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지리산 노고단에서 끝없이 뻗어나간 산줄기들을 굽어보며, 지리산은 장대하고 우람하고 숙연한 산이다. 그리고 지리산은 역사의 무덤이다. 인간의 삶은 갈등을 잉태하고, 그 갈등은 역사를 탄생시키며, 그 역사는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로 삼아 성장한다. 이 땅의 역사의 고비고비마다 지리산은 저항하는 사람들을 품어 보듬었고, 끝내는 그들의 무덤 노릇까지 해주었다. 우리의 현대사에서도 지리산의 그 역할은 변함이 없었다. 지리산은 아흔아홉 골짜기를 열어 8만이 넘는 빨치산들을 받아들였고, 끝내는 그들을 영원히 품에 잠들게 했다. 세계의 현대사에서 그 유례가 없는 죽음의 의미를 캐려고 나는 열 번이 넘게 그 고산준령을 오르내렸다. 나는 지리산의 적막 속에서 빨치산들의 열혈 투쟁을 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숭고한 정신을 느끼고는 했었다. 인간의 인간다운 세상을 향해 끝없이 몸부림치는 인간의 숭고함. 그 몸부림은 시대를 초월한 인류 역사의 불변의 과제였고, 현실적으로 어리석은 소수 인간들의 희생 위에서 인류의 역사는 발전되어 왔던 것이다. 그 숭고한 정신은 인간 긍정의 모태고, 소설의 영원한 테마다. <태백산맥> 마지막 장면에서 하대치와 그의 동료들이 어둠 저편으로 찾아가는 것도 사회주의를 넘어선 바로 그 인간다운 세상을 향한 발걸음이다.


(98)

담배를 하루 평균 3~4갑을 피우고, 커피를 5~6잔 마시며 열흘에서 보름을 자는 시간 빼놓고는 책상에 앉아 있다 보면 첫째 나타나는 증상이 두 다리가 10 20배로 퉁퉁 부어오른 착각이 든다. 그래서 얼른 만져보면 그렇지 않아 주무르고는 한다. 두 번째가 변비 증상이다. 옛날에 똥줄이 탄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실감하게 된다. 세 번째가 머리에서부터 차츰 차츰 피가 줄어들어 온몸이 하얗게 표백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네 번째가 걷는데 다리가 내 뜻과는 다르게 휘뚱거릴 뿐만 아니라 발 밑이 어질어질 기울어지고 흔들리고 출렁거린다. 그런 증상들이 날이 갈수록 겹쳐져오다가 막바지에는 잠자리에 누우면서 온몸이 녹아 흘러 땅속으로 잠기는 듯한 느낌 속에서 내일 아침에 못 일어나고 말지하는 생각으로 정신을 잃듯 잠이 든다. 그 죽음과 소생의 되풀이 속에서 원고지는 쌓여갔다.


(188)

하바로프스크의 아무르 강변에 동포들이 일군 마을 이름은 ‘3.1’. 조국에서 일어난 3.1운동에서 따온 것이다. 그 독립 의지가 가슴 뭉클하다. 동포들은 짧은 여름에는 농사를 짓고, 긴 겨울에는 아무르강의 두꺼운 얼음을 뚫어 생선 중에서 최고로 치는 철갑상어를 낚었다. 영하 30도의 추위를 견디며, 그것을 판 돈이 독립 자금이 되고 자식들의 학자금이 되었다.


(210)

원고를 쓴 기간만 <태백산맥> 6. <아리랑> 4 8개월이었다. 마흔에 <태백산맥>을 시작했는데 <아리랑>을 끝내고 보니 쉰셋이 되어 있었다. 내 인생 장년의 세월이 정말 눈 깜짝할 아이에 흘러가버린 느낌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어떻게 그렇게 긴장을 유지할 수 있느냐고, 무엇 때문에 그렇게 쓰느냐고. 삶의 보람이 가장 커서인가? 소설은 사나이의 생애를 바칠 만한 가치가 있어서인가? 그 대답은 꼭 필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두 원고를 쌓아놓고 그 사이에 서며 얼굴은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왜 그렇게 눈물이 나려 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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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악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송예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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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작년에 벵하민 라바투트의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기를 멈출 때>라는 책을 읽었어. 그 책은 수학자와 과학자에 에피소드를 소설로 쓴 책인데, 양자역학 등 흥미로운 소재로 쓴 소설이지만, 읽는 것은 쉽지는 않았던 기억이 있구나. 하지만 양자역학에 관심이 많은 아빠에게는 괜찮은 책이라고 생각했어. 그 책을 쓴 벵하민 라바투트의 신작 <매니악>이라는 소설이 새로 나와서 읽어봤단다. 소설 제목 매니악(Maniac)은 광적으로 열중한다는 영어 단어인데, 이 책을 읽다 보면 폰 노이만이 개발한 컴퓨터의 이름이기도 한데, 그건 조금 이따 이야기해줄게. 그 외 말고 너희가 이 책의 제목을 보더니 노래 “Maniac”을 흥얼거리더구나.

소설 <매니악>은 모두 3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부마다 한 사람과 과학, 특히 컴퓨터 역사의 중요한 사건을 다루고 있단다. 1부에서는 불확정성과 양자역학을 연구했던 에렌페스트라는 사람이고, 2부는 오늘날 컴퓨터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만든 폰 노이만이고, 3부는 알파고와 바둑 대결을 했던, 너희들도 알고 있는 우리나라 바둑기수 이세돌이란다. 이세돌이 이런 외국 소설의 등장인물로 나오니 반갑고 신기하기도 하구나.

, 그럼 그들의 이야기를 해볼게.

 

1.

먼저 오스트리아 물리학자 파울 에렌페스트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단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지만, 파울 에렌페스트는 1927년 그 유명한 솔베이 5차 회의에 참석을 했었고, 세계 최고의 정모 사진이라고 하는 그 사진 속에도 있던 사람이고, 아인슈타인의 친구이기도 해. 그는 양자역학의 한 축인 통계역학을 연구하였단다. 그런데 이 책에서 파울 에렌페스트를 다룬 것은 불행한 그의 가정사였단다. 그는 심한 우울증을 겪고 있었는데, 결국 다운증후군 장애를 겪고 있는 막내 아들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함으로써 삶을 마감했단다. 파울 에렌페스트의 스승이 루트비히 볼츠만인데, 볼츠만도 자살로 삶을 마감한 이력이 있었다고 하는구나.

2부에서는 천재 과학자 폰 노이만에 관한 이야기란다. 가장 많은 장수를 차지하고 있고, 이 소설의 제목 <매니악>도 폰 노이만이 만든 컴퓨터 이름에서 따왔으니 실질적인 주인공이 아닌가 싶구나. 폰 노이만은 헝가리 출신으로 원래 이름은 노이만 야노시 러요시라고 한단다. 2부의 진행 방식은 좀 폰 노이만의 주변 인물이 폰 노이만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끌어간단다. 다큐멘터리를 보면 주변 인물들을 인터뷰하여 구성하는 경우가 있는데, 2부의 구성이 그런 식으로 되어 있단다. 폰 노이만은 어렸을 때부터 천재로 유명했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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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66)

우리와 다른 외계인, 진정한 천재가 존재한다니. 전교생이 그에 대해 이야기했다. 소문에 의하면 그는 두 살에 글을 깨쳤다고 했다. 라틴어, 고대 그리스어,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에 능통했고, 여섯 살에 암산으로 여덟 자리 숫자 두 개를 나눗셈할 줄 알았으며, 한번은 여름방학 때 펜싱 교사 머리에 불을 붙인 벌로 아버지 서재에 감금되었다가 심심풀이로 미적분을 혼자 깨쳤고 급기야는 마흔다섯 권이나 되는 빌헬름 옹켄의 일반 역사서를 달달 외웠다. 모든 소문을 진실로 밝혀졌다. 그러나 마침내 그 아이가 운동장에서 내 쪽으로 뒤뚱뒤뚱 걸어오는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는 적잖이 실망했다. 아직 통통하게 살이 찌기 전이었음에도 움직일 때 어쩐지 투실투실하고 굼뜬 느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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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천재는 27살에 프린스턴 대학교의 정교수가 되었어. 자타공인이던 폰 노이만은 자신보다 더 천재가 나타났다고 하는 순간이 있는데, 1930년 학회에서 만난 쿠르트 괴델이라는 사람이란다. 이 사람도 유태인으로 미국으로 망명 온 과학자인데, 아빠가 다른 책들에서 여러 번 이야기를 해주었던 사람이란다.

작년에는 <아인슈타인이 괴델과 함께 걸을 때>라는 책의 독서편지에서도 이야기했던 사람이야. 폰 노이만은 학회에서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단다. 이후 폰 노이만은 몇 달 동인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연구해서 따름 정리를 발표하기도 했다는구나. 그리고 폰 노이만은 핵폭탄 개발 프로젝트인 맨해튼 프로젝트에도 참가를 했어. 작년에 이야기해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라는 책의 독서편지에서도 잠시 이야기해 준 적이 있단다.

