르니, 충의로운 선비는 각기 있는 책략을 다하고 용감한 사람은 종군을 자원하여 다 함꼐 어려운 난국을 타개하고 나라의 은해에 보답하라”고 하달했다. 인조는 교서를 발표하고 나서 엿새가 지난 3월 7일 평안감사에게 문제의 ‘절화교서’를 금위영 군사 편에 보냈으나, 어이없게도 그 교서는 도중에 후금 군사에게 탈취당하고 만다.사실상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절화교서를 본 홍타이지는 그 즉시 여러 패륵과 대신들에게 절화교서를 보이고 이에 대한 대책 논의에 들어갔다. 이날 그 자리에 참석했던 패륵과 대신들 모두가 격앙된 어조로 “대군을 출정시켜 조선국을 멸하자!”고 했으나, 홍타이지는 “사신을 보내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인질로 데려오라 하여 그들이 응하면 그대로 덮어두겠으나, 만약 불응하면 그때 가서 조선 정벌을 논의하자“고 하며 한 호흡 늦춘다. p 135



인조 재위기는 임진왜란이 끝난지 40년이 채 안되어, 나라가 피폐했을 당시였다. 하지만 인조는 반정 이후 공신들의 책록을 제대로 하지 못해 벌어진 이괄의 난으로 인해 한번 백성을 버렸고, 끊임없는 친명배금 정책으로 인해 정묘호란이 일어나 두번 백성을 버렸다. 그 와중에 인조가 한 일이라곤 전 정권인 광해군과의 반대로 반대로, 오직 반대로 가는 것이었으며, 자신의 부친과 모친의 추존이었다. 거기다 자신의 첫번째 왕비였던 인열왕후가 죽자, 그 장례식도 아주 호화롭게 치렀다. 그리고 대대적으로 청나라와 ‘절교’한다는 교서를 반포했다.




여기까지가 병자호란 전 인조의 행보다. 이 이후의 인조의 행보에 대해서는 이 책을 읽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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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직장인 열전 - 조선의 위인들이 들려주는 직장 생존기
신동욱 지음 / 국민출판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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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어른의 한자력」 이라는 책의 서평을 쓴 적이 있다. 그 책을 읽으려고 펼쳤는데, 문득 눈에 들어온 저자의 이름. 어딘가 익숙한 이름인데? 싶었기에, 바로 내 책장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발견했다. 조선사 역사책이 꽂혀있는 책장 한켠에서. 그렇다. 나는 이미 이 저자가 쓴 역사책을 구입한적이 있었던 거다.  그 역사책은 바로 「조선 직장인 열전」. 물론 읽지는 못했었지만. 본디 책이란.. 사는 속도와 읽는 속도가 엇박자를 일으키니까^_T. 


뭐, 이유야 어찌돼었든! 이제서야 「조선 직장인 열전」을 읽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역사적 인물들은 나라의 녹을 받는 직장인(일종의 공무원) 이었다! 오, 놀라워라. 매일 그들의 공/과를 따지고, 그들의 행적에 대해서만 보았지, 직장인으로서의 그들을 생각해 본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는 사실에 소오름. 그렇게 역사적 인물들을 ‘직장인’ 으로써 마주하는 순간, 왠지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존경심은 저 멀리 날라가고 측은함이 저절로 샘솟았다. 그도 그럴것이, 현대의 직장인들은 말 한마디 잘못했다고 (진짜!)모가지가 날라가지는 않지만, 조선의 직장인들은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진짜!!) 모가지가 날라갔으니까. 뿐만이랴, 삼대가 멸문을 당하는 경우까지도 왕왕 있었다. 정말 조선시대의 직장인들은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살얼음판을 걷는 직장생활을 해왔던 것이다. 



이야, 다시 생각해도 소름이네. 만약 당시 CEO가 연산군이었으면? 오우. 정말 수백의 직장인 모가지가 날라가는 걸 눈 앞에서 보거나, 혹은 내 모가지가 날라가거나. 반대로 CEO가 세종이었다면? 거기다 만약 일잘러였다면? 퇴계 이황처럼 늙어 죽을 때까지 노동착취를 당했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내가 너무 뛰어난 인재였다면? 주변 동료들의 모함으로 아주 참혹한 정리해고를 당했을지도 모른다. 주식회사 조선의 직장생활은 정말 모 아니면 도. 차라리 현대의 직장인이 백번 낫다. 



1n년간 직장에서 온갖 상황을 마주하며, 이제는 더 마주할 인간 유형(?)도 없고, 그 어떤 상황에 마주해도 당황하지 않을거라 자부한 나였건만, 그건 나의 오만이었고 오판이었다. 지금보다 더 험난했던 직장생활을 한 그들에게서, 다시 한번 배우고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복직해야지!  



이 책에는 여러 직장인(?)을 소개한다. 정도전이나 황희, 김육, 이황 등 대체로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을 법한 역사적 인물이자 직장인(ㅋㅋㅋ)들이며, 우리가 그들에게서 무언가를 배울만한 점이 있는 직장인들이다. 반대로 홍국영이나 허균처럼 반면교사 삼을 비운의 직장인도 소개한다. 난 이 책에 실린 여러 직장인 중, 주식회사 조선의 최고의 직장인과 반면교사 삼아야할 직장인을 단 한 명씩 선택하라고 한다면 아래와 같이 선택하고 싶다.




눈치를 잘 보는 것도 실력이다. 하륜

- 실력과 처세 능력을 동시에 갖추어 누구보다 조직 생활을 잘할 수 있는 인재라고 자부합니다


제 1,2차 왕자의 난부터 시작하여 태종의 치하 기간은 왕권에 위협이 되는 그 어떤 인물도 남겨놓지 않았던 숙청의 피바람이 불던 시기다. 그런 엄혹한 시대 속에서도 하륜은 70세 일기로 천세를 누리다 세상을 떠났다. 어떤 처세 비법이 있었기에 정리해고 한 번 당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p 097


하륜은 향리집안 출신으로 명망가 출신은 아니었으나, 하륜이 과거급제 했을 당시 그를 눈 여겨 본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권문세족이자, 당대 권력가였던 이인임의 형, 이인복. 이인복은 그의 동생인 이인미의 딸과 하륜을 결혼시킨다. 결과적으로 하륜은 이인임 가문과 사돈이 되었다. 그렇다고 하륜이 권문세족의 편으로만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하륜은 이색의 제자였기에, 당연히 또 다른 이색의 제자들인 신진사대부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정몽주와 정도전.



여말선초, 우리가 드라마로도 봐왔듯 공민왕/우왕/창왕에 이어 조선이 개국되고 이성계가 조선 초대왕이 되었다. 당대 권력가였던 이인임이 쫓겨나면서 하륜도 권력의 뒷편으로 밀려났지만, 결과적으로 그 덕택에 그는 자신의 몸을 보전할 수 있었다. 이성계가 쓰러졌을 당시 정몽주가 잠시 권력을 잡았을 때나, 이방원의 선죽교 사건(?)이 있었을 때나, 조선 건국 후 정도전의 숙청의 칼날등에서 말이다. 



하지만 하륜은 똑똑히 보았다. 동문이었던 정도전이, 자신의 스승과 또 다른 동문들을 어떻게 숙청해나가는지를.


