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남진 - '원조 오빠'에서 '영원한 오빠'로
온테이블 지음 / 상상출판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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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내 책 취향과는 사뭇 다른, 정말 새로운 책을 읽었다. 근데 또 책 구성이나, 흐름 이런건 꽤나 익숙하다. 심지어 내 관심사 중 하나인 대한민국 대중음악사도 곳곳에 스며들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색다르게 느낀건, 이 책 속 주인공 때문이다. 왜? 이 책 속 주인공은 내 세대보다는, 우리 엄마 세대가 좋아할 바로 그 사람! 오빠 부대 원조! 가수 ‘남진’ 이기 때문이다.


책 제목은 『오빠, 남진』.


가수 남진의 음악 인생사는 대한민국 대중가요 음악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가요는 잘 안듣지만(?) 대중가요 음악사는 꽤 관심이 있는 편이다. 여기저기서 주어들은 잔지식도 꽤 있고. ‘역사’라는 범주 안에 있다면, 어떤 장르의 역사든 일단 파고 보는 습성이 여기서 빛을 발한다. 


19세기를 지나면서 우리 전통 음악에도 변화의 바람이 분다. 이전까지 왕을 위한 궁중음악과 중인 이상 지배층이 즐기던 가곡, 서민들의 잡가 등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었는데, 신분제가 폐지되고 근대식 극장과 대중매체가 등장하면서 이런 구분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판소리와 잡가에 능한 전문 소리꾼이 국왕에서 천민까지 모두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19세기 후반에는 대중매체가 등장했다. p 022


19세기에 이미 변화를 겪고 있었던 전통 음악은 우리 대중 음악이 탄생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외래 음악의 영향을 받은 전통 음악이 대중음악으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민요풍의 창작 대중가요인 ‘신민요’다. 전통 음악 다음으로 대중음악에 영향을 준 것은 서양 음악이었다.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와 교회 그리고 대한제국 군악대 등을 통해 도입된 서양 음악은 창가와 찬송가, 군가의 형태로 우리 대중음악에 영향을 끼쳤다. 그 뒤를 이은 일본 음악은 일본의 전통 음악이라기보다 ‘일본이 받아들인 서양 음악’에 가까웠다. 서양음악이 일본을 거쳐 우리 대중음악으로 정착한 셈이다. p 025


모름지기 대중음악이란 ‘대중’이 듣는 음악을 말한다. 고로 대한민국 대중음악은 대중이 존재하는 시기부터 시작한다. 그 시기가 언제인고 하면, 백년 전으로 훌쩍 올라가 신분제를 철폐한 갑오개혁까지 가야한다. 그 과정과 배경에는 청일전쟁과 조선에서 주도권을 빼앗고자 하는 일본의 흑심이 다분히 포함되어 있지만, 이유야 어찌되었든 갑오개혁으로 조선에서 신분제는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물론 왕족 제외하고. 그렇게 이 땅에 대중이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개화기. 일본을 시작으로 여러 외국에 문호를 개방했다. 자연스럽게 외국의 음악도 조선으로 들어온다. 조선 땅에 있는 음악이라고는 궁중음악이나 판소리, 민요 등이 전부였으나, 이 시기를 기점으로 여러 장르의 노래가 동시다발적으로 조선 땅에 들어왔다. 백성이었으나, 이제는 대중이 된 개화기 조선 사람들. 그들은 조선에 들어온 외국 노래를 조선화 시키며 부르기 시작했다.


1. 신민요: 기존의 민요를 대중가요화한 장르로 작곡, 작사가가 따로 있다.

2. 트로트: 일본에서 유행하던 대중음악의 영향으로 생겨났다. 처음엔 일본 유행가 번안곡 형태로 시작했다.

3. 재즈송: 재즈, 팝성, 샹송, 라틴음악 등의 서양 대중 음악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노래로, 가사에 외래어를 섞어 쓰는 특징이다.

4. 만요: 미국 팝송에 재미난 가사를 붙인 일종의 코믹송. 대표적인 노래로 ‘유쾌한 시골 영감’, ‘오빠는 풍각쟁이’가 있다.


하지만 서슬퍼런 일제강점기와 태평양전쟁, 한국전쟁이 연이어 터진다. 개화기 때 한창 발전하던 한국 대중가요는 긴 기간 암흑기를 보냈다. 


일제 말기가 되면서 당국의 검열은 더욱 심해졌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뒤에는 노골적인 친일을 담은 군국가요 음반만 발매할 수 있었다. 심지어 빅타와 컬럼비아 같은 레코드 회사는 ‘적성 국가 언어로 된 이름’이라 하여 회사 명칭까지 바꿔야 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성장을 거듭하던 대중음악이 암흑기에 접어든 것이다. p 039 


1935년 발매된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우리 민족의 현실을 담아낸 가사로 인해, 일본 경찰이 문제 삼았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음반사 측 기지로 풀려났고, 오히려 이 일화로 인해 더 폭발적 인기를 얻었다는 그 노래! 목포 유달산에는 이를 기념하는 노래하는 비석까지 서있다. 그 목포에서 해방을 맞은 1945년에 한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이름은 김남진. 무려 양반가문에, 재력까지 있던 집안의 늦둥이였다. 


해방 후 한국의 대중가요는 새로운 도약에 나섰다. ‘이난영(목포의 눈물)’을 시작으로 ‘현인(신라의 달밤)’, ‘한복남(빈대떡신사)’, ‘백난아(낭랑 십팔세’), 등 지금도 많은 후배 가수들이 리메이크하는 명곡들이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이 명곡들은 발매된지 채 몇년 안되서, 묻히고 만다. 1950년, 북한이 남한을 쳐들어오며 전쟁이 시작되었기에. 바로 한국전쟁, 6.25 전쟁이다. 더욱이 한국전쟁 당시 많은 예술인이 월북(을 빙자한 납북)되었다. 일제강점기 못지 않은 대한민국 대중음악계의 암흑기였다.


한국전쟁이 끝났다. 그와 함께 대한민국에 미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미군이 주둔하자, 자연스레 팝송도 유행하기 시작했다.



소년 김남진을 사로잡은 팝송의 유행은 한국전쟁 때 한반도로 온 미군과 함께 시작되었다. 전쟁 후에도 미군이 주둔하면서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원판 LP들은 기지촌 주변과 양키 시장에서 유통된 것이다. 1957년 첫 방송을 시작한 AFKN(주한 미군 방송)도 한몫했다. p 058


해방둥이로 태어났던 김남진은, 팝송을 즐겨 듣는 청소년이 되었다. 그렇게 팝송에 푹 빠진 김남진. 그때까지만해도 철부지 김남진은, 자기 인생이 대중음악과 한 몸이 되리라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극장 쇼는 악극에 신파, 코미디, 국악, 가요, 팝송, 미술까지 망라한 종합 엔터테인먼트였어요. 중학교 때부터 팝송에 푹 빠져 있던 나는 당연이 국악이나 트로트보다 팝송 스타일의 노래를 좋아했죠. 그래서 쟈니리나 정원, 김상국 같은 분들이 나온다고 하면 학교를 빼먹고라도 꼭 보러 갔어요. 『오빠, 남진』 中


미8군쇼와 미국 대중음악의 유행으로 우리나라 대중음악계에 팝송스타일의 가요가 주름잡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노래로 한명숙의 ‘노란 샤쓰의 사나이’, 현미의 ‘밤안개’, 정훈희 ‘안개’등이 있다. 이렇게 팝송 스타일의 가요가 유행한 건 미군 주둔이 제일 큰 이유겠지만, 내적으로 보면 미군에 잘보여야 할 군부독재 정권의 묵인도 한몫했다. 


이때 한창 유행했던게 바로 ‘미8군쇼’다. 미8군쇼에 얼굴을 비치고, 노래를 부르면 바로 인기가수가 될 수 있었다. 실제로 미8군쇼에서 노래를 불렀던 사람들은, 대한민국 대중음악계에 한 획을 긋는 존경받는 가수가 되었다. 당시 인기가 어느정도였나면, 당시 수많은 음악학원 중 미8군 무대 진출을 위한 음악학원도 있을 정도였다. 


청소년 김남진도 이때 음악학원에 들어갔다. 유명 작곡가 한동훈이 세운 한동훈 음악학원에. 여기서 중요한 건 이거다. 청소년 김남진은 요즘말로 길거리 캐스팅을 당했다! 팝송을 부르는 그의 실력이 꽤나 좋았다는 이야기다. 


난 진짜 그때 앨범만 나오면 인기 스타가 될 줄 알았어요. 아버님이 운영하시던 언론사를 통해 기사화까지 예정되어 있었으니 더욱 그랬죠. 앨범이 나오고 기사가 뜨면 방송국에서 내 노래를 틀어댈테니, 인기가수는 시간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오빠, 남진』 中


‘최희준 모창 가수’라고 할 정도로 스타일을 따라한 음악적 한계, 방송계에 촌지를 돌리는게 관행이었으나 이를 몰랐던 신인가수 남진과 고지식했던 작곡가 한동훈. 그렇게 가수 남진의 데뷔곡 ‘서울 푸레이보이’는 대실패했다. 하지만 이 실패는 가수 남진에게 커다란 교훈을 주었다.



