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잔혹동화 『환상소설』. 정말 오랜만에 읽는 소설책이다. 근데 이 소설책이 완전 초면은 아니다. 왜? 난 이미 2021년에 오디오 드라마 형태로 발간된 『환상서점』의 오디오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꽤 오랜기간 성우덕질을 하던 이력을 지닌 피로ㅋㅋㅋ). 이쯤에서 당시 텀블벅 펀딩에 참가했던 날 매우 칭찬한다♡ 잘했다, 장하다 내 자신♥♥




자자, 그렇다면 오디오북 『환상서점』과 일반적인 소설책 『환상서점』의 내용이 같은가? 아니, 절대로. 네버! 



『환상서점』 오디오북은 서점주인 서주가 독자(그러니가 듣는 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이다. 서주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트랙당 1편의 이야기며, 그 이야기들은 옴니버스 형식으로 어떤 이야기를 먼저 들어도 전혀 문제가 없다. 반면에 『환상서점』 소설책은 오디오북에 담겨 있던 일부 에피소드와, 오디오북 대본집(!!!)에 있는 서점주인 서주의 배경을 그대로 가져와서, 바로 그 ‘서주’의 이야기가 하나의 장편 이야기가 된 것이다.





근데 난 소설책 쪽이 훨씬 더 좋네....?!


오디오북 대본집에서만 보았던 서주의 배경이 이렇게 한 편의 소설이 된 것도 좋은데, 심지어 오디오북 『환상서점』 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서주의 뒷 이야기까지 그려진다는게! 거기다 저승차사님 까망의 뒷이야기도 읽을 수 있게되어서 얼마나 좋은지(구색록편). 옥토도 그저 에피소드의 주인공이 아니라 소설책의 등장인물로 나온 것도 너무 좋고. 이건 정말로 작가님께 절하고 싶음. 흑흑 정말 감사합니다. 작가님!!!!



개인적으로...소설책 『환상서점』 2편으로 옥토의 현재 이야기도 출간해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작가님? 네 흐흐흐흐. 옥토와 귀신남자의 만남도 그려줘요T_T. 



기본적으로 『환상서점』은 기본적으로 우리의 전통문화를 소재로 한 신비하고 기묘한 판타지 소설이다. 거기에 기괴하면서도 판타지스러운 이야기도 한 스푼 들어가있다. 신비로운 판타지 소설책 『환상서점』의 이야기를 한 줄 요약하면 이렇다.


‘망령을 보고 들으며, 이승과 저승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남자. 그 남자는 오랜시간을 한 여자만을 기다리며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모으고 또 모았다. 오로지 그 여자에게 들려주기 위해서.「



그 남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신비하면서도 기묘하고, 때로는 가슴이 아려오며 눈물이 나기도 한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누군가의 과거 이야기기도 하며, 혹은 누군가의 전생 이야기이기도 하고, 또 누군가에게는 과거이면서 현재이야기이기도 하다. 


너무......요약했나 ㅋㅋㅋ 뭐, 아무래도 소설책이다보니 나도 모르게 스포할 수 도 있으니까. 뭐, 그럼. 조금 더 길게! 소설책 『환상서점』의 서장을 일부 발췌볼까? 



먼 옛날, 산과 강에 둘러싸인 작은 마을에 호기심 많은 한 소녀가 살았습니다. 소녀는 양반가에서 태어난 귀한 신분이었지만, 예절교육을 받기보다 들판을 뛰어다니길 좋아하는 천방지축이었지요. 하루는 소녀가 저잣거리를 뛰어다니던 중에 바닥에 떨어진 책 한 권을 발견했습니다. 주인 잃은 책을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더니 신선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걷은 한 사내가 보이지 않겠어요? 소녀는 이 책이 저 사내의 물건이라는 걸 집착했습니다. (…) 


그때, 소녀의 작은 머리통 속에서 전기가 튀듯 어떤 예감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나는 이 하얀 사람과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낼 것 같아. 내가 셀 수 있는 숫자보다 더 오래, 쌀 한가마니에서 쏟아지는 곡식의 낱알보다 더 오래. 한참을 지나 깨달은 것이지만 소녀는 사내를 본 첫눈에 사랑을 느끼고 말았던 거죠. (…)


헌데 이상한 건 분명 죽었어야 할 사내가 그 이후로도 자꾸 모습을 보이더란 겁니다. 둘이 뛰어내린 절벽 근처에서, 사람이 많은 시가지에서, 속세와 동떨어진 어느 한적한 사찰에서. 그를 보았다는 장소도 다양했어요. 진짜 해괴한 대목은 지금부터 입니다. 그에 관한 목격담은 몇백 년이 지나도록 이어졌습니다.         - 소설책 『환상서점, 서장- 절벽 아래 남은 이야기』 中



소설책 『환상서점』의 서장은 오디오북 『환상서점』의 대본집에 있는 서주에 대한 이야기 중, 그 어느 시간대의 이야기다. 그리고 이때부터 진정한, 기약이 있는듯 없는듯 한 ‘서주’의 삶이 시작되었다고 해야하나? 



둘의 과거를 이야기 한 건 마지막 욕심이었다. 한번쯤은 그녀에게 지난 일을 오롯이 고하고 싶었다. 그런데도 용서받는다면,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여태 몰랐지만 그런 희미한 기대도 섞여있었다. 지금 연서의 눈에 차오른 원망을 보다가 깨달은 사실이었다.

그가 씁쓸하게 말했다.


“다음 생에도 손님을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땐 우리 가까워지지 마요.”


“지금의 나는요?”


“미안하다고 해두죠. 어차피 전부 잊겠지만.”


그는 마지막 무대를 앞둔 마술사처럼 꽃을 고쳐쥐었다. 푸른색과 자주색이 뒤섞인 광채가 일렁였다. 홉사 저승의 기운 같았다. 서주는 그 빛을 뒤집어쓴 채로 말했다. 예의 그림같은 미소와 함께.


“이전엔 너무 가까워져서 당신이 죽었거든”      - 소설책 『환상서점, 영원의 매듭』 中



와! 근데 정말로 오디오북만 따로 들어도 좋고, 소설책만 읽어도 좋지만. 그냥 둘다 듣고 읽었으면 좋겠는게 내 바람!



무엇보다 오디오북을 먼저 듣고, 소설책을 읽으면 더욱 최고랄까? 흐흐. 오디오북으로 등장인물들의 멋진 목소리를 듣고(이게 중요!), 서점주인 서주가 들려주는 ‘잠 못 이루는 신비한 이야기’도 좀 듣고(진짜 최고bb), 그다음 소설책을 읽으면 와. 진짜 이건 진짜 분명 나는 책을 읽고 있는데, 귓가에 서주의 목소리가 들린달까. 흐흐흐. 진짜로 이거 뭐라 말을 할 수가 없네^_T. 



근데 .. .종이책버전 『환상서점』도 오디오북으로 내어주시면 안될까요? 작가님, 엉엉. 영원의매듭 편... 구자형님 목소리로 듣고싶어요 엉엉T_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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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선생이 작고한지도 벌써 1년이 되었다. 이제와 말하지만, 난 이어령 선생의 부고 기사가 올라오기 전까지만해도 이 분이 누군지 몰랐다. 부끄럽긴하지만, 부고기사로 인해 이어령이라는 이름을 알았고, 이 분이 문단계에서도 정말 유명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심지어 저서도, 쓰신 글도 어마무시하게 많았는데, 그럼에도 내가 이어령이라는 사람을 몰랐던 이유는 역시나....내 독서 편식이 한 몫 했기 때문일것이다. 지금이야 여러 장르의 책을 두루두루 보려고 노력하는 편이긴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독서 편식이 남아있는데, 과거에는 독서편식이 더욱 심했으니 말 다했다.