하륜이 정도전과 제대로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바로 ‘표전문 사건’이다. 명나라 황제 주원장이 조선의 외교문서가 불손하다며 심각한 외교 갈등을 야기한 것이다. 명나라에서는 이 문제의 발단을 정도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그의 압송과 해명을 요구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 그럼에도 정도전은 움직이지 않았다. 도의적으로라도 직접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의지를 보이기는 커녕 전혀 관련도 없는 하륜을 사신으로 보내버리고 만다. 정도전을 제거할 기회로 본 하륜이 당사자인 정도전이 직접 가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정도전에게 오히려 보복을 당한 셈이었지만 하륜은 명나라 황제를 훌륭히 설득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왔다. 이 사건으로 하륜의 명성은 올라간 반면 정도전에 대한 비난은 더욱 커질 수 밖에 없었다. p 040



정도전이라는 못된 선배를 둔 하륜은 어떻게 대처했을까? 처음에는 정도전에 맞서 투쟁하는 방식을 택했다. 하지만 태조 이성계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는 정도전으로부터 돌려 받은 건 이전보다 더 강해진 견제였다. (…) 사실 견제를 받는다는 것은 내가 그만큼 실력이 있다는 반증이다. 그 선배는 실력 있는 내가 자신을 앞서갈까 두려운 것이다. 일단 그것으로 위안을 얻자. 그리고 선배에 맞서 투쟁하기보다는 묵묵히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이자. 분명히 기회는 올 것이다. 마치 하륜이 새로운 상사 이방원을 만나게 된 것처럼 말이다. p 041



정도전과 맞서는 족족 실패한 하륜은 마음을 바꿔 먹었다. 다름아닌,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정도전이 그랬던 것 처럼. 그렇게 하륜은, 정도전이 걸었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방원과 손을 잡았고, 때를 기다렸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한다. 바로 하륜이 이방원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다. 이방원이 누구인가? 가장 존경하던 선배, 그리고 고려 사수파로서 정치적 입장을 함께 했던 정몽주를 죽인 장본인이 아닌가. (…) 이방원을 군주로 모신다는 것은 변절의 끝판왕이라 불릴만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손을 잡았다. 공동의 적 정도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p 044



하륜은 누구와도 손을 잡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신진사대부였음에도 권문세족인 이인임의 후광으로 출셋길을 달렸다. 정몽주와 손을 자복 고려 사수파에 섰다가 고려가 멸망하자 곧 조선의 신하가 된다. 그리고 존경하는 선배 정몽주를 죽인 이방원과 손을 잡는다. 정도전이 좀 더 포용력을 가지고 다른 이들의 의견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인물이었다면 아마 하륜은 정도전과도 손을 잡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만 옳고 다른 사람들은 다 배제해 버리는 정도전의 성격상 그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대신 하륜은 이해관계가 일치한 이방원과 손을 잡았고, 마침내 임금 다음가는 실권자가 된다. p 045



여기까지만 봐도 하륜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선배이자 정적인 정도전이 그러했듯, 하륜도 기다렸고 성공했다. 하지만 하륜이 선택한 남자는 이방원이다. 이성계는 정도전을 무한 지지했지만, 이방원은 달랐다. 이방원은 선죽교 사건과 왕자의 난에서도 보았듯, 잔혹한 군주이기도 했다. 왕위에 오른 뒤에는 자기에게(또는 후대의 왕에게) 걸림돌이 될만한 사람이라면 최측근은 물론, 처가, 사돈댁을 거의 몰살 시켰다. 하지만 그런 피바람 속에서도 하륜은 아주 멀쩡하게 살아남았다.



하륜의 직장 생명력을 이해하는 데에는 그가 태종에게 생명의 은인이었던 점도, 정치적으로 많은 업적을 남긴 훌륭한 신하였따는 점도 중요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상사의 의중을 눈치껏 이해하면서도 절대 선을 넘지 않는 탁월한 처세 덕분이었다. p 048



하륜은 태종의 언어를 정확히 이해한 신하였다. 태종은 “왕위를 넘길게”라고 말했지만 사실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왕위는 털끝만큼도 건드리지마” 였다. 하륜은 신하의 본분을 지킨다는 마음이 있었기에 그 말의 진의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고 이숙번과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따. 이것이야말로 하륜이 서릿발 같은 태종의 치세에서도 오랫동안 평탄하게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인 셈이다. p 051



상사가 업무에 대해 정확히 지시하고, 언제까지 끝내라는 명확한 가이드라인도 함께 주면 실무자 입장에서는 정말 일하기 편하다. 그렇지만 상사의 스타일에 따라 그렇지 않은 경우도 허다하다. 상사가 “이거 좀 한번 알아봐요”라고 흘리듯 이야기했고 부하직원은 별것 아닌 것으로 지레 짐작하고 뭉개버렸다고 하자. 그런데 며칠 후 갑자기 상사가 그 건에 대해 다시 물어본다면 그 앞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서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상사가 아무리 대충 흘러가듯 이야기하더라도 일단 지시하는 것으로 해석이 된다면 즉시 나의 주요 업무로 삼아야 한다. 결국 이것은 ‘직장인의 눈치 보기 능력’과 매우 관련이 높다. p 052




“인생은 하륜처럼” 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무엇보다 한동안은 내 인생의 모티브가 “인생은 하륜처럼” 이기도 했고. 



따지고 보면 한 나라를 무너뜨리고 새 나라를 세운, 킹메이커 정도전도 대단한 직장인이다. 심지어 정도전이 한 많은 것들이 조선 오백년을 만들어냈다고 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의 말년은 너무 뻣뻣했고, 성급했다. 때를 기다릴 줄 알았던 정도전이 사라지는 순간, 정도전은 수많은 적을 만들어냈고, 그 결과는 참혹한(?) 정리해고. 



하륜은 조선이라는 직장에서 정도전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정도전이 그랬듯이 ‘미리 준비하며, 때를 기다릴줄 아는’ 것을 배웠고, 그대로 실천했다. 뿐만 아니라, 전 직장인 고려에서 체득한 처세술을, 조선이라는 직장에서 십분 활용하여 곳곳에 아군을 만들었다. 거기다 까다로운 상사인 이방원의 언어의 참 뜻도 헤아릴 줄 알았다. 그 결과 하륜은 모든 직장인이 바라는 평화롭고 안정적인 삶과 정년퇴임을 얻었다. 




평판관리가 중요한 이유. 허균

스스로 몰락을 자초하다.


홍길동전은 허균이 쓴 고전소설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 최초의 한글소설이라는 점도 파격적이지만 당시 조선사회의 모순을 과감하게 비판한 최초의 사회소설이었다는 점에서 허균은 시대를 앞서간 천재로 불릴 만하다.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난 엄친아였지만, 결국 역적죄로 사형당하고 만 허균. 무엇이 그를 지독한 불운으로 몰고 갔을까? p 106



홍길동의 저자 허균. 그는 조선 선조 때 문신인 허엽의 아들이자, 허난설헌(허초희)의 동생이다. 뿐만 아니라 아비를 비롯하여 형인 허성을 비롯하여 누이인 허난설헌까지 줄줄이, 그의 집안은 아비고 자식이고 문장가로써 이름을 날렸다. 이 말은 곧, 허균은 마음만 먹으면 나는 새도 훨훨 떨어뜨릴 수 있는 자리까지도 쉽게 올라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허균은 그러지 못했다. 외려 주식회사 조선에서 참혹하게 정리해고를 당했다(여기에서 말하는 정리해고는 말그대로 진짜 모가지 댕강^^). 그가 참혹하게 정리해고를 당한 이유야, 모두가 다 알듯 ‘역모죄’라는 누명을 썼기 때문이다. 심지어 허균과 같이 일하던 수많은 사람들도 누명이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하지만 그 누구도 허균을 도와주지 않았다. 



