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201 | 202 | 20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폼페이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4-1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4
로버트 해리스 지음, 박아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9월
평점 :
품절


오만하고 탐욕스런 인류에 대한 로고스의 상실과 불카누스(불의 신)의 징벌에 대한 이야기이며, 서기 79년 이탈리아 캄파니아지방 고대도시 폼페이의 화산폭발일인 8월24일을 전후한 4일간을 소재로 하고 있다.

베수비우스 화산폭발은 악취나는 문명에 종지부를 찍어주었다. 그 종교적 위엄에 인간의 왜소함과 외경심을 불러일으킨다. 인류의 자연에 대한 오만불손함, 그 파렴치함과 부정,욕망에 제동장치를 잃어버릴 때 자연은 엄격한 재해를 던져주었다. 베수비우스는 평화롭게 더욱 심한 재난을 인류에게 보내기위해 오래고 더디게 준비하고 있다.
 
작가가 무수히 인구에 회자(膾炙)되었던 폼페이의 재앙을 다시금 소설의 소재로 삼은 의미는 작금의 우리인류세계의 겸양을 잃어버린 그 방자함에 경종을 울리고자 한 것은 아닌가?

귀족들의 관광과 휴양의 거점지역인 네아폴리스(폼페이,헤라클라내움,스타비아이,미세눔등)의 도시들에 상수를 공급하는 아우구스타 수도교 책임자(아쿠아리우스)로 부임하는 젊은 수도기술자 아틸리우스를 주인공으로 하고있다. 고대 로마의 물은 상상이상의 권력이자 자원이다. 로마는 물로 망했다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호화로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공중목욕탕 시설과 공창, 그리고 발굴된 그 음란한 모자이크화와 조각상, 암각화는 그들의 퇴폐와 향락의 극한적 단면을 이야기한다. 화산 재앙의 기술적 이해와 추악한 그들의 문화에 침투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배역으로서 물의 관리자는 정말 안성맞춤이다.
 
권력과 더러운 부정의 기반위에 쌓여진 재화의 위용을 악행과 이기적 욕심에 삶을 바치는 암플리아투스, 실종된 수도교의 전임 아쿠아리우스인 엑솜니우스 행방의 추적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탐욕과 이중성의 현실, 순수함과 악의 근원에 저항하는 암플리아투스의 딸 코렐리아, 마지막까지 한 문명의 저주를 기록한 학자이자 제독이었던 플리니우스를 통해 인간사회의 그 보편적 당위성과 나약함, 그리고 후대 인류를 위한 절망적 희망의 메시지를 보게 된다.
작품의 진귀한 사실성으로부터 그들의 내밀한 문화와 도시 기간망, 선거와 정치 이면의 몰염치와 부패성, 그 화려한 규모와 시설의 현대성에 독자들은 압도된다. 오늘의 문명을 자만하는 21세기의 우리들은 그들보다 조금도 진전된 존재가 아님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부와 권력앞에 귀족의 자존심은 버려진다. 우리사회의 노블리스오브제의 결여와 자신의 이권에만 어두운 그 어두운 양면성까지 유전인자의 돌연변이는 발생치 않고 전달되어 오고 있다. 2000년전의 고대 로마제국의 폼페이와 오늘의 우리 인류와의 오버랩이 착잡함으로 다가온다.
 
이 작품의 소설적 재미는 거대한 로마제국의 상수원 관리 즉, 수도관의 정밀한 네트워크, 공급되는 수량의 감소로 야기된 그 기술적 추적과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음모, 코렐리아와의 순수한 사랑, 노예출신의 귀족 암플리아투스의 악행, 플리니우스 제독의 인간적 진정성이 역사적 사실과 소설적 허구의 통합된 이미지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한다.
 
