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데리다 라이브 이론
제임스 K. A. 스미스 지음, 윤동민 옮김 / 책세상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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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1930~2004)'의 저술들을 읽는 것은 무엇보다 그의 저작들을 둘러싼 수많은 이론(異論)들과 비판으로 오류와 오해로 가득한 방해로 차단되곤 했던 것이 대중적 읽기의 실상이라 할 것이다. 그것은 진리와 기성의 제도들에 대한 일종의 허무주의를 야기하는 바이러스라고 보는 일체의 현상유지 수호자들의 근거가 취약한 비난들이기도하고, 논설과 담화의 지면 등 매체를 장악한 이들의 데리다를 읽는 어려움을 회피하는 전략이기도 했다. 현상학과 프랑스 철학을 연구해온 미국 캘빈대학 철학교수인 저자 제임스 K.A. 스미스는 이처럼 데리다에게 부여된 괴물성의 신화에 깃든 오류를 벗겨낸다.

 

데리다를 비판한 이들은 데리다의 사상을 괴물로 명명함으로써 길들이고, 그 괴물성에서 자신들과 다른 것, 즉 두려울 수 있는 모든 것을 제거하여 동종화하려 하는 익숙한 기득권적 욕망을 본다. 이 책은 이 만연한 데리다에 대한 신화를 탈신화하여 그 괴물성을 제거하기 보다는 괴물성의 본질을 이해하려 한다. 다시 말해 데리다의 원저작과 기획으로의 너그럽고 호의적인 초대이다. 해서 이 저작은 데리다를 읽기위한 대중적 입문서이자 하나의 촉매 역할을 위해 써졌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저술의 미덕을 하나 집고 가야겠다. 그간의 라이브 이론(Live theory)>시리즈로 간행되어왔던 저작들과 달리 평이한 일상의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난해하다고 걱정하던 데리다 독자들의 선입견을 불식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제임스 교수와 번역자의 노고에 고마움을 먼저 표현한.

 

책은 서론과 에필로그를 비롯 총 5개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무엇보다 <서론>1장인 <말과 사물>은 그야말로 데리다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글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서론>은 데리다에 씌워진 괴물성과 신화가 무엇인지를 밝혀냄으로써 오히려 그 매도된 비난의 내용들로부터 데리다의 사상적 지향을 명료하게 드러낸다. 물론 이러한 명료성과 같은 말은 데리다가 가장 싫어하는 말일 것이다. 발화된 언어의 다의성을 일의성이라는 권위적 고착관계로 몰아가는 언어이니 말이다.

 

괴물이란 서로 다른 것들로 이뤄진 혼종적 생명체가 불러일으키는 불길함과 처음으로 나타난 신기함과 낯섦에 부여되는 이름이다, 즉 규정할 수 있는 범주의 부족과 결핍 때문에 그 모호성에 붙이는 무지의 익숙한 기호이다. 이러한 거북함과 공포와 달리, 데리다의 사상을 야기한 수많은 철학적, -철학적 유령들의 영향을 도외시하고 마치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읽는 이들이 읽는 오류도 있다.

 

특히 데리다의 곡해를 두드러지게 표명했던 사건이 소개되고 있는데, 데리다에게 케임브리지가 명예 학위 수여를 결정하자 수여반대자들이 극렬하게 표명한 내용들이다. “그의 작업 모두는 모든 학문분과가 기초하고 있는 증거와 논증의 기준들을 부정하고 폐기하는 것이라고 해체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실패한 이들의 악의적 선전이 그 하나이고, ‘뉴욕 리브 오브 북스 사건으로 명명된 데리다의 사전 승인없이 리처드 월린이란 인물이 자기 논문집에 임의로 데리다의 글을 편집 출간한 일로 발단된 사건이다. 이에 항의하자 텍스트와 저자 사이의 모든 관계를 산산조각낸 해석학적 괴물이 갑자기 저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했다, 이론과 수행의 모순을 드러낸 것이라고 조롱한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 문화, 정치적 영향력을 장악한 이들이 데리다를 길들이려는 악의에서 비롯된 천박한 공격들이다.

 

이들을 통해 저자는 해체가 단순한 어떤 부정적 파기가 아님을, 파괴의 단순한 동의어거나, 분해하다라는 잘못된 의미로 전유되어 사용되는 오해를 바로잡는다. 해체는 재구축을 위해 분해하는, 즉 재구성적 의미를 가진 비판적 재구성이다. 해체는 무질서나 상대주의적 이해가 아니라 더 정의로운 제도를 위하여 제도적 틀을 부수고 개방시키는 행위이다. 특히 해체에 대한 아주 중요한 언어 표현이 있다. 해체는 타자의 부름에 대한 긍정적 응답이며, 본질적으로 타자에 답하는 윤리적이고 정치적 소명이라는 것이고, 무엇보다 사랑의 일이라는 것이다.

 

이 사랑은 타자를 위해 자리를 만드는 것이고, 그래서 배제되고 소외된 것에 대한 근본적인 환대와 환영이다. 결국 기성의 권위가 수호하려는 불완전하고 불의한 것들이 은폐한 것들의 수많은 영역을 철저하게 분해하고 파괴함으로써 도래하는 민주주의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하니 그 반대는 치졸하고 악의에 찬 것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프랑스 학교에서 추방되고 프랑스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체류 외국인이라는 낙인을 경험해야만 했던 알제리계 유대인 데리다를 읽기위한 예열이 충분히 된 것 같다. 1~3장은 데리다의 형이상학, 인식론, 윤리학을, 4장은 데리다와 여타 사상가들의 관계를 개관하고, 5장은 해체에 대한 일종의 사례연구로서 인터뷰의 형식을 취해 주제들을 확장 사유토록 안내한다.

 

1<말과 사물>은 대다수의 학자나 비평가들이 간과하거나 알지 못하고 넘어갔기에 특히 중요한 부분이다. 데리다의 사상적 환경의 토대가 된 현상학, 특히 그의 스승인 후설의 비판을 통해 현상학의 공리들에서 사유되지 않은 것, 그가 오해하거나 도달하지 못한 순수한 정신, 신체와 물질성을 철저하게 배제하려한 플라톤주의의 이데아가 결국은 신체라는 물질성 없이는 성취될 수 없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피타고라스의 정리와 같은 기하학적 진리라는 것, 즉 순수 정신인 이데아라는 것도 최초 고안자의 정신인 의식의 영역 내 형성물이다.

 

이렇게 내적 근원인 주관적 산물인데. 이것이 어떻게 객관적 진리가 되었는가라는 물음을 해보면 이 기하학적 통찰을 공유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공동체가 창조되어야 하고, 언어를 통해 상호주관적으로 소통될 때에서 비로소 객관적 의미로 존재하게 된다. 플라톤(소크라테스)에서 헤겔, 후설에 이르는 서구철학의 전통은 그들이 그토록 멸시하던 신체와 물질성이라는 오염을 은폐한 것으로 이데아를, 순수 정신을 말하고 있을 뿐이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서양 철학 전통에 깊숙이 똬리를 틀고 있는 이념들의 부패성을 들춰내는 것이다.