그때 제일 인기 있던 라디오가 동아방송이었는데, 아는 사람도 없이 무작정 찾아갔어요. 지금도 이름을 잊어버리질 않아. 강수향 음악부장님이라고, 원래 테너 가수였는데 은퇴하고 방송국에서 음악 방송 총책임자로 일하고 했었어요. 무턱대고 그분을 찾아가서 앨범을 드리며 인사를 했지.


6개월즘이 지나가 여기저기 다른 방송국에서도 내 노래가 나오는 거예요. MBC, KBS, 동양방송, 기독교방송까지 모두 다요. 심지어 하루에 네댓 번까지도 방송을 탔어요. 정말 하늘로 날아오르는 기분이었죠. 『오빠, 남진』 中


금지곡 지정. 검열이라는 명목하에 금지, 통제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유신독재시절이다. 금지 사유야 많지만, 실질적으로는 권력자 마음에 안들면 바로 금지가 되어버리는 세상이었다. 그렇게 남진이 부른 ‘연애 0번지’는 금지곡이 되었다. 여기서 반전. 남진이 부르기 싫었던, 어쩔수 없이 불렀던 트로트 ‘울려고 내가 왔나’가 인기를 타기 시작했다. 요즘말로 순위 역주행!



그때 기분을 지금도 잊지를 못해요.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절로 떠오릅디다. 애당초 부를 생각이 없었던 곡인데 작곡가가 술에 취해서 하기 싫은 걸 할 수 없이 불렀고, 다행히 다른 노래가 인기를 끌다가 금지곡이 되어버렸고, 어머지가 이 노래 좋다고 해서 방송국에 부탁할 때도 이게 터질 거란 생각은 한 번도 안했어요. 근데 그해 우리나라 가요를 통틀어서 최고 히트곡이 바로 ‘울려고 내가 왔나’였어요.

『오빠, 남진』 中



또 금지곡 지정.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대중들에게 가수 ‘남진’이라는 이름을 깊이 새겼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가수 남진의 음악인생은, 굴곡진 우리나라 현대사와 궤를 같이한다.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는 대중음악사 지식은 해방이전 근대사에 한했다. 하지만 이 책 『오빠 남진』 덕분에 그 범위가 넓어졌다. 더해서 엄마들이 왜 가수 ‘남진’에 열광하는 지까지!


이 책은 고스란히 우리 엄마님께 상납하고 효도하는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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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근대사 왜곡은 언제 시작되는가 - 한일 근대사 속살 이야기
박경민 지음 / 밥북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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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2월 『한일 근대 인물기행』 이라는 역사책을 리뷰한 적이 있다. 그 책에선 한국와 일본, 양쪽 근대사에서 중요한 인물들과 그들의 활약상이 담겨있었다. 굳이 왜 일본 근대사 인물을 이야기했는가? 라고 묻는다면, 대체로 일본 근대사에서 중요한 인물들이 우리나라 근대사, 즉 구한 말 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쭉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들과 동일하다. 따라서 한국 근대사와 일본 근대사는 분리할 수 없으며, 같이 공부해야한다는 생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개인적으로는 우리나라 근대사 교육 시간에 일본 메이지 유신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아직까지 이 부분에 대해선 미진한 것 같아 안타깝다. 



일본 메이지 유신 과정을 모르는 상태에서, 갑자기 일제강점기를 배우게 된다? 배우는 입장에서는 머리 속에 무수히 많은 공백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조선 중후기 동안 조선 통신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각종 문물을 받았던 일본이었다. 그랬는데! 갑자기 근대국가를 표방하며 나타나서는 순식간에 조선을 점령한게 아닌가. 심지어 일본이 근대국가가 된 그 짧은 시간동안 조선 위정자들은 또 무얼했는지, 비교도 해야하는데 그마저도 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메이지 유신 과정을 배워야만 한다. 음, TMI가 너무 길었..나.....



뭐 여튼! 이 책은 위 『한일 근대 인물 기행』을 쓴 저자가 새로 발간한 역사책이다. 제목은 『일본의 근대사 왜곡은 언제 시작되는가』.



일본의 역사왜곡은 두 말하면 입아플 정도로 심각한 문제다. 특히 한일관계사에 있어서 역사왜곡은 가히 소설에 가깝다. 그들이 왜곡하는 시기는 고대사와 근대사다. 이 역사책 주제는 일본의 근대사 왜곡이니, 고대사 왜곡은 일단 생략!



일본 근대사 왜곡을 보자. 너무 광범위해서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그 주제를 선정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방대하다. 단적인 예가 강제징용, 일본군 성노예 문제다. 엄연한 범죄임에도, 범죄가 아니라며 포장하는 그들의 행태는 너무 적나라하고, 뻔뻔하다. 오죽하면 지들이 일으켰던 세계 2차 대전에 대해서, 앞뒤 맥락 다 자르고 원자폭탄을 맞은 자기들이 피해자라고 생각하겠는가? 이렇게나 심각한 일본의 근대사 왜곡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이토록 일본에 만연한 근대사 왜곡이 대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고찰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역사책이다. 저자가 말하는 일본 근대사 왜곡의 시작점은 대체 어디인가! 그 시작점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18세기 조선과 일본의 시대적 상황을 알 필요가 있다.



18세기 후반부터 지식인들에게 신지식으로 자리 잡은 국학의 영향으로 국학자들에 의한 정한론이 주장된 적이 종종 있었지만 이는 재야학자들에 의한 무책임한 일방적 주장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번의 정한론은 천황을 포함하여 국가정책을 주무르는 고급 관리들에 의해 숙고와 논의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종전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 당시 메이지 신정부는 서구 따라잡기를 통한 조속한 근대화에 진력하고 있었다. 오늘날의 장, 차관과 국장에 해당하는 신정부의 핵심인사 중 약 절반에 가까운 이와쿠라 사절단을 2년 가까이 미국과 유럽에 장기 체류시키면서 서구의 선진문물을 체험하도록 하고 있었다. p 028



일본의 정한론 파동이 정점을 지날 무렵 그 대상이 되는 조선에서는 이러한 이웃 국가의 동향을 전혀 모른 채 오직 흥선대원군의 권력 유지와 고종의 친정 개시 여부 등 권력 다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는 점에 우리에게는 매우 뼈아픈 대목이다. p 032



위에서도 말했듯 일본의 근대화 메이지 유신을 알기 위해선, 그 이전 18세기 일본을 알아야 한다. 일본은 분명 사무라이의 나라였지만, 18세기 사무라이들은 칼 찬 사무라이가 아닌, 책읽은 사무라이였다. 책 읽는 사무라이들은 전통적 봉건사회는 이제 끝이며, 앞으로는 근대사회가 될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해서 그들은 일본 근대화에 앞장섰다. 미국과 불평등 조약을 맺었을 때도 그랬다. 근대화를 이루지 못한 자신들이 국력이 약했음을 알았고, 그로 인해 불평등 조약을 맺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낮은자세로 미국과 유럽에 사절단을 보내어, 서양의 근대화를 몸소 배워왔고, 그렇게 배워온 것을 일본에 적용했으니 그게 바로 일본의 근대개혁, 메이지 유신이다.



일본이 그렇게 근대화에 앞장서는 동안 조선이라는 나라는 순조, 헌조, 철종 3대 왕이 재위하는 동안 세도정치가 정점에 달하고 있던 시기였다.


이후 일본 근대개혁인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어, 일본이 동양의 서양을 표방하며 근대국가로 나아가고 있을 그 무렵 조선은 어땠는가? 고종 즉위 후 흥선대원군이 왕권강화에 박차를 가하던 시절이었다. 흥선대원군이 조선 내 개혁을 표방하며 칭찬을 받을만한 개혁도 하였지만, 경복궁 중건이라던가 쇄국 등 조선 전체적으로 봤을 땐 전통적 봉건 국가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근대국가와 더더욱 멀어지고 있었다. 


심지어 당시 일본 메이지 내각에선 초기 정한론 파동이 있었음에도, 조선은 이런 상황조차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눈과 귀를 모두 닫고 있었다.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면서부터는 더욱 가관이 아니었다. 고종은 아비인 대원군이 시행하던 정책을 전면 부정했을 뿐만 아니라 왕비 민씨 함께 무당(진령군)에 의존했다. 고종과 민비는 무당에게 수많은 재물을 가져다 바쳤다. 그 재물들의 출처는 내탕금과 국고였다. 백성들이 힘들게 낸 세금을 무당에게 퍼주고, 자신들이 사치하는데 낭비하고 있었다. 고종과 민비는 돈이 부족해지자 지방수령 자리를 팔기 시작했다. 다름아닌 왕실이 나서서 매관매직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민씨 척족들도 중간에 개입하여 인사청탁을 받으며 중개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고종과 민비, 민씨 척족들은 백성들의 고혈에 더해, 매관매직까지 하면서 나라를 거덜내고 있었다. 


