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너러블 스쿨보이 1 카를라 3부작 2
존 르 카레 지음, 허진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너러블 스쿨보이>는 카를라 3부작의 두 번째 작품이다. 나는 이 3부작을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스마일리의 사람들>, <오너러블 스쿨보이> 순으로 봤는데, 비슷한 걱정을 하는 사람들에게 말하면, 시간 순서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어떤 책을 먼저 읽어도 당신은 이 마스터피스의 깊이와 우아함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물론 이 3부작이 모두 다 번역 출간된 이 시점에서 굳이 시간 순서를 다르게 읽을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아마 판권이 문제였던 것 같은데 팅커와 오너는 열린책들에서, 스마일리는 랜덤하우스코리아에서 펴냈다. 나는 팅커를 영화로 시작해 정주행을 노렸으나 중간이 비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금단 현상에 괴로워하다 결국 스마일리에 먼저 손을 댔다. 이제라도 퍼즐을 다 맞췄으니 여한이 없다.


<오너러블 스쿨보이>는 카를라가 무너뜨린 영국 정보부를 스마일리가 재건하는 과정을 다룬다. 스마일리의 역습. 그러나 이 단어가 풍기는 역동적 에너지와 다르게 이 늙은 스파이는 천천히, 은밀하게, 적의 숨통을 조여나간다.


이야기는 3부작 중 가장 방대하다. 중국-러시아-홍콩-영국-태국-베트남-기타 국경을 마주한 동남아시아가 배경이다. 씨실과 날실이 너무 복잡하게 얽혀있어 최종 단계의 문양을 추측하기란 불가능하다. 심지어 전말이 드러난 최종장에 이르러서도 그 완성된 무늬가 무엇을 그려낸 것인지 모를 정도다. 바로 이 부분이 존 르 카레의 소설을 단순한 장르를 떠나 위대한 작품으로 만드는 요소이자 독자를 괴롭히는 요인이기도 하다.


행간에는 수많은 의미가 숨겨져 있어 두 번 세 번 곱씹어야 한다. 그 어떤 스파이도 행동의 이유를 시원하게 밝히지 않는다. 존 르 카레의 캐릭터들은 진짜이기 때문이다. 빈 공간을 유추할 수 없는 사람들은 이 속을 알 수 없는 노인의 이야기가 그저 지루한 중얼거림으로 들려 피로를 이기기 어려울 것이다. 취향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존 르 카레, 특히 이 카를라 3부작을 지나친다면 인류 문학사의 아주 중요한 페이지를 찢어버린 거라고 생각해도 좋다.


존 르 카레의 스파이 세계는 언제나 회색지대에 놓여있다. 그들의 활약은 결코 영웅적이지 않다. 삶은 늘 비참하다. 이 비참함을 이겨내는 건 사랑 같은, 촌스럽지만 결코 시들지 않는 인류의 보편 가치인데 이걸 강렬히 추구할수록, 그러니까 온 힘을 다해 인간다워지려고 노력할수록, 처참하게 짓이겨지는 게 이 이야기의 특징이다.


스마일리의 이야기를 거의 모두 읽은 이 시점에서 나는 이 작고 뚱뚱한 노인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수많은 시체 위에 쌓아 올린 정보부, 아니 영국이란 국가는 스마일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인간다워지기 위한 노력을 짓밟아 버리는 체제가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무엇인가? 마키아벨리는 자신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 가치를 저버릴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스마일리가 이 관점에서 그 모든 고독을 짊어진 거라고 믿고 싶다. 그렇다고 용서할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로스 해킹 - 데이터와 실험을 통해 성장하는 서비스를 만드는 방법
양승화 지음 / 위키북스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드랍박스(Dropbox), 이벤트브라이트(Eventbrite), 로그미인(LogMeIn) 서비스의 초기 성장을 이끈 션 앨리스는 '그로스 해킹'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로스 해킹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는 저마다 다른 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혹자는 데이터 분석과 동의어로 생각할 수도, 또 어떤 사람은 마법 같은 저비용 고효율 바이럴 마케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로스 해킹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성장'을 '해킹'하는 것이다. 성장의 이유를 갈기갈기 해체해 가장 확실한 법칙을 찾아내는 일. 이 개념을 좀 더 쉽게 이해하려면 그로스 해킹이 등장한 배경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모든 것은 스마트폰이 시작이었다.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게 된 환경은 수많은 서비스들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열대 우림이었다. 그러나 늘 그렇듯 시장은 성숙화 단계에 접어들고, 경쟁은 치열해지고, 소비자의 니즈는 파편화되어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시대가 도래했다. 더 큰 문제는 이 필요와 욕망이 빠르게 변화한다는 점이다. 인터넷 세상에선 1억 광년의 속도로 시간이 흐른다. 어제의 핫 아이템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구식이 된다. 이러한 환경에서 시장을 조사하고, 수개월, 심하면 몇 년에 걸쳐 기획해 서비스를 출시한다면 마치 구리와 주석을 열심히 연구하여 최고의 청동검을 만들었더니 세상은 이미 철기 시대가 돼버린 것과 유사한 상황을 맞이할 수 있다.


