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수습직원이었던 아키코는 작가인 이시키 마사카즈의 원고를 받으러 가서는 첫눈에 반하게 되고, 마사즈키 역시 아키코를 보고 첫눈에 반해 두 사람은 결혼을 하고 가마쿠라의 집으로 가서 살게 된다. 가마쿠라는 여러 신들과 요괴들이 인간과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아키코는 이런 마을의 모습이 그저 축제의 한 부분이고 사람들이 변장을 하거나 코스프레를 하는 것으로 안다. 마사카즈는 가마쿠라의 경찰서에서도 심령 범죄의 고문도 맡고 있어서 미스터리한 사건 해결에 도움을 준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마을에서 열리는 요괴 시장에 들어가게 되고 거기서 송이버섯을 사 오면서 아키코와 마사카즈는 갈라지는 운명에 서게 된다
.

일본에는 성(姓)이 한국(300개 정도)보다 훨씬 많은 십만 개 정도가 있다. 마찬가지로 집집마다 섬기는 신이 많은 나라이고 신에 대한 이야기가 널려 있는 나라이다. 요괴의 모습도, 신의 형태도 아주 많아서 일본의 이런 문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기분 좋을 영화라 생각한다. 기분 좋다는 말은 말레피센트처럼 동화 같고, 운명적인 만남에 대해서 영화는 말하고 있어서이다
.

가마쿠라에서는 요괴들이 스스럼없이 다니고 있으며 그런 요괴들과 인간들이 함께 지내는 모습은 흥미 있고 기분 좋다. 가정부 킨 할머니의 나이는 130살이 넘은 것으로 추정하고(같이 살고 있는 마사키즈도 나이를 모른다) 요괴들이 여는 밤의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과 요괴의 모습도 흥미롭다. 마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실사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고, 스타워즈에 나오는 외계 종족들의 모습도 스쳐 지나간다
.

영화의 중심이 되는 인물은 이시키 마사카즈보다는 이시키 아키코 역으로 분한 타카하키 미츠키다. 극 중에서도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어린 신부로 나오는 타카하키는 약간은 철없고 남편만을 바라보며 신혼 생활과 새로운 가마쿠라의 환경, 요괴와 신들과의 만남도 거부감 없이 즐긴다. 놀라거나 기쁠 때는 커다란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크게 뜨고 사랑스럽게 바라본다
.

집으로 숨어 들어온 빈곤의 신에게조차 잘해준다. 빈곤의 신이 집에 붙어 있으면 점점 빈곤으로 가게 되는데, 아키코는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빈곤의 신에게도 식사를 대접하고 가마쿠라의 과자를 나눠먹곤 한다. 송이버섯을 준 요괴 때문에 후에 육체와 영혼이 분리가 되어서 저쪽 세계로 가야 하고 마사카즈는 기차를 타고 저쪽 세계의 아키코를 구하러 가는 내용이다
.

영화 ‘운명’에는 유명한 일본. 배우들이 대거 나온다. 혼노지 호텔의 츠츠미 신이치가 나와서 개구리 요괴로 변하기도 하고, 어느 가족의 안도 사쿠라, 타나타 민, 카세 료의 여친(아직도 사귀는지?) 이치카와 미카코, 곡성으로 우리나라에 잘 알려진 쿠니무라 준도 등장한다
.

깨끗하고 맑은 동화 같은 영화다. 사랑하는 사람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는 억지스러움이 있긴 하지만 동화책을 펼쳐서 읽는 기분이 들면서 그런 것 따위 넘겨버리게 된다. 영화는 슬프다거나 복잡한 이해관계도 없다. 다양한 모습의 요괴와 저쪽 세계의 배경, 그리고 그곳으로 가는 중간의 기차의 모습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먼저 죽은 자들이 떠나기 싫어서 생명을 연장하려고 하는 설정도 나쁘지 않다. 조금은 비어 보이는 빌런들의 모습도 동화스럽다. 엔딩곡도 좋아서 여러 애니메이션이 떠오르기도 한다
.

