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에는 아파트가 없다 - 초록도깨비 낮은산 작은숲 15
김중미 지음, 유동훈 그림 / 도깨비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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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이 우리에게 좀더 쾌적하며 안락한 생활을 부여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혜택이 모두에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개발’이란 명목으로 삶의 자리를 빼앗겨 억울함 가운데 한숨과 눈물로 세월을 보내야만 하는 이웃들이 상당수에 이른다.

김중미의 글은 바로 이런 ‘개발’의 이면에 도사린 어두움에 관심을 갖는다. 하지만 그녀는 이러한 어두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피어나는 한줄기 빛과 같은 희망을 그려낸다. 그 희망은 비록 작은 이들이지만, 이들이 함께 나누는 정을 통하여 새록새록 자라간다. 그의 글은 궁극적으로 작은 이들에게 관심을 가짐으로 그들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자 함에 있다.

“우리 동네에는 아파트가 없다”는 가난한 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빈민촌인 ‘만석동’에 이사온 한 가정의 아이들이 쓴 일기를 차례로 살펴보는 형식을 취한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만큼이나 북적거리며 살갑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환과 그 속에 피어나는 정(情)을 아이들의 눈을 통하여 보여준다.

상미네 가족이 만석동으로 이사를 가면서 가족이 함께 살게된 희망으로 일기는 시작한다. 그런데, 막상 도착한 곳은 가난의 불쾌함과 불결함이 덕지덕지 엉켜있는 어촌이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열심히 살아가지만, 그들의 부지런함에도 그들은 가난을 벗지 못한다.

“엄마는 아버지랑 둘이 버니까 이제 금방 부자가 될 거라고 좋아한다. 근데 나는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우리 동네 엄마 아버지들은 거의 다 공장에 다니는 것 같은데 별로 부자 같지 않기 때문이다.”(25쪽)라고 첫째 상윤은 말한다.

가난이 이들의 게으름 탓만이 아님을 저자는 아이의 눈을 통해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가난은 그들의 게으름 탓이 아니라 사회구조의 잘못과 부의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을 보면 사람들이 다 잘 사는 것 같은데 우리는 왜 이렇게 가난한지 모르겠다”(94쪽)는 넷째 상희의 질문은 가난한 이들을 대변해서 저자가 사회를 향해 외치는 함성이다.

왜 그들은 가난해야만 하는가? 왜 그들은 항상 궁색함을 달고 살아야만 하는가? 그처럼 아등바등 노력함에도 가난이란 괴물을 떨쳐버리지 못함은 무엇 때문인가? 왜 다른 이들은 매일같이 유유자적하면서도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는 것인가? 왜 사회는 우리나라가 잘 살게 되었다고 선전함에도 찢어지는 가난이 여전한 것은 무슨 조화란 말인가? 어느 샌가 만석동 곁에 자리잡은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과 자신들의 삶이 그처럼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한 의문가운데 그들의 아픔은 커져가지만, 셋째 상미의 바램은 의외이다. 비록 만석동이 가난의 궁색함과 불결함과 불쾌감이 스멀거리는 곳이라지만, 자신들의 삶의 추억과 작은 기쁨들이 있던 곳에서 가족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더 이상 아파트가 그곳에 들어서지 않아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 동네에는 아파트가 없다”란 제목은 만석동이 아파트와 대조된 빈민촌임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면서 아울러 그곳에 아파트가 더 이상 들어서지 않아 정겨운 이웃들이 함께 살아가기를 희망함이 투영된 것이다.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비밀 없이 서로를 의지하고 왕래하며 살아가는 빈민촌의 모습. 반면 안락함과 편리함은 있지만, 이웃이 누구인지 관심조차 갖지 않는 단절의 상징인 아파트는 대조를 이룬다.

