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Veritas 10 - 완결
윤준식 외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이 만화가 처음 나왔을 때 나는 두 가지를 생각했다. 첫째는 '간만에 볼만한 무협 만화가 나왔구나'라는 것이었고 둘째는 Oh! Great(오구레 이토)씨의 일본만화 '천상천하의 카피 버전이네'라는 것이었다.  

확실히 이 만화는 '천상천하'에 빚진 것이 많아 보인다. 우선 둘다 학원물이라는 점. 게다가 갈등의 주체가 {(학생회vs비학생회) vs (어른들로 구성된 외부세계)}라는 점 등 세세히 따지고 들면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하지만 '베리타스'가 이 작가의 데뷔작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만화는 꽤 훌륭했다. 특히 그림이 좋았고 '천상천하'처럼 웬지 재는 듯한 무거운 분위기가 없어서 참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이게 겨우 열 권에서 끝이란다. 아무래도 10권이 늦는다 싶어서 조마조마했는데 역시나였다. 한 달에 2페이지라도 계속 연재해 주면 안될까? 나가노 마모루의 파이브 스타 스토리도 5년에 한권 씩 나오는데. 원래 대작이란 독자의 간절한 기다림을 도도히 외면하며 유유히 살아가는거 아닌가.

아직 10권을 보지는 못했지만 안 봐도 뻔하다. 9권의 내용으로 볼 때 한 권으로는 도저히 이야기를 마무리 지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10권이 한 1,000페이지 쯤 되면 어느 정도 수습은 가능하겠지만
보아하니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설마 '협객 붉은매'처럼 2부를 염두에 둔건 아닐테지. (다행히 300 쪽이 넘는 분량이기는 하다)

이 만화의 강점은 한국 전통 문화를 재구성하는 독특한 해석이었다. 예를 들면 남사당 패의 꼭두쇠, 곰뱅이쇠 등이 가진 버나, 살판 등의 기술이 사실은 무술에서 시작한 것으로 백성들이 무기를
소지하거나 무술을 익히는 것을 금했던 지배층의 억압을 피해 교묘히 '놀이'로 탈바꿈 했다는 식이다. 그래서 접신을 시도하여 액땜을 막거나 길흉화복을 점치는 살풀이는 '강신술사'로 남사당 패의 후예는 각자의 기예에 맞는 전통 무예로 되살아 난다.

물론 주류 무공은 이런 전통 무예 보다는 여주인공 '베라'를 중심으로 한 '리 유니온'계 무공이다.  

   

<베라>

'리 유니온'이란 인공 '기(氣)'를 합성하는데 성공한 거대 기업의 무술 연구소다. 이 연구소가 설립한 학교에는 세계 각지에서 뽑혀온 무술 인재들이 다니고 있는데 여기서 무술 인재란 무술을 익힐 재능을 갖춘 자와 이미 전통 무예를 전수 받은 전승자까지 포함된다.  

'일인전승 비인부전'의 금기를 수 천년 동안 지켜왔지만 인공 기라는 달콤한 유혹에 빠진 전통 무예 전승자들은 무공의 비전을 리 유니온에 공개한다. 그리고 이렇게 수집된 전통 무예는 리 유니온의 손에서 혼합되고 보완되어 '리 유니온계'라는 다양한 무공을 탄생시킨다. 물론 이 무공은 리 유니온 학교를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배울 수 있다.

얼핏 봐도 전통 무예 전승자와 리 유니온계 학생들 사이의 갈등이 예상되지 않는가? 예상대로 이 만화의 축은 전통과 현대의 대결이자 지식의 독점과 공개의 대립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만화의 특성상 이런 쟁점이 진지하게 다뤄지지는 않는다.  

이야기 속에서 읽어 낼 수 있는 것이야 다양하겠지만 역시 손에 땀을 쥐고 가슴을 뛰게 만드는 건 주인공 마강룡과 아이들이 '베라'의 학생회와 격돌하는 장면이다. 특히 '신암행어사', '아일랜드'의 양경일, '니나 잘해'의 조운학의 문하생을 포함하여 도합 7년을 수련했다는 김동훈의 작화는 여기서 빛을 발한다.  

