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rnal de Deuil. 26 Octobre 1977 - 15 Septembre 1979 (Paperback)
롤랑 바르트 / Contemporary French Fiction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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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죽음이 하나의 사건이 되는, 다가오고 있는 모험이 되는 때가 있다.그런 때 죽음은 운동을 일으키고, 흥미를 자극하고, 긴장감을 깨우고, 행동을 하게 하고, 마비를 일으킨다.하지만 죽음이 더는 사건이 되지 못하는 그런 알이 온다.그때 죽음은 그저 일정한 시간의 연장,딱딱하고, 뻔하고, 특별한 것도 없고,지루하고,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일 뿐이다.진정한 슬픔은 그 어떤 네러티브의 변증법보다도 강력하다.(-60-)


오늘 - 내내 침울하던 중에 - 오후가 끝나갈 즈음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슬픔의 순간, 너무도 아름다운 헨델의 오페라<세멜레 Semele> 3악장을 듣다가 눈물을 터뜨리다.마망이 말하던 단어 ("나의 롤랑, 나의 롤랑") (-130-)


자기만의 고유한 슬픔을 지시할 수 있는 기호는 없다.
이 슬픔은 절대적 내면성이 완결된 것이다.그러나 모든 현명한 사회들은 슬픔이 어떻게 밖으로 드러나야 하는지를 미리 정해서 코드화했다.
우리의 사회가 안고 있는 패악은 그 사회가 슬픔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165-)


내가 너무도 사랑했었고 너무 사랑하고 있는 이들이, 내가 죽고 또 그들보다 오래 살았던 이들마저 죽고 난 뒤에는, 이 세상에서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말거라면,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나는 죽어서도 계속 디억되어야 할 필요가 있고,내가 살았던 흔적을 세상에 남겨둘 필요가 있을까? 마망에 대한 기억이 아놔 그녀를 알았던 이들이 죽은 뒤에도 세상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면,내가 죽은 뒤에도 기억되어 차갑고도 위선적인 역사의 어딘가에서 계속 살아남게 된다는 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는 나 혼자서만 '기념비'가 되고 싶지는 않다.(-204-)


1년 반 동안 내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잘 아는 건 오로지 나 자신 뿐이다.그동안 나는 당연히 해야만 하는 임무들을 미루기만 하면서, 꼼짝도 않고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은 채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슬픔의 자기 순환적인 길 안에 갇혀 있었다.그러나 나는 언제나 한 권의 책을 씀으로써 하나의 작별을 마무리짓곤 했었다.그것이 나의 방식이었다. -집요함,은밀함- (-241-)


인간은 언젠가 죽음과 마주할 때가 있다.내가 죽거나 아니면,누군가가 죽을 때이다.죽음은 항상 내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일상적이면서, 어색함과 만날 때가 있다.나의 죽음과 자의 가족의 죽음,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죽음을 목도하는 것은 죽음이라는 단어가 3인칭 대명사처럼 남의 일인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경험이다.죽음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가치이며, 언어로 형용하기 힘든 감정이기도 하다.죽음과 슬픔에 대해서 내면 속의 영혼의 울림이라 부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죽음을 목도한 자신의 슬픔과 외로움과 불안은 그 어떠한 언어로서 표현되지 못하고,부유하게 되는 이유였다.사람이 이상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스스로 감정을 삭히면서 살아가는 것은 죽음이 우리 앞에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이질적이면서,응시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인간은 반드시 죽음을 겪어야 하는 존재이고, 그것을 똑바로 보아야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고차원적인 생각과 사회를 추구하면서, 인간은 나의 죽음 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죽음도 챙겨야 하는 순간이 찾아오면서, 인간은 점점 더 죽음에 갖혀버린다.그 죽음의 대상이 내가 직접 본적도 없고,소통해 존적도 없는 사람인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이 책은 나에게 겸손함과 위로와 안타까움을 동시에 체험하게 해주었다. 누군가의 애도 일기는 그것을 쓰는 사람의 기억의 실체이고, 감정이 있으며, 일기를 쓰는 목적이 있다. 그리고 그 끝마무리는 희극이 아닌 비극이 될 수 있다. 그건 이 책을 읽는 것은 좋지만, 스스로 애도 일기를 쓰면 안되는 또다른 이유이다.내 안의 슬픈 감정과 아쉬움이 머물러 있는다는 것은 유쾌하지 못하고,거기에서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면서, 삶에 대한 의미조차 내려놓게 된다.그 어떤 노력도 죽음앞에선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게 되면,우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마망의 죽음으로 인해 거기에 속박되는 삶을 살았던 롤랑바르트의 삶이 마망 알리에트 벵제의 삶을 따라가게 된 것은 불가피한 선택과 결정이었다.견디지 못하고, 넘어서지 못하는 것,그것이 그의 마지막 저작물 ,애도 일기>에 기록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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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de deuil : 26 octobre 1977 - 15 septembre 1979 (Diary)
롤랑 바르트 / POINTS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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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죽음이 하나의 사건이 되는, 다가오고 있는 모험이 되는 때가 있다.그런 때 죽음은 운동을 일으키고, 흥미를 자극하고, 긴장감을 깨우고, 행동을 하게 하고, 마비를 일으킨다.하지만 죽음이 더는 사건이 되지 못하는 그런 알이 온다.그때 죽음은 그저 일정한 시간의 연장,딱딱하고, 뻔하고, 특별한 것도 없고,지루하고,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일 뿐이다.진정한 슬픔은 그 어떤 네러티브의 변증법보다도 강력하다.(-60-)


