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빅토리아 여왕과 귀족 문화 에이케이 트리비아북 AK Trivia Book
무라카미 리코 지음, 문성호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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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영국 귀족문화에 대한 세계사책을 읽은 적이 있다. 이번에 같은 출판사에서 또 다른 영국에 대한 책을 출판했는데, 이번에는 무려 영국 여왕이다. 정확히는 대영제국의 최전성기 여왕, 그녀 재위했던 시기를 ‘빅토리아 시대’라고 부를 정도로 유명한 여왕, 바로 빅토리아 여왕이다. 빅토리아 여왕은 그 어떤 유럽의 여왕 중에서도 유명세로 탑 파이브에 들지 않을까? 여튼 그정도로 빅토리아 여왕은 유명하다. 그녀가 유명한 이유는 대충 네가지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1. 빅토리아 시대, 해가지지않는나라, 대영제국의 최전성기: 대영제국, 아일랜드 연합왕국과 인도의 여왕


2. 그녀의 자손들이 유럽 왕실 곳곳으로 퍼져있어서, 일명 ‘유럽의 할머니’.


3. 영국 왕실의 전통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를 만든 여왕.


4. 유럽 왕실에 혈우병을 퍼트린 사람.


 



빅토리아 시대는 제국주의가 최고조를 달렸던 시기이다보니, 세계 곳곳에 대영제국 식민지가 있었다. 영국의 반대편에도 있었다. 그렇기에 대영제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다. 따라서 이 시기가 영국에게는 제일 리즈시절이라 할 수 있지만, 그만큼 그림자도 많던 시기였다. 식민지가 많았다는 이야기에서도 충분히 추정할 수 있지 않은가. 간혹 tvN 프로그램인 「벌거벗은 세계사」에서 영국아저씨가 출현하면, 그렇게 입이 마르도록 사과하는 이유가 바로 대영제국 시절의 영국의 그림자 때문이기도 하다.



‘유럽의 할머니’와 ‘유럽 왕실에 혈우병을 퍼트린 사람’은 그 궤가 같다. 빅토리아 여왕의 자녀는 9명이었는데, 그 중 딸들이 여러 유럽 왕가와 결혼했고 그 사이에서 42명의 손자녀를 두었다. 이 42명의 손자녀 중 손녀들도 역시 또 여러 유럽왕실로 시집을 갔다. 문제는.. 빅토리아 여왕에게 혈우병 인자가 있었다는 점이다. 이 책에 따르면 혈우병은 여성을 통해서만 유전이 되고, 남자만 발병한다고 한다. 즉, 빅토리아 여왕에게서 시작한 혈우병은 그녀의 딸, 손녀들을 통해 유럽 왕실 곳곳으로 퍼저나갔다. 빅토리아의 아들부터 시작해서, 손자, 증손자 등등. 혈우병은 계속해서 그녀의 피를 이은 유럽 왕실 남자들을 덮쳤다. 무엇보다 빅토리아에게 시작된 혈우병으로 인해 러시아 왕가가 몰락했다고 하니, 여러모로 그녀의 존재감은 대를 끊이지 않고 유럽왕실에 드리워졌다고나 할까?



‘군립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를 영국 왕실의 전통으로 만든 빅토리아. 그 덕분에 군주제가 몰락하는 시점에서도 영국 왕실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 책은 제 2장 정치편에서 이 부분에 대해, 빅토리아의 일기와 그녀의 정치력을 보여주며 설명한다. 말 나온 김에 이 책의 목차를 보면, 빅토리아의 유년시절을 시작으로, 여왕으로 즉위하고, 그녀의 사랑인 알버트와의 결혼, 그녀의 사생활과 정치, 최전성기였던 대영제국의 영광, 그녀의 사망까지를 이야기한다. 빅토리아 여왕의 일기와, 당대의 신문기사,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자서전등을 전부 망라해서 말이다. 소설이 아닌, 오롯이 사료에 의거한 영국사, 세계사책이다. 영국사, 특히 대영제국 시기의 역사를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제 1장 즉위준비 1819-1837


제 2장 대관식과 정치 1837-1839


제 3장 빅토리아의 왕궁 1837-1880


제 4장 결혼으로 가는 길 1828-1840


제 5장 여왕의 주거와 가정생활 1837-1860


제 6장 만국박람회와 전쟁 1851-1858


제 7장 상복을 입은 여왕과 남자들 1861-1883


제 8장 제국의 영광 1868-1899


제 9장 끝날 때 1900-1901



무엇보다 이 책의 장점은 빅토리아 여왕과 관련된 각종 삽화가 정말 많이, 아주 많이 실려있다는 점이다. 올컬러로! 물론 처음부터 흑백인 삽화는 어쩔수 없지만, 그를 제외하면 올컬러다. 만약 글만 있었다면 다소 지루했을지도 모르는 이 세계사책은, 올컬러 그림자료를 넣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읽는 즐거움 뿐만 아니라 보는 즐거움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아래에 이 책의 일부를 발췌하였다.


▶ 제 1장 즉위준비 1819-1837

6시에 어머니가 깨워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하울리와 커닝엄 경이 와서 내게 면회를 요청했다고 했다. 커닝엄 경은 유감스럽게도 나의 할아버지, 국왕께서 이미 세상에 없다는 것, 오늘 새벽 2시 12분에 숨을 거두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내가 여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고했다. p 012, 빅토리아의 일기 中



(빅토리아가)탄생한 시점에 아버지 켄트 공에게는 세 사람의 형이 건재했으나, 모두가 정식 결혼에 의한 자식이 없었다. 만약 이 백부들 중 누군가가 적자를 얻었거나, 아니면 선왕이 살아 있는 동안 빅토리아에게 동생이 생겼다면 남자 우선인 계승 순위 때문에 왕위가 돌아오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빅토리아가 겨우 8개월이 됐을 때 아버지 켄트 공이 세상을 떠나 동생이 태어날 가능성은 사라졌으며, 백부의 자식들도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빅토리아는 겨우 18세의 나이로 영국의 군주가 된다. p 012



모친인 켄트 공 부인은 세상을 떠난 남편의 시종무관이었다가 자신의 회계관으로 등용된 존 콘로이와 함께 딸이 세간의 눈을 최대한 피하게 하고, 동시에 모랄면에서의 의심스러운 왕궁 사람들과도 심리적으로 깊게 엮이지 않도록 켄싱턴 궁전에 격리하듯이 키웠다. (…) 켄트 공 부인의 동생 레오폴드는 빅토리아에게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하는 사모의 대상이었으며, 동시에 지적인 인도자이기도 했다. 그는 세계 각지에서 현지의 정세를 적어 보내주었고, 편지를 통해 지리와 정치, 국제 정세의 지식을 전수했다. 자신이 여왕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녀가 아직 모르던 시절부터 빅토리아는 어머니와 콘로이, 레오폴드의 유도로 ‘그날’을 위한 준비를 착착 쌓아가고 있었다. p 019



1832년 7월, 13세일 때 어머니가 일기장을 준 일을 계기로 빅토리아는 더욱 구체적으로 하루하루의 기록을 일기로 남기기 시작했다. 이 일기는 가족의 죽음 등 도저히 말로 할 수 없을 것 같은 중대한 일이 일어났을 때 중단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반드시 제개되었고,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계속 기록되었다. 또 언니, 숙부, 아이들, 가족과 친척에게는 대량의 편지를 썼다. p 021



빅토리아가 어른이 되어 남편과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보낸 건실하고 도덕적인 삶은 19세기 중류 계급 사람들에게 가정적 도덕의 모범이 되었다고 평가받는 경우도 있었다. 그 원점에는 가족이 없던 왕녀가 도덕 교본과 인형놀이로 생각해낸 공상의 가정 이야기가 있었다고 한다면, 참으로 얄궂은 상황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적은 것들은 모친이 매일 체크했고, 당연하지만 왕녀가 읽는 것들도 엄하게 제한되었다. 켄트 공 부인은 침실에서 옷을 갈아입을 때, 딸이 하인이나 여관과 필요 이상으로 잡담을 해 영향을 받지 않도록 가정교사에게 트리머 부인의 도덕 교본을 낭독해 들려주도록 명령했다. 당사자의 시점으로 생각한다면 모든 면에서 모친의 간섭과 제한이 많았던 소녀 시대였음을 엿볼 수 있다. p 023



