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하강을 하고 가부장제의 정신적인 딸이라는 정체성을 끊어버릴 때, 그 대상이 여신이든 어머니는 내면의 어린아이든지 간에 다시 여성성과 연결되고 싶은 강한 열망이 생긴다. 영웅적 탐색을 하는 동안 지하 세계로 내려가버린 자신의 육체, 정서, 영혼, 창조적 지혜 같은 측면을 발달시키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아버지의 미성숙한 부분들과 맺은 관계에서 자신의 진정한 여성적 본능에 관한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 P220

역사적으로 육체와 영혼의 연결은 지모신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면서 파괴되었다. ‘어머니 대지‘가 대대적인 파괴의 위협을 느끼는 지금에 와서야 관계가 회복되고 있다. 인류가 대지의 신성함을 잊고 숲이나 언덕이 아닌 교회나 성당에서 신에게 예배하기 시작했을 때 자연과 맺은 신성한 ‘나와 너(I-Thou)‘의 관계는 잊혀졌다. 우리는 어머니 대지의 모든 종(種)과 서로 연결된 대지의 자손이라는 것을 잊어버렸다. 우리는 모든 생명체, 나무, 바위, 대양, 짐승, 조류, 아이들, 남자, 여자로 구현된 신성함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이렇게 자연의 성스러움을 무시하는 것이 육체의 신성함을 부정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 P221

하강을 끝내고 돌아올 때 여성은 자신의 몸을 되찾는다. 그 결과로 그녀는 자신의 건강한 몸 상태를 되찾을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해 여성성의 신성함을 구체적인 행위로 표현한다. 그녀는 이 표현의 필요성을 분명히 의식하기 시작한다. 의식적인 영양 섭취, 운동, 목욕, 휴식, 치유, 섹스, 출산, 죽음을 거치며 그녀는 우리에게 여성성의 신성함을 일깨워준다. - P230

여성 영웅의 여정에서 가장 큰 도전은 자신이 여성성과 분리되어 있다는 데서 깊은 슬픔을 느끼는 것과 어떤 식이든 자신에게 적당한 방식으로 이 상실에 이름을 붙이고 애도하는 것, 그런 다음에 그 슬픔을 발산하고 나서 새로운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 P236

다. 여성 영웅이 슬픔과 절망에 빠진 상태에서 그러한 감정을 표출하는 동안 그녀에게 나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어머니나 자매 같은 인물—남성이든 여성이든 상관없이—이 보여주는 긍정적인 여성성의 지지가 필요하다. 슬픔의 강도는 그녀가 자신을 얼마나 제대로 볼 수 없고 알 수 없다고 느끼는지 그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그녀가 잃어버린 보물을 되찾는 데 얼마나 많은 시도를 해야 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 P237

하강을 한 여성은 여성성의 탐욕스러운 파괴자 양상을 경험한다. ‘지상의‘ 삶에서 분리된 이 기간 중에 자신이 쓸모없다거나 자기 삶이 메말라버린 느낌을 경험하고 나서 여성은 창조적인 여성성의 촉촉하고 푸르고 물기 많은 측면을 갈망한다. 자신의 여성성과 단절되었다고 느끼는 여성은 창조성이 솟아나기 시작한다는 것을 느낄 때 천천히 자기 정체성을 되찾기 시작할 것이다. 정원에서, 주방에서, 집을 꾸미면서, 인간관계 속에서, 뜨개질을 하면서, 글을 쓰면서, 춤을 추면서 재생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 여성의 심미적이고 관능적인 감각은 색깔, 냄새, 맛, 촉각, 소리로 새로운 활력을 얻으면서 되살아날 것이다. - P245

여성성은 어떤 일이든 만물의 자연스런 순환 속에서 일어나고 흘러가도록 둔다는 특징이 있다. 깊은 무의식 차원에서 치유나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은 고요함과 재생의 단계가 있다는 것과 이 단계들을 존중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이때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도 안다. 그 누구도 탄생을 강요할 수는 없다. 발현의 신비를 믿는 것이 여성성의 여 - P248

정이 주는 심오한 가르침 중 하나이다. - P249

존재함은 자신을 증명하려고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머무르면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 P249

여성들은 자신의 자궁 안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변화를 허락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한다. 있는 그대 - P250