 

결국 서구 철학이 욕망하는 순수하고 신체화되지 않은 객관성이라는 것에 해체를 수행하는 것이다. 진리와 객관성을 성취하기 위해 구체화와 물질성을 말소하려는 욕망에 깃든 타자성에 대한 반감, 즉 로고스중심주의의 자민족중심주의와 서구형이상학의 강박증에 도사린 타자에 대한 폭력성을 읽는 것이다. 그것을 데리다의 표현으로 한다면 사유는 언어 없이 지속하지 않으며 언어가 공동의 산물인 한 자아는 사유하기 위해 타자에 의존한다.(비밀의 취향P84)”를 인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서 데리다는 왜 해체하려 한 것인지를 발견할 수 있다.

 


언어의 객관성이란 것은 공동체의 상호주관적 소통의 합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언어와 ()쓰기는 매개와 해석의 필연성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것은 곧 공동체 안에 존재함으로써 가능한 것이 된다. 공동체 안에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폭력의 구조 안에 얽혀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하니 이 얽혀있는 폭력성을 찾아내기 위해 해체해야 하고 그 폭력으로 인해 빼앗겼던 타자들의 자리를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이렇게 단순하게 설명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해체의 개념에 가까이 다가가는 데 이보다 좋은 설명은 없을 것 같다. 데리다의 주저(主著)목소리와 현상, 그마라톨로지의 상당부분에 대한 설명이 이루어진 것이다라 할 수 있다.

 

2<다른 문학, 문학으로서의 타자>철학의 여백들우편엽서등에 대한 간접적 읽기가 될 수 있는데, 물론 그마라톨로지를 비롯한 방대한 데리다의 논문들과 여타 저술들이 망라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장()왜 데리다가 문학을 특권을 가진 철학의 타자로 삼았는지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이미 소개되었지만 해체는 다른 것의 여지를 만드는 것을 추구하는 작업이다. 배제되었던 것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스스로를 제도의 틈과 균열에 집어넣은 것이다. 타자성에 대한 이러한 체험은 해체의 방법에서 결정적인 것이다. 그런데 서구 철학은 일의성의 사유이다. 즉 타자성을 부정한다. 그런데 문학은 일의성이라는 단일한 의미들의 이상과 사물의 일대일 대응의 이상인 철학의 이상을 넘어서 흐르는 언어의 양태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데리다에게 문학이 특권을 갖는 이유는 오염으로 여기는 문학을 통해 철학의 욕망을 심문하려는 것이고, 철학 스스로 자기-비판에 참여토록 하는 기획이랄 수 있다.

 

이로서 직접성(일의성)과 순수성에 대한 철학적 열망, 동일자의 공간으로 하고자 하는 헤게모니를 장악한 공동체를 불안하게 만드는 일종의 방언으로서 문학은 훌륭한 해체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된다. 또한 이 장에서는 철학이 은유의 교통을 거부하면서도 닳아빠져 못쓰게 된 은유를 은근히 이용하는 역사적 행태에서 철학 그것이 억압하고자 했던 것이 자신의 중심부임을 밝혀내기도 하고, 그 유명한 문장인 텍스트의 바깥은 없다는 맥락에 대한 통찰의 중요성의 설명도 있다. 아마 저자의 의도라는 것은 존재한 적이 없다는 식의 악의적 오독을 넘어서 비판적 독해로서 저자의 의도를 데리다가 말하고자 했던 의미의 핵심으로 다가갈 수도 있다.

 

3<타자를 환영하기-윤리학, 환대, 종교>는 데리다의 사상을 관통하는, 레비나스의 타자를 승계하는 해체의 윤리적, 정치적 함의에 대한 설명이라 할 수 있다. 사실 해체가 타자에 대한 사랑이며, 타자를 위한 자리 내기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해체가 정치적이고 윤리적이라는 말이 새삼스럽지만, 기성의 학문과 비평의 세계에서는 1989년 카르도조 법학대학원 컨퍼런스에서 해체는 정의(Justice)!”고 말한 데리다가 비로소 공적 정치적 물음으로 전회하였다고 해석하였던 모양이다.

 

데리다를 제대로 읽지도 않은 자들의 오류가 이때에야 자기 오류를 인식하였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타자와의 관계는 정의에 대한 물음이다.”라는 말처럼, 데리다는 해체할 수 없는 것(정의)의 이름으로 해체 작업에 착수한다. 해체는 정의의 해체불가능성과 법의 해체 가능성 사이를 구분하는 그 간격에서 발생하는 것이고, 정의로 법과 제도들을 괴롭히고 잠 못들고 깨어있도록 괴롭히는 작업임을 밝힌다. 수구적인 기득권 집단이 데리다의 해체를 그렇게 폄하하고 조롱하며, 괴물 취급을 하였던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에 멋진 정의의 역설, 세계의 아이러니가 등장한다.

 

데리다는 윤리적 책임을 이렇게 정의(定義)한다. 결정을 해야 하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출구 없는 상황,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중속박에서 결정하는 것이라고. 그것은 규칙에 괄호치기이고, 정의롭고 책임 있는 결정이 있다면 적절한 순간에 규제없이 규제되어야 하는 것이며, 법을 보존하고 또한 파괴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법을 다시 고안해야 할 정도로 충분히 유연하게 사유되고 결정되어야 하는 것으로서 말이다.

 

윤리는 당신이 무엇을 해야할지 모를 때, 앎과 행동 사이에 간극이 있을 때

그리고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규칙을 만든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때 

시작된다.(...) 보증이 있는 윤리가 아니다. (...) 윤리는 위험하다.”

- 데리다, <이론을 쫒아서, P31~32>, 본문 173

 

만일 어떤 판사가 규칙을 단순히 적용한다면 그는 계산하는 기계일 뿐이고, 정의를 보증하지 못한다. 그러나 법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면 또한 정의의 꼬리표는 주어지지도 않는다. 결국 정의로운 법 판결에 내재된 이 역설은 어떤 결정이 정의라고 말 할 수 있는 순간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정의와 윤리적 책임의 조건은 무엇을 해야할지 알지 못하는 동시에 결정해야 할 의무가 있는 이중적 상태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결코 의무로부터 해방될 수 없는 책임의 체험이 곧 정의의 윤리임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해체는 환원할 수 없는 무한한 정의의 이념에 작동하고 운동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우리는 나름 해독할 수 있게 된다.

 

4<데리다의 타자들>5<저자, 주권, 인터뷰에서 자명한 것들>, 우선 4장에서는 데리다의 작업에 흔적을 남긴 소수의 특권적 타자들인 몇 명의 철학을 설명한다. ()쓰기의 유한성이라는 신체성과 물질성을 평가절하한 플라톤으로부터 그라마톨로지영문판 서문을 쓴 가야트리 스피박이 주장한 니체의 영향력이 근거가 취약한 비판임을 증명하고, 오히려 니체의 초인은 데리다의 타자에 굴복했음을, 레비나스의 목소리에 묻힌 존재임을 설명한다. 한편 하이데거는 데리다에게 해체의 공간을 열어주었으며, 심지어 하이데거의 해체였다고 데리다가 말했음을 전하기도 한다. 하이데거와 데리다는 부모와 자식의 완벽한 본보기였다는 것이다.