베수비우스 화산이 폭발하는 날, 우리 인류는 겸허했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린 모두 망각하고 있다. 다시금 베수비우스 화산은 그 폭발을 벼르고 있다. 아직 기회는 있다. 인류는 오만과 그칠 줄 모르는 영악스러움과 탐욕을 버려야 할 것 이라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종교는 평민들에게는 진실로 여겨지고 현자(賢者)들에게는 거짓으로 여겨지며 통치자들에게는 유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세네카(Lucious Anneaeus Seneca)

도킨스는 “이 책은 내 평생에 걸친 과학과의 사랑을 담은 개인적인 저술이다.”라고 밝히고 있듯이 전 인류에 대한 오늘과 미래에 대한 평화로움과 행복 추구에 깊은 애정과 애석함이 저술 전체에 깊이 내재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진화론자(다윈주의자)로서 인류에게 복종과 망상등 끊임없는 해악(害惡)을 제공하는 종교주의자(기독교, 이슬람교의 근본주의자들)와 이들 종교에 대한 냉엄하고 실증적이며 박애(博愛)적인 비판 논서라 할 수 있겠다.

특히, 인류와 인류를 지탱하는 지구와 우주에 대한 창조론자들인 아브라함을 시조로하는 3개 일신교(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배타적이고 기이하며 악의적인 행위에 대한 고발이자 신(God)의 부존재에 대한 과학적인 거증(擧證)이다. 도킨스는 제8장에서 “내가 종교에 적대적인 이유”에서 맹목적인 근본주의 종교가 “과학을 전복시키고 지성을 부패시키는”인류에 대한 적대적이고 악의적 집단이기에 그렇다고 확신한다. 도덕적 기준도 없고 과학적이지도 못하고 이타적 사랑도 존재치 않는 종교적 절대론을 숭배하는 일신교 종교인들의 위험하고 위선적인 믿음으로 희생되는 인류에 대한 보호자로서의 역할에 기꺼이 나섰다.

도킨스는 섬세하고도 친절하게 신(God)이라고 우리들이 지칭하는 의미의 혼동에 대한 명료하고도 적확(的確)한 정의로 자칫 왜곡된 논쟁으로의 꼬투리를 차단해버린다. 초자연적이고 권능과 인격을 갖추었으며 인간의 옮음과 그릇됨을 일일이 단죄하는 우주에 유일한 자를 신이라 하며 그 유일한 자를 섬기는 집단이 종교이다. 이들 종교로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가 중심적으로 거론되며, 이들이 종교로서 인류에게 끼친 그 해악과 기이함과 모순과 거짓에 대해 저자는 분노와 꾸짖음과 학자로서의 설명을 늦추지 않는다.

독자들은 저술 내용에서 ‘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에 대한 무궁무진한 과학적 근거와 논리와 증거들을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다. 우리가 이 탁월한 진화론자와 같은 시대에 살게 됨으로써 괴이하고 사기에 급급한 탐욕스런 성직자들의 무시무시한 권위를 회피 할 수 있는 준거를 갖게 됨이 너무도 다행스럽지 않을 수 없다.

청동기시대에 쓰여지고 수세기에서 10여세기에 걸쳐 조작되고 조합되고 짜깁기된 성서란 것의 시대착오적이고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이 오늘의 우리에게 무지막지하게 적용되는 그 낙후성과 무지함에 아연샐색케 될 것이다. 딸자식을 강간과 겁탈의 대상으로 내어주는 아비와 아들을 끓는 가마솥에 넣는 자를 사랑하는 신은 누구를 위한 신인가? 하나의 민족을 남김없이 쳐 죽이라는 그리고 처녀만을 노획하라고 명령하는 자가 그들이 섬기는 신이다. 이교도는 무조건 죽여 버리라는 것도 그 신의 명령이다.

“종교는 분명히 분열을 조장하는 힘이다.”미국은 이미 신정주의(神政主義)국가의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이미 아프가니스탄,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이 종교가 정치인 이슬람 근본주의가 다스리는 국가들이 있다. 이들은 낡아빠진 30세기전의 구약성서라는 일개 문학소설만도 못한 잡글에 목을 메달고 있다. ‘나 아닌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이렇듯 배타적인 그들의 성전은 서로 상대방을 죽이기에 바쁘다. 미국은 이슬람국가를 이슬람교도들은 미국을 비롯한 일부 유럽국가들을 수시로 살상하고 파괴하고 있다. “종교는 늘 그랬듯이 피에 든 독이다”라는 ‘살만 루시디’의 말은 기막히게 적절하게 들어맞는다.

