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술을 다문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인선의 옆얼굴을 나는 보았다. 특별한 미인이 아니지만 이상하게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녀가 그랬다. 총기 있는 눈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성격 때문일 거라고 나는 생각해왔다. 어떤 말도 허투루 뱉지 않는, 잠시라도 무기력과 혼란에 빠져 삶을 낭비하지 않을 것 같은 태도 때문일 거라고. 인선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 혼돈과 희미한 것, 불분명한 것들의 영역이 줄어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우리의 모든 행위들은 목적을 가진다고, 애써 노력하는 모든 일들이 낱낱이 실패한다 해도 의미만은 남을 거라고 믿게 하는 침착한 힘이 그녀의 말씨와 몸짓에 배어있었다. 피투성이 손에 헐렁한 환자복을 걸치고 팔뚝에 주렁주렁 주삿줄을 매달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약하거나 무너진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 P44

문제가 있는 인터뷰이를 만나거나 섭외된 장소에 말썽이 생겨 내가 허둥거리면 동갑내기 인선은 그렇게 선선히 말하곤 했다. 일단 나는 계속하고 있을게. 내가 문제를 해결하든, 절반 정도만 해결하든, 마침내 실패하고 돌아오든 그녀는 장비들을 세팅하고, 현장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을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놓고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터뷰 영상을 녹화해야 할 경우에는 캠코더를 고정시켜놓고, 스틸 사진 촬영을 위해 카메라를 들고서 웃으며 말했다.
시작하고 싶을 때 시작해.
그 웃음에 문득 전염되어 내 마음이 밝아지면, 내 밝아진 얼굴에 안심한 인선의 눈이 더 환해졌다.
뭐, 일단 나는 계속하고 있을 테니까.
그 말이 주문처럼 나를 안심시키곤 했다. 아무리 까다로운 인터뷰 상대를 만나도, 예기치 못한 돌발 변수가 생겨도, 뷰파인더를 들여다보고 있는 그녀의 침착한 얼굴을 보면 더이상 당황할 필요도, 허둥거릴 이유도 없다고 느껴졌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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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망이 되지 않게 하려고……… 나 같은 애한테라도 축하를 받으면…… 네가 엉망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 나는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졌지만…… 너는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 P36

"생일 축하해."
"다 끝났어."
"생일 축하해."
"필요 없어."
"생일 축하해."
나는 감히 반장에게 소리를 버럭 내지르고 말았다.
"다 끝났다고! 다!"
반장이 침대 밖으로 다리를 내밀며 옆에 있던 목발을 들었다. 그러더니 고통스럽게 움직이며 목발을 겨드랑이에 꼈다. 반장은 한 발 한 발 천천히 내가 있는 곳으로 걸어와 말했다.
"끝나지 않았어. 조금 늦으면 어때? 넌 여전히 이렇게 살아있는데, 네 세븐틴 생일을 정말 정말 진심으로 축하해. 그리고 오늘은…… 내 최고의 생일이야." - P38

동규는 나직이 말하고는 또 달리기 시작했다. 재민은 뛰어가는 동규의 뒷모습을 보면서 깨달았다. 3년 전 선우가 죽고 나서 단 한 번도 슬퍼하지 않았다는 것을, 자신이 선우의 죽음과 무관하다는 것을 밝히는 데 급급해 선우 생각은 조금도 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친구가 하루아침에 영영 사라졌는데도 마음 아파하지 않았다는 것을, 재민은 멀리 어둠 속에 솟아 있는 아파를 올려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선우야, 김선우. - P90

하지만 이제 그런 두려움 따위는 아무렇지 않다. 어느 한 세계가 무너진다고해서 다른 쪽 세계가 무너지는 건 아니다. 양쪽에 기대지 않으면 두 세계가 무너져도 나는 살아남을 수 있다. 혼자라도 단단히 땅에 발을 딛고 서 있으면 세상이 무너져도 견딜 수 있다. 왜 이제야 그걸 깨닫게 된 걸까? 어느 쪽에도 기대지 말자고 결심하자 마음이 한층 홀가분해졌다.
나는 새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기 위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편의점은 됐고, 이젠 갈빗집 서빙 자리를 알아볼까? -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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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 - 제22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개정판
강화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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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트’폭력이라는 달콤한 수사로 포장되는 폭력, 상해, 살인이 너무 많다. 원래 많았는데 이제 우리 의식 속에 들어온 거겠지..

