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영화만 주로 올린 것 같아서 이번에는 말랑말랑한 영화 ‘골든 오케스트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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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교사인 치즈루(안)는 바이올린을 더 연주하고픈 마음에 새로 부임한 학교가 있는 마을에서 ‘우메가와 필하모닉’에 입단하려고 전화를 걸어 바로 입단해라는 말을 듣고 기뻐서 다음 날 가보니, 실수투성이에 언제 숨넘어갈지 모를 노인들만 모인 ‘우메가오카 교향악단’에 입단하게 되면서 펼치는 일본 식, 일본 만의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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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 하나로 노인들만 가득한 악단에서 어떻게든 일으켜 보려는 치즈루는 의지도 없는 노인들을 상대로 의지라고는 점점 사라지고 빨리 탈출하고 싶지만 노인들은 치즈루를 놓치지 않으려 계략을 꾸미는데 그만 계락이 실패로 돌아가고 치즈루는 점점 노인들의 악단에서 벗어나려 하고 노인들의 악단은 망해가려 하는데. 치즈루의 노인 악단 살리기 고군분투 프로젝트 .

 

먼저 이 영화의 문제점은 캐릭터가 몽땅 사랑스럽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느낌과 비슷한 영화가 2017년 각키가 나오는 ‘믹스’였다. 엉망진창 탁구부를 일으켜 세워 대회에 출전하는 전개가 골든 오케스트라와 닮았다. 거절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한 치즈루는 전형적인 일본인을 말하고 있지만 대체로 사랑스럽게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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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인 안은 영화가 많을 것 같지만 의외로 그렇게 많은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다. 와타나베 안으로 일본의 명배우 와타나베 켄의 딸로 어쩌면 배우 활동을 하는 것에 제약이나 말들이 많을 수 있다. 그건 우리나라도 비슷하니까. 와타나베 켄은 고질라를 비롯해 배트맨 비긴즈, 트랜스포머, 인셉션에 이르기까지 할리우드 영화에도 다수 비중 있는 배역으로 출연했다. 내일의 기억에서 기억을 잃어가는 자신과 그것을 잃지 않으려는 자신을 연기한 것을 보면 입을 다물지 못했을 정도였다. 어쨌든 와타나베를 버리고 안으로 활동 중인 안은 얼마 전에 데스노트 뉴 월드에 출연했던 눈썹이 진한 마사히로와 결혼을 하여 쌍둥이도 낳고 뭐 그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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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클리셰 범벅인 영화다. 하지만 그 클리셰 조각들을 꽤 잘 이어붙였다. 일본 영화는 작은 영화든 큰 영화든, 짧은 영화든 긴 영화든, 지루한 영화든 이야기에 중점을 둔다. 오버스럽고 설정이 엉망이라도 대부분의 영화가 이야기를 끌어가려고 노력을 한다. 스토리의 비중이 크다. 요컨대 작년의 일본 영화 ‘신 고질라’를 보면 된다. 에반게리온의 안노 히데아키가 감독이다. 고질라가 나온다 하여 SF 영화라 착각할 수 있지만 그 속을 잘 들여다보면 일본 정부가 핵무기의 공격을 받았을 때 대응하는 방식과 방법, 책임을 회피하려는 정부의 공직자들을 여실히 까발리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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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든 골든 오케스트라는 내일이면 죽을지 모르는 노인들이 차즘 연주를 하고 합을 맞춰 간다. 어림없을 줄 알았는데, 어른이 되면 더이상 성장하지 않을 줄 알았다는 대사처럼 영화 속 노인들과 츠지루는 성장을 해 간다. 구도가 확실한 치즈루와 노인들이지만 하고 싶은 것은 음악, 이 음악 하나가 그들을 이어주며 끝내는 무대에서 연주를 한다. 흔한 클리셰지만 우리는 예전에 박칼린이 이뤄내는 그 엄청난 하모니에 충격과 감동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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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노 타카시의 노인 연기와 그의 친구들이 펼치는 노인들의 속수무책 엉뚱함에도 웃음이 난다. 후에 그 웃음이 눈물로 만들어내는 일본 영화의 설정이 보이지만 끝에는 보는 이들도 같이 뭉클하게 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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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타 거윅이 나오면 그 배역에 그대로 끌리게 된다. 그래타 거윅은 그 배역이 정말 자기 자신인 것처럼 보인다. 영화를 많이 보는 이유는 헐리우드키드의 생애처럼 영화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그만 영화에 잡혀 먹혀 버리는 소년 임병석처럼 현실과 영화의 경계가 허물어 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예술의 세계에 몸을 걸치게 되면 예술이 자기의 세계로 몸을 서서히 끌고 가버린다. 예술의 세계는 꿈을 꾸는 것처럼 비규정적이고 리얼리티가 떨어지고 확정 지어지지 않는 것들이 가득하다. 그 세계에 몰입하다 보면 현실의 경계는 무너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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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영화를 많이 보면 볼수록, 예술의 세계로 발을 담굴수록 영화와 현실의 경계는 더 뚜렷해지는 것 같다. 영화 속 비현실적인 존재가 되어 현실을 바라보는 눈이 멀어지기를 바라지만 전혀 내 바람대로 되지 않는다.
