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치소에 겨울이 오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무엇보다 사방으로 올라가는 영치품들이 바뀌고 과일이 겨울 과일로 바뀐다. 싱싱하고 맛있는 사과와 귤이 잔뜩 사방으로 오르기 때문에 우리는 사방을 순찰하면서 재소자들에게 귤과 사과를 이만큼 얻어서 내려온다. 하지만 정말 맛있는 것은 소시지다. 크고 굵은 소시지를 가득 받아서 막사로 내려오면, 컵라면에 물 받아 먹는 큰 찜통에 넣어서 삶아 먹는데 술안주로 기가 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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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밥이 되면 저녁 점호가 끝난 뒤 피엑스에 난로를 피워 소시지와 소주를 마신다. 마시다 보면 소대장도 오고 교무과에 근무하던 근무자도 냄새를 솔솔 맡고 내려와서 한잔한다. 남은 소시지는 나무젓가락에 끼워 난로 위에서 살살 돌려가면서 궈 먹는데, 그 냄새가 막사 저 밖으로 동초 근무자에게까지 날아간다. 잘 구워진 소시지를 처음 입에 넣어서 씹으면 툭 하며 터지는데 소시지의 육즙이 입안으로 죽 들어오면서 소주를 부르게 한다. 소시지 일 뿐인데 겨울은 그런 맛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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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쩌다 부대 마크를 디자인했는데 그것이 채택되면서 겨울에 크리스마스카드를 만드는 병력으로 차출이 되었다. 잠자는 것 이외에 모든 근무에서 열외 되어서 오로지 카드만 만드는 것이다. 카드를 만들어서 구치소 내 직원들에게 판매를 하여 그 돈으로 회식을 한다. 그러니까 샘플로 몇 개를 만들어서 구치소 직원들 휴게실에 걸어두면 주문이 들어오는데, 같은 크리스마스를 손으로 일일이 몇 백 장씩 만들어야 한다. 거의 초주검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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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하다 보면 요령이라는 게 생긴다. 단순한데 예쁘고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왕창 나는 카드를 몇 백장 만들 수 있는데, 붉은 카드용지 위에 도안을 한 눈 사람이나 산타를 대고 스프레이나 물감으로 틀 안을 칠해주기만 하면 된다(이게 무슨 똥 같은 설명이지??). 글자는 금색의 사인펜으로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꼬부랗게 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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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플 몇 개를 잘 만들어 놓고 그것을 대고 차출된 쫄다구들은 반복적으로 채색만 하면 된다. 너는 흰색 물감으로 이것만 하고, 너는 글자만 쓰고, 너는 테두리만 그려라.라고 지정해 준다. 나는 이런 것을 재미있어 하는 것 같다. 뭔가 일을 꾸미고 그것을 총괄하고 책임지고 뭐 이런 것들. 그 때문인지 여러 번 일을 꾸며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었다. 몇 해 전에는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관리실 앞에서 아파트의 모습들을 카메라에 담아 액자로 만들어서 게릴라 전시회를 했었다. 그때 어머니들의 어머, 하며 괜찮은 반응이 나왔는데 재미있었다. 부녀회장이 그 사진들을 다 달라고 해서 줬는데 얻다 써버렸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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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쫄다구들은 반복된 일, 그것만 하면 되는데 잠을 못 자다 보니 엉망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나도 화를 낸다. 돈을 받고 하는 것이기에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힘든 것은 내 쪽이다. 샘플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뭔가를 처음 만드는 것은 꽤 난처한 일에 봉착을 하게 되는데, 그 샘플이 채택이 안 될 경우도 있고, 사람들의 반응을 일일이 체크해야 하고, 주문이 적게 들어온 카드와 많이 들어온 카드의 배분을 나눠야 하는 것을 조정해야 하는 것이 퍽 힘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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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작업실 안에서는 음악을 계속 들을 수 있다. 막사의 저녁 점호시간에 칼바람이 불고 아이들의 비명소리가 들려도 이 안에서는 모두가 자유롭다. 엎드려서 잠을 자도 되는 세계, 과자를 막 먹어도 되는 세계, 저녁 점호 총원 몇 명, 열외 4명 같은 보고로 우리는 지옥 같은 세계에서 제외된 것이다. 그것만으로 우리는 기쁘고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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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하고 그 해 겨울 군고구마를 팔았는데 그때에도 오전에 농산물 시장에서 군고구마를 떼와서 저녁에 장사를 하기 전까지 낮에는 카드를 만들었다. 학원가에서 장사를 했는데 그때 아이들이 군고구마를 사러 오면 군고구마를 하나 더 줬고 여자 손님이 오면 직접 만든 크리스마스카드를 줬다. 그것이 먹혔는지 소문이 소문을 물고 저 끝까지 퍼졌다. 지난번에도 이야기했지만 아파트 단지에는 군고구마를 배달을 했다. 배달을 해주면 집 안에서 뜨거운 군고구마를 먹을 수 있다. 