이 대단한 걸작의 다채롭고 정연한 수없는 이론과 논증들을 모두 풀어헤치기가 버거울 정도이다. 기독교도들이 주장하는 종교가 없다면 인간은 도덕을 상실할 것이라는 해괴망칙 하고 한심한 논리나 생명의 존엄성에 이율배반적이고 비논리적이며 기만적인 종교인들의 행태들에 대해서까지 일일이 증거하고 예를 들고 설명하는 수고를 하고 있다.

이 한권의 책은 풍요로운 지식여행을 하려는 독자들,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저자의 신념과 기저에 흐르는 다위니즘의 해석, 종교가 가지는 허위성과 그 한계에 대한 증거들, 미래의 불편한 종교 근본주의자들의 움직임과 그 우려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정신적 쾌락을 제공 할 것이다. 물론 무신론자이거나 불가지론자이거나 유신론자 저마다 불편함과 분노, 혹은 기쁨과 카타르시등 다양한 신념의 변화를 느끼겠지만 책 속의 그 뛰어난 지식의 향연만큼은 찬탄치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종교는 인간의 존엄성을 모독한다”,“선한 사람이 악행을 한다면 그것은 종교 때문이다”이와 같은 인용된 명제들의 본리를 보려면 바로‘리처드 도킨스’의 “THE GOD DELUSION"으로 당장 뛰어들라!

서로 질시하고 파괴하고 살인하는 배타적이고 도덕심도 없으며 파렴치하고 탐욕스러운 근본주의 종교인들과 그 종교는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도 인간 개인의 도덕심과 이성에 자리를 내주어야 할 것 같다.
“무신론적인 관점은 삶을 지지하고 삶을 고양시키는 한편,
삶이 그들에게 빚지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자기환멸,
안이한 생각, 은근히 스며드는 자기연민에 결코 오염되지 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치욕과 자존은 다르지 않았다”는 작가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평가나 이야기속의 등장인물 혹은 그들의 견해 어느쪽의 편도 아니다라는 말은 사실에 대한 빗나간 착상일뿐 무의미한 말싸움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는 다름아니다. 이러한 중도는 정말 의미없이 그리고 공허하게만 들린다.

그러나 이야기속에서 작가는 정말 명료한 메시지를 우리들에게 보내고 있다.

바로 지금의 한국사회와 한 치의 차이도 없어 보이는 17세기 조선조의 국왕과 그의 신하들이 주고받는, 어떠한 진정한 의미도 없는 말과 말들의 움직임은 청의 침입과 그의 굴복이라는 국가적 치욕의 사실보다 더욱 진저리나는 모멸감을 확실케 해준다. 작가 김훈은 성공했다. 아주 분명하게 소설에서 우리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우며 아둔하기까지한 한국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제발 변화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지독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청의 침입, 우리는 병자호란이라 부른다. 이 무슨 뚱딴지 같은 표현인지...
이러한 역사적 편견은 오늘의 우리 현실에 드러나는 국제관계의 무지함과 무능력한 외교역량과 다르지 않다.
이미 기울어버린 ‘명’에 대한 군신의 의리라는 뿌리깊은 유교적 명분과 세치 혀만으로 나라를 정치하는 천박한 사대부만 우글거리는 인조반정세력과 그 무리들의 무능함은 당시 동북아시아지역의 새로운 국제질서의 이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청이 국제질서의 핵심에 있었다.

국왕과 그의 신하들은 대략 47일간 좁디좁은‘남한산성’에 웅크리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국가의 무참함의 원인에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 오로지 유교적 명분만이 그들 삶의 모든 사고와 행위를 지배하고 있었다. 작금의 한국사회의 정치지도자와 행정권력자들의 행태와 다름이 없다. 지금도 세치 혀만 놀리고 있다..., 지금은 남한산성이 아니라 남한이라는 좁은 지역에서...