 

<마강룡> 

삼국지, 수호지를 읽으며 등장인물을 줄줄이 외우고 장비가 무슨 무기를 썼는지 노지심이 어떤 무공을 사용했는지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베리타스'는 현대판 삼국지이자 수호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개성있는 캐릭터를 즐기는 사람에게 다양한 인물과 기술의 등장은 심장을 쿵쾅거리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베리타스와 삼국지와 수호지는 그런 면에서 쌍둥이다.

만약 작가에게 건강과 시간 그리고 여유가 좀 더 주어졌더라면 '베리타스'는 한국 무협 만화의 고전이 됐을 수도 있다. 겨우 10권으로 마무리된 이 만화에 깊은 애착과 아쉬움이 남는 이유가 이것이다.  

나는 이제 무슨 만화를 기다리며 살아야 하는걸까. 이제 우리 나라의 무협 만화라면 이미 백만년 전에 성장을 멈춰버린 열혈강호 말고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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벡 Beck 34 - 완결
사쿠이시 해럴드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만화의 이해의 저자 스콧 맥클라우드는 만화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각을 오로지 시각을 통해서만 전달하는 매체라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만화가는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고 맛볼 수 있는 것들을 그림으로만 보여줘야 하는 어려움에 부딪히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대단한 작품이라고 칭송하는 것들은 언제나 이런 난제를 멋지게 극복해낸 것들이 아니던가. 예를 들면 미스터 초밥왕 같은 만화 말이다. 비록 지겨울정도로 되풀이되는 구성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쇼타가 만든 초밥을 입에 넣는 심사위원의 모습에서 황홀한 맛의 비밀이 느껴지는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미각은 원래 시각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 보기 좋은 것이 먹기도 좋다는 말을 괜히 하는게 아니다. '맛'을 그리는 만화가 비교적 다양하게 존재하는 것도 증거로 들 수 있다.  

그렇다면 청각은 어떨까?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라는 것을 시각적으로 표현할 방법이 있나? 없다고 생각한다면 여기 굉장한 만화 한권을 소개해 보겠다. 보는 것만으로도 음악이 들리는 만화 해롤드 사쿠이시의 '벡(Beck)'이다.

Beck의 주인공 다나카 유키오는 삶의 목표가 없는 무기력한 중학생이다. 사실 중학생이라면 누구나 그렇지 않은가. 자신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인정해주는 환경은 없고 그렇다고 과감히 세계 밖으로 뛰쳐나갈 수 있는 능력도 용기도 없는 나이. 하지만 우연히 류스케라는 남자를 만나 락 밴드 'Beck'을 결성하면서 유키오의 인생은 평범한 삶의 궤도를 벗어나기 시작한다.

'Beck'을 만나기 전까지 유키오는 그저 노래 부르길 좋아하는 소년에 불과했다. 기타를 치기 시작한 것도 단순히 좋아하는 여자에게 잘보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모든 위대함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사소한 이유. 바로 그렇게 시작한 일에 서서히 몰두하게 되면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의 의미가 과연 무엇인지 어렴풋한 윤곽이 만져진다.  

하지만 아직까진 자신이 얼마나 음악을 사랑하는지 얼마나 큰 재능이 있는지 정확히 깨닫지는 못한다. 그것을 완전하게 만드는 것은 밴드(Band)와의 교감이며 동료의 신뢰다. 서로가 서로의 능력을 믿게 되는 순간 개인의 능력은 날개를 펴고 밴드는 알에서 깨어난다. '이들과 함께하지 않으면 음악을 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시점이 바로 이 때다. 그렇기 때문에 전세계 투어를 시작하는 고물 승합차 안에서도 Beck의 멤버들은 웃을 수 있다. 어떠한 고난과 역경도 이들에게는 장애물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뻔한 얘기라고? 뻔한 얘기 맞다. 그러나 묵직한 삶의 진리는 언제나 뻔한 얘기 속에 담겨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때도 됐지 않은가.  