그런 것이 먹혀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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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기수 밑의 쫄다구와 같이 했는데 서점 집 아들래미라 서점 앞에서 장사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 책을 많이 봤는데 책이 잡지책이었다. 그때 잡지책의 세계에 대해서 또 눈을 뜬 것 같다. 소설과 시와는 다른 세계가 잡지책의 세계였고 그 세계에서도 굉장한 읽을거리와 볼 거리가 있었다. 그 후로 이충걸이 편집장으로 있는 지큐와 황경신이 편집장으로 있는 월간 페이퍼, 김혜리 기자가 있던 씨네 21을 열심히 구독해서 보기도 했다. 그들의 글을 매달 본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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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고구마 장사를 할 때 통이 두 개였다. 군고구마계에서 부르주아였다. 만든 카드를 천막 앞에 죽 걸어놓고 학원 강사님이나 약사님이나- 물론 여자들- 서점을 찾는 여자 손님이 군고구마를 사러 오면 어떤 카드를 드릴까요, 해서 이거라고 하면 그 카드에 글을 슥슥 적어서 줬었다. 생각해보면 호감이 있으니 내일 다시 오라느니, 꼭 다시 들러달라느니, 연락처 같은 것을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저 뭔가 시적인 문구와 메리 크리스마스를 썼었다. 바보 같은 걸까. 겨울의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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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깅을 하고 오는데 동네가 이렇게나 예쁘게 바뀌었다. 인공조명은 광합성은 없지만 사람들을 즐겁게 한다. 그 가운데 스티비 원더와 안드라 데이의 캐럴이 흘렀다. 아아 이제 완연한 겨울,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겨울은 춥지만 뜨뜻한 계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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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비 원더는 시각장애를 겪고 있다. 사람들은 그가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안고 태어났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는 안타깝게도 출산 예정일보다 6주 일찍 태어났다. 뇌에서 눈으로 가는 혈액이 원활히 공급되지 않아서 그는 인큐베이터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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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운명의 장난이었는지 당시 인큐베이터 기계의 고장인지 간호사의 실수인지 아기 스티비 원더가 들어가 있던 인큐베이터에 산소가 과다 공급이 된다. 때문에 스티비 원더는 망막의 기능을 잃어버리게 된다. 시력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었지만 결국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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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는 시력을 잃은 대신 노래를 얻었다고, 그 덕분에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열 살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고, 오르간, 베이스, 리코드 등 그가 완벽에 가깝게 연주하는 악기만도 스무 개가 넘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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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지구에서 하모니카를 가장 잘 부르는 사람이 스티비 원더가 아닐까. 스티비 원더 하면 많은 노래가 있지만 isn't she lovely가 있는데 싱글 버전과 앨범 버전이 있다. 앨범 버전에는 첫 시작에 아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이 노래는 잘 알겠지만 자신의 첫째 딸 '아이샤 모리스'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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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의 내용은 아이샤 모리스를 볼 수 없어서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내용이다. 이봐 내 딸 예뻐? 정말 작고 귀여운 거야? 나 닮진 않았지?(하지만 정말 빼닮았다) 하며 딸을 볼 수 없는 안타까움과 기쁨을 그대로 표현한 곡이다. 보이지 않아서 느낄 수밖에 없는 아빠의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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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의 라이브 공연을 보면 그의 딸인 아이샤 모리스가 늘 따라다니며 백 보컬을 맡고 있다. 그래서 공연에서 이 노래가 나오는 영상을 보면 카메라가 아이샤를 비추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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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비는 7명인가? 자녀를 두고 있다. 아이샤의 동생들도 나의 노래도 만들어 달라고 할 법 하다. 스티비 원더가 2009년인가 올림픽경기장에서 콘서트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앞자리에서 노래를 들었던 그 굉장한 감동은 새빨간 거짓말이고 헤헤. 그때 우리나라에서 콘서트 티켓이 최단 시간에 매진이 되었다. 말 그대로 순삭이었다. 공연장에는 일반인들 반, 우리나라 연예인과 최정상 가수들 반이었다. 김태우가 가장 열광했던 것으로 아는데

