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오월의 책은 그저 우연의 연속적 선택으로 이루어졌다. 아마 진실을 왜곡하는 인간들에 대한 울화 때문이었던 싶다. 이러한 심상이 만연한 진화이론의 남용에 의한 편협과 왜곡, 의도적인 선전물들의 난무를 분별하는 책을 찾게 했던 모양이다. 다윈으로부터 시작된 진화이론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센스 앤 넌센스를 읽게 되었다. 그러다 신간 안내 도서에서 와일드 후드라는 세상의 모든 생물체의 청년기와 인간의 행동,심리를 비교하여 성장기의 지난한 진화론적 역사 이야기를 재빨리 구매했다"직관을 거스르고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며 세상의 경험으로 진입하는 성장기의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들의 이야기"에 몰입하게 되기도 했다. 두 책은 전혀 계획된 독서의 목록이 아니었음에도 삶에 끼어들었다.

 

칼 마르크스의 자본 1권의 영역본 Capital은 순전히 대조 읽기와 참조용으로 구입했다. 의미가 모호할 때 이 영역본은 유용하게 활용될 터이다. ‘파울 첼란의 시집은 조르조 아감벤 불과 글에 영향을 받은 읽기이다. 독일어를 말하며 성장했지만 독일인들로부터 배제된 유대인의 그 철저한 소외와 넘어설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벽의 부당함을 일생 고뇌했던 시인의 글쓰기인 신비에 대한 매혹 때문이었다. 아마 이와 유사한 맥락이 나를 끌어당겼던 것 같은데, ‘로베르트 무질 사랑의 역사에 수록된 생전의 유고를 구성하는 작품들 때문이다. 이 세계의 구조를 파악하는 독자적 논리인 비이성적 영역과 비논리적 대담성을 바탕으로 하는 그의 작품에 대한 호감으로 인한 것이었다. 지금 그의 작품들을 읽으며 나는 공명하려 애쓰고 있다. 오스트리아에서 출생하고 1차 대전 독일군 장교로 참전했음에도 나치에 의해 금서작가로 몰리고 스위스에 도피하여 곤궁한 삶을 살다간 한 인간에 대한 연민이 들끓는다.

 

한국 문학들은 사실 완전한 임의적 선택이랄 수 있다. 요즘 국내 문학의 획일화된 분위기에서 조금은 멀어지고 싶어서이기도 하지만 다만 외면 할 수 없는 몇몇 작품들에 독자의 작은 성원을 보내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전혜진 작가의 바늘 끝에 사람이는 주류 사회가 은폐하거나 외면한 한국사회의 불편한 진실들이 빼곡한 소설집이다. 이 사회의 도덕적 타락을 다시 자성하는 읽기가 될 것 같다. 박문영 작가의 허니비는 버려진 지구에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인 미래 사회를 축으로 인간에 대해 생각게 하는 작품일 것 같다. 내 의지가 가닿기를 기다리고 있는 소설이다. 여행자, 빛과 영원의 시계방은 유행과 광고의 현혹으로 내 수중에 들어 온 책들이다. 아마 무더위가 찾아오면 읽게 될 줄 모르겠다.

 

로제 카이와의 놀이와 인간은 내게 어떤 의도를 남겼는데, 놀이를 사회학으로 연결 짓는 이 위대한 저작은 놀이와 정치의 상호관계성에 대한 연구 가능성을 던져주었다. 사회와 문화 비판의 중요한 논거로서 높은 가치가 느껴진다. 요한 하우징거의 호모 루덴스를 완결 짓는 역사적 걸작일 것이다. 이 두 저술 이후에 이렇다 할 후속 연구가 이어지지 않은 까닭은 지식 엘리트라 자처하는 이들이 회피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늠하게까지 한다.

