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하는 철학자
헤르만 폰 카이저링 지음, 홍문우 옮김 / 파람북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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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출신 철학자가 쓴 여행에세이 「방랑하는 철학자」. 이 책을 받는 순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도 그럴게.....벼..벽돌책이잖아? 철학자가 세계여행을 하며 쓴 책이라고 하길래, 당연히 여행에세이라고 생각했는데. 으하하하하. 정말 반전도 이런 반전이 있을 줄이야. 내가 살면서 읽은 벽돌책이라고는 「코스모스」나 「사피엔스」 정도인데, 이 책은 앞 두 책보다 페이지가 더 많다. 무려 800페이지!! 


‘철학자의 세계여행 기록’이라고 하길래 당연히 뒤에 있는 단어 ‘세계여행’이 메인이라 생각했는데ㅋㅋㅋㅋ으하하하. 앞 단어 ‘철학자’가 메인이었다. 정말 진짜 와. 철학책은 읽어본 적이 단 한번도 없다보니, 와. 순간 당황했지만, 읽었다. 다 읽고야 말았다. 벽돌책에다가 철학책이라서 솔직히 조금 겁났다. 어려울까봐. 웬걸? 의외로 술술 읽혔다. 뭐, 간혹 흐름이 끊겨서 위험한 순간도 있긴 했지만, 완독 성공!  이렇게 내 책장엔 벽돌책이 또 하나가 늘어난건가. 하하하.

나는 오래전부터 혼자 지질학을 공부했다. 그러다 만난 사람들의 개성을 파고들면서 그들에 관한 이야기가 차곡차곡 담긴 책을 읽어도 보았다. 그러나 흥미진진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지금이야말로 세계를 한 바퀴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더욱 안달이 났다. 분명 호기심 때문은 아니다. 나는 ‘볼 만한 재미’가 있다는 곳은 싫다. 절실히 원하는 곳이 아니니까 별로 내키지 않는다. 내 기질에 맞거나 근본적으로 진지하게 접근할 만한 특별한 문제도 없다.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수도원에 들어가는 많은 사람이 그랬겠지만 나 자신부터 알고 싶다. p 017

저자는 지금의 에스토니아 땅인 러시아 제국령 리보니아에서 태어난 독일의 철학자 헤르판 폰 카이저링. 무려 금수저출신이다. 원래 전공은 지질학. 지질학 박사학위를 딴 사람인데, 갑자기 철학자가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 저자가 왜(!) 바로 철학을 공부안하고, 지질학을 먼저 공부했는지 이해가 안될정도로, 정말 철학계에 딱 맞는 인간상이랄까. 아 물론 내가 철학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왠지 그런 생각이 든달까? 


저자의 세계여행 시작은 ‘실론’이다. 실론이 대체 어디지? 내가 아는 실론은 ‘실론티’ 밖에 없는데… 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실론티의 그 실론이었다. 실론의 현재 이름은 ‘스리랑카’. 

저자가 세계여행을 시작한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던 시기였다. 당시 실론은 영국 자치령이었고, 저자는 유럽권에 위치한 독일의 철학자였다. 저자 입장에서 동쪽으로 떠나는 첫 세계여행이니, 아예 모르는 나라보다는 유럽 국가 식민지를 가는 것이 쉬웠을테다.


욕망과 성취! 이 둘이 제대로 어울린다고 모든 문제가 풀릴까? 어째서 위인들은 기후가 혹독하지 않은 지역에서 등장했을까? 모든 것이 나타난 곳에서는 더 찾을 것이 없다. 탐구자가 아닌 한 누구도 궁극의 진실을 찾지 않는다. 의지는 모든 것을 갖춰 아쉬울 것 없는 곳에서 솟구치지 않는다. 영웅적 행위는 한가한 데에서 나오지 않는다. 모든 가능성이 실현되는 곳에서 어떤 이상적 관념도 살아남지 않는다. p 052

열대의 독특함은 너무 낯설다. 열대에서는 상상력도 다른 것들처럼 식물처럼 움직인다. 사실, 열대에서 경이로운 꽃이 핀다. 마치 신들과 얽힌 민중 신화처럼, 시인의 가슴에서 무르익은 서정처럼, 야성의 환상을 보여주며 향기롭게 타오른다. 그러나 제아무리 아름다워도 ‘자연계’ 속에서만 벌어지는 창조다. 영적 ‘깊이’라는 독특한 원리에서 나오지 않는다. 정신으로 재창조되지 않는다. 제아무리 화려해도 저절로 높아지는 영성 같은 것은 없다. 주어진 틀을 과감하게 뛰어넘는 인간만 거기에 이른다. 하지만 열대 사람은 이렇게 노력할 기회가 없다. 모든 것이 자연발생적이라 그렇다. 불가능한 것을 탐내는 동기와 추진력이 부족하다. 그 의식은 무척 빈곤할 수밖에 없다. 의식이란 자발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모든 것이 자연스레 저절로 벌어지는 곳에서 그럴 필요가 있을까? 열대사람들이 과연 사랑을 알기나 할까? 이들은 서양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을 상상에만 기댄다. 욕망이 쾌락보다 우선이고 관념이 현실을 앞지른다. 이런 곳이라 경이로운 생장은 욕망과 성취의 거리도 없어질 만큼 풍성하고 따뜻하며 아름답다. p 052

당시 세계는 서구 우월주의로 만연했다. 그들에게 아시아는 미개한 지역이었다. 이 책의 저자 헤르만 폰 카이저링도 그랬다. 그는 철학자이기 전에 유럽사람이었다. 

스리랑카는 유럽과는 달리 뜨거운 열대 지역이다. 저자는 이런 열대기후와 날씨 등을 토대로 서구와 비교하면서, 열대지역의 문명 발달이나 그들의 가치관을 분석했다. 어찌보면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가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이 책의 저자는 유발 하라리와는 달랐다. 헤르만 폰 카이저링은 세계여행 기록 곳곳에서 서구 우월주의를 내비쳤다. 어쩔수 없는 시대적 한계다. 따라서 이 책을 읽을 땐 이런 한계를 잠시 내려놔야 한다. 그러면 보인다. 

이 책이 서구인의 눈으로 본 동양의 이색적인 풍경이 아니라, 철학자의 눈으로 본 동양의 정신세계를 고찰한 책이란 것을.

붓다의 현상학은 분명한 진리다. 붓다의 연상학은 그 어느 시대의 식물론보다 정확하다. 식물의 삶이 모든 삶을 대표하는 만큼 붓다는 인간에 대해서도 진리를 말했다. 내용도 풍부하다. 모든 기본 문제가 인간의 가장 고상한 문제와 마찬가지로 식물 속에서 완벽하게 벌어지고 풀이된다. 아무튼 식물을 통해 인간을 정의하니 조금 거북하다. 그렇게 하면 인간을 왜곡하지는 않지만 고유의 안간성을 설명하지도 않는다. 원칙적으로 식물과 비슷함을 보여주면서도 어떻게 다른지 따지지 않는다. 붓다의 이론을 들여다보면 그가 인간을 종종 식물로 바꾸고 싶어 하지 않을까 싶다. 정말 그는 그렇게 했다. 붓다의 이론은 모든 생명체의 공통점을 속속들이 모방했다. 그 추종자들은 이런 생명 공동체의 방향으로 발전하고 말았다. 불교의 수동성은 식물과 비슷하다. p 055

불교 승려들의 수준은 매우 높다. 지성의 수준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수준이 높다. 인품도 기독교도보다 낫다. 인자하며 지식에 관련된 것에 호방하다. 사람들을 반긴다. 기독교 사제도 그만하다고 주장하기 어려울 만큼 초연하다. 이는 불교가 신도들에게 완전히 무사무욕을 보였기 때문이다. 자신을 위해 사는 것보다 타인을 위해 사는 것이 이론적으로야 훌륭하다. 하지만 실제로 적극적 이웃 사랑은 수준 높은 정신에 이르지는 못했다. 되레 야박해지기나 했다. 타인에게 닦달이나 했지 지배욕을 버린 사람은 극히 드물다. 사람들을 향상시키고 싶다는 사람들이 막상 얼마나 요령부득이던가! 선교사들은 얼마나 가리는 것이 많고! 선교사들의 심리는 단순하다. ‘자기 관점을 타인에게 씌운다.’ 사실상 제한된 행동을 한다. 이렇게 계속 직무에 따라 움직이다 보면 어느덧 편협해 진다. p 061