이 영화는 너무나 뻔한 플롯이다. 운명 같은 여자가 요괴에 잡혀가고 그곳으로 가서 요괴에게 잡혀 있는 그녀를 구하는 내용, 너무 뻔한 내용의 이런 동화 같은 이야기가 나는 좋다. 그건 마치 11살 때 대야에 담은 시원한 물에 발을 담그고 앉아서 꿈같은 동화책을 읽었던 기억을 여지없이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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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디아틀로프는 페이크 다큐 영화다. 페이크 다큐의 팬이라면 좋아할 만한 영화라고 생각된다. 디아틀로프는 59년에 일어났던 탐사대의 실제 미스터리한 사건을(페이크 다큐는 대체로 있었던 사건을, 곤지암도 그렇고) 두고 거기에 상상력을 덧입힌 이야기라 꽤 흥미롭다. 잘 만들지 못한 B급 고어물보다 훨씬 무서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이 영화는 한 시간 반 정도로, 중반부까지는 루즈하고 지루하게 흘러가지만 실제 사건에 대해서 복선을 까는 중이라고 생각하고 보다 보면 중반부를 넘어서부터 긴장감이 돌면서 질주하듯이 흘러간다
.

페이크 다큐는 파라노말엑티비티 이후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파라노말엑티비티 같은 센세이션은 일으키지 못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파라노말엑티비티를 볼 때가 생각나는데, 마지막 상영을 보러 갔었다. 끝나니까 두 시가 좀 넘었는데 본 사람은 알겠지만 마지막의 점프 스케어는 혼이 나갈 정도였다. 몇 명 없던 극장 안의 사람들이 소리를 너무나 크게 지르고 놀랐는지 생생생생생한 기억이 있다. 그때 일행도 너무 놀라서 순간적으로 나의 팔을 얼마나 세게 잡았던지 시간이 지나서 보니 멍이, 멍이 보남파초노주빨로 들어 있었다. 아마도 공포영화사에 남을 점프 스케어가 아닌가 생각한다
.

디아틀로프의 탐사대의 죽음은 미스터리한 부분이 실제로 많다. 그 추운 곳에서 속옷만 입고 맨발로 두 명의 시체로 발견되었다거나 시체에서 방사능이 계속 나온다거나, 탐사대의 텐트는 다 찢겨있고 눈으로 덮여있거나 신발, 카메라와 신분증이나 일기나 음식 같은 것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던 부분도 미스터리하고 두 명을 제외한 나머지 탐사대원들은 5월에 눈이 녹으면서 발견되었는데 4명의 시신에서 이상한 점이 발견되었다
.

네 명의 시신에서 발견된 미스터리한 점은, 두 명은 두개골에 골절이 발견되었고, 다른 두 명은 늑골과 갈비뼈에 골절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인간이 할 수 없는 굉장한 힘으로 가격 당한 것이라는 것이다. 여성대원의 시신에는 혀가 잘려 나가있고 또 다른 한 명의 대원은 눈이 사라져 있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방사능이 검출되었다는 것
.

그러니까 59년부터 현재까지 ‘어떤 알 수 없는 무엇’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고 아직도 디아틀로프 사건을 파헤치려고 한다는 것이다. 영화는 이런 사실에 의거하여 영화를 만들었고 ‘어떤 알 수 없는 무엇’에 영화적 상상력을, 방사능이라는 부분에 중점을 두어 영화적 이야기로 만들어냈다
.

영화 속 주인공 5명은 실제 디아틀로프의 행적을 그대로 따라가면서 실제의 이야기를 다큐 형식을 빌려 영화적으로 드러냈다. ‘어떤 알 수 없는 무엇’에 대해서 영화적 상상력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분야라 마음에 들었다. 엄습해오는 두려움, 상대가 무엇인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을 때 그는 공포심은 몸을 힘들게 한다
.