 

기득권의 그 집요한 보전 욕구가 학문에는 순수성이란 애초 없음을 확신케 한다. 무질이 학문을 경멸하고 문학에 천착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프랑스사를 구입하게 된 동기는 막연하게 18~19세기의 프랑스 혁명 전후의 그네들 인식을 조망하기 위한 대강의 또 다른 판본에 대한 기대였다. 사실 이러한 의도는 충족되지 못했다. 책의 선택이 매번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런 실패로 인해 읽게 될 일 없는 책들을 읽게 된다. 우연, 즉 인간이 논리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에 이름을 붙인 우연에 휘둘리는 것이 인간사인 모양이다. 이제 6월의 도서를 준비해야 할 시간이다. 시간, 계절이 쏜살같이 지나가버리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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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 2023-05-24 09: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한국문학을 자꾸 외면하게 됩니다.
파울 첼란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네요.
늘 감탄하며 리뷰 읽고 있습니다. 유월의 우연도 기대할게요.

필리아 2023-05-24 10:30   좋아요 1 | URL
네, 저는 요즘 파울첼란,카프카,무질에 꽂혀있어요. 이들의 열린결말, 비의적 글쓰기에 매료되어 있어요. 댓글 감사드립니다, 초원님~
 


내 믿음을 사로잡은 문장을 요즘 빈번하게 떠올리게 되는데, 현시(顯示)적 욕망에만 매달리는 가족주의 근간의 위기를 지적하는 인문학자 고미숙의 그 끔찍한 우라질 계획을 버려라!”는 말이다. 이 말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반감을 표시하곤 하는데, 그것은 대부분 미래를 준비하지 않고 어떻게 살 수 있는가?’라는 취지이다.

 


그들이 말하는 미래란, 즉 계획이란 30,40평형 아파트를 사고, 수입차를 타야하며, 소위 일류대학이란 곳을 나와야하고....- 한글의 이 자는 醫師, 判事, 辯護士와 같이 한자로는 모두 다르다 - 자를 붙인 전문직업 등등의 현시적, 물질적 욕망의 추구에 집중되어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의 일부라도 충족되지 못하면 박탈감에 허우적대고, 이름뿐인 스위트 홈은 이내 박살나고 만다. 이러한 양상을 바라보면서 바로 이것, 계획이란 것이 지금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극단의 양극화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곤 했다.

 

이 생각이란 개개의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 가에 대한 것이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손(Henri Bergson)’물질과 기억2장에서 인간의 기억을 습관기억과 이미지기억으로 구분하고, 주의 깊은 식별(la reconnaissance attentive)'이라는 처음 본 대상이나 분석이 필요한 복잡한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과거의 기억을 불러내 참조해야 하는 경우를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이들 용어 개별을 설명하는 사치는 배제하고 습관기억만 짧게 설명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습관기억이라는 것은 살고 있는 동네 골목길을 걷는다든가, 책을 읽다가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에 밑줄을 긋기 위해 연필을 쥐는 것과 같은 어떤 의지작용을 필요로 하지 않는 기억이다. 개념의 차이는 조금 있지만 이것과 유사한 심리학 표현이라면 직관(直觀) 정도로 말해도 될 것 같다. 이것은 철저하게 평소 사람들의 관심이 준비된 반응행동, 즉 삶의 즉각적 유용성을 위한 기억이다. 습관으로 신체에 체화된, 익숙하여 거의 자동적으로 튀어나오는 반응이다.

 

그런데 자신이 잘 알고 있지 못하거나 새로운 것은 이 기억만으로 반응 할 수 없다. 즉 식별하고 파악하며 해석하여야 어떤 반응을 할 수 있다. 그저 침묵 할 것인지, 어떤 선택된 말이나 행동을 취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다. 이 과정을 대중 언어로 말하자면 깊이 있는 사유와 많은 참고 기록들, 문헌을 참고하는 것 등이다. 이러한 문제에 즉각 반응한다면 그것은 습관기억이라는 익숙한 것, 즉 자신이 아는 그 편협하고 알량한 것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그것이 올바를 턱이 없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행위 한다.

 

참고 문헌을 찾아보아야겠다는 결정도 사유이고, 그 결과 이를 실천하는 것도 사유의 결과다. 그리고 나서야 새롭거나 알지 못하는 대상과 문제에 대해 최종적인 반응을 할 수 있다. 이것은 사유와 사유의 실천이라는 지난한 과정을 요한다. 주의깊은 식별이란 습관기억의 유용성을 포기하고 내면의 심층에 있는 과거의 이미지 기억들을 층층이 소환하여 대조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 과정은 사용하지 않았던 부가적 에너지와 시간의 집중적 소비를 요구한다. 한마디로 부지런해야 하고, 능동적 행위가 요구된다.