핵심은 속도다. 필수 기능만 정제하고 정제해 MVP(Minimum Viable Product)를 개발한 뒤 사용자의 이용 방식을 추적해 기능을 추가하고 발전시키는 것이다. 기획 단계에서 모든 요소를 고려하여 미래를 준비하는 게 탁월한 재능의 증거였던 시절은 끝났다. 요즘엔 이렇게 일하면 멍청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미래는 근본적으로 예측 불가하기 때문에 최선의 방법은 흐름을 파악하여 빠르게 대응하는 것이다.


새로 만든 서비스의 가입자 수가 마음처럼 늘지 않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전통적인 회사의 전통적인 마케터라면 새로운 프로모션을 기획할 것이다. 가입 시 5천 원 쿠폰 증정! 그러나 아무리 마케팅 비용을 때려 박아도 활성 사용자는 좀처럼 늘어나지 않는다. 이유가 뭘까? 가장 유용한 방법은 데이터를 쪼개 보는 것이다. 앱 설치 수는 늘어나는데 가입자 수가 지지부진하다면 회원 가입 UX를 의심해 볼 여지가 있다. 입력 정보가 너무 많은가? 본인 확인 과정이 너무 어려운가? 가입자 수는 폭증했는데 실제 매출로 이어지지 않았다면 결제 프로세스를 톺아볼 필요가 있다. 카드를 등록하는 방법이 너무 복잡한가? 아니면 선택할 수 있는 결제 수단이 너무 적은가? 이처럼 회원 가입, 결제 등 서비스를 구성하는 프로세스를 서비스 기획에선 퍼널(funnel)이라고 부르는데, 그로스 해킹은 단순하게 말해 이 퍼널들을 최적화하여 이용자의 이탈을 막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책은 이 바닥에서 가장 유명한 프레임워크인 AARRR을 기반으로 그로스 해킹을 설명한다. 사용자를 확보하고(Acquisition), 활성화시키고(Activation), 계속 사용하게 만들고(Retention), 다른 사용자에게 추천하고(Refferal), 최종적으로 매출을 일으킨다(Revenue)! 너무 오래된 개념이라 촌스럽게 생각될 수도 있지만, 사실 서비스의 핵심 지표를 이해하고 발굴하는데 이것만큼 훌륭한 틀이 없다.


주제도 괜찮은데 저자의 설명은 또 얼마나 친절하고 쉬운지. 항상 외서에 의존해왔던 과거의 경험을 비추어볼 때 <그로스 해킹>은 그야말로 어둠을 뚫고 떨어지는 한 줄기 빛과 같은 책이다. 서비스 기획을 처음 시작했거나, 도전해보려는 사람들. 혹은 업계에서 오랜 시간 구르며 그저 시킨 일을 꼼꼼하게 마무리하는 것을 프로페셔널이라 생각했던 사람이라면, 이 책을 통해 진짜 기획이 무엇인지 느껴보기를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토록 풍부하고 단순한 세계 - 실재에 이르는 10가지 근본
프랭크 윌첵 지음, 김희봉 옮김 / 김영사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주의 역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시간과 공간이 단순히 개념적 존재가 아니라 물리적 실재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시공간은 고무처럼 휘고 팽창할 수 있으며 우리는 저마다 그 고유한 공간 속에서 자기만의 시간을 산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