나는 정대만의 3점슛 장면에서도 그랬지만 다나카 유키오가 노래를 부르는 2 페이지 풀샷 씬에선 언제나 눈물을 흘렸다. 자신을 믿어 주는 동료와 자신을 사랑해주는 관객 앞에서 자신의 가진 모든 능력을 투신하는 작디 작은 고교생(이 때는 고교생으로 진학했다.)의 모습에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면 과연 무엇을 위해 울어야 한단 말인가.

평범한 사람의 노력과 성장에 대한 이야기에는 그저 유치하다고 단정해 버릴 수만은 없는 가슴 찡한 매력이 담겨져 있다. 삶의 의미도 목표도 없던 무기력한 중학생 유키오가 세계인의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부르는 순간 어쩌면 나에게도 반짝반짝 빛나는 재능이 숨어 있지는 않을까하는 기대감과 함께 현실에 안주하려는 자신을 채찍질하는 뭔가가 느껴진다.  

만약 이것을 느낀다면 당신의 삶에는 아직 희망이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영혼은 더 이상 자라지 못할 것이다.

사족.
쓰다보니 줄거리 요약에 적당히 무거운 주제를 껴맞춘 인스탄트 리뷰가 되어 버렸네. 사실 그림, 작법에 대한 얘기를 더 했어야 하는데 글을 다시 쓰기엔 너무 먼길을 와버렸다.  

모든 문화 컨텐츠가 그렇겠지만 역시 이 만화도 직접 봐야만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나는 유키오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 언제나 눈물을 흘렸다고 했는데 이 말은 진짜다. 정말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해롤드 사쿠이시가 그린 힘있는 유키오의 모습에서 나는 언제나 혼신을 다한 그의 노래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살아오면서 적지 않은 만화를 봐왔지만 정말로 노래가 들리는 책은 이 만화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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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판토 해전에서 가장 인상 깊은 인물을 고르라면 나는 주저없이 '울루지 알리'를 꼽겠다. 해전을 장식한 수 많은 인물 중에 하필 해적이라니. 하지만 현실적인 조건으로 보면 도저히 좋아할 수 없는 인물에 시나브로 빠져들고 마는 경우는 살아가면서 수 없이 경험해본 사실 아닌가. 적어도 울루지 알리에겐 기독교 연합함대의 귀하신 귀족들도 투르크의 오만한 군주도 따를 수 없는 확실한 존재감이 있었다. 흔해빠진 귀족들 사이에서 묻혀 버리기엔 그는 너무나도 독특한 배경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우선 그는 알리 파샤, 시로코와 함께 투르크 함대 최고위 지휘관 중 하나였다. 높은 지위에 뭐 그리 특별한게 있냐고? 이 말을 듣는다면 생각이 바뀔 것이다 울루지 알리는, 기독교 노예 출신 이었다.
울루지 알리 아니 조반니 디오지니는 1520년, 남부 이탈리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따라 어부가 된 그는 1536년 알제리 해적 지아페르 라이스에게 붙잡혀 갤리선의 노예가 되는 불운을 겪는다. 당시 베네치아를 제외한 모든 국가에선 갤리선의 노잡이로 적국의 노예를 이용했다.  

노잡이라는 것이 좁고 습한 갑판 밑에서 감독관이 휘두르는 채찍을 견뎌내는 혹독한 직업이다 보니 노예말고는 이런 일을 감당해 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16세에 불과한 우리의 조반니도 얼마나 힘든 일을 겪었을까? 하지만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탈출해 세상을 뒤집어 버리고 싶은 마음은 오히려 이 끔찍한 생활을 견뎌내는 뜨거운 불빛이 됐을 것이다.

그래서 조반니 디오지니에게 코르세어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소년은 결코 그 끈을 놓치지 않았다. 마침내 이슬람으로 개종한 그는 해적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울루지 알리'로 다시 태어났다.

해양국의 전통이 없는 투르크는 주로 해적들이 해군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각자의 근거지에서 해적질로 먹고 살다가도 제국의 부름이 있을 때면 해군으로 출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해적이면서 동시에 총독, 장관 등의 직책을 겸비하는 경우가 많았다. 레판토 해전의 우익 지휘관 시로코도 이집트 총독으로 소개되고 있으나 사실은 유명한 해적이었다.  

