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햇살처럼 차려입거나, 배가 고파서 안달하거나, 완전히 맑은 정신으로 일어나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고 마음을 신중하면서도 상냥하게 보듬어 보는 것이 엘리너로서는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칫솔질조차 이토록 상쾌한 적이 있었나 싶었다. 모두 푹 잔 덕분이야.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생각보다 잘 못 잤던 것이 분명해. - P155

전날과 마찬가지로, 대화가 매끄럽게 이어지며 두려움에 대한 염려를 떨쳐 낸 덕분에 엘리너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마도 그녀는 모두를 대표해 이따금 두려움을 토로할 자격을 얻은 듯했다. 다른 이들이 그녀를 달래면서 그들 자신도 다독여 두려움을 떨쳐 내는 것이리라. 아마도 그녀는 모두를 대신해 온갖 두려움을 담기에 충분한 역량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저들은 어린애 같아. 서로 먼저 도망치라고 배짱을 겨루며 달아날 채비를 하다가 마침내 누가 달아나면 욕을 퍼붓지. 그녀는 접시를 밀치고 한숨을 쉬었다. - P158

행복을 인정하는 것은 행복을 없애는 짓이라는 평생의 믿음을 내다 버린 그녀는 거울 속의 자신을 향해 빙그레 웃으며 소리 없이 말했다. - P211

"신체적 위험은 없습니다. 유령의 기나긴 역사를 살펴보면 그 어떤 유령도 사람의 신체를 해친 적은 없죠. 사람이 스스로 자해를 하지 않는다면요. 유령이 인간의 정신을 공격한다고조차 말하기 어렵답니다. 정신과 이성은 공격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죠. 우리가 지금 이곳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우리의 이성은 유령의 존재를 믿고 있지 않습니다. 심지어 어젯밤과 같은 일을 겪었으면서도 ‘유령‘이라는 단어를 언급할 때면 자기도 모르게 살짝 미소를 지어 버리죠. 사실 초자연 현상은 현대적 정신의 가장 취약한 곳을 공격하는 것이 주특기입니다. 미신에 대한 보호용 갑옷을 벗어 버렸으나 대체할 방어책을 아직 만들지 못한 곳이죠. 어젯밤에 정원으로 달려가거나 문을 두드린 존재가 유령이었다고 이성적으로 믿는 사람은 우리 중에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어젯밤 힐 하우스에서 분명 뭔가가 일어났고, 이성의 본능적 피난처인 자기 회의에 의지할 수 없게 되었죠. ‘그건 다 내 상상이었어‘라고 말할 수 없는 겁니다. 다른 세 사람도 그 자리에 있었으니 말이죠." - P216

두려움과 죄책감은 자매인 법이다. -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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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반납전 빨리 읽기~

"항상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요. 우리의 용기가 어디에서 오는지 우리는 결코 알지 못하죠."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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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책 쏜살 문고
토베 얀손 지음, 안미란 옮김 / 민음사 / 2019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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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너무 사랑스럽다. 너무 슬프지도 너무 즐겁지도 않지만. 잔잔히 슬프고 잔잔히 즐겁다. 어릴 때 방학마다 가던 시골 할아버지댁, 외가집 생각난다. 할머니와 소피아가 어두운 밤바다의 등대와 배의 불빛을 바라보듯. 가로등도 없는 깜깜한 시골밤에 가끔 지나가는 자동차 불빛을 보던 때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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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8월에 생기는 이런 큰 변화들을 언제나 사랑했는데, 그것은 어쩌면 일이 그렇게 흔들림 없이 진행되었고 모든 물건들이 정해진 자신들만의 자리로 돌아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모든 흔적들이 섬에서 사라져 버릴 수 있는 계절, 섬이 최대한 원래 상태로 복구될 수 있는 계절이었다. 물풀이 둑이 되면서 지친 밭이랑을 덮쳤다. 오랜 비가 땅을 고르게 하고 물로 쓸어 갔다. 아직도 남아서 핀 꽃들은 붉은색과 노란색으로 빛났고, 물풀 위로 환한 빛깔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숲에는 보기 드물게 커다란 흰 장미들이 피어 하룻낮과 하룻밤 동안 숨 막히게 화려한 모습을 뽐냈다.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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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일이라고, 할머니는 생각했다. ‘이제는 설명할 수가 없네. 단어가 생각이 안 나. 내가 노력을 덜한 건지도 모르지. 너무 옛날 일이야. 지금 있는 사람들은 다들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지. 내가 마음이 내켜서 그 이야기를 하지 않는 한, 그때 일들은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 되고 마는 거야. 다 덮이고 끝나는 거지.’ - P86

"어떻게 알아?"
"아가야." 할머니가 조급하게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한단다." 할머니는 매우 지쳐서 집으로 가려고 했다. 섬을 방문한 일로 할머니는 어딘가 슬퍼졌다. 말란데르한테는 뭔가 생각이 있었지만, 스스로 이해하려고 애를 써도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하리라. 너무 늦은 뒤에야 이해하는 것들이 있으니까. 그러고 나면 더 이상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힘이 없다. 아니면 중간에 다 잊어버리고는 잊어버린 줄도 모른다.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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