이곳 사찰의 분위기가 무척 마음에 든다. 이렇듯 편한 곳을 어디에서 다시 찾을까. 그런데 지금 어느 때보다도 불교는 유럽 사람들에게 쉽게 통할 종교가 아니다. 실론 사람들 틈에서 그들만큼 적극 실천하려면 유럽 사람과 완전히 다른 정신이 필요하다. 유럽 사람들은 ‘현상’을 절대시하면서 개인의 구원만 바라는 생활에만 투자하다 보니 금세 비루한 이기주의에 빠졌다. 온정은 야생동물 보호 조치 비슷하게 싱거워졌다. 유럽 사람들은 열반을 동경하면서 각성은 고사하고 쓸데없이 부실해지기나 했다. p 063

기독교는 원래 빈민의 종교였다. 기본 원리부터 특권층과 대립했다. 가진 것 없는 사람들 편에 선 입장에서 행복한 사람들에게 원한이 많은 사람들 편에 섰다. 그뿐만 아니라 어느 쪽을 지향하든 불화의 씨를 품고 있었다. 평화에 가장 탁월한 종교가 가장 불화를 키웠다는 사실이야말로 매우 의미심장하다. 예수의 정신이 아무리 뛰어났떠라도 그것으로 세속의 문제를 지배하지 못했다. p 066

저자는 동양 불교를 마주하고, 분석한다. 그리고 자신이 속한 서구 문명의 가치관인 기독교를 떠올린다. 분명 두 종교의 커다란 지향점은 비슷함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기독교가 그렇게 타락했는지를 분석한다. 이게 이 책의 묘미다. 분명 이 책을 읽다보면 서구 우월주의가 자주 나타나는데, 진짜 딱 그만큼 서구문명도 비판한다. 

이런 이유일 것이다. 헤르만 폰 카이저링이 자신이 속한 유럽권에서도 비판받은 이유가.


이렇게 볼 때 낙원에 대한 관념은 진실하다. 만약 우리가 나쁜 의도로 행동하지만 않는다면 나쁜 일이 벌어지지 않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유럽 사람은 어떤 낙원도 만들 수 없다. 우리는 사랑의 미덕을 확신하면서도 동물적 본능이 너무 강하다. 그러나 불교와 힌두교의 세계에는 여러 면에서 낙원의 분위기가 살아 있다. 종교가 사람들에게 동물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금하니까 동물도 사람에게 적개심을 보이지 않는다. 동물은 인간을 존중한다. 어떤 인종이 다른 인종을 존중하듯 모두를 위한 자리가 있다고 가르친다. p 102

안내자는 타밀족 출신이라 내가 입장하는 사원마다 들어가지 못했다. 입장 허가를 받지 못했다. 그는 기독교도인 데다가 최하층민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첫눈에 그의 신분을 알아본다. 힌두교도는 누구든 얼마나 능란한 거짓말을 하든 위장하든 아니든 사람의 계급을 즉시 알아내는 특이한 능력이 있다. (…) 서로 다른 계층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누구와 왕래하고 누구와 함께 식사할 것인지가 매우 중요하다. 나쁜 사람과 사귀는 것은 세균만큼 감염의 위험이 크다. 정신도 감염된다. 심리는 놀랄 만큼 쉽게 오염된다. p 138

난처한 일이다. 우선 끝없이 자기자신을 타인과 차별화하면서 가벼운 병에도 죽어버린다. 인도에서 차별화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계급 제도는 극히 복잡해졌다. 인도 주민들은 늘 걱정하며 살아간다. 매번 편견이 길을 가로막는다.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라는 끝없는 걱정도 낳았다. 유럽에서는 페스트가 만연하던 시대에서나 볼 법한 엄격한 처방과 규제를 항상 염려해야 한다. 

편견을 뿌리 뽑기란 어렵지 않다. 겪어보거나 조금 더 이해하면 금세 사라진다. 유럽에선 천 년 이상 일상에 자리 잡았던 대부분의 편견도 단 한 세기 만에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영혼이 우세한 인도 같은 나라에서는 모든 현실이 상상력에 좌우된다. 인도에서 일상화한 완고한 계급 제도도 편견만 사라진다면 함께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너무 해묵은 편견이라 온실 속에서만 유지될 수 있다. 최근까지 인도를 떠난 모든 브라만 계급은 해외에서 자기 계급을 잃었다. p139

책을 읽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자의 눈으로 본 불교와 힌두교의 모습은 어떻게 그려졌을까. 그저 유토피아로만 봤을까? 그 안에 있는 계급 불평등은 큰 문제는 아니었을까? 아니면 저자 스스로 언급한 ‘인도 같은 나라에서는 모든 현실이 상상력에 좌우’되기 때문에, 그 ‘상상력’으로 인해 생겨난 계급 불평등이니, 이는 그저 서구보다 못한 아시아의 모습이라고 생각했을까?

생애 첫 철학책(?)이라 그런가, 지금까지 읽어본 최고의 벽돌책(?)이라 그런가 읽는 내내 온갖 생각들이 머리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 책 자체가 철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쓰여진 책이라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내가 읽고 있는 이 책이 여행에세이인가 철학책인가, 아니면 두 종류를 짬뽕한 책인가! 이 책의 정체성에 대한 고찰은 덤이다. 뭐, 이 책의 저자는 세계여행을 하기 전부터 에세이스트로도 조금 유명했다고 하니, 여행에세이가 맞...맞겠지? 확실한 건 이 책은 지금까지 읽었던 여행에세이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점이다. 철학자가 세계여행을 하며 쓴 책이니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이 책을 읽으면 알게 될 것이다. 여행을 함에 있어서, 장소를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이 이토록 다양할 수도 있구나! 라는 사실을. 플러스로 서구우월주의가 만연한 그 때, 동양과 동양 종교를 이토록 폭넓게 이해한 유럽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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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글쓰기 - 모든 장르에 통하는 강력한 글쓰기 전략
박종인 지음 / 와이즈맵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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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 기자님 새 책이 나왔다. 음... 새 책인가? 제대로 말하자면 과거에 출판됐던 「기자의 글쓰기」 개정판이다. 이미 구판을 가지고 있는 나지만, 개정판은 또 못참지!!!

 


 

「기자의 글쓰기」 초판을 읽었을 때도 그랬지만, 이번 개정판도 어김없이 배울점이 많다. 그리고 반성할 점도 많다T_T. 분명 초판을 읽었을 때도 반성을 했는데?? 이제 고쳐야지, 했는데??? 이게 참. 반성만 하고 개선을 못했다. 사람은 학습하는 동물이라고 대체 누가그런거여. 왜 난 학습이 안되건데?! 그래서 난 여전히 글쓰기 반성중 ^_T (심지어 초판을 읽고, 잊지 않기위해 블로그에 리뷰까지 썼는데, 개선을 못했음.하ㅏㅎ..핳하ㅏㅎ.ㅎ)

 

 

과거 포스팅을 곱씹어보자. 생각해보면 한동안은 「기자의 글쓰기」 에서 박종인기자님이 강조했던 ‘쉽고, 구체적이고, 짧게’를 상기시키며 포스팅을 했었다. 분명 그랬다. 벗뜨... 임신과 함께 나에게 온 그 이름 ‘매너리즘’. 그렇게 나는 매너리즘이라는 친구와 함께(^^) 오랜 기간 함께했다. 최근 몇 년간 도서 리뷰의 70%는 매너리즘과 함께한 포스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랄까. 문장도 길고, 쓰잘데기 없는 수식어도 많고. 그 옛날 대학 레포트를 길게 늘려쓰기 위해 아무말을 늘어놓던, 그 때의 내 모습이랄까? 하하하. 다시금 반성...!

 

 

근데 이 매너리즘이 블로그 포스팅에만 온 게 함정. 회사에서는 매너리즘이고 나발이고 ‘쉽고, 구체적이고, 짧게’를 오백프로 지키는중;;

 

 

이 책은 진실한 글에 대한 책도 아니고 도덕적인 글에 대한 책도 아니다. 그렇다고 부도덕한 글은 절대 아니다. 글을 잘 쓰는 방법에 관한 책이다. 진실한 글도 잘 쓰자는 말이고 도덕적인 글도 기왕이면 재미있게 잘 쓰자는 이야기다. 악마를 소환하는 글도 악마를 감동시킬 만큼 재미가 있어야 악마를 부를 수 있다. 악마도 맛있게 읽고 천사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글에 관한 요리책이다. p 011

 

 

복잡한 원칙은 원칙이 아니다. 원칙은 간단해야 한다. 몇 가지 원칙만 익히면 훌륭한 글을 쓸 수 있다. 사람들이 글쓰기 자체를 두려워하기에 원칙을 적용하지 못할 뿐이다. 이 책은 바로 그 원칙을 깨닫게 해주는 목적으로 썼다. 글쓰기는 어렵지 않다. 몰라서 못쓰지, 원칙을 알면 누구나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p 013

 

 

박종인 기자님이 말하는 글쓰기 원칙은 한결같다. 글쓰기는 ‘상품’과 같기 때문에, 소비자(독자)가 선택할 수 있는 좋은 상품(좋은 글)이어야 한다. 모름지기 좋은 상품이란,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다. 좋은 글도 똑같다. 독자에게 쉬운 글이어야 한다. 쉬운 글은 내용이 구체적이고(이해하기 쉽고), 문장에 리듬이 있어서 읽는 데 끊김이 없다.