핵폭탄의 시험 폭발이 성공을 거둔 후, 그 위력이 엄청난 것을 본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정부에 폭탄 사용을 만류하게 된단다. 하지만 폰 노이만은 적극 지지를 한단다. 폰 노이만이 물리와 수학 분야에 있어 초천재인 것은 맞지만 다른 분야에는 좀 적응을 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윤리적인 면을 판단하는 것도 좀 부족했던 것 같아. 다른 과학자들이 핵폭탄을 만류하는 동안 폰 노이만은 어떻게 하면 가장 효과가 좋은지 알려주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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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154)

실험 직후 우리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서신이 돌기 시작했다. 일본을 상대로 폭탄을 사용하지 말아달라고 대통령을 설득하는 탄원서였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가한 학자 중 백오심 명 이상이 탄원서에 서명했다. 유럽의 전쟁은 끝난 후였다. 히틀러도 이미 총을 쏴 자결했으니, 우리가 실제 그랬던 것처럼 일본 민간인 이십만 명을 죽일 이유는 단 하나도 없었다. 진심으로 말하건대, 일본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기만 했다면, 일본 장군이 단 한 명이라도 폭탄 실험 장면을 목격했다면 그걸로 충분했을 것이다. 그랬으리라 확신한다. 하지만 탄원서는 트루먼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탄원서가 결과를 바꿨으리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우리가 만든 폭탄은 이미 군의 손에 넘어가 있었으니 어쨌거나 그들은 그 무기를 사용했을 것이다. 최상의 표적을 고르기 위해 위원회도 벌써 꾸린 터였다. 그런데 폭탄을 지면이 아니라 높은 공중에서 터뜨려야 한다고 군을 설득한 다름 아닌 폰 노이만이었다. 그래야 폭풍파의 피해 규모가 비교할 수 없이 커진다는 이유에서였다. 심지어 그는 최적의 높이가 600미터, 대략 2천 피트쯤이라는 계산도 직접 도출했다. 그리고 정확히 그 높이에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예스러운 목재 가옥 지붕 위로, 우리가 만든 폭탄이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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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 노이만은 끝까지 세상을 비관적이고 냉소적인 시작으로 바라보았다고 하는구나.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스스로 계산하는 기계장치를 개발하는데 힘쓰는데, 그것이 최초의 컴퓨터인 에니악이라는 결실로 나타났단다. 이후 줄리언 비글로와 함께 더 좋은 컴퓨터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해서, CPU에 의한 제어 장치, 기억 장치, 논리연산 장치로 구성된 컴퓨터를 개발한단다. 프린스턴 연구소에 있을 때 만나 결혼한 두 번째 아내 클라리 단도 컴퓨터 프로그래밍 개발에 참여하여 순서도를 제작하기도 했어. 그리고 그들은 수학분석기와 숫자 적분기 및 계산기가 가증한 업그레이드된 컴퓨터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MANIAC이었단다. MANIAC Mathematical Analyzer Numerical Integrator and Computer의 약자였단다. 이 컴퓨터를 이용하여 최초로 체스 프로그램을 만들어 실행하기도 했어. 그 뿐만 아니라 군에서는 매니악을 이용하여 수소 폭탄 제조에도 이용이 되었어. 컴퓨터가 군에 의해 많이 생산되었단다. 초창기 컴퓨터는 대부분 군사용으로 쓰였던 거야.

폰 노이만은 53세에 안타깝게도 췌장암 진단을 받았어. 암으로 고생을 하면서도 그는 계속 연구에 매진했단다. 그러면서 기계가 생물체들처럼 스스로 진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단다. 그것이 그의 사후 계속 연구되어 오늘날 알파고와 같은 AI 컴퓨터들로 이어진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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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4)

어떻게 기계가 스스로 생명을 얻어 살아갈 수 있는가? 튜링이 그의 기계를 구상한 것처럼 나도 이 문제를 철저하게 공식화할 수 있을 것 같네.” 연치는 죽기 몇 달 전 내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는 알레프제로(Aleph-zero)라고 명명한 일종의 자동기계가 존재하며, 이는 다음과 같은 속성을 지니는데, 만일 당신이 알레프제로에게 무엇에 관한 서술을 제시하면 그 정보를 흡수해 두 개의 사본을 생성한다는 것이다라는 명제를 증명할 계획을 이미 세웠다고 했다. 튜링이 컴퓨터의 탄생으로 이어진 사고실험을 고안했을 때, 또 괴델이 불완전성정리를 증명했을 때 사용한 것과 같은 논리 방법, 자기 참조적이며 재귀적인 추론을 사용해, 단순히 1 0의 문자열이 아닌, 실제적이고 물리적인 대상을 생성하는 이론적 기계를 설계해낸 것이다. 그는 일종의 임계점, 티핑 포인트가 존재하며 그것을 넘어서는 순간 비로소 기계의 진화가 시작된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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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마지막 3부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대전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단다. 이세돌과 AI 컴퓨터인 알파고가 바둑을 둔 것이 얼마 전인 줄 알았는데 찾아보니 2016년으로 벌써 8년의 시간이 지났구나. 정말 세월이 빠르긴 하구나. 아무리 AI라고 하지만 바둑은 체스와 달리 경우의 경우가 너무 많아서 많은 사람들이 이세돌의 승리를 점쳤단다. 하지만 첫 번째 경기를 마치고, 두 번째 경기를 마치고 어쩌면 알파고를 한 번도 이길 수 없겠다는 예측들이 나왔던 기억이 나는구나. 결국은 이세돌이 4대국에서 한 판을 이겨 전체 스코어 4 1로 알파고가 최종 승리했는데, 그 한 번의 승리가 AI 컴퓨터를 인간이 이긴 유일한 경기가 되었다고 하는구나.

알파고는 그 이후 계속 더 진화하여 인간이 접바둑을 두고도 이기기 어려운 존재가 되었다고 하는구나. 이 책에서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대전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어 반가웠단다. 이세돌의 목소리를 처음 들어보는 사람들은 좀 독특하다고 생각할 텐데, 아빠는 그것이 천성적으로 타고나고 그런 것인 줄 알았는데 어렸을 병을 앓고 목소리가 그렇게 변했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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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3)

이세돌, 쎈돌, 바둑 9, 동시대 누구보다 창의적인 바둑 기사. 첨단 인공지능 시스템과 대전을 치러 패배를 안긴 유일한 인간, 그는 열세 살이 되던 해에 목소리를 잃었다.

한반도 서쪽 끝자락의 작은 섬 비금도에서 서울로 상경한 지 오 년째, 프로 바둑 기사가 된 지는 육 개월째이던 1996, 폐에 알 수 없는 병증이 생겼다. 기관지가 상해 성대가 마비되었으니 말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으나 희한하게도 일부 단어를 읽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게 되었다. 일시적이었던 실어증의 근본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 질병(심오한 내적 혼란의 징후가 아니라 정말 질병이었다면)의 여파로 결국 기관지 신경이 영구적으로 마비됐다.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도 장난감 인형에서 나올 법한 독특하고 새되고 밭은 목소리로 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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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은 목소리만 특이한 것이 아니라 바둑 기풍에 있어서도 독특하다고 하는구나. 아버지의 영향으로 5남매가 모두 어렸을 때부터 바둑을 배웠는데 이세돌은 어렸을 때부터 천재 소리를 들었다고 하는구나. 최연소로 프로 9단을 땄으며, 가끔 허세부리기도 하고 돌출 행동을 하기도 하지만 K pop을 좋아하는 대한민국 젊은이이고 K 드라마도 즐겨 본다고 하더구나. 바둑을 둘 때도 예상치 못한 수로 상대의 허를 찌르는 것이 주특기였대. 하지만 이세돌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둑이었고, 그가 바둑을 은퇴하기 전까지는 매 순간 바둑만 생각하면서 지냈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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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9-330)

그에게 바둑이란 호흡과 같아서 멈출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언제나 바둑을 생각한다. 머릿속에 바둑판이 하나 있어서 새 전술이 떠오르면 그 바둑판에 돌을 둔다. 술을 마시고 드라마를 보고 당구를 칠 때도 늘 그런다.” 지금껏 눈 뜨고 깨어 있는 모든 순간을 바둑에 바치느라 놓친 것들이 아쉽지는 않은지, 사실상 정규교육이란 걸 받지 않았고 초등학교조차 마치지 않은 상태에서 은퇴를 앞두었는데 곧 닥쳐올 일에 맞설 준비는 되었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바둑이야말로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이라고 대답했다. 바둑의 무한한 복잡성은 인간 정신의 내적 작동 방식을 거울처럼 비추며, 바둑의 전술과 수수께끼와 풀 수 없어 보이는 난해함이 바둑을 우리 우주의 아름다움, 혼란, 질서를 유일하게 비견할 인간의 창조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누군가 바둑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면, 그러니까 돌의 위치와 관계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형세에 숨겨진, 거의 감지할 수조차 없는 패턴을 이해할 수 있다면, 나는 그게 신의 정신을 들여다보는 것과 다르지 않으리라 본다.” 이세돌에게는 승패보다는 바둑의 가장 심오한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했다. 따라서 모든 수를 전부 이해하기 전까지는 절대 게임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김지석은 말했다. “한번은 이세돌과 새벽 두 시까지 술을 마셨는데 나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더니만 자기가 막 이기고 온 대국을 만취한 채로 복기하겠다며 흑돌과 백돌의 수 하나하나 다시 두기 시작했다. 이기기는 했으나 딱 한 수가-심지어 자신이 두었던 수인데!-완벽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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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과 대적한 알파고는 어떻게 태어났을까. 알파고는 데미스 허사비스라는 사람이 개발을 했단다. 데미스는 어린 시절 체스를 잘 두어 대회에 입상하기도 했대. 대학에서는 프로그램과 컴퓨터 과학을 전공했는데 인지신경과학 박사 학위도 땄다는구나. 학창시절 많은 논문을 읽었는데 그 중에는 폰 노이만의 논문들도 포함되어 있었어. 2011년 그는 딥마인드라는 스타트업 회사를 창업했고, 2014년 구글이 4억달러라는 천문학자 금액으로 인수를 했단다. 회사가 인수된 이후에도 데미스는 딥마인드를 경영했으며, 알파고를 개발하게 된단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바둑이라는 것은 경우의 수가 너무 많단다. 그것을 다 고려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어. 그 경우가 수가 얼마냐 하면 아빠는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숫자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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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7)

바둑판에서 가능한 자리의 수, 즉 두 사람이 대국할 때 발생하는 고유한 돌 배열의 가짓수는 너무 커서 2016년에 이르러서야 제대로 규명되었다.