울루지 알리도 트리폴리 지역의 해적 투르굿 라이스 휘하에 있었기에 1560년에 투르크 함대의 척후로 복무했다. 5년 뒤 몰타섬 공방전에 참전한 그는 투르크 제독의 눈에 띄었고 때마침 몰락한 투르굿 라이스를 대신해 트리폴리의 장관이 되었다. 그 뒤로는 오직 성공일로였다.

1571년 역사적인 레판토 해전에 울루지 알리가 참전했을 때 고귀한 투르크 제독 알리 파샤의 눈에 울루지 알리란 그저 더러운 이교도 출신의 천한 해적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투르크 함대가 괴멸한 그 해전에서 유일하게 살아 남아 기독교 연합함대의 동진을 막은 것은 고귀한 알리 파샤도 총독 시로코도 아닌 울루지 알리였다.  

폐허가 된 전장을 유유히 빠져나가는 울루지 알리를 봤을 때 기독교 연합함대의 병사들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울루지 알리가 살아있는한 베네치아 해군은 잠들 수 없다'는 트라우마는 이 때부터 생긴 일인지도 모른다.

그 후 울루지 알리는 투르크의 해군을 성공적으로 재건하면서 최고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6세, 기독교 포로로 잡혀와 노잡이가 되야했던 소년이 비로소 지중해의 왕이 되는 순간이었다.  

울루지 알리는 최고 사령관이 된 뒤로도 해적질을 멈추지 않았던 모양이다. 공식적인 집무가 없을 때는 여지없이 배를 타고 나가 기독교 선박을 노략했다는 기록이 있으니까. 그는 분명 해적질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끊임없는 노략질은 자신이 해적임을 자각하려는 평생의 몸부림 이었으리라.  

적의 입장에서 보면 악몽에 가까울 그는 무려 일흔 다섯살이 되어서야 세상을 떠났다. 그것도 여자의 '배' 위에서. 참으로, 해적다운 마무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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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알게 된 사실인데 지중해 시대의 해전은 오늘날 내가 상상하는 그런 싸움이 아니었다. 나는 해전이라고 하면, 적어도 2, 3층 정도 되는 높이에 길이가 200-300미터는 되는 방주급 기함 수십척과 강력한 대포로 무장한 쾌속선 수백대가 초정밀 사격을 가하는 규모와 과학이 어우러진 화려한 경연장 정도로 상상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레판토 해전에 쓰인 배들을 살펴보면 수송용 대형 범선과 함포 사격을 담당했던 갈레아차 등이 포함되어 있지만 역시 주류는 갤리선이었다.  




갤리선은 사람이 직접 노를 저어 움직이는 배다. - 전혀 과학적이지 않다! - 보통 노 1개에 3명의 노잡이가 달라 붙었고 노의 갯수는 배의 규모에 따라 각각 달랐다. 그러나 이 배가 사람의 힘으로 움직인다고 해서 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대양에서의 항해에는 약점이 있을지 몰라도 기동/조종에 관한한 당시 바다에서 갤리선을 따라올 배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갤리선을 이용한 해전은 대충 이런 양상을 보였다.

양쪽 진영의 함대가 서로 마주보고 선다. 전쟁 시작을 알리는 함포 소리와 함께 양 진영의 선박들이 돌진한다. 서로가 가까워졌다고 느낄때쯤 양쪽의 군사들은 서로를 포위하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인다.  

하지만 이리저리 움직이기만 해선 적 선박을 포위할 수 없다. 게다가 이 곳은 뻥 뚫린 바다. 아차 하는 순간에도 곧바로 방향을 틀어 도주해 버리면 쉽게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적 선박의 기동력을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이 갤리선 전투의 핵심이었다. 레판토 해전에서 바르바리고가 이집트 총독 시로코를 무찔렀던 방법도 바로 이것으로 당시 바르바리고는 시로코의 함대를 갯벌 쪽으로 몰아 적 함대를 사실상 고립시킬 수 있었다.