우리네 삶이 점차 편리해지고 발전해가지만, 그에 비례하여 이웃 간의 정을 잃어 가는 현시점에서 이 책은 진정 우리가 회복하여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한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땅엔 더 이상 단절과 이기주의의 상징인 ‘아파트’는 없어야 한다. 움켜쥐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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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 이야기 어른을 위한 동화 3
김지수 지음 / 문학동네 / 199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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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의 고마움과 소중함을 잊고 살아가곤 한다. 그러면서 흔하지 않은 희귀한 것들을 귀한 존재라고 착각하며 살아가곤 한다. 하지만, 진정 소중하고 존귀한 것들은 우리의 주위에 언제나 함께 하는 것들이다. 신이 세상을 만들 때, 우리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소중한 것들은 가난한 이나 부유한 이나 차별 없이 모두가 함께 누릴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러한 예로 공기와 물, 그리고 나무를 들 수 있지 않을까?

껓에 있어서도 이와 같지 않을까? 물론, 들꽃이건 온실에서 자란 화초이건 간에 꽃이 아름답고 소중함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값없이 감상할 수 잇는 들꽃들보다는 비싼 값을 지불하고 사는 꽃들을 더욱 귀하게 여김 역시 사실이다. 물론 값을 지불하고 사는 가꾼 꽃들이 들꽃들 보다 화려함이 사실이다. 하지만, 들꽃들은 그들 꽃처럼 화려한 아름다움은 뒤진다손 치더라도 은은함과 투박함 내지는 청초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여기 이처럼 은은한 사랑 이야기가 있다. 댐 공사로 인해 수장될 운명에 놓인 한 시골 마을. 모두들 보상금을 받고 떠나버린 그 마을엔 오지 않을 죽은 아들을 기다리며 자신이 거둔 벙어리 소녀와 함께 외로이 살아가는 한 노인이 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외롭지만은 않다. 그에게는 속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들꽃 보살핌의 소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들꽃들 하나하나에 잊혀져간 과거 사람들의 영혼이 실려있다는 마음가짐으로 들꽃들을 소중히 키워나간다.

그러한 마을을 찾은 한 풋내기 사진작가에게 꽃에 얽힌 사연들을 하나하나 전하는 노인. 노인의 도움으로 들꽃들의 마음을 엿보면서 사진작가의 작품은 점차 알려지기 시작한다. 유명세와 함께 젊은 작가는 화려하고 안락함을 상징하는 모델과 사랑에 빠지면서 들꽃마을을 잊게 된다. 시간이 지나 모델과의 화려한 사랑이 끝나버린 사진작가는 세상을 떠난 노인이 자신을 죽었던 아들이라 여겼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들꽃을 돌보던 노인과 사진작가의 만남은 결국, 벙어리 소녀와의 결혼으로 이어진다. 처음엔 그저 시골 소녀에 불과했지만, 어느덧 그 아름다움이 밖으로 드러나 버린 벙어리 소녀와의 결혼은 바로 은은한 아름다움의 발견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사랑이 왠지 공허한 울림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도 화려함만을 쫓아가는 행태에 있지 않을까? 눈에 틔는 화려함을 추구하며 그 아름다움에 몰입하지만 쉬이 식어버리는 사랑의 세태를 저자는 꼬집고 싶었던 것일까? 우리네의 사랑이 들에 핀 한 송이 꽃처럼, 일견 투박하지만 자신의 자리에서 소박한 작은 아름다움을 키워 가는 사랑이라면... 그러한 사랑으로 조금씩 키워간다면 들꽃의 생명력처럼 우리네 사랑도 영원하지 않을까? 노인이 들꽃을 키워갔듯이 나 역시 삶의 자리에서 작은 사랑을 키워가리라. 영혼이 실린 사랑을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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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일기
노먼 메일러 지음, 조성기 옮김 / 민음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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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에 접근하면서 우리가 흔히 범하는 오류는 바로 성서의 기록, 수집, 편집 작업이 성서 내용이 가리키고 있는 시대와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음을 간과한다는 데에서 발생한다. 다시 말해, 성서의 내용이 전개되고 있는 시대와 성서가 기록된 시대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신약성서 역시 마찬가지이다. 특히 4복음서의 경우, 이들의 기록은 예수 당시가 아닌, 그로부터 몇 십 년이 지난 시대이다. 그렇기에 복음서들의 내용은 예수 당시의 내용을 사실 그대로 전달하고 있다기보다는 그 복음서들이 기록되어지는 신앙공동체 내에서 그들 공동체가 지향하는 바에 영향을 받아 기록되어졌다. 따라서 복음서들은 자신들 공동체가 추구하는 바에 따라서 신격화되어 있는 예수상을 그들 복음서에 투사하였다. 그렇기에 각각의 복음서들은 유사한 부분이 있으면서도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또한,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에게 예수는 인간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온 인류의 구세주로써 그는 신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렇기에 복음서 속에 있는 예수에 대한 접근에 있어 예수의 인간적인 면에 대한 접근이 지나치게 터부시되고 있는 경향 역시 있음이 사실이다.