 

특히 4장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학계와 비평계의 데리다 수용사이다. 다시 말하자면 각 계의 해체에 대한 반응의 역사라 할 수도 있겠다. 예일학파, 즉 미국 문학이론가들을 중심으로 한 수용사인데, 이들은 후설과 하이데거를 모른 채 데리다를 읽음으로써 매우 비-맥락적으로 읽었기에 무수한 오류로 점철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독일의 경우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중심으로 반목과 교류로 이루어졌음을, 초기에 하버마스와 가다머를 중심으로 데라다를 반혁명적, 보수주의자로, 권위주의적 정치 구조를 복권하려는 불순한 인물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후 해체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하는, 계몽주의의 지속임을 이해하고 공동의 노력을 하는 동맹관계가 되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바디우, 지젝, 이글턴 등의 인사들에게서는 오해와 오류가 여전함을 발견하게 된다. 적절한 비판을 정초하는 데 요구되는 보편성을 거부하는 이론(바디우)”이라던가, 폭력에 대항하는 가치를 보여주기보다 전체주의 공간을 열어준다(지젝)”고 주장하기도 하고, 차이의 철학들은 시장주도의 세계를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데 적응케 하는 전술(이글턴,바디우)”이라는 뚱딴지같은 비난으로 점철되어있다. 이들은 데리다를 얼마나 읽었을까?

 

5장은 데리다를 수용하는 이 세계의 현실을 살펴보고, 데리다는 이제 살아있지 않지만, 그가 남겨 놓은 여전히 많은 과제들이 있음을 상기하는 장으로, 그리고 심화된 학습의 장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서문>과 함께, <에필로그>도 중요한 장이라 할 수 있는데, 데리다는 유행이 아니다!”는 저자의 선언처럼 제도에 대한 비판, 텍스트들에 작동하는 힘들에 대한 지속적이고 면밀한 재생산을 위해 끊임없이 읽어야 하는 인류의 부채이기도 하다. 타자에 대한 책임이 사라지기라도 했나? 여전히 타자는 존재한다. 아무쪼록 학자의 야심을 억제하고, 데리다의 읽기로 이끄는 이 아름다운 저술물을 생산해 낸 제임스 K.A. 스미스교수와 윤동민 번역자에 감사를 전한다.

 

언어적 전희가 언어를 망각하거나 폄하하는 경향, 철학은 단지 담론이라는 매체에서만 발생한다는 점을 망각하고 언어의 2차적 성격, 진리에 대한 순수한 접근으로부터 동떨어진 것으로 폄하하는 서구 사상의 오랜 전통을 거스르는 방식으로서 해체를 주장했던 20세기 타자의 자리를 주목했던 위대한 사상가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는 기회가 되었다. 내게 잠복했던 데리다에 대한 그릇된 이해로 읽기를 회피하며 정당화했던 편협한 정신을 털어내기에 충분한 읽기가 되었다. 우선 가지고 있는 비밀의 취향이나, 마르크스의 유령들, 그라마톨로지를 다시 펼쳐들어야 할 것 같다. 조금 인내가 필요하겠지만, 그 수고가 결코 낭비는 아닐 것이다. 아마 이 저술을 읽는 독자는 데리다 읽기에 나처럼 나설 것이 틀림없으리라 생각된다. 그만큼 이 책은 일반 독자에게 접근 가능한 수월함이 있다. <라이브 이론> 시리즈의 단연 최고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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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 문장의 기억 (양장본) -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박예진 엮음, 버지니아 울프 원작 / 센텐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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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 소설은 물론 일기에 이르는 출간된 대다수의 망라된 작품으로부터 북큐레이터 박예진이 발췌 인용한 212 꼭지의 문장(sentence)과 해당 작품에 대한 생각의 실마리를 이끌어내는 섬광같은 해설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의 소설 작품을 몇 개의 문장으로 이해하려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하물며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들처럼 연대기적 서사라기보다는 의식과 현실과 가상의 혼합된 흐름을 형식으로 하고 있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럼에도 박예진 작가의 말처럼 버지니아 울프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으로서, 아마 이 말은 한 인간 생의 단독성에 대한 탁월한 성찰을 감히 전체적 시선으로 조망하는 문학적 접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버지니아의 소설을 비롯한 에세이들은 다채롭게 엮여 많은 독자들에게 소개되어왔지만, 그 모두를 두루 읽는다는 것은 전문 연구자가 아니고서는 사실 현실이 허락하지 않는다. 또한 읽기는 했지만 작품 속으로 마냥 뛰어 들어가지 못했던 부분도 있을 것이다. 아마 여기에 인용된 문장들과 해설은 해당 작품들의 의미를 다시 새기게 되고, 그럼으로써 그 작품으로 다시 달려가는 계기가 되어 줄 터이다.

 

오랜 역사의 시간동안 사회적 구조와 규율, 성차별, 타인의 시선에 고통받아왔던 사람들의 창조력이 그 갇힌 벽에 모두 스며들었다, 그 한계에 이미 이르렀으니, 이제부터 펜과 붓으로 정치와 사업과 사회의 전면에 나서야 한다는 웅변인 자기만의 방이나 3기니에 울려 퍼지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에세이가 책의 도입부를 장식하는 것도 어쩌면 이 책의 하나의 의지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의 미덕은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작품들 개개의 면모를 살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자기 발견과 표현을 통해 독립된 개체의 성숙한 인간으로의 성장과정을 담아낸 초기작 출항에서부터 50년에 걸친 중산층의 연대기로서 생의 유한과 영속성을 말하는 세월에 이르는 10편의 소설에 대한 엮은이 박예진만의 고유한 해석은 독자와 감상을 나누는 좋은 기회가 되어준다.

 


일례로 결혼과 배우자 선택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는 낭만적 열정이나 우아한 감수성의 로맨스인가 아니면 이성과 분별이 담긴 관계인가를 밤과 낮의 등장인물을 따라가며 더불어 사유할 수 있으며, 삶과 기억의 형성과 변화를 통해 인간의 성장이란 무엇인지를 발견하거나 새로운 여성성의 정체를 확인코자 하려면 등대로 읽어보아야만 할 것 같은 어떤 강한 촉발, 유혹을 느끼게 된다. 이미 읽어본 작품은 물론 알지 못하는 작품에까지 은근한 열망이 독서 애호가의 마음에 피어나게 하는 것이다.

 

너무도 뻔해서 시선을 주지않고 그저 넘겼던 문장이 새롭게 눈에 밟혔는데, 제이콥의 방의 문장이다.

 

“The strange thing about life is that though the nature of it must have been apparent to every one for hundreds of years, no one has left any adequate account of it.”