기동력을 잃은 적선에 아군의 배가 충돌하여 엉키고 나면 더 이상 바다는 없다. 멈춰버린 한 무더기의 배들은 거대한 육지가 되는 것이다. 그럼 양쪽의 군사들이 서로 칼을 들고 나와 피비린내 나는 백병전을 벌인다. 당시의 해전이 '바다 위에서 벌이는 육전'으로 불렸던 이유가 이것이다.

그러나 육, 해, 공을 막론하고 새로운 무기의 출현은 언제나 전쟁 양상을 크게 변화시켰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에 최대의 공을 세운 대포가 함대의 주요한 공격 무기로 자리잡게 되자 기나긴 세월 동안 영광을 누리던 갤리선의 지위는 급속도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뒤의 이야기는 앞선 리뷰에서도 말한바 있듯이 에스파냐의 무적함대가 영국 해군에 완파당하면서 마무리 지어진다. 이런 양상은 비슷한 시기, 지구 반대편에 있던 조선에서도 발견되는데 그것은 이순신이 활약한 임진왜란에서였다.  

압도적인 전투병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백병전을 주로 하는 일본의 해군이 '아직 12척의 배를 갖고 있던' 이순신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조선의 판옥선에 영국 해군과 마찬가지로 뛰어난 대포와 그를 활용한 절묘한 전술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르고 흘러 당시의 대포는 이제 고성능 미사일과 항공모함으로 업그레이드 되었다. 그런데 2차 세계 대전 당시 이 미사일과 항공모함을 무력화 시킨 것이 마치 백병전을 연상케하는 카미카제 특공대였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한 사실이다.  

카미카제 특공대에 충격을 받은 미군은 그 때 이후로 상당한 연구를 거듭, 급기야 현대 해양 강국의 기준이 된다는 무적의 방패 이지스함을 등장시키기에 이른다. 그러나 카미카제가 항공모함을 무너뜨린것 처럼 이지스함 또한 되풀이 되는 역사의 희생양이 될 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도 이지스함은 무적이라고? 역사의 진보를 믿는 당신의 마음에 상처주고 싶진 않지만, 카미카제 특공대의 자살 테러에 무너지기 전까지 항공모함이 불리던 이름이 바로 그 '무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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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판토 해전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4
시오노 나나미 지음, 최은석 옮김 / 한길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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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9년 9월 13일, 베네치아 국영조선소에 화재가 발생했을 때 키프로스 섬은 입만 닫으면 먹혀버리고 마는 악어새의 운명에 처해 있었다.

키프로스는 당시 여왕이었던 카트린느 코르나로로부터 매각을 강요, 1489년 베네치아 공화국의 차지가 된 지중해의 섬이다. 그런데 이 섬의 위치를 보면 이슬람 안뜰의 뱀둥지로 불리던 성 요한 기사단의 로도스 섬보다도 투르크 제국에 밀착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야말로 호랑이의 입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셈.  

코 앞에 있는 적들로부터 끊임 없는 위협을 받아야하는 이 섬이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영토에 의지하지 않고 그저 해상 무역만으로 지중해의 최강자가 될 수 있었던 베네치아에게 대 투르크 무역의 전초기지인 키프로스는 그야말로 없어서는 않될 중요한 섬이었던 것이다.  




이는 물론 투르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두 나라의 입장은 좀 달랐다. 투르크의 입장에선 키프로스가 베네치아령임으로 인해 얻는 이득이 자신이 직접 차지하고 있을 때 보다 오히려 재미가 좋았기 때문이다.  

우선 '베네치아령 키프로스'의 존재로 인해 투르크는 동서를 잇는 다양한 문화, 기술과 지속적으로 교류할 수 있었고 서유럽 강대국들과 외교적인 접촉을 시도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베네치아로 
부터 거둬들이는 조공, 통상료등의 물질적 이득은 매우 짭짤했다. 한마디로 '베네치아령 키프로스'는 가만히 앉아 있는 투르크 제국의 발 밑으로 호박 넝쿨째 굴려주는 보물단지였던 것이다.