208,168,199,381,979,984,699,478,633,344,862,770,286,522,453,884,530,548,425,639,456,820,927,419,612,738,015,378,525,648,451,698,519,643,907,259,916,015,628,128,546,089,888,314,427,129,715,319,317,557,736,620,397,247,064,84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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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대전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모든 이들의 예상을 깨고 알파고가 41로 완승을 했단다. 이것은 이세돌뿐만 아니라 그 경기를 지쳐봤던 관람객, 시청자들그리고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던 것이란다. 인간이 수십 년 동안 갈고 닦아도 이길 수 없는 존재가 있다는 것더 이상 인간이 가장 뛰어난 존재가 아니라는 것앞으로 미래는 어떻게 될까? 이세돌도 알파고의 대전을 끝내고 소회를 이야기했고, 이 대전과 상관없이 사전에 계획한 대로 은퇴를 했다고 하는구나. 그는 바둑 은퇴를 하고,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하며 제 2의 인생을 살고 있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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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1-102)

일종의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제대로 결정타를 날렸죠. 어떻게 해도 이길 수가 없더라고요. 그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어요. 의미가 없습니다. 나는 다섯 살 때부터 바둑을 뒀습니다. 그때 바둑은 예의와 매너가 전부였어요. 게임보다 예술을 배우는 것에 가까웠죠. 크고 난 후에야 바둑을 두뇌 게임으로 생각하게 됐지만 배울 때는 예술이었어요. 바둑은 두 사람이 함께 만드는 예술작품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주 달라졌어요. AI가 도래하면서 바둑의 개념 자체가 바뀌어버렸습니다. 굉장한 충격이에요. 알파고는 나를 그냥 이긴 것이 아니라 무너뜨렸습니다. 이후로는 계속 바둑을 뒀지만, 은퇴는 진즉에 결심했어요. AI가 등장한 후로는 내가 최정상에 있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아무리 화려하게 복귀해서 미친듯이 노력해 최고의 바둑기사가 되더라도, 최고일 수는 없어요. 세계 최고가 되어도 이길 수 없는 존재가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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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까지가 이 책에 대해 아빠가 대충 이해한 것이란다. 이 소설이 심도 깊은 과학 지식을 좀 갖추고 있어야 이해하기 쉬웠을 것 같은데 아빠는 그 정도는 아니라서, 쉽지 않게 읽었단다. 너희들에게 이야기한 부분도 아빠가 이해한 부분과 등장인물들의 에피소드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해주어, 어쩌면 책의 핵심이 빠져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나중에 너희들이 커서 이 책이 여전히 인기가 있다면 한번쯤 읽어봐도 좋겠구나. ,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1993 9 25일 아침, 오스트리아 물리학자 파울 에렌페스트는 암스테르담에 얀 바테링크 교수가 세운 환아 교육 시설에 걸어들어가 열다섯 살 난 아들 바실리의 머리를 총으로 쏜 뒤 자신에게도 총을 겨눴다.

책의 끝 문장: 그것의 이름은 알파제로이다.


수학이란 신의 정신과 가장 가까이 닿아 있는 학문이다. 그러므로 숭배하는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 수학에는 진정한 힘이 깃들어 있으며, 그 힘은 손쉽게 악용될 수 있다. 그 힘은 오직 인간만이 소유한 능력에서 탄생했는데, 은혜로운 우리의 신은 날카로운 이빨과 손톱과 발톱 대신에, 그만큼 위험하고도 치명적인 힘을 우리에게 선물했다. 이에 관해 나는 그에게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다. 나에게 어떠한 심판이 내려지건 간에, 차마 부인하지는 못하겠다. 그가 미래에 무슨 일을 하게 될지 내가 누구보다 먼저 보았음을. 그가 가진 능력이란 참으로 진귀하고 아름다워서 지켜보기만 해도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래, 나는 그것을 보았지만, 다른 것도 보았다. 우리 모두를 묶어두는 자제력을 상실한, 사악하고 기계 같은 지성. 그런데 왜 침묵했냐고? 그가 너무 우월했으니까. 나보다도. 우리 모두보다도. - P111

정말 모든 상황마다 합리적인 행동 경로라는 게 있을까? 조니는 이를 의심할 여지 없이 수학적으로 증명해냈으나 그건 오직 양측의 목적이 정반대로 다를 경우에 한정되었다. 그러니 우리의 추론에는 관찰안이 좋은 사람이면 단박에 발견해낼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우리 이론 전체의 틀을 떠받치는 최대최소정리는 완벽하게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주체를 상정한다. 그런 주체는 오직 이기는 것에만 관심이 있으며, 규칙을 완벽히 이해하고 자신의 이전 움직임을 모조리 기억할 뿐 아니라, 게임이 한 단계 진행될 때마다 자신과 상대방의 행동이 일으킬 수 있는 결과를 오차 없이 파악하고 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정확히 이런 조건에 부합하는 자는 조니 폰 노이만뿐이다. - P176

에니악의 특징은 계산이 일어나는 과정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할 수 있다는 거였다.
내부로 걸어들어가면 비트값이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누구도 숫자들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실시간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하지만 조니는 예외였다.
계산의 현장 한가운데 잠자코 서서 눈앞에서 번쩍이는 빛을 보던 그를 기억한다.
기계가 또다른 기계 안에 들어가 생각하는 모습을.
그는 다음날 나를 고용했다. 고등연구소에서 더 다은 기계를 함께 만들자는 거였다.
나는 곧장 연구소로 가는 기차를 탔다.
- P186

기계가 못하는 일이 있다고들 한다. 기계가 못하는 일이 정확히 뭔지 내게 말한다면, 나는 언제든 그걸 해내는 기계를 만들 수 있다.
- 존 폰 노이만
- P213

클라리는 자기 남편이 그렇게나 컴퓨터를 좋아하더니 아예 컴퓨터가 되어가는 것 같다고 했다. 연치는 잠시도 가만있지를 못하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계산했고, 그게 아니면 루프에 빠지거나 서서히 멈춰버리거나 오류를 일으켰다. 하지만 그는 절대 미친 것이 아니었다. 대화할 때는 어느 때보다 명민했고, 사후 출간되어 읽은 그의 말년 연구는 생각할 거리가 풍부했으며, 수학적으로 아름다웠고, 기술적으로는 역시나 그의 연구답게 빈틈이 없었다. 그가 정말로 선을 넘어 이성이 굴레이자 제약이 되는 세상으로, 앞으로 나아가려면 이성을 옆으로 치워두어야만 하는 영역으로 들어가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닌지 표면적으로 암시한 신호는 단 하나, 암이 그의 혈액뇌장벽을 넘어서기 직전 그의 조지타운 집에서 내가 목격한 참으로 혼란스러운 일화였다. - P270

미래를 감춰놓은 베일을 걷어낼 수 있다면, 그리하여 우리 과학이 다음에 어디로 진일보할지, 다가올 세기에 일어날 과학 발전의 비밀이 무언지 일별할 수 있다면, 기뻐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 다비트 힐베르트
- P317

"사실은 알파고가 확률을 계산하는 기계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수를 본 순간에 생각이 달라졌어요. 알파고는 분명 창의적입니다. 그 수가 알파고에 대한 나의 시각을 바꾸었어요. 바둑에서 창의성이란 무엇을 뜻할까요? 단순히 좋은 수, 위대한 수, 강력한 수를 두는 능력이 아닙니다. 의미 있는 수를 두는 능력이죠." 대국이 끝난 후 인터뷰를 진행한 다큐멘터리 제작진에게 그는 말했다. 이세돌은 평소였으면 포기했을 시점을 훌쩍 넘겨 세 시간을 어 기계와 싸웠다. - P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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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 2024-05-02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185)

이건 진심이다! 좀 생기 있게 살아 봐! 네가 그 조로라는 노상 강도가 갖고 있는 용기와 기백의 반만큼이라도 가졌다면 원이 없겠다! 그 사람은 원칙을 갖고 있어. 그걸 위해 싸우고 있고. 그 사람은 힘없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한을 풀어주고 있어. 나는 그 사람을 존경한다! 난 네가 하릴없이 빈둥거리면서 맥없이 몽상에나 젖어 지내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그 사람처럼 죽거나 감옥에 갇힐 위험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 싶다.”


(193)

앉아요. 안 그러면 발포할 거요! 나는 돈 알레한드로의 댁에서 당신들과 싸우러 온 게 아니오. 나는 어르신을 존경하기 때문에 그런 짓은 할 수 없소. 나는 당신들 자신에 관한 진실을 말해주러 온 거요. 당신네 가문들은 지사를 세울 수도 있고 끌어내릴 수도 있는 힘을 가졌어요! 대의를 위해서 하나로 뭉쳐요. 그렇게 해서 인간다운 삶을 살란 말이오. 마음속에 두려움만 없다면 그렇게 하고 싶을 거요. 모험을 좇기를 원하시오? 불의를 싸우는 삶에는 모험이 차고 넘쳐요.”