오늘 - 내내 침울하던 중에 - 오후가 끝나갈 즈음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슬픔의 순간, 너무도 아름다운 헨델의 오페라<세멜레 Semele> 3악장을 듣다가 눈물을 터뜨리다.마망이 말하던 단어 ("나의 롤랑, 나의 롤랑") (-130-)


자기만의 고유한 슬픔을 지시할 수 있는 기호는 없다.
이 슬픔은 절대적 내면성이 완결된 것이다.그러나 모든 현명한 사회들은 슬픔이 어떻게 밖으로 드러나야 하는지를 미리 정해서 코드화했다.
우리의 사회가 안고 있는 패악은 그 사회가 슬픔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165-)


내가 너무도 사랑했었고 너무 사랑하고 있는 이들이, 내가 죽고 또 그들보다 오래 살았던 이들마저 죽고 난 뒤에는, 이 세상에서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말거라면,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나는 죽어서도 계속 디억되어야 할 필요가 있고,내가 살았던 흔적을 세상에 남겨둘 필요가 있을까? 마망에 대한 기억이 아놔 그녀를 알았던 이들이 죽은 뒤에도 세상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면,내가 죽은 뒤에도 기억되어 차갑고도 위선적인 역사의 어딘가에서 계속 살아남게 된다는 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는 나 혼자서만 '기념비'가 되고 싶지는 않다.(-204-)


1년 반 동안 내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잘 아는 건 오로지 나 자신 뿐이다.그동안 나는 당연히 해야만 하는 임무들을 미루기만 하면서, 꼼짝도 않고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은 채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슬픔의 자기 순환적인 길 안에 갇혀 있었다.그러나 나는 언제나 한 권의 책을 씀으로써 하나의 작별을 마무리짓곤 했었다.그것이 나의 방식이었다. -집요함,은밀함- (-241-)