쳇바퀴처럼 고종과 민비는 계속해서 무당에게 재물을 바치고, 끊임없이 사치했다. 부정부패로 늘어나는 돈보다, 사치로 쓰는 돈이 많아져서 자금이 부족해지자, 고종과 민비는 나라에 있는 광물 자원이나 철도부설권 등을 외국에 팔기 시작했다. 고종과 민비는 자신들의 사치를 위해 나라의 모든 것을 내다 팔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바로 일본이 근대개혁을 하는 동안 조선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고종과 민비가 온갖 사치를 하는 동안 조선 백성 생활은 아귀도가 따로없었다. 작금의 조선은 죽은 아이에게조차도 세금을 물리는 나라였으니까. 그런 백성들의 울분이 쌓이고 쌓이다 터져나온게 동학농민운동이다. 하지만 고종과 민비는 이런 백성들을 가엾이 여기기는 커녕, 폭도(반란군)으로 규정하고 진압을 명령했다. 심지어 조선 정규군으로 진압이 어려워지자,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한다. 한마디로 자신들이 보호해야 할 백성을 죽이기 위해 외국 군대를 불러들인 꼴이다.


청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자, 텐진조약에 의거하여 일본도 조선에 군대를 파병했다. 동학농민운동이나 강화도조약, 텐진조약 같은 조선, 청나라, 일본 간의 여러 조약들을 설명하자면 길기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무엇보다 이 책이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는 ‘경복궁 점령사건’이니까.


여튼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고종과 민비는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였고, 일본도 덩달아 조선에 일본군을 파병했다. 결과적으로 조선 땅에는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가 주둔하게 되었고, 두 나라 군대와 조선 정규군에 의해 동학군들은 말살된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간과한 사건이 하니 있으니, 바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사건이다. 저자가 말하는, 일본의 근대사 왜곡 시작점이다.



청일 간 직접 협상이 결렬되고 각국의 중재노력이 가망 없을 것으로 예견되자 무쓰는 7월 10일, 향후의 조선 정세에 대비하여 오토리에게 조선의 개혁파 관리들을 규합할 것과 철도 및 전신 등 조선에서의 실질적 이권 확보를 지시했다. 그날 오토리는 1차 노인정회담에서 조선에 내정개혁을 권고하면서, 조선이 거부할 경우를 상정해 두 가지 안(갑안, 을안)을 본국에 올리며 훈령을 요청했다.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일본 정부의 입장을 잘 알고 있는 오토리의 두 가지 안 모두 성의 출입문과 왕궁의 문을 일본군이 점령해야 한다는 군사적 조치를 포함하고 있었다. (…) 갑안이든 을안이든 오토리가 보낸 전문의 표현 중 ‘군대로 경성의 각 대문을 경비하고 왕궁의 문을 지킨다’는 것은 ‘군사력으로 문 안팎의 공간을 제압하여 지배력을 확보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이 표현은 한성과 경복궁을 군사력으로 점령하겠다는 뜻이다. p 237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남아있는 경복궁 점령에 관한 오토리 공사의 본국 보고 전문을 찾아보자. (…) 즉 일본 외무성에 대한 내부 보고용으로는 일본군 이동의 목적이 ‘조선 정부의 불만족스런 회답에 대한 응징으로 왕궁을 포위하기 위해서’ 였으며, 그 목표지점은 ‘왕궁(경복궁)’이라고 명시했다. p 260


약 10년 후, 일본군 육군참보본부가 공식 발간한 『일청전사』도 이런 입장의 연장선에 있다. 오토리 공사의 내정개혁 담판 사태가 어려워지자 군사력 일부의 입경을 요청했다고 서술하여 ‘군사력 이동이 조선과의 내정개혁 담판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과 관련있음’을 연관시켰다. ‘군사력 이동의 목표 지점은 왕궁 북방산지’라고 표현했다. 이처럼 사건 초기부터 내부 보고용 자료외 외부에 공표하는 자료 내용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p 261



‘경복궁 점령사건’에 대해 일본정부가 지금까지도 시종일관 주장하는게 있다. 이는 계획된 사건이 아니었고, (1) 먼저 발포한 조선 병사와의 우발적인 충돌에서 시작되었으며, (2) 일본군은 어쩔 수 없이 응전하다가 국왕을 보호하기 위해 왕궁에 들어갈 수 밖에 없었으며, (3) 따라서 경복궁 점령사건은 소규모 충돌 사건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이다.



사실 왕궁 점령은 고종을 사실상의 포로로 삼고, 왕비 일족과 대립중인 대원군을 떠받들어 정권을 잡게 함으로써 조정을 일본에 종속시키고 청군을 조선 밖으로 쫓아내기 위한 선제적 핵심조치였다. 즉 개전 명분인 조선 조정의 청군축출의뢰서를 일본의 손에 넣고, 나아가 한성에 있는 조선군을 무장해제시킴으로써 일본군이 남쪽에서 청군과 싸우는 동안 한성의 안전을 확보하고 동시에 군수품 수송과 징발등을 조선 정부의 명령으로 시행하는 편의를 얻는 등 일석삼조의 목적 아래 계획한 것이다. p 269



『일청전사』 「조선왕궁에 대한 위협적 운동계획」 은 그간 일본 정부와 군 당국이 ‘한일 양국 병사의 우연한 충돌’ 또는 ‘조선군이 발포해 이에 일본군이 응전하여 벌어진 우발적 사건’ 등으로 주장했던 사건의 치밀한 기획과 준비에 관하여 육군참보본부가 작성한 실체적 기록이다. 혼성여단이 작성한 ‘조선왕궁에 대한 위협적 운동계획’이란 ‘경복궁 점령 계획’이었다. 이는 청일 양국의 충돌을 앞두고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조선의 국왕과 정부를 일본 편으로 만들라는 일본 정부의 포괄정 훈령에 따라 그간 오토리가 본국에 수차 강경제안을 했으며, 결국 ‘어떤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결정적인 조치를 취하라’는 일본 정부의 포괄적 승인이 내려짐에 따라 조선 현지의 오토리 공사와 오시마 여단장이 협의해 구체적으로 만들어낸 일본 정부와 일본군의 합작품, 즉 ‘합동군사작전계획’이었다. p 275



실질적으로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 직후, 일본은 조선군을 무장해제 시켰으며 조선군 병영을 접수했다. 뿐만 아니라 대원군을 앞세워 일본 공사관의 지원을 받는 형식으로 개혁기구를 설치했으니, 그게 바로 제1차 김홍집 내각이다. 뿐만아니라 김홍집 내각이 제대로 구성되기도 전에, 청군축출의뢰서 공문을 확보하여, 청군을 공격할 명분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조선땅에서 일본은 청나라를 공격했다.


조선 땅에서 청일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당시 동양의 서양을 추구하며, 서양 강대국 앞에서는 국제법을 잘 지키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야 했던 일제로서는 ‘경복궁 점령 사건’이 계획된군사계획이라는 사실이 알려져서는 안됐다. 저자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따라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시까지는 일본정부와 일본군이 국제법을 잘 지켰다”라는 일본인들의 일반적인 인식은 당시 국제적 눈초리를 의식한 일본 정부의 의도적 사건 조작과 각색을 거친 허상이며, 일본인의 국뽕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사건은 일본 정부의 한일 근대사 역사 왜곡의 시발점이다. p 294



학교에서조차도 깊게 가르치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이 간과했던 ‘경복궁 점령사건’. 이 사건을 모르고 일본 역사왜곡을 논하는건, 메이지 유신을 모르고 일제강점기를 논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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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 지음 / 상상출판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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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박종인 기자님의 『땅의역사 7권』이 나왔다. 나름 기자님 스토커(ㅋㅋ)라 ‘땅의 역사’ 신문 연재는 진즉에 끝나고, ‘흔적’이라는 새 주제로 다시 연재하는거 보면서, 역사책 『땅의 역사』도 완결인가 싶어서 괜시리 걱정했는데! 신간이 나와부렸다♡ 오얘예옝예ㅖ예



땅의 역사 7권은 기존에 조선일보에서 연재하셨던 ‘땅의 역사’ 와 현재 연재중인 ‘흔적’에 있는 내용이 섞여 있는거 보니, 앞으로도 역사책 ‘땅의 역사’ 시리즈는 계속 될 것 같은 너낌적인 너낌이다. 암만! 내 답사여행에 시작이 된 책인데, 저얼대 끝나면 안되지!! 지금은 육아로 인해 잠시 멈춘 답사여행이지만, 뿡뿡이가 크면 다시 답사여행을 다녀야하니! 그런 의미에서 기자님께서 계속 쭈욱 답사를 해주셨으면!



이번 땅의 역사 7권도 어김없이 의도적으로 ‘삭제’되거나, ‘왜곡’된 역사 속 진실을 찾아가는 기록이다. 정부 주도하에 의도적으로 삭제된 역사, 피해의식으로 인해 왜곡된 역사,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아서 사라진 역사 그 모든 것들이 주인공이다. 