마지막에 ‘세상 일엔 틀린 것이 없다’라는 커트 보네거트의 제5도살장의 문구를 대사로 치면서 ‘어떤 알 수 없는 무엇’을 감당하기로 하지만 결국 세상 일이란 내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주인공의 입장에서는 내 생각처럼 되지 않은 것이 세상 일에는 틀린 것이 아닐 수 있을지도 모른다
.

하지만 박평식 평론가의 말처럼 미스터리도 호러도 엉거주춤하다. 페이크 다큐의 고질적인 부분이라 생각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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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이야기#영화리뷰#리뷰실습생
#리뷰꿈돌이#이구역리뷰방사능
#디아틀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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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미야마 타카는 전철에서 처음 본 후쿠쥬 에미를 보고 반하고 만다. 소심한 성격의 타카는 어떡하면 에미에게 말을 걸까 고민고민하고, 그러는 동안 에미가 전철에서 내린 걸 알고 무작정 따라서 내려서 에미를 찾는다. 그리고 저 앞의 에미를 불러 마음을 말한다. 이렇게 말을 하는 자신도 놀란 타카는 휴대전화 번호를 가르쳐 달라고 한다. 하지만 휴대전화는 없다는 에미. 아, 거절이라 생각한 타카는 인사를 하고 가려는데 에미는 정말 휴대전화가 없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역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타카는 타카라가이케- 자신의 고향 이야기를 하려는데 에미를 시간을 보고 가야 한다고 일어난다. 타카는 내일 다시 만날 수 있냐고 묻는다. 그때 고개를 돌리는 에미는 눈물을 흘린다. 처음 만나서 눈물을 흘리는 에미는 타카에게도 관객에게도 의아하게 다가온다
.

두 사람은 다음 날부터 만나서 서로를 알아가고 수줍은 데이트를 한다. 타카는 에미를 만나기 몇 시간 전부터 행복하다. 데이트할 장소를 미리 답사하고 에미가 어떤 음식을 좋아할지 먼저 먹어보기도 한다.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기에 이런 장면은 참 행복하게 보인다. 두 사람은 서서히 알아가고, 타카는 반짝이는 트리의 전구 앞에서 에미에게 마음을 고백을 한다. 그리고 에미는 자신은 엄청 잘 우는데 괜찮냐고 묻는다. 이후 타카의 이사를 에미는 돕고, 타카의 친구들과 알아가고 타카의 집에서 에미는 맛있는 소고기 스튜를 만들어준다. 타카는 자신의 집에서 엄마가 해주던 스타일과 비슷하다고 하고 에미는 초콜릿을 넣어서 만들어서 그렇다고 말한다. 타카는 그건 우리 집에서만 하는 방법인데 에미가 어째서 알고 있는지 묻고 지난번에 말해줬잖아, 같은 말을 듣는다. 타카는 전혀 기억이 없지만 그렇게 넘어가고, 그날 두 사람은 사랑을 나눈다. 에미는 이때에도 눈물을 흘린다. 전철이 끊어지기 전에 에미는 집으로 가고, 두고 간 에미의 수첩을 보면서 타카는 이상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수첩에는 앞으로 일어날, 앞으로 일어난 일에 대해서 적혀 있고,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선율, 리듬, 화성이 변형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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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의 소설’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를 영화로 만든 판타지다. 그동안 일본은 수많은 시간의 어긋남, 시간의 후퇴, 타임리프, 시간의 격차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었다. 이 영화 역시 다른 영화처럼 시간의 뻔한 클리셰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아무 생각 없이 보다가 그만 빠져들게 되는, 보고 나면 영화가 주는 매력과 감동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되는, 그런 기묘한 이야기다
.

주인공 후쿠시 소우타는 정말 멋진 외모를 지니고 있고, 고마츠 나나는 이렇게 예쁠 수 없을 정도로 예쁘게 나온다. 두 사람은 극 중에 서른 살로도 나오지만 멋진 외모가 나이를 무색하게 만드는데, 그 아름다움이 너무 깊어서 실은 슬프게 보인다
.