 

 

한마디로 좋은 글이란 ‘쉽고, 구체적이고, 짧아야’ 한다. 여기서 조금 더 디테일을 더하면 ‘팩트를 기반으로, 수식어 및 진부한 비유는 빼고, 기승전결이 있어야’ 한다.

 

1. 좋은 글은 쉽다.

2. 쉬운 글은 전문 용어나 현학적인 단어가 아니라 평상시 우리가 쓰는 입말을 사용해 짧은 문장으로 리듬감 있게 쓴 글이다.

3. 독자는 글을 읽으면서 감동받기를 원한다.

4. 감동은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에서 나온다.

5. ‘매우’ ‘아주’ ‘너무’ 같은 수식어는 그 감동을 떨어뜨린다.

6. 독자들은 ‘너무 예쁘다’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예쁜 이유, 즉 구체적인 팩트를 원한다.

7. 불명확한 글, 결론이 없는 글은 독자를 짜증나게 만든다. 명확한 팩트로 구성된 명쾌한 글은 독자에게 여운을 준다.

- 「기자의 글쓰기」 ‘좋은 글이 가지는 일곱 가지 특징 中’

 

 

 

 

글을 쓰려면 재료가 필요하다. 재료는 상상에서 나오지 않는다. 일상생활 경험과 남이 던진 이야기, 읽은 책, 검색한 자료에서 나온다. 그렇게 얻은 재료를 물 흘리듯 보내버리면 글을 쓸 재간이 없다. 반드시 기록해 둔다. 그게 글 보따리다. p 045

 

 

축적해 놓은 글 재료들을 되도록 엑셀 파일로 정리해 둔다. 방대한 재료들이 분류와 검색이 가능한 ‘데이터베이스’로 진화한다. 키워드를 만들어서 한 칼럼은 그 키워드를, 자료는 파일 이름과 컴퓨터 폴더명, 인터넷 URL을 분류해서 엑셀에 정리해 놓으면 기가 막힌 글보따리가 된다. 글을 쓰기로 작심했다면 꼭 이를 실천해보시라. 한번 쓰고 글짓기 그칠 사람은 이럴 필요 없다. p 047

 

 

2018년 12월, 박종인 기자님 북토크에 참가한 적이 있다. 그 때 기자님이 했던 말이 있었다. 바로 기자님 본인이 모아온 ‘데이터’에 관한 것. 정확한 내용은 기억이 잘 안나지만, 본인이 취재하며 찍었던 사진들을 찾기 쉽게 정리하고, 갑자기 떠오르는 내용들도 까먹지 않도록 메모해둔다고 하셨던 것 같다. 이른바 ‘데이터 베이스’. 

 

 

박종인 기자님은 이 책에서도 ‘데이터 베이스’가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한다. 본인이 관리하는 데이터 요약 화면까지 보여주면서.

 

 

위에서도 언급했듯 좋은 글은 좋은 상품이다. 좋은 상품을 만들기 위해선 생산계획을 수립하고, 재료를 수급하여 생산계획에 따라 제조한다. 좋은 글쓰기도 똑같다.

 

이제부터 발상을 전환한다. 글은 글이 아니라 ‘상품’이다. 독자에게 팔아먹기 위해 필자가 만드는 상품이다. 제조업이 됐든 금융업이 됐든 한 업종 한 업체가 상품을 만들기 위해서 거쳐야 할 단계가 있다. 첫 번째가 생산 계획이다. (…) 왜 글쓰기가 아니고 글 생산이어야 할까. 일기장을 쓴다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글은 대게 남에게 읽히기 위해 쓴다. (…) 팔리지 않는 상품은 무가치하다. 읽히지 않는 글은 무의미하다. 그래서 업체들은 저마다 계획을 세우고 상품을 만든다. 글에서는 이 계획을 ‘디자인’이라고 부른다. 글을 독자들이 읽을 수 있도록 디자인해야 한다. p 072

 

 

 

 

 

 

 

이렇게 좋은 글 쓰는 과정을 배웠다면, 바로 써봐야 하는 법! ....라고 하기엔 나같은 글쓰기 풋내기들에겐 너무 이르니, 책에 실려있는 예문을 보자. 기자님이 쓴 (땅의 역사)원고 뿐만 아니라, 글쓰기 수강생(?)들의 글과 수강생들의 글을 고친 글 등이 실려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 ^^! 

 

 

에세이와 평론은 ‘사실’에 대한 근거 제시 정도에서 차이가 난다. 에세이가 상황 묘사와 주관적 느낌에 중점을 둔다면 평론은 사실 자체에 더 비중을 둔다. 따라서 평론적인 글쓰기를 위해서는 글에 등장하는 여러 에피소드가 창작이 아니라 사실임을 입증할 필요가 있다. 이게 학계에서 논문에 첨부하는 각종 인용 출처, 주석이다. 출처가 없는 사실은 독자에게는 사실이 아니라 주장밖에 되지 않는다. ‘소설’을 쓰겠다면 출처가 굳이 필요 없겠지만 사실을 담은 글, 논픽션을 쓰려면 출처 게시는 필수다. p 074

 

 

사건, 사고를 보도하는 신문기사는 철저하게 두괄식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 뒤 육하원칙에 따라 그 상세한 상황을 끌까지 서술한다. 이유는 명쾌하다. ‘침략했다’라는 사실이 독자가 읽고 싶고 듣고 싶은 첫 번째 사실이니까. 에세이와 평론은 어떻게 시작해야할까. p 075

 

 

뿐만 아니다. 기자님은 여행 에세이, 역사평론, 인물에세이 쓰는 방법도 알려준다. 기자님이 이 정도로 떠먹여줬으니, 이제 배부르게 소화만 잘 시키면 되는데!! 내가 그게 가능할지는 미지수라는게 함정. 하^_T. 일해라 머리야!!!!! 

 

 

글은 문장으로 주장 또는 팩트를 전달하는 수단이다.

좋은 글은 리듬 있는 문장으로 팩트를 전달한다.

리듬 있는 문장은 입말로 쓴다.

- 기자의 글쓰기 p 111

 

1. 한국말의 외형적인 특성을 100퍼센트 활용한다:

문장 속 단어를 이리저리 순서를 바꾸거나 단어 자체를 바꿔보면 어느 순간 ‘이게 더 읽기 쉽네’하는 구성이 나온다.

 

2. 수식어를 절제한다:

수식은 ‘꾸민다’는 말이다. 뒤집어서 말하면 불필요하다는 뜻이다. ‘의’자와 ‘것’자를 절제한다: 의와 것을 남발하면 리듬이 끊어진다. 쓸 때는 모르지만 두 글자를 안 쓴 문장과 쓴 문장을 비교하면 명확하게 알 수 있다.

 

3. 입말과 리듬:

글은 무조건 입말이다. 왜? 말을 문자로 옮기면 글이 되니까. 글이란 문자로 기록한 말이니까.

 

4. 단문과 리듬:

리듬 있는 문장을 쓰려면 단문이 좋다. 리듬이 있다면 문장이 길어도 상관이 없다. 비결은 리듬에 있다.

 

5. 상투적인 표현-사비유 금지:

사비유는 죽은 비유를 뜻한다. 처음에 그 표현을 만들었던 사람은 주변 사람들한테 칭찬을 받았겠지만 이제는 개나 소나 다 알고 있는 표현을 혼자 알고 있는 것처럼 얘기하네 라는 반응이 나올듯한 표현들을 총괄해서 하는 말이다.

- 「기자의 글쓰기」 ‘한국말의 특성: 외형률과 리듬  中’

 

 

우리들이 글에 담아야 할 것은 주장이 아니라 팩트다. 거짓말 가운데 제일 좋은 거짓말은 그럴듯한 거짓말이다. 그럴듯한 거짓말은 왜 그럴듯할까? 구체적일수록 그럴듯하다.