예컨데 지금 핫한 관광지가 된 경복궁 본연의 역사라던가, 친일파 춘원 이광수가 쓴 소설 『단종애사』로 인해 숙주나물로 왜곡된 신숙주의 일생이라던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제 세금 수송 마차를 탈취했던 잊혀진 독립운동가 박상진의 일생이라던가, 정약용과 박제가 등이 인두법을 발견하고 임상까지 하여, 정조의 사상통제만 아니었다면 지석영 우두법보다 빨리 천연두를 몰아낼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움의 역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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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0년전 매향리 마을에 간적이 있다. 매향리 마을이 어떤 곳인지 알고 간게 아니라, 제암리 유적지를 가는 길에 우연히 본 ‘매향리정보화마을’이라는 표지판이 신기해서 들렀던 곳이다. 우연히 들렀던 그 곳에서 나는 눈물흘리고 말았다.


경기도 화성 매향리 마을. 불과 가까운 과거에는 섬이었으나,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미군이 폭격훈련장으로 사용하면서 섬이 아닌 곳이 되어버렸다. 1951년부터 연간 250일간 폭격 훈련이 있었다. 사격횟수도 1일 600회가 넘었다. 미공군 전투기는 하루에도 수백번 매향리 마을 상공을 돌며 기총사격과 폭탄을 투하했다. 그렇게 숲이 우거졌던 농섬은 밑둥만 남았다. 


남양만 남쪽 매향리 앞바다의 농섬은 또 다른 이유로 사라졌다. 매향리와 궁평항을 잇는 화옹방조제로 남양만은 화성호로 변했다. 숲이 우거졌다는 뜻으로 ‘짙을 농濃’자를 쓴 농섬은, 방조제 바깥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정확하게는 밑동만 남았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한 미 공군은 이곳 매향리를 폭격 훈련장으로 사용했다. 훈련장 이름은 쿠니 사격장 이다. 토착주민은 물론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까지, 조개와 굴을 주우며 살던 사람들에게 희생이 강요됐다. p 049



“아기를 낳을 여자들에게는 신생아 귀를 막을 탈지면을 선물했다. 오일장이 서면 사람들은 괘종시계를 들고 장터에 갔다. 벽에 건 시계들이 다 떨어져 고장이 나서”


주민들은 난폭해졌고, 강력범죄와 자살이 잇달았다. 오폭과 불발탄 사고로 많은 이가 죽었다. 2000년 미군 전투기가 추락하고 한미군사협정 개정이 이슈가 되면서 대한민국 사회는 매향리 문제를 ‘생존권’을 둘러싼 갈등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2005년 마침대 쿠니 사격장은 폐쇄됐다. p 051



매향리에서 봤던 폭탄 잔존물로 만든 조형미술과 벽화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폭탄 잔여물 위에서 여자아이가 꽃에 물을 주고 있던 벽화. 폭탄 파편에 맞아 죽은 사람중에는 임산부와 뱃속 아기도 있었다고 했다. 벽화속 꽃이 꼭 별이 되어버린 아기인 것 같아서 그 앞에서 유독 눈물을 흘렸었다.



한국전쟁은 진작에 끝났고, 독재정권도 끝났고, 국민이 1인 1표를 정당하게 행사할 수 있는 시대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매향리는 더 오랫동안 지옥에서 살았다. 왜? 미군이 사용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이 정도의 희생은 감수해야한다고 생각했기에, 따라서 매향리의 문제를 국민들이 알면 안되었고, 당연히 매향리 문제는 묵살되어야 했기에. 



그렇게 오폭사고와 불발탄 폭발 등으로 사망자와 중상자가 끈임없이 나왔던 매향리. 폭발로 인한 주거지, 어장 파괴, 소음성 난청등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던 매향리. 매향리는 2005년이 되어서야 그 지옥에서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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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시흥 오이도와 화성 대부도 사이를 가로막는 방조제 공사는 1994년에 끝이 났다. 공업단지 부지와 농경지를 확보하겠다는 계획은 엉터리임이 공사 도중에 드러났다. 물이 나갈 길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헛되고 기이한 공사였다. 막힌 하천 물은 썩었고 갯벌도 썩었고 땅도 썩어 버렸다. 그 꼬락서니를 이제 일흔을 눈앞에 둔 당시 젊은 사내 최종인이 보았다. 누구는 그를 개발 방해자라 불렀고 누구는 그를 시화호 지킴이라 불렀다. p 052



2n년간 시흥에 산, 지금도 시흥에 살고 있는 시흥시민으로서 ‘시화호’ 이야기를 그냥 넘기면 섭하다. 시화호는 한 때 ‘죽음의 호수’라 불렸다. 하지만 지금은 천연기념물까지 찾는 생명의 호수다. 



1980년대 중동 건설 붐이 끝나면서, 수많은 중장비와 인력이 남아돌게 된다. 그렇게 남아도는 중장비와 인력을 꾸려 거대한 간척 사업을 시작했으니, 그게 바로 바다를 막아버리는 시화호 간척사업이다. 졸속으로 진행된 간척사업은 실패했다. 시화 방조제는 건설되었지만, 그 안에 가로막힌 바닷물은 썩어들어갔다. 검은호수, 죽음의 호수가 되었다. 그 어떤 생명체도 살 수 없는 호수였다. 전문가들은 시화호가 살아나는데 30년은 더 걸린다고 이야기했다.



이 공사 기간 동안 한 사내가 끊임없이 공사를 방해했다. 그는 시화호가 죽어가는 과정을 꼼꼼히 기록했고, 언론에 알렸다. 끊임없이 정부를 귀찮게 했다. 결국 그 사내말대로 가로막혀있던 물을 통하게 했다. 딱 10년이다. 10년만에 시화호는 생명의 호수가 되었다. 저어새, 밭종다리, 홍여새, 재두루미 등 천연기념물들이 찾는 공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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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페르트 도굴 사건을 알고 있다. 독일 상인이 흥선대원군 부친인 남연군 묘를 도굴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다. 이와 함께 자연스레 따라오는 이야기가 있으니, 바로 남연군묘 이장에 관한 이야기다. 이 땅에 가야사라는 대찰이 있었는데, 이 자리에 부친의 묘를 쓰면 2대가 왕이 된다는 지관의 말에 흥선대원군이 냅다 절을 밀어버리고 자신 부친의 묘를 썼다는 이야기.


역사적 사실이라 알려진 남연군묘 이장에 관한 이야기, 놀랍게도 이 이야기 속에는 거짓이 교묘하게 섞여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남연군묘 앞에 버젓이 진실이 기록된 비석이 서있다는 사실이다.


대원군이 부순 절은 가야사가 아니라 묘암사다. 그리고 석탑 또한 전설 속 허구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했던 탑이다. 하나 더 있다. 대개 남연군묘, 즉 대원군이 세운 선친 묘가 이장된 해를 ‘고종이 왕이 되기 13년 전’인 1850년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남연군묘 입구에 있는 비석에는 역사적 진실이 기록돼 있다. 


‘처음 마전 백자동에 장사 지냈다가 바로 연천 남송정에 이장하고 을사년에 덕산 가야산 북쪽 기슭에 이장했다가 병오 3월 18일 드디어 중록 건좌한 언덕에 면례하였다.’


이미 대원군은 선친을 한 차례 이장한 뒤 을사년(1845년)에 가야산 북쪽으로 이장하고, 이듬해에는 지금 자리에 묘를 썼다는 뜻이다. 을사년에 첫 이장을 한 자리를 주민들은 ‘구광터(옛 무덤자리)’라고 부른다. 남연군 묘에서 400미터 북동쪽 산기슭 밭이다. 왜 처음부터 석탑 자리에 옮기지 않았을까? 이기웅이 말했다.


“묘암사 주변 주민들과 땅 문제를 협상하는 시기였을 것이다. 그러다 마지막 남은 절을 불태웠고.”


이장 시기와 토박이 역사가 분석을 들어보니 ‘만세 권력을 누린다는 지관 말에 있는 돈 없는 돈 탈탈 털어서 급히 가야사라는 대찰을 불태우고 주민을 내쫓았다’는 대중매체의 보도와 공식 안내문은 수정돼야 마땅하다. p 082



현재 남연군묘가 있는 자리는  옛 가야사가 있던 절터라고 알려져있다. 분명 이는 사실이다. 헌데 흥선대원군이 가야사를 때려부수고, 남연군묘를 이장했다는 건 일부 거짓이다. 