그러나 종교가 개입하면 언제나 일은 비합리적으로 굴러가기 마련이다. '눈 앞의 섬 키프로스는 제국의 목을 향해 겨눈 칼날과 같다. 존귀한 알라 앞에서 어찌 물질적 이득을 논할셈인가. 섬에서 이교도들을 몰아내고 위대한 알라의 힘을 보여주자' 이것이 투르크 궁정의 주류로 떠오르고 있는 대(對) 유럽 강경파의 논리였고 일관된 주장이었다. 그러니 1569년의 베네치아 국영조선소의 화재 소식이 그들에겐 베네치아를 쓸어 버릴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로 보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1570년 2월 중순 베네치아 시에 투르크 제국의 사신이 도착한다. 그가 전한 술탄의 친서는 간단 명료. '키프로스 반환'. 끝을 모르는 이교도의 오만에 베네치아 의회는 220표 중 199표의 반환 반대로 화답했다. 이리하여 그 찬란했던 역사를 스스로 마무리 지으려는 듯 지중해 최후의 전쟁 레판토 해전의 서막이 올랐다.

레판토 해전은 기독교 연합함대 210척과 투르크의 대함대 300척이 맞붙은 최대의 해전이었다. 여기에는 물론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바다의 총사령관 '미스터 성채' 베니에르, 참모장이자 소설의 주인공인 바르바리고, 이집트 총독 시로코, 해적왕 울루지 알리 등 지중해를 주름잡던 바다의 터프가이들까지 모두 포함된다. 그야말로 바다와 관계된 모든 것들이 투입된 전쟁인 것이다.

전쟁 준비가 한창 무르익을 즈음 기독교연합함대에 무거운 소식이 전해져왔다. 1년여의 농성 끝에 결국 키프로스가 함락된 것이다. 베네치아 병사들은 슬퍼할 새도 없이 막바지 전쟁 준비에 몰두했다. 자신의 칼 앞에 으스러질 이슬람 병사들의 죽음을 다짐하면서.

1571년 10월 7일, 마침내 '500척의 갤리선과 17만명의 인간이 레판토에서 정면으로 격돌'했다. 정오에 시작한 전투는 저녁때 까지 이어졌다. 적장 시로코의 패배가 알려지는가 싶더니 곧이어 바르바리고의 전사 소식도 알려져왔다. 잠시 후 이슬람 우두머리 알리 파샤의 기함이 연합함대의 기함 앞으로 조용히 끌려나왔고 해적왕 울루지 알리는 남겨진 네 척의 배를 이끌고 유유히 도망쳐갔다. 마침내 연합함대의 뱃전에서 승리의 깃발이 나부꼈다.

포획한 적의 갤리 군선 117척, 소형선 20척, 이슬람 전사자 8,000명, 포로 10,000명, 풀려난 기독교 노예 15,000명. 전과는 거대했다. 가시적인 성과 말고도 베네치아가 얻은 이익은 충분했다. 레판토 해전의 승리는 그 후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베네치아에게 귀중한 평화를 안겨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해전의 승리도 역사의 흐름만큼은 막을 수 없었나 보다. 레판토 해전은 갤리선이 활약한 최대 최후의 전쟁이었다. 이것은 정확히 17년 뒤 에스파냐의 무적함대가 대영제국 해군에 완파 당하면서 확실히 증명 됐다. 대형 범선과 함포사격이 주인공이 된 바다위에 더이상 갤리선이 설 자리는 없었던 것이다.  

또 이 전쟁은 십자가를 앞세운 최후의 전쟁이기도 했다. 역사의 무대가 서유럽으로 옮겨지고 너도나도 영토 국가의 대형화를 지향하던 혼란기에 유럽 어느 국가도 지중해 변방의 이교도들에게 눈길을 돌릴 여력은 없었던 것이다.

이로써 콘스탄티 노플 함락으로 마지막 불씨를 살린 지중해 역사는 로도스섬 공방전으로 활활 타오르더니 마침내 레판토의 앞바다에서 그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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