‘옛날옛날’이 아니라 ‘서기 1821년 6월 7일에’라고 쓴다.

‘두 시쯤’이 아니라 ‘2시 11분’이라고 쓴다.

‘강원도 두메산골’이라고 쓰지 말고 ‘1993년에 전기가 들어온 강원도 화천군 파로호변 비수구미마을’이라고 쓴다.

‘20대 청년’이 아니라 ‘스물다섯 살 먹은 키 큰 대학 졸업생 김수미’라고 쓴다. p 130

 

원래 주장을 하기 위해 사람들은 글을 쓴다. 당연하다. 아무리 객관적인 사실에 대해 글을 쓰더라도 필자가 가지는 주관적인 관점을 벗어날 수 없다. 소설가도 자기 원하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 소설을 쓴다. 수필가가 수필을 쓰는 이유도 똑같다. 기업 직원이 쓰는 보고서에도 목적이 있다. 모든 글, 아니 모든 창작물은 그런 법이다. 자기가 갖고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이러이러한 팩트, 이러이러한 재료를 버무려 사진을 찍고 글을 쓰고 영화를 찍는다. 이 팩트가 제대로 수집되지 않는 상태에서 글을 쓰게 되면 오로지 주장밖에 보이지 않는다. p 131

 

 

잊지말자. 좋은 글은 짧고 쉽고, 팩트를 기반으로 한다. 회사 업무 메일이나 기안문만 이렇게 쓸 게 아니라, 내 공간인 블로그에서도(!!!) 제발 좀 이 원칙들을 잊지말자. 

 

 

 

 

 

 

기자님이 말하길, 이 책은 딱 두 번 읽고 버리라는데, 음. 나...나에겐 어려운 일일지도^_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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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파랑길 인문 기행 - 동해 바닷가 길에서 만난 우리 역사 이야기
신정일 지음 / 상상출판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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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육아때문에 여행을 못하고 있지만, 난 본투비 여행러다. 내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국내일주다보니, 남들보다 더 많이 더 자주 돌아다닌 면도 있다. 지금까지 돌아다닌 지역을 지도에 체크하면 우리나라(정확히는 남한)의 약 80%정도는 다 찍고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이런 성향이 어디서 왔는고 하면, 아무래도 어렸을 때부터 나를 차에 타우고 전 지역을 쏘다닌 부친의 영향이 오백프로라고 할 수 있다.



평생을 운전을 하신 내 아버지는 휴가철이 되면 우리가족을 태우고 여행을 다녔다. 정확히는 업무로 인해 지방을 내려갈때, 우리 가족 모두 같이 가는 거라고 해야하나? 아버지 일이 끝나면 그때부터 여행 시작이었다. 이렇게 여행을 떠나게되면, 도착지는 대부분 동해였다. 아버지 차로 동해 해안길을 달리며 차에서 먹고자고 하면서 말이다. 지금 기준으로 따지자면 일종의 캠핑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여튼, 그렇게 해안길 여행을 자주 하면서, 동해안을 제집 드나들듯이 다녔다.



그래서 그런가? 다 커서는 신랑과 둘이서 소소한 짐만 꾸려서 해안 여행을 자주 했다. 둘다 직장인이라 장거리 여행은 불가능하기에, 해안길 여행을 할 때는 지역 몇 개씩을 묶어서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 여행은 저기서부터 저기까지, 이런식으로 여행을 다녔다. 예컨데 동해로 치면 이번 여행 때는 부산부터 경주까지, 다음 여행은 (강원)고성에서 속초까지 뭐 이런 식으로! 그렇게 해안길 여행을 하다보니 어느새 서해안, 동해안 길은 완전히 섭렵했다. 아, 물론 트레킹이 아니라 자동차 여행이었지만.



요즘은 서해안은 서파랑길, 동해안은 동파랑길이라고 해안 트레킹 코스가 개발되었는데, 내가 여행을 한창 다닐때만해도 이런 제대로 된 트레킹 코스가 없었다. 그저 ‘무슨무슨 해안산책로’ 이런 형식이었을뿐. 그래서 조금 아쉬운면도 있다. 왜 해파랑길 트레킹코스는 내가 한창 여행다닐 때는 없었나!!!! 근데 이게 또 이유가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해파랑길(동파랑길, 서파랑길) 트레킹코스가 생겨나게 된 이유가 바로 이 책의 저자 덕분이었다는 것. 허허허허. 내가 여행을 조금 더 늦게다녔어야 했나 싶기도 하고...하하...ㅋㅋ






이렇게 TMI가 길었던 이유는 『해파랑길 인문기행』 이라는 여행에세이를 리뷰하기 위함이다. 여름휴가책으로도 손색이 없는 이 책은 말그대로 파란바다가 넘실대는 동해안! 해파랑길 트레킹코스를 완주하는 여행에세이다. 거기다가! 그냥 여행에세이도 아니고 무려 ‘인문기행’ 여행책이다. 동해안 해파랑길을 그냥 무작정 걷는게 아니라, 발길이 닿는 그 곳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설명이 어우러져있는 것이다. 완전 내 여행취향이랑 딱 맞는 여행에세이가 아닌가!



난 동해안 지역은 단 한 군데도 빼먹지 않고 다 섭렵을 하고 왔던 경험이 있고, 지금은 해파랑길로 명명된, 당시에는 그저 해안산책로였던 트레킹코스를 꽤 여러구간 걷고 오기도 했다. 그래서 이 책이 더욱 기대되었으며, 실제로 이 책은 내 기대에 오백프로 부응했다. 분명 내가 다녀왔던 지역이고, 내가 두 발로 걸었던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모르는 역사적 지식들이 저렇게나 많다니! 역사적인 지식에 대해서는 나도 꽤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편인데(물론 일반인에 비해서만), 역시나 나는 풋내기였다. 이 책을 들고 다시 동해안 여행을 다녀야 할 판. 하하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동해안은 정말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강원)고성이나 삼척, 영덕, 부산 앞 바다는 똑같이 ‘동해’라 불리우는 같은 바다임에도 불구하고, 각 지역마다 서로 다른 맛과 멋을 가지고 있기에 어디를 가든 특색있는 동해여행을 할 수가 있다. 이번 여름휴가 여행지로 동해안에 인접한 그 어떤 지역을 가든지간에,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고 보장할 수 있다. 물론 이 책을 들고가야 그 재미가 보장된다!




 




이 여행에세이 속 저자의 동해안 해파랑길 트레킹은 부산에서 시작해서, 휴전선이 있는 강원도 고성에서 끝난다. 물론 어떠한 한 시점에 이 기나긴 해안길을 정복한 건 아니다. 내 여행방식이 그랬던 것 처럼, 저자 역시도 일정기간동안 일정구간을 걸었다. 그렇게 동해안 해파랑길 트레킹을 완주한 것이다.



아래는 저자의 첫번째 트레킹 부산에서 시작해서 울진에서 끝나는 9일간의 첫번째 여정 중 일부다.



부산부터 울진까지



 


이곳 연화리 일대에서 나는 미역이 명물이다. 기장 미역은 다른 어느 바다에서 채취한 것에 비해 잎이 두텁고 넓으며 파릇한 빛깔과 윤기가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이 지역 돌미역이 『동국여지승람』의 「동래현」과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임금의 밥상에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왕실에서는 이곳에 곽전이라고 불리던 유명한 미역밭을 두어 직접 관리했다. (…) 당나라 사람인 서견은 자신의 저서 『초학기』에 “고구려인들은 고래가 몸을 풀고 미역을 뜯어 먹는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따라 미역국을 해산 식품으로 먹는다”라고 고구려 사람들의 독특한 해산 풍습을 기록했다. p 025~026



죽성리에는 죽성리 왜성이 있다. 마을 이름을 따서 ‘두모포 왜성’이라고도 불리는 이 성은 임진왜란 때 서울에서 후퇴한 왜군이 장기전 태세를 갖추기 위해 쌓은 성 중 하나다. 당시 동원된 인부 수만 해도 약 3만 3천명 정도이다. 이 왜성에 올라서면 두모포만 전체를 아우르는 해안 절경을 조망할 수 있다. 이 성에 머물렀던 왜군들은 임진왜란 마지막까지 저항했다. 특히 기장과 경남 일대 도공들이 이 왜성으로 꿀려와 결국 왜군들과 함께 일본까지 가게 되었다고 한다. p 027



기장미역이 부산에 특산품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으나, 기장미역이 무려 고구려 때 부터(!!!) 유명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이정도면 지자체의 특산품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특산품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이건 뭐. 천 년을 훌쩍 넘는 미역 사랑이 아닌가?!