주자학의 나라 조선. 양반네들은 사찰과 승려를 천시했다. 하지만 예외가 있었다. 바로 왕실사찰이다. 왕실의 원찰로 지정된 사찰은 막대한 권력을 누렸다. 보통 태실이나 왕릉을 조성했을 때 이를 수호하는 사찰이 지정되는데, 이런 사찰들이 바로 원찰이다. 원찰은 뒷배가 무려 왕실이기에, 양반네들이 함부러 할 수 없었다. 외려 원찰 소속 승려들이 양반네들을 상대로 떵떵거리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원찰에 지정된 사찰 중 하나가 바로 예산 가야사다. 가야사는 광해군이 왕이었을 때, 세자 이지의 원찰이었다. 세자 이지 태실은 황해도 신계군이 있었으니, 태실 수호사찰은 아닐테고. 세자 이지를 지지하기 위한 원찰인지는 모르겠지만 뭐. 여튼! 원찰이 된 가야사는 거대해졌다. 그러다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광해군이 폐위되었고, 당연히 세자도 폐위되었다. 폐세자 원찰이었던 가야사는 몰락했다. 당시에 이미 가야사는 텅 비어있었고, 가야사의 말사였던 묘암사만 남아있던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흥선대원군이 가야산 북쪽에 남연군 묘를 이장하고, 일정 기간 뒤에 남아있는 묘암사를 철거 한 뒤 현재 자리에 남연군묘를 이장했다. 고로 우리가 알고 있는 남연군 묘 이장 스토리는 진실과 거짓이 교묘하게 섞인 왜곡된 이야기라는 것. 하지만 왜 바로잡지 않는건지는 당최 모르겠다. 


흥선대원군이 ‘무자비하게 사찰을 부시고 부친 묘를 이장하여, 아들을 왕으로 만들었다’라는 풍수지리 중요성에 힘을 실어주고 싶은건지, 아니면 흥선대원군이 ‘무자비하게 사찰을 부시는 바람에, 왕이 된 아들이 나라를 말아먹었다’라는 이야기에 힘을 실어주고 싶은건지, 아니면 이도저도 아니고 그냥 될대로 되라- 싶은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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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4년 추석, 산청에 살던 선비가 고택을 찾아왔다. 고택에는 정온의 증손자 정중원이 살고 있었다. 선비의 이름은 유이태다. 그는 한양에서 임금 숙종의 병을 치료하고 내려오던 길이었다. 유이태는 선비의사다. 유의라 한다. 유학자이면서 동양적 의학 이치에 통달한 선비다. 두창(천연두)과 마진(홍역) 치료에 능했다. 거창에서 태어나 남쪽 산청에서 살았는데, 워낙 의술이 뛰어나 영남과 호남 일대에 숱한 전설과 설화를 남겼다. p 195



명의, 산청, 전설. 기시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맞다. 과연 자기 몸을 해부용으로 내놓은, 의성 허준의 스승 유의태가 아닌가. 산청에는 유의태를 기리는 테마파크 동의보감촌이 있고 그에 관한 전설이 남아있다. 결론부터. 여의태는 태어난 적도 죽은 적도 없는, 소설 『동의보감』과 드라마 <집념> 속 인물이다. 거창에서 태어나 산청에서 활동하고 임금 숙종의 병을 고치고 의술을 베푼 의사는 유의태가 아니라 유이태다. 동계 고택에서 주인장과 대작하고 죽은 해가 1715년이니, 허준(1530~1615)보다 100년 뒤 사람이다. p 196



민관이 합작하여 만들어낸 역사왜곡, 허준 스승 유의태. 이 인물은 명확한 ‘허구’다. 민관은 유의태라는 허구 인물을 실제로 만들기 위해, 실제 역사속 인물 유이태를 꽁꽁 감추었다. 실존 인물 유이태의 흔적은, 허구 인물 유의태의 흔적으로 바꿔치기 했다. 



여기서 말하는 민관은 이들이다. 『한국인물사』에 허준 스승 유의태를 소개한 한의사 노정우,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소설 『동의보감』을 집필한 소설가, 이를 드라마로 만든 방송사, 이 인기에 편승하기 위해 동의보감촌을 만들고 광고한 산청군. 이들 연합작전으로 인해 산청에서 실재 활동했고, 산청에 무덤까지 있는 선비 의사 유이태는 사라졌다. 대신 유이태의 모든 흔적을 가로챈 소설 속 인물 유의태가 나타났다. 그 누구도 이 거짓을 바로잡지 않았다. 실존 인물 유이태 후손이 나와 논문까지 써가며 반박하기 전까지.



허구 인물 유의태의 흔적이라던, 유적지라던 공간은 하나둘 철거되었지만 아직 완벽하지 않다. 산청군은 아직도 허구인물 유의태를 내세우고 있으니 말이다.


무원칙의 원칙을 모아 보니 온통 대한제국이고 고종이다. 이로써 대한민국 국민은 ‘간악한 일제가 담장을 철거한’ 탁 트인 경회루 경치를 감상한뒤, ‘총독부 박물관’ 건물에 상주한 경복궁 관리소 관할 경복궁을 떠나, 촬영 세트장으로 변한 덕수궁 월대를 넘어서 ‘순종 황제가 즉위한 장소임을 절대로 알리면 안되는’ 덕수궁관리소가 상주한 3층짜리 신축 건물에서 끝나는 테마공원 조선 궁궐을 소유하게 되었다. p 212


위 유의태 이야기는 지방정부가 주도한 왜곡이라면, 이번엔 중앙정부다. 무려 문화재 당국이 주도한 결과다.



문화재청은 경복궁 복원 기준 연도를 1888년으로 설정했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한 이후를 기준으로 했다. 2023년에 복원된 경복궁 앞 광화문 월대. 월대가 설치되었던 해는 1866년이다. 그러다 1917년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 세워진지 고작 100년도 안된 월대였지만, 복원 기준 연도 안에 포함된다. 문화재청은 원칙대로 1888년에 그 자리에 있었을 월대를 복원했다. 



1888년 경복궁 경복궁 경회루에는 사방에 담장이 있었다. 그러다 일제 시대에 담장이 철거되었다. 현재 복원된 경회루는 딱 두 곳에만 담장이 있다. 관람객 편의를 위해서! 일제가 담장을 철거한 이유를 그대로 답습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경복궁 동쪽에 숨어있는 경복궁 관리소 사무실. 이 건물은 일제시대에 지어진 총독부 박물관이다. 당연히 문화재청이 설정한 복원 기준 연도 1888년에 없었다. 오롯이 일제가 만든, 강탈한 문화재 전시용 건물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멀쩡하게 자리하고 있다. 



그 다음은 덕수궁 돈덕전. 고종이 강제 퇴위되고 순종이 즉위한 공간이다. 2층 건물이었던 돈덕전은 1920년에 철거되었다. 현재 복원된 돈덕전은 실제를 기반한 복원이 아니다. 사라진 돈덕전을 재현하기 위해 상상에 기반하여 만들어진 건물이다. 심지어 지금 재현된 돈덕전은 3층 건물이다. 3층은 덕수궁 관리소다. 이 돈덕전 재현을 위해 600년간 그 자리에 있었던 회화나무 한 그루를 옮겨버렸다. 



기함할 이야기 하나 더. 문화재청은 경복궁 영추문루 소문이 1926년 소실되었고, 지금까지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했다. 놀랍게도 영추문 소문은 100년간 쭉 경복궁 안에 있었다. 자경전 구역에 이전된채. 자경전은 위에서 말한, 총독부 박물관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복궁 관리소 지척에 있다.



이 모든 내용들은 역사 전문가나 문화재 당국이나 알 법한 내용이다. 따라서 이런 내용을 문화재 안내판이나, 역사 교과서 등을 통하여 일반인에게 알려야 한다. 나같은 일반인들이 역사적 지식을 습득하는 제일 쉬운 경로가 바로 문화재 안내판이나 역사 교과서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국에서 맘 먹고 왜곡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왜곡된 내용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만다.



그리하여 우리에겐 시화호 지킴이 최종인씨처럼, 유이태 후손 유철호씨처럼, 이 책을 쓴 박종인 기자님처럼 왜곡된 사실이 바로잡고자 하는, 외력에도 흔들림없고 끈질긴 사람들이 필요하다. 이들처럼 잘 알지 못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들을 지지하여 지치지 않기를 바라는 것 뿐이니.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가려지고 왜곡되고 사라진 역사를 온전하게 바라볼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조그만 기대를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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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 - 활자중독자 김미옥의 읽기, 쓰기의 감각
김미옥 지음 / 파람북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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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쓰는 글도 남다르다. 책 좋아하는 사람이 책을 읽고, 자신의 생각을 한 자 한 자 옮겨 쓰다 어느새 본인도 작가가 되어 책을 썼으니, 그게 바로 이 에세이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쓰다』 다. 보통 에세이는 자신의 일상 속에서 글감을 찾기 마련인데, 이 에세이는 다르다. 책을 좋아하는 작가라서 그런가? 목차만 봤을 땐 일상 에세이인가 싶지만, 모든 챕터가 한 권의 책을 읽은 뒤 써 내려간 글이다. 이 글들이 모두 고품격이다. 나 역시 책을 좋아해서, 매번 책을 읽고 블로그에 짧게나마 기록한다. 헌데 이 책을 읽고 보니, 내가 쓴 기록들은 아. 휴지통에 버리고 싶은 기분^_T. 


진정한 서평이란 이런 거구나, 를 깨달았다.