스티비의 원래 이름은 스티브 랜드 하드웨이 모리스다. 10살 때 길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는 스티비를 보고 한 무명가수가 픽업을 해서 당시 기획사에 데리고 가서 그곳의 사장에게 보여줬는데 그 사장이 스티비의 노래를 듣고 이건 불가사의다! 그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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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장의 말을 빌리면, 세계의 7대 불가사의가 있는데 이 아이는 8대 불가사의다. 그래서 불가사의? 궁금하다? 원더? 뭐 이렇게 파생되어 스티비 원더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즌쉬럽미 노래 시작 전 애기 울음소리는 모리스의 울음소리는 아니라고 한다. 어떻든 그래서 그런지 스티비 원더의 노래는 여기, 가슴을 뜨뜻하게 해 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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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04 2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교관 2018-12-05 14:18   좋아요 0 | URL
알아보지 않으면 어때요, 노래를 듣고 여기, 여기 가슴이 따뜻해져오면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ㅎㅎ.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사람들이 월요병에 시달리고 있다. 특히나 지금과 같은 계절에는 월요일 오전에 일어나서 움직이는 것이 힘겹다. 그건 급작스럽게 바뀌어버린 계절 탓에 밤 새 높은 온도에서 잠을 자면서 몸이 따뜻하고 안온함에 적응이 되어 있다가 먼지가 많고 쌀쌀한 이른 오전에 일어나서 움직이는 것에서 오는 괴리가 몸을 힘들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대부분 가족을 위해서 또 욕 들어 먹지 않기 위해서 더 나아가 나를 위해서 힘든 몸을 일으켜 세워 월요일의 오전을 극복하고 각자도생의 길로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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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월요병이나 월요일 개념이 없기 때문에 월요일이 딱히 힘든 날도 아니고 일요일이 마음의 안식 같은 날도 아니다. 구치소에도 월요일이나 일요일의 개념이 잘 없는 편이다. 구치소 법무부 직원들이나 재소자들도 일요일이나 월요일이나 거의 흡사하게 흘러간다. 같은 시간에 기상을 하고 점오를 하며 번호를 외치고 이발소에서 일을 하는 기결수(미결수만 있는 구치소에도 형을 사는 기결수가 복역한다)는 면도날을 갈고 가위를 제자리에 두고 직원들의 이발을 하고 수염을 깎아주고 월급을 받는다. 단지 평일처럼 접견, 즉 면회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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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처럼 겨울 속 온도가 높은 날은 구치소의 소각장에 겉옷을 입고 있으면 등에 땀이 흐른다. 구치소에서는 매일 엄청난 양의 인분과 굉장한 양의 쓰레기와 설명 할 수 없는 양의 더러운 물이 나와서 처리 장에서 처리과정을 거친다. 겨울의 소각장은 꽤 재미있고 무엇보다 따뜻하다. 활활 타오르는 불기둥을 보는 것은 어린이 때나 어른이 되어서나 어째서 재미있는지 모를 일이다. 쓰레기 중에는 책도 많다. 미결수인 재소자들은 기결수가 되어서 교도소로 이송이 되거나 아니면 그대로 구치소를 빠져나갈 때까지 사방 안에서 할 일이 없기에 책을 많이 읽는다. 암수살인에서 주지훈이 법률에 관한 책을 독파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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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소자들이 소설을 많이 읽는데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을 읽는 사람은 드물다. 소각장에서 만난 평식이 형은 레이먼드 카버의 팬이었다. 오전 소각을 하고 점심시간에는 사방으로 올라가지 않고 따뜻한 소각장 옆에 비스듬히 누워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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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카버의 책을 읽고 있으면 옆에서 도대체 그 사람 책이 뭐가 재미있냐고 해. 읽어봤는데 도통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고 하면 그럼 한 번 더 읽어 보라고 말해. 두 번이나 읽었는데 당최 뭔 소리지? 하는 사람에게는 세 번 읽어보라고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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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식이 형이 나에게 해 준 말이었다. 나는 레이먼드 카버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는데 평식이 형 덕분에 그의 소설을 읽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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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카버의 글이 중의적이라고 하는 서평이 많은데 그것도 받아들이는 사람 나름이라고 생각해. 카버의 단편들은 대체로 당시 미국 중산층의 이야기야. 80년대 이전의 미국 중산층은 자식에게는 엄격한 교육과 제재가 있었고 이웃과의 교류가 지금보다는 암묵적으로 이어진 화합 같은 것이 많았지. 눈에 드러나지 않는 견제가 있었고 중산층을 벗어나기 위해 부부관계도 여러모로 고충을 겪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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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치소는 한 곳에서 보통 일주일 씩 근무를 하기 때문에 평식이 형과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죽 같이 지내게 되었다. 저녁을 제외한 시간에는 평식이 형이 레이먼드 카버에 대해서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따뜻한 소각장과 날름 거리는 불꽃과 레이먼드 카버의 이야기. 갇힌 곳, 구치소지만 꽤 낭만적이었다. 지옥 같은 곳에도 틈은 언제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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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카버가 단편만 쓴 이유는 돈 때문이었지. 돈을 벌기 위해 몇 년씩 걸리는 긴 장편을 쓸 수가 없었던 거야. 190센티미터가 넘는 거구로 카버는 마땅히 집필할 수 있는 공간이 없었어. 그는 자동차에 구겨지듯 애매하게 앉아서 글도 썼지. 그런 것을 생각하면 참 글을 쓰고 싶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 뭉클하기도 하지. 지금 손에 들린 이런 멋진 글을 남겨 놓았으니.라며 평식이 형은 손에 들린 카버의 책을 흔들며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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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카버는 18살에 결혼을 했어. 나는 대단하다며 박수를 쳤다. 그래서 장모에게 늘 미움을 받았고 죽을 때까지 그 미움이 계속 이어졌지. 카버의 첫 단편 ‘목가’가 ‘웨스턴 휴머니티스 리뷰’라는 잡지에 실렸을 때, 카버가 그 잡지를 들고 무척 기뻐했다고 해. 그때 한 푼의 돈도 받지 못했지만 그 잡지를 들고 기뻐했지. 이후 (평식이 형은 자신의 책을 보이며) 제발 좀 조용히 좀 해요,라는 단편이 ‘폴리 선집’이라는 단편집에 실리면서 알려지기 시작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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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카버는 술 때문에 서서히 망가지지. 알코올 의존 재활치료센터에 두 번이나 들어갔고 한 번은 병원에 입원도 했었지. 카버의 글이 좋은 게 뭔지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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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른다고 했다. 