 


 


동방섬, 새뜸섬, 고래 아구리섬, 질무섬 등 크고 작은 섬들에 시선을 두고 걷다 보니 울산시 구류동이다.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큰 공을 세웠떤 하곡 사람 박윤웅에 얽힌 일화가 많은 지역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박윤웅은 신라 54대 경명왕의 후손으로, 신라왕족임에도 불구하고 왕건의 고려 창건을 도왔다고 한다. 그러한 공을 높이 평가한 왕건은 박윤웅의 고향을 부로 승격시키고, 구류동 앞바다의 소출이 좋은 몇 개의 바위에서 채취하는 미역 일부를 박윤웅에게 세금처럼 바치도록 했다. 지금도 그곳 바위에는 ‘윤웅’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p 047



우리의 발길은 울산광역시의 마지막 마을인 북구 신명동에 이른다. 이 지역에는 신라시대 박제상에 관한 전설이 남아있다. (…) 그의 아내와 딸들은율포 앞바다가 훤히 보이는 산마루 치술령에 올라 하염없이 그를 기다렸으나, 박제상이 끝내 돌아오지 않자 높은 바위에서 뛰어내렸다고 한다. 그렇게 뛰어내린 그들은 전설의 새가 되었다고 하는데, 아내는 치조라는 새가 되도 딸은 술조라는 새가 되어 날아갔다고 한다. 그들이 매일 올라 바다를 바라보며 박제상을 기다렸다는 산마루가 경북 경주시 외동읍 내동면과 경상남도의 경계지점에 있는 치술령이다. 그리고 모녀가 서서 기다렸다고 알려져 있는 망부석이 있다. 뒷날 사람들은 박제상의 아내를 치술신모라고 부르며 치술령 기슭에 신모사라는 사당을 짓고 위패를 모셔 제사를 지냈는데…. p 049



부산에서 시작한 미역이야기는 울산에서도 ing!!



신라시대 박제상 이야기는 워낙에 유명한지라 잘 알고 있었다. 우리나라 여신 중 하나인 치술신모에 대해서도 조금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두 개를 엮어볼 생각은 해 본적이 없었지? 물론 현재는 신모사도 사라지고, 제사도 사라졌다지만. 박제상에 대한 이야기와 치술신모에 대한 이야기의 비중을 두고 보았을때, 대체로 박제상만 알고 그의 부인인 치술신모에 대한 내용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은게 조금은 씁쓸하다.






 


읍천리에서 세상을 놀라게 할 천연기념물이자 명승이 발견된 것은 2011년이었다. 내가 2007년 부산에서 통일전망대까지 19일 동안 걸을 때는 근처 군부대에서 ‘민간인 출입을 금합니다’라는 표지판을 세워놓아 들어가지 못하고, 7번 국도로 돌아갔다. 그 뒤 『동해 바닷가 길을 걷다』라는 책을 펴낸 후에 문화체육관광부에 나라 안에서 제일 긴 도보 답사길을 만들 것을 제안했다. 그 길이 이후에 ‘해파랑길’로 명명되면서 나라 안에 아름다운 길로 자리잡았다. 그 길을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에서 다시 걷게 된 2011년 봄, 경주시 양남면 읍천항을 지나가고 있었다. 마침 초소에 군인들이 없어서 들어갔는데, 유레카! 놀라운 풍경이 펼쳐졌다. p 054



그 뒤 읍천리의 주상절리는 국가 지질공원으로 지정되었고, 2012년에 문화재청에서 천연기념물 제536호로 지정했다. 전국의 수많은 사진작가의 사진 속에 담겼으며, 지금은 그 일대가 대처가 되어서 관광객들이 줄을 잇는다. 중국 귀주성의 만봉림이나 장가계가 뒤늦게야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과 같이 해파랑길을 제안한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때문에 알려진 명승이다. p 055



봉길리 하봉 부근 소나무 우거진 숲길로 들어서 한참을 걸으니 수제마을이다. 봉길리 북쪽 수제마을은 예부터 가뭄이 들면 경주부윤이 마을 북쪽 해변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마을 동쪽으로 약 100m거리 바다에 대왕암이라고 부르는 문무왕 수증릉이 있다. 신라 제30대 문무왕릉은 사적 제158호로 지정되어 있다. p 057



경주시 감포읍 이견대 아래 위치한 대본리, 그 남쪽으로 큰 나루가 있었고, 동북쪽 독촌산에는 봉우재가 있는데 그 재 밑에 ‘용의 돌’이라는 바위가 있다. 옛날에 신문왕이 이견대에서 동해를 바라보다가 그 바위에서 용이 오르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누정 조’에 이견대에 관한 내용이 실려있다. p 061



읍천리 주상절리!!! 진짜 저 주상절리는 너무나 신기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꽤 오랫동안 민간인 출입금지 지역이었다는 사실에 또 한번 놀랐다. 얼마나 많은 천연기념물이 민간인 출입금지 지역이라는 제한으로 인해 숨겨져있을까? 정부 차원에서도 몰랐고, 이 책의 저자가 발견하고 나서야 화들짝 놀라서 천연기념물로 지정까지 할 정도이니.



경주 문무왕릉과 이견대, 감은사지는 더 이상 모르는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왠걸. 그럼에도 모르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야. 진짜 경주 역사 이야기는 정말 까도 까도 끝이 없구나!




 


뇌성산 뒤쪽에 있는 성동리 하성마을은 영천 황보씨 마을이다. 1454년 단종 2년에 계유정난이 일어났을 때 당시 영의정이던 황보인의 삼대, 곧 그 자신과 그의 후손 다섯 명이 수양대군의 칼날에 희생된다. 그때 황보인 집안의 늙은 여종이 황보인의 젖먹이 손자를 물동이 안에 감춰서 도망친 뒤 이 땅 동쪽 끝, 구룡포에 들어와 살며 황보 씨의 맥을 잇고 마을도 일군 것이다. 마을 남쪽으로 광남서원은 황보인과 그의 아들 석, 흠 형제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순조 31년에 사액을 받았고, 광무 4년인 1900년에 복원한 뒤 1941년에 복설했다. p 073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 상해에서 자객 홍종우에게 피살된 그의 시신은 청나라 정부를 통해 국내로 이송되어 양화진에서 육시처참형을 당한다. 그의 왼쪽 팔이 장기곶(호미곶) 앞바다에 내던져졌는데, 그때가 동학농민혁명이 한창이었던 1894년 갑오년 5월이었다. 이곳을 투기 장소로 정한 이유는 동해로 돌출되어 있는 이곳 지형에 역모의 기운이 서려 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p 083



포항의 향토연구가 박일천 씨는 연오랑과 세오녀로 상징되는 이 집단을 신라 초기 ‘근기국’으로 불리던 부족국가라고 설명했다. 진나라 멸망 뒤에 동쪽으로 이주해 온 세력 중의 하나로, 이들 부족에서 베 짜는 기술을 신라에 전해주었으나 신라가 강성해지자 무리를 지어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지금도 영일 지방에는 줄줄이 이어 수평선 위를 지나가는 행렬을 지칭해서 “왜배 가는 것 같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아득한 옛날 이 부족들이 가축과 가재도구를 싣고 수평선 저쪽으로 왜 나라를 향해 줄줄이 사라져 가던 모습에서 유래된 표현이라고 한다. p 088



현재 포스코가 자리 잡은 곳에 대송정으로 유명한 조선시대의 역, 대송역이 있었다. 대송정은 동쪽 바닷바람을 막기 위해 소나무를 많이 심어 울창한 숲을 이루었고, 그 숲 앞에 흰 모래밭이 있으니 경관 좋은 해수욕장을 이루었으리라. 하지만 공업단지 조성으로 그 풍광은 사라졌고, 동촌 남쪽으로 부련사 라는 절집도 사라진 지 오래다. 포스코가 들어서 있는 포항시 남구 송내동 주진리에 조선시대 행인들의 편의를 제공하던 주진원이 있었으나, 그 역시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p 091



난 분명 포항 호미곶에 가서 상생의 손 동상을 보고 왔다. 그때는 약간 흉물(?)이라는 느낌 말고는 딱히 별 생각이 없었더랬다. 그런데.. 포항 호미곶에 김옥균의 왼쪽 팔이 버려졌다니? 이 사실을 알고 나니, 호미곶 상생의 손 동상이 좀 다르게 보이는 건 나만 그런가. 왜.....왜 하필 호미곶에 버려진게 김옥균의 팔인가;;;;; 다리도 아니고 목도 아니고, 이거 참 묘한 우연이네?