(201-202)

저는 경험도 없고 마음이 자연스럽게 우러나지도 않습니다.”

돈 디에고는 그렇게 말하고는 피곤해 뵈는 눈길로 돈 카릴로스를 쳐다보면서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아이를 몹시 연모하는 것처럼 쳐다보는 게 제일 좋을 거요. 우선, 결혼 얘기는 절대 하지 말고 사랑에 대해서만 얘기해 봐요. 쓰잘 데는 없는 얘기는 일절 하지 말고 울림이 풍부한 낮은 목소리로 은근하게 말해 봐요. 처녀들에게 의미심장하게 들릴만한 얘기를. 여러 가지 의미가 깃든 얘기를 하는 것이야말로 은근하면서도 효과적이지.”


(205)

아 좋은 수가 떠올랐어요! 실연한 남자라면 어떻게 행동할까요? 당연히 코가 쭉 빠져서 기운이 하나도 없이 지낼 겁니다. 그리고 세상사에 일절 관여하지 않으려 들겠죠! 어느 면에서는 아가씨가 저를 구해 준 셈입니다. 아가씨가 저를 사랑해 주지 않는 바람에 저는 번민에 싸여서 지내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제가 바보처럼 말 타고 정신없이 뛰어다니지 않고, 싸움도 하지 않고 양지쪽에 앉아서 멍하니 공상에 잠기거나 명상을 해도 하등 이상하게 생각지 않을 거란 말이에요! 그러면 저는 마음껏 평화로운 생활을 즐길 수 있을 겁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실연을 해서 그런다고 생각해 줄 거고.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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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7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1년 10월
평점 :
품절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조정래 님의 <아리랑> 7권을 이야기해줄게. 7권부터 9권까지는 제3부인데, 3부의 제목은 <어둠의 산하>란다. <아리랑>을 읽을 때마다 지은이 조정래 님이 대단하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12권짜리 대하 소설을 쓴다는 것이 엄두도 나지 않을 것 같은데, 이야기의 흐름과 각 등장인물의 성격의 일관성을 놓치지 않고 전개되는 것을 보니 소설 속 세계를 만들어낸 신()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 소설 속 주인공의 운명은 지은이 조정래 님에게 달려 있으니 말이야. 뿐만 아니라 소설 곳곳에 들어 있는 역사 상식도 이야기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가 있어서 참 좋았단다. 소설을 읽다 보면 역사 상식이 저절로... 기억력이 좋다면 오래 간직할 텐데, 그것이 조금 아쉽구나. , 그런 아리랑 7권의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

세키야의 첩이었던 보름이는 세키야의 아이를 낳았지만 세키야에게 버림을 받고 떡 장사를 하며 생계를 유지했단다. 그런데 우연히 외눈박이 백남일을 만나게 되었는데, 백남일은 보름이가 수국이의 언니인 것을 알고 홧김에 폭력을 휘둘렀단다. 이 소식을 들은 서무룡이 백남일 고소했단다. 서무룡이 깡패이긴 하지만 그래서 보름이를 대하는 마음은 진정인 것 같았고, 백남일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백남일이 보름이를 구타했으니 가만 있을 수 없었지. 서무룡은 백남일을 고소하였고, 경찰의 뒷줄이 있는 서무룡을 무시할 수 없었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서무룡의 뜻에 따라야 했단다. 그래서 백남일은 보름이의 치료비뿐만 아니라, 자신이 운영하는 정미소에 대한 월세를 서무룡에게 내야 했단다.

 

1.

송수익의 장남 송중원은 3.1운동 후 감옥에 갔다가 2년만에 출옥을 했단다. 장인이자 아버지 송수익의 친구 신세호는 중원에게 일본 유학을 제안했어. 중원은 일본에 유학을 갔고 그곳에서 사귄 친구 허탁과 함께 조선인 노동자들을 위해 힘썼단다. 중원이 동경에 머무르고 있을 때 그 유명한 동경 대지진이 발생했던다. 1923 9 1일이었어. 송중원과 허탁은 공부도 했지만 한편으로 과자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어. 과자공장도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고 그들은 피해 복구를 도와주기 위해 공장에 갔단다. 그곳에서 신문 호외를 보게 되었는데, 그 내용이 그들을 당혹스럽게 했단다.

신문에 적힌 내용은 지진이 발생하여 혼란한 틈을 타서 불령선인(조선인)들이 동경 시내에 불을 지르고,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말도 안 되는 내용이었단다. 일본은 자경단을 조직하여 조선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였단다. 이 때 죽은 사람이 6000여 명이라고 했어. 송중원과 허탁도 일단 몸을 숨겨야 했는데, 다행히 그들을 좋게 본 일본인 과자공장 사장이 그의 집에 숨겨 주어 위험을 면할 수 있었단다.

...

, 이번에는 만주 북간도의 상황을 이야기해줄게. 일본의 밀정인 양치성은 북간도에서 결국 자신의 뜻대로 수국과 살림을 차렸단다. 수국은 어쩔 수 없이 양치성과 함께 살고 있지만, 양치성에게 마음을 두지 못하고, 어디선가 고생하고 있는 동생 대근만 생각했단다. 그래서 양치성에게 동생이 있고 지인들이 살고 있는 서간도로 이사를 가자고 했지만, 양치성은 단칼에 안 된다고 했단다.

그런데 장사꾼인줄만 알았던 양치성이 밀정이라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어. 수국은 두려워하면서 이번이 어머니와 동료들의 원수를 갚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어. 몇 달 동안 준비를 했고 만취한 양치성을 찌르고 서간도로 도망을 갔단다. 수국이 당황하여 칼을 한번밖에 안 찌르고, 양치성의 죽음을 확인하지 않고 도망을 간 점으로 보아, 양치성이 죽지 않았을 확률이 높을 것 같구나. 서간도에 도착한 수국은 지삼출과 필녀를 만나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하고 그들도 알고 지내던 양치성이 밀정이었다는 것을 알려주었어. 수국이 서간도에 도착하기 열흘 전 동생 대근은 의열단에 가입하기 위해 북경으로 떠나서 동생은 만나지 못했단다.

당시 만주는 경신참변 이루 독립운동이 와해된 상태여서 대근은 의열단에 가입하기로 마음 먹은 거란다. 대근이 의열단에 가기 전에 송수익이 조언을 해주었는데, 당시 만주의 독립군들의 상황을 잘 설명하는 것 같아서 발췌해 보았단다.

==========================

(165)

그래, 자네의 판단이 정곡을 찌르고 있네. 여기 서간도가 북간도보다 다소 덜할지는 모르나 여기 동포들의 동향도 대동소이하네. 경신년 참변 때 이곳 서간도에서도 학살이 자행됐으니까 그런 생지옥을 겪은 동포들이 그리 서간도에서도 학살이 자행됐으니까 그런 생지옥을 겪은 동포들이 그리 생각하게 된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일세. 그런데 독립군들이 이동을 단행한 것은 무고한 동포들을 보호하는 동시에 더욱 효과적인 전쟁을 수행하려는 작전계획으로, 이는 어느 나라 어느 군대에서나 취하는 군사행동이지. 그 작전에 왜병들은 당당한 작전으로 맞서지 않고 한다는 짓이 양민들을 대량학살한 것이네. 그건 세계 어느 나라 군대에서도 볼 수 없는 비열함이고 잔혹함일세. 그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한 가지 명심해야 할 점이 있네. 그게 무언고 하니, 동포들이 품고 있는 그런 생각이 바로 왜놈들이 대량학살을 자행한 목적이고 노렸던 바란 사실이네. 우리 동포들을 낙담하게 만들고, 공포에 떨게 하고, 또한 독립군을 불신하게 하고, 협조를 못하게 만드는 술수, 그게 바로 왜놈들이 조작해 내는 이간책동술이네. 그러니까 지금 독립군들이 해야 할 일은 무장을 강화하기 위해 동포들에게 무작정 협조를 구하는 것이 아니고 왜놈들의 그런 이간책동을 바르게 알리고 이해시켜 가며 민심을 수습하는 것이 급선무일세. 동포들이 곧 조선이고, 동포들이 없고서는 그 어떤 독립투쟁 단체들도 존속할 수 없으니까.”

==========================

...

한편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했던 독립군들은 일제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연해주로 이동했어. 하지만 연해주에서는 자유시 참변이라는 사건으로 많은 독립군들이 죽고 말았단다. 자유시 참변을 간단히 이야기하면 조선공산당의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갈등이 있었는데, 이르쿠츠파가 적군의 힘을 이용하여 조선공산당 상해파와 다른 독립군을 공격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 사건이었단다. 같은 민족으로 한 힘으로 일본에 저항해야 시기에 상당히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단다. 이 일 이후 남아 있는 독립군들은 다시 쫓기는 신세가 되어 만주로 돌아왔단다.