시공간의 비밀을 알게 되면 시계를 거꾸로 돌려 태초의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견디기 힘들다. 태초의 순간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었을까? 사실 이러한 질문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시간과 공간 자체가 없는 상황에서는 무엇이 '존재'한다는 말 자체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의문이 여기서 멈춘다면 좋겠지만 아마 많은 사람의 호기심은 마지막 한걸음을 향해 괴로움 움직임을 계속할 거라 믿는다. 그렇다면 '무'란 무엇인가? 우리는 무를 인지할 수 있을까? 마치 저 신화 속 신들이 행했던 것처럼? 경험의 세계에서는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반으로 무를 인지한다. 무 자체가 아니라 무와 쌍을 이루는 존재의 부재를 통해 간접적으로 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는 개념적 존재에 불과했던 시간과 공간이 물리적 실재로 밝혀진 것처럼, 언젠가는 무의 실체가 밝혀질 수도 있지 않을까? 무라는 현상이 사실은 어떤 입자가 만들어낸 장이라고 생각하는 건 지나친 상상일까? 그렇다면 무는 도대체 어디에 존재하는가. 무라는 것이 존재하는 공간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 시공간을 만드는 무가 있고 그 무가 있는 시공간이 있고, 무가 있는 시공간을 만드는 무가 또 있고... 질문에 질문을 거듭하다 보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바로 이 질문들이 끊임없이 나를 우주로 되돌아오게 만드는 이유 같다. 돌고 도는 이 문제의 최종 답을 찾기 위한 여정. 이 세상은 무에서 출발해 아주 단순한 몇 개의 규칙에 따라 움직였다. 심지어 이 규칙들도 사실은 단 '하나'의 다양한 측면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 힘 중 하나인 중력은 끊임없이 평형을 향해 가려는 우주의 관성에 저항하며 항성과 행성과 그리고 생명을 낳았다. 모든 힘이 사실 하나라면, 왜 그 힘은 동시에 상반되는 결과를 낳는 걸까. 이 기적과 같은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혹자는 초월적 존재를 끌어오지만 현대 과학은 이것이 누군가의 의지가 아니라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일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이토록 풍부하고 단순한 세계>는 시공간의 역사를 설명한다. 두껍지 않지만 독해는 결코 쉽지 않다. 김영사라는 전설적 타이틀을 달고 있지만 번역이 훌륭한 것도 아니다. 각 장은 현상의 해답을 제시할 것처럼 굴다가도 명쾌한 답변 없이 끝나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이 책은 스스로에게 질문할 기회를 준다. 우리는 무엇인가. 어디서 왔는가. 어디로 가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 (리커버)
콜슨 화이트헤드 지음, 황근하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는 1800년대 남부의 노예들을 북부의 자유주나 캐나다로 탈출시켰던 비밀 조직의 이름이다. 야만의 시대에도 늘 선각자는 있기 마련인데, 19세기의 미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는 흑인을 돕는 흑인 조직이 아니었다. 노예제 폐지에 반대하는 수많은 백인과 흑인이 도망친 노예들에게 은신처와 먹을 것을 비밀리에 제공하고 북쪽으로 가는 길을 안내했다.


그들은 역할에 따라 스스로를 ‘역장’ 또는 ‘기관사’로 불렀다. 도망 노예들은 ‘승객’, 은신처는 ‘역’이었다. 비밀 조직답게 실제 철도 용어를 은어로 쓰며 10만 명이 넘는 노예들에게 자유를 선물했다. 노예제와 관련이 있는 한 백인의 분노는 백인과 흑인을 가리지 않았다. 도망친 노예에게는 다시 옛 주인에게 끌려가 본보기를 위해 끔찍한 인체 실험의 대상이 되거나(백인들은 식사를 즐기며 이 스펙터클을 구경했다), 구타를 당한 뒤 목이 걸리거나, 운이 정말 좋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도망을 쳤던 바로 그 중노동으로 복귀하는 미래가 있었다. 백인들은 자기와 같은 피부색을 지녔으나 생각이 좀 달랐던 배신자들에겐 의외로 큰 자비를 베풀었다. 주먹맛을 좀 보여준 뒤, 그 자리에서 목을 매달았다.


콜슨 화이트헤드는 어린 시절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가 실제 땅 밑을 달리는 기차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대단히 실망했다고 한다. 그 허탈감이 바로 이 소설의 탄생 계기다. 화이트헤드는 실제로 땅을 파 선로를 깔고 기관차를 들여와 기차를 달리게 했다. 역장들은 진짜로 역을 지켰고 승객들은 북부로 달리는 이 기차를 따라 자유를 향해 나아갔다.