에미는 타카와 만날 때마다 매 순간, 희한한 타이밍에 울고 만다. 타카는 눈물이 많았던 에미가 왜 그랬는지 알게 되었을 때, 그 순간, 그때는 보는 나도 그만 영화에 이입이 너무 되어 버렸다. 타카는 앞으로 흘러가는 시간 속에 살고, 에미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 속에 살기 때문에 두 사람이 만날 수 있는 시간은 오직 스무 살, 그리고 한 달 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에미가 울었던 매 순간은 그 시간이 마지막이기 때문에 에미는 눈물을 그렇게 흘렸었다. 타카가 에미를 처음 만난 그날이 에미에게는 마지막 날이었던 것이다
.

에미는 세상의 시선도, 사회적 인식도, 직업도, 돈도 전혀 중요하지 않고 오로지 두 사람을 위해 사랑을, 그 짧은 순간일지라도 그때의 사랑을 택한 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의 사랑이 에미에게는 무엇보다 제일 소중한 것이다. 에미에게 화를 낸 타카가 자정이 지나서 에미에게 전화를 하여 이렇게 말한다. “내일의 나는 너에게 못되게 굴 거야, 괴롭기 때문에, 하지만 지금은 극복했어”
.

시간이 지나면서 에미는 울지 않게 되고 타카가 눈물이 많아진다. 행복하기만 해야 할 두 사람의 사랑은 슬프기만 하다. 흔한 우연을 운명이라 여기는 두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일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억지스러움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고 슬프고 감동적인 영화다
.

우리는 사랑을 하고 싶어 하고 사랑을 한다. 우리는 하나의 선으로 그 선은 일직선이다. 서로 교차하고 싶어 하지만 선은 서로 일직선으로 죽 이어진다. 누군가 노력으로 선을 조금 기울인다면 우리는 언젠가 서로 만나는 날이 온다. 그 순간은 비록 짧고 찰나지만 그 순간을 우리는 영원으로 기억을 한다. 사랑은, 사랑이라는 건 시공을 초월하고 모든 것을 무너지게 만드는, 인간이 가지는 아주 기이하고 묘한 감정이다. 이 영화는 그것을 너무 콕 집에서 보여주어서 내 마음을 들켜버린 것 같은, 눈물샘을 그대로 뚫어 놓은 것 같은 영화였다. 20대가 본다면 참 좋을 영화, 20대라면 보라고 하고 싶은 영화. 누군가 나를 욕해도 어쩔 수 없다. 이 영화는 환상적이고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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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이라는 직감이 들면 다가가야 한다고 마음에게 말하라고 하는 영화.
영화를 보면 끝에 눈물이 나지만 다시 한 번 영화를 보면 처음부터 눈물이 흐를 것 같은 영화.
그 사람이 보고 싶어, 그 사람을 위해서 몇 년을, 그 한 사람을 위하여 무언가를 준비하고 다가가려고 했던 사람에게는 눈물로 몸을 촉촉하게 선사하는 영화.
사랑에 대해서, 깊은 사랑에 대해서 말을 하는 영화.
사랑을 이어가는 것은 사람의 의지와 노력과 용기라고 말하는 영화.
누구에게나 가장 아름다웠던 사랑의 순간이 있다고 말하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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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 보면 어느새 두 사람을 향해 응원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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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라는 남편과 함께 산부인과에 다녀오면서 행복한 밤을 예견한다. 곧 태어날 아기는 세라의 전부이며 모든 것이다. 남편과 아기의 이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가 앞에 오는 차를 보지 못하고 충돌을 하고 만다. 차는 그대로 중심을 잃고 구르고 굴러 남편은 그대로 죽고 말지만 세라는 기적적으로 살아난다. 대신 세라는 청각을 잃고 만다
.