허균은 과거에 급제하고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 기사관 등의 관직을 거쳐 30세 때 황해도 도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한양 기생을 데려와 같이 살고 무뢰배들과 어울리며 청탁을 일삼는다는 이유 등으로 1년도 되지 않아 파직된다. 또한 어머니가 별세했음에도 찾아가 보지 않고, 유교 예법에 따라 삼년상을 치르기는 커녕 상중에도 고기를 먹어 세간의 비난을 샀다. 당시에는 이단으로 여겨지던 불교에 관심을 가진 것도 그의 평판을 떨어트리는 요인이 되었다. p 107



또 광해군 2년 때에는 허균이 시험관으로 참여한 과거 시험에서 일어난 부정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과거 합격자의 상당수가 시험관의 자제, 조카사위, 동생, 사돈들이었는데 이 중에 허균의 조카와 조카사위도 끼여 있었다. 조카는 정처 없이 떠도는 승려였고 조카사위는 이미 불합격 판정을 받았음에도 기어이 다시 합격자 명단에 끼워 넣었다. p 107



무엇보다 허균은 스스로 많은 적을 만들었다. 자신보다 상관이던 심희수를 다른 사람들 앞에서 노골적으로 망신 주어 그의 원한을 샀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그는 스스로 고립되는 것을 자처했고, 결국 역모자로 몰렸을 때 누구도 그를 위해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p 108



기자헌은 원래 허균과 정치적 동지였고, 그 아들 기준격은 허균의 제자였으나 허균의 공격으로 아버지가 유배를 가자 격노한 기준격은 허균이 평소 역모를 꾸몄다는 탄핵을 한다. 거기에 허균과 가까이 지냈던 곽영도 그를 격렬히 비난하는 상소를 올리고, 언론기관인 사간원과 사헌부에서도 동일한 내용의 상소를 올린다. 허균의 평한이 얼마나 최악에 도달했는지 짐작이 된다. p 110



나라의 녹을 받기 시작한 허균은 일반적인 직장인과는 조금 다른 생활을 했다. 보통의 직장인이라면 본인의 이미지 메이킹에 신경을 쓸법도 한데, 허균은 달랐다. 이미지 메이킹은 커녕, 자기 자신의 부정적인 평판을 무한 생산했다. 심지어 몸소 나서서 적군을 대량 생산하기까지! 자기의 상사를 공격하는 건 기본이고, 자기 동료와 동료의 부친까지도 공격했다. 본인 스스로 아군까지 내치는 상황을 만든 것이다. 거기에 더해, 간신 중의 간신인 이이첨의 손을 잡기까지 했다. 



이이첨과 손을 잡은 후에 허균은 반대 세력 제거에 앞장섰다. 본인 스스로 아군도 잘라낸 허균이다보니, 반대세력 제거에 앞장 설만도 하다. 이후 허균에게 역모죄 누명이 쓰여졌다. 손을 잡았던 이이첨 마저도, 자신이 저지른 잘못까지 허균에게 언지며, 허균을 손절했다. 한마디로 토사구팽. 그 누구도 허균을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다.



이쯤되면 비교되는 인물이 있으니 바로 조선 초, 청백리로 이름난 맹사성이다. 맹사성도 정치적 위기에 몰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수많은 동료들이 앞다투어, 맹사성을 구하겠다고 나섰다. 자칫 잘못하면 본인들까지 연루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말이다. 맹사성은 그 정도로 만인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고, 만인의 존경을 받을만한 사람이었다. 내미는 발길 족족 적을 만들어내는 허균과는 달리.



평판이란 조직 내에서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가의 문제다.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 써야 하는 것은 사실 별로 유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나에 대한 평가가 내려질 때는 업무 성과와 더불어 평판이 함께 반영된다. 내 노력에 대한 보상, 즉 월급과도 직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평판 관리는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더 나아가 나의 직장 생활 수명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평판이다. p 111



무엇보다 좋은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람에 대한 예의가 중요하다. 부하 직원이라고 함부로 대하거나 무시하는 행동은 반드시 주의해야 한다. 물론 부하 직원뿐만 아니라 상사나 동료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는 것도 당연히 중요하다. 협력업체나 거래처 직원에게도 주의해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말자. p 113



만약 허균이 삐딱선을 타지않고 맹사성 처럼, 동료들을 존중할 줄 알았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허균의 인생은 적어도, ‘누명’을 써서 참혹하게 정리해고 당한채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직장은 정글이다. 절대로 자기 혼자 살아남지 못한다. 좋든 싫든 웃어야하고, 토악질나는 사내정치도 어느정도 견뎌야 한다. 누군가가 나를 공격한다면, 그 자리에서 날카롭게 받아치기 보다는 유연하게 흘러 넘기는 법도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누군가 비판을 한다면, 귀담아 듣고, 비판받은 행동에 대해 고치는 자세도 중요하다. 



이제 평생 직장이라는 말은 옛말이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장 내에서 필요한 모습은 과거나 현재나 달라지지 않았다. 평생을 다닐 직장이든, 2~3년만 다닐 직장이든, 직장에 몸을 담고 있는 동안에는 적을 만들지 말고, 누구나가 존중해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퇴사를 하는 제일 큰 이유는 바로 ‘사람’ 이니까. 그러기 위해선 본인 역시도 동료들을 존중해주는 것은 기본이다. 두번째가 바로 성과. 성과에 따라 보상이 귀결되는 사회이니, 이 만큼 중요한게 또 있을까. 뭐... 동료들의 존중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 사람은 일잘러에, 평판도 엄청 좋은 사람이라는 말이긴 하다.



인생을 하륜 처럼 살 것인지, 허균 처럼 살 것인지, 선택은 당신의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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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의 신사를 찾아서 - 일본·류큐·제주도 제주학연구센터 제주학총서 27
오카야 고지 지음, 이예안.이윤주 옮김 / 제이앤씨 / 2017년 11월
평점 :
절판


나는 역사에 관심이 많은 만큼, 민속학에도 꽤나 흥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외국 출신 신神을 추종하는, 그 중에서도 유독 개신교로 점철된 우리나라를 보고 있노라면 대체 무엇이 문제이기에 우리 고유의 민속신앙은 이토록이나 처참하게 무너졌을까 싶기도 했다. 그래도 어렸을 적에는 시골에 가면 당산나무가 있었고, 서낭당도 있었고, 가족과 마을을 지켜주던 가택신도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 흔적조차도 찾아보기가 힘들다. 이제 한반도 내에서는 우리 고유의 민속신앙을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 수준이다. 하지만 나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지, 많은 사람들은 우리 고유의 신앙에 살아숨셨던 신들은 잊은채 외국 신에 열광한다. 외국 출신 신을 받드는 종교도 종교거니와, 그리스/로마/북유럽 등의 외국신화에도 열광한다. 그렇게 내가 발 딛고 사는 땅에 살았을, 우리를 지켜주었을, 우리만의 신들은 그렇게 사라졌다. 아니,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아직 제주도에는 신이 남아있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그래서 나는 제주도 신화와 관련된 책도 여러 권 읽어보았고, 제주 여행을 다닐 때는 제주의 신화와 관련된 곳을 일부러 찾아다니기도 했다. 본토에는 찾기 힘든 민속신앙을, 제주도에서는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난 제주도만큼은 아직 신화의 나라이며, 그네들의 전통을 잘 보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왠걸. 내가 본 제주도의 신들도, 이미 수 많은 신이 사라진 뒤였다. 그 사실을 이 책을 읽고 나서야 알았다. 사람들 눈에 띄지않게 꼭꼭 숨어있는, 본토처럼 난개발에 사라지고 있는 제주도의 ‘당’을 보고나서야 알았다. 뭐, 이 책의 주제는 사라지는 전통신앙에 대한 것은 아니니, 이 이야기는 일단 여기서 멈추고.