송중원의 친구로 함께 3.1운동에 참여했던 이중에 이광민이라는 사람이 있어. 이광민은 3.1운동 이후 만주로 와서 홍범도 부대에 참가해서 독립운동을 함께 했단다. 홍범도 장군이 나이가 드신 이후 독립운동 일선에 물러난 이후 이광민은 연해주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했단다. 빨치산들은 일본을 상대로 기습 작전을 벌여 치고 빠지는 전략으로 썼어. 이런 계속된 공격으로 일본군은 연해주와 시베리아에 철수를 하게 되었단다.(1922.10) 연해주에서 활약하던 빨치산 독립군들의 큰 성과였어. 이광민은 연해주에 머무르면서 윤철훈을 만나게 되어 함께 공산주의 사상을 공부하면서 향후를 도모하기로 했단다. 그리고 윤철훈의 여동생 윤선숙과 사랑을 하게 되지만, 이광민과 윤철훈은 독립운동을 위해 곧 떠나기로 했단다. 이광민와 윤선숙은 서로를 향한 사랑을 확인하고 헤어져야 했어. 사랑을 해야 할 수많은 젊은이들이 독립운동에 투신했기에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맥이 오랫동안 끊기지 않고 이어져서 결국 해방까지 이어지는데 큰 힘이 되었을 거라 생각한단다..

..

 

2.

공허 스님은 국내에서 활동을 하던 중 기차 안에서 순사인 장칠문과 마주치게 되었고, 장칠문은 공허 스님을 알아보고 바로 체포했으나 장칠문이 방심하는 사이 공허 스님은 장칠문을 공격하고 도망을 갔단다. 여기저기 도망 다니다가 홍씨 집에 머무르게 되었단다. 홍씨는 이야기했는지 모르겠지만, 공허 스님이 파계하면서 알게 된 여자란다. 장칠문은 도망간 공허 스님을 찾으러 돌아다녔고, 공허 스님과 친분이 있는 송중원의 집에 찾아왔어. 고향에 돌아와 있던 송중원을 공산주의자로 몰아서 다짜고짜 유치장에 집어 넣었단다.

...

농장조합의 회장이자, 오쿠라 농장의 지배인인 요시다는 간척사업을 통해 더 많은 땅을 차지하려고 했단다. 많은 조선인들을 쥐꼬리만한 봉급으로 고용하여 노동력을 착취를 하면서 간척 사업을 진행했어. 요시다 지배인과 조선인 노동자 사이에는 악랄한 이동만이라는 자가 있었단다. 요시다의 충실한 수하이지만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악마 같은 놈이었어. 요시다는 소작료까지 인상하려고 했단다. 소작인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집단 행동으로 반발했단다. 소작인들이 그렇게 집단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배후에 사회주의자들이 방법을 알려주었기 때문이야. 요시다의 농장 조합은 그런 소작인들을 군대처럼 편성을 하고 서로 감시하게 만들었단다. 소작인들 중에 공산주의자가 있다면 연대 책임을 묻겠다고 했어.

한편, 쥐꼬리만한 봉급을 받고 간척사업을 하던 노동자들은 임금까지 체불 당하고, 자신들이 일군 땅을 일본에서 온 일본인에게 공짜로 주고 소작인들에게 주기로 한 땅도 대폭으로 줄어들어 든 것에 불만이 쌓였단다. 이에 정씨 형제의 막내인 정도규와 그의 친구 고서완이 배후에서 조종하여 소작회를 결성하게 했단다. 정도규와 고서완은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고 있는 공산주의를 받아들여 공부하고 있던 사람들이었단다. 고서완의 제자 중에 이경욱이라는 자가 있는데, 그도 철저한 공산주의자이며 항일 정신이 투철한 자였단다. 그런데 이경욱은 악랄한 친일파 이동만의 아들이었단다. 이경욱은 자신의 아버지를 부끄러워하고, 아버지의 죗값까지 자신이 받겠다는 생각으로 더 열심히 소작인들과 노동자들을 도와주려고 했단다.

차득보 생각 나지? 잃어버린 동생 옥녀를 찾아 헤매다가 공허 스님을 만나 함께 했잖아. 공허 스님이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다 보니 함께 못 있어. 신세호의 집에 기거하면서 일을 도와주고 있었단다. 그런데 신세호의 둘째 딸 월엽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단다. 신세호가 아무리 신 지식인이라고 하지만, 자신의 딸을 차득보와 연을 맺어줄 수 없어 크게 반대했단다. 월엽은 신세호와 점지해준 집안으로 시집을 가게 되었단다. 그런데 얼마 후 옥녀가 오빠를 찾아 신세호의 집에 찾아왔단다. 그렇게 십 수 년 만에 득보와 옥녀가 만나게 되었단다.

….

 

3.

우려했던 것처럼 양치성은 오른쪽 가슴을 칼에 찔렸지만 죽지 않고 살아났단다. 수국에 대해 복수를 다짐했어. 수국은 서간도에 와서야 자신이 양치성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애를 떼어보려고 이런 저런 시도를 했지만 결국 실패를 했단다. 결국 아들을 낳았고 낳자마자 버리려 했지만, 필녀가 막으면서 자신이 키우겠다면서 아이를 데려갔단다. 하지만 모정을 그리 쉽게 끊을 수 있겠는가. 100일이 지나고 수국은 아이를 자신이 키우기로 했단다.

여기까지가 아리랑 7권에 대한 이야기란다. 우리나라에도 가끔 조선족이라고 비하하는 사람들이 있단다. 그런데 그들 대부분은 일제 시대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건너간 이들의 후예란다. 친일파의 후예와는 질적으로 다른 사람들이란다. 그리고 조선족이라는 말은 중국이 동북공정을 하면서 소수 민족들을 부를 때 부르는 말로, 너희들은 쓰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그들은 중국동포나 중국교포라고 이야기하면 될 것 같구나. 미국에 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미국교포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야.

, 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요시다 지배인님 드시느만이라우.”

책의 끝 문장: 바다 쪽으로 눈길을 돌리며 긴 한숨을 쉬었다.


천지에 가득한 그 아름거림은 꿈결인 양 황홀하면서도 서러운 하소연양 슬픔이 깃들여 있기도 했다. 그 슬픔이 깃들여 있기도 했다. 그 슬픔은 서러움 깊은 사람들의 탄식 같기도 했고, 한 많은 사연 품은 넋들의 승천 같기도 했다. 그건 기실 굶주려 배고픈 사람들의 한숨이고 한탄이기도 했다. 아지랑이가 그리도 숨막히게 흐드러지면 보릿고개의 배고픔도 병이 되도록 사무쳤다. 이미 죽으로도 끼니를 때울 수 없게 된 사람들은 부황이 들고 어질병을 앓았다. 그 배고픈 병이 든 눈으로는 아지랑이를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아지랑이의 아롱거림은 어질병을 더 도지게 했다. 그 사람들은 속 메스꺼운 어지럼증에 휘둘리며 하늘을 향해 한숨짓고 한탄을 토했다. 배곯고 사는 기구한 팔자를 쓰라려 하고 아파하는 그 한숨과 한탄은 풀릴 길 없는 채 아지랑이에 실려 멀고 먼 하늘로 스러져 갈 뿐이었다. - P56

만주에 퍼져 있는 일본영사관들이 독립군을 잡아 넘겨주는 중국관리들에게 상금을 주기로 한 것은 사실 그대로였다. 독립군 토벌에 실패하고 군대까지 철수시킨 그들은 중국관리들을 이용하고자 했다. 그 계획이 바로 이화제한(以華制韓)이었다. 중국의 힘으로 한국을 제재하자는 것이었다. 그전의 이한제한(以韓制韓)의 수법에다 하나를 더 첨가한 것이었다. 조선인 친일파와 밀정들을 투입하여 독립투쟁 세력을 파괴하고 제거하는 것이 이한제한이었다. - P90

저런 인종들은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종자들인가. 저런 것들이 바라는 것은 도대체 뭔가.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이 저런 종자들이 갈수록 불어나고 있는가. 영원히 일본세상이 되어버렸다고 믿는 것인가. 저런 놈들한테 꼼짝없이 끌려가야 하는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은 왜 튀어나온 것인가. 조선인은 허위와 공상과 공론만 즐기고 게으르며 서로 신의와 충성이 없으니 이를 반대방향으로 개조해야 한다는 것이 이광수의 주장이었다. 이광수는 왜 저런 못된 인종들을 질타하고 정신차리게 하지 않고 민족 전체를 비하시키고 흉보고 흠집 내고 있는가. 이광수는 3.1운동을 보지도 않았는가. 아니, 지금도 독립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그 많은 사람들이 안중에 없는 것일까. 이광수는 왜 그 따위 글을 쓴 것일까. 그건 바로 일본놈들이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이광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 의도나 저의는 무엇일까.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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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나는 이 잃어버린 고리판타 레이라는 개념에서 찾고자 한다. ‘판타 레이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의 유명한 언명으로 만물유전(萬物流傳)”, 모든 것은 흐른다라는 뜻이다. 모든 사물은 고정되어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마치 흐르는 유체(流體)와 같이 시간에 따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모든 것들을 유체 현상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대표적인 예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상의 물체들은 물, , 공기, 흙의 조합으로 이루저졌다는 4원소설을 제시했다. 그리고 천상 세계의 물체들, 즉 우주와 행성 같은 천체들은 제5원소라 불리는 유체 에테르(aether)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력이 여전히 남아 있던 르네상스 시대와 과학 혁명 초기, 학자들은 천체의 움직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에테르의 움직임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러기 위해 보텍스(vortex, 소용돌이)’라는 유동 현상에 주목했다. (유체 역학에서는 와류(渦流)’, ‘와동(渦動)’이라고 부르지만, 이 책에서는 훨씬 포괄적인 의미를 가진 보텍스라는 단어를 사용할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의 보텍스 스케치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시대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세계를 판타 레이의 관점으로 보고, 모든 물리 현상을 유체의 보텍스로 이해하고 설명하고자 했다. 그것은 그들에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25-27)

다행히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의 책의 인쇄본을 보고 난 뒤 눈을 감았다. 이렇게 서구 문명에 가장 큰 충격을 준 저작물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가 세상에 드러났다.