켄트 공 부인은 빅토리아가 즉위할 때까지 같이 침실에서 자고, 가능한 딸을 자기의 컨트롤 아래에서 키우려는 의도가 있었다. 하지만 사교 행사로서의 정찬에는 적극적으로 출석시키지 않았다. 이때의 의도는 어른으로 취급하지 않고, 아이인 채로 머물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머니인 켄트공 부인과 측근이자 브레인인 존 콘로이에 대해서는, 빅토리아를 세간과 격리해 아이 취급을 했다는 점에서 역사가나 전기 작가들의 견해가 일치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아가서는 콘로이는 사설 비서, 모친은 섭정으로 지명되어, 즉위 후에도 영향력을 확보하려 했다. 장사자의 생각은 당연히 별개였다. p 031



빅토리아가 자신이 여왕이 될 것임을 안 것은 1830년 3월 11일, 10세 때였다고 한다. 위의 인용은 즉위 50주년과 60주년 시기에 대량으로 제작된 저렴한 기념 책자 중 하나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 ‘좋은 사람이 되겠다’라는 대사는, 그녀의 성격의 핵심을 나타내는 일화로 누구에게, 언제, 어떻게 말했는지 디테일은 달라지지만, 다양한 종류의 여왕 전기, 회상록, 기사 등의 초반 하이라이트에 대부분 등장한다. p 038



신의 뜻에 따라 이 지위에 오른 이상, 나는 전력을 다해 나라를 위한 의무를 다할 것이다. 나는 너무나 어리고, 전부라고까진 하지 않더라도 많은 부분에서 경험이 부족할 테지만, 지금의 나만큼 올바른 일을 하겠다는 진정한 선의와 열의를 품은 사람은 없으리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p 040, 빅토리아의 일기 中




▶ 제 2장 대관식과 정치 1837-1839

그것은 빅토리아의 어머니 켄트 공 부인의 여관인 레이디 플로라 헤이스팅스에 관련된 사건이었다. 당시 빅토리아와 켄트 공 부인의 모녀 관계는 더욱 험악해져갔으며, 이렇게 사이가 나빠진 원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너무나도 싫어하는 콘로이와도 친하게 지냈던 여관 플로라는 그들의 스파이처럼 느껴졌다. 빅토리아는 그녀를 ‘엄마의 느낌 좋은 레이디’라고 일기에 적었지만, 당연히 비꼬는 것이었다. p 056



여관과 총리를 둘러싼 문제는 같은 시기에 하나 더 더해졌다. 1839년 5월, 휘그파의 멜번 총리가 식민지 자메이카를 둘러싼 법안에서 패배하고, 반대파인 토리파로 정권이 교체되게 된다. 이 시기까지 빅토리아는 정치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멜번총리에게 의지하고 있었으며, 그와 빅토리아는 아버지와 딸 같은 관계를 쌓고 있었다. 대관식 날의 일기에는 자신을 지켜보는 그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던’ 것을 네 번이나 되풀이해서 적었을 정도로. 여왕은 마지못해 토리파의 원로 정치가 웰링턴 공작을 불러 총리가 되기를 요청했으나, …. 필은 빅토리아의 침실 여관 중 ‘몇 명인가를 변경’할 것을 요구했다. 이 여관은 전원 휘그파 정치가의 아내들 중에서 선택되었기 때문이다.  (…) 빅토리아는 ‘전원을 바꾸라고 강요당했다’고 해석해 강하게 반발했으며, 일체의 변경을 거절한다. 결과적으로 필은 내각을 조직하는 것을 단념하고 멜번이 돌아오게 되었으며, 여왕은 만족했다. 하지만 정치에서 구심력을 잃었던 멜번 총리의 명운은 금방 다했고, 2년 후에는 사임하는 사태로까지 몰리게 된다. p 058 ~ 061



빅토리아의 치세는 길었다. 경험을 쌓은 그녀의 의견은 존중되었고, 발군의 기억력을 기초로 제시되는 과거의 지식은 대신들에게도 나름대로 존중받았다. 하지만 편지나 총리와의 회견을 통해 매일 영향력을 발휘한다 해도, 최종적인 결정에는 의회의 의향이 우선시되었으며, 정치나 외교, 군사에 관한 커다란 문제에 여왕 개인의 의견을 밀어붙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한 입장으로 서서히 물러났기때문에, 수많은 나라에서 군주제 그 자체가 폐지되던 역사적 흐름 속에서도 21세기인 지금에 이르기까지 영국 왕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p 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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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근대인물 기행 - 한일 근대사 속살 이야기
박경민 지음 / 밥북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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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내 주 관심사인 한일관계사 역사책을 들고 왔다. 물론 서평은 오랜만이고, 근래까지도 한일고대사책은 종종 읽었다. 서평만 안했을 뿐!




이 책은 한일관계사 중에서도 근대사를 다룬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암흑기이자 떠올리고 싶지 않은 역사인 근대사를 말이다. 단, 일제강점기까지는 가지 않는다. 일제강점기까지 가는 과정을 그릴 뿐이다. 그 과정을 그리는데 있어서 중심은 인물이다. 한일 근대사에 있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의 흐름을 만든 조선인과 일본인을. 그 인물들 중에는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을 법한 인물도 있다. 반면에 학교에서는 가르쳐주지 않는 인물들도 있다. 한, 일 양 국가간의 인물 모두 말이다.



우리는 조선이 어째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는지를 알고 있다. 다만 ‘제대로’ 알고 있는게 맞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가 국사, 근현대사를 배웠을 당시에는 그 유명한 순/헌/철 시대의 세도정치와 나쁜 일본인들에 의해서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정도만 배웠다. 약간 ‘남탓’ 위주였다고 해야할까? 여튼 그렇게 배웠다. 반대로 우리에게는 자랑스러운 역사인 독립운동사는 아주 세세하게 배웠다. 이름이 비슷비슷한 수많은 독립운동 단체들을 하나하나 외우면서. 이 당시에는 별 생각이 없었다. 국사, 근현대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오로지 수능 때문이었으니까. 그냥 가르쳐주는 대로 배웠고, 수능을 봤으며, 한 문제 틀린걸로 분노했었더랬다. 뭐 여튼, 그랬다.



그리고 꽤 오랜시간이 흘렀다. 언제부턴가 역사책을 읽는데, 특히 한일관계사 관련 역사책을 읽으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임진왜란이 오롯이 왜놈들 탓인가? 2백년간의 평화에 도취되어, 국방력을 조금씩 조금씩 줄여나간 조선의 위정자들은 문제가 없었나? 당시 조선의 왕이었던 선조의 리더십은 문제가 없었나? 일제강점기가 온게 오롯이 나쁜 왜놈들 탓인가? 당시 조선의 왕과 조선을 주름잡던 노론세력들은 정말 문제가 1도 없었나?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학교에서는 가르치지 않는 어두운 역사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어찌보면 부끄럽고, 창피하지만 엄연한 우리의 역사를 말이다.



우리 조상들의 어두운 역사를 이야기하면, 식민사관이다 뭐다해서 마녀사냥을 하던 시절도 있었다(내 블로그에도 그런 덧글들 꽤 있었음^^). 그나마 다행인 건 요즘은 시대가 변해서, (학교교육은 몰라도) 예전처럼 빛나는 역사만 이야기 하지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얼마나 다행인지. 몇 백년이 흐른 지금에서야 류성룡의 『징비록』이 빛을 발하는건가 싶기도 하다. 확실한 건 요즘은 서점에서도 ‘징비’를 하는 역사책들이 왕왕 보이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박종인 기자님의 「땅의 역사」 시리즈 같은?



‘징비’란 지난 일의 잘못을 후회하여, 후에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한다는 뜻이다. 즉, 나쁜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그 일이 왜 일어났는지를 정확히 파악하여 대비한다는 뜻이다. 고로 징비를 하기 위해서는, 지난 잘못에 대해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를 명확하게 알아야 하는게 우선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한일 근대인물 기행」도 ‘징비’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본다. 