카버의 글이 좋은 것은 지식이나 아는 것이 많아서 쓴 글이 아니야. 그저 수정하고 수정하고 또 수정을 한 글이라 좋은 거야. 그는 수정하는 것을 즐겼고 그것은 작가에게 바람직한 거야. 글을 마지막까지 수정을 하는 거지. 하나의 단편에 수정 본이 스무 개나 있는 경우도 있고 더 많은 경우도 있었지. 원래 카버는 시인이 되려고 했어. 그래서 쓴 시도 수 십 번이나 수정을 했어. 매일매일 앉아서 10시간을 글을 썼는데 대부분이 수정에 수정에 또 수정이었어

.


평식이 형은 어찌 된 일인지 목요일부터 보이지 않았다. 평식이 형의 재소자 복의 앞주머니에 5살짜리 딸의 사진을 늘 넣고 있었는데 가끔 둘이 비스듬히 소각장 앞에 누워 있을 때 그 사진을 꺼내서 보여주었다. 귀여운 모습의 아이에게서 평식이 형의 얼굴이 조금 보였다. 평식이 형도 작가를 꿈꾸고 있었는데 알코올 때문에 사고를 치고 복역을 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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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목요일부터 보이지 않는 것일까. 평식이 형은 기결수다. 구치소에서 형을 살고 있는 것이다. 조금씩 월급을 받아 가면서. 가끔씩 담배가 몹시 피우고 싶다고 했다. 그러던 평식이 형은 흡연욕을 참지 못하고 소각장에서 담배를 몰래 주워 피다가 걸려버렸다. 그것도 계장에게 걸리는 바람에 야외로 나갈 수가 없게 되었다. 평식이 형에게서 아직 레이먼드 카버의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었는데, 그날이 오늘처럼 겨울의 틈을 벌리고 있는 아주 따뜻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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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덕분인지 레이먼드 카버의 글이 거부감 없이 다가왔다. 삭막한 구치소의 추운 겨울의 따뜻한 소각장과 평식이 형과 레이먼드 카버. 오늘의 먼지가 낀 따뜻한 겨울의 공기가 그날과 비슷했다. 점심 맛있게들 드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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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트니 휴스턴은 4살 때 교회에서 홀로 노래를 불러 사람들의 박수를 받았다. 경악에 가까운 노래 솜씨를 휘트니 휴스턴은 사람들에게 들려주기 시작했다. 노래를 부르는 그녀도, 그녀의 노래를 듣는 사람도 모두가 행복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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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사람 중에는 나의 아버지도 있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술만 드시고 집에 오시면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를 틀어 달라고 했다. 그러면 나는 카세트테이프나 레코드 판을 뒤져서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를 틀었다. 그러면 아버지는 벽에 기대어 가물가물해지는 정신을 잡고 노래가 참 좋구만,라며 노래를 들었다

.