 


영덕 지방에서 가장 큰 항구인 강구항은 경치가 매우 아름답기도 하지만, 영덕 대게로 유명세를 타는 곳이다. 매년 11월부터 이듬해 4-5월까지 이어지는 대게 철에는 수많은 대게잡이 배들이 항구로 집결하고 위판장이 운영되며, 일명 ‘대게 거리’로도 불리는 식당가도 3km나 이어져 있다. p 112



동해 바닷가 어촌인 영덕읍 노물리에서는 지금 미역, 조개, 새우 등이 주로 잡히지만, 조선시대에는 물개를 잡아 나라에 진상했다고 한다. 방어가 많이 잡혔다는 방아짬, 돌매라는 사람이 미역을 따던 돌매방우, 상어 비슷한 물고기인 지투가 많이 잡히던 지투짬 등 노물리의 아름다운 옛 지명을 통해 이 지역에 해산물 종류가 다양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 풍무한 어종 때문이었는지, 궁벽진 이곳까지 광대들이 자주 찾아들어서 광대에 얽힌 지명도 많이 남아있다. 광대가 줄을 타고 재주를 부렸다는 강대 줄탄모기 고개, 광대들이 가무를 즐기며 놀았다는 깨뭇개도 있다. p 115



지명의 유래로 그 지역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걸 좋아라하는 편인데, 이야. 영덕 노물리의 지명은 정말 놀랍다. 바닷가니까 해산물 종류가 다양하고, 그에 따른 지명이 생성된건 이해가 되는데.......광대라니! 전혀 생각치 못한 지명 유래라서 그런가 정말 놀랍기 그지없다. 광대로 인한 지명 유래가 생길정도면, 영덕 해안가 지역이 꽤나 상업적으로(?) 발달했고, 시장도 발달했었다라는 사실도 유추할 수 있고. 



이래서 사람은 어딜 가서 뭘 보든, 조금이라도 더 알고 봐야해!





 


대진항을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대진 해수욕장이다. 이곳은 해안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그 가운데 특히 관어대 일출이 빼어나다. 관어대는 영해면 괴시리에 위치한 조망대다. 그려 말 문신 목은 이색이 외가인 호지마을에 왔다가 바닷가 상대산에 올랐는데 넓은 바다가 내려다보이고 바닷물이 아주 맑아서 물고기가 뛰노는 모습까지 보일 정도였다고한다. 그 모습에 이색은 이 산을 관어대라 이름 붙이고 글을 남겼다. (…) 이색이 살았던 괴시리는 원래 호지마 또는 호지촌이라고 부르던 곳이었으나, 사신으로 중국에 다녀온 이색이 이곳 지형이 중국 괴시와 흡사하다며 붙인 지명이라 한다. p 127



대진항에서 덕천, 고래불로 이어지는 해수욕장. 바다에서 바다로 이어진 모래사장을 맨발로 걸어보자. (…) 한국의 포경지, 고래불 해수욕장. 고래불은 병곡면 병곡리에서 휘리리까지 동해 바다를 따라 약 4km에 이르는 긴 모래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에서 예전에 고래를 잡았다고 한다. p 128



금곡 북쪽으로 서낭당이 있다. 매년 정월 대보름이면 ‘칠보산 토지지신 골매기님’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데, 소원 성취에 매우 영검하다고 한다. 유금남서쪽으로 선덕여왕 시절 창건된 유금사라는 사찰이 있고, 유금 남쪽 도리봉 위로 마고할미 집터도 있다. 경상북도와 강원도 사이에 도계를 이루는 지경 마을을 지나 울진군 후포면에 이른다. 드디어 첫 번째 일정긴 1구간 여정이 끝났다고 생각하니 온 몸이 아프다. p 130



목은 이색의 흔적을 울진에서 찾게 될 줄은 또 몰랐다. 대체 난 울진에서 뭘 보고 온건지..ㅋㅋㅋ 울진 대게만 먹고 왔나. 허허 이거 참. 나도 나름 울진에서 여러곳 답사도 하고 그랬는데^_T. 더군다나 다른 지역이긴하지만 목은 이색의 흔적이 있는 곳도 찾아 다니긴 했었는데. 정작 울진은 생각도 못했다. 심지어 목은 이색이 지명까지 바꾼 곳인데..허허허..



내가 가봤던 부산에서 울진까지, 저자가 걸었던 부산에서 울진까지의 갭이..너..너무 크니까 ㅋㅋㅋ 이거 뭐 정말 내가 가봤던 곳이라고는 생각치 못하겠는데? 어휴, 안되겠다. 이번 여름은 글렀지만, 내년 여름휴가는 뿡뿡이와 함께 이 책을 들고 동해 여행을 떠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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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마제국 멸망 후 르네상스가 도래하기까지의 천 년. 그 기간을 우리는 중세시대라고 배웠다. 그리고 대표적인 폭력과 억압의 시대, 모든 문명이 죽은 시대라고 생각한다. 아마 중세를 관통하는 두 가지의 키워드 ‘십자군 전쟁’과 ‘흑사병’ 때문일 것이다. 오롯이 이 두 가지 키워드만으로, 우리는 중세 천년에 ‘암흑기’라는 굴레를 씌워 부정적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물론 십자군 전쟁과 흑사병이라는 두 가지의 키워드만을 놓고 보았을 땐, 중세는 분명 폭력적이고 억압적이며, 죽음만 있는 어두운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게 다일까? 중세의 천 년을 고작 저 두 가지의 키워드만으로 재단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어쩌면 이 모든 것이 누군가 의도적으로 중세를 폄하하기 위해 한 일은 아닐까? 



시작과 끝은 제멋대로이다. 시작과 끝은 화자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의 틀이다. 그동안 중세 세계는 그림자에 가려진 채 어렴풋하게만 이해되었고, 고정적이고 변하지 않는 대상으로, 결국에는 우리가 바라는 현대 세계의 대립항으로 여겨졌다. 이 책에서 우리가 들려주려는 이야기는 중세가 “암흑시대”였다는 수 세기에 걸친 신화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므로 325년에 열린 니케아 공의회, 410년에 일어난 로마 약탈, 476년에 벌어진 서쪽의 “마지막” 로마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폐위 사건 같은, 고대와 중세 사이의 전통적인 전환점들은 일단 잊자. 만약 중세가 존재했고 그 시작과 끝이 있었다고 결론을 내린다면, 굳이 쇠락이나 암흑, 사멸을 출발점으로 삼을 필요가 없다. 이 빛나고 거룩하고 고요한 공간에서 시작할 수도 있는 것이다. p 011



분명한 사실은 당대의 추악한 정치적 혼돈과 전쟁에 낙담한 14-15세기의 이탈리아인들이 고대 그리스 로마 세계에 닿는 향수 어린 연결고리를 마련하기로 결심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1,000년에 이르는 지난 역사와의 연관성을 끊기 위해서 로마와 그리스라는 먼 과거를 활용했다. 이후 18세기와 19세기 내내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들과 지식인들은 백인성이라는 관념이 유럽의 세계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들의 새로운 세계질서를 위한 역사를 찾아나섰다. 그들은 중세와 그리스 로마의 연관성, 그리고 중세 정치체들의 독립성과 독특한 전통에 주목하면서 중세의 원형 국가들이 유럽 열강의 근대적 기원에 해당하는 유용한 과거라는 점을 발견했다. p 015



우리가 알고있는 ‘암흑기’ 중세라는 이미지는, 근대 유럽 열강에 의해 만들어졌다. 근대를 살던 유럽 제국주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빛나는 현재를 “서양 문명”이라는 개념으로 정립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서양문명 우월주의로 인해 유럽 열강들은 자신과는 다른 나머지 세력들을 ‘야만인’으로 보았고, 중세적인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개화해야할 대상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중세는 더더욱 야만적인 시대, 어둠의 시대, 문명이 없는 시대로 여겨졌다.



이러한 인식은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이어져서, 유럽의 ‘중세’는 암흑기라 보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 되었다. 오죽하면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 수많은 매체들마저도, 중세를 암흑기로 그리고 있으니까. 그래서 이 책의 저자들은 이미 세계에 만연하게 뿌리내린, 암흑기 중세라는 이미지를 탈피시키기 위해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 왠만큼 해서는 암흑기 중세라는 뿌리깊은 인식을 뒤집긴 어렵다. 그래서 저자들이 선택한 것이 바로 이탈리아에 위치한 갈라 플라키디아 영묘였다.