작가는 ‘영의정 김류’라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모호하고 의지도 없는 인물과 국제질서의 이해와 국가적 실리주의자인 ‘이조판서 최명길’, 그리고 유교적 명분으로 충효만을 내세우는 ‘예조판서 김상헌’을 그리고, 우직히 자신의 소임에 충실한 이시백, 무엇하나 자신의 결정이 없는 병조판서, 그리고 서날쇠라는 민초, 청의 통역관으로 잡배일뿐인 정명수등 나름의 등장인물에 현실의 성격을 부여했다.

우리가 생활하는 우리사회의 어느 조직에서든 볼 수 있는 인물들로 구성되어있다. 작게는 지역집단에서, 그리고는 기업조직에서, 나아가 정부조직에 이르기까지 남한산성에 있던 그 인물들과 아주 똑같은 행태가 아무런 변화 없이 약400년간을 지속되고 있다.

적군을 대적하는 무관으로서 자신의 소임에 진중한 의미와 그 실행에 힘을 쏟는 ‘이시백’이나, 무능하기 이를데없는 ‘묘당’의 정치권력자들을 비웃어 대는 그러나 자기의 이익을 잃지 않는 이기적 실속파로 묘사되는 민초의 대표격인 ‘서날쇠’는 오늘의 민중들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작가는 우둔하고 좁은 시야와 탐욕에 그득한 우물안 개구리같은 우리한국사회의 세칭 ‘지도계층’과 그들과 하등 다를바 없는 우리 사회구성원들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작가는 이시백만을 사랑하고 있구나, 우리에게는 이시백만이 필요한 것 아닌가? 달달외워 명문대 나오고, 부모 후원받아 유학갔다 오면 말로만 한세상 살 수 있는 사회가 우리사회 아닌가 말이다. 남한산성의 그들의 삶과 어쩌면 이다지도 같은지...

우리민족을 이렇게 아둔하고 무능하며 탐욕스런 이기적 인간들로 4세기를 묶어둔 그 한국적 인식과 유전인자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지...

남한산성에서 왕과 신하는 삶과 죽음, 절망과 희망이 작가말대로 한 덩어리로 엉켜있었다.

그것은 원인을 빼어버리고 청의 칸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하는 결과일뿐, 나라가 그 모양에 이를정도로 무지하고 준비없으며, 책임도 없이 굴러간 그 과정인 원인이 없지 않은가? 남한산성은 그래서 아쉽다. 작가는 바로 그래서 “내 약소한 조국의 운명 앞에 무참하였다”고 하였다. 우리는 약소한 국가가 아닐 수 있다. 오히려 약소한 국가 일 밖에 없었던 이유를 밝혀야 했던 것 아닐까?

그럼에도 여전히 모처럼 우리의 치부를 그려준 ‘남한산성’이 고맙기까지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작품을 주인공의 생활무대로 구분하면 대략 3분 할 수 있겠다. 청진과 무산(북한)에서의 생활, 중국에서, 그리고 영국에서의 삶으로. 작가는 작금의 글로벌화하는 지구촌과 종족의 이동이 의미하는 경계의 모호함을 위한 구도로 도입한 듯하다. 이는 작품속에 스며들어 인류의 삶과 정신의 동질성이라는 인식의 기반위에 인류의 무지와 탐욕 그리고 절망등 본성을 그려내고 이의 이해와 구원을 이야기한다.

주인공 ‘바리’는 청진시 무역직 간부의 일곱째(막내)딸로 비감(悲感)하게 출생한다. 육공주 집안에 또다시 출생한 일곱 번째 공주님 핏덩어리 바리는 바로 버려진다. 우리네 삶 그자체가 이미 원죄이듯이 바리의 세상과의 대면은 버려짐이다. 이후 북선(북한)에서의 삶은 외삼촌의 남선(남한) 도피로 가족이 분열되기까지 행복과 화목함으로 그려진다.
작가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문체로 아기자기한 에피소드와 일상을 영상으로 담듯이 유연하게 북선의 삶을 그려내 독자의 흥미를 견인한다.