 

나는 이 이미지 기억을 소환하여 층층이 대조 분석하는 판별이라는 사유의 과정을 하지 않고 습관 기억에 의존해 행동하고 말을 뱉어내는 것을 지적 게으름이라고 부르곤 한다. 또한 그것을 무지와 무관심이라고 싸잡아 부르기도 한다. 신경과학자 나타샤 모트(Natasha Mott)’가 대뇌 반구의 활성화 연구를 통해 주장한 좌파와 우파의 뇌가 공명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제시하듯, 진보와 보수주의자 행위의 구조적 차이의 근저에 있는 신경적 과정의 결과는 습관기억, 직관에 의해 끌려다니는 불온한 세계의 이유를 보여준다. 이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입증하는 연구저술도 있다.

 

생각에 관한 생각이라는 책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행동경제학을 창시한 인지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은 이 저술에서 시종일관 직관이 지닌 수많은 오류들을 열거하고 있다. 그것은 속단과 어림짐작, 편향, 진실호도, 더 쉽게 문제찾기, 의심의 거절 등인지적 압박감을 회피하고 편안함을 추구하려는 생각의 게으름이다. 사실 이 입증을 위한 수많은 연구 사례는 어쩌면 불필요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앙리 베르그손이 100년 전에 발표했던 생각들이다.

 

장황한 이야기가 되고 말았는데, 너무도 많은 사람들의 의식이 잠들고 있다는 것이다. 오로지 습관기억에 의한 행위만이 이 사회를 점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 정권의 친일 행위에서부터 제반 경제, 노동 정책, 사회복지 정책 등 전() 부문에 걸쳐 황당한 퇴행을 일삼는 것과, 이에 의문을 가지지 못하는 대중 행태의 근저를 이루는 인식을 돌아보기 위함이다. 일례를 들어보면 강제 징용 노동자에 대한 대법원 판결에 의한 일본의 배상 문제는 외교적 갈등으로 대두 되었었다. 당시 국내 기업의 출연을 통해 배상금을 지급할 줄 몰라서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현 정권은 쉬운 길을 선택했다. 가해자의 반성이나 배상도 없이 피해자가 배상을 결정했다. 이것이 카너먼이 지적한 직관이라는 지적 게으름이 불러온 더 쉽게 문제 찾기의 폐해이다.

 

대중들 또한 이러한 비판과 자기반성을 비켜날 수 없다. 습관기억이 아니라 추가적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사유의 과정을 겪어야 한다. 자기가 알고 있는 익숙한, 그 좁아터진 편벽한 앎의 터전으로 이 세계의 무엇을 인식하고 반응하면 그것은 대개 편향이고, 왜곡이며, 진실을 지니지 못한 거짓이라는 점이다. 이제 이 글의 첫머리로 돌아가 생각을 다시 이어가보면, ‘계획을 버리라는 짐짓 과격해 보이는 이 말은 단순히 미래의 삶을 준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현시적 욕망을 따르기 위해 세상 모두를 고통으로 몰고 가는 욕망의 에너지를 변환해보라는 것이다. 즉 우리들에게 제시된 강요된 그 익숙한 시대성의 산물에 노예처럼 따르지 말고 당신의 고귀한 생명의 차원에서 삶을 사유하고 실천하라는 요구의 조언이다.

 