 

내가 어릴 때 집은 참 가난하여 단칸방에 식구 네 명이 살 때도 있었는데 티브이는 없어도 집에 노래는 늘 나오고 있었다. 가난 때문에 풍성하게 살 수는 없어도 아버지는 내가 듣고 싶은 노래가 있으면 손을 잡고 가서 음반을 사 주었다. 어머니도 그것에 대해 나무라지 않았으며 모친도 티브이보다는 음악을 집에 늘 틀어 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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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문인지 국민학교 때에도 마이마이 같은 것으로 음악을 늘 듣고 있었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음악감상실에서 주로 살다시피 했는데 그곳에 있으면 노래 이외에 팝 가수들의 가십거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박은석의 칼럼을 읽게 되고 김태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임진모의 책을 구입하여 읽으면서 듣는 것 이외의 것들에 대해서도 많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

 

엑슬 로즈는 걸핏 하면 호텔의 2층에서 로비로 의자를 집어던졌대. 로비에는 자신을 보러 온 팬들이 가득했는데 말이야. 존 세카다는 머라이어 캐리 뒤에서 긴 시간 백댄서로 춤을 추면서 기회를 엿보다 노래를 불러 if you go 같은 감미로운 노래를 발표했지. 미트로프는 미식축구를 하던 그 큰 덩치로 그렇게나 멋지고 아름다운 가사의 노래를 불렀던 거야

.

 

아이들을 모아 놓고 주워들은 이야기를 들려주면 모이를 받아먹는 새끼 참새들마냥 재미있어했다. 어쩐지 이런 이야기는 지금도 사람들에게 들려주면 모두들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듣고 있다. 그것은 참 신기한 일이다. 휘트니 휴스턴은 바비브라운을 만나고 나서 망가지기 시작했다. 약과 술에 몸과 마음은 잠식되었다. 푹 꺼진 눈과 깡마른 몸으로 약에 취해 사람들 앞에서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노래를 부를 땐 그녀의 노래를 들으며 자란 나로서는 몹시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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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를 주로 겨울에 많이 들었다. 여름에도 들었을 법한데 기억이 전혀 없다. 마찬가지로 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겨울이 훨씬 많다. 이불을 덮어 주고 출근을 했다던가, 새벽에 라면을 끓여 먹고 가면 꼭 나 먹으라고 라면을 밥그릇에 조금 남겨두고 갔다던가, 추운 날을 헤치고 같이 목욕을 하고 휘트니 휴스턴의 카세트 테이프를 사러 손을 잡고 겨울의 음반가게에 갔다던가

.

 

늘 그렇듯이 추억이라는 게 마음 안쪽으로부터 따뜻하게도 하는 동시에 마음 안쪽에서부터 아프게도 한다. 겨울은 제일 싫어하는 계절이라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따뜻한 기억은 주로 겨울에 몰려 있는 것을 보면 앞으로도 겨울에 몇 개의 따뜻한 기억을 만들어가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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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금기를 깨버린, 기존의 콘크리트처럼 굳건한 ‘틀’을 콘크리트로 깨버린 건축가가 있었으니 그가 안도 다다오다. 안도 다다오의 이야기는 워낙 유명하고 방대하고, 또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매년 안도 다다오의 이야기를 적어놔서 썩 새로울 것도 없지만 ‘틀 깨기 4부작(영화, 음악, 사진, 건축)’을 하기로 했으니 해버리자

.

 

모두 잘 알겠지만 안도 상은 쌍둥이다. 입이 거칠고, 거친 만큼 성질도 더럽고, 하지만 건축으로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은 자연과 같은 묘한 사람이다. 어린 시절 권투를 하다가 건축으로 전향한, 제대로 건. 축. 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보라, 지금은 어떤가. 그것 자체가 틀을 깨버린 사람이다

.