인생에 대한 이상한 점은 수백 년 동안 모든 사람에게 그 본질이 분명히 드러나 있었지만, 누구도 충분히 설명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작품에 대해 인간의 내적 복잡성과 심리적 상태를 경험해보는 훌륭한 독서가 되어 줄 것이라는 엮은이의 해설은 이 작품을 새로이 다양한 각도에서 다시금 읽도록 유인했다. 아마 여러 소설들에서 보아오던 익숙한 형식이 아니어서 읽다 덮어둔 작품이었다는 기억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다시 혹은 새로이 손에 들어야 할 작품들을 상기하거나 발견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는데, 순종 코커스 스패니얼 혈통의 개인 플러시가 등장하는 소설 플러시의 발견이다.

 

극작가 미트포드가 자신의 개에게 계급에 어울리는 대우를 해주기 위해 시인 엘리자베스 바렛 브라우닝에게 주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라 한다. 비타 색빌웨스트로부터 버지니아가 선물받은 강아지 핑카와 관련있는 작품으로 여겨지는데, 인간과 동물이 나누는 섬세하고 충직한 감정의 교류가 표현되었다고 하니 관심이 동한다. 결국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세 권의 소설을, 두 권은 책장에서 다시 꺼내서 읽으면 될 것이고, 한 권은 새로 구매하는 결정을 하게 되었으니, 이 책은 단지 기억하는 자를 위한 선물을 넘어 강력한 독서의 자극이 되어주었다고 해야겠다.

 

어쩌면 이 책은 독자로 하여금 버지니아의 세계에 보다 친근하게 다가가는 계기가 아니라 버지니아의 세계로 아예 침몰케 하는 강력한 도취제 같다. 버지니아 울프를 애호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작은 선물이 될 것 같다. 책장에 꽂혀 있는 버지니아의 책들 곁에 꽂아둔다. 소설 속 액자극(額子劇)에 들어가 끝없는 상상과 자유로운 감상을 떠오르게 하는 소설 막간의 한 문장으로 감상을 맺어야겠다.

 

거울이 깨지고, 이미지가 사라지고, 숲속 깊이의 녹색을 가진 낭만적인 모습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 의해 보이는 그 사람의 껍질만 남는다고 가정해 보세요. 그러면 그곳은 얼마나 답답하고 천박하며, 황폐하게 벗겨졌으며, 눈에 띄는 세상이 되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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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화서 - 2002-2015 이성복 시론집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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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서(花序)란 꽃이 줄기에 달리는 방식으로 순우리말은 꽃차례라고 한단다. 무한(無限)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은 밖에서 속으로 피는 끝없는 실패의 형식이라는 의미에서 유한과 다른 추상과 거룩함의 방향성을 지시하려는 의도인 듯싶다. 이 시론집은 470개의 응축되고 예리하게 벼려진 생각들의 에피그램 모음으로 구성되어있다. 이성복 시인의 대학원 시 창작수업 내용을 아포리즘 형태로 정리한 것이다. 이 개개의 에피그램들이 시()란 어떤 언어로 발설되어야 하고, 무엇을 대상으로 하여야 하는지, 그리고 시란 무엇인지, 어떻게 표현되어야 하는지, 삶과 시의 관계는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 함께 생각을 나누는 시간이 된다.

 

어쩌면 시()란 우리네 삶의 진실한 목소리, 과장하거나 치장하지 않은 일상의 모든 몸짓과 말 그 자체 일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시인은 시의 에너지원은 세속이예요.”라고 말한다. 일상에서 잡생각은 시에서 진실이고 [...] 우리가 쓸데없다고 버리는 것 안에 우리 자신이 가장 많이 들어있어요.”라는 말처럼, 시는 거창하게 인간의 운명을 얘기할 것도 없다고 말한다. 그냥 부엌에 숟가락 몇 개인지 쓰는 것이 곧 시라는 말이다.

 

뭐 좀 있어 보이는 소리는 다 헛소리예요. 절실하지 않으면서 쥐어짜는 소리 하지 마세요. 그건 사기 치는 거예요.” - [언어-64], 33

 

인간 삶이란 것이 뭐 특별히 대단한 것이겠는가? 그러니 시로 개똥철학 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저 사랑하고 일하고 여유가 있으면 남 생각도 좀 해주는 게 전부인 것을, 헛소리란 늘 자기 내면에 가까운 것이고, 뭔가 욕심내어 꽉 잡고 말하면 빨리 지치듯, 손에 힘을 빼는 것, 그것이 곧 시요, 삶의 진실이라 말하는 것일 테다.

 

책은 시론(詩論)’의 정수(精髓)들을 말하고 있지만, 그렇기에 이는 곧 우리네 삶의 행위에 대한 윤리적 태도로 읽어도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속에 철학은 저절로 품어진다. 이성복 시인의 시집 어느 쪽을 들춰도 이 말의 의미를 곧 발견할 수 있다. 시집 래여애반다라에 수록되어있는 신문은 침대에 반쯤 누워 신문을 매일 읽는 그녀가 있다. 그저 일상의 한 풍경이 있을 뿐이다. 인간 삶의 실 면목 전체를 본 듯한 인상이 남는다. 그러면서 묻는 듯하다. 당신의 삶이란 뭐 다른가 하고.

 

매일 아침 그녀는 침대에 반쯤 누워

신문을 읽는다 매일 아침 그녀가 모르는

일이 일어나고, 무언가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데도 그녀가 모른다면 정말

끔찍한 일이기 때문이다

.... [中略] ....

그녀의 굵은 허리는 점점 아래로 깔리고

콧등까지 내려온 안경이 헐겁게 떨어질 때,

문간에 내놓은 음식 쟁반처럼 그녀의

얼굴 위로 구겨진 신문지가 내려 덮인다

 -신문,래여애반다라,2013.1 문학과지성사

 

시의 언어, 대상에 대해서, 시와 시 쓰기, 시와 삶의 관계성에 대한 오랜 통찰의 언어들 무엇 하나 소홀할 수 없는 사색의 깊이를 지니고 있어 감히 어느 한 구절을 선택하여 말하는 것은 수많은 진실을 누락시키는 꼴이 되고 말 것 같다. 그럼에도 전체를 아우르는 어떤 선각(先覺)과 같은 하나의 지점으로 모이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를테면 내 애기만 하려 하면 과장이 되고, 말에 힘이 붙지 않아요 [...] 시는 남 얘기를 통해 자기 얘기 하는 거예요.”라는 시의 대상에 대한 아포리즘은, 시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곳에서 모든 사연을 지워버리고 그리고로 시작해보세요 [... ]우리의 참모습은 그리고 이후예요.”라고 시는 일단 모르는 데서 시작할 때 진정한 시가 됨을, 그리고 삶의 관계에 이르러 자기 안에 아무것도 없어야 들을 수 있어요. 귀는 평등성이에요. 작가는 듣는 사람이에요. 안 들으면 안보여요. 소통이란 내 말을 들려주는 게 아니라 남의 말을 듣는 거예요.”에 도달함으로써 시는 자기 머릿속에서 꺼내는 말이 아니라 자기한테 하는 말이어야 함을, 그래서 불리하고 불편한 말이 되고 그게 곧 진실의 목소리임을 깨우치게 한다.