이 책 「별의 지도」를 읽기 전까진, 이어령 선생의 저서를 읽어본 적도 없고, 그의 정치적 행보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어서 위키를 비롯하여 여기저기서 정보를 훑어보았다.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인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 전 문화부장관 등등. 그를 이야기하는 수식어가 정말 많았지만, 대체적으로 한국의 ‘지성’ 이라는 키워드가 많이 보였다. 그와 함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책도 많이 보였다. 다만 생전에 언행이나 정치적 행보에 대해서는 여러모로 비판도 많았던 것 같다. 뭐, 이 분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 생전 행보에 대해선 내가 왈가왈부 할 건 아니고. 



그저 이번에 읽은 이어령 선생의 책 「별의 지도」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자면, 이 분은 유일무이한 대한민국의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쁜 의미가 아닌, 좋은 의미로써의 이야기꾼 말이다. 좀 식상한 표현이긴 하지만 책에 쓰여진 한 줄, 한 줄이 주옥같다고 해야할까? 허투루 쓰인 글이 하나도 없었다. 그의 글에는 역사와 철학, 윤리, 인문학적 사고 등 모든 것이 조화롭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본디 인문학이란 ‘인간과 관련된 근원적인 문제나, 사상, 문화 등을 중심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 연장선에서 보면 동양의 사상이나 문화는 공자, 맹자, 순자, 노자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다. 서양은 기본적으로 성서, 기독교가 바탕이다. 이렇게 동, 서양의 사상에서 시작하여 중세를 지내 근세, 근대로 넘어오면서 수많은 문화가 생겨나고, 사라지고, 향유했다. 이렇게 방대한 인문학이라는 학문으로 책을 집필한다면, 적어도 그에 상응하는 인문학적 지식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요즘 나오는 인문학 책들은 읽어보면, 그냥 무늬만 인문학이 많아서 실망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사람들이 추천하는 인문학책이란게 이런건가? 싶은 생각도 들면서, ‘사람들이 숱하게 말하는 인문학책들은 이제 그만 읽어야겠다’라는 생각까지도 했었다. 



헌데 왠걸? 이 책, 이어령 선생의 「별의 지도」를 읽고나서야, 진정한 인문학 책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고 깨달았다. 무엇보다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이어령 선생의 인문학적 지식이 얼마나 방대하고 대단한지를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은 동양의 정신세계의 바탕이 된 공자, 맹자, 순자, 노자를 비롯하여, 서양의 성서, 서양의 고전문화, 동양의 고전문화등에 대해서 해박하지 않다면, 절대 집필하지 못할 인문학책이다. 다름아닌, 바로 이런 책이 인문학책이다. 이런 인문학 책이라면, 나는 군말없이 인정할 것이며, 이런 책이 인문학 도서라면 수십 권도 읽을 생각이 있다. 이런 인문학책이야말로 많은 사람들에게 추천할 수 있는 인문학책이 아닐런지!



이 책에는 정말 수많은 내용이 있었다. 인문학적 사고, 삶의 태도 등 배울 점도 정말 많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내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책 속의 키워드는 다름아닌 ‘윤동주’였다. 책의 시작부터, 끝을 장식한 이야기도 시인 ‘윤동주’였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윤동주’라는 이름은 모르는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 속의 키워드로 ‘윤동주’를 꼽는 이유는 하나다. 이어령 선생의 시선으로 본 윤동주는, 내가 알고 있던 윤동주와는 달랐다. 내가 학교에서 배웠던, 일제강점기에 시로써 일제에 저항한 ‘저항시인’ 윤동주가 아니라, 별을 노래하는 아름다운 ‘시인’ 윤동주 였다.




 



덕분에 책장에 꽂혀있던 윤동주 시인의 시집을 다시 꺼내어 읽어보았다. 저항시인이라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읽었을 때는 몰랐던 윤동주 시인의 시가 새로이 보였다. 



이어령 선생이 말하는 시인 윤동주. 그에 대한 내용만 발췌하였다. 윤동주 시인의 시집을 읽으려 한다면, 이 책을 읽거나, 이 포스팅을 읽은 후에 읽었으면 좋겠다. 그럼 ‘저항시인’ 윤동주가 아닌, 별을 노래하는 ‘시인’ 윤동주가 보일테니.



죽는 날 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 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서시>



눈을 들어 밤하늘을 보면 수많은 별이 있습니다. 한국인은 ‘별’하면 먼저 윤동주 시인을 떠올리게 되지요. 지상에서 마주한 얼굴이 하늘로 올라가 하늘의 얼굴, 하늘의 눈동자가 되면 윤동주의 시에 가장 가까운 이야기가 됩니다. (…) 첫 행과 둘째 행의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은 맹자의 어록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어린 시절 윤동주는 《맹자》와 《성경》을 배웠다고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선약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가 부끄러움을 알게 되었다고 하지요? 부끄러움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위치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란 하늘을 뜻합니다. 


윤동주가 《맹자》와 《성경》에서 영향을 받았으리라 여겨지지만 <서시>는 동양적인 문맥의 ‘천天’의 개념, ‘앙불괴어천’ 사상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어요. 옛날 한국인들은 오늘의 우리보다 훨씬 더 사물로부터 많은 것을 보고 배웠습니다. 사물 속에 숨겨져 있는 본성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 본성은 하늘이 주는 것이라 여겼어요. 인간은 그 무수한 사물의 본성을 통해 물질의 만족이 아니라 정신의 행복을 찾으려는 존재요. 여기서 본성이란 쉽게 말해 적자의 마음, 즉 아이의 마음입니다. 그 아이의 마음을 잃지 않고 사는 사람을 맹자는 ‘대인’이라 불렀는데, 몸뚱이가 큰 사람이 아니라 정신적 행복을 느끼고 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p 015~017



우리가 학교 다닐 때 책에 줄을 긋고 칠하면서 배운 시가 윤동주의 <서시>입니다. ‘윤동주’, ‘저항시인’, ‘죽는 날 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하며 줄줄줄 외웠죠. 윤동주 저항시? 윤동주가 저항하는 거 봤어요? 다 선생님에게 들은 얘기지요. 이 시를 읽기도 전에 선생님이 알려준거에요. “윤동주는 저항 시인이다. 이 시는 일제에 저항한 시다”라고 말한 뒤 시 읽기를 시작하지요. (…) 윤동주 선생이 저항시인이 아니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저항시인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이 시를 보면 이 시의 진짜 값어치를 모르게 돼요. 다 일제에 저항하는 시로만 읽으니까, 이 시의 장치나 비유도 딱 그렇게 한정짓게 되니까요. p 096