인간은 언젠가 죽음과 마주할 때가 있다.내가 죽거나 아니면,누군가가 죽을 때이다.죽음은 항상 내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일상적이면서, 어색함과 만날 때가 있다.나의 죽음과 자의 가족의 죽음,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죽음을 목도하는 것은 죽음이라는 단어가 3인칭 대명사처럼 남의 일인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경험이다.죽음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가치이며, 언어로 형용하기 힘든 감정이기도 하다.죽음과 슬픔에 대해서 내면 속의 영혼의 울림이라 부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죽음을 목도한 자신의 슬픔과 외로움과 불안은 그 어떠한 언어로서 표현되지 못하고,부유하게 되는 이유였다.사람이 이상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스스로 감정을 삭히면서 살아가는 것은 죽음이 우리 앞에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이질적이면서,응시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인간은 반드시 죽음을 겪어야 하는 존재이고, 그것을 똑바로 보아야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고차원적인 생각과 사회를 추구하면서, 인간은 나의 죽음 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죽음도 챙겨야 하는 순간이 찾아오면서, 인간은 점점 더 죽음에 갖혀버린다.그 죽음의 대상이 내가 직접 본적도 없고,소통해 존적도 없는 사람인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이 책은 나에게 겸손함과 위로와 안타까움을 동시에 체험하게 해주었다. 누군가의 애도 일기는 그것을 쓰는 사람의 기억의 실체이고, 감정이 있으며, 일기를 쓰는 목적이 있다. 그리고 그 끝마무리는 희극이 아닌 비극이 될 수 있다. 그건 이 책을 읽는 것은 좋지만, 스스로 애도 일기를 쓰면 안되는 또다른 이유이다.내 안의 슬픈 감정과 아쉬움이 머물러 있는다는 것은 유쾌하지 못하고,거기에서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면서, 삶에 대한 의미조차 내려놓게 된다.그 어떤 노력도 죽음앞에선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게 되면,우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마망의 죽음으로 인해 거기에 속박되는 삶을 살았던 롤랑바르트의 삶이 마망 알리에트 벵제의 삶을 따라가게 된 것은 불가피한 선택과 결정이었다.견디지 못하고, 넘어서지 못하는 것,그것이 그의 마지막 저작물 ,애도 일기>에 기록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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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de deuil. Tagebuch der Trauer, franzosische Ausgabe (Paperback) - 26 octobre 1977 - 15 septembre 1979
롤랑 바르트 / Editions du Seuil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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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하나의 사건이 되는, 다가오고 있는 모험이 되는 때가 있다.그런 때 죽음은 운동을 일으키고, 흥미를 자극하고, 긴장감을 깨우고, 행동을 하게 하고, 마비를 일으킨다.하지만 죽음이 더는 사건이 되지 못하는 그런 알이 온다.그때 죽음은 그저 일정한 시간의 연장,딱딱하고, 뻔하고, 특별한 것도 없고,지루하고,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일 뿐이다.진정한 슬픔은 그 어떤 네러티브의 변증법보다도 강력하다.(-60-)


오늘 - 내내 침울하던 중에 - 오후가 끝나갈 즈음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슬픔의 순간, 너무도 아름다운 헨델의 오페라<세멜레 Semele> 3악장을 듣다가 눈물을 터뜨리다.마망이 말하던 단어 ("나의 롤랑, 나의 롤랑") (-130-)


자기만의 고유한 슬픔을 지시할 수 있는 기호는 없다.
이 슬픔은 절대적 내면성이 완결된 것이다.그러나 모든 현명한 사회들은 슬픔이 어떻게 밖으로 드러나야 하는지를 미리 정해서 코드화했다.
우리의 사회가 안고 있는 패악은 그 사회가 슬픔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165-)


내가 너무도 사랑했었고 너무 사랑하고 있는 이들이, 내가 죽고 또 그들보다 오래 살았던 이들마저 죽고 난 뒤에는, 이 세상에서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말거라면,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나는 죽어서도 계속 디억되어야 할 필요가 있고,내가 살았던 흔적을 세상에 남겨둘 필요가 있을까? 마망에 대한 기억이 아놔 그녀를 알았던 이들이 죽은 뒤에도 세상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면,내가 죽은 뒤에도 기억되어 차갑고도 위선적인 역사의 어딘가에서 계속 살아남게 된다는 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는 나 혼자서만 '기념비'가 되고 싶지는 않다.(-204-)


1년 반 동안 내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잘 아는 건 오로지 나 자신 뿐이다.그동안 나는 당연히 해야만 하는 임무들을 미루기만 하면서, 꼼짝도 않고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은 채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슬픔의 자기 순환적인 길 안에 갇혀 있었다.그러나 나는 언제나 한 권의 책을 씀으로써 하나의 작별을 마무리짓곤 했었다.그것이 나의 방식이었다. -집요함,은밀함- (-241-)