노먼 메일러의 <예수의 일기>는 그의 글 첫 부분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복음서는 예수에 대한 기록에 과장이 많이 있음을 전제하고 글을 전개해 나간다. 또한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신적인 존재인 예수, 하지만 한 인간이었던 그가 겪었던 갈등, 두려움, 성냄, 슬픔, 기쁨, 내적 혼란, 주저함, 자신감 등을 매우 잘 그리고 있다. 그는 이런 예수의 내면 세계에 주로 관심하면서 이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예수의 시각에서 일인칭시점으로 예수 일대기를 풀어 가는 방법을 택한다.

그렇기에 본서는 예수의 인간적인 측면의 강조와 그의 인간적인 고민을 엿본다는 점에서는 훌륭한 길잡이가 되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그가 첫머리에서 말했던 예수에 대한 과장이 적지 않다는 전제는 글이 전개되어감에 있어 실망을 안겨준다. 여전히 작가는 지난 2천년간에 형성된 기독교의 전통에서 예수를 바라보고 있다. 그렇기에 눈에 띄는 복음서 저자들의 과장을 그는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글을 써내려 간다. 어쩌면 그러한 부분은 그가 전문적인 신학자가 아니기에 갖는 한계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럼에도 그의 작업이 격찬을 받을 만한 것은 기독교 역사가 옷을 입힌 예수의 신격화 작업을 그는 예수의 내면세계에 대한 묘사를 통해 오히려 인간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인간 예수가 행하지 않았을 법한 예수 신격화의 작업들을 그는 예수의 사역으로 인정하면서, 그런 신격화 작업의 흔적들을 예수 일대기에서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의 인간적인 내면세계를 파헤치는 재료로 삼는다. 이런 그의 작업은 과히 격찬 받을 만 하다.

그의 글에 있어 또 하나의 아쉬운 점을 찾는다면, 예수의 일대기를 다루고자 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범하는 오류인데, 모든 복음서의 내용들을 짬뽕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복음서 저자들은 각자가 속한 신앙공동체의 전통에 의해서, 또는 각자가 추구하는 신학적 지향점에 따라 자기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를 서로 다른 이야기들로 써 내려가고 있고, 또 같은 이야기라 하더라도 서로 다른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다. 그렇기에 복음서 이야기들은 각각의 복음서가 추구하는 관점에 의해 읽어져야 한다. 하지만, 저자는 예수의 일대기를 기록하려다 보니 그들 각각의 예수 사역들을 짬뽕시켜서 국적 불명의 예수를 만들고 있음이 그의 실수라면 실수일까?

노먼 메일러의 <예수의 일기>는 그럼에도 오늘의 지나친 예수 우상화세태에 있어 신선한 충격을 일반 독자들에게 줄 수 있음은 사실이다. 이러한 예수에 대한 인간적 접근을 통해 많은 이들이 예수의 인성 가운데 신성을 발견하는 기회가 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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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전우익 지음 / 현암사 / 199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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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익 할아버지의 “혼자 잘 살믄 무슨 재민겨”라는 책을 읽으며 드는 생각은 참 좋다는 것. 다른 여러가지 표현을 들먹거리는 것이 왠지 꺼려진다. 그리고 그분이 참 용기 있는 분이란 생각이다. 단순하고 절제하는 삶을 몸으로 실천하며 살아가는 분... 나무를 사랑하고 농사짓는 것을 업으로 삼고 농부의 길을 걷고 계신 분... 그러한 삶을 선택하기까진 얼마나 많은 갈등이 있었을까?

