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뷰
존 르 카레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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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아버지와 아들의 합작품이다. 2021년 겨울 존 르 카레로 더 잘 알려진 데이브 존 무어 콘웰은 폐렴으로 사망한다. 아들은 아버지와 약속을 하나 했다. 언제쯤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버지는 무조건 약속하라 말했고 아들은 그러겠노라 했다. 당신이 죽고 난 뒤 책상에 미완성 원고가 남아있다면 대신 마무리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실버뷰>는 그렇게 탄생했다.


존 르 카레가 살아생전 이 책을 내지 못한 이유는 뭐였을까? 소설이 신통치 않았을까? 그렇다면 어떻게 이 이야기를 살려낼 수 있을까? 사자의 자식이 고양이일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똑같이 위대한 사자이리란 법은 없다. 아버지가 웬만한 사자가 아니지 않은가!


아들은 초고를 읽고 푹 빠져들었다. 초고 단계의 실수들은 보였다. 하지만 편집을 거치지 않은 원고치고는 깔끔했다. 소설이 전하려는 서사와 정서는 잘 구축되어 있었다. 그런데 왜 책상 서랍에 담아만 둔 걸까? 아버지의 망설임은 어디에 있었을까? 정확히 어느 부분을 고쳐야 아버지가 내딛지 못한 마지막 한 걸음을 완성할 수 있을까?


아들은 <실버뷰>를 다른 존 르 카레 소설이 한 번도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평가한다. 단편적으로나마 첩보를 '실제로' 보여줬다는 것이다. 내가 지금껏 열광해 온 그 명작들은 전부 실제 첩보가 아니었나 보다. 나는 그곳에 항상 진짜 스파이가 있었다고 믿었는데. 가짜가 보기엔 그럴듯해도 저 회색지대의 위대한 진짜들에겐 다른 게 보이나 보다.


<실버뷰>는 느리기로 소문난 존 르 카레 소설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느리다. 40페이지도 채 남지 않았는데 사건은 여전히 안갯속을 기어 다닌다. 이야기를 마무리 지어야 하는 건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보는 내가 초조해진다. 짧은 행간에 마구잡이로 구겨 넣는 건 아니겠지? 가짜는 대작가의 작품을 손에 들고도 이처럼 쓸데없는 걱정을 늘어놓는다.


아버지와 아들의 글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나뉘는지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실버뷰>는 완벽한 소설이다. 아들 닉 콘웰은 이 책의 후기 첫 문장에 '어쩌다 보니 왕을 우러러보는 고양이 신세가 된 기분'이라고 썼다. 그렇다면 나는 고양이를 우러러보는 쥐 정도가 될 것이다. 아주 후하게 쳐준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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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키보드 - 법의학의 성지, 독일 최고의 전문가가 들려주는 강력범죄의 세계
미하엘 초코스 지음, 박병화 옮김 / 에쎄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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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에서 범죄는 스펙터클이다. 경지에 이른 미디어는 폭력과 살인을 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눈길만 줘도 범죄자의 성격이 줄줄이 그려지는 전능한 프로파일러와 손만 대도 단서가 수집되는 천재 법의학자의 이미지가 여기서 탄생했다. <CSI>,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며 이 직업을 꿈꿔보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현실이 편집된 이야기와 얼마나 다른지는 여기에 매료된 모든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수사는 대개 지루하다. 용의 선상에 오른 주변인을 끈질기게 탐문하고 어떨 때는 피해자의 몸에 새겨진 문신 하나를 들고 온 도시의 문신 가게를 찾아가야 한다.


법의학적 단서는 찾아낸 살인 도구가 피해자에게 사용된 것이 맞다는 걸 증언하거나 찾아야 할 도구가 어떤 형태인지를 알려주는 데 그친다. 현장에 뿌려진 핏방울은 용의자가 누구인지보다는 잡혀온 용의자의 진술에 거짓은 없는지 밝힌다. 실제 수사는 이렇게 모인 수많은 단서들을 돼지 같은 인내심으로 하나씩 맞춰 나가는 10만 피스짜리 직소퍼즐 같다. 척, 보는 순간 번쩍하며 사건의 시종이 정렬하는 천재적 추리 쇼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죽음의 키보드>는 딱 그 괴리를 보여주는 책이다. 내용은 실제 독일에서 벌어진 사망, 살인 사건으로 구성된다. 드라마를 기대해선 안 된다. 케이스 스터디로 접근해야 한다. 나는 이런 류의 책들을 주로 글을 쓰기 위한 참고 자료로 활용한다. 자기가 쓰는 글에 살인 사건을 등장시키고 싶다면 작가는 살인에 대해 알아야 한다. 하지만 무슨 수로? 예전엔 취재가 답이었지만 요즘은 이런 책처럼 쉽게 접할 수 있는 자료들이 많다.