인간은 언젠가 죽음과 마주할 때가 있다.내가 죽거나 아니면,누군가가 죽을 때이다.죽음은 항상 내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일상적이면서, 어색함과 만날 때가 있다.나의 죽음과 자의 가족의 죽음,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죽음을 목도하는 것은 죽음이라는 단어가 3인칭 대명사처럼 남의 일인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경험이다.죽음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가치이며, 언어로 형용하기 힘든 감정이기도 하다.죽음과 슬픔에 대해서 내면 속의 영혼의 울림이라 부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죽음을 목도한 자신의 슬픔과 외로움과 불안은 그 어떠한 언어로서 표현되지 못하고,부유하게 되는 이유였다.사람이 이상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스스로 감정을 삭히면서 살아가는 것은 죽음이 우리 앞에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이질적이면서,응시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인간은 반드시 죽음을 겪어야 하는 존재이고, 그것을 똑바로 보아야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고차원적인 생각과 사회를 추구하면서, 인간은 나의 죽음 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죽음도 챙겨야 하는 순간이 찾아오면서, 인간은 점점 더 죽음에 갖혀버린다.그 죽음의 대상이 내가 직접 본적도 없고,소통해 존적도 없는 사람인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이 책은 나에게 겸손함과 위로와 안타까움을 동시에 체험하게 해주었다. 누군가의 애도 일기는 그것을 쓰는 사람의 기억의 실체이고, 감정이 있으며, 일기를 쓰는 목적이 있다. 그리고 그 끝마무리는 희극이 아닌 비극이 될 수 있다. 그건 이 책을 읽는 것은 좋지만, 스스로 애도 일기를 쓰면 안되는 또다른 이유이다.내 안의 슬픈 감정과 아쉬움이 머물러 있는다는 것은 유쾌하지 못하고,거기에서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면서, 삶에 대한 의미조차 내려놓게 된다.그 어떤 노력도 죽음앞에선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게 되면,우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마망의 죽음으로 인해 거기에 속박되는 삶을 살았던 롤랑바르트의 삶이 마망 알리에트 벵제의 삶을 따라가게 된 것은 불가피한 선택과 결정이었다.견디지 못하고, 넘어서지 못하는 것,그것이 그의 마지막 저작물 ,애도 일기>에 기록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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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 일기 (리커버 에디션)
롤랑 바르트 지음, 김진영 옮김 / 걷는나무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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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하나의 사건이 되는, 다가오고 있는 모험이 되는 때가 있다.그런 때 죽음은 운동을 일으키고, 흥미를 자극하고, 긴장감을 깨우고, 행동을 하게 하고, 마비를 일으킨다.하지만 죽음이 더는 사건이 되지 못하는 그런 알이 온다.그때 죽음은 그저 일정한 시간의 연장,딱딱하고, 뻔하고, 특별한 것도 없고,지루하고,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일 뿐이다.진정한 슬픔은 그 어떤 네러티브의 변증법보다도 강력하다.(-60-)


오늘 - 내내 침울하던 중에 - 오후가 끝나갈 즈음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슬픔의 순간, 너무도 아름다운 헨델의 오페라<세멜레 Semele> 3악장을 듣다가 눈물을 터뜨리다.마망이 말하던 단어 ("나의 롤랑, 나의 롤랑") (-130-)


자기만의 고유한 슬픔을 지시할 수 있는 기호는 없다.
이 슬픔은 절대적 내면성이 완결된 것이다.그러나 모든 현명한 사회들은 슬픔이 어떻게 밖으로 드러나야 하는지를 미리 정해서 코드화했다.
우리의 사회가 안고 있는 패악은 그 사회가 슬픔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165-)


내가 너무도 사랑했었고 너무 사랑하고 있는 이들이, 내가 죽고 또 그들보다 오래 살았던 이들마저 죽고 난 뒤에는, 이 세상에서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말거라면,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나는 죽어서도 계속 디억되어야 할 필요가 있고,내가 살았던 흔적을 세상에 남겨둘 필요가 있을까? 마망에 대한 기억이 아놔 그녀를 알았던 이들이 죽은 뒤에도 세상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면,내가 죽은 뒤에도 기억되어 차갑고도 위선적인 역사의 어딘가에서 계속 살아남게 된다는 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는 나 혼자서만 '기념비'가 되고 싶지는 않다.(-204-)