이 책은 일본인 저자가 제주도, 한반도 서남해안, 오키나와, 일본 본토의 신사를 답사하며 연구한 결과물이다. 제목은 「원시의 신사를 찾아서」. 



한줄로 요약하자면 “일본 본토의 신사의 원형은 오키나와의 ‘우타키’로, 그럼 이 우타키는 어디서 온 것인고 하니, 제주도의 ‘당’”이다. 물론 이렇게 한줄로 요약하기엔 그 내용이 꽤나 방대하긴 하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한일고대사를 너무나 좋아할 뿐더러, 관련 역사책을 비롯하여 일본에 갔다 하면 도래인의 흔적을 찾으로 여기저기 다니던 나다. 그런 나에게 이 책은 그야말로 보물과도 같은 책이었다. 아니, 이 책을 왜 이제서야 읽었지? 산지는 꽤 되었는데. 육아하느라 시간이 없다고 미루고 미루고 계속 미루다가 이제서야 읽게 되었다는게 후회될 정도로 너무 만족스러운 책이었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을 좀 길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1. 일본의 신사의 원형을 오키나와의 우타키로 보고 있는데, 이 우타키의 원형은 제주도의 당으로 추정된다. 우타키나 당은 성스러운 숲, 여성사제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2. 제주도의 당 문화는 바다건너 서, 남해안에도 퍼져있을 것으로 보이나, 제주도와는 달리 본토는 미신타파 등 토종신앙 박해등으로 당문화가 급속도로 쇠퇴하여 지금은 흔적을 찾기 어려운 곳이 많다.


3. 그렇다면 오키나와의 우타키 문화만 제주도의 당 문화가 비슷한 것인가? 아니다. 제주도와 바다를 사이에 둔 오키나와 뿐만 아니라 일본 본토 규슈 해안가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적어도 고대에는 쿠루시오 해류가 흐르는 해안가를 주변으로 동일한 문화권으로 묶여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뿐만 아니라 제주도의 풍습 역시도 오키나와나 쿠루시오 해류가 흐르는 해안가 마을과 비슷하다. 즉 제주도인과 오키나와인, 그외 큐슈 해안가 사람들의 교류가 빈번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4. 고대의 일본 신사는 오키나와 우타키처럼 신사 건물이 없었다. 즉 성스러운 ‘숲’이나 나무, 바위 등을 모셨다. 신사에 대한 제일 오래된 기록은 한반도 도래인이, 자국의 신을 모시기 위해 세운 신사에서 시작된다. 


5. 일본 내에 있는 신사에서 출토된 제일 오래된 물품은 야요이 토기인데, 야요이 문화는 한반도 도래인의 선진문물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사에 대한 최초의 기록과 그외 수많은 도래인이 세운 신사의 기록을 볼 때, 일본 내의 많은 신사의 성립 과정에서 한반도 도래인은 어떠한 경로로든 개입이 되어 있을 것이다.


6. 제주도의 당과 오키나와의 우타키는 기본적으로 ‘성스러운 숲’, 즉 신수신앙에 대한 인식이 깔려 있는데, 신수신앙에 대한 시작은 아무래도 신라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그 근거로 『삼국사기』에는 신라의 성스러운 숲에 대한 기사가 많이 실려있다. 또한 당시 고대 일본의 권력은 신라계 도래인이 쥐고 있었다.


7. 제주도의 당(본토 성황당 등)과 오키나와의 우타키(본토 신사)는 그 시작은 비슷했으나, 결과는 너무나 달랐다. 일본의 신사와 오키나와의 우타키는 일본 관광책자에는 무조건 실려있는 관광 명소가 되었지만, 제주도의 당이나 본토의 성황당등은 많은 수가 사라졌거나, 있어도 유명무실하며, 실제로 있는지 조차 모르는 경우가 대다수다. 일본은 기본적으로 자국의 문화를 중요시하였고, 타종교를 들여왔어도 박해를 하지 않았으나, 한반도는 달랐다. 고려 불교 오백년, 조선 유교 오백년, 현대의 새마을운동등을 거쳐 한반도 토종 민속문화는 거의 절멸하였다.


8. 한국의 토종신앙과 일본의 신사 사이에는 분명한 연결고리가 있으며, 일본에는 명확하게 검증된 고대 도래인이 세운 신사들이 많이 남아있지만 이에 대한 연구가 많지 않은게 현실이다. 제일 큰 이유는 아무래도 한국의 토종신앙을 미신으로 치부하며 타파한 유교문화이지 않을까. 그러다보니 신사가 일본 고유의 문화인 것마냥 알려지게 되었지만, 실상 일본 신사의 시작은 한반도다.




정말 이 책을 읽은 나를 너무 칭찬한다. 특히 한일고대사에 매우 큰 관심을 갖고 있는 나에게는 이만한 책이 또 어디있을까? 정말 이 책에 실려있는 모든 내용이 흠잡을 데가 없다. 정말 역사책은 ‘ㅇㅇ총서’ 정도는 되야 흠잡을 데 없고, 번역에 대한 가독성도 높아서 읽기도 좋다. 



나 역시도 일본의 신사의 시작은 고대 한반도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이렇게 생각한 근거를 들자면, 일본에 갈 때마다 한반도 도래인이 세운 신사와 사찰, 도래인들이 꾸려나간 지역들을 찾아다니면서 보고 들은것과, 한일고대사를 공부하면 할수록 보이는 고대 일본의 권력 중심세력이 한반도 도래인들이었다는 점이랄까? 다만 이것만으로는 그저 나만의 ‘카더라’에 지나지 않기에, 그냥 입 밖으로는 내지않고 혼자만 생각하던 것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내 이런 생각들이 그저 헛된 생각이 아니었다니. 흑. 이런 연구를 하는 연구자가 있었을 줄이야, 그것도 바로 일본에! 요즘의 일본은 자국에 있는 신사와 사찰에서 도래인의 흔적을 지우고, 도래인의 흔적이 남은 지명조차도 바꾸었기에, 일본에서는 이런 연구를 하는 사람이 별로 없을 거라 생각했다. 만약 이런 연구를 한다면 극우파에 협박에 시달리지않을까 싶기도 하고 말이다. 뭐, 여기까지 각설하고!