이 책은 소수의 전문가만이 이해할 수 있었기에 단 400부만 인쇄되었고, 그나마도 다 팔리지도 않았다. 6권으로 이루어진 이 책의 원제에서 레볼루티오니부스(revolutionibus)’, 레볼루션(revolution)’은 천체의 회전을 의미한다. ‘레볼루션혁명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뉴턴의 <프린키피아>가 출판되던 1688년 영국의 명예 혁명(Glorious Revolution)부터이다. 이처럼 원래 천문학 용어였던 레볼루션은 코페르니쿠스 이후 혁명적인 변화라는 의미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코페르니쿠스의 레볼루션코페르니쿠스적 전환(Kopernikanische Wendung)”이라고 명명했으며, 토머스 쿤(Thomas Kuhn)은 이를 다시 코페르니쿠스 혁명(Copernican Revolution)”이라고 부르며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는 과정을 일컫는 용어로 사용했다.


(35-36)

전 유럽을 휩쓴 30년 전쟁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마무리된다. 보헤미아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이 전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은 독일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여 오스트리아와 동유럽으로 축소되었다.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한 독일은 수많은 제후국으로 분할되어 유럽에서 가장 낙후된 곳으로 전락한다. 하지만 전쟁 중에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공국과 합병한 프로이센은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대규모 영토를 보장받으며 신흥 강국으로 등장한다. 또하, 80년간의 기나긴 독립 전쟁 끝에 네덜란드의 독립이 최종 확정되어, 신대륙 발견 이후 강대국으로 군림하던 네덜란드의 지배자 스페인의 몰락이 시작된다. 종교의 도그마에 갇혀 국력을 낭비한 스페인과 신성 로마 제국과 달리 철저히 실리를 챙긴 프랑스와 영국이 30년 전쟁 이후 유럽의 강대국으로 급부상한다.


(49)

뉴턴은 조폐국에서 일하던 수십 년간 상당한 재력가가 되었다. 한편, 1714년 앤 여왕이 후사가 없이 사망하자 영국의 스튜어트 왕조는 단절된다. 의회는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앤 여왕의 먼 친척인 독일 하노버 영주 게오르크 1세를 허수아비 국왕으로 데려와 조지 1세로 세웠다. 현재 영국 왕실은 이 하노버 왕조의 후손들이다. 이러한 정권 교체 시기에 1720년 런던의 커피하우스들의 미확인 소문들과 묻지 마투기로 시작된 남해 버블 사건(South Sea Bubble)’이라는 주식 사기 사건이 일어난다. 조폐국장 뉴턴은 여기에 휘말려 2만 파운드를 날렸다. 하지만 자산 관리에 탁월했던 그는 1727년 사망 시에 어머니의 유산을 제외하고도 3 2000파운드(현재 가치로 약 60억 원)의 유산을 남겼다.


(70)

유럽 학계가 뉴턴파와 라이프니츠파로 나뉘어 대립하던 무렵, 1738년 베르누이 정리가 발표되자 샤틀레는 소멸하지 않는 유체의 보존량으로 도입된 속도의 제곱에 주목한다. 이후 라이프니츠의 다니엘 베르누이, 오일러 등과 적극 교류하던 그녀는 연인 볼테르가 너무 뉴턴파의 입장만 고집하자 볼테르와의 관계가 틀어진다. 그녀는 새로운 연하의 연인을 사귀고 그의 아이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당시는 노산의 사망률이 높아 42세인 그녀는 삶이 얼마 남지 않음을 직감하고 평소 추진하던 뉴턴의 <프린키피아>의 프랑스 어 번역을 서두른다. 그녀는 하루에 3~4시간만 자며 마침내 1749 9월 번역을 마무리하고 3일 뒤 출산했으나 일주일 뒤 사망하고 만다. 이 번역본은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뉴턴 이 진행된 미적분학의 발전과 논쟁을 정리한 수많은 주석이 달렸고, 이러한 그녀의 방대한 프랑스 어판 주석 덕분에 프랑스는 영국을 제치고 수학과 물리학에서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전하다. 샤틀레는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관점이 동일하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조제프루이 라그랑주는 뉴턴의 힘을 시간에 대해 적분하면 운동량이고, 거리에 대해 적분하면 운동 에너지라며, 그녀의 아이디어를 깔끔하게 정리한다. 또한, 보존량이 속도의 제곱이라는 개념은 후에 갈릴레오 좌표 변환이 로렌츠 변환으로 일반화되면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의 유명한 공식 E=mc2의 토대가 된다.


(117)

청동은 섭씨 900도에서 녹지만, 주철은 섭씨 1,300도 이상이 되어야 녹는다. 기원전부터 주철을 녹여 제품을 만들었던 중국과 달리 서양은 16세기까지 이 온도에 도달하지 못했다. 중국에서 시작된 주철 기술로 동아시아에서는 오래전부터 무쇠솥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 차이가 동서양의 식생활을 다르게 만들었다. 즉 동양은 솥으로 밥을 지어 먹었고, 솥이 없던 서양은 화덕에 빵을 구워 먹었다. 인류는 수천 년 전부터 철기 시대에 진입했지만, 서양의 철기 문화는 중세까지만 해도 기껏해야 대장간에서 수백 도로 달군 철을 망치로 두들겨 창검이나 농기구를 만드는 수준이었다. 이러한 기술 격차를 만든 것은 바로 풀무였다.


(145)

1453년 동로마 제국의 멸망은 서양사에서 중세가 종말을 고하고 근대가 시작된 기점이다. 과학 기술의 측면에서는 창과 칼 같은 냉병기에 의존하던 유럽이 대포라는 화기를 앞세운 이슬람에 굴복한 사건이기도 하다. 두 세력 모두 화포를 지니고 있었으나, 오스만 제국은 훨씬 강력한 대포로 1,000년 이상 난공불락의 요새였던 콘스탄티노플의 3중 성벽을 허물어뜨리며 함락시켰다. 이는 단순한 전쟁의 결과를 넘어서, 인류사에서 전쟁의 패러다임이 활과 창검을 이용한 용맹 무쌍희 기사도에서 화포로 상징되는 과학 기술로 이동했다는 의미를 가진다.


(162-163)

자코모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는 마렝고 전투 당시의 로마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1796 1차 나폴레옹 원정으로 로마에 공화정이 수립되지만, 프랑스의 지배력 상실로 공화정은 무너지고 로마의 공화파들은 지하로 숨어 투쟁한다. 이 와중에 알프스를 넘은 나폴레옹이 다시 진격해 오자 로마의 혁명적 공화파가 전면에 나서고 이를 막아내려는 왕당파의 탄압 역시 필사적이었다. 오페라는 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공화파 혁명 지도자와 사랑에 빠진 여인 토스카의 비극적 운명을 담고 있다.


(167)

베토벤과 달리 독일의 상당수 지식은 나폴레옹에 열광했다. 1806년 독일 예나 전투에서 승리한 나폴레옹이 말을 타고 예나에 입성하는 것을 보고, “저기 세계 정신이 온다.”라고 외친 예나 대학교 교수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이 대표적이다. 참고로 칸트에 이어 독일 관념론을 완성한 헤겔은 1801년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칸트는 <일반 자연사와 천체 이론>이라는 논문을 썼고, 헤겔은 <행성들의 궤도에 관하여>를 박사 학위 논문으로 썼다.


(203)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붕괴된 부르봉 왕조는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1814년 부활한다. 하지만 돌아온 왕족들은 혁명 전보다 오히려 더 심하게 망가져 있었고, 이로 인해 왕당파와 공화파의 대립은 보수와 진보의 이름으로 더욱 격렬해졌다. 이러한 대립은 정치뿐 아니라 문화 예술 및 과학 기술 분야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자유주의의 확산을 가져온다. 한때 급진주의자로 나폴레옹을 증오하던 베토벤은 1824년 무려 10여 년간 중단했던 작품 활동을 재개하는데 이때 들고 나온 작품이 바로 영국의 로열 필하모닉 소사이어티가 의뢰한 <합창>이다. 베토벤은 인류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꼽히는 이 교향곡에 반체제 작가였던 프리드리히 실러의 <환희의 송가>를 가사로 붙였다.