저항시라는 말도 모르고 윤동주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길을 걷는데 그냥 <서시>가 땅바닥에 떨어져 있기에 주워 읽었다 칩시다. 그런 마음으로 솔직하게 그냥 읽어보세요. 이 시만 읽어서 ‘아, 이분이 후쿠오카 감옥에서 생체실험 희생자로 돌아가시고, 그 집안도 다 기독교인데다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이지’ 하고 느껴질까요? 그런데 저항시인이라는 프레임을 제거하고, 시대상황도 배제하고 이 시를 읽으면 ‘모든 죽어가는 것들’에 예외가 있습니까? 일본 사람, 한국 사람의 구별이 있어요? 공자님이 말씀하신 대로 ‘나라’를 빼고, 이 시에서는 ‘노자’까지 나갔어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이니까 ‘사람’까지 뺐잖아요. (…) 태어나면서 사형선고를 받는 것이 사람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죽을 줄 알면서도 버티고 싸우지요. 윤동주는 그 안에서 버티는 것이 아니라 하늘까지 올라갔어요. 하늘에 올라가면 별이 있습니다. 땅을 노래하는 마음이 아니라 별을 노래하는 거니까 벌써 그 안에 역사를 내재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역사를 포함하고 점점 위로 올라가면 땅이 보이고 지구가 보이고, 거기서 쭈욱 올라가서 별을 노래하는 겁니다. 하늘을 우러러 보는거죠. 그러니까 하늘까지 못 올라간 사람, 별을 모르는 사람은 풀잎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할 리가 없어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이라는 말은 ‘현재 나 자신은 부끄러울 것이 전혀 없다, 나는 결백하다’, 이런 의미라기 보다는 ‘나는 그런 뜻을 가지고 있다’며 스스로에게 맹세하는 말이에요. 그렇게 살고 싶다고 소원하는 거죠. p 099



<서시>를 일제에 대한 저항시라고 했을 때는 이 시를 정치적 레벨에서 읽은 것입니다. 국가 간의 정치 속에서 이 시를 읽을 수 있어요. 국가의 개념을 털어내고 인간의 레벨의 문제로만 읽었을 때는 휴머니즘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종교적, 초월적 하늘의 레벨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해서 <서시>는 저항시(정치), 인간주의시(휴머니즘), 종교시 이렇게 3개 층위로 읽을 수 있지만 전체적인 뜻은 천지인입니다.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애, 인간애, 우주애 말이죠. 이처럼 하늘, 땅, 사람으로 나눠놓으면 놀랍게도 이 시가 금세 보입니다. p 116



‘죽는 날 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라는 마음의 기저에는 ‘나-하늘’이 직접 연결돼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과 연결된 지상의 인간들은 사랑을 해도 뭘 해도 다 죽지만 별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했을 때, 내 마음속 심리적인 부끄러움이나 괴로움을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극복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은 시인의 마음이죠. 정치인이나 종교인의 마음이 아니라 시인이니까 윤동주는 하늘의 별을 노래하지 스스로 하늘의 별이 되지는 않았어요. 그러니까 다시 천지인으로 돌아옵니다. 제일 높은 곳에 ‘별’이 있고, 가장 아래에 ‘잎새’가 있고 그 사이에 ‘내(사람)’가 있습니다. 위를 보고, 아래를 보고, 다시 시인으로 돌아오는 것이지요. p 117



인간의 마음속에는 땅의 마음만이 아니라 하늘의 마음이 있고 인간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 말을 하죠.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냐. 너도 사람이냐?”고 할 때는 ‘그 말을 듣는 너라는 상대가 짐승보다 못하다’는 비난입니다. 그러데 “나도 사람이야” 할 때는 실수할 수 있고 완벽할 수는 없는, 신이 아닌 인간이라는 뜻이에요. 신처럼 완벽할 수는 없지만 짐승은 아니지요. 지금 ‘사람’은 신과 짐승 사이에 있습니다. p 120



인간은 하늘과 땅 사이에 있기 때문에 하늘을 볼 때는 신을 향하고 땅을 볼 때는 짐승을 향합니다. 그래서 그 사이에 있는 인간의 눈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윤동주의 눈이 그래서 아름다워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기를 맹세하는 사람이니까 사랑해야지, 영원히 미래를 향해서 사랑해야지, 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 시가 이렇게 아름다운 겁니다. p 122



이 시에서 바람이 두 번 나옵니다. 처음에는 ‘잎새에 이는 바람인데, 그 바람이 지금은 ‘하늘의 별에 스치고’ 있어요. 모든 것을 시들게 하고 죽게하는 바람은 시간이죠. 그 시간이 별에 스치면 영원까지 갑니다. 그러니 윤동주가 ‘나는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라고 말할 때의 그 길은 풀잎에서부터 별까지 가는 것이지요. 바람을 따라서, 잎새에 이는 땅의 바람에, 저 허공에 부는 바람까지 뻗쳐서 별까지 가는 그 과정의 길입니다. 부끄러움이 없는 길이지요. p 123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하고 서술어 대신 말줄임표 (….)를 썼어요. 이건 읽는 사람이 서술부의 시제를 무엇으로 넣어 읽느냐에 따라 이 문장을 과거로도 현재로도 미래로도 읽을 수 있다는 거지요. 한 번 해볼까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맹세했다’라고 읽으면 과거에 맹세한 것이지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맹세한다’라고 읽으면 지금 현재에 내가 맹세하고 있는 것이에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맹세할 것이다’라고 읽으면 미래에 그리 맹세할 것이라는 다짐이 됩니다. 과거, 현재, 미래에도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다는 이야기예요. 부끄럽지 않게 살았고, 살고 있고, 살 것이라는 말이지요. p 130



그런데 윤동주가 시인이 아니라 군자라면 어떻게 될까요. 군자는 이미 초월한 사람입니다. 땅에 사는 보통의 사람이 아니에요. 맹자는 《맹자》 <진심편>에서 군자에게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 부모님과 형제가 모두 무사하면 첫번째 즐거움이고, 둘째는 위로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아래로는 사람을 대함에 있어 부끄럽지 않을 때가 두 번째 즐거움이며, 셋째는 천하의 영재를 얻더 교육을 함이 세 번째 즐거움이라 하였습니다. 윤동주의 시는 이 두 번째 즐거움에서 나옵니다. ‘앙불괴’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 윤동주의 <서시>를 전부 과거형으로 고치면 윤동주는 시인이 아니라 군자가 됩니다. 과거형으로 바꾸어버린 시에는 망설임과 노력하려는 마음과 현실에서의 부딪침이 전혀 나타나지 않아요. 그런 것들이 시인의 마음인데요, 남에게 말하는 것은 시가 아니라 자랑이에요. 과거형으로 바꾼 <서시>에서 윤동주는 시인이 아니라 군자가 되었습니다. p 136



<서시> 원문을 보면 아무것도 이루어진 것이 없어요. 이루어진 것은 보통 과거형, 완료된 문장으로 서술되는데 이 시에서 과거형으로 쓴 것은 ‘괴로워했다’ 단 하나예요. 그러니까 괴고워한 것만은 사실이고 현실이지요. 나머지 서술부의 시제를 보면 ‘사랑해야지’ ‘걸어가야겠다’ 하는 미래의 다짐, 미래의 원망遠望과 의지만이 나타납니다. 일종의 자기 자신에 대한 맹세지요. p 137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이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 윤동주 <자화상>



윤동주가 만약 별이 되었다면, 별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별 그 자체가 되었다면, 땅을 내려다보면서 어떤 시를 썼을까요. 윤동주의 다른 시 <자화상>에서는 이미 시인을 초월해서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p 177



이 시를 보면 윤동주는 이미 땅 위의 인간, 시인을 초월했어요. 우물 속을 들여다보니까 제 얼굴이 있을 텐데 그것을 ‘낯선, 이상한 사람’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사람은 이미 위에서 자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윤동주가 우물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는 행위는 일종의 ‘반성적 사고’ 입니다. ‘참 자기찾기’인 것이죠. 그런 점에서 현실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자아를 들여다본다는 것은 일종의 격려 혹은 박수치는 행위와 다름이 없지요. 그러니 우물을 내려다보고 자신과 마주하며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겁니다. p 180