요즘 정말 길을 지나가다 젊은 남녀가 심각한 표정으로 있거나 말다툼을 하거나 큰소리를 내거나 울거나 팔을 잡고 뿌리치는 것만 봐도 걱정이 된다, 겁이 난다,,

우리는 다면적 인간인 피해자를 단편적으로만 보려고 한다. 피해자다움. 나도 쉽게 판단하게 된다. 쉽게 비난한다. 피해자가 무조건 선해야 피해자인 건 아닌데.. 이 책은 그런 부분을 잘 나타낸다. 욕망하는 피해자, 거짓말하는 피해자, 남들이 싫어하는 피해자..

수진과 그 남편 사이의 이야기가 훅 마무리되어 뭔가 급히 마감한 듯 아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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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서른이 다 되어갈 무렵, 단아는 연애가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더는 누구를 만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얼마 못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진짜였다. 그리고 단아는 누구를 만나고 있을 때보다, 지금 훨씬 편안하고 단단해 보인다. 언젠가 외롭지 않냐고 물었더니, 단아는 말했다. 누구를 만나고 있을 때가 더 외로웠다고, - P184

"수진아, 사람 믿지 마라. 네 남편도 믿지 마라. 지금은 널 아끼니까 뭐든지 해주고 싶고, 하려고 하겠지. 하지만 사람은 자기가 준 건 절대 안 잊는다. 사람들은 자신의 호의를 절대 잊지 않아. 상대가 어떻게 느끼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마을 사람들을 보렴. 할머니가 일한다고 생각하는 건 너와 나뿐이다. 사람들은 우리를 도와준다고 생각해.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든, 빚을 진 거다. 너 그 사람이랑 평생 빚진 기분으로 살고 싶냐. 네게 준 것들이 많다고 생각할수록 ‘이정도는 요구해도 되겠지‘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 정도’가 뭐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다. 현규는 좋은 사람이지. 나도 알고 있다. 그렇게 변하지 않을 수도 있어. 하지만 사람의 인생에는 늘 만일이 있는 법이다. 결혼은 저울과도 같아. 지금 네 저울에는 아무것도 없어. 처음부터 이렇게 기울어진 채로 시작하는데, 여기에 더 무게를 얹을 필요는 없다. 세상은 변했지. 여자들은 달라졌어. 할머니도 알아. 하지만 그건 변한 세상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과 배경이 있는 여자들의 몫이야. 할머니는 해당되지 않아. 덕 보고 살 생각 없다. 그건 네가 다 가져. 너는 빚지는 거 없이 시작하는 거야." - P223

개소리다. 이강현은 오빠를 믿었다는 여학생들의 울음소리 못지않게 남자는 아랫도리가 빳빳해지는 걸 참는 게 힘들다는 말을 경멸한다. 이건 욕구를 참지 못해서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다. 욕구를 참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 데서 발생하는 문제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 P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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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내 이야기가 알려지고 나서, 누군가에게 실제로 이런 말을 들었다. 내가 그럴 줄 몰랐다고, 그런 일을 당할 여자처럼 보이지 않았다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맞을 것처럼 보이는 여자란 대체 어떤 모습일까. 그리고 그는, 내가 만났던 사람은, 만나는 여자를 때리며 죽여버리겠다고 속삭이던 이진섭은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일까. - P17

그가 나를 구겨진 옷더미처럼 대할 때마다 그 감정을 기억했다. 그는 나를 분명 사랑했다. 그는 단지 조금 달라졌을 뿐이다. 그렇다면 또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이전처럼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그는 조금 피곤한 건지도 모른다. 감당하기 힘든 스트레스 탓에 조금 우울해진 걸지도 모른다. 내가 그를 외롭게 한 건 아닐까. 그러면 내 잘못일지도 모른다. 내가 그걸 헤아리지 못했으니, 먼저 알아채지 못했으니, 잘못한 것이다. 노력하자. 내가 그에게 잘한다면, 그가 나를 보고 느꼈던 감정을 다시 느끼게 한다면 우리는 처음처럼 행복해질 것이다. - P22

저항하지 않았으니까. 싫다고 안 했으니까. 하지만 계속 짓밟히고 있는 기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비참한 기분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용서를 했다. 그러면 마음이 나아졌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어서? 아니. 지저분하고 굴욕적인 그 상황을 내가 그나마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역겨운 상황에 들어온 것이 내 선택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면, 언젠가는 내 선택으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할 수 있었다. - P44

나는 이진섭에게 맞으면서도 맞지 않을 방법만 생각했다. 그의 비위를 맞추고, 기분을 좋게 해서 손찌검을 피할 방법을.
하지만 진짜 필요했던 건 내 목소리였다. 하지 마.

나를 때리지 마. -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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