여기서 다시금 귀에 거슬릴 정도로, 그리고 눈이 시릴 만큼 노출된 공생이나 연대의 언어를 반복하지 않겠다. 서로 힘차게 응원해 줄 수 있는 관계, 타자에 대한 경계와 단절이라는 부정성이 아닌 생명의 플랫폼이 되는 길로의 전환을 모색해 보자는 것이다. 나는 그것의 밑바닥에 사유라는 과정, 즉 수고스럽더라도 조금 더 생명 에너지의 사치를 부려보자는 것이다. 이것이 하지 않던 일이어서 불편하고 낯설더라도 직관이라는 그 왜소한 생각의 불완전함, 혐오와 적대를 만들어내는 불온함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각자의 진영에서만 활성화되는 좌뇌와 우뇌의 그 단절, 습관기억이라는 익숙함에만 머물려는 게으름이 이 세계를 지배하게 둘 때, 그것은 우리 모두의 공멸 가능성을 높이기 때문이다. 선진국 대열에 들어 선지 고작 몇 년에 불과하다. 이 기회를 다시 나락으로 몰아넣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적 게으름이 눈앞의 유용성을 해치는 것이 당장 보이지는 않겠지만, 미래가 손상되는 것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 계획에 매달리는 것, 당장의 편익에 몰두하는 삶, 타자의 의지를 속단하는 즉각적 반응이 몰고 오는 장기적 폐해는 분명 숙고하는 삶의 태도가 바꾸어 줄 것이라 믿는다. 바로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주의깊은 식별, 깊은 사유가 필요한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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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구태여 문학 장르를 특정한 개념적 세부분류로 구분하는 것은 어쩌면 식자(識者)들이 자신들의 무료함을 달랠 겸 어쭙잖은 전문성의 자랑질도 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얘기할 수 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동기야 어쨌든 이러한 분류 작업은 독자들의 작품에 대한 이해에 분명 도움을 주고, 글을 쓰는 이들에겐 진부함을 탈피하는 새로운 방향의 안내가 되어주기도 할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단순한 이해에는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 듭니다. 우리네 일상적 언어로 이 세계를 온전히 표현할 수가 있나요? 아마 부족한, 결여된 무엇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를테면 지배질서가 은닉하거나 배제시켜 그 근원을 표현하지 못하거나 할 수 없는 것들로 인해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 작가들은 그 결핍의 욕구에 시달리는 것이 실상이니까요. 그래서 작가들은 기성의 세계 인식이나 언어가 확보한 독단론을 뛰어넘어 시간성의 교란이나 현실과 가상을 전복하는 새로운 세계를 그리고 싶은 충동에 내몰리곤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럼으로써 이 세계의 존재방식을 재질서화하고 풍부하고 다채로운 세계의 인식을 제시하려고 하는 것이겠지요. 이러한 관점으로 바라보면 새로운 장르의 출현, 그 시도는 당연하고 불가피한 소산이라고 이해하게 됩니다. 이제 슬립스트림(slipstream)’이라는 이미 오래되었지만 제겐 낯선 장르를 알아보아야겠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국내에 번역 소개된 적이 없던 작가인 것 같은데요, 민음사에서 ‘애나 캐번(Anna Kavan)’의 소설 Ice』이 번역 출간 되었네요. 이 소설을 평론가들은 생소한 장르인 슬립스트림의 전형적 작품으로 꼽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추가적인 장르화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SF작가 존 케셀(JohnKessel)’ 슬립스트림은 장르가 아니라 공포나 코미디 같은 문학의 효과일 뿐이며, 인지부조화가 그 핵심이라 지적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단지 문학적 효과로 이해하던, 장르로 받아들이던 슬립스트림이 무엇인지는 알아야겠습니다. 이러한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작품이 과연 내 취향에 맞는 것인지, 설사 맞지 않더라도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선()지식이 필요한 것이니까요.

 

가장 단순하고 간단한 정의는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거나 낯선 것을 낯익게 만드는 글쓰기의 한 형태인 이상함의 소설’”이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를 조금 구체적으로 표현한 설명으로, 슬립스트림 문학의 특징은   사실주의 원칙의 파괴, 전통적인 환상적 이야기의 탈피를 위해 SF를 비롯해 심리적 붕괴에 대한 인식을 이용한 비현실적 감성의 탐구라고 합니다.  이들 정의는 너무 압축되어 있으며, 구체적 실체가 그려지지 않습니다. 혹자는 간략하게  ‘SF 요소를 지닌 소설이지만 주류의 순문학에 가까운, 경계가 허물어진 주류 문학이라고도 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SF장르의 비유를 사용하는 고급 예술의 한 형식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의들을 보면 언뜻  마술적 사실주의가 떠오르는데요, 슬립스트림은 이를 포함하는 상위의 개념이랍니다. 마술적 사실주의는 우리들이 몸담고 있는 일상적 현실에서 출발하는, 즉 굳게 현실에 발을 딛고 창조적 상상을 통해 환상에 이르도록 가공되는 것입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가브리엘 마르케스, 이탈로 칼비노로 대표되는 일련의 작가들이 보여주는 환상과 현실, 심리적 실재와 현실성, 역사와 허구 등의 경계 해체를 통해 상호 교환되는 특성을 공유하는 작품들이지요.