우리는 윤동주를 일제강점기 역사 속에서 사람의 마음을 울린 저항시인으로 알고 있지만, 만약 윤동주가 역사적 차원에서 저항시로만 <서시>를 썼다면 광복 후에도 우리의 가슴을 울리지는 않았겠지요. 윤동주의 시는 우리 생각의 틀을 한 번 더 깨주고 더 큰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만들어주었던 것입니다. 앞으로 한국인이 할 일은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나는 일, 하늘에서 한국을 내려다보는 별이 되는 일입니다. 그것이 우리 역사 속에서 천지인의 천天을 가지는 일입니다. 윤동주는 하늘로 올라가는 그 길이 아름다운 포물선임을 가르쳐준 시인입니다. p 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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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책을 읽으며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그도 그럴 것이 책을  이는 영원한 청년작가로 불리우는 소설가 박범신님물론 자타공인 독서편식가인  문학소설이라고 불리우는 책과는 거리가 멀기에박범신 님께서 쓰신 소설들은 대게 「은교」나 「고산자」 처럼 영상화된 것만 봤을 뿐이다한마디로 박범신 님의 글을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는 .



그래도 언젠가 읽어봐야지 마음은 먹었었는데이번에 박범신님 산문집 『순례』가 출간되어 !! 읽을  있었다문학소설은 당최 눈이  안가지만산문은  결이  다르기에무엇보다 이렇게 유명하신 (?) 산문집은 왕왕 읽어보고  느낌이 좋았던터라꽤나 기대를 품고 박범신님 산문집 『순례』를 읽기 시작했다.

역시나는 역시나였다박범신님의 산문집 『순례』는 읽으면 읽을수록 ‘ 대해 오래도록 생각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내가 바라는 행복은 무엇인지내가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게 맞는지 등등정말 오롯이 ‘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박범신님 산문집 『순례』의 전체적인 틀은 편지형식이다박범신님께서 히말라야를 순례하며그날 그날 K형에게 쓰는 편지형식의 글이다약간 삼천포긴 하지만내가 이렇게 깊이 있게 쓰인 편지를 받아본적이 있었나 싶기도 하고이렇게 편지를 써본적이 있었나 싶기도 하고만약 내가 편지를 쓴다면 이렇게 깊이있는 글을   있을까 싶기도 하다정말 이렇게 단어 하나하나에 깊이가 있다고 느낀 책은 오랜만이라고 해야하나?

그도 그럴 것이 요즘 사람들이 주로 보는 글들은 조그만 스마트폰 화면 속에 떠있는 짧은 글들이 많다심지어 누군가와 소통을  때도 조차도 글을 쓰기보단 단축말이나 이모티콘 등을 주로 이용한다깊이 있는 글은 고사하고짧은 글조차도  안쓰려는게 요즘 추세라면 추세랄까 뿐인가가끔가다 책에 대한 이야기누군가가  문장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만한 사람이 없다.

만약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하루에아니 일주일에  1권이라고 읽는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면 대다수가  읽는다고 말한다아니바빠서 못읽는다고 한다슬프지만 이게 현실이다그래서 누군가에게 ‘ 문장 너무 멋지다’, ‘  읽어봤어?’ 라고 이야기 하고 싶어도들어줄 사람도 없고 공감해줄 사람이 없다근데 정말 아이러니하다바빠서 책을  읽겠다는데왜들 스마트폰으로 이것저것  시간은 많을까그냥 뭐랄까이렇게 깊이 있는 글들이 점차 사라지는 현실이 슬프다.

이왕 주절주절거리는 김에조금  주절거리면.

요즘 나오는 에세이를 보면(심지어 베스트셀러라고 하는 책들), 대게 신변잡기 글이 많다내가 알기로는 에세이 역시 산문의 하위호환 영역일텐데이상하게 글에 깊이가 없는 경우가 많다그저 글쓴이의 이름값(?)으로 베스트셀러가  느낌이랄까그래서 그럴까 ‘에세이라고 불리는 책들 보다는이렇게 ‘산문으로 불리는 책들을 좋아한다적어도 지금까지 내가 읽었던, ‘산문집이라는 타이틀을 들고 나온 책들은 언제나 글에 깊이가 있었고나를 오래도록 생각하게 하였으니까물론 그런 산문집들의 저자는 대게 박범신님 처럼 관록이 있는 분들이 많긴 했지만.

유명인의 에세이신변잡기 글을 읽으면 이상하게도 ‘’ 자신에 대한 생각보다는 그저  앞에 보일듯 보이지 않는 성공에 열을 내거나 혹은 ‘ 사람은 했는데  이렇게 못하지?’ 같은 자기비하에 빠지는 경우가 왕왕 있다물론 정말 깊이있고오롯이 ‘’ 자신에 대해 생각해보는 에세이도 많지만 말이다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요즘 핫한 인물이  에세이베스트셀러가  에세이라고 해서  좋은 글이 아니라는 이야기다오히려  지금의 20대들에게현실에 아파하는 청춘들에게 그런 에세이보다는박범신님의 산문집 『순례』를 추천하고 싶다그대들이 지금 힘들어하는  삶의 전부가 아니라고그럴수록 오히려 ‘’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한다고적어도  산문집을 읽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비우니 향기롭다

히말라야는 무엇보다 내가  내가 속한 사회에서 악을 써가며 지키고자 했던 사악한 전투거짓말허세그리고 성공과 실패의 이분법이 주었떤 상처들까지얼마나 나와 상관없이 주입된 가짜 꿈들에서 비롯된 것인이 분명히   있도록 도와줍니다이곳에서   있는 일은 걷는 것뿐입니다자동차도 없고 비행기도 없습니다오직  앞에 놓인 길만이 나를 도울 뿐입니다그러므로 영혼은 분산되지 않습니다멀리 있으니 오히려  나라가 조감도처럼 한눈에 보이고 그곳에서 습관에 의지해 죽을    달려온 나의 지난 삶도 아프게 보입니다바로 ‘은혜로운 생음 불러온 본원적 세계를 사실적으로 보고 느끼는 축복을 누릴  있다는 말입니다. p 017

티베트 불교의 성자 밀라레파는 이렇게 읊었습니다그가 지닌 것은 배고픔을  견디는 몸뚱이와 누더기 면포와 헤진 방석뿐이었으나그는 세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감히 밀라레파와 비교할  없겠지만 나는 이제 내가 가진 모든 이를테면 좋은 기민한 휴대전화요술 상자 텔레비전재빠른 자동차로부터 벗어나도 외롭지 않은 시간의 길로 들어갑니다느릿느릿걷겠습니다그것은 오래전 전근대의 ‘한량들이 갔던 길이며밀란 쿤데라의 표현에 따르면 ‘신의 으로 들어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p028

돌림노래는 길고 따뜻했습니다.

간간이 웃음소리와 잡담이 돌림노래 사이로 섞여 들어왔습니다촛불도 켜지 않은 어둠 속에서 손에 손을 잡고 둘러앉아 돌림노래를 부르면서 밤을 보내는 저들에게 ‘가족 무엇일까요 눈엔 자꼬 가족이 모여도 서로 마주 앉기보다 일렬로 앉아 현대인의 신이기도  텔레비전을 향해 경배드리는 우리네 가정의  풍경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p 052

K형에게 여기에서 다시 묻고 싶습니다당신은 행복해지기위해서 이순간 무엇 무엇을 소유하고 있습니까내가 가진 더운 밥과   넓이의 방과 시멘트 욕조와 새로  내의와 삐걱거리는 침대를 갖고 있나요지금의 나처럼 모국어에 대한 감동을  갖고 있나요그렇다면 형이 가진 그것들로 지금의 나만큼 충만되고 행복한가요?