한반도 도래인에 관해선 대충 규슈는 가야/신라, 관서는 백제/신라, 관동은 고구려 도래인 계열이 주를 이루었다고 알고는 있었다. 그 도래인들이 각 지방에 설립한 신사나 사찰에 대해서도 유래나 뭐 이런 건 대충은 알고 있었는데, 이 책 덕분에 대충 알고있던 사실을 제대로 알게 된 부분이 꽤 많았다. 특히 이세신궁과 신라의 연관성은 단 한번도 생각해본적이 없었던 터라, 와. 생각해보면 신라나 이세신궁에 대한 각각의 내용은 다 알고 있던건데, 왜 난 이걸 연관짓지 못했을까 싶기도 하고. 이래서 사람은 꾸준히 계속 배워야 하나보다.



이 책의 목차는 아래와 같이 총 10개의 챕터로 되어 있다.


-제주도 당과의 만남

-한국 다도해의 당

-제주도 당과 제

-오키나와의 우타키

-제주도와 류큐

-신사와 한반도

-신사를 둘러싼 몇 가지 문제1 (조몬, 야요이와 신사)

-신사를 둘러싼 몇 가지 문제2 (신사는 무덤인가)

-성스러운 숲의 계보

-신사, 우타키, 당



이 챕터중 일부를, 특히 내가 기억하고 공부하고자 하는 부분을 아래에 발췌했다.




▶ 제주도 당과의 만남


당은 결코 제주도만의 것이 아니다. 적어도 과거에는 신사나 우타키와 마찬가지로 한반도 어느 마을에나 있던 것 같다. 하지만 유교를 국료로 하는 조선시대 500년 동안 크게 변질되었고, 특히 최근에는 근대화(예를들어 새마을운동)나 기독교의 보급으로 한국 본토에서는 급속히 사라지고 있는 것 같다. p 012



내가 본 최초의 당은 잊을 수 없다. 그곳은 서귀포시 북쪽 교외 호근동이라는 마을의 당으로 감귤밭 속 작은 숲이었다. 『제주도 고대문화의 수수께끼』에 실려있는 사진과 똑같은, 아니 우타키의 숲 그대로였다. (…) 『니혼쇼키』와 『고지키』에 나오는 스이닌텐노의 명을 받아, 다지마모리가 바다 저편 이상향인 도코요노쿠니에 구하러 갔다는 도키지쿠노가쿠노미는 제주도의 감귤이라는 설이 있을 정도다. 다지마모리는 신라에서 건너간 아메노히보코의 후예로 알려진 인물이며, 게다가 감귤이 자라는 곳은 한반도 안에서 오직 제주도뿐이라고 하니 이설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p 018



당은 신사나 우타키와 비교해서 일반적으로 청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청결하지 않다. 처음에는 신앙의 쇠퇴가 그 이유로 보였지만 한마디로는 정리할 수 없는 것 같다. 제를 지낼 때 이외에는 함부로 출입해서는 안된다는 일종의 금기가 있고, 또한 사람들은 일단 신에게 바친 제물은 쉽게 가져가거나 버려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러한 데에서 난잡함의 일부가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p 021



길에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던 네, 다섯 명의 할머니들에게 물으니 이 마을의 당은 해안가에 있었는데 새마을운동으로 파괴되었다고 했다. 새마을이란 새로운 마을을 의미하며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 지시에 의해 시작되었다. 농어촌 구습을 타파하고 시대에 걸맞은 마을 만들기를 목표로 하는 운동으로 당 신앙 등은 미신으로 규정하여 배제 대상이 되었다. p 026



 



▶ 한국 다도해의 당


한산도에 가는 페리안에서 일본어를 잘하는 제승당 이사장과 함께 있었기에 당의 주소를 물어보았는데 “없어요” 라고 단번에 부정을 하는 바람에 나는 섬을 돌 의욕을 잃어 제승당만 보고 다음 페리를 타게 되었다. 연화도에서도, 욕지도에서도 내 입에서 나오는 당이나 신당이라는 말에 주민들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단지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 그리고 작은 마을에 개신교, 천주교를 포함해 네 개나 되는 교회가 있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최근 한국에서 기독교, 특히 개신교의 보급은 우리 일본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으며, 예를 들어 상점 하나 없는 작은 섬에도 지붕에 십자가가 반짝이는 교회만은 있다고 할 정도이다. p 039



나는 소매물도에서 처음으로 당, 정확히 말하면 당의 흔적을 보았다. (…) 그러자 주인은 나를 가게 밖으로 데려가더니 왼쪽 작은 산 정상 가까이의 산등성이에 우거져 있는 벌목된 것 같은 작은 숲을 가리키며 “옛날에 저곳에 당이 있어 제를 지냈었는데, 지금은 아무도 가지 않게 되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곳까지 올라가 보았따. 잡목이 우거진 숲 속에는 거대한 바위가 있었고, 그 앞에는 희미하지만 제사를 지냈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사라진 당이었다. p 040



한려수도의 섬에서는 제주도와 비교해서 당 신앙의 자취가 매우 옅고, 당의 형태도, 그 제祭도, 제주도와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p 044



(신안 지도) 당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 아직 초목의 마른 빛깔이 남아있는 밭 속에 있었는데 주위의 평범한 풍경 속에 있어 유달이 눈에 띄는 숲이었다. (…) 신목이라고 생각되는 숲 중심에 솟아있는 커다란 팽나무 밑가지에 금줄이 쳐져있을 뿐이었다. 당은 보편적으로 마을의 뒷산과 가까운 산, 작은 산이나 조금 높은 곳에 입지하는데, 내가 처음으로 본 당인 제주도 호근동의 당과 이곳처럼 밭 가운데 있는 경우는 비교적 적다. 이런 당을 들당이라고 한다. 당이 상당과 하당으로 나누어져 있는 경우 신사의 야마미야와 사토미야과 같이 상당은 산이다 다른 높은 곳에 있고 하당은 마을이나 그 주변에 있는데, 대천리에서는 이 들당이 상당이고 마을안에 하당이 있다. p 048



비금도에서는 섬 남서부에 있는 내촌리의 당을 보러갔다. 마을 뒷산 중턱에 제를 지낼 때 제물 등을 준비하는 낡은 오두막이 있고, 그곳에서 40~50m 정도 더 올라간 곳에 돌담으로 둘러싸인 한 구역이 있었다. 그 안에 높이 1m정도의 돌로 만들어진 신기한 신상이 평평한 자연석 위에 모셔지고 있었다. 이목구비와 가슴 앞에 모은 두 손만을 매우 단순한 저부조로 새긴 반신상으로 어딘가 오리엔트나 이집트의 신상을 떠올리게 했다. 『다도해의 당제』에 의하면 먼 옜날 한 학자가 딸인 소녀를 데리고 이 마을에 유배되었다. 아버지는 어느 날 바다에 고기를 잡으러 가서 익사하고 딸은 아버지의 죽음을 모른 채 산 정상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는 나날을 보내는 사이 죽게 된다. 머지않아 마을 사람의 꿈에 신이 나타나 딸의 영혼을 모시라고 고했기에 모시게 된 것이 이 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소녀상인 것이다. p 051