태아도 세라처럼 자동차 사고에도 불구하고 기적적으로 무사했고 세라는 아기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날만 기다리며 생활을 하고 있었다. 세라를 든든하게 응원하는 이웃의 아이작과 그녀의 엄마, 그리고 동네를 순찰하는 경찰들. 하지만 어느 날 밤 낯선 여자가 문을 두드리며 이 모든 평화가 깨지기 시작한다. 엄마를 위해 우편함에 넣어둔 열쇠로 집으로 들어온 낯선 여자가 원하는 건 산모 속의 아기. 낯선 여자는 필사적으로 세라의 아기를 원하고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하나씩 제거하기 시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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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모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서스펜스다. 모성은 인간의 가장 초석이 되는 두려움보다 더 위에 있는 감정이다. 모성이 전격적으로 앞으로 오게 되면, 모성본능이 엄마에게 작동하게 되면 때로는 초인적인 힘이 나오기도 하고 대항할 수 없는 조직과도 맞서게도 한다. 모성이란 순수하고 완벽하기에 어쩌면 더 무서울 수 있다. 영화는 모성이 모성을 누르려고 하고 모성이 지키려는 아기와 그 모성에 대항하려는 또 다른 모성의 대비를 말하고 있다. 영화 마지막에는 두 여자 다 모성본능을 보여주며 영화는 끝이 난다
.

영화는 1시간 30분으로 적당한 러닝타임을 가지고 있다. 53분까지는 답답하고 갑갑하게 흘러간다. 그 후에는 더 답 답 하 고, 더 지 루 하 다. 그게 내가 영화를 본 생각이다. 답답, 갑갑, 지루, 평면, 엉뚱, 고루, 몰개념이 이 영화에는 가득하다. 그 속에 모성, 이 하나를 집어넣었을 뿐이다. 모성이라는 클리셰가 언제까지 통할 것인가. 영화 미옥에서도 현정으로 나온 김혜수는 영화에 질질 끌려다니다가 모성이 등장하면서 영화는 망하고 말았다
.

영화 속 세라는 청각장애를 교통사고로 얻었기에 사운드가 소거되고 흐르는 장면이 많다. 그게 긴장감을 고조시켜야 하는데 지 루 하 다, 또 답 답 하 다. 첫 장면에서 앞에서 오는 자동차와 그대로 충돌하면서 차가 기계체조 선수처럼 공중 돌기를 하는데, 그러려면 도대체 속력을 얼마나 세게 내야 하며, 세라와 남편은 이야기를 하며 산모인 세라가 운전을 하고 있었는데$씨%^$&^%ㅂ&$#$%^ 그리고 중앙선을 넘어갔다고 해도 그렇지 자로 잰듯하고 차와 차가 그렇게 정확하게 앞과 앞이 박을 수가 있나
.

설정의 문제는 카메라를 들고 낯선 여자를 내리치는 장면에서 스트로브가 내리칠 때마다 펑펑 터진다. 이건 아마도 청각장애를 지니고 있고 보청기의 소리를 건드린 세라의 입장에서 촬영을 한 것 같은데, 스트로브는 셔터를 누르거나 스트로브에 달린 버튼이 눌러져야 펑펑 하며 빛이 터지는데 손으로 잡은 모양을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그저 영화적인 상황에 맞추다 보니 이렇게 촬영을 한 거 같은데 영화가 전반적으로 다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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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으로 나오는 낯선 여자는 어디서 훈련을 받았는지(영화 말미에 가면 낯선 여자가 세라의 아기를 가져가려는 이유가 나온다. 낯선 여자는 세라와 교통사고가 난 차에 있던 여자였고 그 여자 역시 산모였는데 그 여자는 아기를 잃었다, 평범했던 여자가 아기를 잃고 어딘가에서 훈련을 받았는지 엄청난 능력을 영화 속에서는 보여준다) 세라의 친구인 아이작(남자)을 칼로 찔러 반쯤 죽이고 손으로 코와 힘을 막아서 악마처럼 숨통을 끊는다. 그리고 순찰을 하던 경찰의 얼굴에 칼로 찔러서 숨통을 끊어놓고 여자 경찰도 총으로 정확하게 얼굴의 반을 날려 죽이고 세라에게 칼로 베이고 차이고 카메라에 처맞아도 벌떡 일어나 뚜벅뚜벅 걸어오는 장면을 보면 마치 터미네이터 3에서 무표정의 크리스티나 로켄의 T-X를 보는 것 같다. 주인공인 세라는 자신의 엄마를 낯선 여자로 잘못 오인해 깨진 유리로 엄마의 목을 찔러 죽였는데 오마이 갓, 미안,으로 끝이고,,, 낯선 여자는 얼굴에 묻은 피나 좀 닦고 걸어 다녀라, 처럼 투덜거리게 된다
.