나는 히말라야에서 보았습니다.

내가  것은 속도를 다투지 않은 수많은 길과본성을 잃지 않은 사람과문명의 비곗덩어리를 가볍게 뚫고 들어와 내장까지 밝혀주는 투명한 햇빛과 자유롭기 한정없는 바람만년 빙하를 이고 있어도 결코 허공을 이기지 못하는 거대한 설산들을 보았습니다 감히 고백하자면행복하고 충만 되기 위해서 내가 이미 너무도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며행복해지는 길이 어디에 있는이 어렴풋하게나마 찾을  있었습니다. p 087

비가 오락가락 합니다.

나는 넓은 비닐 주머니를 거꾸로 쓰고 흐느적흐느적 빗속을 겉습니다수많은 사람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갑니다내가 사랑했떤 사람도 떠오르지만 내게 상처를 주었떤 사람 내가 상처를  사람들도 생각납니다오해에 불과한 작은 일로 나를 버린 사람아집에 따른 어리석은 고집으로 내가 버린 소중한 사람들도 떠오릅니다회한은 많고  길은 멀고남은 사랑은 아직도 이렇듯 여일하게 뜨겁습니다. p 103

나는  순간 눈물겨웠습니다나의 존재가 너무도 가벼워 눈물겨웠고죽을    일벌레로 살아온 우리네 넓은 날의 초상이 안쓰러워 눈물겨웠고동강  조국에 살면서 그래도 세계의 중심으로 우뚝 서겠다는 장한 꿈을 쫓아 오늘도 다리가 찢어져라 내달리고 있는 조국에 대한 연민 때문에 눈물겨웠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p 114

행복해지는 길을 찾지 못한다면 부자가  필요도 없습니다죽어라 일해 돈을 버는  최종적으로 나와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불어 행복해지기 위해서입니다그래서 나는 우리가 지금 어떤 ‘샹그릴라 가슴에 품고 있는지과연 행복을 향한 비전은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물론 이런식의 질문이 자본주의적 속성을 쫓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다지 유쾌한 질문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나는 압니다. ‘사는  이게 아닌데….’라는 회의는 뒤집힌 압정과 같아서 밟을 때마다 하고 억눌려 있는 본성이 속에서 비명을 지를테니까요. p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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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묻고 인문학이 답하다 - 우리가 사랑이라 말하는 모든 것들 날마다 인문학 4
정지우 지음 / 포르체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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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풀리지 않은 명제가 많다. 대체적으로 이과적인게 많지만, 문과적인 것에서 찾자면- 그건 아마도 사랑이 아닐까? 사랑이란 무엇일까!




도대체 사랑이란게 무엇이기에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과는 다른 삶을 살게 하는 것일까. 이렇게 사랑에 대해 궁금해 하는 건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해답은 명확하지 않다. 무엇보다 사랑의 정의, 사랑의 형태, 사랑의 모습 등등 수많은 질문에 대한 대답 자체가 사람마다 다르기에, 사랑이란 무엇인지 명확한 해답을 찾고자 하는 것 자체가 모순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은 사랑이 무엇인지, 무엇이기에 사람을 바꾸는지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사랑에 대해 글을 써내려 갔다. 그 글은 책이 되었고, 그 책이 나에게 들어왔다. 제목은 「사랑이 묻고 인문학이 답하다」.



「사랑이 묻고 인문학이 답하다」를 읽고 난 뒤, 한 줄 감상은 이렇다. 사랑에 대한 인문학책이라고 하기에는 1%부족하지만, 사랑에 대한 인문학적 에세이라고 했을 때는 이 만한 책이 없다! 사랑이라는 감정의 수많은 모습을 인문학적으로 써내려간 이 책을 읽고 있노라니, 나 역시 사랑이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본디 사랑이란 내가 사랑하는 상대의 모습에 따라 남녀간의 사랑 뿐만아니라, 부모자식간의 사랑, 친구간의 사랑, 연예인을 향한 사랑, 반려동/식물을 향한 사랑 등등 수많은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은가. 사랑의 형태는 이토록 다양하다. 그리고 나 또한 이토록 다양한 사랑을 해왔다. 아니,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사랑을 하고 살았고, 살고 있으며, 살아갈 것이다.



어떠한 형태의 사랑이든, 사랑을 했을, 하고 있을, 할 예정인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어보는건 어떨까?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은 내 욕망의 특이함을 보여준다. (…) 수많은 사람 중에서 내 욕망에 꼭 들어맞는 이미지를 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우연과 놀라운 우연의 일치가 필요했던가!

-롤랑 바트르, 《사랑의 단상》 中


지금껏 많은 사람과 소개팅도 하고, 썸도 타며 만났지만 당신만큼 나에게 ‘특별히’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었다. 그 말은 당신의 특별함을 이야기하지만, 그 이상으로 내 욕망이 특별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특별함을 지키기 위해 당신이 필요하다. (…) 우리가 사랑하는 그 사람은 세상 모두에게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시큰둥 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든 아니든 상관없다. 나에게는 남들이 모르는, 연인에 대한 ‘나만의 지식’이 있다. p 029



우리는 사랑이 나와 당신만이 맺는 관계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나와 내 욕망이 맺는 관계이기도 하다. 나는 내 욕망을 사랑한다. 그 사람이 내 곁에 있어야 하는 이유는 이 특별한 욕망을 지키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특별한 욕망이 주는 삶의 활기, 인생에서 무언가에 몰입하는 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움직이는 힘까지…. 우리에게는 삶을 생기로 가득 채우는 이 욕망이 필요하다. p 030




사랑이라는 욕망을 사랑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단연코 없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곰곰히 생각해보니, 나역시도 사랑이라는 욕망 자체를 사랑했었다. 물론 당시 사랑의 대상, 그러니까 내 애정을 한 몸에 받았던 대상은 일종의 스타, 뮤지컬 배우다. 그 배우가 출연하는 뮤지컬을 보기 위해 피켓팅을 마다하지 않고, 오히려 피켓팅하는 그 시간의 쫄깃함까지 즐겼다. 주말에는 공연을 보러가니, 평일에는 으쌰으쌰하며 나에게 주어진 삶을 보낼 수 있었다. 그 배우가 출연하는 공연을 보기전 까지의 모든 시간이 나에게는 두근거림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공연을 보고 나온 뒤에는 허했다. 다음 공연 스케쥴이 잡힐 때까지 쭉 마음이 허했다. 그때는 그저 공연을 보지 못하는 거에 대한 공허함이라 생각했는데, 다시금 돌이켜보니 내가 사랑한건, 사랑이라는 욕망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나의 언어로 바꾸자면, 나의 시간과 비용을 써가며 얻어낸 티켓과 공연을 보러가기전의 두근거림과 기다림. 그 두근거림과 기다림이 있었기에, 나는 디데이를 맞이하기 위한 하루하루를 활기차게 보낼 수 있었지않았나 싶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과거의 일이고. 지금의 내가 사랑하는 욕망은 무엇인지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아직은 모르겠다. 그저 아기 보는데 하루 24시간이 너무 후딱 지나가기에, 욕망을 사랑할 시간조차도 지금의 나에겐 사치인 느낌이랄까.