저자는 조선후기부터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까지, 조선과 일본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미화도 생략도 없이 사실에 기반하여 책을 썼다. 특히나 동시간대의 일본과 조선의 위정자들이 어떤 행보를 보였는지, 그 행보의 결과가 어떤 결과로 이어졌는지를 말이다. 그러다보니, 한일근대사를 학교에서만 배우고 끝난 사람들에게 이 책은 배신감을 주는 책일 지도 모른다. 왜? 학교에서는 남탓(일본) 위주로 가르쳤으니까.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내가 배웠던 교육과정에 한해서지만. 거기다 일본이 조선을 야금야금 집어삼킬 수 있었던 이유조차도 대게 가르쳐주지 않기도 했고. 그렇기에 난 한일근대사 역사책으로 이 역사책을 추천한다. 정확한 내용을 알아야,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고, 그래야만 반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이후 류성룡이 『징비록』을 썼으나, 조선의 위정자들은 이를 무시했고 결국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이러한 일이 또 반복되지 않으리라는 장담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기에 알아야만 한다. 임진왜란 이후 왜 같은 일이 반복되었는지를 말이다. 그게 바로 이 역사책을 추천하는 이유다.




조선과 일본, 

근대화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일본은 그 기회를 잡았고

조선은 그 기회를 철저히 무시했다.




조선과 일본, 일본과 조선. 근대화의 시작.


조선과 일본. 서구열강의 눈에는 두 나라 모두 먹기 좋은 살구였다. 어떻게든 개항을 하게 하면 되는 거였다. 다만 서구열강에 비해 조선과 일본은 힘이 없었으니, 당연히 불평등한 시작이었을테지만 말이다. 확실한 건 불평등이라 할지라도, 개항을 해서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고 근대화를 하느냐 마느냐이다. 



미국은 함대를 이끌고 일본의 해역으로 들어갔다. 조금의 시차는 있으나, 미국의 배는 조선의 해역으로도 들어왔다. 하지만 조선과 일본의 반응은 달랐다. 일본은 미국을 받아들였고, 조선은 거부했다. 그것도 아주 극렬하게 거부했다. 여기서부터 조선과 일본, 일본과 조선의 평행선은 끊어졌다. 일본은 빠르게 서구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이룩한다. 반면에 조선은 강력한 쇄국을 단행한다.



조선과 일본의 서로 다른 선택의 배경은 어디서 나온 걸까?


시마바라의 난을 계기로 천주교가 가공할 단결력을 가졌음을 절실히 깨달은 막부는 천주교에 대한 단속과 탄압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쇄국정책을 ‘조법’이라며 막부 말기까지 약 250년간 엄격하게 유지했다. 이와 같이 에도막부는 엄격한 쇄국정책을 오랫동안 흔들림 없이 시행했지만, 조선의 쇄국과는 개념상 많이 달랐다. 즉 서구문물과 기술에 호의적인 반면 천주교에는 폐쇄적이었고, 무역의 효용성은 잘 알지만 막부 외의 다이묘와 상인들이 활용하는 것을 엄금했다. 정리하면 에도막부의 쇄국정책은 막부가 허용한 다음과 같은 4개의 제한된 문을 통해서만 바깥세상과 교류할 수 있었다.


나가사키의 데지마를 통한 네덜란드 상인과의 독점무역


쓰시마번을 통한 조선 왜관에서의 독점무역


사쓰마번(현 가고시마현)의 류쿠왕국에 대한 편취무역


마쓰마에번(현 마쓰마에군)의 에조치현(현 훗카이도)에 대한 독점무역 . p 029



일본 도쿠가와 막부는 쇄국을 하면서도, 기본적으로 서구문물(네덜란드)이 들어오는 창구 하나는 계속해서 유지했다. 즉, 본인들의 사상에 걸림돌이 되는 종교는 반대하지만, 본인들의 삶의 질을 높여주는 기술이나 문물은 끊임없이 받아들였던 것이다. 하지만 조선은 달랐다. 조선은 서구의 문물도, 서구의 종교도 전부 반대했다.



개별적인 수탈 외에 탐학한 관리들은 교묘한 수법으로 삼정의 제도를 이용한 시스템적인 수탈을 가장 많이 활용했다. 전정은 경작하는 토지에 부과되는 세금이다.농민들은 원래 수확량의 1/10 정도를 내면 되었으나, 지방 수령들이 여러 가지 명목의 부과금을 붙이며 점점 늘어나기 시작해 심한 경우 수확량의 1/2까지 수탈당했다. 군정은 16~60세의 남자가 군역 대신 군포 또는 쌀로 내는 세금이다. 18세기 중반 균역법의 시행으로 부담이 절반으로 줄었으나 군포를 면제받는 양반 수가 늘어나자 그 부족분이 농민에게 전가되었다. 지방관들은 죽은 사람에게도 부과하거나(백골징포), 어린이에게도 부과하고(황구첨정), 친척들에게까지 세금을 내게 했다(족징). p 065



정조는 죽기 직전 세자와 김조순을 불러 세자에게 옆에 있는 김조순을 가리키며 그의 보필을 받으면 절대 잘못된 길로 인도하지 않을 것이라는 유훈을 남겼다. (…) 딸이 순조의 왕비(순원왕후)로 책봉되자 그는 영안부원군에 봉해졌으며…. 1804년 정순왕후가 수렴첨정을 거두자 어린 순조를 대신해 섭정했다. 김조순은 정순왕후가 승하한 1805년 막후에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p 071



김조순의 막내아들 김좌근은 초고속 승진을 통해 명실상무하게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핵심이 되었다. (…) 1862년 삼정의 문란 등으로 발생한 각지 농민봉기의 대책으로 설치된 삼정이정청의 총재관을 겸했다. 농민봉기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할 삼정이정청에 농민봉기에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한 세도정치의 원흉을 앉혔으니 제대로 된 대책이 나올 수 있을까? 조선 말기의 정치가 늘 이런식이었다. p 074



조선은 세도정치로 망해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세도정치를 하던 당시 집권여당(안동 김씨 등)을 탓하기엔, 뭔가 부족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세도정치를 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준 사람은,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고 일컫는 정조다. 정조는 안동 김씨의 좌장 김조순을 직접 국구로 만든 사람이기 때문이다. 정조는 외척의 위험성을 잘 아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조순에 힘을 실어주었다. 김조순은 내 사람이니 안그러겠지, 라는 안일한 생각이 문제였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제일 큰 문제는 정조의 조선은, 오로지 정조 한 사람 덕분에 굴러갔던 것이다. 시스템에 의해 잘 굴러가는 조선을 만들었어야 했으나, 정조의 조선은 시스템이 아닌 사람, 즉 정조 한 사람이 움직이는 나라였다. 그렇기에 정조가 죽자마자, 정조라는 한 사람 때문에 숨죽이던 간신들이 여기저기 몰려나와, 조선을 갉아먹기 시작 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서구 열강이 앞다투어 조선으로, 일본으로 밀고 들어왔다.


(일본) 2개월이 넘는 협상 끝에 1854년 3월 31일 역사적인 미일화친조약을 맺었다. 막부는 일단 개항해 전쟁을 피하되, 시간을 벌어 서양을 이길 국방력을 키우자는 심산이었다. 역사적인 조약의 체결로 일본은 개국으로 나아가는 첫발을 내디뎠다. 통상조약은 아니지만 일본이 서양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다. 이 조약을 모델로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와도 조약을 체결했는데, 최혜국조항 등 일본에 불리한 조항을 뒤늦게 깨닫고 나서 후일 메이지 신정부가 오랫동안 불평등조약 개정이라는 숙제를 떠안게 된다. p 034




(조선) 프랑스군과의 병인양요에 이어 신미양요에서 미군이 물러나자 대원군은 더욱 확고한 쇄국으로 치닫게 된다. 일본이 이미 개항했다는 것과 개항 이후 벌어지는 일본 사회의 격렬한 변화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국제정세 파악에 소홀하고 시대적 소명을 통찰하지 못한 ‘우물 안 개구리’ 조선호는 시대의 조류와는 역방향으로 더욱 강하게 나아가고 있었다. p 133



일본은 미국에 개항했다. 당연히 불평등한 관계였으나, 일본은 개항했다. 당시 청나라 이홍장과 주중 일본공사 모리 아리노리의 대화에서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이홍장이 물었다. “왜 귀국은 서양옷을 입는가.”