1년 반 동안 내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잘 아는 건 오로지 나 자신 뿐이다.그동안 나는 당연히 해야만 하는 임무들을 미루기만 하면서, 꼼짝도 않고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은 채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슬픔의 자기 순환적인 길 안에 갇혀 있었다.그러나 나는 언제나 한 권의 책을 씀으로써 하나의 작별을 마무리짓곤 했었다.그것이 나의 방식이었다. -집요함,은밀함- (-241-)


인간은 언젠가 죽음과 마주할 때가 있다.내가 죽거나 아니면,누군가가 죽을 때이다.죽음은 항상 내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일상적이면서, 어색함과 만날 때가 있다.나의 죽음과 자의 가족의 죽음,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죽음을 목도하는 것은 죽음이라는 단어가 3인칭 대명사처럼 남의 일인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경험이다.죽음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가치이며, 언어로 형용하기 힘든 감정이기도 하다.죽음과 슬픔에 대해서 내면 속의 영혼의 울림이라 부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죽음을 목도한 자신의 슬픔과 외로움과 불안은 그 어떠한 언어로서 표현되지 못하고,부유하게 되는 이유였다.사람이 이상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스스로 감정을 삭히면서 살아가는 것은 죽음이 우리 앞에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이질적이면서,응시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인간은 반드시 죽음을 겪어야 하는 존재이고, 그것을 똑바로 보아야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고차원적인 생각과 사회를 추구하면서, 인간은 나의 죽음 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죽음도 챙겨야 하는 순간이 찾아오면서, 인간은 점점 더 죽음에 갖혀버린다.그 죽음의 대상이 내가 직접 본적도 없고,소통해 존적도 없는 사람인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이 책은 나에게 겸손함과 위로와 안타까움을 동시에 체험하게 해주었다. 누군가의 애도 일기는 그것을 쓰는 사람의 기억의 실체이고, 감정이 있으며, 일기를 쓰는 목적이 있다. 그리고 그 끝마무리는 희극이 아닌 비극이 될 수 있다. 그건 이 책을 읽는 것은 좋지만, 스스로 애도 일기를 쓰면 안되는 또다른 이유이다.내 안의 슬픈 감정과 아쉬움이 머물러 있는다는 것은 유쾌하지 못하고,거기에서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면서, 삶에 대한 의미조차 내려놓게 된다.그 어떤 노력도 죽음앞에선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게 되면,우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마망의 죽음으로 인해 거기에 속박되는 삶을 살았던 롤랑바르트의 삶이 마망 알리에트 벵제의 삶을 따라가게 된 것은 불가피한 선택과 결정이었다.견디지 못하고, 넘어서지 못하는 것,그것이 그의 마지막 저작물 ,애도 일기>에 기록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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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네 산골 일기 - 청년사 풀꽃문고 5
송성일 지음, 류준화 그림 / 청년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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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언덕이 '웃갓재'고 ,저쪽 제일 깊은 골짜기가 '호장골' ,저쪽이 '밤골',그리고 저기가 '쑥디',음....저 아래 마을 입구가 '비나리 거리'고 저쪽은 '참샘골'이야.그리고 저기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집이 마을회관이고, 우리 집은 저기 '큰골' 웃마(웃마을)에 있어. 자 ,이제 우리가 살 집을 빨리 가서 보자." (-23-)


"니 어데서 왔는데?"
"멧 학년이고?"
"니 우리 동네에서 살라꼬 왔나?"
"니 혼자가? 언니나 동생도 없나?"
"너거 집 저 웃마에 있는 새집 맞제?"
친구들이 나에게 몰려들어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사투리로 갑자기 여러가지를 물었습니다. (-29-)


"고추를 심을라 카나 말라 카나,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 인자 밭으로 나오면 우짜노?" (-56-)


"아이고 ,저 논밭을 다 아떡하누?"
"안 그래도 농사지어 밥 먹기 힘든데 가뭄에, 홍수에, 태풍에.....참 하늘도 무심하시지.." 
아빠는 뉴스를 보다가도 비가 얼마나 오는지 보러 비바람 치는 마당에 계속해서 나갔다 들어왓습니다.집 앞 개울에 물이 얼마나 차올랐는지도 확인했습니다. (-91-)


