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는 걸 펄롱은 알았다. 멀리 가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여기저기 돌아다녔고 시내에서, 시 외곽에서 운 없는 사람을 많이 보았다. 실업수당을 받으려는 사람들 줄이 점점 길어지고 있었고 전기 요금을 내지 못해 창고보다도 추운 집에서 지내며 - P22

외투를 입고 자는 사람도 있었다. 여자들은 매달 첫째 금요일에 아동수당을 받으려고 장바구니를 들고 우체국에서줄을 섰다. 시골로 가면 젖을 짜달라고 우는 젖소들이 있었다. 젖소를 돌보던 사람들이 갑자기 다 때려치우고 배를 타고 영국으로 떠나버린 탓이었다. 한번은 세인트멀린스에사는 남자가 차를 얻어 타고 시내로 요금을 내러 왔는데,
그 사람 말이 지프를 팔아야 했다고, 빚을 생각하면, 은행에서 압류가 들어올 걸 생각하면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아서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어느 이른 아침 펄롱은 사제관 뒤쪽에서 어린 남자아이가 고양이 밥그릇에 담긴 우유를 마시는 걸 봤다. - P23

늘 이렇지, 펄롱은 생각했다. 언제나 쉼 없이 자동으로다음 단계로, 다음 해야 할 일로 넘어갔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 삶이 달라질까 아니면 그래도 마찬가지일까 아니면 그저일상이 엉망진창 흐트러지고 말까? 버터와 설탕을 섞어 크림을 만들면서도 펄롱의 생각은 크리스마스를 앞둔 일요일, 아내와 딸들과 함께 있는 지금 여기가 아니라 내일, 그리고 누구한테 받을 돈이 얼마인지, 주문받은 물건을 언제어떻게 배달할지, 누구한테 무슨 일을 맡길지, 받을 돈을어디에서 어떻게 받을지에 닿아 있었다. 내일이 저물 때도생각이 비슷하게 흘러가면서 또다시 다음 날 일에 골몰하리란 걸 펄롱은 알았다. - P29

곧 펄롱은 정신을 다잡고는 한번 지나간 것은 돌아오지않는다고 생각을 정리했다. 각자에게 나날과 기회가 주어지고 지나가면 돌이킬 수가 없는 거라고. 게다가 여기에서이렇게 지나간 날들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게, 비록 기분이심란해지기는 해도 다행이 아닌가 싶었다. 날마다 되풀이되는 일과를 머릿속으로 돌려보고 실제로 닥칠지 아닐지모르는 문제를 고민하느니보다는. - P36

아무것도 달라지지도 바뀌지도 새로워지지도 않는 걸까? 요즘 펄롱은 뭐가 중요한 걸까, 아일린과 딸들 말고 또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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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것들
앤드루 포터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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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단편이 사라진 것들을 안타까워하고 그리워하는, 마지막 표제작에서 방점을 찍는, 일관된 주제를 관통하는 쓸쓸하고도 아름다운 단편집이다. 이토록 다정하고 섬세하고 자상하고 배려심 넘치는 40대 중년 남성을 만난 적이 있던가(책에서라도...) 그의 50대, 60대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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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4-02-06 20: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공감입니다. 이토록 다정한 40대 남성! 알라딘에서는 좀 보입니다만 ㅎ

햇살과함께 2024-02-07 00:45   좋아요 1 | URL
현실에서는 찾기힘든 ㅋㅋ 책과 온라인에만 있는??
 