모리가 대답했다. “옛날 옷은 놀기에 좋았지만 열심히 일하는 데는 절대 맞지 않는다. 우리는 가난하고 싶지 않다. 부자기 되기 위해 옛것을 버리고 새 것을 취했다.”


이홍장이 반격했다. “의복 제도는 조상에 대한 존중 표시다. 만세 후대에 이어야 한다.”


모리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조상이 살아 있어도 똑같이 했을 것이다. 천 년 전 조상들은 중국 옷이 당시 일본 옷보다 우월해서 중국 옷을 택했다. 남의 나라 장점이 보이면 일본은 어떻게든 배워서 따라한다. 그게 일본의 미풍양속이다.” _P 287 (「대한민국 징비록」 中 모리 아리노리 전집 일부, 박종인 」




조선은 미국이 이 땅에 들어오는 것을 극렬하게 반대했다. 그렇기에 조선의 백성들을 사지로 밀어넣었다. 무기에서부터 이미 엄청난 차이를 보인 미군과 조선군이었음에도 말이다. 결국 조선 군은 미군에 의해 무참하게 학살당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딱 48시간만에 종료된 이 날, 미국 전사자는 단 3명인 반면, 미군측에서 작성한 기록이긴 하지만 조선군은 최소 300명 이상이 죽었다. 헌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날의 전투는 조선의 ‘승리’로 둔갑했다. 이유는 단 하나다. 미국이 조선의 해역에서 떠났기 때문이다. 그저 미국이 조선의 개항을 ‘포기’하고 돌아선 것인데도,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조선의 위정자들은 조선이 승리했다고 자축했다. 조선군은 전멸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조선은 완벽한 쇄국을 선언하며, 조선 땅 곳곳에 척화비를 세웠다. 



신미양요 4년 뒤, 일본 운요호가 미국이 했던 것 처럼 강화도로 쳐들어왔다. ‘개항’을 빌미로 말이다. 과거 미국이 일본에 그러하였듯이. 이 때의 일본은 이미 근대국가로 돌아선 뒤 였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열강에 문호를 개방하고, 먹는 것 부터 입는 것 까지 모든 것을 서구를 따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본은 근대국가로 나아가고 있었다.



1863년 봄 5명의 조슈번 청년들이 밀항해 영국 유학을 가기 위해 영국 범선의 석탄 창고에 숨어 요코하마에서 출발했다. 이들은 ‘서구의 해군과 국방기술을 배우고 온 후 제대로 된 양이를 하겠다’고 번주를 설득했고, 당시 번의 실세 다카스키 신사쿠의 지원으로 유학이 결정되었다. 유학이 불법이었기에 번주는 모르는 체 하되 사적으로 경비 지원을 해주었다. p090 (유학생 중 한명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



메이지 신정부는 선진국의 근대문물을 직접 시찰하고 이를 개혁에 반영하고자 용단을 내렸다. 오늘날 장차관과 국장 등에 해당하는 상당수의 핵심 인력이 무려 2년 가까운 기간에 걸쳐 구미 12개국을 순방했다. 이들의 또 하나의 숨겨진 임무는 서구와 맺은 기존 불평등 조약의 재협상이었다. (…) 당시 신정부의 실세 및 정부 각 부처의 중견 관리 41명, 수행원 18명, 유학생 43명 등 100명이 넘는 대규모였다. 이들의 장기 공백으로 정무에 큰 차질이 빚어졌으니 메이지 신정부의 서구 따라잡기를 통한 근대화의 의지와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p 112



이렇게 말이다. 이 때 서구에 유학을 갔던 유학생들이 훗날 메이지유신을 주도하고, 근대 일본의 권력층에 선 사람들이며,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데 일조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우리에겐 ‘원수’라는 말로도 부족하나, 일본에서는 나라를 발전시킨 애국자였다.




조선은 세도정치 후에 또 다른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그저 성씨만 바뀌었을 뿐이었다. 거기다 왕실은 황제국을 자칭했다. 물론 일본도 만세일계라는 허황된 말로 (천황)제국주의로 나아갔지만, 적어도 일본은 근대국가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오로지 황제를 위한 헌법을 만든 대한제국과는 달리, 일본은 천황제를 명시하긴 했으나 적어도 서구열강의 헌법을 조사하여, 외적으로나마 입헌군주제의 면모를 갖춘 근대헌법을 만들었다.



정권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탕평책을 추진해 그간 소외되어 있던 남인과 북인등을 골고루 발탁했다. 아울러 역량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했다. 탈세와 당쟁의 온상이자 유림의 사권력으로 뿌리내린 서원을 정리했다. (…) 백성들에게 피해가 컸던 환곡제를 폐지하고 사창제를 시행했고, 지방특산물의 진상제도를 폐지하는 등 백성들의 잡세를 없앴다. 양반과 토호의 세금 등을 철저히 조사해 양반에게도 세금을 부과했다. 호포제를 시행해 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했고, 양전을 통해 토호와 양반의 누락 토지를 발굴해 전정을 개선했다. 또한 은광 개발을 허용하는 등 나라의 재정확충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p 127



1865년 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확실히 세우기 위해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경복궁의 중건 공사를 시작했다. (…) 양반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원성이 높아져 대원군 몰락의 한 원인이 된다. p 128



물론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고 개혁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희망은 있었다. 하지만 그 개혁의 중심이 왕권강화였기에, 결국 그 개혁도 경복궁 중건이 시작되며 빛을 바랬다. 거기다 천주교 박해는 계속 되었고, 쇄국 역시도 계속되었다. 심지어 아들인 고종은 아비를 못마땅해하면서, 부자간의 권력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그 사이에는 고종의 부인인 민비가 있었다. 고종이 권력을 잡았을 때, 민비도 권력을 잡았다. 그렇게 조선에는 또 다른 세도정치가 시작 된 것이다. 여흥 민씨라는 성씨만 바뀐 세도정치가.



근대화의 기회를 무시하고

철저하게 ‘황제국’을 선언한 조선은

망국행 급행 열차에 탑승했다.



물론 조선에도 근대국가로 나아가고자 했던 사람들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결과론적으로 그들은 실패했다. 



아시아에서는 제일 빠른 근대국가가 된 일본은 아래와 같이 차근차근 조선을 식민지화 시키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준비 과정에서 보다 원활하게 조선을 식민지화 시키기 위해, 고종을 비롯한 대한제국 황실을 위한 당근도 차근차근 준비되고 있었다는건 안비밀.



ㆍ1904년 한일 의정서 및 제 1차 한일협약 - 조선을 일본 군사기지로 사용, 고문 정치, 그리고 대한제국 황실 보전 및 보증


ㆍ1905년 제 2차 한일협약 (을사늑약) - 외교권 박탈, 그리고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 유지 보증


ㆍ1907년 한일신협약 (정미7조약; 정미늑약) - 차관정치, 고종 강제퇴위 및 조선 행정권 등 박탈


ㆍ1909년 기유각서 - 사법권 박탈


ㆍ1910년 6월 - 경찰권 박탈


ㆍ1910년 한일병탄 - 국권피탈, 그리고 한국 황제 및 그 일가의 존엄과 명예 향유 보존 및 충분한 세비 지원




또 다시 이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과연 장담할 수 있을까? 우리 해군이 욱일기를 단 일본 전함에 경례를 한게 불과 최근이다. 욱일기를 단 일본 해군이 독도 인근에 들어온 게 얼마 안된 일이다. 