우리는 마술에 걸린 채 황홀해하며, 잠들지 않고 잠 속에 있으며, 잠들기 전의 어린애 같은 쾌감 속에 있다. (…) 시간, 법률, 금기 등. 아무것도 고갈되지 않으며, 아무것도 원해지지 않는다.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中


늘 엄마와 아빠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아이에게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아이는 고민하다가 “안아주는 거”라고 말했다. 나는 내심 ‘많이 좋아하는 거’ 정도를 기대하고 있었기에 아이의 말이 생경하게 들렸다. 아이에게 사랑은 아주 구체적인 무언가인 모양이었다. 기분 좋고, 따스하고, 행복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구체적인 행위 그 자체, 즉 안아주는 행위가 곧 사랑인 것이다. p 047



완벽한 껴안음의 순간에, 우리는 더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그저 그 따사로운 평온으로 완전하게 채워진다. 그 속에서는 다른 욕망의 작동이 정지하며, 그저 ‘괜찮은’ 상태가 된다. 욕망과 결핍이 인생을 계속 어딘가로 이끌고 간다면, 포옹과 충일은 우리를 여기에 머무르게 한다. 꼭 껴안고 있으면 불안에 떨며 채우기 위해 무언가를 쫓지 않아도 괜찮다. 그래서 바르트는 포옹이야말로 사랑에서 최고의 순간으로 꼽는다. p 048



아이에게 언젠가 “왜 아빠보다 엄마가 더 좋아?”라는 나의 볼멘소리에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다. “엄마가 더 많이 안아주니까.” 그 말을 듣고 나는 꽤 반성했다. 아이에게 사랑이란, 아주 구체적인 감각이다. 어른들이 따지기 바쁜 능력이니 미의식이니 하는 것들이 아니라, 가장 직접적이고 섬세하며 생생하게 존재하는 감각의 향연이다. 아이는 그 누구보다 그것을 정확하게 알고 솔직하게 말할 줄 안다. p 049




완벽한 껴안음의 순간. 그 순간이야말로 사랑 그 자체다. 나 역시 그렇게 확신할 수 있다. 누군가를 안아준다는 건, 특히 안아주는 그 품이 따뜻하게 느껴진다면, 그건 분명 그 누군가를 사랑하는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게 남녀간의 사랑이든, 가족간의 사랑이든, 친구간의 사랑이든, 그 무엇이든. 그 어떤 사랑의 모습 중에서 거의 공통되게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안아주는 것’일테니까. 



나와 신랑은 육아로 인해 하루하루가 너무 고되다. 말못하는 아기와 실랑이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더더욱. 그렇게 힘든 하루를 보내다가도, 아기를 안고 있으면 1분전까지도 힘들었던 순간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아기를 안고 있는 그 시간만큼은 ‘내가 힘들었었나?’ 싶을정도로 말이다. 힘들 때는 내가 아기를 사랑하고 있는게 맞을까 싶다가도, 아기를 안는 순간 ‘아, 나는 우리 아기를 정말 사랑하는구나’하고 확신한다. 육퇴 후에 나에게 고생했다며 안아주는 신랑 품도 그렇다. 정말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다. 말을 하지 않아도, 잠시잠깐 안는 것으로도 나도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정말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안아주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그토록 우리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고 우리의 삶을 온통 뒤집어 놓은 그들이, 인생의 어느 지점에선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무의미한 존재였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안드레 애치먼, 《알리바이》 中


사랑하게 된 사람이 눈 앞에 있다. 그는 온통 내 삶을 뒤집어 놓았다. (…) 그렇게 격렬한 감정들을 느끼게 하는 사람이 한때는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은 기묘하다. 예를 들어 학교나 직장 등 한 공간에서 그 사람을 오랫동안 보아온 경우라면 더욱 그럴 법하다. 지난 몇 달간, 혹은 지난 몇 년간 나에게 완전히 ‘무의미’한 존재였던 그가 나와 ‘연인관계’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된 것이다. 이 간극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p 081



어제까지 아무 관계도 아니었던 당신이 오늘부터 나와 연인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 우리 사이에는 무언가 일어난다. 일단 ‘연인이라면 해야하는 것’의 목록이 각자의 가슴에 주어진다. (…) 즉, 연인 관계로 진입하는 그 순간부터 그들은 서로에게 의무를 가진 존재가 된다. 다른 사람들은 내게 그런 의무가 없다. 오직 당신만이 그런 의무가 있을 뿐이다. 달리 말하면, 당신만이 내게 그만한 ‘의미’를 가진 존재가 된다. p 081~082



그렇기에 사랑을 대할 때는, 오로지 감정만 떠올리기보다 앞서 말한 ‘계약상 의무 준수’에 관해 생각해야 한다. 사랑의 핵심이 감정일 지는 모르지만, 그 감정을 지탱하는 형식 또한 빼놓고 사랑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어떤 형식에 진입함으로써 사랑하는 사람, 연인이 된다. 그래서 사랑 앞에서는 때론 의미와 형식, 그리고 의무를 떠올려야 한다. 우리는 그러한 ‘딱딱한 것들’ 또한 사랑의 일부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때로는 사랑에 딱딱한 태도가 필요하다. p 083




신랑과 가끔 ‘라떼’를 이야기할 때가 있다. 우리에게 라떼란, 서로가 서로를 모르던 바로 그 시기다. 태어나서부터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의 약 이십여년간의 시간. 그 시간동안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아무 의미가 없던, 그야말로 ‘타인’이었다. 어쩌면 그 이십여년간 어딘가에서 마주쳤을지도 모르겠으나, 우리는 철저하게 타인이었다. 그렇게 타인으로 살다가, 한 공간에서 만나게 되었고, 그렇게 연애를 하게 되었다. 그러다 연애가 끝나고, 결혼을 하였고, 지금은 이쁜 아기를 키우고 있다. 이것만큼 놀라운 일이 또 어디있을까? 생면부지의 생판 남인 사람들이, 어느날 갑자기 연인이 된다는 것. 어쩌면 우리가 아닌, 서로 다른 사람을 만났을 가능성도 있었을텐데, 그럼에도 우리가 만난 것. 난 지금도 이 모든게 놀랍고 신기하다.



그래서 그럴까? 우리는 이 책에서 말하는 소위 ‘계약상 의무 준수’에 대해 한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서로에게 연락을 하고, 혹시라도 연락이 힘든 상황이 올 경우 그전에 어떠한 상황인지 미리 이야기를 하는 등, 서로가 서로를 존중했다. 그 덕분에 연애기간, 결혼, 그리고 현재까지 1n년간 큰 싸움(?)없이 아주 잘 살고 있다. 뭐, 아이가 학교를 가기 시작하면 또 달라진다고는 하지만, 나와 신랑은 지금의 모습과 크게 변하지 않을 듯 싶다.



서로 사랑하라, 허나 사랑에 속박되지는 말라. (…) 서로의 잔을 채우되, 어느 한 편의 진만을 마시지는 말라. (…) 함께 노래하며 춤추며 즐거워하되, 그대들 각자는 고독하게 하라.