가령 숨바꼭질을 할 때 술래가 바로 앞에 집으러 왔지만 나는 그 밑에 숨죽이며 숨어 있는데 자칫 바로 잡힐 것 같은 그 긴장감을 느끼지 못한다. 마치 메이즈러너 스코치 트라이 멀에서 좀비들이 잡으러 왔을 때 그 밑에 숨어 있는 그 느낌의 긴장감. 그 느낌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아마 현실이 영화보다 더 버라이어티하거나 단조롭거나 지옥 같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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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설하고 최신 영화에 대해서 짧은 언급을 하자면 톰 하디의 팬심으로 본 사람들이 많겠지만 영화의 장면들은 전부 다른 영화에서 조금씩 떼와서 이어붙인 장면 같았다. 영화는 중간은 없고 시작과 끝 만 있는 아주 베놈 같은 영화였다. 베놈, 착한 사람은 건들면 안 돼. 그럼 나쁜 사람은 머리를 먹어도 되고?
지네 나라에서는 따돌림당하던 놈이 지구에서는 힘깨나 쓰는데 그게 악당이면 머리를 씹어 먹어 죽여도 된다는 설정? 망작이라 할 수 있다. 스텐 리가 출연해줬으니 망작은 아닌가. 베놈 네 이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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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 푸는 예전의 훌쩍 커버린 로빈 윌리엄스의 피터 팬 이야기 후크와 닮았다. 아니 그대로 되돌이표하고 있다. 디즈니는 꿈의 동화를 실사하기로 했고, 미녀와 야수부터 그렇게 하고 있다. 존 파브로(아이언맨 감독이자 아이언맨 친구 역)가 감독을 맡고 라이온 킹이 내년에 나온다고 하니 기대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알라딘에서 무슨 역인지 모르겠지만 윌 스미스가 선택이 되었고, 뮬란에는 유역비가 캐스팅되었다는 소식이 있다. 디즈니 사는 왜 장윤주를 보지 못했는가. 메리 포핀스도 실사 화가 되어 곧 개봉을 앞두고 있다. 에밀리 블런트가 메리 포핀스며 메릴 스트립과 콜린 퍼스가 나온다. 메리 포핀스 역시 제목이 ‘메리 포핀스 리턴즈’로 보아 곰돌이 푸 다시 만나 행복해, 와 비슷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미녀와 야수처럼 그대로 실사화한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조금 비틀어서 실사화하는 것이다. 피터 팬도 크리스토퍼 로빈도 성장을 하면서 공허하며 닳을 대로 닳아버린다. 모두가 그들에게 부양이라는 책임과 회사의 운명을 짊어지게 한다. 어른이, 어른들이, 아빠들이 이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면 로빈은 이미 어른이 되어버려 100 에이커의 일을 몽땅 잊어버린다. 피터 팬 역시 팅커 벨과의 일들을 전부 잊어버리고 만다. 모두가 로빈에게 기대고 부탁을 한다. 곰돌이 푸 역시 현실에서 닳을 대로 닳아버린 로빈에게 도움을 청하러 온다. 한 남자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회사에서 진급을 하며 어른이 되어 가지만 대체로 남자는 풀어지면 아이가 되어 버린다. 회사일로 지칠대로 지친 아빠들이 지친 그대로 들어가서 보면 그만 무너지고 마는 영화. 그런 어른들이 보면 눈물샘을 자극할 수 있지만 이 영화는 좀 더 유치해도 되고, 좀 더 신났어야 했다. 어른이들 힘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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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는 올가 쿠릴렌코가 주연으로 극을 끌어가는 공포영화다. 히트맨에서 잘 빠진 몸매를 드러내며 할리우드의 입지를 다진 그녀는 007퀀텀 오브 솔러스, 오블리비언, 모멘텀 등 많은 영화에 주조연으로 등장했지만 홀로 극을 끌어가는 공포영화의 주연은 처음인 듯하다. 공포의 주체가 처음부터 등장해서 긴장을 빠지게 하고, 공포의 빌런은 꼭 일본의 꺾기 귀신을 보는 것 같다. 장면에서 주는 무서움은 공포의 주체인 마라보다 마라에게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마지막 모습 정도다. 공포 영환데, 올가 쿠릴렌코는 옷을 다 입고 나오지만 야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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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수 살인에서 주지훈의 부산 사투리가 어색하다는 말이 있는데 내가 있는 곳의 사투리는 부산 사투리와 다르기 때문에 내는 마 씨그러운 귤 까묵으며 봐도 뭔가 좀 그르트라. 분노, 분노로 인해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서 나타나는 폭력은 폭력 그 이상의 공포를 준다. 주지훈의 그런 연기는 실감난다. 맞제?