 

시 쓰기는 자기와 남을 불편하게 해서 진실을 밝히는 거예요. 혹은 진실을 밝힘으로써 자기와 남을 불편하게 만드는 거예요.” - [-212], 86

 

시가 안락하고 위로를 말하면 그건 분명 거짓일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세상에서 위로 받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확인하는 것이고, 마지막 표정 하나 얻기 위해 인생 전체가 걸려있는 그런 헛소리에 가까워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는 착한 소리 지껄이는 것이 아니라 소스라치게 만드는 귓속에 들려오는 쌍욕처럼 위태롭게 만드는 혼잣말이며, 쓰는 사람 자신을 겨냥한 살기(殺氣)가 서려있어야 하는 것이라 말한다. 진실은 늘 불편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진실이다!”라고 외치는 글들이 있다. 아마 헛소리이고 거짓말의 맨 얼굴일 것이다.

 

내가 하는 말을 돌아보게 한 구절이 있는데, 남들에게서 내가 비난하는 것은 내 안에 다 있어요. 그걸 잊어버리면 자기한테 속는 거예요.”라는, 아마 이 절대적인 진실의 목소리를 수시로 잊어버리는 망각증상의 환기였다. 시는 자기 의심으로 시작하고 그 의심으로 끝나야 하는 것, 자신에게 불리한 것에서 진실은 어슴푸레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이니까. 어떤 말이 자기 대신 남을 베기 시작하면 안 좋은 말이에요. 하지 마세요.”, 내가 진실이라 내뱉기 시작하면서 그 진실이란 것에는 거짓이 함께 따라 들어오고 있음을 보지 못했음을 돌아보게 된다. 자기 방어를 위해 상대의 약점을 후벼 파는 못된 말을 던지곤 그것이 곧 자기를 향한 말이었음을 깨닫는 것처럼 결코 시와 우리네 삶의 언어는 남을 향한 것이 아님을.

 

무언가를 볼 때는 항상 그것의 초라함과 속절없음을 보도록 하세요. 왜냐하면 나 자신이 그렇기 때문이지요.” - [대상-112], 51

 

언제나 버림받은 것들을 귀하게 여기는 언어일 때 시가 됨을 알려주는 문장이다. 이성복 시인의 시가 줄곧 세상에서 버림받은 것들을 향해 있었듯 시인 고유의 문학관일 것이다. 시는 이처럼 밑바닥에 인생이 있어야 하고, 남과 세상의 사물, 사건을 듣는 것이며,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당연한 것들에 질문을 던지고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임을 배운다. 남을 향한 비난과 살벌함을 담은, 윤리나 이념을 노골적으로 드러낼 때 그것이 천박한 포르노와 다르지 않음을, 때문에 시는 이것들을 대상으로 삼을 때조차 에로티시즘으로 하여야 하는 까닭을 또한 배운다. 보여준다고 다 보여주는 것도 아닐뿐더러 밖으로 드러나는 순간 힘이 사라져버림을.

 

시의 대상(對象), 시작(詩作)과 삶의 관계를 모두 읽을 수 있는 이 시론의 일례로써 다음에 인용하는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에 수록된 그날의 일부분으로 소회를 마무리해야겠다. 이 시론집은 엄숙하거나 난해한 말이 아니라 머릿속으로 생각한, 다시말해 이성을 쥐어짜낸 말들이 아니라 그 이전에 힘이 들어가지 않은 손으로 써진 언어들이다. 그래서 시를 읽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보다 가까이 시로 다가갈 수 있게 해주고, 시를 쓰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쓰는 걸음을 한결 가볍게 해주리라 여겨진다.

 

.......... (前略) .........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前方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驛前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未收金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愛人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그날, 1992.1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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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4-01-17 14: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애독한 책입니다.^^

필리아 2024-01-17 14:55   좋아요 0 | URL
네, 저는 이성복 시인의 낮은 곳으로 향한 시선을 좋아한답니다.
 
밝은 밤 (특별 한정 에디션)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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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풍부한 서사가 있는 소설을 읽었다. 누군가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졌기 때문인데, 아마 나도 모르게 외로웠었는가보다. 짧은 소설들을 피해 비교적 호흡이 긴, 그러면서도 지나치게 길지않은 작품을 고르다보니 익숙한 최은영 작가의 4세대에 걸친 여자들의 이야기가 되었다. 소설의 화자(話者) ‘(지연)’는 바닷가 할머니가 계신 희령이란 곳에서의 열 살 무렵의 추억을 더듬는다. 어린 자신이 하루도 지나지 않아 마음을 열었던 할머니와의 즐거웠던 기억을 하는 지연은 새로운 직장인 천문대의 근무를 위해 희령으로 삶의 거처를 옮긴다. 지연은 서른두 살이다.

 

지연은 결혼을 파탄으로 몰아대곤 이유를 지연의 탓으로 돌리는, 자기 외도에 대해 죄책감이라곤 없는 남편과의 이혼을 자기 존재가 부정된 사건으로 이해하는 듯하다. 희령으로의 이동은 이러한 존재박탈이라는 자기부정의 고통을 해소하려는 삶의 분투이기도 하다. 지연은 아파트와 마트에서 수차례 할머니와 마주치지만 할머니가 다가와 아가씨 내 손녀를 닮았어, 이름이 이지연인데라는 조심스러운 인사말이 오기까지 먼저 다가서지 않는다. 할머니와의 기억이 그녀를 이끄는 무엇이었다는 점에서 이러한 태도는 희령이란 장소가 모순처럼 여겨지기도 하는데, 조금씩 열리는 마음의 문과 함께 희령이 곧 지연으로부터 거슬러 세() 세대 여인들의 기억의 뿌리, 그네들 삶의 역사를, 살아갈 용기를 품고 있는 장소로 드러남으로써 모순은 와해된다.

 

이 어색한 만남 이후 조금씩 할머니에게 마음을 열며, 할머니 영옥이 들려주는 지난 삶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증조모 삼천이, 증조모의 벗인 새비 아주마이와 그녀의 딸 희자, 그리고 새비 아주바이, 증조부, 고조부, 피난길의 안식처가 되어 준 명숙 할머니까지, 현대사를 관통하는 이 땅에 서린 곡절의 시간을 관통한다. 어머니와 딸 사이의 사랑과 몰이해, 강요와 속박의 굴레를 체념처럼 껴안고 살아야 했던 증조모, 할머니, 엄마 세대가 자기 생존을 위해 지녀야만 했던 여자들의 삶의 방식, 그리고 그 속에서 생의 유일한 믿음이 되어주었던 조건 없이 베풀어지는 여인네들의 무한한 사랑의 이야기들이 드넓은 강처럼 유유히 흐른다.