-칼릴 지브란, 《예언자》 中


결혼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한다면, 이전의 어떤 연애보다 타인과 더 깊이 사생활을 모두 공유한다는 점일 것이다. 사회마다 결혼의 의미가 다르긴 하지만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양가 부모님등 가족들의 사정까지 서로 깊이 알고 생활의 일부가 되어 간다는 걸 의미한다. 연애 때와는 다른 밀착감이 생기고, 서로가 서로의 삶의 일부가 되어간다. p 105



결혼에 위기가 찾아온다면, 아무래도 가장 큰 이유는 너무 오랜 시간동안 함께 지내면서 하나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 누구보다 서로 결합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막상 그렇게 되고 나면 사랑의 위기가 시작된다. 너무 오래 지내면서 모든 걸 다 알게 되어 서로에 대한 환상과 호기심이 사라지고, 더는 새롭게 할 이야기나 재미가 없어 질리는 것이 사랑과 결혼의 역설일지도 모른다. 그런 결혼에 대해 칼릴 지브란은 말한다. “그대들 각자는 고독”하라고 말이다. p 106



상대가 자기만의 내면을 가진 고유한 존재라는 사실을 유념하면 지루했던 일상도 조금은 달라진다. 나는 자기만의 감각과 마음으로 세상을 받아들이는 한 존재와 함께 걷고 있다. 그러면 그의 기분이나 마음이 궁금해진다. 그에게 지금 이 산책의 기분은 어떠하냐고. 오늘은 어떤 마음이냐고 묻게 된다. 그 대답에서 상대의 마음을 알게 되고, 또 그와 비슷하거나 다른 나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것만으로도 ‘당연한’ 존재가 될 뻔했던 내 곁의 사람은 한 명의 고유한 존재로 서게 된다. 나와 당신은 함께 있지만 동시에 거리를 가진, 고유한 존재로 실재한다. p 107




신랑과 난, 연애시절의 환상과 호기심은 당연히 사라진지 오래지만, 상대방을 향한 감정은 연애시절보다 결혼한 지금 더 커졌다면 커졌다고 확신할 수 있다. 연애기간까지 합치면, 내 나이의 ⅓ 정도나 되는 다소 긴(?) 기간을 함께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이유는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서로를 향한 존중이다. 혼자 있는 시간을 지켜주고, 함께하는 시간은 함께하는 것. 



연애할 때도 그랬지만, 결혼한 지금도 모든 일을 둘이서 다 같이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본디 오랜 시간을 타인으로 살아온 우리다. 하루 24시간 붙어서 생활한다면, 어떻게든 탈이 날 수 밖에 없다. 잠시 잠깐이라도 서로 떨어져 있는 시간도 필요하다. 하다못해 서로가 직장에 있는 시간이라도.



물론 지금의 나는...육아휴직 중인지라 혼자 있는 시간이 흔치 않다. 혼자 있고 싶으나, 내 앞에는 뽈뽈거리며 기어다니는 아기가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다행인건, 우리 신랑이 주말에는 아기를 전담케어하며, 나에게 조금이라도 혼자있는 시간을 주고자 노력한다는 것이다. 신랑의 이러한 사랑과 배려가 내 원동력이 되어, 나의 온 힘을 우리 아기에게 쏟아붓고 있다. 물론, 신랑에게도 나누어줄 힘을 조금은 남겨놔야하는데, 온 종일 아기를 보다보니....아직까지 그건 좀 무리인듯^_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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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경기도 의정부시에 있는 천보산을 갔었다. 집에서 멀기도 멀거니와, 이름도 생소한 천보산을 갔던 이유는 단 하나다. 제일 험난했던 시기에 귀한 자리에 올랐으나, 비참한 일생을 지낸 한 여인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 여인의 이름은 이애숙. 생소하다면 생소한 그 이름. 하지만 그녀의 봉호를 들으면 ‘아!’ 하고 알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조선 왕 효종에게 받은 봉호는 바로 의순공주 이다.



의순공주에 대해서는 내 블로그에서 여러차례 포스팅을 했다. 아마 잊을만 하면 포스팅을 했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의순공주의 일대기를 그린 역사소설 서평을 시작으로, 오롯이 의순공주와 환향녀에 대한 포스팅, 족두리묘 답사 포스팅, 그리고 의순공주와 당대 상황이 쓰여진 역사책 서평이 있었다. 내가 이토록 의순공주에 대한 포스팅을 끊임없이 한 이유는 단 하나다. 기억하고 또 기억해서, 이 같은 역사를 반복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의순공주에 대한 이야기는 조선의 흑역사다. 사람에 따라서는 알고 싶지 않은 역사이고, 왜 계속 그런 이야기를 하냐며 마음에 안들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의순공주의 이야기는 못난 리더와 못난 남자들의 환장의 콜라보로 이뤄진 이야기기 때문이다. 차라리 소설이었으면 하지만, 슬프게도 역사적 사실인 이야기, 조선왕조실록에도 떡하니 기록되어있는 이야기다.



의순공주의 이야기를 알기 위해서는, 그녀가 살았던 조선 중기 (인조 ~ 효종) 대의 상황을 알고 있어야 한다.


※빠르게 훑어보는 인조 ~ 효종까지.


콤플렉스로 중무장된 한 사람이 반정으로 왕이 되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선조이고, 아버지는 선조의 아들 정원군(조선왕실 최초의 싸이코패스)이다. 할아버지 선조와 아비인 정원군. 그 핏줄을 이어받아 왕이 된 그는 바로 능양군, 인조다.


삼촌 광해군을 몰아내고, 1623년에 왕위에 오른 인조는 즉위 직후 광해군의 정책을 전면 폐기하고, 친명배금 정책을 펼쳤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이 때가 임진왜란/정유재란 7년전쟁이 막 끝난지 얼마 안된 시기라는 점이다. 당시 광해군은 그 유명한 중립외교로 명나라와 금나라(청나라) 사이에서 완벽한 줄타기를 하며, 전쟁으로 피폐해졌던 조선 땅의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광해를 몰아내고 왕이 된 인조는 망해가는 명나라를 선택했다. 그렇게 조선의 안전이 다시 한번 송두리째 흔들린다.


1627년 금나라는 군대를 이끌고 조선에 쳐들어왔다(정묘호란). 이후 인조는 금나라와 형제의 관계를 맺는 것으로 겨우 마무리 하는 듯 싶었다. 하지만 인조는 다시 금나라의 뒷통수를 쳤다. 이에 빡친 금나라는 국호를 청으로 바꾼 뒤, 1636년 다시 조선으로 쳐들어온다(병자호란).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도망갔다(원래는 강화도로 가려하였으나, 강화도로 가기 전에 청군에 길막당했다). 남한산성에서 항전을 하다 결국 삼전도(현재 잠실 부근)에서 청태종에게 항복을 하며, 삼배구고두례를 하며 굴욕을 맛 보았고, 조선의 왕세자를 비롯한 왕자들이 청나라로 끌려갔다.


이후 청나라와 돈독한 관계를 맺었던 소현세자가 귀국했지만, 소현세자가 요절한다. 결국 동생인 봉림대군이 왕위에 등극하니 그가 바로 효종이다. 





북벌정책으로 유명한 효종이다. 하지만 실상은 북벌다운 북벌은 한 적이 없는 효종이다. 명분이 없는 왕위였기에, 아비를 위하는 명분으로 내세운 것이 바로 북벌이었던 것이다. 뭐, 여기까진 그렇다치고. 다시 의순공주 이야기로 돌아가보면..



청나라는 효종에게 조선 왕실의 딸을 공녀를 요청한다. 하지만 효종과 종친들은 자신의 딸들을 오랑캐에게 보낼 수 없었다. 그렇다고 계속 공녀를 안보낼 수도 없는 일, 결국 종친의 한 사람이었던 금림군 이개윤이 본인의 딸을 공녀로 보내겠다고 하였다. 금림군은 효종의 10촌으로, 종친이라고는 해도 거의 남이나 다를 바 없었던, 성씨만 조선 이씨였던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힘없는 종친이 자의반, 타의반 총대를 맨것이다.