 

그런데 슬립스트림은 환상, 동시성, 파편성 등 마법적 사실주의의 시간 형식의 파괴는 물론 소설의 행동 공간을 여러 층위로 중첩 사용할 뿐 아니라, 일반적 SF소설이 갖는 선형적 이야기 구조를 버리고 사실과 초현실, 부조리를 마구 뒤섞은 의식의 흐름 기법에 가까운 비현실적 소설이라 묘사되고 있습니다. 영국 소설가 크리스토퍼 프리스트(Christopher Priest)’는 이를 한 문장으로 정리했는데요,   일그러진 거울을 살짝 들여다보듯 독자에게 느껴지는 '타자성'”이라고 말이죠. 슬립스트림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을 마음의 상태에 접근되는 상태 그대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조언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슬립스트림, 왠지 이들 정의에 대한 문장들을 읽고 나면 선뜻 다가가기 어려운 소설로 이해됩니다. 그럼에도 이 용어의 기원을 말한 영국 사이버펑크 작가 브루스 스털링(Bruce Sterling)’의 말처럼 "SF 장치를 사용하지만 장르 SF가 아닌 작품" 이라는 간략한 문장이 다소 그 문턱을 낮춰줍니다. 슬립스트림의 범주에 속하는 작품으로 스타니스와프 렘(Stanistaw Lem)’The Cyberiad, ‘토니 모리슨Beloved, '무라카미 하루키태엽 감는 새 연대기등이 거론되고 있습니다만, 페미니즘 문학의 시원을 연 ’애나 캐번의 작품 Ice를 통한 슬립스트림의 실체에 접근해 보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은 서구에 페미니즘의 두 번째 물결이 몰아치기 직전인 1967년 출간 되었답니다. 1970년대 페미니스트 SF 주요 작품이 등장하기 이전에 써진 소설로서, “여성에 대한 위협적이고 치명적인 성적 대상화와 삶을 파괴하려는 집단 간의 냉전을 묘사하고 있다고 하는군요. 그리고 기후변화와 전쟁 위기... 즉 이들을 통한 페미니스트 문학의 실험이라는 것입니다. Ice는 기존의 거의 모든 장르를 넘나들며, 장르를 파괴하는 파괴적 모더니스트 소설이라 평가되고 있습니다.

 

1967, 68혁명이 아직은 일어나지 않은, 기성의 고루함과 젠더의 구분이 여전히 암약하던 시대입니다. 애나 캐번은 기성의 언어로는 그녀가 기대하는 새로운 질서를 표현하는 것이 불완전하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세계의 실재와 본질에 대한 의구심, 그 반발의 추동이 불가피하게 문학의 장르 파괴, 마구 넘나드는 의식의 흐름을 쫓을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닐까하고 생각해보게 됩니다. 어떤 개념의 원형으로 불리는 작품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시대성, 지배 질서를 넘어서기 위한 작가의 노력이 배어있으니까 말이죠. 그것의 실체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게 되리라는 기대일 겁니다.  어쩌면 요즘의 SF를 넘나들며 주류 문학의 경계를 허무는 한국 문학의 흐름도 이와 그리 다르지 않는 연장선에서 보아도 되는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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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이상 책장에 손을 대지 않은 채 꽂혀있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야릇한 제목을 한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을 읽는 우연과 함께, 미스터리 장르의 소설책이 내 시선을 끌었다. ‘사토 기와무라는 작가가 쓴 테스카틀리포카(Tezcatlipoca란 작품이 독자들을 열광케 했다는 홍보 문장, 그리고 주술 자본주의토대에  칠흑같은 저승에 잠든 욕망들이 벌이는 피의 전쟁이란 표현은 당연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베르베르의 백과사전 98번 항목, 아스테카 사람들이 상상한 세상의 종말은 아즈텍 신화에서 다섯 번째 태양기인 현세에 앞선 네 번의 종말에 대한 간략한 신화를 담고 있다. 세계의 첫 번째 시기를 주관하는 신이 바로 테스카틀리포카. 연기나는 거울(Smoking Mirror)’이란 의미를 지닌 전능한 신이다. 그의 가슴에 달린 거울에는 우주의 모든 것이 나타난다. 인간의 생각과 마음을 포함한 세상일을 모두 알고 있는 신, 그래서 이 신은 주술(呪術)의 신이기도 하다.