‘갈라 플라키디아’.


진짜 생전 처음 듣는 이름이다. 그 어떤 역사책에서도 보지 못했던 이름인지라 책을 읽기 전에는 몰랐다. 왜 수많은 유명인물들을 놔두고, 하필 역사적으로 이름의 가치(?)가 조금 뒤떨어진 사람이 중세의 시작으로 선택되었을까? 하고 말이다. 벗뜨, 이 책을 읽고 나니 이해가 갔다. 반짝이는 별들로 가득한 갈라 플라키디아 영묘. 중세 천 년간의 사회상을 짧게 요약하라고 한다면, 그녀의 삶으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갈라 플라키디아 영묘, 암흑기가 아닌 “빛의 시대” 중세를 말하기 위해, 이보다 더 적합한 장소가 또 어디 있을까.




갈라 플라키디아 영묘



라벤나에 있는 갈라 플라키디아 황후의 예배당으로 되돌아가자. 기원후 5세기에 지어진 이 예배당은 황후의 시신이 매장되지 않았는데도 오늘냘 영묘로 알려져있다. 최근들어 학계의 동향이 바뀌고 있기는 하지만, 갈라 플라키디아 황후는 아들의 섭정으로서 권력을 잡았을 때와 관련한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이 시기에 관한 역사서의 주요 등장인물은 아니다. 중심이 되는 것은 남자, 피, 전투이다. 그러나 이 여성과 이 공간을 중심으로 관점을 재구성하면, 우리는 중세 유럽의 매우 색다른 “출발점”을 만나게 될 것이다. p 023



그녀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태어났고, 어릴 적에 이탈리아로 건너갔으며, 그곳에서 다시 프랑스와 스페인으로 향했다가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왔고, 이탈리아에서 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갔다가 결국 이탈리아로 되돌아왔다. 이탈리아의 도시 라벤나에 머물던 그녀는 423년에 어린 아들의 섭정이 되어 서로마 제국 전체를 다스렸다. 갈라 플라키디아는 남녀를 불문하고 지난 500년간 누구 못지않은 로마 통치자의 위치에 있었다. 그녀는 450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제국은 위기와 과도기를 겪고 있었지만, 그 위기가 종류와 정도의 측면에서 이전에 로마를 엄습했던 위기와 꼭 다르다고는 할 수 없었다. 로마에는 예전부터 늘 파벌싸움이 있었고 외부의 위협도 언제나 존재했다. p 024



갈라의 인생에는 여전히 왕성하게 살아 숨쉬지만 확실히 과도기를 겪던 로마 제국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것은 새로운 종교와 민족들이 기존의 관념, 풍습과 통합될 시대의 무대를 마련하는 복잡한 이야기이다. 새로운 형태의 황제권을 배경으로 온갖 부류의 통치자들이 다양한 기독교인 집단이나 종교 지도자들과의 친밀한 유대관계를 통해서 정통성을 주장했고, 그런 식의 황제권은 지중해 세계 전역과 갈리아 지방의 대부분에서 표준으로 자리를 잡았다. 새로 출현한 이민족들은 로마의 통치 세력인 최상류층 가문들과 동맹을 맺는 데에 열중했고, 로마의 전통을 받아들였다. p 038



“제국”으로서의 로마는 변했지만, 로마는 예전부터 늘 변해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변화는 처음부터 로마 이야기의 일부분이었다. 권력의 중심지는 바뀌었다. 권력이 영향을 미치는 영역은 분열했고 연합했고 다시 분열했다. 반면에 로마가 “멸망했다”는 관념은 동질성 개념, 즉 역사적인 평형 상태 개념에 기댄다. 아주 오래된 이 관념은 중앙집권화된 근대 국민국가의 원형을 가정하는데, 그 이상적인 국민국가는 고대의 실제 현실보다는 에드워드 기번이 살던 18세기 대영제국과 훨씬 더 비슷하다. p 039



암흑기라고 배웠던 중세 천 년은, 그 이후 우월하다 자부하던 근대 서구 열강과 비교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여러 인종이 교류하고 있었고, 수많은 종교 문화가 발달했으며, 그에 따른 멋드러진 종교 건축물들이 곳곳에서 지어졌고, 어느 왕조든 근대 서구열강과 견주었을 때 더하면 더했지, 절대로 덜하지 않은 권력투쟁이 지속되고 있었다. 중세의 시계바늘은 어느 한 곳에 멈추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던 것이다.



이 책을 읽어보았다면, 그 누구도 중세가 암흑기였다고 감히 입에 담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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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08-02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중세의 교회는 오직 유일신인 하느님을 믿고 따라야 한다는 율법으로 인간들(서민)의 삶을 지나치게 통제함으로써 핍박한 삶을 살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기에 인본주의 입장에서는 그 때를 암흑기라고 평가한 것 같아요.
 
베트남 셀프 트래블 - 2023-2024 최신판 셀프 트래블 가이드북 Self Travel Guidebook 25
정승원 지음 / 상상출판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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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팬데믹이 끝났다. 막혀있던 하늘길이 열렸고, 전 세계적으로 해외여행이 폭증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그렇다. 하루가 멀다하고 해외로 떠나고, 들어오는 비행기들이 이/착륙 하고 있다. 심지어 곧 있으면 여름휴가 시즌! 이미 진즉에 여름휴가 시즌에 맞춰서 항공권을 발매한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만약 이번 여름휴가로 베트남 여행을 계획했다면! 베트남 여행책 『셀프트래블 베트남』을 추천한다. 진짜, 정말, 베트남 여행에 꼭 필요한 모든 정보가 다 있다. 베트남 전 지역에 대한 지도는 기본이고, 관광지(휴양지), 맛집, 호텔, 쇼핑몰 기타 등등등. 정말 없는 정보가 없다. 무엇보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베트남의 최신 정보를 닮은 정말 따끈따끈한 베트남 여행책이라는 것.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해외 주요 관광지 및 맛집들 중 폐업(?)하거나 혹은 서비스 질이 똑 떨어지는 등 많은 게 변했기 때문이다. 베트남 역시 다를 바가 없기에, 부디 여름휴가로 베트남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최신 개정판인 『셀프트래블 베트남』을 읽어보시길!



베트남, 어디까지 가봤니?


베트남은 북부에 위치한 수도 하노이에서 경제, 문화의 수도 호찌민 시티까지 비행기로 2시간, 기차나 버스로 2일이 걸릴 만큼 큰 나라다. 하지만 ‘베트남’ 하면 생각나는 곳은 ‘하노이, 하롱베이, 호찌민 시티, 다낭’ 정도. 최근 나트랑도 가족 휴양지로 입소문이 나고 모 항공사의 적극적인 광고 공세가 시작되면서 베트남 전역의 숨은 진주 같은 관광지들이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자, 그렇다면 당신이 주목해야 할 베트남 관광지는 어디가 있을까? p 024




01. 하노이: 베트남의 수도. 베트남의 역사가 살아 있는 관광지와 베트남 최고의 박물관이 모두 모여 있다. 저렴한 가격과 뛰어난 디자인의 제품들로 쇼핑마저 즐거운 곳.

02. 사파: 베트남 북단에 위치한 고산지대 소수민족 거주지. 복잡한 도심을 떠나 푸른 자연으로 떠나는 하이킹족들에게 각광을 받는 곳.

03. 하이퐁: 베트남에서 3번째로 큰 도시. 하롱베이와 깟바섬을 오갈 때 방문한다.

04. 하롱베이: 기암괴석이 아름다운 바다 위 크루즈 여행을 즐길 수 있는 곳.

05. 깟바섬: 하롱베이의 상위호환! 호핑투어를 통해 에메랄드빛 바다를 만다는 것은 물론이오, 깟바국립공원에서 트레킹까지 가능하다.

06. 닌빈: 육지의 하롱베이. 강 위를 배를 타고 다니며 기암괴석을 구경할 수 있다.

07. 퐁냐케방: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퐁냐케방 국립공원은 세계에서 2번째로 큰 카르스트 지형이다. 스릴만점인 액티비티도 즐길 수 있는 곳!

08. 후에: 한국의 ‘경주’와 같은 세계문화유산 도시이자, ‘파주/철원’처럼 DMZ 투어를 할 수 있는 곳.