어떤 책이 좋은 책이냐 묻지 마시라

읽지 않은 책은 쓸모가 공책만 못하니

당신이 읽고 있는 책이 가장 좋은 책이다

책은 마법의 여권 같아서 그곳이 어디든

당신이 꿈꾸는 곳으로 데려가 줄 것이다.



목차만 봤을 땐 저자가 어떤 책을 읽었는지 알 수 없지만, 해당 챕터를 읽으면 알 수 있다. 글 속에 책이 나오니까. 내가 읽어본 책도 있었고, 읽으려고 했으나 포기한 책도 있었고, 읽어봐야지 하던 책도 있었다. 문득 보니 저자의 독서는 장르 구분하지 않고 어마어마하구나 싶다. 나도 다름 독서 편식을 고친다고 고쳤는데, 아직 멀었구나 싶다.



젊은 날 내게도 지적 치기가 있었다. 편집과정이 허술하거나 비문이 보이고 내용이 부실하면 가차 없이 책을 버렸다. ‘준비되지 않은 자의 책이 인쇄되는 불행’이라고 함부로 지껄였다. 돈을 주고 채을 사서 시간을 들여 읽는 독자는 ‘갑’이었다. 특히 작가의 꿈을 접은 독자는 터무니없이 눈이 높다. 어느날 나의 사고가 전환되는 일이 생겼다. 유독 잘 쓴 소설을 만났는데 문체가 익숙했다. 작가의 초기작품을 읽고 집어던졌던 기억이 났다. 나는 기다릴 줄 몰랐던 것이다. p 016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


“나도 루쉰의 유품이라네, 나도 보존해주게나.”

언급조차 되지 않았떤 그녀가 다시 떠오른 건 2010년대였다. 이 책은 주변사람들의 편지와 일기, 사진 등으로 루쉰 집안의 가정사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게 만든다. 루쉰의 양심에 평생 걸림돌이었을 그녀는 그의 작품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오래전 상해의 루쉰 공원에 있는 그의 묘지와 기념관을 찾아갔었다. 주안의 넋은 무덤도 안식처도 없이 허공을 헤매고 있을 것이다. 살아 묶였으니 죽어서는 자유로워야 하지 않겠는가. 살아서 그녀가 무엇을 했느냐고 물으면 이렇게 답해야 한다. “주안은 루쉰을 이룩했다.” p 128, 『나도 루쉰의 유물이다-주안전』, 차오리화



루쉰의 아내 주안과 버지니아 울프, 모두 혹독한 시대를 살던 여성들이다. 구시대에서 신시대로 변하는 격동기였다. 한 쪽에선 여성은 남성의 전유물이었지만, 반대쪽에 있는 여성은 신교육을 받는 신여성이었다. 같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달랐다. 루쉰의 아내 주안은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구시대 상징인 전족을 하고 있던 여성이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주안과는 달리 깨어있는 가족들 덕분에 교육을 받고, 본인 역시 지적욕구가 지대했던 여성이었다. 사회 비판적인 시선으로 많은 글을 써왔지만, 그녀 역시 여성의 한계를 규정하는 구시대적 가치관에 항상 부딪혔다. 그리고 나보다 이른 시기에 태어나, 내 어머니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 책의 저자. 그녀 역사 여성의 한계를 규정하는 구시대적 가치관에 부딪혔으며, 결국 본인의 꿈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사는 시대는 어떤가? 루쉰, 버지니아 울프보다 몇 백배는 살기 좋아진 사회가 되었다. 저자나 내 어머니 때는 여자가 공부를 하는 건 당연한게 아니었지만, 내가 사는 시대는 남녀불문 공부를 하는게 당연한 시대가 되었다. 여성의 한계를 규정짓는 구시대적 발상은 사라졌다. 그런데, 정말 사라졌을까? 



어릴 땐 몰랐다. 성인이 되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직 여성의 한계를 규정짓는 구시대적 발상이 곳곳에 살아숨쉬고 있다는 사실을. 특히 아이를 낳고나니, 숨어있던 구시대적 발상이 나를 옥죄이며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분명 루쉰, 버지니아 울프, 내 어머니 시대보다 더욱 발전한 시대를 살고 있는데 말이다. 앞으로 내 딸이 살아갈 시대에는 어떨까? 이런 구시대적 발상이 사라지려나? 죽은듯 있다가 잡초처럼 다시 살아올라올까?




“전원 구조되었습니다!” 현장에 가지도 않은 기자가 국정브리핑에 앵무새처럼 읊조렸다. 어른들의 말을 믿었던 아이들은 결국 수장되었다. 생존학생들은 병원에 격리되어 죽은 친구들의 장례식에도 갈 수 없었다. 70일 동안 외부와 접촉하지 못하게 한 건 박근혜 정부였다. 그 와중에 기자들은 갖가지 방법으로 생존학생들에게 접근했다. 그가 만난 가장 좋은 어른은 택시기사였다. ‘단원고’라고 하면 또 물어볼까 싶어 옆 건물 이름을 댔는데 그는 차비를 받지 않았다. “그냥 가.” 이 대목에서 눈물이 글썽해졌다. 어른인 것이 부끄럽고 미안하다.  (…) 작년 9월 세월호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외력 가능성을 조사했으나 외력이 침몰 원인인지 확인되지 않았다.” 박근혜 정권은 진상규명을 방해했고, 문재인 정권은 방관했고, 윤석열 정권은 종결했다. 생존 저자는 지금 26세의 청년이 되었다. p 060 ~ 061, 『바람이 되어 살아낼게』, 유가영



140416.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숫자다. 나는 이 날 회사에서 세월호 사건 진행사항을 보고 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내 주변 동료도 모두. 왜? 내가 다니는 회사가 시화공단에 있다보니, 동료중에 안산시민도 있고 거래처 역시 안산에 다수 산재해있다. 당연히 세월호 사건에 모두가 집중할 수 밖에 없었다. 모두가 구조되었다는 소식이 흘러 나왔을 땐 다 같이 기뻐했다. 얼마 안가 그게 거짓뉴스란걸 알았을 땐, 이미 골든타임을 놓쳐버린 뒤였다. 심지어 그 이후에 일어난 모든 일들이 생중계되고, 그 어린 학생들이 구조되지 못한 이유가 정말 어이없게도 이기적인 어른들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을땐 그 충격은 뭐라 말할 수 없었다. 비단 어린학생들 뿐이랴. 바다속에 수장된 이들 중에는 일반인도 많았다. 그저 가려졌을 뿐.



세월호 선박 사고부터 침몰과정, 침몰 이후 후속처치 등 일련 과정애서 명명백백하게 밝혀진건 하나도 없었다. 이 책 저자 말을 빌리자면, 박근혜 정권은 진상규명을 방해했고, 문재인 정권은 방관했고, 윤석열 정권은 종결했다.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책임을 면했다. 그 과정에서 책임을 져야할 그들은 생을 달리한 피해자, 생존 피해자, 유족들, 국민들 사이를 헤집고 이간질했다. 처음엔 정권의 문제인가 싶었는데, 이건 정권의 문제가 아닌 ‘권력자’들의 문제였다. 니편내편 갈라진 권력자들이라도, 자신들의 권력에 흠집이 생긴다면 그때만큼은 같은 편이 된다. 그렇게 권력자들이 한 편이 되어, 세월호 사건은 종결되었다. 뒷맛이 쓰다.



세월호 생존자들은 나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트라우마가 생겼고, 그 트라우마를 이기기 위해,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다. 『바람이 되어 살아낼게』는 그런 생존자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쓴 책이다. 읽고자 했지만, 아직까지도 차마 읽을 수가 없는 책. 저자가 이 책을 읽고 쓴 소회만 봐도 이렇게 눈물이 나는데, 나는 저 책을 언제쯤 읽어볼 수 있을까.



나는 문득 그의 유해가 돌아올 때 왜 많은 이들이 반대했는가에 생각이 붙들렸다.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다는 이유를 드는데 시대에 맞지 않는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윤동주나 김좌진 장군 등은 영웅처럼 떠받들면서 대체 홍범도 장군에게 왜 이리 혹독한가? 75세까지 살았던 장수의 비극인가? 젊은 시절에 요절한 그들은 해방을 보지 못했다. 그들이 살아서 해방을 보았다면 무엇을 선택했을까? 친일 경찰이 독립운동을 한 이들을 다시 붙잡아 고문하는 기막힌 ‘해방’이 아니었는가 말이다. 나는 책을 덮고 우리나라의 불우한 역사를 생각한다. 늙어 극장지기로 일하고 그마저 문을 닫아 정미소에서 일하다 쓸쌀하게 세상을 떠난 우리의 머슴 출신 ‘홍범도’를 떠올리며 운다. p 069, 『홍범도』 이동순



그녀의 재판기록에 여러 설이 있다. 여자니까 살려주겠다고 하자 세계 인구의 반을 점하는 모든 여성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은 모욕이라고 항의헀다는 얘기도 있다. 총살당할 때 눈을 가리지 말아달라고 요구했고 그녀는 33세에 총살당했다. 시체는 아무르강으로 던져졌으며, 인양되지 않았다. 김알렉산드라의 묘지는 없다. 김알렉산드라는 사회주의 운동가였기에 우리나라 역사책 한 줄도 장식하지 못했다. 2009년에야 조선의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독립투사였으나 소비에트 좌파라는 이유로 많은 이들이 남과 북으로 외면당했다. p 132, 『시베리아의 딸, 김알렉산드라』, 김금순



홍범도 장군, 김알렉산드라. 이들은 독립운동가다. 하지만 오랜기간 우리에게는 잊혀졌던 인물들이다. 왜? 그들이 사회주의 노선을 걸었던 독립운동가였기 때문이다. 이들뿐만이 아니다. 김원봉, 김상옥, 김지섭, 전율성, 김산, 나석주, 윤세주, 김시현, 김익상 등 의열단 소속 독립운동가들도 잊혀졌다. 역시나 이유는 똑같다. 의열단도 사회주의 노선을 걸었기 때문이다. 