영화 속 경찰은 왜 이렇게나 무능할까. 영화 속에서는 탐정이 경찰을 훨씬 앞지른다. 경찰의 조직력과 수사력은 탐정 한두 사람이 절대 따라올 수 없다. 이 영화 속의 경찰 역시 참 무능의 극치다. 총 한 번 뽑아 들지 않고 여자에게 너무 무력하게 당하고, 같이 순찰을 도는 경찰끼리 서로 연계도 안 돼있고 여자 경찰은 앞서 당한 경찰보다 더 더 무능하게 죽는다. 세라로 나오는 레이첼 니콜스는 얼핏얼핏 조디 포스터의 모습처럼 보이지만 연기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아니 이런 영화가 곧 개봉을 한다니. 그리고 극도의 긴장감, 같은 문구로 사람들을 현혹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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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심리는 뭘까. 나는 공포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데도 공포영화 마니아만큼 많이 보는 것 같다. 사람들이 욕을 하면서, 무서워하면서 극장 속으로 기어들어가 공포영화에 시선을 두는 것은 매운 음식을 찾는 것과 흡사하다고 나는 늘 말하고 있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먹을 땐 매운데 먹고 나면 더 땡기기 때문에, 나는 싫지만 애인이 좋아하기 때문에, 그저 매운맛이 맛있어서. 이 매운 맛에 공포영화를 기입하면 어느 정도 비슷하다. 상업적으로 공포영화는 적정 수준의 손익분기점을 가능하게 한다. 그렇기에 머리만 굴려 공포영화를 만드는 감독은 대체로 점프 스케어와 사운드로 공포영화를 만들었다. 인간의 뇌는 상대가 뭔지 모를 때 공포를 느끼고 생존에 위협을 받을 때 극한의 두려움을 받게 되도록 진화가 되었다. 공포는 인간 감정의 저변에 깔려 있는 초석과도 같은 것이다. 사실 무서운 이야기는 단순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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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워서 시원한 카페에 지인들과 모였다. 날은 청명하고 무더웠고 카페 안은 에어컨으로 시원했다. 음료도 시원해서 더위를 잊을 수 있었다. 모임으로 모였기에 이야기를 하다가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모임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낮에 운전을 하는데 입에 머리카락이 들어가서 뺐는데 여자 머리카락이 나왔다. 손가락으로 잡고 빼니 긴 머리카락이었다. 한 번에 빠져나오지 않아 당긴 다음 다시 손가락으로 집어서 뺐다. 머리카락은 아주 흑발이고 30센티미터는 되어 보였다. 그때 빵 하는 경적이 울려 앞을 보니 중앙선을 넘어가고 있었다. 놀라서 핸들을 돌렸다. 이상하다? 오늘 오전부터 여자를 만난 적도 없고 여자가 있는 곳에 가지도 않았다. 지인들과 만나서 커피를 마시기에 오전에 들리는, 여자 직원이 있는 카페에도 가지 않았다. 입에서 빼 낸 머리카락을 창문을 조금 열고 밖으로 버렸다
.