09. 다낭: 요즘 핫하게 떠오르는 동남아의 휴양지. 장장 30km의 해변을 따라 고급리조트들이 늘어서 있다.

10. 호이안: 19세기 가옥들이 보존되어있는 구 시가지. 역사/문화/예술/먹거리/쇼핑을 한번에 즐길 수 있다.

11. 나트랑: 동양의 나폴리! 해안가를 따라 수많은 레스토랑과 클럽들이 들어서 있다.

12. 달랏: 베트남 국내 신혼여행지로 각광받는 곳.

13. 무이네: 사막과 리틀 크랜드 캐니언을 갖춘 곳.

14. 호찌민 시티: 베트남 문화와 쇼핑을 한 번에 즐길 수 있는 곳. 한켠은 프랑스식 건물이 즐비하지만, 메콩강 유역에서는 원주민들의 삶을 느낄 수 있다.

15. 푸꾸옥: 요즘 떠오르는 베트남 휴양지의 신흥 강자! 베트남의 ‘진주섬’이라고 불리고 있다.




곧 있으면 여름휴가 시즌이 시작되다보니, 베트남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중에서도 베트남에 처음(!!) 가는 여행객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처음 베트남 여행을 가는 사람들이 베트남 여행을 계획 할 때 주로 궁금해하는 내용이 있다.


Q: 베트남은 언제 가야 좋아요?

Q: 여행 비용은 얼마나 필요할까요?

Q: 환전은 어떻게 하나요?

Q: 비자를 받아야 하나요?

Q: 치안이나 위생 등에서 주의할 점이 있나요?



답변은? 『셀프트래블 베트남』 QnA를 확인해보시라! 첫 베트남 여행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베트남에서 꼭 해봐야 할 모든 것


베트남여행을 시작했다면 꼭 해봐야하는 것들이 있다.


첫 번째는 CNN이 주목한 베트남의 주요 관광지 중 일부라도 보고 오는 것!


두 번째는 당연히 베트남의 대표적인 음식들을 먹어보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 하나! 우리가 알고 있는 베트남의 유명 음식들 말고도, 베트남 지역별로 유명한 먹거리가 각각 다르니, 어떤 지역을 방문하게 될지는 몰라도 그 지역의 먹거리를 꼭 먹어볼 것! 물론 베트남 음식의 스테디셀러인 쌀국수와 커피는 기본이고^^!


세 번째는 바로 쇼핑이다. 베트남의 슈퍼마켓, 약국, 쇼핑몰 등! 각각의 장소마다 잇아이템이 다르니, 가능하면 전부 다 돌면서 가성비 쇼핑하면 개이득! 『셀프트래블 베트남』에서 알려준 꿀팁 하나가 바로 약국 쇼핑이다. 베트남은 의약분업이 철저하지 않아서 처방전 없이도 항생제같은 전문의약품 구매가 가능하다고?! 뭐 일반적인 건강식품인 발포 비타민이나 의약외품인 샤론파스등은 기본이고! 확실한건 한국에서 구매하는 것 보다 훠얼씬 저렴하다는 것! 아, 그리고 베트남에서만 판매한다는 농모자 쓴 테디베어도 꼭꼭 사올 것!!!!


네 번째는 동남아 여행 필수코스라는 마사지! 어떤 나라든, 어떤 숍이든 마사지는 가격과 시설이 천차만별이다보니, 그 퀄리티도 역시 천차만별이다. 기안84가 인도여행에서 마사지 호갱된 것을 보셨다면, 정말 마사지숍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꼈을 것이다. 자, 호갱되고싶지 않은 사람! 정말 퀄리티 좋은 마사지를 받고 싶은 사람!! 『셀프트래블 베트남』에서 그 꿀팁을 찾아보시라!


다섯 번째는 다름아닌 숙소다. 베트남 여행 경비에서 제일 큰 비중을 차지하는게 바로 항공권과 숙소인 만큼, 숙소 선택은 정말로 중요하다. 비용은 저렴한데, 잠을 편하게 잘 수 있는 숙소. 어떤 여행이든 숙소만 잘 골라도 반은 성공한거니까!


역사와 문화의 관광 1번지, 하노이


하노이는 2천 년에 이르는 도시 역사 중 약 1천 년간 베트남의 수도 역할을 담당해오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이자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베트남 제1의 도시로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하노이 관광의 핵심은 호찌민 단지다. 베트남 민족운동의 지도자이자 북베트남의 대통령을 지낸 호찌민의 묘와 그가 거주했던 저택들, 호찌민 박물관 등 단순한 볼거리 이상으로 베트남 역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 하노이에는 300여 개의 호수가 있어 일명 ‘호수의 도시’라고도 불리는데, 그 가운데 가장 큰 호수 서호와 관광객들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은 호안끼엠 호수는 밤낮 가릴 것 없이 현지인과 관광객들로 북적거린다. 하노이의 서민 생활이 궁금하다면 구시가를 방문해보도록 한다. 저렴한 숙소와 식당, 바, 기념품숍, 환전소 등은 물론 현지인들의 생활용품 가게들이 골목마다 빼곡히 들어서 있다. (…) 카페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시원한 쌀국수 퍼와 분짜에 베트남식 커피를 맛보고 저녁에는 정통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멋진 파인다이닝을 즐기는 미식탐험 또한 하노이에서 빼놓지 말아야 할 즐거움이다. p 045


내가 베트남 여행을 가게 된다면 꼭 일정에 넣을 곳이 바로 ‘하노이’다. 내 여행에서 ‘역사’를 빼면 섭섭하니까. 베트남 근/현대 역사의 주인공인 '호찌민'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 하노이에 있는 것이 첫 번째 이유고, 중세 베트남 통치 왕조였던 리왕조의 유적이 하노이에 있는 것이 두 번째 이유다.



호찌민이야 베트남의 영웅으로 대/외적으로도 유명한 인물이니 이해한다고 쳐도, 뜬금없이 베트남 중세 통치 왕조인 ‘리 왕조’는 대체 왜?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지도 모른다. 흐흐. 알아도 쓸데없는 지식이긴 한데, 베트남의 ‘리 왕조’는 우리나라와도 자그마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때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1174년, 베트남 리 왕조의 수도 탕롱성. 리 왕조 6대왕 영종의 아들 이용상은 피난길에 나선다. 나라에 쿠테타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용상이 도착한 곳은 바다 건너 어느 해안 마을. 그 곳은 바로 ‘고려’였다. 이용상은 고려에 정착했고, 당시 왕이었던 고종(고려 23대왕)에게 ‘화산군’이라는 작위를 받고, 그렇게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렇게 한반도에 터를 잡고 살아간 ‘화산 이씨’ 후손들. 시간은 흘러흘러 1995년. 화산 이씨 종친회가 베트남을 방문했었는데, 베트남 정부는 화산 이씨 종친들을 환대함은 물론이고, 자국에 있었던 리 왕조의 후손이자 왕손으로 인정했다. 심지어 베트남 정부는 매년 리 왕조의 태조 탄신일마다, 화산 이씨 종친들을 초대하고 있다. 심지어 베트남에선 화산 이씨 후손들을 하루 빨리 본국으로 귀환시키고자 한다며. 뭐 이건 정치적인 면도 어느정도 깔려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물론 아주 당연하게 현재 진행형인 이야기^^



우리나라의 한 ‘성 씨’의 시조가 베트남 리 왕조의 왕자였고, 시간이 흘러 왕자의 후손들이 베트남과 한국의 가교 역할을 한다는 것은 꽤나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고로 나는 정말 진짜로 완전 !! 하노이에 가서 리 왕조의 유적을 보고 싶다는 것!! 심지어 리 왕조의 탕롱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다만 『셀프트래블 베트남』 저자 기준으로는 탕롱성은 완전 추천은 아니고, 어느 정도 추천(ㅋㅋ)인 관광지인 듯. 뭐 근데 그건 인정. 역사 더쿠들이나 볼게 많지 뭐, 일반 관광객들에겐 크게 관심 없는 장소일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베트남에서 하노이 여행을 계획했다면 알아야 할 게 바로, 근교(?) 투어!! 바로 ‘하롱베이’나 ‘사파’, ‘땀꼭’ 같은 지역도 하노이에서 투어상품으로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사파는.....《신서유기》에서 촬영지로 나왔던 곳이라, 정말 가보고 싶었던 곳 중 하나인데. 그...판시판? 아 가고싶다, 베트남!!!!! 물론 아기가 조금 더 커야 가능하겠지만^_T. 이렇게 오늘도 난...  책으로 세계여행을 한다...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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