류성룡이 말한 ‘징비’를 우리는 얼마나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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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한번씩 블로그에 서평을 올렸던 역사책 중 일제강점기 관련 역사책 몇 권을 다시 꺼내어 읽었다.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암흑기와도 같은 바로 그 시대이다. 암흑기인 일제강점기를 그린 책은 크게 독립운동과 일제의 만행으로 나뉠 수 있는데, 이번에는 내가 소개하려는 책은 일제의 만행과 관련된 책이다. 이 역사책은 그 내용도 탄탄하거니와, 우리가 절데 잊어서는 안될 역사이기에 과거에도 여러차례 블로그에 소개했던 책이기도 하다.



물론 이 역사책들은 일제의 만행이 고스란히 담겨있다보니, 가벼운 맘으로 읽기에는 그 내용이 너무 무겁다. 하지만 그렇다고 평생토록 모르고 살면 안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가해자인 일본도 모르쇠로 일관하는 역사이다보니, 당시 피해자였던 우리마저 이 역사를 잊는다면, 지난날 일제의 만행은 없던일이 되어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혹시나해서 덧붙이지만, 난 반일을 하자는 이야기도 일본을 가지말자는 이야기도 아니다. 나만해도 시간만 되면 일본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고, NHK채널을 자주 보고, 일본원서를 자주 읽는 사람이니까. 그저 많은 사람들이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알고, ‘기억’했으면 좋겠다. 적어도 매번 무슨 이슈가 있을 때마다 갑자기 ‘반일’, ‘불매’를 들고 일어나서 씩씩거리다가, 어느 순간에 슉 가라앉아서 ‘반일이 무엇? 불매가 무엇?’ 하며 모르쇠하는 그런 상황도 반복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특히 어떠한 이슈로 인해 반일, 불매를 외치면서 누군가를 ‘매국노’라고 마녀사냥하는 행위는 정말-.. 일제와 다를바가 하나도 없다. 그렇게 누군가를 매국노라고 칭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애국자이고 깨끗한지 본인을 돌아봤으면 좋겠다. 과연 본인들은 일제의 잔재가 남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일본음식을 먹지 않고, 일본제품을 하나도 쓰지않는지, 경술국치일이 언제인지, 아니 경술국치가 어떤 의미인지는 아는지, 수백명의 독립운동가들 중 이름과 그의 행적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되는지, 매 국경일마다 태극기를 게양하고 있는지, 순국선열을 위한 묵념을 하고 있는지를 물어보고 싶다.



이렇게 쓸데없기 길게 말한 이유는 단 하나다. 저렇게 누군가를 탓할 시간에, 혹은 어떠한 이슈가 있을 때마다 냄비처럼 들끓었다가 가라앉을 시간에, 차라리 한일근대사에 대해 정확히 알고 기억하기를 바란다. 눈앞에 있는 일본인들이 똥베짱 부리면서 자기네 조상들은 잘못없다고 말할 때, 왜곡으로 점칠된 역사를 배우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할 때, 그들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요목조목 냉정하게 지적할 수 있기를 바란다. 현대에도 곳곳에 남아있는 친일파들이 백년전 그 때처럼 기승할 생각을 못하도록 매섭고 날카로운 눈으로 감시할 수 있기를 바란다.




1) 일본이 찾아낸 침략과 식민지배의 기록: 우리는 가해자입니다


지은이: 아카하타신문편집국 기자들

출판사: 정한책방



이 책은 일본 기자들이 기록한 책이다. 제국주의 시절 자기의 조상들이 어떠한 만행을 벌였는지 직접 보고, 듣고, 두 발로 뛰어가며 목숨 걸고 취재하여 남긴 기록물이다. 이 책 안에는 일본이 제국주의시절 자행한 모든 불법행위에 대한 증거와 증언(녹취록)이 그대로 담겨있다. 이 책의 서문은 이렇게 쓰여 있다.


​이 책은 침략 전쟁의 역사와 상황을 규명하고, 기자들이 한국, 중국 등에서 피해를 입은 현지 주민들로부터 직접 들은 증언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한반도에서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서는 1부 '청일/러일전쟁에서 패배 전까지의 51년'과 '한국병탄과 식민지 지배'에서 다룹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한 것은 청일/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주된 목적이 한반도의 국민과 자원에 대한 '강탈적 지배'에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과, 일본군의 개입/군사지배에 저항하며 일어난 동학농민혁명, 항일의병운동 등과 같은 한국의 민중 운동, 특히 3.1 독립운동이었습니다. 



한일 관계의 초점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는 위안부 피해자를 직접 취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일본군의 통제 아래 벌어진 수 많은 여성 인권 유린 행위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중략)


실제로 천황 절대의 암흑 정치 세력에 의해 불법화된 당 기관지 <세스키>는 '조선 독립운동 3.1기념일 만세!', '일본, 조선, 대만, 중국 노동자/농민의 단결!', '조선의 토지를 조선의 농민에게!' 등의 구호를 내걸었습니다. 그리고 수 많은 우리의 선배들이 탄압받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투쟁은 미래를 향한 한일 두 나라와 두 나라 국민들의 우호에 있어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고 확신합니다. 한국의 독자 여러분께서. 부디 이 책을 읽어주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한국 독자에게 전하는 글 - 아카하타 신문 편집국장>



이 책을 쓴 일본 기자들은 자기 조상들의 신념을 따랐다. 식민지배를 하던 민족이었음에도, 당시 식민지 노동자들의 편에 섰던 그 조상들의 신념을 말이다. 그래서 과거의 그 조상들처럼, 이들도 일제의 만행을 취재하는 내내 수많은 반대와 살해협박에 시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일제의 만행을 알리고자 이 책을 썼다.



당시 식민지배를 당했던 조선과 우리 조상들. 백여년이 지난 현재 우리는 그 땅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식민지배 당시 일제의 만행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조상들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있나? 이 책을 읽다보면 머릿속에 이런 질문들이 떠다니기 시작한다. 가해국가의 기자들은 자국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책까지 내었는데, 당시 피해국가의 후손들인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 14살 때 강제 동원된 한국의 근로정신대 피해자, 양금덕


초등학교 일본인 교장과 헌병은 "정신대로 일본에서 일하면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여학교도 갈 수 있다." 라며 학생들을 속여 양씨 등 10명을 지명했습니다. 나중에 부모들이 반대한다고 하자, 교장은 "네가 안 가면 경찰이 너희 부친을 잡아갈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그렇게 끌려가게 된 곳은 미쓰비시 중공업 나고야 항공기제작소의 도우도쿠 공장이었습니다. 삼엄한 감시하에서 거대한 비행기 부품에 도장작업을 했습니다. 당시 페인트가 자주 눈에 들어갔던 탓에 지금도 눈이 아프다고 합니다. (중략) 양 씨는 일본이 패전을 맞은 뒤인 1945년 10월에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급료는 받지 못한 상태였고, 한국 사회에서는 일본군 위안부로 오해받았습니다. 정신대였던 것을 숨긴 채 결혼했는데, 남편은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되자 "더러운 여자"라며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 P 100



-위안소를 전전하며, 김복동


김 씨가 14살이던 당시 마을의 구역장과 반장이 일본인과 함께 찾아와 "딸을 군복 만드는 공장에 보내라. 거부하면 반역자다" 라며 가족들을 위협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끌려간 곳은 중국 광둥성에 있던 위안소였습니다. 일본군의 성 노예가 되어 하루 15명의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주말에는 50명이 넘었습니다. 5년간 인도네시아와 싱가포르 등을 전전했습니다. 외국에 가면 일본 정부가 이 문제를 이미 해결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보니 이야기를 하면 다들 놀라면서 이대로는 안된다고 많이 공감해주십니다. 



-중국 후난성, 창지아오 학살사건


쟝야오메이 증언) 일본군이 창지아오에 왔을 때 쟝씨는 생후 1개월이 된 작은 딸과 집에 있었습니다. 세 사람의 일본군은 쟝 씨를 발가벗겨 이웃집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들은 부엌에 이불을 깔더니 당시 15살 정도이던 그 집 소년에게 쟝씨를 강간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호통을 들은 소년은 얼떨결에 쟝 씨를 덮쳤지만 공포로 떨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화가 난 일본군은 나무 막대기를 쟝 씨의 하반신에 쑤셔 넣고 30분 이상 고통을 주었습니다.