분노로 인해 일어나는 폭력은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현상 같은 것.
하지만 영화 놈들이 실제 사건을 영화화했으면 사전에 당사자들에게 양해를 구했어야지 다 만들어 놓은 다음 펼쳐놓는 태도는 옳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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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리치를 실사화 해놓은 블리치는, 블리치에서 나가사와 마시미는 예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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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소설의 대가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에 의하면, 우주에서 온 공포와 그 앞에 선, 한없이 나약한 인간은 그대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의 가치라는 건 끝없는 우주에서 먼지 같은 존재로 우주의 공포에게 맥없이 박탈당하게 된다. 인간의 잣대로 잴 수 없는 우주의 존재 앞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고 무기력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 서사를 영화로 잘 나타낸 것이 이 영화 ‘이벤트 호라이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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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 호라이즌은 뭐랄까 시대를 잘못 만난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97년도 작품이니까 그 당시를 보면 주위의 상업영화들 속에서 이벤트 호라이즌, 같은 우주적 존재에 대항하는 인간이 고어스럽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장면이 많은 상업영화는 성공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영화 속에는 고어 장면이 나오지만 아주 짧게 지나가 버린다. 제작사에서 모든 고어 장면을 빼 버리기를 원했으나 짧게 끊어서 1,2초 정도로 넣는 것으로 타협을 본 것이다. 그래서 지금 본다면 징그러운 장면은 그렇게(요즘 고어물에 비하면) 많이 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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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 호라이즌은 물리학 용어로 블랙홀의 바깥 경계라는 말이라고 한다. 영화의 내용은 아주 간단하다. 2015년에 우주를 마음대로 나가게 되고 2040년인가? 그때부터는 태양계 끝이나 그 밖으로 연구를 하러 우주선이 다닌다. 그중 한대였던 이벤트 호라이즌이 조난을 당하고 몇 년 후에 주인공들의 우주선이 이벤트 호라이즌을 찾아서 그 속에서 벌어지는 공포를 그린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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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긴장감을 죽 끌고 간다. 공포의 주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고 공포를 주는 그 주체가 제대로 나타나지 않기에 영화를 보는 사람도 주인공들처럼 긴장을 바짝 하며 시간이 흘러가는 것에 속수무책으로 빠지고 만다. 공포의 주체를 관객은 알고 주인공들은 몰라서 어어? 그쪽으로 가면 안 돼! 하면서 긴장을 하는 경우가 있고, 관객과 주인공들 모두 공포의 주체를 몰라서 긴장을 하며 숨죽여야 하는 영화가 있는데 이벤트 호라이즌의 공포는 후자에 속한다. 몇몇 장면들은 샤이닝을 떠올리게 한다. 어쩌면 주인공들이 서서히 미쳐가는 모습 역시 샤이닝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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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처럼 물리학의 양자역학에 관한 부분은 아주 미흡하다. 우주의 공포, 지구에서 볼 수 없는 암흑, 온 마음과 뇌를 바꾸고 마음대로 조종하는 전지전능한 악의 존재 암흑을 영화는 표현하려고 했다. 러브크래프트식의 코믹스 호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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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보면 개연성이나 표현방식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방식에서 벗어났지만 영화 속에는 기억에 남을 만한 대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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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모르는군, 지옥은 그저 단어일 뿐이야. 