내가 이 섬을 방문하고자 한 이유는 외나로도의 신금리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상록수 숲이 있어, 그 속에 마신馬神을 모시는 당이 있다는 것을 『남해안』이라는 한반도 남해안 가이드북을 보고 알았기 때문이다. 그 후에 최덕원씨의 「나로도의 당제」라는 글도 접하게 되었다. 최씨에 의하면 1986년 조사 시점에서 나로도 30개 마을 중 16개 마을에서 당제를 행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재작년 내가 돌아본 몇 개의 당 중에 2곳은 폐당 혹은 제를 지내지 않아 현재 당으로써 남아있는 마을은 드물 것이다. p 055



남해와 서해 섬들의 당을 돌아보고 깊이 느낀 점은 제주도 당의 분포가 높다는 점, 대부분이 당사를 두지 않는 작은 숲으로 되어 있다는 점, 여성이 제사를 주관한다는 점으로 다른 섬들의 당과 비교해서 상당히 이색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질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제주도의 당과 남해, 서해 섬들의 당, 특히 신안지역 섬들의 당 사이에는 상충하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차이점도 두드러진다. 높은 분포를 보인다는 점에 대해 말한다면, 옛날에는 다른 섬들 즉 어느 섬의 어느 마을에서도 한 곳 이상의 당이 있었다고 생각되며 실제로 그 흔적이 남아있다. 하지만 왜 섬에서 당이 이정도로 소멸되었고, 제주도에만 아직도 많이 남아있으며 게다가 그 신앙이 계승되고 있는 것일까. p 059



 


▶ 제주도 당과 제


일본에서는 ‘민간신앙과 그들의 국가 종교가 대부분 직결’되어 있는 반면, 한국에서는 ‘민간신앙이라고 하면 바로 반사적으로 미신과 타파라는 말이 튀어나온다’며 장주근씨는 약간 노기 서린 어투로 말한다(『한국의 향토신앙』). 실제로 일본의 오랜 역사 속에서 신사가 국가로부터 박해를 받은 사례는 거의 발견되지 않고 우타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쓰마번의 류큐정벌 이후, 번의 직할령이 된 아마미의 섬에서 우타키와 같은 신산과 그 신앙이 탄압을 받아 관리의 손에 의해 산신의 나무가 베어지는 일도 있었고, 메이지정부가 한때 우타키를 신사화 하려고 도모한 적도 있었으나 모두 극히 일시적이고 한정된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에 불가하다. 이것도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제주도의 당 입지가 이러한 박해의 역사과 관계가 없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실제로 신사나 우타키와 같이 마을 안쪽 눈에 띄는 장소에 입지하는 경우는 드믈고 대부분은 외딴 곳에 숨어 있듯이 존재한다. p 066



제의 주체가 여성이라는 점에서 제주도의 당과 오키나와 우타키는 비슷하지만, 우타키의 경우 사제자인 노로, 쓰카사도 여성에 한정되어 있다는 데 반해 제주도 당제의 사제자는 남녀 누구나 될 수 있다. 과거에는 오히려 박수 중심이었는지 17세기 초반에 병자호란 때 제주도에 오게 되었던 김상헌의 『남사록』이라는 저서에는 ‘이 지방 풍속에는 예로부터 여자 무당이 없고 귀신을 모시고 기도하는 일은 다 남자 무당이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p 072


▶ 오키나와의 우타키


여성 사제자는 오키나와, 아마미 외에 일본 곳곳 변두리에 아직 그 존재를 겨우 유지하고 있다. 이를테면 도카라열도의 네시, 쓰시마의 묘부, 이즈칠도의 하치조섬과 아오가섬의 미코, 무녀들이다. 모두 낙도 이야기이며 본토에서는 거의 모습을 감추었다고 여겨진다. 다만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신사 제사에 여성의 영향이 커진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이세신궁의 제사에 미혼의 여성 황족을 사제로 봉사시키는 사이구제도, 가모신사의 같은 제도 사이인은 그러한 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두가지 제도는 당시 다른 신사에서도 제사가 여성 중심이었다는 사실을 추측하게 한다. p 103



이러한 우타키를 대표하는 게 세이화우타키이다. 이곳은 류큐왕조의 최고 신녀, 왕비, 왕의 자매, 왕녀 등이 임명된 기코에오키기의 즉위식과 오아라우리를 행했던 곳으로 이세신궁과 견줄만한 성지이다. 지금은 가이드북에도 실려있고 주차장도 있어 관광 명소의 하나가 되었지만 과거에는 통제가 심했다. 특히 남자 엄금으로 남자가 어쩔수 없이 들어가게 되었을 때는 여장해서 들어갔을 정도의 장소이다. p 109



오키나와에서 현재까지 제사의 중심이 여성이라는 사실은 류큐왕조가 있던 시기에 기코에오키미를 정점으로 하는 확고한 신녀 조직을 구축한 점이 그 커다란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의 영적 우위를 인정하고 자매를 형제의 수호신으로 하는, 이른바 오나리신 신앙이 아마미, 오키나와 지방에 넓게 나타나는 것은 야나기나 구니오가 「누이의 힘」에서 다룬 이후 잘 알려지게 되었다. ‘오나리’란 형제가 자매 즉 여자형제를 이르는 말로 자매가 남자형제를 이를 때는 ‘에케리’라고 한다. p 111



(…) 세 명의 신녀가 있어 류큐왕조의 판도를 세 개로 나누고 각각 구역을 관리, 통괄했다. 그들 하에 있는 것은 하나의 마을 혹은 몇 개의 마을마다 한 명씩 둔 ‘누루’(노로라고도 함)이다. 누루는 임명제이긴 했으나 왕부에서 파견되는 일은 거의 없고 지역 구가 여성이 선택되었다. 부계를 따르는 세습으로 백모, 숙모에서 조카딸에게 이어지는 계승이 전형적이다. 현재도 누루, 쓰카사 제도는 오키나와 전역에 남아있기는 하지만 소멸 직전에 놓여있다. 이제는 경제적으로 공적인 지원을 받을 수 없고 제사 수는 많아 여러가지 제약을 받는 누루, 쓰카사를 자진해서 떠맡으려는 여성은 극히 드물다. p 112



 

▶ 제주도와 류큐


제주도와 일본의 관계는 고대부터 서로 이주와 혼혈이 반복되어 왔다는 것은 틀림없다. 특히 거리적으로 가까운 고토열도, 쓰시마에서는 그러한 일이 일상적이었다고 여겨지며, 한반도 남해와 서해의 섬들과 현해탄의 섬들은 한 때는 동일 문화권에 속해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제주도와 쓰시마에 대해 살펴보면 제주도에서 자리돔, 갈치 등 연안어업과 해조류 채취에 지금도 사용되는 떼배는 쓰시마에 현존하는 떼배와 매우 유사하다고 한다. 그리고 작은 말은 일본에는 쓰시마, 도카라 열도, 요나구니 섬에 있는데 한국에는 제주도에만 있고, 쓰시마의 말은 제주도에서 건너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p 129



『제주도 무속연구』의 저자 현용준씨에 의하면 제주도에서는 제를 지낼 때 심방이 ‘대로 만든 채롱 위에 북을 세로로 세워 올려 고정시키고, 북채를 양 손에 들어 오른쪽 고면 만을 치는 것이다’라고 하는데 현씨가 쓰시마섬, 이키섬 조사 때 신사의 제의에어 신관이 이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북을 치는 것을 몇 군데 견학한 일이 있다고 한다. p 129