 

이 신은 전능한 신()답게 별칭을 무려 360가지를 가지고 있다. 즉 모든 신의 속성을 지닌 하늘과 땅과 바다의 신이며, 인간 창조자이며, 온갖 생명의 기원이다. 아즈텍인 들이 이 신을 경외한 것은 물론이다. 부귀와 영화를 누리게 하다가 단숨에 모든 것을 빼앗기도 하며, 불화와 적의, 전쟁을 부추기기도 하는 신.

 

사토 기와무의 소설이 마약밀매 조직의 잔혹한 전쟁을 소재로 하며, 이제까지는 없던 피의 비즈니스를 시작하게 되는, 가장 추악한 자본주의, 그 검은 비즈니스의 내막을 상상을 초월하는 디테일로 그려내는 모양이다. 가장 강력한 주술의 도형인 마약 자본주의라는 소설의 주제를 드러내는 문장이 아주 적나라하고 자극적이다.

 

그런데 또한 우연인지, 의도된 맞춤인지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의 걸출한 역작, cannibal capitalism(식인 자본주의)좌파의 길이란 제목을 달고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프레이저는 "한계 없이 자본을 축적하고, 가치를 팽창시키려는 절대적 강박"을 내재하고 있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비경제적 조건을 드러내며, "마치 전이되는 암처럼 도처에 전체 사회조직이 압도당할 때까지 인구 집단에 고통를 가하게 될 것이라고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의 위기, 전 지구적인 파국을 회피하고 인류의 해방적 시나리오를 향한 행동을 만들어내기 위한 숙고이자 각성을 요청하고 있다.

 

주술의 신, 거울의 신인 아즈텍의 전쟁신 테스카틀리포카는 신의 의지를 넘어서려는 이들 자본주의의 마법진을 펼치는 인간들에게 과연 어떤 응징을 내릴까? ‘마약자본주의’, 그야말로 식인자본주의의 그 폭력적 욕망의 전형일 것이다. 아마도 사토 기와무의 소설, 낸시 프레이저를 함께 읽으며, 자본주의, 그 탐욕과 무자비함과 잔혹함의 속성,  그 태생적인 윤리의 결여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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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존재론적 형상을 모두 품고 있는 도시라면 지나친 수사가 될까?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두 얼굴을, 그 이중적 내재성을, 인간의 속성이란 그러한 것임을 그 자체로 투영하는 장소에 대한 불가피한 이끌림일지도 모른다. 이 도시에 대한 속설은 밀애와 이별이라는 두 상반된 결과를 발설하곤 한다. 낯선 이들을 사랑의 열정에 휩싸이게 하는가하면 연인들을 갈라서게 만드는 곳, 도시의 여기저기를 가르는 소()운하와 발목까지 물이 차오른 보도, 그 거울 같은 표면위에 불을 밝힌 상점의 간판들, 허영을 부추기는 주위의 장식과 기둥과 벽공들의 아름다움, 그리고 눅눅하고 춥고 좁은 안개 낀 골목길은 인간을 비논리적 동물적 욕망에 침잠하게 한다.



 


프랑스의 젊은 시인 뮈세가 연인 상드를 졸라 한없는 밀애를 기대했던 곳, 그에게 베네치아는 자신과 닮은 욕망의 공간, 열정의 대기였을 것이다. 여기에는 이성(理性)의 냉철이 자리 잡아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오갈 데 없는 정신은 시인에게 한 편의 이야기를 쓰게 한다. 방탕한 정열을 한껏 태우는 쾌락의 게으름이 흐르는 세계를.

 

사람들의 눈을 피해 안개 낀 운하 위를 미끄러지듯 유영하며 밀애의 장소로 다가가는 곤돌라는 그야말로 에로티시즘과 일체가 되어 연인을 기다리는 폭발할 것만 같은 부푼 연심, 그 혼돈의 설렘을 감각할 수 있을 만큼 선명하게 각인할 수 있게 한다. 뮈세는 단편 티치아노의 아들에서 자신의 반영인 주인공 피포와 베네치아 최고의 여인 베아트리체 도나토와의 사랑을 그려낸다.