실제는 훨씬, 훨씬 끔찍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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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도 애매하고 내용도 애매하여 보고 나면 뒷이야기가 많은 이런 영화가 흥미롭다. 순전히 편견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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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18-10-15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급 영화로 종종 소개되는 걸 봤는데, A건 B건 참 재밌었다는 ^^

교관 2018-10-16 12:03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재미있었고 요즘 봐도 재미있네요 ㅎㅎ
 

샐린저가 적은 ‘호밀밭의 파수꾼’ 읽어보셨습니까. 나 자신이 어른이 되어도 아이 같은 마음이 강하게 남아있는 사람이라고 생각되면 읽어 보세요. 주인공인 홀든 녀석의 말과 행동에 이입이 되고 마는 마법 같은 소설이에요. 아마도 이렇게 호밀밭의 파수꾼이 지금까지 사람들이 미친 듯이 읽고 있는 건 샐린저가 글을 적을 땐 정신이 제정신이 아니어서가 아닐까. 군인으로 2차 대전 인가에도 참전을 했어요. 근데 막사가 폭격을 맞아서 허물어지는데도 책상 밑으로 들어가 타자기로 글을 썼어요. 뭐 그랬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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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스의 존 레논을 죽인 살인범 마크의 손에 호밀밭의 파수꾼이 들려 있었다고 하고, 멜 깁슨과 줄리아 로버츠가 나온 오래된 영화 ‘컨스피러시’에서는 멜 깁슨의 집 책장에는 호밀밭의 파수꾼만 가득 꽂혀 있어요. 멜 깁슨은 극 중에서 서점에만 가면 그 책을 사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이 영화는 지금보면 촌스럽지만, 영화학도들은 반드시 보고 연구를 하는 영화로 알려져 있어요. 그 속을 관통하는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 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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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작가들이 호밀밭의 파수꾼에 대해서 비평이나 감상문을 써 내 놨어요. 영국과 미국에서 책의 제목이나 내용에 나오는, 같은 단어지만 받아들이는 다른 나라 사람들은 각각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내용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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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비틀스의 ‘노르지안느 우드’는 영국에서는 노르웨이산 가구라고 받아들이고, 미국에서는 노르웨이 숲이라고 받아들입니다. 한국은 대체로 하루키의 소설책으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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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호밀밭의 파수꾼에는 홀든 녀석의, 홀든 녀석 식의, 홀든 녀석대로의 욕이 가득합니다. 이것이 어쩌면 샐린저의 정신세계일지도 모르겠고....... 사실 책 속에 욕이 난무하면 그것대로 재미있습니다. 욕이라는 것은 잘 적어 문맥에 녹여낸다면 완전한 새로운 세계입니다. 소설가 한창훈의 ‘홍합’을 읽어보면 지역의 욕을 그대로 들을 수 있는데 마치 사운드스케이프가 가동된 것 같아요. 글인데 소리가 들리는 마법이 펼쳐집니다. 하지만 욕이라는 것은 아름다운 문체로 적어내는 것 못지않게 어려운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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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 ‘허’에서 꼬마 캐릭터가 욕을 사정없이 난발하는 장면에서 자막 버전 중에 욕을 아주 신랄하게 해석해 놓은 버전이 있는데 그것을 보면 직독직해로 참 재미있게 해석을 하여 자막을 넣었는데 번역한 사람이 꽤 연구를 많이 한 것 같아요. 예전에 어벤져스 1편도 욕 버전이 있는데 극장에서 제대로 된 번역보다 훨씬 재미있는 겁니다. 공부를 상당히 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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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호밀밭의 파수꾼에서도 홀든 만의 욕이 나오는데 지난 삼십 년 동안 천만 부가 넘게 팔렸다고 합니다. 샐린저는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12월을 마녀의 젖꼭지처럼 춥다고 했는데 작년의 추운 날(러시아보다 춥다고 호들갑을 떨었던)을 생각해보면 정말 그런 날이었습니다.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는 제목은 한국에서만 이렇게 불리고 있어요. 다른 나라에서는 완전히 다른 제목으로 읽히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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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한 남자의 인생