이 이야기를 지인들에게 하고 나니 웃으며 듣던 지인들이 조용해졌다. 카페의 안에서 보는 카페 밖의 날은 화창했고 몹시도 무덥고 맑은 날이었다. 지인들 중에 한 명이 얼굴에 땀을 흘렸다. 너무 무더워서 그런가. 그러더니 모임도 덜 끝났는데 그 사람은 일어나서 가야 한다며 가버렸다. 나머지 지인들도 아무런 말도 없이 조용하게 음료만 마셨다. 나는 화장실에 좀 갔다 온다고 하며 일어나서 카페의 화장실로 갔다. 소변을 보고 손을 씻는데 입안이 또 꺼끌꺼끌했다. 손가락을 입에 넣으니 여자 머리카락이 입속에 있었다. 잡아서 당기니 어딘가에 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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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이야기로 각본을 쓰고 다듬어서 휴대전화로 10분 미만의 영상으로 제작을 해도 꽤 무서운 단편영화가 될 것이다. 누구나 입속에 머리카락이 들어가 본 경험이 있고, 긴 머리카락이 목 너머의 어딘가에 걸려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까지 상상하게 되면 그 이상의 상황과 장면을 누구나 상상할 여지를 둔다. 머리카락이 입속에서 느껴질 때는 유리를 긁는 듯한 사운드를 삽입한다. 무서운 이야기는 어쩌면 단순할 수 있다
.

서론이 길었지만 영화 ‘샤이닝’도 아주 단순한 내용이다. 소설가 잭은 아내 웬디와 아들인 대니와 함께 덴버에 있는 오버룩이라는 호텔의 관리를 5월까지 하게 되는데, 잭은 이전 관리인이었던 그래디의 유령을 만나게 되고 그래디가 그랬던 것처럼 점점 미쳐가는 잭은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도끼로 토막을 내려 한다는 내용이다. 스티븐 킹은 이 영화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

스티븐 킹의 소설을 몇 권 읽어보지 않은 나로서는 편견일 수 있지만 스티븐 킹의 소설은 스티븐 킹 자신이 너무 재미있어서 너무 좋아서 너무 자신의 글에 빠져서 썼는데 사람들이 좋아하는 장르가 되어 버린 것 같다. 그러니까 내가 읽어 본 몇 권의 장, 단편 소설들에게서 사람들이 이렇게 흥분하며 빠져들 정도인가,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미국식 대사와 유머, 같은 것들이 번역을 거쳐서 그런지 빠져들지는 못했다. 비교하기는 뭣하지만 트루먼 카포티의 초년 소설 ‘차가운 벽’같았다. 하지만 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는 정말 퐁당 빠져서 읽었었지만 스티븐 킹의 소설들은 특유의 공포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다가갈 수 없었다. 물론 나의 문제겠지만
.

샤이닝이 무서운 이유는 평범한 아버지이자 남편이었던 잭이 살인마로 변하기 때문이다. 익숙한 것에서 익숙함이 빠져나가고 낯선 것을 느낄 때 우리는 고도의 공포를 느끼게 된다. 이 영화는 흔한 점프 스케이도 없이 공간이 주는 장대한 우울감이 영화를 보면서 보는 이들의 몸속에 이입이 된다. 잭으로 분한 잭 니콜슨의 미쳐가는 연기는 분장을 한 공포 유령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무섭다. 무엇보다 아들인 대니가 자신의 입속에 살고 있는 작은 유령 토니와 이야기를 하는 장면과 대니가 칼을 들고 있는 장면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섬뜩하게 한다. 세상 귀엽고 깜찍하고 너무나 사랑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대니의 연기를 보라, 아니 저 아이가 저 칼을 들고! 하게 된다
.

큐브릭 감독은 당시에는 없을, 드론이어야만 가능한 촬영기법으로 초반 영상을 장식한다. 장대함과 웅장함이 주는 고요와 고독, 그것은 곧 결락으로 몰아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독일의 사진 거장, 안드레아스 구르스키의 거대 사진을 보는 듯한 미로의 모습, 성곽 같은 호텔을 덮어버린 엄청난 눈과 눈이 쌓인 미로 속을 헤매는 대니와 도끼를 들고 대니를 쫓는 잭. 이 모든 것들이 짜임새 있게 연출이 되었다
.