로 존재하는 것을 지지하고 존중한다면 여성들은 지혜를 낳을 것이다. 우리의 행성인 가이아 여신은 모든 살아 있는 생명과 긍정적이고 원만한 관계를 맺도록 정신을 집중해서 존재함의 지혜를 발휘하기를 요청하고 있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해 온 행위가 엄청난 환경 파괴를 불러 왔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삶에서 영웅과 여성 영웅을 재정의해야 하는 이유이다. 영웅적 탐색은 권력, 정복, 지배에 관한 탐색이 아니다. 영웅적 탐색은 우리 본성의 여성성과 남성성 두 측면의 결합을 통해 우리 삶에 균형을 가져오는 일이다. 현대의 여성 영웅은 자신의 개인적 힘, 즉 느끼고 치유하고 창조하고 사회 구조를 변화시키고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는 능력인 여성적 본성을 회복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대면해야 한다. 여성 영웅은 모든 생명체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지혜를 가져다준다. 그녀는 이 지구라는 그릇에서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우리의 삶에서 여성성을 회복하도록 도와준다. 우리는 여성 영웅을 그리워한다. -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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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버라이어티 팩 세트 - 12g, 5개입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3년 2월
평점 :
품절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어서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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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가 살았던 시기는 치료 용도의 철학이 절정에 달한 시기였다. 헬레니즘 시대라고 불리는 그 시기에 사람들은 오늘날 배우자나 통신사를 고를 때처럼 열정적이고 신중하게 철학 학파를 골랐다. 리스크는 컸다. 프린스턴 대학과 스탠퍼드 대학 사이에서 하나를 고르는 게 아니었다. 자기 성격을, 그러므로 자기 운명을 형성할 일생일대의 선택을 내리는 것이었다. - P195

먼저 그는 신은 존재하지만 인간사에 아무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왜 관심이 있겠는가? 신으로 사느라 너무나도 바쁜데. 에피쿠로스에게 신은 유명인사와 비슷했다. 그들은 걱정도 없고 늘 원하는 자리를 예약할 수 있는 부러운 삶을 살아간다.
죽음에 관해서 에피쿠로스는 마음을 편하게 먹으라고 말한다. 물론 죽어가는 과정이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것은 그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 고통에는 본질적으로 끝이 있다. 그 고통은 평생 지속되지 않는다. 고통이 가라앉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다. 어느 쪽이든 두려워할 것은 없다. - P196

진정해. 에피쿠로스가 말한다. 그리고 즐기라고. 그는 "행복한 삶의 시작이자 끝"인 쾌락을 옹호했다. 그리고 도발적으로 덧붙였다. "만약 내게서 맛의 쾌락을 빼앗는다면, 성적 쾌락을 빼앗는다면, 듣는 쾌락을 빼앗는다면, 아름다운 형태를 보았을 때 느끼는 달콤한 감정을 빼앗는다면, 선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 P196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다르게 규정했다. 우리는 존재의 차원에서,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긍정 정서positive affect의 차원에서 쾌락을 떠올린다. 반면 에피쿠로스는 결핍과 부재의 측면에서 쾌락을 규정했다. 그리스인은 이러한 상태를 아타락시아ataraxia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우리를 만족으로 이끄는 것은 어떤 것의 존재가 아니라 바로 불안의 부재다. 쾌락은 고통의 반대말이 아니라 고통의 부재를 뜻한다. 에피쿠로스는 향락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평정平靜주의자"였다. - P197

에피쿠로스는 쾌락에는 종류의 차이도 있지만 작용 속도의 차이도 있다고 말한다. 그는 정적인 쾌락과 동적인 쾌락을 구분한다. 시원한 물 한 잔으로 갈증을 해소하는 행위는 동적인 쾌락을준다. 물을 마신 후에 우리가 경험하는 만족스러운 기분(갈증 없음)은 정적인 쾌락이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물을 마시는 행동은 동적인 쾌락이고 물을 마신 상태는 정적인 쾌락이다.
우리는 보통 동적인 쾌락이 가장 큰 만족감을 준다고 생각하지만 에피쿠로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정적인 쾌락이 더 우월한 쾌락인데,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바로 그 상태이기 때문이다. 정적인 쾌락은 목표지, 수단이 아니다. - P200