하지만, 그분이 용기 있다는 나의 생각 자체도 그분의 관점에서 본다면 맞지 않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나의 입장에선 그분의 삶이 많은 걸 포기한 삶처럼 보이겠지만, 그분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삶이 바로 자신을 세워 가는 철저한 삶의 현장일수 있기에... 그리고 그분의 입장에서는 잃은 것보다는 어쩜 온통 얻고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기에...

아무튼 전우익 할아버지의 삶이 참 멋스러워 보인다. 그럼에도 그처럼 행할 용기가 없음이 역시 나의 한계가 아닌가 여겨져 더욱 작아지는 느낌이다. 시골에서 나무와 함께 하는 그분의 세상을 읽어 가는 독특한 관점 역시 멋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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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동 한 그릇
구리 료헤이 지음, 최영혁 옮김 / 청조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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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로 기억된다. 교회선생님으로부터 빌려본 책이 있었다. 그 당시 많은 감동을 받았던 그런 책이다. 하지만 그 후로 까마득하게 잊혀졌던 책. 이젠 커버린 내가 얼마 전 꿈속에서 교회 아이들을 대상으로 열심히 이야기해주던 내용이 있다. 바로 “우동 한 그릇”의 내용. 난 꿈속에서 아이들에게 내가 느꼈던 감동을 전해주려 애쓰지만, 그 감동의 전달이 쉽지 않아 애태운다. 잠에서 깬 후 잠결에 꾼 꿈치고는 너무나도 선명하고 또한 책의 내용마저 뚜렷하게 전달하던 꿈속의 내 모습에 무척 신기해하던 일이 있다.

얼마 후 들른 서점의 진열장에서 눈에 띄는 책이 있어 반갑게 손에 든다. 바로 며칠 전 꿈속에서 신기한 경험을 했던 바로 그 책, “우동 한 그릇”이다. 서점 주인에게 이 책이 혹 예전에 나왔던 책이 아니냐고 묻자, 예전에 출판된 책이 맞지만 여전히 잘 나간다는 주인 아저씨의 말에 내 꿈속에 나타났던(?) 바로 그 책임을 알고 얼른 사게 된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책을 펼쳐들면서 또 다시 맛보게 되는 감동이란! 책 전반에 걸쳐 느껴지는 작지만 아름다운 사랑의 배려가 내 가슴을 훈훈하게 덥혀준다. 허름한 세 모자의 밤늦은 우동 한 그릇의 주문에도 웃으며 조금 많은 양의 우동을 말아주던 주인아저씨의 묵묵한 인정. 우동 한 그릇을 함께 나누며 삶의 희망을 키워가던 세 모자. 작은 빵집에서 일하지만 그곳을 찾는 손님들에게 작은 인정의 아름다움으로 채워주려 노력하는 여종업원의 모습. 인생의 마지막에 자신이 일하는 빵집의 빵을 먹고 싶어한다는 할머니에게 사랑과 인정을 담아 건네주는 모습.

진정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따뜻한 곳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크고 힘찬 어떤 정신이나 힘보다는 이러한 작은 배려와 사랑임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책을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았지만, 벌써 눈시울을 글썽이게 하는 아름다운 배려의 마음들... 이런 작지만 아름다운 마음들로 인해 세상은 더욱 맛깔 나는 곳이 되어 가는 것이리라.

아무리 세상이 삭막해지고 무서워진다 해도 이런 작은 아름다움들이 모인다면 결국 세상의 어두움은 그 아름다움 앞에 무릎을 꿇고 말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어떤 빛깔을 띄느냐 하는 것은 그 누구의 몫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의 몫임을 자각하게 된다. 정말 가슴을 후끈 달구어주는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책이다. 내가 꾼 꿈은 이런 아름다움을 다시 맛보도록 하기 위한 계시(너무 거창하지만...)가 아니었을까?

책을 덮으며 다시 한번 놀란다. 이 책의 초판은 1989년도가 아닌가! 난 이 책을 어린 시절에 읽었었는 줄 알았지만, 이 때는 이미 내가 대학생이었었는데... 역시 사람의 기억은 이처럼 불완전하고 세월 따라 변해가기 마련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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