스티븐 킹이 영화를 썩 달가와하지 않은 이유는 알지 못하지만 샤이닝을 다양하게 해석한 다큐멘터리 영화 ‘룸237’을 보면 큐브릭의, 큐브릭만의 샤이닝 세계관이 벽 너머의 또 다른 벽처럼 뚜렷했기에 그러지 않았을까 한다. 샤이닝은 그저 공포영화로 보면 그렇게 보이지만 역사적인 사실과 대학살, 그리고 개척자의 미쳐가는 정신과 삶을 고스란히 샤이닝에 녹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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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룩 호텔, 1907년도에 건립된 역사가 있는 호텔이다. 과거의 호텔 관리인은 가족을 몰살한 비극이 존재하는 호텔. 들어가지 말라는 방 237에 들어간 잭과 대니에게는 영혼을 비롯한 환영이 나타난다. 초반에 호텔을 안내하는 장면에서 호텔은 1907년에 착공하여 1909년에 완공됐다는 말을 듣는다. 1907년은 인디언 마지막 영토였던 오클라호마가 미국으로 편입된 해였다. 인디언의 무덤을 허물고 위에 지어진 오버룩 호텔의 내부를 구경하던 중에 웬디는 지배인에게 “전부 인디언 장식들인가요?”라고 질문을 하고 나바호와 아파치 문양이라는 말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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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은 인디언 마지막 전사 제로니모가 사망한 해였다. 인디언들의 저항이 막을 내린 해라고 한다. 오버룩 호텔에는 아주 많은 인디언들을 상징하는 장식과 문형, 문양이 있다. 인디언들이 영혼과 대화를 나누듯 대니가 입속의 토니와 대화를 하는 모습에서 인디언들을 떠올 수 있다. 오버룩 호텔의 지붕과 청소를 하는 호텔 직원들 사이에 ㅅ자로 서 있는 사다리는 인디언들의 텐트인 티피를 보는 것 같다. 인디언들의 무덤을 허물고 세워진 건물 오버룩 호텔은 현재 미국의 모습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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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있는 호텔은 사람이 없다고 여겼던 신대륙이며 잭은 미국의 개척자의 모습이다. 당시 일자리를 찾아 신대륙으로 건너왔던 영국의 노동자들이 인디언들이 살고 있어서 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아주 평범한 노동자들이었던 영국인들은 총을 들고 살인마로 변해 무참히 인디언들을 이유 없이 죽였다. 인디언 학살로 인해 죽은 사람의 수는 6,000만 명이었다. 전범 국가 일본과 나치의 독일이 홀로코스트나 마루타를 통해 대학살을 했지만 600만 명으로 미국의 개척이라는 명분으로 대학살에 비할 바가 못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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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에게 보이는 강물처럼 흘러넘치는 피바다의 환영은 대학살의 잔류이고 나타나는 영혼들의 모습은 대학살 속에서 사라진 인디언들이었다. 그렇지만 잭과 대니와 웬디는 애써 환영을 무시하고 못 본채 하려 한다. 그저 넘기려 한다. 호텔의 이름이 오버룩으로 뜻이 못 본체 하다,이다. 과거사의 과오를 못 본채 넘기려 하는 미국을 꼬집었다. 대니가 쓴 레드럼이라는 글자를 뒤집으면 머더, 살인이며 복잡하고 왜곡된 미국의 역사 같은 미로 속으로 잭을 피해 들어간 대니는 거꾸로 쓴 레드럼처럼 자신의 발자국을 다시 뒤로 밟아 가면서 그곳을 탈출하게 된다. 그 방법은 인디언들이 주로 사용했던 방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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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카메라는 1921년의 사진 속 잭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잭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잭은 늘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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