일본: 인생의 위험한 순간들

노르웨이: 모두들 자신을 위해 그리고 악마는 최후 순간을 취한다

스웨던: 기억의 순간에 나타나는 구원자

덴마크: 추방당한 젊은이

독일: 호밀밭의 남자

네델란드: 사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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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어보고 위의 제목들을 보면 아아 그래, 그럴 수 있겠군. 하는 생각이 듭니다. 홀든 녀석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이야기가 좋지만 이런 문장은 참 좋습니다. 마치 그 장면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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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하품했다. 이 방에 들어온 이후로 하품이 멈추질 않는다. 이 방이 지나치게 따뜻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졸리게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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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인표는 장편 소설을 두 권이나 냈다. 

이 책에는 저 밑까지 떨어진 인생의 이야기가 있는데 차인표가 그걸 잘 적었다. 

리얼리즘이지만 책 속에는 초현실적인 이야기도 있다. 

유머스러운 부분이 많아서 조금 웃으며 읽는데 저 끝으로 가면 묘하게도 코끝이 찡해진다. 참 기이하다. 

마치 로맹 가리의 자기 앞의 생에서 모모가 죽어가는 로자 아줌마를 붙잡고 똥을 싸니까 살아 있는 거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찡 한 것과 비슷한 결의 찡함이다. 

꼭 어른들의 동화 같은 이야기다.

책 속에는 이런 대화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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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아 뱀 좋아하니

뱀 먹는 거?

아니 그냥 뱀 좋아하냐고

아니 싫어하는데

혹시 뱀한테 물린 적 있냐?

아니 없는데

그런데 왜 싫어해?

마땅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냥 싫지?

남들이 싫다고 하니까 무조건 싫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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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보 중에는 또 이런 대사도 있다.

밥은 먹는다고 하고, 잠은 잔다고 하고, 방귀는 뀐다고 하잖아. 그런데 왜 사랑은 한다,고 하는지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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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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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우리는 사랑한다의 반대말이 사랑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사랑했었다,라는 걸 모두 알고 있다.

사랑은 늘 현재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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