 

39년생인 할머니는 개성 태생이다. 할머니의 엄마인 증조모가 들려준 할머니의 기억과 그녀가 간직한 한 장의 빛바랜 사진 속 증조모와 그녀의 친구 새비 아주마이의 모습, 증조모 삼천과 새비가 주고받았던 한 묶음의 편지가 시간을 뛰어넘어 현재의 지연에게 세상과 인간에 대한 이해, 삶의 태도와 방식의 길이자 빛을 뿌려준다, 그것은 전쟁 전 구습에 매여지내야만 했던 여인네들의 신산한 고립과 고통의 이야기들이며, 전쟁 속 피난시절의 여인들만이 나누던 마음 깊이 깃든 애정의 순간들이다.

 

백정의 딸이라는 신분사회의 냉혹함과 인간들의 폭력성, 생존을 위해 병석에 누운 엄마를 두고 떠나야만 했던 증조모 삼천의 이야기가 그녀의 고통에 무관심과 백정을 구원했다는 보상심리로 일방적 권위만 강요했던 증조부의 좁아터진 이기심과 갈등한다. 또한 전쟁 후 기만적 중혼(重婚)으로 삶을 송두리째 부정당했던 할머니, 허겁지겁 삶의 도피처로 결혼을 했던 엄마의 체념적 이야기와 더불어, 그런 엄마조차 딸에게 남자의 바람조차 여자의 태도에 있다는 근거없는 뒤집어씌우기가 곤혹스럽게 현재의 이야기로 줄기차게 이어진다. 이것은 현재를 사는 지연의 이야기들과 그 속살을 교환하기 시작하는데, 지연의 언니 정연의 어린 죽음으로 고통을 겪던 엄마 앞에서 지연 자신의 슬픔은 발설되지 못한 채 심연에 묻어두어야 했던 고통이 되었음과, 아마 이로부터 비롯된 모녀의 감정적 충돌이 여자의 삶에 씌워진 굴레의 서로 다른 이해로 변주되어 여자의 삶이라는 전체적 성찰이 된다.

 

이렇게 이야기를 읽으면 자칫 여성주의의 소설로, 남성의 가부장과 유교적 권위주의의 비판으로 읽을 수 있지만. 한편으론 이러한 범주에 갇힌 읽기를 거부하는 작품의 면모를 읽을 수도 있다. 삼천의 남편인 지연의 증조부는 표면적으로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너그러운 시선을 보이지만 정작 아내에게는 무관심과 무시로, 자기 가계(家系)에 몰두하는 인간이니 위선적 인물로 비판을 피할 수 없지만, 증조부의 친구인 새비 아주바이로 등장하는 남자는 어떤 경우에도 남위에 올라가서 주인 노릇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었던 거야.”처럼, 배려와 약자인 여자들과 아이들에 대한 세심한 관심을 보내는 인물이다.

 

또한 증조부를 설명하는 증조모의 말 속에도 남성의 권위적 표시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의 품성, 인격으로서 자기가 얼마나 작은 손해에도 예민하고 속이 좁은 사람인지. 자신은 부모를 떠날 만큼 용기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그저 충동일 뿐이었며 처럼, 그는 자기 자신을 평생 몰랐던 자기 무지와 성찰적 인간이 아니었음에 대한 비난의 대상이 된다.

 

이것은 현재의 지연에게도 해당하는 말이 되기도 하는데, 천문대에서 그녀가 수행하는 데이터 정리에서 오류가 발생했을 때, 사정(지연의 이혼)은 나도 들어서 알고 있다. 사적 영역의 감정이 공적 영역에 영향을 줘선 안 되는 거라는 상대 직원의 말에 나의 실수가 사생활 때문일거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으며 그 생각을 내게 전할 수 있을까라는 대목처럼, 세상을 보며 어떤 사건의 양태를 하나의 관념으로 단순화하고 싶어 하며, 그 결과 무수한 진실들을 사라지게 하고서는 단 하나의 이해로 세상을, 인간을 판단하려 드는 어리석음, 그 무지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이것은 타자에 대한 배려 없음으로, 몰이해로, 무관심으로, 나아가 배제와 무시, 폭력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이러한 양태의 가장 위선적인 장면을 보게 되는데, 지연의 이혼 사실을 친족들에게 알리지 않고 있었으나, 삼촌 딸의 결혼식에서 만나게 된 가족들의 모임에서 지연의 결혼 생활을 묻는 질문에 일 년 전 이혼했다는 사실을 발설 할 때이다. 이때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친다는 삼촌이란 인물이 형수라며 지연의 엄마를 낮추어 호칭하며, 조카의 이혼을 조롱의 화제로 비아냥대는 것인데, 지연은 형의 아내인 지연의 엄마에게 형수님으로 호칭을 제대로 부를 것, 그리고 이혼은 당신들에게 알릴만한 개인적 여건이 되지 않았을 뿐임을 설명한다. 여기서 삼촌이란 인물의 내심에 자리한 조잡한 가부장적 권위의식과 조카인 지연이 겪을 수 있는 고통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부재하는 인간들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이란 것, 여전히 이 사회는 구태를 집요하게 반복하고 있다는 실상의 강렬한 스틸-컷 같다.

 

이러한 관념의 단순화 욕구가 파생시키는 공감부재, 무지, 편협성, 판단오류는 인간 모두에 두루 편재하여 인간 세계의 유대를 폭 넓게 파괴하는 중대한 요인일 것이다. 소설은 물론 이러한 관념적 오류와 낡아빠진 신분제나 가부장적 권위의 불모성과 폭력성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보다는 조건 없이 베풀어지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에 가깝다. 어쩌면 모성 신화에 심어둔 거짓 이야기들을 전복하며, 아이와 눈을 마주치며 웃던 어느 날, 자신이 낳은 아이를 사랑하고 있음을 문득 깨닫듯, 아이에 대한 사랑은 엄마의 본성에 억지로 꿰맨 것이 아니라 사랑은 근심에서 자라는것임을, 자기감정에 진실한 어느 순간 다가오는 것일 뿐임을 보여주기도 한다,

 

사실 이 작품 속에서 오래 머물고 싶은 장면이 딱 세 장면이 있는데, 모두 무조건인 사랑이 서로 무한히 교환되는 그런 공간이자 시간에 관련된 것이다. 특히 피난길의 고생을 면하게 해준 새비 아주마이의 고모인 명숙 할머니의 작은 집에서 증조모 삼천네, 새비 아주마이, 할머니, 희자, 다섯의 여자들만이 어우러져 모처럼 조촐한 술상을 앞에 두고 해맑은 애정의 몸짓들을 발산하는 순간이나 삼천의 딸 영옥이 로빈슨 크루소를 읽을 때마다 절제된 침묵의 여인인 명숙 할머니가 귀 기울여 듣는 양상이다. 그리곤 전쟁이 끝나고 증조부의 자기 피붙이들이 피난한 장소라는 희령으로의 이주 고집으로 삼천과 새비네의 이별 후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삼천과 새비가 재회하여 바닷가에서 공놀이를 하는 장면이다. 사실 여자들만의 이 이미지가 왜 낙원처럼 여겨졌을까? 그 해맑은 자유의 정경, 어떤 구속도 없는 그네들의 때 묻지 않은 사랑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찰나의 포착이기 때문이었을 것 같다.