"아빠는 농사지어서 망하지 않을 자신 있어?"
"응?"
나의 질문에 당황했는지 아빠는 잠시 대답할 말을 찾아 우물쭈물햇습니다. 하지만 금방 자신만만한 표정을 되찾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화야, 아빠가 최선을 다해서 우리 가족 밥 먹고 살 수 있게 할 거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 알았어?" (-137-)


"비나리 주민 여러분 이장이시더, 오늘 영민이 할아버지 상여가 아침 여덟 시에 나갈 예정이오니 주민 여러분께서는 아침 여섯 시 삼십분까지 돌아가신 어른 댁으로 모여 주이소,아,아....그라고 마을 청장년은 새마을 지도자하고 곳집에 가시갔고, 상여 좀 실어 오시면 고맙겠니더, 다시 한 번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152-)


"아빠 , 그럼 동제는 또 뭐야?"
"화야, 동제란 말이다,정월 대보름날 저녁에 당나무 아래서 지내는 제사를 말하는 거야."
"근데 당나무가 뭐야?"
"아이고 답답해라.화야, 마을 입구에 서 있는 큰 느티나무도 모르니? 그게 바로 당나무야." 
"그게 당나무인 줄은 아는데 왜 당나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거야."
아빠는 나의 계속되는 질문에 답답해 못 참겠다는 표정을 짓고 침을 튀겨 가며 말했습니다.
"화야, 당나무는 마을을 지켜 주는 마을 수호신이 깃든 나무를 말하는 거란다." (-173-)


내가 아는 사람이 쓴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의미가 다르다.책은 그 사람의 삶이 녹여져 있고, 그 삶의 경험이 녹여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친숙함과 그 사람의 익숙한 말과 언어와 마주하게 된다.특히 이 책은 그 분의 목소리를 느낄 수 있고, 상상하면서 ,감정을 상상하면서 읽어가게 되었다.


서울대 철학과 출신이었던 송성일님은 도시에서의 정해진 스케줄의 삶을 접고 농촌으로 귀농하게 되었다.도시의 삶과 농촌의 삶이 다르다는 것은 학교에서 또래 친구들의 질문에서 정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나와 남이 정확하게 구별짓는 도시의 삶과 달리 사촌에 팔촌까지 알고, 숟가락 숫자까지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 농촌의 삶이며,그들의 삶의 원칙과 절차이기도 하다.그래서 농촌에서의 삶이 익숙하지 못하고, 자꾸만 농촌 인구가 줄어드는 이유이다. 이러한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익숙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이질적으로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일찌감치 농촌에 정착하게 되었다.사회적 인프라가 열악한 곳에, 문화를 심었으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과 사회적 안목을 채워 나가게 된다.지역 주민들의 시큰둥한 모습들이 조금씩 조금씩 바뀌게 된 이유는 저자 송성일님의 남다른 노력 때문이다. 더군다나 오지 중의 오지 봉화군 명호면 비나리 마을에 경북에 없는 유일한 미술관이 있으며, 그 미술관을 비나리 미술관이라 부르고 있다.이 곳에 비나리 미술관이 있는 이유는 송성일님의 아내이자 이 책의 그림과 삽화를 그린 아내 류준화 때문이다. 시골에 살면서도 자신의 에술적인 감각을 내려놓지 않겠다는 의지가 반영되고 있으며, 농촌에 살면서도 예술적인 감각을 잃지 않는 그러한 모습들이 잘 드러나고 있다.


그렇게 농촌은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농촌에 대한 편견이 지워지고 있었으며, 힐링의 공간, 열악한 농촌 환경에 대한 변화 모색,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도농복합적인 농촌의 모습을 갖춰 나가게 되었다.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곳, 그 과정에서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였으며, 도시에서 경험했던 것들, 자신의 직장 경험들을 도시의 사회적인 변화로 엮어 나가게 된다. 즉 농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가치를 잃어버리지 않고 보존하면서, 자신의 남다른 삶을 비나리 마을에 뿌리 내리게 되었으며, 마을 사람들과의 삶에 있어서 동화되는 삶을 추구하게 된다.남다른 삶을 살아가지만, 지역 사회에 이바지 될 수 있는 삶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였으며, 지역 발전, 잘사는 농촌이 되기 위해 애쓰는 그러한 모습들이 이 책에 기록되어 있으며, 청년 농민으로서,일꾼이 되기 위한 과정들이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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