런더바오 증언) 일본군이 집에 들어와서 총검으로 런 씨의 머리를 가격하고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다음 날 출산 예정이던 모친은 거동조차 힘든 몸으로 침대에 누워있었는데, 일본군이 총검에 2번이나 배를 찔려 태아와 함꼐 목숨을 잃었습니다. 일본군은 이에 멈추지 않고 모친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낸 뒤 총검으로 찔러 높이 내걸었습니다. 주변에 있던 동료 일본군들이 웃으며 박수를 쳤습니다. 



-정의감 강하던 아버지도 결국 가해자


고바야시의 차녀 노자키 요시코가 <아카하타신문>에 아버지, 고바야시 다로 당시 상등병의 일지를 제공했습니다. "가족으로서는 가해 사실을 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인지상정이겠지요. 그러나 침묵하고만 있으면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 되어버리잖아요. 괴롭더라도 진실을 말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중략)


난징점령 (1937년 12월) 까지의 행군과 일본 육군 최대 규모 작전인 '쉬저우 작전'의 경로를 기록한 일지입니다. "병사는 칼로 머리를 벤다. 토민(민간인)은 총살"등의 기술이 남아있습니다. 일지의 기술만 봐도 살해당한 민간인이 15명 입니다. (중략)


포로 살해 관련 일지에는 제16사단의 나카지마 게사고 사단장이 "돼지 같은 놈들은 주저 없이 죽여도 된다"고 명령한 내용도 적혀있습니다. (중략)


고바야시의 차녀 노자키는 고등학생 시절에 처음 일지를 읽었을 때, 기록되어있는 가해의 참상을 접하고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가족의 입장에서 볼 때는 늘 성실하고 정의감이 강했던 아버지였기에 더욱 무서웠고, 전쟁의 끔찍함 또한 통감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아베 총리는 중일전쟁이 침략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아버지의 일지를 보면 애초부터 침략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를 대신해 희생자 유족에게 사과한다고 바뀔 것은 없겠지만, 스스로 가해를 저질렀다는 진실과 마주할 수는 있겠지요. 이 일지가 평화를 위해 작게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합니다."



 



2)분노하기 전에 알아야 할 쟁점 한일사


지은이: 이경훈

출판사: 북멘토



이 책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의 만행과 그 만행들을 왜 지금까지 풀지 못하고 있는지를 요목조목 밝히고 있다. 총 아홉가지 문제를 이야기 하고 있으며, 그 아홉가지가 바로 “일본군 성 노예, 강제동원, 사할린 한인, B·C급 전범, 야스쿠니 신사, 재일 한국인, 독도, 문화재 환수, 역사교과서” 문제이다.



이 아홉가지 문제를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하는 제일 큰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한일기본조약’이다. 1965년 박정희 정권 당시 한일국교가 정상화 되었는데, 이 때 체결한 ‘한일기본조약’이 바로 일제의 만행에 대한 면죄부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한일기본조약 제2조에는 1910년 8월 22일 이전에 체결된 조약·협정은 ‘이미 무효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라는 조항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한국은 일본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강요된 한일병합 이전의 모든 조약이 무효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체결은 합법이었으나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무효가 되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 중략 … 청구권협정으로 일본이 한국에 제공한 무상 3억달러, 유상차관 2억달러의 성격에 대해서도 한국은 배상금이라고 주장하지만 일본은 ‘독립축하금’이라고 하여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한일 간의 재산·권리 등에 대한 청구권에 대해서도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음을 확인한다’라고 하여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에 따른 한국국민들의 개인청구권 문제를 모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나마 일본군 위안부, 사할린 한인, 원폭피해자 문제 등은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B·C급 전범으로 몰려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한국인들에 대한 피해보상에 관해서도 일본 측은 한일청구권협정을 내세우며 한국 측에 보상책임을 떠넘겼습니다. 졸속으로 체결된 재일한국인협정은 재일한국인의 법적 지위와 민족차별 문제를 매듭짓지 못하였습니다. 어업협정에서는 독도문제를 협정문에 명기하지도 않았고, 문화재 협정에서는 협정 이후 새롭게 드러나는 일본인 개인이 소장한 한국 문화재의 환수에 대해서 한국정부에 '기증되도록 권장'한다고 하여 이후 약탈당한 문화재 환수에 적극적으로 나서가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_ P 016



심지어 박정희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었던 그의 딸은 일본군 성노예 문제와 관련하여 일본과 밀실협약을 맺기도 했다. 거기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소송은 사법농단과 재판거래등으로 무기한 연기되기도 했다. 이후 정권이 두 차례나 바뀌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변한 것은 없다. 아, 생각해보니 변한 것이 하나 있긴 있다. 당시 생존해계셨던 피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돌아가셨다는 것. 이제 정말 일본 정부의 사과를 받아야 할 당사자인 피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몇 안계신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정부나 일본 정부는 변한 것이 없다.




3)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지은이: 강덕상

출판사: 역사비평사


이 책을 쓴 사람은 얼핏 보면 한국인이지만, 사실은 일제강점기 당시에 태어난 황국신민이었다. 당시 지도상에 ‘조선’은 없었으므로, 그는 일본어를 쓰고 일본문화를 향유하던 일본인이었던 샘이다. 심지어 일본에서 살았으니, 조선에 대한 기억이나 향수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하지만 그의 뿌리는 어디까지나 조선이었다. 그런 그가 역사를 전공하면서, 자신의 정체성과 한반도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렇게 관동대지진에 대해 알게되었다. 그리고 당시에 있었던, 조선인을 상대로한 관동대학살을 마주한다.



저자는 책에서 이리 말했다. ‘왜, 어째서, 무엇때문에, 관동대학살의 피해국인 한국정부는 이 일에 대해 언급이 없고 무관심한건가?’. 



그래서 관동대지진과 관동대학살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고, 기록물을 찾아다니고, 증거, 증언 등 수 많은 자료를 모았다. 그리고 이 책에 실었다. 그 수많은 사진과 기록, 자료들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심지어는 눈 뜨고 보기 힘든 일본인이, 조선인을 학살하는 사진들도 게시되어 있다. 



하지만 이렇게 관동대학살을 샅샅히 밝힌 책이 발매되었어도, 슬프게도 한국 정부는 여전히 무관심하다. 심지어 관동대학살이 있었던 1923년 9월 1일에 일어난 관동대지진은, 그 의미가 바뀌었다. 2011년 3월 11일 원전사고를 일으킨 동일본 대지진으로 말이다.



내지인과 조선인을 구분하기 어려우므로 말씨가 분명치 않은 자를 조선인이라 하고, 무리를 이룬 피난민을 보고서는 ‘불령선인’ 단체라고 속단했으며, 조선인 노동자가 고용주의 인솔하에 작업장으로 가는 것을 ‘조선인 무리의 습격’ 이라고 잘못 믿어리는 등의 사례가 많았다. 9월 2일 오후 3시경 자경단원이 고마고메 경찰서로 끌고가 폭탄과 독약을 소지한 조선인을 조사해본 겨로가, 폭탄이라고 한 것은 파인애플 깡통이었고 독약이라고 한 것은 사탕이었다. P 108



이처럼 불안에 떠는 일반 시민을 동원한 권력은 어떤 행동요령을 내렸을까? 앞서 살핀 것처럼 경시총감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요시찰인, 사회주의자, 조선인의 책동에 특히 주의하시오, 방화에 주의하시오” 등의 말을 했을 것은 분명하다. 일반 심니이 점점 더 암시에 사로 잡혀갈 때, 이런 종류의 예단이 실제로 원인 불명의 화재와 겹쳐 민중을 더욱 흥분시키면서 “방화다!”, “불 지르는 것을 보았다!”, “조선인이다!”라고 외치게 만들었다. P 113



