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에 가톨릭 부르주아 계층이라 교황이 피임에 대해 제시한 훈계들을 존중했기에, 비밀을 털어놓는다면 가장 마지막에 선택할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월부터 끝까지 내가 속내를 털어놓았던 사람은 바로 그녀다. 나는 이제야 이런 사실을 깨닫는다. 내가 처한 상황을 누군가에게 말하라고 몰아붙이는 욕구는 비밀을 털어놓을 상대의 가치관이나 판단을 고려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 상황에서 말조차 하나의 행동이었고, 그 결과는 아무래도 상관없었으며, 말을 함으로써 상대방을 현실의 놀라운 광경 속으로 끌고 가보려고 애썼다.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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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겪은 임신 중절 체험 - 그것도 불법으로 - 이 끝나 버린 이야기의 형식을 띤다고 해서 그것이 그 경험을 묻히게 놔둘 타당한 이유가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 정의로운 법은 아이러니하게도 거의 매번 ‘모든 게 끝났다.’라는 명목으로 이전 희생자들에게 입 다물 것을 강요한다. 그래서 그 이전과 똑같은 침묵을 일어나게 하는 일들을 다시 뒤덮어 버려도 말이다. — 1970년대의 투쟁들 - ‘여성들에게 가해진 폭력‘ 같은 것에 맞선 - 이 어쩔 수 없이 단순화한 문구들과 그런 집단적인 관점에 거리를 두면서, 내가 나로서는 잊을 수 없는 이 사건을 당시의 실재 속에서 과감하게 맞설 수 있는 까닭은 바로 임신 중절이 이제는 금지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 P20

장 T.가 나를 모욕적으로 대했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그에게 나는 섹스 제안을 받아들일지 거부할지 알 수 없는 여자의 범주에서, 이제 의심할 여지없이 이미 섹스를 경험한 여자의 범주로 이동한 셈이었다. 두 범주 사이의 구분이 엄청나게 중요하고, 여자를 판단하는 남자의 태도에 영향을 끼치던 시절에, 그는 무엇보다 현실적인 면모를 드러냈다. 게다가 나는 이미 임신한 상태라 임신할지도 모른다는 위험마저 없었다. 불쾌한 일화였지만, 내 상황에 비춰 보면 어쨌든 하찮은 일이었다. 그는 의사의 주소를 찾아 준다고 약속했고, 나는 달리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이들을 알지 못했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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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 매력이 철철~~

나이가 더 많고 세상을 더 잘 아는 여자로서, 그 애의 잘못을 이해하고 헤아리게 되면서, 그리고 그 애의 망가진 미래를 예견하면서, 마로너 부인의 마음속에 새로운 감정이 강력하면서도 분명하게, 억누를 수 없이 차올랐다. 이런 일을 저지른 남자에 대한 이루 말할 수 없는 원망이. 그는 알고 있었다. 간파하고 있었다.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충분히 예견하고 가늠할 수 있었다. 순진하고, 무지하고, 고마워하며 따르고, 타고나길 온순한 성격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남았다. 다 알면서 그런 점을 의도적으로 이용했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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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있을 때 나는, 첫째 책을 제일 많이 읽었다. 나의 내부에서 끊임없이 끓어오르는 모든 것을 외적 감각으로 억누르고 싶었던 것이다. 외적인 감각 중 그나마 나한테 가능했던 것은 오직 독서 하나뿐이었다. 독서는 물론 많은 도움이 되었으니, 흥분에 들뜨기도 하고 달콤함에 젖기도 하고 괴로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때론 끔찍할 정도로 지루해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몸을 움직이고 싶었기에 나는 갑자기 어둡고 추잡한 지하의 방탕, 아니 방탕 나부랭이에 빠져들었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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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어떻게 알겠느냐마는, 인간은 오직 먼발치에서만 그 건물을 좋아할 뿐, 가까이서는 절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건물을 짓는 것만 좋아할 뿐, 그 안에서 사는 것은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나중에 그걸 aux animauxdomestiques(가축들에게), 그러니까 개미나 양이나 뭐 그런 것들에게 줘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 P65

나는 물론 나의 관청 동료들을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증오하고 또 경멸했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을 좀 무서워했던 것 같다. 갑자기 그들이 나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 무렵엔 그들을 경멸하다가도 어쩐지 갑자기 그들이 나보다 낫다는 생각이 드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지적으로 성숙했고 점잖은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무한히 까다롭지 않고서는, 또 어떤 순간엔 자기 자신을 증오할 만큼 경멸하지 않고서는 허영심에도 사로잡힐 수 없다. 하지만 남을 경멸하든지 아니면 남이 나보다 낫다고 생각하는지 간에 마주치는 누구에게나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심지어 나에게로 쏟아지는 아무개의 시선을 참아 낼 수 있는지실험까지 해 봤지만, 늘 내 쪽에서 먼저 눈을 내리깔았다. 이것이 나를 미칠 정도로 괴롭혔다. 또 나는 웃긴 놈이 될까 봐 병이 날 정도로 무서웠던 나머지, 외적인 것과 관련된 모든 것에서 노예처럼 인습을 숭배했다. 기꺼이 일반적인 통념을 따랐으며 온 마음으로 내 내면의 온갖 기괴함을 저어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끝까지 견뎌 낼 수 있었겠는가? 우리 시대의 지적으로 성숙한 인간이 응당 그렇듯, 나는 병적으로 성숙해 있었다. 반면 그들은 모두 둔한 데다가 한 무리 속의 숫양들처럼 서로서로 닮았다.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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