에피쿠로스는 "우리가 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즐기는 것이 우리를 풍요롭게 한다"며, 올바른 마음가짐만 갖춘다면 아주 적은 양의 치즈만으로도 소박한 식사를 성대한 만찬으로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 P202

에피쿠로스 철학은 수용의 철학이자, 수용의 가까운 친척인 감사의 철학이다. 무언가를 진정으로 받아들이면 감사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 P203

제퍼슨은 부처의 가르침을 잘 몰랐지만 에피쿠로스와 부처의 가르침은 놀라울 만큼 유사하다. 두 사람 다 욕망을 고통의 근원으로 보았다. 두 사람 다 평정을 수행의 궁극적 목표로 보았다. 두 사람 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보았는데, 에피쿠로스에겐 정원이, 부처에겐 수행공동체인 승가가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 다 숫자 4를 좋아했던 것 같다. 부처에겐 사성제가, 에피쿠로스에게 네 가지 치료법이 있었다. -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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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09-25 0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살까말까하다가 내려놓은 책인디....여기서 보니 반갑네요..^^
 

하강은 영혼의 어두운 밤, 고래의 뱃속, 암흑의 여신과의 만남, 지하 세계로 가는 여정으로 여겨지거나 또는 그저 우울증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하강은 대개 삶을 통째로 바꿔놓는 상실에서 비롯된다. - P177

지하 세계로 가는 이 여정은 혼돈과 비탄, 소외와 환멸, 분노와 절망으로 가득 차 있다. - P177

지하 세계에는 시간 감각이 없다. 시간은 무한하고 그곳을 서둘러 떠날 수도 없다. 아침도 없고 낮도 없으며, 또는 밤도 없다. 칠흑같이 어둡고 혹독하다. 온통 암흑뿐인 지하 세계는 축축하고 차갑고 뼈가 시리다. 지하 세계에는 쉬운 해결책이 없다. 빠져나가는 지름길도 없다. 울부짖음이 그친 그곳엔 침묵뿐이다. 여성은 벌거벗은 채 죽은 자들의 뼈 위를 걷는다. - P178

위로 올라가고 빛을 향해 밖으로 나아가는 남성들과 달리 여성들은 그들 존재의 근원 아래로 깊이 내려가 자신에게 돌아가는 길을 찾는다. 자신에게 돌아가는 길을 찾기 위해 땅을 판다는 비유는 여성의 입문 과정을 표현한 것이다. 여성에게 영적인 경험은 자아의 바깥이 아닌 자아의 내부로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 P180

어머니를 거부하면서 여성성의 거울이 산산조각 난 여성은 분리된 자신의 부분들을 되찾기 위해 땅속 깊이 내려간다. 이 여행중에 여성은 어쩌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몸, 자신의 감정, 자신의 성적 취향, 자신의 직관, 자신의 이미지, 자신의 가치, 자신의 마음을 알게 될 수 있다. 이것들이 그녀가 그 깊은 곳에서 찾는 것들이다. - P181

하강은 강박 행동이다. 우리는 모두 하강을 피하려고 애쓰지만 삶의 어떤 순간에는 내면 깊은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하강은 매력적인 여정은 아니지만 반드시 여성을 강하게 하고 여성이 자아감을 분명히 하게끔 한다. 오늘날 몇몇 여성들은 하강 과정을 꿈속에서 암흑의 여신을 만나는 것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 P183

칼리 여신과 다른 여신들의 창조 원리(creatrix principle)는 아버지 신들(father gods)에게 자리를 빼앗겼다. - P183

"모든 어머니는 자기 안에 딸을 품고 있고 모든 딸은 자기 안에 어머니를 품고 있다. 모든 여성은 뒤쪽으로는 어머니와 이어지고 앞쪽으로는 자신의 딸과 이어진다." - P197

헬렌 루크(Helen Luke)는 모자와 모녀 경험의 엄청난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원형적 차원에서 아들은 어머니 자신의 내적 탐색의 이미지를 전달한다. 반면에 딸은 바로 어머니 자신의 확장이다. 딸은 어머니를 어머니 자신의 과거와 젊음으로 되돌아가게 하고, 자기 인식과 새로운 존재로의 재탄생을 약속하며 미래로 이끈다." - P198