그러나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는 어둠을 찢고 달리는 기차처럼 경쾌한 소설이 아니다. 콜슨 화이트헤드는 끔찍한 노예사냥이 그냥 옛날 일이 아니라 지금 자신의 현실에서도 끈질기게 살아있는 해충이라는 걸 알리고 싶은 듯 위기와 위기와 고난과 고난과 공포와 공포와 처참과 처참을 짓이긴 이야기 속으로 캐릭터를 몰아붙인다. 중간중간에 끼어든 평화는 곧 다가올 폭력을 강조하기 위한 장식일 뿐이다. 이 소설은 꺼질 듯 말 듯 아주 실낱같은 희망만을 보여주는데, 풀어쓰면 ‘그래도 아직 흑인이 멸종한 것은 아니다.’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그래도 우리 민족의 역사에는 이처럼 멍청한 노예 제도가 없었음에 안심하고, 한편으로는 자부심까지 갖게 됐는데, 따져보면 이처럼 안이한 생각도 없는 것 같다. 이것은 계속해서 파내고 끄집어 이야기하지 않으면 마치 존재한 적도 없었던 일로 느끼는 인간 인식의 한계 아닐까?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1930년대 연방작가프로젝트에 자금을 제공해 노예 출신들의 실화를 수집했다. 이 책의 각 장을 장식하는 노예 수배 광고들은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도서관에 쌓여있는 기록들을 참고한 것이다. 그들은 부끄러운 과거를 기록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기록을 뒤지고 꺼내 이야기를 이어갔기 때문에 그 상처가 얼굴을 가로지르는 흉터가 되어 빛나는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부끄러운 과거를 지치지도 않고 되풀이하는 사람들에게 ‘이제는 좀 그만할 때도 됐지 않았냐’며 피로감을 호소하는 건 어떠한 상황과 이유를 대더라도 정당하지 않다. 뭔가를 바라기 때문에 저런다는 잔인한 인간들의 폄훼는 말할 것도 없다. 역사가 원하는 건 단 한가지 뿐이다. 그저 듣고, 기억하는 것.


어려울 것도 없지 않은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태도가 작품이 될 때
박보나 지음 / 바다출판사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의 제목 <태도가 작품이 될 때>는 1969년 스위스 쿤스트할레 베른에서 열렸던 전시 '태도가 형식이 될 때'에서 가져왔다. 이 전시는 전통적 개념의 예술 형식인 회화나 조각을 단정하게 보여주는 대신에, 비물질적이고 언어가 중심이 되는 작품들을 유기적이고 자유로운 방식으로 선보였다.(p.7~8)


이 전시는 68혁명 직후에 열렸다. 베트남 전쟁을 계기로 반전, 평등, 해방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던 시기였다. 통제와 억압으로 상징되는 기존의 보수적 질서는 모두 거부의 대상이었다. 사람들은 기존 체제와 규칙을 비판적으로 바라봤으며, 뭔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 발버둥 쳤다.


예술계도 다르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는 미술의 관습적인 틀을 거부하는 새로운 작품의 형식과 전시의 형태로 구현되었다. 쉽게 말해 보는 순간 이딴 게 예술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주 전시 대상이었다는 것이다. 얼음을 끌고 멕시코 시티의 길바닥을 걸어 다니거나 한 회에 한 명만 관람할 수 있는 연극 같은 것들. <태도가 작품이 될 때>는 이처럼 지금까지 유지되어온 사회질서와 미술을 다르게 읽는 사람들의 작품들을 소개한다.


같지도 않은 걸 예술이랍시고 펼쳐놓는 주접이 꼴 보기 싫은 사람이라면 부탁이니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와 유심이 봐주기 바란다. 예술이 이러저러한 형태여야 한다는 건 그 누구도 정하지 않은 일이고, 그 누구도 정할 수 없는 일이다. 어떠한 형식, 형태, 또는 행위가 단순히 오래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정당성과 앞으로도 쭉 이어질 권리를 갖는 거라면, 우리는 노예제도와 가부장의 억압, 국가의 폭력이 당연시되던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고 여성이 경제 활동에 참여하며, 경찰의 고문을 규탄하고, 머리를 기르고 짧은 치마를 입는 일들이 모두 비상식적이었다. 세상에 자유와 평화, 평등이 늘어나는 이유는 익숙하고 당연한 것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덕분이다. 그리고 그 비판의 최전선에는 우리가 개수작이라고 부르는 일들을 끈질기게 해내는 예술가들이 서 있다.


이 책은 이상하게만 보이는 현대 예술에 친절한 설명을 덧붙여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의 이해 안으로 끌고 들어온다. 낯선 모습에 의미라는 명찰을 붙여 우리로 하여금 가던 길을 멈추고 그들이 바라보는 관점에서 이 세계를 다시 해석할 기회를 부여한다. 재미있는 예술이 가득하고, 어렵지도 않은, 좋은 책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22-10-09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대 미술에 대한 책이네요. 한깨짱님 글 보고 도서정보에 가서 또 책 내용을 보고 왔어요.
한깨짱님덕분에 좋은 책을 담아갑니다.

한깨짱 2022-10-10 09:56   좋아요 1 | URL
좋은 책 한 권을 알아가셨다면, 그것만큼 고마운 일이 없네요. 선선한 가을 즐독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