 

도입부에 이런 문장이 있다 지연은 할머니의 이야기, 그녀가 보관해 온 편지들과 사진,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는 일이 세상에 머물다 사라진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기억의 역사에 회의적 심정을 밝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편지를 받아 읽었을 증조할머니의 마음도 내 안에서 살아났다.”로 변화한다, 지연은 엄마와 갈등으로 단절한 할머니의 이야기, 그리고 증조모의 이야기로 거슬러 자신의 직계 여인들의 삶 속으로 뛰어들며 삶을 살아가는 길, 그 길을 비추는 빛을 따라 나아간다. 더 나아지는 모습, 더 행복한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는 강박, 부정당한 자기 존재의 증명을 위해 조바심 서린 두려움에 장악된 자신의 반면교사들을 보았던 것일까?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우리는 타인을 향해 얼마나 공격적으로 변하곤 하는가? 그리고 또 얼마나 편리하게 타인과 세상의 일을 단 하나의 관념으로 축소하여 그것이 곧 진실이라 판단하곤 하는가? 그 사이에 수많은 진실들이 빠져나가버리고 편협하고 고루하며 알량한 쭉쟁이를 들고선 인간의 추레함이란.

 

자신이 죽는 순간까지 자신을 알지 못했던 소설 속 지연의 증조부로 대표되는 인물이 어쩌면 우리네들의 일상적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이 말이 너무 생소해서 나는 순간 움칫 거렸다. 앞으로 내가 널 더 많이 사랑할게, 우리들은 어떤 이유도 없이 사랑해주는 사람을 기대한다. 그렇듯 우리 역시 이유없이 사랑을 누군가에게 줄 수 있을 때 삶은 아마 풍성한 의미로 다가 올 것만 같다.

 

이 작품은 우선 1945년 이전의 개성을 배경으로 한 식민지민의 삶, 제도에서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작동하던 신분제와 남녀의 차별, 그리고 전쟁과 피난길, 피난지 대구에서의 여인들의 생업과 애환, 전쟁 후 현재에 이르는 질기게 작동하는 가부장적 권력 등 이야기를 구성하는 풍부한 소재들과 무엇보다 갈등하기도 하지만 여자들만의 고 고유한 유대와 압도적인 사랑의 이야기는 꿈길을 걷듯 안락한 즐거움이었다고 하겠다. 읽는 동안 외로움은 이미 떠나버렸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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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엉이의 불길한 말 문지 스펙트럼
루쉰 지음, 성민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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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鲁迅,1881-1936)의 산문 10편과 산문시집 야초(野草)전체로 구성된 모음집이다. 중국의 근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사회운동의 사상가로서의 사유를 읽을 수 있는 정선된 글들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대표적 소설인 광인일기Q정전은 많이 소개되고 있으나 정작 그의 사상적 진수라 할 산문이 비교적 덜 알려진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더구나 시대와 인간의 오랜 어리석음의 관성을 꿰뚫는 자기 성찰의 요구는 끈질기게 붙어 떨어지지 않고 시공을 거듭하며 이 세계를 혼란시키는 원인들을 명징하고 냉정하게 바라 볼 것을 요구한다.

 

이 책의 제목이 된 부엉이의 불길한 말이란 문구는 시집 야초(野草)에 수록된 산문시 희망(希望)의 한 구절이다. 20세기 초 혼란기 중국 사회의 청년들이 그 어느 늙은네들보다 더욱 늙어있음을 발견한 놀라움의 표현이다. 헌데 지금은 왜 이리 적막하지? [...] 세상의 청년들도 다 늙어버렸나?” 생물학적 연령은 젊은데 그 내면은 노인들보다 더 늙어빠진 젊음, 마치 동시대 독일의 소설가 토마스 만의 소설 마의 산의 붉은 뺨을 하였지만 죽음을 안은 등장인물들을 생각나게 한다. 부패한 아버지 세대를 비난하지만 정작 부패한 것은 표면의 젊음 속에 숨겨진 결핵을 품은 붉은 뺨의 젊은이들이듯 말이다.

 

이 동시대적 동일 양상은 나치와 기회주의적 극우 국민당이라는 끔찍한 세계로 이어졌다. 중국이나 독일, 이 역사적 동일 유사성은 오늘 한국 사회의 현실과 또한 동일 유사성에 닿는다. 1922년 출간된 그의 단편소설집 외침(吶喊)서문에서 그 어떤 반항도 도전에도 관심이 없는 청년세대의 평화의 안주, 그 사악함을 비판한다. 사실 그에게 평화는 암류가 잠복하는 음험한 파괴의 열화(烈火)에 불과한 것이다. 버젓이 벌어지는 불의에 눈감고 자기 이익에 열중하는 삶이 지속 가능할 것이라 여기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익에 전념한다는 것, 이것은 차츰 비겁과 인색으로, 후퇴와 공포로 변질되고 급기야 소박함을 잃은 말세의 각박함만 남게 되는 것이 필연적임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다.

 

세상은 저항과 파괴의 도전 소리로 들끓어야 한다. 아무 일도 없는 듯한 평온은 익숙한 실리에 가려진 독선과 아집의 세계, 몰락한 정신과 구습에 감염된 습관화 된 눈의 오류가 보이지 않게 할 뿐이다. 산문 악마파 시의 힘(摩羅詩力說)은 어떤 세계든 그 내부의 다른 반항의 목소리가 끝없이 외쳐져야 함을, 그럼으로써만 세계는 아주 조금씩 선의 세계로 다가갈 수 있음을 문학예술론, 시론의 지향할 바를 통해 강론하고 있다.

 

6세기 중국의 문학비평서인 문심조룡(文心雕龍)시자지야, 지인성정(詩者持也 持人性情)’이라며 시라는 것은 잡아두는 것이다. 사람의 성정을 잡아둔다.”라고 했으며, 공자는 시경(詩經)을 설명하길 시삼백 얼언이폐지왈 사무사 (施三百, 一言以蔽之曰 思無邪)’라며, 시 삼백 편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생각함에 삿됨이 없다.”라고 말했다. 루쉰은 이러한 자기 계급 유지 목적의 평화론이 얼마나 교활하고 탐욕스러운 것인가하고 비판한다. 인간의 성정인 시를 규범에 가두어, 그 어떤 다른 목소리도 가두고 죽여 없애려는 권력인 유교적 질서에 경멸을 보내는 것이다. 그 깊숙이 숨겨진 보수적 기만이 민중의 삶을 질식시키고 있음을.

 

루쉰은 이러한 세태에 자신의 문학예술이 아무런 변화도 가져 올 수 없다는 실의로 좌절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때 그에게 쓰기를 요구했던 후배 문인과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중국의 먹물들에게는 제법 알려진 일화이다. 일명 쇠로 만든 방(鐵屋子)’이야기. 창문하나 없는 쇠로 만든 방이니 부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하는 곳에 많은 사람들이 잠들어 있다. 머지않아 모두 숨 막혀 죽을 것인데, 혼수상태에서 죽어가는 것이니 죽음의 비애랄 것도 없다.