<죽음의 키보드>를 통해 알게 된 가장 흥미로운 사실. 법의학의 성지는 CSI의 미국이 아니라 '독일'이었다는 것이다. 독일의 의과 대학에서 직업적 명성을 쌓거나 교수로 고위직에 오르려면 최소 1~2년은 미국의 유명대학에서 경력을 쌓아야 하지만 법의학은 반대다. 법의학에 관한 한 독일은 여전히 국제적 표준 역할을 하며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객원 연구원들이 방문한다고 한다. 무려 16세기! 카를 5세 황제 치하에서 우발적, 고의적 살인 및 상해치사, 유아 살해, 의료 과실 같은 형사 사건에 의료 전문 지식의 도입을 규정하는 것이 '법령'으로 반포된 나라라고 하니, 경험의 양과 질이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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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터리 전쟁 - 리튬부터 2차 전지까지, 누가 새로운 경제 영토를 차지할 것인가
루카스 베드나르스키 지음, 안혜림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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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전기차의 미래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세계에서 가장 큰 자동차 회사인 폭스바겐은 유럽 내 내연기관 차 생산 중단 시기를 2033년에서 2023년으로 앞당겼다. 벤츠도 2023년을 마지막으로 내연기관과 작별한다. 몇몇 업체들이 원자재 수급의 불균형, 높은 전기차 가격, 전기 생산에 따르는 막대한 탄소 배출 등을 따지며 주춤대고는 있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졌다. 세계의 의지는 전기를 향하고 있다.


태양광과 풍력 등의 재생에너지 산업이 무려 반백년에 가까운 업력을 이어왔음에도 여전히 화석연료가 우리의 삶을 압도하는 이유는 화석연료가 가진 독특한 이중성 때문이다. 화석연료는 에너지원이자 에너지를 저장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석유는 뽑아놨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연료 탱크에 가득 채운 휘발유는 자동차가 멈춰있을 땐 에너지를 저장해 뒀다가 달릴 때는 스스로를 태워 동력을 공급한다. 재생 에너지들은 비교적 최근까지도 이런 방식으로 사용할 수 없었다. 리튬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배터리는 재생에너지를 화석 연료처럼 사용할 수 있게 만드는 마지막 퍼즐이다. 언젠가는 거의 모든 에너지가 전기라는 형태로 배터리에 저장되는 시대가 올 것이다. 지금은 자동차만 생각하고 있지만 해운과 항공 운송에 소비되는 석유의 양은 자동차가 먹어치우는 양을 훌쩍 뛰어넘는다. 건물의 에너지 소비 형태도 완전히 바뀔 수 있다. 옥상의 물탱크 옆에 태양광 패널과 거대한 배터리가 늘어선 것을 상상해 보자. 소형화와 무게에 집착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배터리 전환은 오히려 이런 분야에서 더 빠르게 진행될 수 있다. 바야흐로 미래는,


배터리의 것이다.


자, 미래가 배터리의 것이라면 배터리는 누구의 것일까? 막강 배터리 3사를 보유한 우리의 입장에선 당연 한국일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완제품으로만 따져도 아직 점유율 1위는 중국이며 핵심이 되는 리튬, 코발트 등의 원자재에 관해서는 사실상 황무지와 같은 게 한국의 상황이다. 자원은 대부분 남미, 채굴과 가공은 중국 업체들이 꽉 잡고 있다. 아무리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어도 재료 수급이 안되면 도대체 무엇으로 배터리를 만든단 말인가? 압도적 1위 삼성 반도체가 일본 정부의 수출 제한으로 공포에 떨었던 것을 떠올려보자. 일본은 고작 불산과 포토레지스트리 2개만으로 소니와 파나소닉 매출 합계의 2배가 넘는 삼성전자의 목줄을 죌 수 있었다.


<배터리 전쟁>은 배터리 생산에 따르는 밸류 체인들을 하나씩 훑으며 누가 어떻게 이 시장을 장악하려는지 보여준다. 주로 원자재 채굴, 가공 쪽에 무게를 두긴 하지만 전체 산업을 조망하기에는 충분하다. 그런데 곰곰이 이 책을 읽다 보니 정말 이 세계의 동력이 전기로 대체될 수 있는 걸까? 하는 회의가 피어오르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우선 리튬의 양이 문제다. 배터리 생산은 결국 이 지구에 리튬이 얼마나 묻혀있는가에 달려 있다. 전 세계 리튬 매장량은 8,000만 톤. 전기차 한 대에 30~60kg의 리튬이 필요하니 대략 45kg으로 치면 지구의 모든 리튬을 이용해 만들 수 있는 전기차는 대략 17억대 정도다. 이 세계에는 현재 15억대의 자동차가 굴러 다닌다.