해방 후 정권을 잡은 이승만은 자유주의 노선을 걸은 독립운동가다. 자유주의 노선을 걸은 만큼 미국과 친했다. 뿐만 아니라 (구)친일 경찰, 친일 군인들과 손을 잡았다. 이승만과 미국, (구)친일 경찰과 친일 군인. 그들은 아주 확실하게 노선을 정했다. 미국 입장에선 입지가 커져가는 소련을 그냥 둘 수 없었다. 단독정부를 원했던 이승만은, 통일정부를 원한 사회주의 노선을 탄 독립운동가들이 눈엣가시였다. 그렇게 미국과 이승만의 의견이 일치했다. 빨갱이 사냥. 친일경찰들은 자신들의 ‘친일’ 경력을 가리기 위해선, 빨갱이 사냥 만큼 좋은 게 없었다. 그리하여 독립운동가가 친일 경찰들에게 붙잡혀 고문받는, 말그대로 기막힌 상황이 일어난다.



남한의 대통령이 여러번 바뀌었어도, 빨갱이 사냥 기조는 변하지 않았다. 심지어 유신독재를 진행했던 대통령 박정희는 일본이름을 가지고 있던, (구)일본군 출신이었다. 이승만 옆에서 권력을 키운 (구)친일 경찰들은 계속해서 권력을 세습했다. 그렇게 독재 정권이 끝날때까지, 진정한 1인 1표를 행하게 되는 민주화가 진행될 때까지, 이 땅에서 사회주의 노선을 걸었던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은 부르면 안될 이름이었다.



이제나마 그들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게되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독립운동가에 걸맞는 예우를 할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일이 생겼다. 불과 작년, 2023년에 일어난 일이다.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 동상을 철거한단다. 반대로 친일파이자 한국전쟁 당시 자국 국민을 빨갱이로 몰아 대규모 학살한 백선엽 동상을 설치했다. 비슷한 일들이 계속 현재진행형이다. 이런 일들을 자행하는 현재 권력가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걸까. 자기들이 이 땅에서 호의호식하는 게 누구 덕분인지 모르는걸까? 아니면, 본인들 가까운 조상 중에 ‘빨갱이 사냥’에 열을 올릴 수 밖에 없었던 인물들이 있는걸까? 참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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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것들의 인문학
조이엘 지음 / 섬타임즈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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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책은 내가 즐겨 읽는 장르 중 하나다. 아니 제일 좋아하는 장르다. 따지고보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역사책도 인문학의 하위 분야니까. 다만 요즘 말하는 인문학은 좀 다르다. 인문학 하위에 있는 사회, 역사, 문화, 철학, 고전 각각의 분야를 모두 아우르는 책들을 인문학책이라고 하니까. 각설하고!


오늘 읽은 인문학책 『사소한 것들의 인문학』을 소개해볼까 한다. 책 제목과 표지만 봤을 땐, 약간 젊은 독자층을 타겟으로 한 책으로 보였다. 예컨데 톡톡튀는 20대, 이제 갓 사회에 발을 담근 30대를 타겟으로 한 느낌이랄까? 고로 표지와 제목만 봤을 땐 오케이! 흥미를 끄는데 충분했다. 그렇게 표지를 넘기고 프롤로그를 읽었다. 

으음? 뭐지? 보통 프롤로그를 읽으면, 대충 짐작이 되는데 이 책은 짐작이 안된다. 그래서 바로 목차로 넘어갔다.

목차만 언뜻 보니 내가 즐겨 읽는 역사가 담뿍 버무려진 책 같았다. 근데 뭔가 이상하다. 성학십도 다음이 국가 비상사태다. 16세기 소크라테스가 나오더니 갑자기 서울 건천동이다. 심지어 한남더힐과 압구정 현대아파트까지 나온다. 문명 목차만 봤을 땐 정약용도 나오고, 이괄도 나오고, 매화를 이야기하는거보니 퇴계도 나오는 것 같고, 허엽 집안 이야기도 나오는 것 같고, 칠서의변에 임진왜란까지 나오는 걸 보면 조선사를 버무린 인문학책 같긴 한데. 목차 중간중간에 자꾸 21세기가 튀어나온다. 조선 역사를 암시하는 목차에 하버드 대학교는 왠말이고, 댓글부대는 또 무엇이며, 부루마블은 왠말인지! 머리속에 물음표가 왕창 떠다니기 시작했다.

분명 인문학책이라고 했는데? 표지를 내용을 해체해봤을 땐 대충 역사 속에서 답을 찾는 느낌이었는데?! 이쯤되니 제목부터 대놓고 ‘인문학책’이라고 한, 이 책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그렇게 한 장 한 장 넘기며 읽기 시작했다. 


읽고 나서, 한줄 평
“작가 천재 아니야???”



퇴계가 은퇴하고 낙향하며 만났던 선비들은, 16세기 선비가 아니다. 21세기 고등학생이다. 16세기 선비들은 상위 1% 퇴계를 보며 그저 부러워하고, 본인들도 그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 부단히 과거시험 준비를 해을 것이다. 하지만 21세기 고등학생들은 다르다. 그들에게 퇴계는 상위 1% 위치에 있는 특권층, 고위 공무원이다. 상위 1% 고위 공무원인 당신은 나머지 99%를 위해 무엇을 했냐며 묻는다. 

정약용이 아들에게 남긴 말을 요즘 말로 풀이하니, 놀랍게도 21세기 아들을 둔 아버지와 오버랩 된다. 허균을 개돼지라고 하며, 다른 힘센 간신들은 비호하고 꼬르자르기 한 광해군. 국민을 개돼지라고 한 21세기 모 정치인이 떠오르고, 입시비리 의혹에서 당당힌 모 정치인이 떠오른다. 부모에게 당연하게 물려받은 물질적 지원과 문화자본은 무시한채, 유명대 입학이 입시생간 공정한 경쟁이라며, 저소득층 지원은 ‘역차별’이라며 지속적으로 ‘공정’을 외쳤던 어떤 정치인도 떠오른다.

옛말을 요즘말로 바꿔놓으니 조선과 내가 살고 있는 21세기가 구분이 안된다. 여기가 조선인지, 저기가 조선인지. 여기가 21세기인지, 저기가 21세기인지. 퇴계가 나오고, 정약용이 말하고, 허균이 망나니질을 하는거보면 분명 조선인데, 자꾸 내가 살고 있는 21세기가 오버랩된다. 참 이상하다.

내가 여러 역사책, 인문학책 리뷰를 하면서, 자주 썼던 말이 이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근데 반복되는 역사가 인재로 생겨난 대형 참사, 예방했으면 없었을 국민들의 희생같은 굵직한 사건사고만이 아니다. 매일 반복되는 정치인 비리문제, 내 자식 앞길이 달린 입시문제, 무슨 일만 있으면 니편내편 이분법으로 갈라치는 정치인과 언론 등등. 항상 내 옆에서 자리하던 크고 작은 모든 일들마저, 역사속에서 계속 반복된다. 


아래는 이 책 내용 일부를 발췌하였다.



정약용은 서울이 좋았다. 서울에 살면서도 아웃 서울이 꿈이었던 퇴계와 달리 정약용에게 인 서울은 일종의 신앙이었다.
   상류층 아이들은 애써 공부팔 필요 없다.
   아빠 찬스, 아빠 친구 찬스가 촘촘하니까.
   그러니 마작, 골패 등 보드게임만 즐긴다.
   나라 꼴이 가관이다.
   생각하면 화만 오르니 그냥 술이나 마시자.

정약용이 쓴 <여름날 술을 마시다> 일부다. 정약용이 대단한 건, 한탄에만 머물지 않고 이론을 제시했다. 불공정한 사회를 ‘경자유전’으로 개혁하고자 했다. 이승만 대통령*보다 150년 앞선 주장이다. 하지만 애비로서는 다른 모습이다.
* 이승만 정부 농지개혁은, 당시 전직 공산주의자 였던 조봉암을 1대 농림부 장관으로 앉혀서 실행. 농지개혁의 모티브가 된건 위에서 말한 ‘경자유전(농사 짓는 사람만 농지 소유 가능)’이다.