 

안도 다다오의 건축물을 처음 본 것이 고등학교 사진부 암실에서였다. 당시 암실에는 금발의 제니퍼가 여체를 뽐내는 사진을 들여다보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을 때 건축과를 진학한 선배가 들고 온 안도 다다오의 건축물 전집을 봤는데 그만 빠져들어 버렸다. 아아 세상에, 내 주위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건축물. 안토니오 가우디의 아르누보와는 또 다른, 그러니까 인간이 몸을 말고 들어가서 생활할 수 있는데 점점 몸이 양수 속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게 느껴지는 건축물, 오 그것이었다

.

 

나는 사진과 디자인에 심취해서 디자인 학원에 1년 가까이 다니고 있었는데 방향을 틀어 나와는 무관한 건축과를 가버리고 말았다. 그것이 내 인생의 큰 실수였는데 그저 안도 다다오의 건축물이 좋아 건축과를 갔다가 성적은 바닥을 기었고 건축 사진만 찍으러 1년을 그렇게 다녔다가 졸업의 영광을 못 누릴 뻔했는데 방대한 양의 건축 사진들과 그나마 투시도를 제법 그렸고 모델링에서 점수를 받아서 겨우 졸업을 했다. 그때 나의 동경은 오모테산도를 누비며 안도 다다오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것이었다

안도 다다오는 건축물이 들어설 것 같지 않은 곳에 당당하게 보란 듯이 건축물을 세웠다. 안도는 일본 주택에 큰 관심을 보였다. 데면데면 붙어있는 오사카의 주택지에 도시게릴라의 집 제1호 도미시마 주택을 설계하는데, 지금 가서 함 보라 전혀 촌스럽지 않다. 그 속에 속 들어가면 정말 나오기 싫을 정도로 집을 살갑고 멋지게 지었다. 지나가면서 일별하는 것만으로도 머리에 딱 새겨질 만하다. 하루키의 글에 자주 등장하는 오모테산도와 오모테산도 힐즈의 거리를 몽땅 안도 다다오가 설계를 했다. 긴 도로가 죽 이어지는 양옆으로 안도 다다오의 건축물들이 거짓말처럼 늘어서 있다

.

 

모든 건축물을 땅속에 묻은 지추 미술관(땅속에 박힌 미술관의 중정인 삼각 코트에는 해가 뜨면 해가 고스란히 그 속에 담긴다. 나의 얄팍한 언어로 표현하기 힘들다. 이해 바람) 등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건축물은 이제 신화가 되어 가고 있다

.

 

안도는 왜 남들이 꺼려 하는 힘든 건축물을 창조하는 것일까.

안도는 처음부터 타협하기를 싫어 했다. 좀 더 잘 보이기 위해, 이득을 취하기 위해 건축물을 창조하는 행위를 버렸다. 오로지 희망과 도전으로 건축물을 설계하는 것이다. 건축가들이 가져야 할 바람직한 덕목이다(정규 이 새끼야)

.

.

 

일례로 안도는 70년대 절벽을 깎아서 주택, 록코 집합 주택을 건축하기로 한다. 모든 것이 끝났을 때 10년이 지나갔다. 록코 집합을 짓기로 하고 스케치를 하고 시공을 하는 동안 법규제라는 ‘틀’에 강하게 부딪힌다. 관료들은 시공허가를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허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안도는 그에 굴하지 않고 건축주의 동의를 얻어내고 스티브 잡스처럼 같이 일하는 젊은 건축가들에게 우리가 목숨을 걸고 건축물을 지어야 그 속에 들어가서 생활을 하는 사람은 목숨의 위험을 받지 않는다,라며 끝까지 끌었다

.

 

사지(죽은 땅)에 건축을 짓기로 하고, 법이라는 큰 규제에 부딪히고, 한계 건축을 뛰어넘고, 목숨을 건 공사, 그리하여 10년 만에 록코 집합주택이 완성된다. 83년에 록코 집합주택이 완성될 즈음, 비슷하게 지어 달라는 제의가 들어오게 된다

.

 

긴 시간 마침내 완성된 록코1, 록코2, 록코3 집합주택은 모두가 서로 연결된다. 건축주가 난색을 표하며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포기를 하려고 할 때 안도는 말했다. “설비는 결국 망가질 날이 오지만 건축을 구성하는 사고방식은 살아남습니다. 긴 안목으로 보면 이것이 더 질 높고 가치 있는 건축입니다”라며 느긋하게 버텨낸다

.

 

안도의 유명한 건축물 말고 이런 곳에 한 번 가보고 싶지 않습니까. 관습과 틀을 깨버린 곳으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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