리튬이 자동차 배터리에만 쓰이는 게 아닌데 과연 우리가 바라는 배터리 세상이 올 수 있는 걸까? 배터리 성능을 획기적으로 올린다 해도 점점 고갈되는 리튬의 가격 상승 때문에 그 효과는 잠식될 것이다. 저자는 이 문제를 역사에 맡기기로 했단다. 무슨 말이냐고? 내 어릴 적 교과서는 지구에 남은 석유가 50년 뒤 전부 고갈될 것이라 했다. 그로부터 정말 50년이 흘렀다. 지구 문명은 석유의 고갈로 붕괴했고 정부가 사라져 임모탈이 지배하는 야만의 시대가 열렸으며 사람들은 매드 맥스와 퓨리오사가 구원해 주기만을 바라는 세상이 되었다. BOOM!


오늘날 우리는 석유보다 깨끗한 물이 사라질 걸 걱정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아람코 혼자서만 매년 400조 원의 석유를 판다. 리튬도 마찬가지 아닐까? 8,000만 톤이라는 건 지금의 예상일 뿐이다!


이 말에 동의해 배터리에 올인하려는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하겠다. 지구의 모든 리튬을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4,800조 원이다.


지구인은 매년 3,800조 원의 석유를 소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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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분석의 힘 - 그 많은 숫자들은 어떻게 전략이 되는가
이토 고이치로 지음, 전선영 옮김, 이학배 감수 / 인플루엔셜(주)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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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논쟁을 싫어한다. 생각과는 다르게 논쟁은 한쪽이 엉터리 논리를 펼쳐서가 아니라 양쪽이 다 맞는 말을 할 때 성립한다. 연애 상담이라면 그래, 둘 다 옳지 옳아, 하며 하나씩 양보해 타협하라는 중재안을 내놓을 수 있지만 회사 일에서는 이런 식으로 넘길 수 없는 순간이 많다. 중재안으로 팀은 평화를 찾을 수 있겠지만 고객은 그렇지 않다. 이 맛도 저 맛도 아닌, 그 누구도 만족하지 못하는 반푼이 서비스를 누가 좋아하겠는가?


뭔가를 결정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 이런 식으로 행동해선 안 된다. 좋은 게 좋은 거지. 좋게 좋게 가자. 이건 좋은 게 아니라 이기적이고, 무능한 거다. 비용과 수고가 드는 일에는 반드시 결과가 따라야 한다. 꼭 성공을 하라는 말이 아니다. 실패를 하더라도 얻는 게 있어야 한다. 적어도 우리의 판단이 틀렸구나, 다음번에는 절대 이렇게 하지 말아야겠다는 교훈이라도 얻어야 한다. 그러려면 격돌하는 논쟁의 양 끝을 부드럽게 깎아 접붙이는 식으로 결정을 내려선 안 된다. 논리적으로는 둘 다 맞을 수 있지만, 이 세상에 통하는 진짜는 하나뿐이다. 논리와 진짜를 구분하는 도구, 나는 이게 데이터라고 생각한다.


데이터를 분석하는 이유는 그 사이에서 인과관계를 찾기 위해서다. 그러나 B라는 사건을 일으킨 원인이 어디 A 하나뿐이겠는가. 수많은 A의 변형과 심지어 C와 D까지 B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있다. 이 변수들을 효과적으로 제거하거나 그 영향력을 낮추는 법을 소개하는 것이 이 책의 주임무다. 크게는 무작위비교시험(RCT), 회귀불연속설계법(RD디자인), 집군분석, 패널 데이터 분석을 설명한다. 이름은 숨 막힐 정도로 무섭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다. 분량도 적다. 데이터 데이터 하도 떠드니 나도 한번? 의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냥 훌훌 읽을 수 있고 반드시 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도무지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모르는 사람은 어느 정도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데이터 분석의 힘>은 진짜 진짜 쉬운 입문서다. 현업에서 데이터 분석을 어느 정도 해온 사람이라면 건너뛰어도 무방하다. 케이스 스터디도 평범하다. 본격적인 무호흡 다이브, 그전에 유의사항을 알려주는 팸플릿 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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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탄의 세이렌
커트 보니것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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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탄의 세이렌>은 커트 보네거트 주니어가 아직 밥을 벌기 위해 쩔쩔매던 시절에 출간한 두 번째 장편소설이다. 불의의 사고로 숨진 누나의 자식들까지 입양하여 대가족을 이룬 그에게 이름 없는 작가의 삶이란 결코 녹록지 않은 적수였을 것이다. 어디서 글을 쓸 용기가 났는지는 확실치 않다. 확실한 건 이 위대한 용기가 출발한 지 거의 20여 년이 지나서야 그가 성공다운 성공을 맛봤다는 것이다.