지침으로 “일부 조선인과 사회주의자 가운데 불온을 꾀하는 자 있으니 저들에게 빈틈을 엿볼 기회를 주지 않도록 시민 여러분은 군대·경찰과 협력하여 충분히 경계토록 할 것이며, 우물에 독을 투입하는 부녀자도 있으니 우물물에 주의할 것” 등의 지령이 있었던 것은 뒤에서 살필 사이타마현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다. “그 당시 ‘조선이니 습격해온다’라는 전단지를 신문사 이름으로 게시했던 일도 있었다고 한다”. P 126



일본 국회의원 인 육군소장 쓰노다 고레시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집 부근에서도 매우 소란스러워 문밖으로 나가보았더니 무장한 군대가 있었다. 그리고 대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적은 지금 하타가야 방면에 나타났다”라고 호령하고 있어 그 장교를 붙들고 “적이란 누구인가”라고 질문했더니 “조선인이다”라고 답했다. 내가 다시 “조선인이 어째서 적인가” 라고 묻자 “상관의 명령일 뿐 알지 못한다”라고 대답했다. P 181



지바가도로 나오자 1,000명 가까이 될 것으로 여겨지는 조선인이 4열로 늘어서 있었습니다. 가메이도 경찰서에 일시 수용되어 있던 사람들입니다. 헌병과 군대가 얼마간 붙어 나라시노 방향으로 호송하는 중이었습니다. 물론 걸어서였지만요. 행렬에서 벗어나면 구타하는 등 포로처럼 다루었으며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중략)… 헌병은 2명, 병사와 순사가 4,5명이 동행했습니다. 그 뒤를 사람들이 우르르 뒤쫓아가면서 ‘우리 원수를 내놔라’ 하며 흥분하고 있었습니다. (헌병은) 군중들을 쫓아내고 조선인들을 목욕탕에 넣었지요. …(중략)… 군대와 수사는 뒷일은 알아서 하라는 듯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자, 이제 그 다음에는 베고, 찌르고, 때리고, 차고 … 총은 사용되지 않았지만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P 278



4) 흔들림없는 역사인식


지은이: 다카자네 야스노리

출판사: 삶창


이 책의 저자는 일본인이다. 맨 위에 소개한 일본 기자들처럼, 이 책의 저자도 일제의 만행을 파헤치기 위해 당시 식민지배의 피해자들의 곁에 서서 목소리를 냈던 사람이다. 뿐만아니라, 역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올바른 역사 인식을 지니기 위한 역사윤리에 대해서도 이야기 한다.



역사왜곡이 만연한 일본에서, 일본인이 이런 책을 출간했다는 사실은 놀랍기도 하지만, 어느 한 편으론 부럽기도 하다. 과거에는 남의 일이라 생각된 역사왜곡이, 실은 우리나라 안에서도 자행되고 있는 것을 두 눈으로 보고 있노라면, 대체 일제와 우리가 다를게 뭐가있나 싶기도 하니 말이다.


일본의 근대사를 둘러싼 역사 인식이 문제가 된 지 오래다. 최대 논점은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크게 두 가지 입장의 대립으로 볼 수 있는데, 사실의 검증과 교육을 중시하는 사고방식 대 사실 검증에는 관심이 희박한 채 근대를 미화, 정당화하는 데 중점을 둔 입장이다. 전자는 후자를 역사 왜곡이라 비판하고, 후자는 전자를 자학사관이라 비판한다. 이러한 대립은 역사교육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 교과서 검정 과정에서 전자는 점차 축소되고 후자 쪽이 증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과서에 따라 강도의 차이는 있으나 사실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교육함으로써 현대를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역사교육이 약화되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런 흐름은 제2차 아베정권에 의해 한층 강화되고 있다. p 035



역사윤리란 ‘역사에 책임을 지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역사 용어로서는 존재하지 않지만 개념으로서는 전혀 드물지 않다. 역사상 자주 볼 수 있고 국제 관계에서 많은 국가가 역사윤리의 과업을 다해왔다. (……)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인간의 길’에 어긋나는 행위가 없었는지를 따져보고, 만일 있다면 반성하고 사죄와 배상, 처벌 등의 과정을 통해 청산할 의무가 발생한다. 또 항상 이 ‘역사윤리’를 의식하며 정치와 사법에 임해야 한다는 뜻도 포함한다. p 036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의 책임을 묻는 이른바 전후 보상문제에 대하여, 일본 정부는 국가 간의 ‘해결’이 끝났다는 이유를 내세우며 완전히 무시했다. 하지만 ‘해결이 끝난 문제’라는 일본 정부의 주장은 핑계에 불과하다. 개인의 손해배상청구권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고, 국가 간에도 배상을 한 것이 아니라 한일 경제협력협정을 맺고 청구권을 방기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는 피해자의 배상 청구를 모조리 거부했다. 그런 까닭에 배상 청구는 사법의 장에서 다툴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사법 역시 하급심에서 드물게 원고가 승소하는 일은 있어도 최고재판소에서는 전부 패소 확정을 강요받았다. 사법이 정치권력을 추종하는 소위 어용 기관이 된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p 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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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화재로 만나는 백제의 흔적

내 개인적으로 제일 백제 역사책 추천을 한다면 이 책, 「문화재로 만나는 백제의 흔적」이다. 제일 큰 이유는 저자이신 김희태님은 오로지 사료와 문화재에 입각하여 글을 쓰시고, 연구자에 따라 의견이 불분명한 부분에 대해서는 있는 그대로 글을 쓰시고, 판단은 책을 읽고 있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시기 때문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희태님은 쓰시는 책 모두, 행여나 부정확한 오류를 담아서 역사 왜곡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롯이 사료나 문화재를 통해 명확하게 입증된 것을 기준삼아 글을 쓰신다.


이 책은 청소년들에게 추천하기 딱 좋은 역사책이다. 학교 국사시간에 배우는 백제 문화재가 고스란히 책속에 나오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책의 주제가 ‘문화재로 만나는’ 백제의 흔적이다보니 그럴지도 모르겠다. 


대게 ‘백제’라고 하면 우리는 한성백제, 웅진백제, 사비백제, 그리고 익산 왕궁리(천도여부를 떠나서)를 배운다. 더군다나 각 시기에 해당하는 백제성이 남아있기도 하고. 한성은 몽촌토성/풍납토성, 웅진은 공산성, 사비는 부소산성 이렇게 말이다. 시대순으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한성백제(서울) 몽촌토성, 풍납토성은 물론이고, 웅진백제(공주)의 공산성, 사비백제(부여)의 부소산성 그리고 익산 왕궁리 기본으로 나온다. 그리고 이 성들은 해당 지역에 있는 다른 백제 유적지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기도 하다. 


난 학창시절 엄마아빠와 여행을 다닐때, 대게 국사책에 사진이 실려있는 유적지 위주로 다녔다. 그래서 당연히 공주, 부여 여행도 갔었다. 공산성을 다 돌고, 송산리고분군(+무령왕릉)을 보았다. 부여에 가서는 역시나 부소산성(+낙화암)을 다돌고, 능산리고분군, 정림사지를 보았다. 이것들을 직접 눈으로 보았때야 비로소, 국사책에서 공부했던 백제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했다. 확실한 건 엄마아빠와 역사여행을 주로 다녔기에, 역사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엄마아빠와 여행 추억은 덤이고! 아,  어쩌면 이건...엄마아빠의 의도였나 싶기도 하고.....허허.


그저 책으로 공부하는 것과, 직접 가서 보고 공부하는 것은 많이 다르다. 그렇기에 이 책은 자녀를 둔 부모들에게 필히 추천하고 싶은 역사책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책속의 장소로 여행을 떠나고, 그 장소에서 이 책을 다시 꺼내 읽어보고, 그러다보면 막연했던 고대국가 백제가 어느새 눈 앞에 다가온다. 약간 삼천포긴 하지만, 저자의 다른 책인 ‘왕릉으로 만나는 역사, 신라왕릉’도 같이 읽어보면 좋을 듯하다.