 

루쉰은 자신이 살고 있는 중국 사회를 이렇게 생각했다. 그렇기에 큰 소리를 질러 몇 사람을 깨우는 것은 그 깨어난 소수에게 돌이 킬 수 없는 임종의 고통만을 주는 일이고, 그들에게 미안한 일이니 소리 지르는 일이 무용하고 공허한 일이라 말한다. 그때 후배는 말한다. 몇 사람이 일어난 이상 쇠로 만든 방을 부술 희망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죠.”, 루쉰은 그 말에 문득 깨닫는다. 희망, 그것은 말살해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미래에 속하는 것이어서 [...]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에...”라고.

 


몰락한 정신들을 깨워야 하고, 강건함과 저항, 파괴와 도전의 소리를 질러대는 악마가 되는 것이 자신의 소명임을. 그래서 그는 산문 눈을 뜨고 보는 것을 논함(論睜了眼看)에서 정시(正視)를 말한다. 무슨 일이나 눈을 똑바로 뜨고 보는 용기를 가지는 것, 감은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은 원만하고 [...] 문제도 결함도 불평도 없게 되고, 개혁도 반항도 없게 되는 것이니 문제와 결함을 보지 못하게 되고, 보이지 않게 된다고. 불온하고 불의한 세계의 개혁은 요원한 것이 되고 만다고.

 

오늘 우리의 세계에서 전개되는 형국이 이와 다르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자신들만의 폐쇄된 음습하고 어두운 공간에서 자기 이익에만 열중하던 한 탐욕스런 인간이 어느 날 한 낮의 눈부신 햇빛 아래 기어 나왔다. 그 자는 눈이 부셔 눈을 꼭 감은 채 잔존하는 옛 꿈만 계속 꿀 터이다. 눈 감은 그 자에게 어둠이나 빛은 보이지 않는 셈이고, 때문에 눈을 감고서 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인다. 그렇게 기만과 사기가 이 세계를 가득 채운다. 어리석은 대중 또한 눈을 감고 있으니 자못 평화스럽다고 느낀다. 이렇게 세계는 시간을 퇴행하며 썩어 들어간다. 아마 어느 날 눈을 뜬 대중은 자신에게 공포 가득한 지옥이 열려 있음을 보게 되고 그 당혹스러움에 정신을 잃을지도 모른다. 루쉰은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정시(正視)하지 않고, 기만과 사기로 기묘한 도피로를 만들어서 그것을 올바른 길이라고 여긴다는 것. 여기에 국민성의 비겁함과 나태함, 교활함이 증명된다. 하루하루 타락하면서, 오히려 날마다 영광을 본다고 느낀다.”. - 論睜了眼看에서

 

아마 루쉰의 엄청난 산문들 중에서 그 상징적 의미에서 가장 웅변적이고 강경한 글은 단연코 물에 빠진 개는 때리지 않는다는 일견 관용적이고, ()을 막론한 도덕애(道德愛)의 지고로 여겨질 경구에 대한 치열한 반론인 페어플레이의 시행을 늦춰야 함을 논함('Fair-Play'應該綬行)이다.

 

여기서 물에 빠진 개는 호시탐탐 사람을 무는 개이고, 굽신거리며 사람을 기만하고, 수시로 악행을 저지르며, 악행이 드러나면 절름발이 흉내를 내며 동정을 애걸하고, 구제되면 다시금 전과 똑같이 사람을 무는 개다. 루쉰은 이러한 개들, 즉 악을 방임하면 그 개는 사람을 물어 댈 뿐 아니라 우물에 빠진 사람에게 돌까지 던져 넣을 것(投石下井)이라고 말한다. 해서 물에 빠진 개는 때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신에게 페어(fair) 하지 않은데 당신만 페어 하면 결국 폭행을 당하고 죽음에 내몰린다고. 페어 할 자격이 없는 것에 페어를 기대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고 말이다. 민중이 일제 부역자들의 처단을 말 할 때, 이러한 것들에 공정한 도리를 말하면서 보복하지 말아야 하느니, 너그럽게 용서하라느니 떠들어 댄 결과가 오늘 한국사회의 역사적 퇴행을 보게 하고 있다. 이것들은 구제 받은 뒤 고마움이나 회개는커녕 나쁜 짓을 하려는 기회만을 호시탐탐 엿보다가 갑자기 튀어나와서는 사람들을 물어뜯고, 심지어 뱃속을 채우려 나라마저 팔아치울 태세다.

 

여기서 고사가 등장한다. 옹기를 만들어 그 안에 사람들 가두어 죽이는 방법을 고안한 주홍이라는 인간이 있었다. 그 자가 지독히 나쁜 짓을 하여 처벌을 받게되자 판관은 그 자를 옹기에 들어가게 하라!’라고 했다는 이야기다. ‘청군입옹(請君入瓮)’이라 한다. 악에 대한 방임을 마치 관용이라 고지식하게 관대한 체하다 오늘과 같은 역사를 부인하는 혼란 상태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것들에게는 관용의 도(恕道)가 아니라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곧음의 도(直道)를 적용해야 하는 것이 옳다. 페어플레이는 폐단이 크다. 여전히 한국의 정치사회에서는 페어플레이, 물에 빠진 개는 때리지 않는다는 말은 이른 윤리적 잣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안타깝고 수치스럽지만 말이다.

 

당대 민중의 정신 개조를 위해, 쇠로 만든 방 같은 권력의 경계 속에 잠든 인간들을 흔들어 깨우는 목소리를, 들리든 말든, 위협이 다가오든 말든, 그침없이 반항의 목소리를 외치던 이방의 문인이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초월해 오늘 이 땅에 잠에 취한 몽롱한 인간들을 깨운다. 뜻있는 사람이 발양(發揚)하려면 먼저 자기를 성찰하라고 했다. 또한 반드시 남을 두루 알고서야 자각이 생겨난다고 말한다. 자각의 소리가 나오면 그 소리는 반드시 사람들의 마음에 적중하고, 그 깨끗함과 맑음이 이 세계를 향한 빛이 될 수 있다고. 이 땅의 인간과 세계는 한 치도 변하지 못했는지 모른다.

 

사실 적절한 인용이 되지는 않겠지만 사람과 사람의 차이는 때로 유인원과 원인(原人)의 차이보다 더 크다는 인간과 인종 차별 등의 논리를 만들어낸 문제 많은 사회진화론자 에른스트 해겔(E. Haeckel)의 웅변마저 공감되는 시절이다. 구제된 물에 빠졌던 개들이 설치는 형국이니 관대하게 이해될 것으로 믿는다. 이 자기 성찰적 산문을 이제야 발견하고 읽게 된 것도 어쩌면 스피노자기 말하는 유일한 실체로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필연인 것만 같다. 안타까움과 분노로 가득 한, 그러면서 자기 성찰적 지혜로 꽉 채워진 글을 읽으며 켜켜이 쌓인 체증이 조금은 내려간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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