짹짹?


이 책에는 이후 커트 보네거트가 끈질기게 추구해 온 테마의 씨앗이 골고루 심겨 있다. 트랄파마도어 행성, 미래를 안다는 것의 의미, 자유의지 같은 것들. 작가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는 킬고어 트라우트는 아직이다.


주니어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이 <제5 도살장>과 <타임퀘이크>의 믹스라는 말에 어느 정도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제5 도살장>에는 전 세계가 똥통에 빠진 경험을 했던 2차 세계대전이 주요한 소재인 것에 비해 <타이탄의 세이렌>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확실히 문학계는 자유의지 같은 추상적 논쟁보다는 고통과 절망, 인간의 잔혹성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는 시도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는 것 같다. 내 보기에 주니어가 작가로서 이름을 얻기 위해 <제5 도살장>까지 기다릴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커트 보네거트에게 이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면 아마 이렇게 답했을 것이다.


그렇게 가는 거지.


들어보라! 미국 로드 아일랜드 주 뉴포트에 사는 윈스턴 나일스 럼포드는 그의 개 카작과 함께 화성을 탐험하던 중 크로노 신클래스틱 인펀디뷸럼을 통과하는 바람에 파동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이후 그와 그의 개는 주기적으로 우주 곳곳에서 물질화하는 신세가 된다.


그러나 이 비극은 지구에서 15만 광년 떨어진 트랄파마도어 행성에서 온 살로를 만나며 완전히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낸다. 살로는 우주선의 부품 고장으로 토성의 위성인 타이탄에 불시착했고 윈스턴은 그곳의 유일한 인간이었다. 살로는 윈스턴을 좋아했다. 그를 친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에게 시간의 비밀과 자신이 가진 기술을 아낌없이 공유한다.


사실상 신이 되어버린 윈스턴은 인간의 역사를 송두리째 다시 쓰기 위해 화성에서 군대를 양성해 우주 전쟁을 벌인다. 그의 목표는 화성군이 철저히 패배하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자신이 창조한 새로운 종교가 지구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의 계획에는 두 인간의 비극이 핵심이었다. 한 명은 성경을 이용한 투자로 세계를 지배할 정도의 부를 이룬 멜러카이 콘스탄트였고 또 하나는 그가 아직 물질로만 존재하던 시절에 결혼한 아내 비어트리스 럼포드였다. 두 사람은 윈스턴의 계획에 따라 완전히 몰락한 뒤 화성으로 납치된다. 지구인이었던 시절의 기억은 모두 삭제됐고 그 공백을 채운건 무선으로 사람을 조종하기 위해 만든 안테나였다.


신을 믿는 사람들은 고난에서조차 신의 의도를 찾으려 노력한다. 그들은 이 불행이 신이 준비한 해피엔딩의 과정일 뿐이라 믿음으로써 스스로를 위로한다. 우리 같은 하찮은 피조물의 입장에선 원하는 대로 믿고 위안을 찾으면 된다. 그러나 신의 입장에선 어떤 생각이 들까? 그러니까 지금까지 지구에서 일어나고 스러졌고 스러져 갈 모든 존재의 필요와 역할을 원자 단위까지 정해놓은 자신의 계획이, 사실은 더 큰 신이 짜 놓은 더 큰 계획의 일부라는 걸 알게 됐을 땐?


<타이탄의 세이렌>을 읽을 때 당신은 멜러카이 콘스탄트나 비어트리스 럼포드에 감정을 이입해선 안 된다. 당신은 이 이야기의 신이자 악당인 윈스턴 나일스 럼포드에 빙의해야 한다. 그래야만 이 소설이 전하는 진정한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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밍유유 2023-08-29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품의 맥락을 짚어주는 좋은 리뷰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한깨짱 2023-08-30 22:10   좋아요 1 | URL
긴 글 읽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얼마전 코맥 매카시까지 가버리고 나니, 제 30대를 송두리째 차지했던 작가들이 이제는 아무도 지구에 남아있지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