(금림군의 딸)의순공주로 간택이 결정되고 사흘 뒤 효종이 관료들에게 이리 물었다. “근래에 사대부집에서 서로 다퉈 혼사를 치른다는데 사실인가?” 사정을 모르는 양반들이 간택을 면하려고 결혼행진곡을 벌인다는 소문이었다. 효종은 열 살 된 세자와 열한 살과 아홉 살 먹은 공주 혼인을 걱정하며 8~12세 사대부 자녀 혼인 금지령을 내렸다.(『효종실록』) ‘두 살배기 공주 하나뿐’이라는 말은 삼척동자도 아는 가짜라는 자백이었다. - 역사책 「땅의 역사 5권」 中



자기 딸 대신 오랑캐 나라로 간다는 금림군의 딸 이애숙을, 효종은 자신의 양녀로 삼았다. 그렇게 우리가 알고있는 의순공주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효종의 양녀로 청나라로 간 의순공주는, 다행이라면 다행이게도 당시 청나라 권력가였던 예친왕 도르곤의 부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남아있는 기록에 따르면 부부사이도 좋았던 듯 보인다. 하지만 조선사람들은 이를 못마땅해했다. 그 사실은 의정부 천보산에 위치한 족두리묘와 정주당놀이로 확인할 수 있다.


병자호란과 정축하성으로 인해 울분에 차 있는 뭇 백성들 사이에 '왕실에서 공주까지 오랑캐에게 바쳤다' 라는 원성이 들끓었지. 조정에서는 몇 달 동안 민심을 무마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으나 결국 임금께서 자신의 딸을 빼돌리고 종친의 자녀인 너를 대신 보낸 일 까지 소문이 나서 민심이 더욱 흉흉해질까 봐 전전긍긍하시는 형편이 됐단다. 그래서 궁리해낸 것이 바로 이 족두리 묘였어. 네가 연경에서 오라비들을 통해 돌려보낸 족두리를 갖고 이야기를 지어낸거야. 


의순공주는 끝내 국경을 넘지 않았다. 국경으로 가던 중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힐 수가 없었다면서 평안도 정주 강에 몸을 던졌고 시신을 찾지 못한 채 족두리만 물에 떠 올랐다는 설화를 만들어 낸 것이지. - 역사소설 「애숙의 나라」 中


경기도 의정부 천보산 기슭에 금림군 가족묘역이 있다. 동쪽 끝 비석 없는 묘는 ‘족두리산소’라 불린다. 오랑캐 땅을 밟기 전 공주가 압록강에 투신해 족두리만 모셨다고 믿는다. - 역사책 「땅의 역사 5권」 中



조선은 멀쩡히 살아있는 의순공주를 죽은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뭐, 의순공주가 청나라에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다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겠지만 슬프게도, 이후 의순공주에게는 비극이 연달아 일어난다. 힘든 기간을 버티며, 우여곡절 끝에 겨우 조선 땅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그 누구도 반기지 않았다. 당연히 그녀를 공주로 봉했던 조선왕실조차도 말이다. 하기사, 조선에서는 이미 죽어서 무덤까지 만든 사람인데, 살아서 돌아왔으니 반가울리가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의순공주는 조선의 무능을, 자신들의 무능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람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비단 의순공주 뿐만이 아니다. 조선에는 의순공주를 포함하여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천신만고 끝에 고국으로 돌아온 수많은 조선의 여성들이 많이 있었다. 그녀들은 조선과 조선의 왕, 조선의 위정자들의 무능으로 인한 피해자였다. 그렇기에 조선은 그녀들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정축하성의 국치*로 전쟁이 끝난 뒤 청국으로 끌려간 포로들에 대한 석방 교섭이 있었던 기묘년 이후 적지 않은 조선인들이 돌아왔다. 그런데 여인들만은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혀 실절했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내쳐지고 시집에서 문전박대를 받았다. 어쩌다가 도성으로 들어간 여인들도 다른사람들 눈에 띄지 말라고 별당이나 뒷방에서 유폐되다시피 홀로 쓸쓸히 지내야 했다. 대들보에 명주실을 내려 목을 걸거나, 은장도로 손목을 긋고 가슴을 찌른 여인들이 부지기수 였다. 집 안에 있는 샘에 거꾸로 뛰어들어 목숨을 끊은 이들도 한 둘이 아니었다고 한다.


아예 집안에 들어갈 수 조차 없는 여인들은 깊은 강을 찾아 몸을 던졌다. 대게는 오랑캐에게 끌려갈 때 자결하지 못한 자신을 한탄했고, 조선의 남정네들을 원망하면서 눈을 뜬 채 이승을 떠났다. 속환한 며느리가 칠거지악을 저질렀으니, 이혼을 하도록 해달라는 상소가 쉬지 않고 올라왔다. 환향한 지 한 해 만에 그렇게 한이 맺힌 채 죽어간 여성이 대략 일만 명은 넘었을 것이라는 말도 나돈다고 했다. - 역사소설 「애숙의 나라」 中

*정축하성의 국치: 삼전도의 굴욕


숱한 여자들이 청으로 끌려갔다가 매우 적은 숫자로 돌아왔다. 환향녀라 부른다. 이들에 대한 반응은 차가웠다. - 역사책 「땅의 역사 5권」 中



조선은 이들을 환향녀라 불렀다. 그리고 이들을 괄시했다. 그녀들을 괄시한 명분은 뚜렷했다. 조선의 여인에게는 매우 중요한 정절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오랑캐에게 복수는 하지 못할 망정, 끌려갔을 때 죽지도 않고 살아서 돌아왔으니 정절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인가. 청나라에 대한 복수심을 힘없는 여인들에게 쏟아낸 것이, 당시 조선의 위정자들, 조선의 남자들이었다. 자기들이 무능해서 일어난 일이었고, 그로 인한 피해를 조선의 여성들이 입었음에도 조선의 위정자들, 조선의 남자들은 그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았다. 



의순공주는 그저 비극적인 삶을 산 여인이 아니다. 그녀의 삶은 죽지 못해 살았던 수많은 환향녀들을 대변한다. 그녀의 삶은 무능하고 치졸했던 조선과 조선의 왕, 조선의 위정자, 조선의 남자들을 고발한다. 




과거에는 의순공주 비극적인 삶 같은 조선의 흑역사를 볼 때마다 ‘만약’ 이란 생각을 했었다. 물론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그럼에도 ‘만약에 이랬다면~’ 이라는 생각이 머리속에서 떠나질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좀 다르다. 이제는 ‘만약’이라는 가정이 아니라, ‘앞으로’를 위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훗날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앞으로’ 어떻게 해야하는가, 라는 생각 말이다.



의순공주가 살았던 당시 조선을 보면, 임진/정유재란이 일어난지 오래 안지나서 정묘/병자호란이 일어난 것을 알 수 있다. 즉 한번 대규모의 외침이 있었으므로, 이후 방비 및 외교에 대해 ‘제대로’ 생각했더라면 의순공주와 같은 피해자들은 나오지 않았을 거라는 이야기다. 그 뿐인가? 약 이백여년 뒤 여러차례 외침이 있었고, 결국에는 일본의 식민지배까지 받았다. ‘앞으로’를 생각하지 않아서, 흑역사가 계속 반복된 것이다.



물론 우리가 사는 21세기에 저런 외침에 있겠냐고 말하는 삶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끊이지 않고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음. 확실한 건 ‘앞으로’에 대해서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는다면, 21세기에도 의순공주와 같은 피해자가 다시 생겨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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