부언하자면 다니가와씨가 이 책에서 한반도에서는 정월 보름에 줄다리기를 하는데 제주도만은 구마모토, 가고시마에서 남도에 걸친 지역과 마찬가지로 음력 팔월 보름날 밤에 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러한 사실은 제주도가 이 지역과 마찬가지로 쿠로시오 문화권에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제주도 역사학자 김태능씨는 제주 여성아 한반도 본토보다 오히려 일본에 가까운 습속으로 ‘바느질 방법, 아이를 업는 방법, 물건을 등에 지고 머리 위에 올리지 않는다’는 점을 들며 예로부터 떠돌아다니는 성향이 강해 타지에 진출하는 규슈 시마바라반도와 아마쿠사섬의 여성들이 제주도에 건너간 것은 아닐까 추측한다. p 131



김철준 교수는 ‘제주의 삼성설화는 이 지석묘 영조자들의 설화였다고 생각된다’고 까지 말한다. 삼인의 일본 여성이 안에서 나타났던 나무상자의 표착지는 제주도 동남쪽 온평리로 알려져있다. 이곳은 규슈 서부지역에 가장 가까운 장소로 한때는 열운리라고 불렸다. ‘열운리의 여는 일본의 별칭인 이에 혹은 요와 비슷한 음이며, 이에인 즉 일본인들이 상고시대부터 이주해 온 장소라고 생각된다’고 김태능씨는 말한다. p 133



이러한 습속 외에 섬이라는 지리적 조건, 독립국이었는데 결국 본토에 귀속되어 지속적으로 차별을 받았다는 점, 최근에는 본토 사람들에 의해 제주도는 43사건, 오키나와는 오키나와 전투라는 비극에 휘말린 역사가 있다는 점에서도 제주도와 오키나와는 매우 닮아있다. p 140




▶ 신사와 한반도


제주도의 풍습도 포함해 당이 우타키와 관계가 있다면 우타키는 신사의 ‘원시형식’이기 때문에 당은 신사와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아니, 야요이 시대부터 고대까지 한반도 남부와 일본 본토, 특히 기타 큐슈와는 동일 문화권을 형성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당과 신사의 관계는 멀리 떨어진 오키나와 우타키의 경우보다 훨씬 밀접했던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조차 든다. p 153



신사의 역사가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신사의 신역에서 야요이 토기가 출토된 사례가 많다는 사실에서 야요이시대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그렇다면 야요이 문화는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전한 문화이기에 그늘이 신사의 성립에 관련이 없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들은 벼와 철이라는 이른바 선진문명의 전수자이기도 했고, 신을 모시는 방법만 토착민들(조몬인)에게 배웠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p 154



『하리마국풍토기』 이보군이세노조에 ‘기누누히노이테, 아야히토노도라라의 조상’이라는 백제에서의 도래인이 ‘여기에 살려고 신사를 산기슭에 세워 신을 받들어 모셨다’라는 구절이 있으며, 또한 『고고슈이』에도 오진텐노 부분에 ‘진, 한, 백제에 종속하는 백성이 각각 많다. 감탄할 만 하다. 모두 그들의 신사가 있지만 아직 제물을 바치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어, 도래인이 신사를 세운 사실을 전하고 있다. p 155



무라야마 마사오씨의 「조선관계신사고」는 「신명장」에서 도래계라고 추정되는 신사를 표로 정리해 싣고 있고, 그 수는 140여 곳에 이른다고 한다. 게다가 히라노신사, 마쓰오타이샤 등 이미 도래계로 확실히 알려진 신사는 제외한 것이니 실제수는 「신명장」 2,861사의 10퍼센트 가까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신사 명과 제신, 기록, 항간에 전하는 유래를 통해 사실로 판명된 것들이다. 하지만 중고시대 이후 신사 측에서 한반도와의 관계를 꺼리는 경향이 강해져 이들 중에도 신사 명의 표기나 발음을 바꾸고, 제신도 원래 제신을 폐하고 『니혼쇼기』와 『고지키』의 신으로 하는 사례가 눈에 띈다. 따라서 이들 이외에도 도래계였던 사실을 지금은 알 수 없는 신사도 많다고 할 수 있다. p 155



신사에 대해 말하자면, ‘교토에서 가장 도래된 절인데, 전부라고 하면 과장이 될지도 모르지만 많은 부분에서 한반도 도래인의 신앙이 밀착되어 있다’라고 어느 좌담회에서 우에다 마사아키씨는 말했다. 실제로 가모신사, 히라노신사, 마쓰오타이샤, 후시미이나리타이샤, 야사카신사 등 교토의 유명한 신사의 대부분의 창사에 도래계 사람들이 어떤 형태로든 연관되어 있다. p 161



…이나리라고 칭하게 된 유래는 하타노나카쓰헤노이미지키 등이 먼 조상의 하타씨족 이로구는 벼농사로 유명했다. 그런데 떡을 갖고 과녁으로 하여 활을 쏘았는데 떡이 백조로 변하여 날아가 이 산에 내려와 벼가 되었으므로 이를 신사 명으로 했다. 『야마시로국 풍토기』 中 인용


후시미이나리가 있는 주변은 하타우지 세력의 중심이었던 곳으로, 신사가 진좌한 이나리산과 그 주변에는 몇 개의 고분이 있다. 이 고분의 일부는 하타우지의 고분이고, 이나리 신사는 그 고분에 묻힌 하타우지의 선조를 모시기 위해 만들어서 후에 농업신이 되어 널리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고 고증하고 있다. 하타우지의 창사에 관련이 있는 교토의 신사로는 이외에도 마쓰오타이샤와 하타노사케키미를 모시는 우즈마사의 시키나이샤 오사케신사가 있다. p 162



야사카 신사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해지고 있는데, 여기서 하나하나 소개할 여유는 없기 때문에 신사에서 나오는 『야사카신사 유서 약기』의 한 구절만을 인용하기로 한다.


…야사카 신사의 창립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사이메텐도 2년 고구려에서 일본으로 온 부사인 이리시오미가 신라국 우두산의 스사노오미코토를 야사카 지방에 모셔, 야사카즈쿠리 성을 받은 것에서 시작했다는 설은 니혼쇼키에 스사노오미코토가 아들 이소타케루노카미와 함께 신라에 내려가 소시모리에 있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신찬성씨록에 야사카즈쿠리는 고구려인 시루쓰마노오리사의 자손이라는 기록과 추정을 합하면 거의 이치에 맞는 창립이라고 볼 수 있다. p 164



이세신궁도 한반도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오랜 세월동안 그런 사실은 사라지거나 감춰져 이젠 거의 눈에 띄지 않지만 향후 연구를 통해 점차 밝혀질 것이다. 김달수 씨의 『일본 속의 조선문화』 4에는 신궁 근처 이세시 구스베의 가라카미산을 찾으러 가는 도중 신궁사청에 오랫동안 근무하다가 퇴직 후에 지방사 연구에 볼두하고 있는 사람의 집을 방문하니 그 사람이 “조사를 하면 할 수록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그대로였어요”라고 했다. “모조리 조선 분위기가 풍긴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 말을 하면 신궁사청이 곤란해진다는 거죠”라고 대답하는 흥미로운 장면이 나온다. 덧붙여 이스즈강을 따라가는 가라카미산은 신궁의 네기(신관)의 묘지였던 곳으로 커다란 고분이 있었지만, 다이쇼 초기 이스즈강 개수 공사로 파괴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산에는 가라신사의 작은 사당이, 그리고 가까운 숲에는 구니쓰미오야신사, 오쓰치미오야신사라는 두 개의 신사가 있다. 신궁 네기의 무덤이 있던 산이 왜 가라카미산으로 불리는지, 왜 근처에 선조를 의미하는 미오야라는 이름이 붙은 신사가 있는것인지 의문만 깊어간다. p 167