외삼촌의 탈출은 바리의 가족을 분열시키고 그들 모두를 어둠으로 내몬다. 무당의 염력이 전해져오는 할머니와 일곱 번째 딸‘바리’ 그리고 칠성이(개)는 우리네 무속설화인 ‘바리공주’와 교차한다. 두만강을 건너 오직 생존만이 삶일 수밖에 없는 처절함에서 어머니와 언니들, 그리고 할머니를 여의고 아버지, 칠성이를 잃고, 하늘아래 오직 어린소녀 ‘바리’만이 거칠고 낯선 이국의 질서에 남겨진다.

북쪽에 있는 우리의 피붙이들이 겪는 좌절과 회한의 단순한 이해를 떠나 인류의 연민과 구원이라는 차원의 시야를 만들어준다.
거칠고 사나운 대륙, 중국에서의 아슬한 생활과 15세 소녀 ‘바리’의 한 인간으로서의 삶의 궤적이 시작되고 죽음과 삶의 교차를 반복한다. 밀항선의 밑창, 그리고 컨테이너 바닥에 숨이 멋는 40여일간은 고통이 아닌 저승과의 수없는 왕래이다.

영국 런던에 기착한 ‘바리’의 삶은 그녀의 성품과 영험한 샤먼적 역량으로 이민사회집단의 무난한 정착과 동화를 가져다준다. 그러나 작품속의 종족은 유색인종 일색이다. 유일한 백인은 ‘에밀리’뿐, 그것도 흑색인종의 주술사를 연결하는 고리일뿐으로 ‘부 와 빈’ , ‘권력과 비권력’, ‘강대국과 약소국’등과 같은 양극화에 대한 이해와 해결의 접근으로서 못내 아쉬운 부분이란 생각을 갖게한다.

‘바리’의 결혼과 남편의 실종, 아이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18살 어린 아내이자 엄마의 번민과 고통은 다시금 ‘바리공주’설화의 환상을 빌려 인류의 본성과 구원을 꿴다.
“불행과 고통은 우리가 이미 저지른 것들이 나타나는 것”, 그리곤 ‘불바다’, ‘피바다’, ‘모래바다’, ‘무쇠성’을 여행한다. 굶어죽은 북선의 식구들, 죽고 죽이는 전쟁의 화신들, ‘목청껏 떠들지만 남의말을 삼켜버리는 아무런 의미도 전하지 못하는’ 종교인들의 허위를 내려다보며 서천의 하늘끝, 인류를 구원하는 생명수를 찾는다. 그러나 생명수는? “그런게 있나”.....

인간의 고통이란 그들의 묙망, 자신들의 절망일 뿐,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한 자는 아무도 없대 . 그래서 우린 목청을 합쳐 서로의 말을 해주든지, 아니면 그냥 침묵하는 것이 좋을텐데, 그리고 작가는 우리 스스로의 구원이란 남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고, 어떤 지독한 일을 겪을지라도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된다고 속삭인다.

작품 전편(全篇)의 이야기는 소설적 재미가 가득함에 틀림없다. 그러나 작가가 시사하고자 했던 집착화된 고정 관념과 의지가 상당히 표면화되어 있는 작품이란 생각을 갖게하며, 정교하게 조립된 기계와 같은 이성적 호소를 기저로 하여, 이 의도가 너무 불그러져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부담도 느끼게 한다. 특히, 작품의 마지막에 급작스런 결론을 내리려는 듯 ‘바리공주’설화의 환상을 현실인식에 무리하게 결부하려는 부조화는 작품의 내면과 흥미를 위축시키기기도 한다.
그럼에도 ‘바리데기’는 인류의 구원과 희망이란 메시지를 분명히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으며, 우리소설이 신자유주의의 질서와 인류라는 커다란 그릇을 활용한 새로운 시작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작품이라 아니할 수 없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201 | 202 | 20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