실루엣

굉장히 힘들긴 해도 보람이 크다고, 구체적으로 어떤 보람인지는 설명하기가 힘들다고. 새로 부모가 된 많은 사람들이저지르는 큰 실수 중 하나는 지나친 기대라고 그들은 말했다. 린지는 그들 부부도 같은 실수를 저질렀지만 지금은 기대를 낮추는 법을 배웠다고 했다. 그러고는 개릿을 돌아보며그의 손을 꽉 쥐었다.
"부모가 되면 사람이 바뀐다 어쩐다 다들 얘기하잖아요."
린지가 말했다. "뭐, 물론 그렇긴 해요. 하지만 그런 말을 듣고 흔히 떠올리는 변화와는 다를 뿐이죠. 뻥 뚫린 마음이 채워진다거나 하진 않아요. 무언가를 해결해주진 않죠. 그저 달라질 뿐이랄까요? 때로는 더 좋게, 때로는 더 나쁘게. 하지만 대부분은 그냥 전과 다르게."
린지가 개릿을 돌아보며 그가 읽었다는 행복과 육아의 관련성에 관한 연구 논문 얘기를 해보라고 채근했다. 그러자 개릿은, 전문적인 내용까지 깊이 들어갈 생각은 없지만, 맞는다, 대학원생과 교수로 이루어진 연구팀이 행복과 육아의 관계에 대해 꽤 광범위한 연구를 수행했는데 실제로 부모가 된다고 더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사실은 부모가 되면, 적어도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더 불행해진다는 상당히 강력한 증거도 있다, 라고 말했다. - P181

포솔레

언젠가부터 나는 주문을 할 필요조차 없게 되었다. 바텐더들은 나를 알았고 내가 왜 거기에 있는지도 알았다. 그들은내가 바 끄트머리에 나타나면 빙긋 웃고 고개를 끄덕인 뒤주문을 넣었다. 몇 분 뒤에는 막 끓인 포솔레 그릇이 내 앞에놓였다.
이 식당 밖의 세상에서 내 인생은 혼란 그 자체였다. 집에 어린아이가 둘 있어서 아내와 나는 잠을 거의 못 자고 심지어 대화도 거의 하지 못했다. 하지만 여기 이 식당에 있으면 그 모든 것이 사라졌다. 나는 사십오 분 동안 수프를 먹고 신문을 읽고 가끔은 와인을 마시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식당은 어둡지만 편안했고, 배경음악은 주로 경쾌한 어쿠스틱 멕시코 음악으로 1930년대와 1940년대에 나온 오래된 곡들이었다. 손님들도 대체로 나이가 많거나 그렇게 보이는들, 모르긴 해도 이십년, 삼십년 동안 이곳에 드나들었을사람들이었다. - P232

히메나

그해 봄에는 나이들어간다는 것을 한층 실감했다. 물론 거울을 보면 바로 느낄 수 있는 사실이었지만 다른 곳에서도 느꼈다. 예컨대 슈퍼마켓에서 젊은이들 사이를 걷고 있으면 아무도 나를 의식하거나 쳐다보지 않았다. 가장 큰 슬픔은 바로그런 인정의 부재에서 왔던 것 같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 현실, 유령이 되어 세상을 살아나가는 현실이었다.
"그러나 히메나와 함께 있으면 늘 다시 보이는 존재가 된느낌이었는데, 아마 그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히메나는 젊었고, 어쨌든 나보다는 젊었고, 나를 바라봐주었다. 아마도 그 눈길에 연애 감정은 없었겠지만ㅡ나 역시 그런 차원에서 생각하진 않았다―같은 인간으로서, 자신과 마찬가지로 두려움과 후회에 휩싸인 채 인생을 망치지 않으려 애쓰며 이 땅위를 걷는 사람으로서 나를 바라보았다.
비록 나는 정말로 인생을 망치고 있었고 그 사실을 알고 있긴 했지만 말이다. 나는 혼자 궁리하며 내 인생을 수습하거나, 적어도 영화 작업이나 다른 프로젝트에 매진해야 할 시간에 히메나와 마냥 노닥거리면서 인생을 망치고 있었다. - P267