이세신궁의 신궁이라는 명칭 자체가 신라에서 먼저 쓰였다는 설이 몇몇 사람들에 의해 나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지마립간 9년 봄 2월조에 ‘신궁을 나을에 설치하였다. 나을은 시조가 처음 태어난 곳이다’라고 되어있는데, 이를 신궁의 첫 기록이라 한다. 그 전까지 역대 왕은 제 2대 남해왕 때 창건한 시조묘에서 제사를 지냈지만, 이후 시조묘라는 이름이 사라지고, 왕이 제를 지내는 것은 신궁이 됨에 따라 시조묘를 신궁으로 개명했거나 개편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 잡기 제1, 제사조에 남해왕이 시조 혁거세의 사당을 세웠다는 것을 기록한 후에 ‘사계절에 맞추어 제사를 지냈는데 친 누이동생 아로로 하여금 제사를 맡게 하였다’라고 하니, 이세의 제궁제를 떠올리게 하여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p 167



마에카와 아키히사씨는 「이세신궁과 신라의 제사제」라는 논문에서 ‘이세신궁이 신사에서 신궁의 칭호가 붙게 된 전화의 계기는… 신라의 제사성의 영향에 의한것은 아닐까 생각된다’고 설명하며, 이세신궁은 제사제도까지도 신라에서 배웠다고 한다. (…) 덴무도 이후 거의 정기적으로 복정되고 있다는 점에서 적어도 제도로서 확립된 것은 덴무텐노시기로 보인다. 덴무텐도는 그 출신이 신라의 왕족이라는 설이 나올 정도로 신라에 가까운 텐노였다. 진신의 난이 덴지텐노의 친동생과 제1황자의 황위계승을 둘러싼 난이라는 종래의 설을 부정하고, 신라의 세력을 배후에 둔 오아마황자와 백제의 세력을 등에 업은 오토모황자의 싸움이라는 오와 이와오씨의 설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이 설이 맞다면 진신의 난 이후 덴무조에서 신라의 문물이 많은 분야로 들어왔다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고 이세신궁도 예외는 아니다. 게다가 이세, 시마 지방에는 그 이전부터 많은 신라계 도래인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 같다. p 168



이런 신라의 신의 숲은 당의 숲으로, 그리고 진수의 숲, 그러고 나서 우타키의 숲으로 이어졌음에 틀림없다. 신사와 한반도의 관계를 구체적인 사례에 입각해 추적해왔지만 끝이 없기 때문에 이정도로 해 두겠다. 그렇다고 해서 나라, 교토의 신사가 특히 한반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데 무라야마 마사오씨의 「조선관계신사고」에서 조선과 관련 있는 시키나이샤가 가장 많은 곳은 이즈모로 11곳, 다음은 오미 10곳, 야마토와 이세, 에치젠은 8곳으로 3위, 야마시로와 가와치, 무사시가 6곳으로 4위였다. 이주모는 지리적으로 한반도 특히 신라와 가까워 신라와의 관계에는 예사롭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 p 169



약간 농담濃淡의 차이는 있으나 일본 대부분 지역에서 고대 도래인의 흔적과 그들과 연관 있는 신사를 찾아낼 수 있다. 그러므로 신사의 성립을 고찰할 때 한반도를 무시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p 171



신라의 신수신앙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했지만, 좀 더 보충해보자.


신라의 시조 혁거세는 숲 속 우물 옆에 놓인 커다란 알에서 태어났고, 제13대 미추왕이 속한 김씨의 시조 알지는 계림에 하늘에서 내려온 금궤 속에서 나왔으며, 또한 수도 경주는 원래 계림이라고 불렸으니 이 나라는 수림樹林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실성왕 시대에 경주 부근 낭산에 구름이 일어났는데, 향기가 가득 퍼져 오랫동안 없어지지 않으니 왕은 신선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믿어 낭산을 성지로 하여 나무를 베는 일을 금했다고 한다. p 180



당과 신사 사이의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 둘이 거쳐 온 역사이다. 신사 신앙도 우타키 신앙도 모두 시종일관 국가의 신앙으로 국가의 두터운 비호를 받으며 박해를 받은 사례는 없었다. 그에 반에 당은 유교를 국교로 하는 조선시대 500년 동안 음사로 배제되고, 때로는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제주도 당의 박해 사례는 제1장에서 언급했지만, 그것은 제주도만의 일이 아닌 한반도 전체의 일이었다. p 181



일본에서 나오는 한국 가이드북에서 당을 접할 수 있는 책은 눈에 띄지 않는 것에 반해, 일본의 이세신궁이나 이즈모타이샤, 이쓰쿠시마신사 등에 대한 기술이 없는 한국 가이드북은 적다. 당의 자취는 희미하고, 그 존재는 없는 것과 같아보인다. 그렇기에 신사는 일본 고유의 것이라는 의식이 나타나게 된다. 한국인 스스로 손수 다룬 당과 당제에 대한 연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마침내 본격화되고 있고, 향후 연구가 진행되면 당과 신사가 숨겨진 형제 혹은 자매라는 점이 서서히 밝혀지게 될 것이다. p 183



 

그리고.....책 내용과는 조금, 아니 매우 관계없는 TMI



그러고보니, 이 책의 저자는 김달수 씨의 저서를 많이 인용하였는데, 그 김달수 씨의 저서가 우리집에도 있다. 그 책들은 여차저차해서 겨우 구하긴 했는데, 아직 읽지는 않았던 터라, 이 정도의 책을 쓴 저자가 인용할 정도면 그 내용도 정말 깊이가 있겠구나 싶다. 늦장 그만부리고 김달수 씨 책도 얼른 읽어봐야지(김달수 씨는 한일고대사에서 ‘도래인’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만들어 사용한 재일동포).



그러고보니22


이 책의 출판사가 제이앤씨다. 문득 내 책장에 일본사, 한일고대사에 관한 역사책들이 꽂혀있는 책장을 봤는데 놀랍게도 제이앤씨에서 출판된 책들이 여러권 있었다. 뭐지 이 출판사..? 눈여겨 봐야겠어!



그러고보니333


위에서도 말했지만 이 책은 번역이 꽤나 잘 되어 있다. TMI이긴 한데, 내가 읽어본 일본인이 쓴 책의 번역본 중 반 이상은 정말 가독성이 매우 떨어진다. 물론 나 역시도 제약논문 번역을 하면서, 번역이 어렵다는 것은 몸소 깨달았지만 그럼에도 뭐랄까. 책을 번역하는 사람들은 돈받고 하는 일일텐데, 그정도로밖에 못하나? 싶은 마음이 아주 수백번 드는건 어쩔 수 없달까. 헌데 이 책은 그저 그런 교양서도 아니고 학술총서인데, 이 정도의 매끄러운 번역이라니! 이런 번역본들만 있었으면, 내가 굳이 원서를 읽을 일들이 없었을 건데^_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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