(208)

1830 7월 혁명을 그린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빅토르 위고는 이 그림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1832 6월 학생 무장 봉기를 배경으로 <레 미제라블>을 집필했다. 이 그림 오른쪽에 권총을 들고 등장하는 소년은 <레 미제라블>가브로쉬의 모델이 되었다. 메두사 호 사고에서 보듯이 왕정 복고 이후 프랑스의 사회 부조리는 더욱 심해진다. 하지만 기득권 세력이 총동원되어 이 모든 게 볼테르 때문이고, 이 모든 게 루소 때문이라며 오히려 진보 진영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프레임을 만들기 시작한다. 이러한 한심한 작태에 분노한 빅토르 위고는 <레 미제라블>에 이 표현을 가브로쉬가 반어적으로 부르는 노래로 삽입했다. 대략적은 내용은 내가 못생긴 것도 가난한 것도 이게 다 볼테르 때문이고 루소 때문이라는. 가브로쉬는 바리케이드에서 이 노래를 부르며 진압군을 조롱하며 실탄을 구하다 진압군의 총에 사망한다. 1985년 캐머런 매킨토시가 <레 미제라블>을 뮤지컬로 각색하며 이 노래의 역사적 배경을 전혀 알지 못하는 영어권 관객들을 위해 “Little People”이라고 가사의 내용을 바꾸었다. 루브르에서는 들라크루아 작품 옆에 제리코의 <메두사 호의 뗏목>을 나란히 전시하고 있어, 7월 혁명의 배경이 무엇인지 명확히 보여 준다. 한편, 요즘 제일 인기 있는 록그룹 중 하나인 영국의 콜드플레이(Cold Play)의 대표작 <비바 라 비라(Viva la Vida)> 역시 들라크루아의 바로 이 그림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참고로 제목은 인생 만세라는 뜻의 스페인 어로 20세기 멕시코 혁명 화가 프리다 칼로의 마지막 작품에서 따온 것이다.


(229-230)

따라서 데카르트에게는 행성을 움직이는 힘의 전달 매체로 우주를 가득 채운 유체 에테르가 필요했고, 에테르의 소멸하지 않는 운동인 보텍스가 행성 운동의 원천이라고 보았다. 이에 대해 뉴턴은 유체의 점성 저항을 도입하여 유체 유동은 지속하지 못하고 소멸한다고 지적했다. 대신 행성은 에테르의 보텍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중력에 의해 스스로 움직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뉴턴 역시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중력이 작용하려면 물질의 접촉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에테르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더 나아가 자력이나 전기력에도 마찬가지로 힘의 매개체가 있다고 생각했다.


(249)

1848년 전 유럽을 휩쓴 혁명의 열풍은 음악가들에게도 불어닥친다. 바그너는 폭동을 주동하다 수배령이 내려져 기나긴 도피 생활을 시작했으며, 빈의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프랑스 혁명곡 <라 마르세예즈>를 연주하다가 체포되었다. 그의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혁명을 무력으로 진압한 라데츠키 장군을 위해 <라데츠키 행진곡>을 작곡하고, 체포된 아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이러한 아버지의 힘 덕에 풀려난다. 보헤미아의 스메타나는 프라하의 카를 다리에 바리케이드를 쌓고 총을 들고 무장 항쟁을 하다 체포되었으며, 리스트는 고국 헝가리에서 일어난 봉기가 합스부르크 군대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는 사실에 격분하여 피아노곡 <장송>과 교향시 <헝가리아>를 작곡했다.


(267-268)

엥겔스는 마르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같은 시기 맨체스터에서 활동하던 동년배 사업가 줄의 성과에 대해 언급한다. 이들은 줄의 실험이 열, 운동, 전기, 자기 등 다양한 에너지와 힘이 서로 다른 형태로 바뀌기도 하고 상호 전환되기도 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후 엥겔스와 마르크스는 자신들의 경제학에 줄의 성과를 반영하여 노동이 상품이 되고 상품이 화폐가 되고 화폐가 상품으로서의 노동을 구매하는 과정을, 보존량으로서의 가치가 형태를 바꾸어 가며 전환된다는 물리학적 개념으로 분석한다. 이렇게 하여 카를 마르크스의 최초의 경제학 저술인 <정치 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1859년에 출판된다. 이 책이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매진되자 고무된 마르크스는 이 책을 확장하여 새로운 책을 저술한다. 이것이 바로 1867년의 <자본론>이다.


(299)

논란이 불 보듯 뻔한 상황에서 늘 조심스러웠던 다윈은 자신의 진화론에 대해 에볼루션(evolution)’이라는 단어를 되도록 쓰지 않으려고 했다. 아마 사전적 의미가 줄 수 있는 혼동 때문으로 보인다. 라틴어로 두루마리를 펴다라는 의미의 ‘evolvo’에서 유래한 영어 에볼루션은 원래 책을 펼치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이후 콩트가 혁명적 변화를 의미하는 레볼루션과 대비하기 위해 진보(progress)’의 의미로 에볼루션을 사용했고, 이는 발전(development)’의 의미로 이해되어 라마르크의 진화론에 쓰인다. 다윈은 자연 선택에 기초한 자신의 진화론이 라마르크와 구분되기를 원했고, 콩트의 진보와도 거리를 두기 위해 <종의 기원>에는 세대 간의 걸친 변화정도로 표현한다. 다윈은 이처럼 <종의 기원>에서 에볼루션이라는 단어 사용에 주저했지만, 딱 한 번 책의 마지막 문장에 다음과 같이 등장한다. “아주 단순한 시작으로부터 가장 아름답고 경이로운 끊임 없는 형태들이 진화해 왔고,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


(340)

파리 코뮌으로 파리 전체가 내전에 휩싸이며 주요 시설물들이 불타 없어진다. 그림은 파리의 상징 루브르 궁이 불타는 장면이다. 이 화재로 루브르 궁의 서쪽 면이었던 튈르리 궁이 전소되었다. 르네상스 군주 프랑수아 1세가 짓기 시작해 앙리 4세를 거치며 프랑스 최고 권력의 중심이던 이곳이 불타 버리자 프랑스 제3공화국 정부는 루브르 궁의 재건을 검토한다. 하지만 치욕의 역사도 역사의 한 부분이라는 의견에 따라 루브르 궁을 훼손된 채로 그대로 두게 되었다. 현재 루브르 궁은 서쪽 편이 뻥 뚫린 채로 남아 있다. 루브르 궁 맞은 편에 있던 오르세 궁 역시 불타 없어진다. 이 건물에는 프랑스 정부 주요 부서인 재무부와 최고재판소가 있었다. 폐허로 남아 있던 그 자리에 기차역이 세워졌다가, 훗날 미테랑 대통령에 의해 리노베이션이 시작되어 1986년 오르세 미술관으로 개관했다. 한편, 당시 건축 중이었던 오페라 가르니에는 코뮌 군의 시설로 쓰이던 관계로 참화를 피할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1875년 완공된 이 화려한 오페라 극장에서 코뮌 군의 시체가 발견되자 이 건물에 유령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다. 이 소문은 추리 소설 작가 가스통 르루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그는 코뮌 직후의 오페라 가르니에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잘표한다. 이것이 1911년 소설 <오페라의 유령>이다. 그는 소설의 서문에서 축음기를 파묻기 위해 인부들이 오페라 하우스의 바닥을 팠을 때 시신 한 구가 발견되었다. 나는 곧바로 이것이 오페라의 유령의 시신임을 증명할 수 있었다. 이 시신이 파리 코뮌의 희생자 중 한 사람의 것이라고 신문이 아무리 떠들어도 나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가스통 르루의 소설을 뮤지컬로 만든 것이 1986년 런던 여왕 폐하 극장에서 초연된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오페라의 유령>이다.


(345)

마치 기술과 예술의 대결인 듯한 논란이 벌어지자, 에펠은 에펠탑 4면에 자신에게 가장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는 72명의 프랑스 과학 기술자들의 이름을 보란듯이 새겼다. 72명 중 상당수가 열유체 관련 인물들이며,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로는 보르다, 쿨롱, 라그랑주, 라부아지에, 몽주, 라플라스, 드장드르, 프로니, 푸리에, 앙페르, 게이뤼삭, 푸아송, 나비에, 코시, 코리올리, 카르노, 클라페롱, 스트럼, 푸코 등이 있다. 여기서 카르노는 카르노 사이클의 사디 카르노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 라자르 카르노이다. 여기서 보듯 당시 사디 카르노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고, 마찬가지 이유로 에펠의 고향 선배 다르시 역시 여기에 등장하지 않는다.


(376-378)

한편, 1904년 볼츠만에게 충격을 준 세인트루이스 만국 박람회에서는 충격파를 이용한 조리 기구가 출품되어 수십만의 구름 관객을 모았다. 앞서 1894년 미국 의사 하비 켈로그는 자신의 요양 병원 환자들의 아침 식사를 위해 차가운 시리얼인 콘플레이크를 발명하는데, 환자 중에 찰스 윌리엄 포스트라는 사람이 있었다. 포스트는 퇴원하자마자 1897년 콘플레이크 회사를 창업하여 큰 성공을 거둔다. 포스트에 선수를 뺏긴 켈로그는 1906년 창업되었고, 두 기업은 오늘날까지 100년이 넘도록 라이벌이다. 콘플레이크로부터 시작된 시리얼 산업에 1901년 또 다른 형태의 시리얼이 나타났다. 미네소타 출신의 농학자 알렉산더 피어스 앤더슨은 우연히 전분이 담긴 시험관을 가열하다 깨뜨렸다. 순간 굉음과 함께 전분이 순간적으로 팽창되며 눈꽃같이 날렸다. 이것이 충격파를 이용한 최초의 현대적인 뻥튀기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기존의 콘플레이크와는 다른 새로운 방식의 시리얼을 널리 알리기 위해  앤더슨은 1904년 세인트루이스 만국 박람회에 이 뻥튀기 기계를 출품했고, 이것이 수십만의 관객을 끌어모으는 히트 상품이 되었다.