2) 백제왕조실록 1,2

우리집 책장 한켠에는 살림지식총서가 쫘르르 꽂혀있다. 물론 전권은 아니고, 역사에 관련된 책들에 한해서만! 이 책 「백제왕조실록 1,2」는 살림에서 고조선부터 조선까지 ‘실록’형태로 출판한 역사책 중 하나이다. 우리집에 백제관련 역사책도 꽤 있는데, 굳이 이 책을 고른 이유는 말그대로 ‘실록’ 형태로 기록되어 있어서, 백제사를 시간순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체적으로 이 책은 《삼국사기-백제본기》를 기본으로 서술한다. 물론 삼국사기가 고려시대에 집필된, 신라의 시선에 입각하여 쓴 책이긴 하지만,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고대사 사료는 삼국사기 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삼국유사도 있긴하나 야사이며, 고대사의 정사는 삼국사기가 유일하다. 물론 삼국사기 만으로는 내용이 빈약할 수 있으므로, 우리와는 달리 고대의 사료가 많이 남아있는 중국, 일본 사료의 내용도 이 책에 담겨있다. 


1권은 1대 온조왕부터 ~ 25대 무령왕까지, 2권은 26대 성왕부터 ~ 31대 의자왕까지다. 1권에 백제 왕의 4/5가 몰빵되어 있는 이유는, 고대중에서도 고대라(^^) 사료가 그만큼 빈약하고, 워낙에 금방 죽은 왕들도(...) 꽤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2권의 성왕, 위덕왕, 혜왕, 법왕, 무왕, 의자왕 쪽은 중국이나 일본쪽의 사료도 꽤나 남아있기에, 그 분량이 1권과 맞먹는다. 그리고 대체적으로...우리가 국사시간에 알고 넘어가야하는 백제 왕들은 대게 후반부 왕들이기도 하고. 하ㅏㅎ.ㅎ.ㅏ하.


책 자체도 작고 얇다보니, 백제 역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간략하게 한눈에 살펴보기엔 이 만한 역사책이 없지싶다. 





3) 백제왕의 죽음

이 책은 내가 고등학생 때 쯤 부터 우리집 책장에 꽂혀있던 책이다. 그때도 지금처럼 역사를 좋아한 건 매한가지였고, 심지어 그때는 부천역 교보문고랑 영풍문고를 제 집처럼 드나들때였기에 아마 그 즈음에 샀던 책이 아닐까 싶다. 다만 당시에는 책을 읽어도 어딘가에 기록한 적도 없었기에, 내가 이 책을 읽었을 때 어떤 생각을 가졌었는지.....뭐, 아마 당시에는 지금처럼 전문서적보다는 흥미위주의 대중서적을 읽다보니, 다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ㅋㅋ


1n년이 흐른 지금와서 다시 읽어본 「백제왕의 죽음」이란 책은 두번 읽을 책은 아닌 느낌이다. 뭐라고 해야하나, 꼭 조선왕 독살사건 이란 책의 백제버전이라고 해야하나?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혹!!’ 하게 하는 그런 책이다. 한마디로 흥미위주의 책이랄까. 하하. 


이 책은 백제왕들의 죽음을 다루고 있으며, 백제왕의 죽음을 크게 3가지(의문사, 객사, 전사) 로 나누었다. 근데 의문사든 객사든 어느 에피소드를 읽어도 결국 ‘추정’으로 끝난다. 정확히는 본인의 추정을 ‘단정’한다. 뭐, 백제같은 고대사는 사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다보니, 추정이 많이 들어갈 수 밖에 없긴하다. 단, 고대사를 추정하는데 있어서는 남아있는 사료(대내외기록, 문화재 등)를 분석하여, 당대의 기준으로 최대한 합리적이라 생각하는 쪽으로 추정한다. 그래서 같은 사건에 대해 어떤 사람은 A라고 추정하고, 또 어떤 사람은 B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이런 고대사의 추정은 들어보면, 둘다 그럴듯하기에 ‘오오! 그럴수도 있겠군!’ 할 수 있다. 단, 언제 어디서 또 다른 사료가 뿅! 하고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추정을 할 뿐 단정짓지는 않는다. 근데 이 책은.....자신의 주장을 추정을 빙자한 단정같달까. 음,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하나. 뭐랄까, ‘조선왕의 1/3이 독살당했다’고 주장하는 그런 이야기와 비슷한 맥락으로 보인달까.



거기다 분명 책의 주제는 백제왕의 ‘죽음’인데, 책의 반정도 되는 분량밖에 안된다. 네, 그냥 뭐 그렇다구요. 백제사에 흥미를 가지는 초기 입문 대중서로는 썩 나쁘지는 않긴한데, 워낙 발매한지도 오래된 책이고, 백제사 초기 입문 대중서로는 지금 나온 책들도 잘나온 책이 너무 많으니(예를 들어 위에 쓴 「문화재로 만나는 백제의 흔적」 같은), 굳이 찾아볼 필요는 없는듯. 허허허하하.하ㅏㅏ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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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묘한 미술관

난 독서를 즐기는 만큼, 책을 수집하는데도 꽤나 진심이다. 이 책 『기묘한 미술관』은 그 수집벽의 일환으로 읽은 책이다. 어쩌다보니 내 책장에는 『방구석 미술관』 시리즈와 『혼자보는 미술관』이 책장에 꽂혀있었다. 물론 내돈주고 산 책들은 아니고, 선물로 받은 책들이긴 했지만. 그래도 뭐랄까. 책장에 꽂혀있는 이 책들을 보니 미술관 시리즈를 완성을 시켜야 될 것 같은 그런 강박관념(?)이 생겨버렸다.

다만, 이런 류의 책은 돈 주고 사기엔 쵸오끔 아까운 느낌도 있다보니, 회사 독서통신(^^) 제도를 활용했다. 이럴땐 우리 회사 꽤 만족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책은 앞선 방구석 미술관 시리즈 처럼, 코로나 시국으로 인해 미술전시회를 온전히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물론 요즘은 위드코로나라고 해서 이것저것 방역도 완화하고, 출입제한도 완화해서 미술전시회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갈 수 있다. 하지만 방역완화와는 별개로 확진자수는 n십만명 단위로 급증하고 있으니, 솔직히 나한텐 이런 전시회를 가는건 목숨을 거는 것과 같다고 본다. 뉴스에선 매일 독감정도라고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독감으로 매일 몇십만명이 걸린적이 있기나 했었나? 무엇보다도 사망자도 급증하는 추세고. 뭐, 누군 무증상으로 훅 지나갈지도 모르겠지만, 누군가는 코로나로 인해 목숨을 잃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난 앞으로도, 꽤 오랜기간 직접 가서 보는 것보다는 이렇게 책으로 간접구경을 하는 편을 선택하련다.

행여 코로나를 뚫고 미술전시회 가서 명화들을 직접 본다고 할지언정, 옆에 해설사가 없으면 누가 그렸는지, 이 그림에 무슨 이야기가 있는지 모르는건 매한가지다. 그냥 몇 초간 그림만 멀뚱히 보다가 나올뿐. 반면에 안전하게 내 방구석에서 이 책 한권을 읽으면, 그림 속에 어떤 이야기가 남겨있고, 누가 그렸는지, 왜 이런 그림을 그린건지 한눈에 알 수 있고 얼마나 편하고 좋은가!

무엇보다 이 책에서 마음에 드는건, 그림 속에 있는 사연들! 애초에 책 제목 자체가 ‘기묘한’미술관이다. 즉, 미스터리한 이야기가 담겨있다는 것! 난 미스터리한 이야기도 늠나 좋아하다보니, 꽤나 내 취향을 저격한 미술책이라고나 할까?


2) 방구석 미술관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책 한 권으로 손 쉽게 보고, 그 명화를 어떻게 해석하는지까지 알려주었던 책. 이 책도 그렇다. 책 한 권으로 내노라하는 명화들을, 내 집에서, 내 책상앞에서 마주할 수 있는거다. 미술관을 좋아하는데, 코로나19로 인해서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단비와도 같은 책이랄까?

그저 단순하게 ‘이 그림은 이런 뜻이야’가 아니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가 어떤 시대를 살았으며,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감정 속에서 이 그림을 그렸는지도 이 책 속에 있다. 단순히 그림 뿐만 아니라 그림을 그린 화가에게 초점을 맞춘, 그림을 인문학적으로 해석한 책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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