사라진 것들

내가 어쩌다 한 번씩 함께 뭔가 하자고-저녁을 먹거나 술을마시러 나가자고 제안했을 때도 타냐는 당장은 사람 많은 곳에 갈 만한 마음 상태가 아니라고 말했다. 내가 그게 무슨 의미냐고 물어도 더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그저 슬픔을 다루는 방식이 달랐던 것 같다. 정신적 외상을 일으키는 어떤 일이 일어나면 나는 성격상 그것에 대해 - P304

말하고 마음을 털어놓는 편이었지만 타냐는 훨씬 더 내향적이고 안으로 숨어드는 사람이었다. 타냐의 성정은 주위에 벽을 쌓고 담요를 누에고치처럼 둘둘 감은 채 소파 위에 누워 누구와도 말하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니얼의 실종 이전에도 우리 사이는 이미 벌어지고 있었기에 나는 문제가 더 악화될까봐 걱정스러웠다. - P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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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틴

나는 항상 책과 와인 한 잔, 때로는 칵테일 한 잔을 들고 그 방에 앉아 있는 시간을 즐겼다. 그것이 요즈음 내 인생의 단순한 즐거움이었다―퇴근하고 돌아와 아이들이 잠든 뒤 저녁두세 시간을 그렇게 보내는 것. 내가 더 거창한 것을 원했나? 가끔은 그렇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 순간에는 술 한 잔을 들고 거기 앉아서 묘한 시적 감흥을 일으키는 그 음악을 즐길 - P20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이곳이 내 집이고, 나는 그 안에서 안전하며, 복도 저편에서는 내 아이들이 각자의 침대에서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 P21

넝쿨식믈

그동안 나는 안마당에 앉아서 책을 읽으며 저녁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았다. 예전부터 늘 읽으려 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던 고전들을 하나하나 독파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마담 보바리』『에피 브리스트』같은 책들. 안마당은 사방이사막식물들-샐비어와 유카와 선인장-로 둘러싸여 있었고마당 한쪽 끝에 있는 높은 철제 울타리에는 부겐빌레아를 비롯해 꽃 피는 넝쿨식물들이 뒷골목까지 흘러내렸다.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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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숲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0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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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반세기만에 다시 읽었다. 하루키의 책과 음악 취향을 보여주는 책. 이렇게 많은 책과 음반이 소개되는 줄 몰랐다. 하루키의 청춘에 대한, 섹스와 여성에 대한 환상과 로망을 보여주는 책이다. 여전히 청춘의 아이콘이라는 하루키의. 그때도 지금도 청춘을 즐기지 못한 나의 오글거림은 나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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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12-30 15: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의 오글거림도 저의 몫이겠죠. ㅋㅋㅋㅋ

햇살과함께 2023-12-31 15:42   좋아요 0 | URL
나만 오글거리는 거 아니어서 안심…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3-12-30 15: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니글거림은 제가!!! 제가 이 책 상실의 시대 시절 읽고, 반딧불이 읽고, 집에 서너시리즈?권? 모셔둔 거 같은데 하루키 못 읽어(다들 좋다는데 나만 왜이래 하고…)병이네요…

잠자냥 2023-12-30 15:37   좋아요 2 | URL
유열님 동병상련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23-12-30 15:39   좋아요 1 | URL
하루키 리뷰대회 우승 예비자의 발언은 무효입니다. (이상 하루키 못 읽어서 리뷰대회 못 나가는 반놈이었습니다. )

잠자냥 2023-12-30 15:40   좋아요 2 | URL
열님! 저 은바오에요!🐼

반유행열반인 2023-12-30 15:42   좋아요 2 | URL
은바오 사칭범! 그치만 잠자냥님이라 다 용서되요! 결혼만 해주시면!!! 이러실 듯… 햇살님 여기서 이러고 폐가 많습니다…

햇살과함께 2023-12-31 15:44   좋아요 1 | URL
열반인님도 그러시다니 반갑네요!
오글거림에도 리뷰 대회 참여하시는 잠자냥님의 그 인내심을 리스펙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