   얘들아, 무조건 서울에서 살아야 해.
   벼슬에 오르면 지옥고라도 무조건 서울에서 살아라.
   벼슬이 끊어져도 최대한 서울 가까이에 살아라.
   무조건 서울에 집을 사야해.
   돈이 모자라면 서울 근교에 과일을 심고 생활하다가
   재산이 조금 불어나면 바로 ‘인 서울’ 하거라.
   명심해라. 한 번 서울에서 멀어지면 영원히 들어갈 수 없단다.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
세속적이고 빤하다. 하지만 누가 아비 정약용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p 065~066




퇴계가 학생들에게 기대한 답변은 ‘헛된 명예와 탐욕을 버리고 분수대로 사는 삶’ 정도였다. 이규보도 <지지헌기>를 그런 식으로 마무리했다. 하지만 학생들 대답이 엉뚱 발랄 기발하면서 날카롭다.

   “용꿈 꾸는 이무기는 탐욕스러운건가요?”
   “멈출 곳을 정하는 건 누구예요?”
   “이무기가 늪을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이무기랑 사람이랑 같이 살면 안 돼요?”

한 학생이 일어나 또박또박 묻는다.
   “통계로만 따지면 여기 모인 친구들 중 1%만 용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나머지 99%는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이무기, 뱀, 미꾸라지 혹은 지렁이로 살아가야 하죠. 우리 사회는 ‘나머지 99%’로 살아도 행복한 사회인가요?”
  “퇴계 할아버지, 이건 다른 얘긴데요. 고진감래라고 하잖아요? 진짜 고생 끝에 낙이 와요?”
퇴계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p 079~080


  “퇴계 선생님은 고위 공무원으로서, 정치인으로서, 지식인으로서 우리 사회 1%로 살아오셨는데, 우리 같은 평범한 ‘나머지 99%’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나요?” p 081



한 사람은 본능, 감정, 지성, 의지, 성격, 혈액형, 팔다리, 옷, 신발, 주식, 대출금, 가족, 친구, 직업, 명예, 종교, 취미 등 제 것이라 부를 수 있는 모든 것의 총합, 그 이상이다. 이 복잡다난한 생명체를 단 두 개(좌파 아니면 우파, 진보 아니면 보수)로 나누어 갈라치는 것은 그 사람 영혼에 가하는 폭력이다. 스스로든 타인에 의해서든.

일부를 보고 전체를 판단하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허깨비를 만들어 공격하는 허수바이 공격의 오류

그래서 ‘저쪽의 위선과 불공정을 생생하게 보면서 반대쪽으로 돌아섰다’는 유명인들의 발언에 진저리를 치게 된다. 위선과 불공정은 이쪽이나 저쪽이나, 남이나 내게나 있다. 회색지대를 인정하지 않는 극단적 흑백주의는 싸우지 않아도 될 사람들까지 전부 적으로 만들어 우리 사회에 혐오와 증오 총량만 들린다. p 095



위 책 내용에 조금 보태본다. 왜 사람을 이분법적으로 보면 안되는지를!
임진왜란 직전, 일본에 조선통신사로 간 사람들이 있다. 서인 황윤길과 동인 김성일. 이 두 사람의 서로 다른 보고는 지금도 국사시간에 배우는 대표적인 내용이다. 서인 황윤길은 일본이 쳐들어온다고 했고, 동인 김성일은 일본은 그럴 깜냥이 안된다고 한것 말이다. 이건 이들의 의견이기도 했지만, 서인과 동인 집단에서 선택한 당론이기도 했다. 

여기서 우리가 잘 모르는 내용이 숨어있다. 당시 저 둘과 함께 서기 역할로 조선통신사 일행에 포함된 사람이 있었다. 바로 동인 허성. 놀랍게도 허성은 동인 당론을 무시하고, 서인 황윤길과 의견을 같이했다. 일본이 곧 쳐들어올것이라고! 동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않고, 당론을 거스른 것이다. 이런 허성의 모습은 그야말로 참된 충신이자, 나라를 생각하는 관리구나 라는 생각이 들게끔 한다. 하지만! 여기서 반전이 있다.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전쟁 발발 후 동인 김성일은 자신이 잘못된 보고를 했다고 자책하며, 오히려 의병으로 나서서 전쟁에 앞장섰다. 반면에 전쟁이 일어날거라고, 당론을 거스르면서까지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동인 허성은 도망갔다. 심지어 백성들을 수탈하는 탐관오리였다. 거기다 그는 이름 난 문신 초당 허엽의 아들이고, 허균과 허초희(허난설헌)의 형이자 오라비다.

사람을 이분법적으로 보면 안되는 이유, 이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랴.



1610년(광해2년) 10월 22일 실시된 과거시험은 개판, 난장판, 아사리판이었다. 합격자 명단 일부다.
박자흥 - 시험관 이이첨 사위
이창후 - 이이첨 사위 아비, 즉 이이첨 사돈
정준 - 이이첨 옆집 사람
허보 - 시험관 허균 조카
박홍도 - 허균 조카 사위
조길 - 시험관 조탁 동생
변현 - 응시 자격 없는 전직 승려

사람들은 합격자 명단을 자서제질사돈방이라 조롱했다. 합격자 명단이 아니라 아들, 사위, 동생, 조카, 사돈 명단이라는 뜻이다. 여론이 폭발하자 광해군이 조치를 취하는데, 희한하다.

감독관 중 허균만 처벌
합격자 중 허보와 변헌만 합격 취소

누가 봐도 비리 몸통은 최고 권력자 이이첨이었고, 법무부 장관까지 불법을 저질렀지만 그냥 넘어갔다. 허균이 제일 만만해서 그랬다. 400년 후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똑같이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권력자 세 명이 비슷하게 자식 입시에 부당하게 개입하는데, 한 명만 혹독하게 처벌받고 두 명은 의혹 수준에서 슬그머니 뭉개진다. 그 한 명이 제일 만만해서 그랬다. p 128~129



어릴 때 부터 확립된 독서 습관
다양하고 세련된 어휘력과 문해력
자신을 표현하는 기술
음악, 연극, 오페라 등 문화 취향
예술 작품에 대한 이해도
사교술, 처신, 에티켓, 예의, 사회성
감정 제어, 성실
이런 것들을 문화자본 이라 한다. 입시에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능력이지만 학교나 사교육, 유튜브에선 배울 수 없다. 왜 그럴까? 문화자본은 문화자본을 지닌 부모가 가정에서 대화나 삶을 통해, 조언이나 모법을 통해 오랜시간 부지불식간에 전해주는 능력이라 그렇다. SKY 학생들이 나는 내 노력‘만’으로 정당하게 진학했다고 말하는 것은 정당한가? p 140~141


금융 자본이나 부동산 자본을 상속할 때 세금을 낸다. 문화 자본과 사회 자본은 세금이 없다. 아무 제한 없이 자녀에게 물려줄 수 있다. 그래서 이딴 소리 나온다.
   “능력 없으면 네 부모를 원망해. 돈도 실력이야(국정농단 사건시 비선실세 딸이 한 말)”
문화 자본과 사회 자본을 충분히 누리는 사람들은, 그것을 상속이라 생각하지 않고 온전히 제 능력이라 믿는다. p 144


또 첨언해본다. 2000년을 전후해서 ‘할아버지 재력, 엄마 정보력, 아빠 무관심’이 입시 성공 필수세트였다. 요즘엔 ‘부모 재력’과 ‘아빠 학력’이 입시 성공 필수 요소다. 오죽하면 이를 풍자하는 드라마도 연이어 나왔겠는가. 거기다 2018년 서울대에서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아버지 학력이 높으면 자녀 성적도 높다’라고 한다. 그런데 이게 끝일까? 아니다. 여기에 추가로 필요한게 바로 문화자본이다. 

문화자본이 대체 무엇인가? 쉽게 말하면 그 어떤 걱정 없이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는 환경, 내가 원하면 언제든지 고액 학원을 다닐 수 있고, 원하는 만큼 공부할 시간이 제공되는 환경, 티켓 가격 걱정없이 음악회, 뮤지컬, 오페라 등을 문화 예술 관람을 할 수 있는 환경, 흔히 말하는 고소득 전문직들을 언제든지 보고 대화할 수 있는 환경등을 말한다. 이런 문화자본이라는 특혜가 바탕이 되었기에, 아무 걱정 없이 공부에 매진하여 높은 성적을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아니 꽤 많은 이들이 ‘문화자본’이 특혜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자신들은 공정하게 공부해서, 당당하게 유명대학에 입학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저소득계층에 대한 지원은 공정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과거 박근혜 키즈라고 불렸던, 현 엘리트 출신 정치인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비단 그 뿐만이랴? 수많은 특권층 자녀들이 자신의 SNS에 싸질렀던 글들, 기사화되었던 글들을 떠올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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