 



최고가문의 상속녀이자 미망인인 귀족 여성의 사랑의 헌신은 연인의 잠자는 재능의 회복에 대한 희망찬 기대다. 나는 베네치아를 떠올리면 미로같은 좁은 골목길, 미궁(迷宮)에서 욕망의 제물을 기다리는 미노타우로스의 이미지와, 이성(理性)과 사랑의 끈을 상징하는 아드리아드네의 실이 내 지각에 재생된다. 길을 잃지 않고 목적을 성취토록 돕는 실, 뮈세가 그린 주인공은 이 실을 끝내 놓지 않으면서도 자기 열정의 자유까지 움켜쥔 인물을 만들어내고 있지만 현실의 삶은 인내 할 수 없을 것이라 내게 말한다. 내 안의 미궁에 웅크린 욕망 덩어리를 인지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테세우스는 아드리아드네의 손을 놓음으로써 자멸하지 않았나!

 

이 한 토막의 이야기(뮈세의 소설)는 사랑을 소유하려한 천재 바이올린 장인의 이야기를 읽고 연상 작용이 촉발된 것인데, 장인(匠人)은 첫눈에 순수하고 신적인 목소리의 여인을 향한 사랑에 빠져들고, 그녀의 목소리를, 그녀를 소유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흑단의 바이올린을 제작한다. 그것은 예술의 지고한 고뇌와 절망적 대비를 통해 사랑과 예술의 존재와 소유 양식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지며, 인생의 의미를 되뇌게 하는 작품이었다. ‘막상스 페르민검은 바이올린은 이 장인의 주검을 실은 채 망자의 섬인 산미켈레(San Michele)’ 묘역을 향해 떠 있는 검은 곤돌라의 정경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것은 내게 기억을 파헤치고 상상을 사방으로 펼치게 했다. 이 글은 이 장면으로 비롯된 소박한 단상이다.

 

상여를 실은 검은 곤돌라 ... 베네치아에 비가 내렸다. ...물방울들이 대운하 위에서 내는 소리. 곤돌라의 허리를 때리며 찰랑이는 물의 소리. 이따금 건물들 사이를 지나며 바람이 우는 소리만이 들렸다.       - 막상스 페르민 , 검은 바이올린, 난다 2021.7

 

이 장면은 상반된 감응으로 두 문인에 의해 써지고 있는데, 시인 조지아 브로드스키베네치아의 겨울 빛에서 물 위를 미끄러져 가는 그 길에는 유독 에로틱한 면이 있다며, 고르게 옻칠한 듯한 검은 수면과 완벽하게 합을 이루는 요소들의 에로티시즘을 발견한다. 이와 달리 소설가 토마스 만베네치아에서의 죽음에서 변치 않고 전해 내려온 이 이상한 배는 ...관처럼 보일 정도로 색깔이 너무 특이하게 까맣다. ...그것은 범죄적 모험을 생각나게 할뿐더러, 더욱이 죽음 그 자체같다며, 곤돌라의 타나토스적 아름다움을 묘사하고 있다.


 


사실 타나토스는 에로스의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다. 황금 화살과 납 화살, 사랑과 생명의 거부, 에로스의 폭주는 타나토스로 탈바꿈하며 존재를 뒤바꾸기 일쑤인 것처럼 우리 인간 삶의 실체이다. 이중성, 태생적, 즉 존재론적으로 이 양면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우리는 미궁 속 미노타우로스와 테세우스의 끊임없는 투쟁의 존재자이다.

 

베네치아, 황금 빛 햇살이 튀어 오르는 수면과 수세기 동안 변함없이 인간의 시원적 모습들이 도처에서 존재를 환기케 하는 곳, 이 존재 반영의 도시는 그래서 사람들을 사랑에 도취케 하고, 도취된 인간들은 그 열정에 휘말려 가까이 있는 연인을 잊는다. 사랑과 이별의 도시,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도시, 제어되지 않는 욕망과 이성의 실이 함께하는 도시, 베네치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문학과 예술이 그치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올 여름 가보게 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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