(385-386)

1895년 발생한 드레뒤스 사건으로 프랑스 사회가 둘로 분열한다. 당시 최대 스포츠 신문 <르 벨로>는 무죄를 지지하고, 라이벌 신문 <로토>는 유죄를 주장하며 첨예하게 대립한다. 미슐랭이 주요 주주였던 <로토>는 자신들의 정치적 주장을 강력하게 펼치기 위한 이벤트를 만든다. 이것이 1903년 시작된 자전거 경주 대회 투르 드 프랑스이다. 로토의 바람과 달리 1906년 드레퓌스는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는다. 하지만 투르 드 프랑스는 오늘날까지 세계 최대의 자전거 경주 대회로 이어지고 있다. 한편, 1900년 미슐랭은 자동차 타이어 시장에 진출한다. 하지만 생각보다 자동차 타이어가 많이 팔리지 않자, 타이어를 많이 팔도록 하는 아이디어를 하나 생각한다. 자동차 여행용 안내 책자를 만들어 미슐랭 타이어 교체 방법과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지점들을 슬쩍 집어넣는 것이다, 여기에는 믿을 만한 호텔과 식당을 표시함으로써 여행자들의 주목을 받도록 했다. 이 책이 <미슐랭 가이드>이다.


(391)

1938년 듀폰이 개발한 테플론은 핵무기 제조 등 군사용으로 쓰여 사용이 제한적이었다. 1945년 프랑스의 한 주부는 남편이 낚싯대에 사용하는 테플론에 음식물이 잘 묻지 않는 것을 보고, 남편에게 프라이팬에 테플론을 코팅해 달라고 조른다. 하는 수 없이 남편이 알루미늄에 테플론을 코핑하여 프라이팬으로 사용했더니 음식물이 묻지 않아 편리했다. 뿐만 아니라, 이전의 주철이나 스테인리스 소재 프라이팬보다 훨씬 가벼워져 주부의 손목에 무리가 가지 않아 조리가 편해졌다. 무엇보다 열전달이 뛰어나 예열이 필요 없게 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회사가 테팔(TEFAL)이다 테팔은 테플론(Teflon)과 알루미늄(aluminum)의 합성어로, 여기서부터 조리 기구의 혁명이 이루어졌다.


(395)

이처럼 승승장구하던 록펠러에게 전혀 뜻밖의 대항마가 등장한다. 1879년에 등장한 에디슨 전구가 그것이다. 이후 등유에 의해 주도되던 조명 시장이 급속히 개편된다. 전구는 에디슨이 처음 발명한 것은 아니었지만, 에디슨은 당시로서는 가장 실용적인 필라멘트를 개발해 일상 속으로 급속히 파고들었다. 심지어 조선 왕실조차 1884년 에디슨과 계약을 맺고 궁궐에 전등을 설치한다. 이는 일본 왕실보다도 빠른 것이었다. 이후 전등이 급속히 보급되면서 여러 다른 회사들에서도 전구가 개발되었다. 그중 하나는 카를 마르크스의 이종 사촌이 1891년 네덜란드에 차린 전구 회사로, 이 회사가 필립스이다. 이러한 전구의 발달은 제철 산업에서 출발한 볼츠만의 복사 이론을 막스 플랑크의 흑체 복사 이론으로 발전시켜 마침내 양자 역학을 탄생시킨다. 한편, 전구의 등장으로 크나큰 타격을 받은 P&G는 결국 양초 사업을 포기한다.


(402-403)

하지만 석유 못지않게 유동성이 뛰어난 전기를 이용한 자동차의 개발 역시 만만치 않았다. 오스트리아 황실에 자동차를 공급하던 회사에 취직한 엔지니어 페르디난트 포르셰(Ferdinand Porsche) 1898년 전기 자동차를 개발하여 가솔린과 경쟁한다. 그는 전기 자동차의 가장 큰 문제가 무거운 배터리임을 주목하고, 1901년 세계 최초로 벤츠의 가솔린 기관을 발전기로 채택하여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개발한다. 1902년 포르셰가 군대에 입대하면서 그의 전기 자동차와 하이브리드차 개발은 중단된다. 포르셰는 군대에서 황태자의 운전병으로 일했고, 나중에 이 황태자가 암살되며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다. 한편, 포르셰가 군대에 있는 동안 세계 자동차 시장의 대변화가 미국에서 일어난다.

1903년 에디슨의 전기 회사에서 일하던 헨리 포드가 독립하여 자동차 회사를 설립한다. 아마도 전 직원 테슬라와의 싸움에서 교훈을 얻은 탓인지, 에디슨은 헨리 포드와는 친하게 지냈다. 재미있는 것은, 1903년 대한제국 황실은 포드 자동차를 구입한다. 이는 포드 자동차 회사가 설립된 직후로, 이로 보아 고종과 순종은 상당한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였음을 알 수 있다. 포드 이후 가솔린 자동차의 수요가 비약적으로 증가하며 주류였던 전기 자동차를 추월한다. 포르셰가 군대 복무를 마치고 1906년 현장에 복귀했을 즈음 대세는 이미 가솔린 자동차로 기울고 있었다. 이때 벤츠가 포르셰를 불러 전기 자동차를 포기하도록 설득하고 가솔린 자동차 개발에 투입한다. 이후 포르셰는 가솔린 자동자의 역사에 불멸의 업적들을 남긴다.


(417)

1929년의 대공황으로 모든 산업이 타격을 받지만, 보잉의 항공 우편 사업은 정부와 결탁하여 엄청난 성장을 기록한다. 또한, 보잉은 우편 항공기의 빈자리에 사람을 태워, 일반인도 비행기를 탈 수 있게 했다. 이렇게 항공 승객 사업까지 장악한 보잉은 1910년 에어쇼의 굴욕을 깔끔하게 만회한다. 하지만 아직 항공기는 사고의 위험이 컸고 항공 승객이 늘면서 공포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이에 보잉사는 1930년 승객들의 안전을 위해 25세의 여간호사 엘렌 처치를 객실 승무원으로 깜짝 고용한다. 그녀가 최초의 스튜어디스로, 고객들의 폭발적인 반응으로 큰 인기를 얻자 이후 항공 여객 사업의 표본이 되었다.


(423)

“’명백한 것들은 모두 다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과연 문명이란 무엇인지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의 한 문장이다. 레비스트로스는 배 위에서 일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순간, 보이던 것들이 경계가 불분명해지며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고, 실재한다고 믿던 것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여러 페이지에 걸쳐 생생히 묘사한다. 세계를 움직이는 힘이라 믿었던 유체도 이렇게 사라졌다. 그러나 분명하던 것들이 사라져야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플로지스톤이 사라지며 화학이 탄생했고, 칼로릭이 사라지면 열역학이 탄생했듯이, 마지막 유체 에테르가 사라지며 새로운 과학이 출발한다.


(450)

헤디 라마르(Hedy Lamarr)와 빈 중앙 묘지에 있는 그녀의 묘. 그녀는 오스트리아에서 나치의 집권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유명인 중 하나였다. 그녀는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타고난 끼로 1930년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전신 노출 영화 <엑스터시>에 출현하여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재벌과의 결혼과 망명으로 언론의 조명을 받던 인물이다. 어릴 때부터 과학 기술에 심취했던 그녀는 미국 망명 후 저녁마다 화려한 할리우드의 파티보다는 지식인들과의 토론을 즐겼고, 거기에서 나온 아이디어로 발명하는 것에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나치가 승승장구하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어뢰의 무선 조종을 획기적으로 할 수 있는 아이디어로 특허를 등록한다. 당시 기술로 분노하여 특허는 상용화가 힘들었지만, 1990년대 이후 무선 통신이 발달하며 휴대 전화의 기본이 되었고, 와이파이, 블루투스 등에도 응용되면서, 그녀의 업적이 다시 부각되고 다시 한번 전세계의 찬사를 받았다. 2000년 미국에서 사망한 그녀는 빈 중앙 묘지 볼츠만의 묘 근처에 묻혔다. 그녀의 묘비에는 영화는 순간이지만, 과학 기술은 영원하다라는, 평소 그녀가 늘 하던 말이 새겨져 있다. 한편, 그녀는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폰 트랍 집으로 등장하는 잘츠부르크 저택을 소유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이 영화가 오스트리라와 나치와의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예를 들어, <사운드 오브 뮤직>에 등장하는 <에델바이스>는 오스트리아 전통곡이 아니라 영화 속 창작곡이다.


(485)

안타깝게도 70여 년 전 대학자의 이러한 우려는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2011년 스티브 잡스가 아이패드를 발표하며 애플이 테크놀로지(technology)’와 리버럴 아츠(liberal arts)’의 교차점에 있다고 보여 준 슬라이드 한 장으로 우리나라에 느닷없이 인문학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리버럴 아츠는 그리스 로마에서 노예가 아닌 자유인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 교육에서 출발했다. 이후 중세를 거쳐 근대적인 의미의 대학이 탄생하자, 대학 교육에서 기초 과목으로 정착한 리버럴 아츠는 문법, 논리학, 수사학 등의 인문학 분야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수학, 기하학, 음악, 천문학 등을 포함했다. 대학이 등장하던 시기에 존재하던 교육 기관들은 주로 의학, 법학, 경영 등의 일봉의 직업 학교였기에, 새로이 탄생한 대학은 이 전문 학교들과 차별화하기 위해 리버럴 아츠를 커리큘럼으로 구성했다. 때문에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은 미국 대학의 경우 현대에 와서도 의학, 법학, 경영은 전문대학원 과정으로만 존재한다. 따라서 리버럴 아츠의 근원을 생각하면 인문한 열풍은 우리나라의 독특한 문과 이과의 구분이 촉발한 해프닝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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