자신이 가부장제 사회에서 정신적으로 ‘아버지의 딸‘로서 살아왔음을 깨달을 때, 우리에겐 몇 가지 캐내야 할 것이 있다. 문화라는 의복으로 덮어 감추기 전에 우리들 것이었던 우리의 일부를 되찾아야 하는 것이다. - P203

자연이나 몸과 관계 있는 모든 것들이 그러한 것처럼 에레슈키갈은 남성 신들에게 강간당하고 지하 세계로 추방당했다. 그녀는 지하로 가버린 여성성의 일부이다. 격노, 탐욕, 상실의 공포를 상징한다. 원초적이고 거친 성적 에너지이다. 의식의 세계와 분리된 여성적 힘이다. 무시당하고 조롱받는 여성의 본능과 직관이다. "그녀는 태어나기 전의 잠재적 생명이 출산의 진통 속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장소이다."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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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그 사관이 여전히 번창하고 있음을 고려할 때, 아직까지는 지성사 연구가 완전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어떤 면에서 휘그 사관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널리 퍼져있다. 대중적인 역사 잡지나 어느 도시 책방의 ‘역사‘ 코너, 또는 라디오나 TV에 출연하는 인기 있는 역사가가 말하는 내용을 훑어보면, 예기적 해석, 즉 과거가 미래의 관심사를 앞질러 말해준다는 식의 독해가 지금까지 이를 비판해온 연구자들의 낯이 뜨거워질 만큼 여전히 지배적으로 유통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런 식의 잘못된 역사서 쓰기는 과거를 오늘날의 도덕적 관점에서 판단하는 단계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다음으로 과거에서 오늘날까지 역사적인 매개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이어지는 무언가의 기원을 찾아내는 것이 두 번째 단계라면, 역사 속의 행위자들에게서 단순명료한 교훈을 이끌어내는 것이 세 번째 단계다. 그런 교훈의 예로는, 과거란 얼마나 별나고 흥미로운 때였는지, 또는 종종 되풀이되듯 과거에 비해 우리가 더 합리적이고, 더 윤택한 생활 수준을 누리고, 더 커다란 부를 누리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등등의 뻔한 내용이 있다. - P198

이런 출판물에 실리는 글을 몇 편 읽어보면, 수많은 현직 역사가들이 여전히 다음과 같은 잘못된 믿음들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난다. 우리들은 과거의 연구에서 오늘날의 선행 사례를 찾아내야 하고, 과거는 우리 자신이 - P199

살고 있는 세계와 연결되어 있을 때에만 흥미로우며,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범주들을 활용해 과거의 쟁점들을 캐물어야 하고, 우리가 과거의 행위자들 및 그들이 살던 시대를 반드시 도덕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런 믿음들이다. - P200

이러한 믿음을 정당화하기 위한 근거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면 과거가 현재와 지극히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처럼, 혹은 과거가 지금과 너무나 다르다는 점에서 신기하게 보이도록 역사를 제시해야 한다는 논리가 나오곤 한다. 그 부정적인 결과 중 하나는 이렇다. 점점 더 많은 수의 정치가들 혹은 공인들이 역사책을 적어도 한 권 정도 쓰는 일을 통과의례처럼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들의 책장은 스스로가 다른 이들의 작업을 적절히 각색했으며 1차 자료를 거의 또는 완전히 무시했다고 고백하는 책들로 채워지고 있는 중이다. - P200

지성사 연구가 목표하는 바는 과거 사상의 복잡성을 인식하고 이를 더 섬세하게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는 것, 그리고 그런 사상들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어째서 역사적인 문제를 풀고자 하는 서로 다른 해결 방법들이 각기 나름대로 타당할 수 있는지, 사람들이 삶에서 마주하는 이데올로기적 체계가 역사 속의 인간 행위에 어떤 한계를 부여하는지 등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역사 속 행위자에게 공감하는 태도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자세가 꼭 역사가가 과거의 사상과 행동을 정당화하는 결과로 이어질 필요는 없다. 지성사 연구자는 인간과 사회가 완전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약속하는 기획에 회의적인 견해를 가질 확률이 높으며, 마찬가지로 혁명가로 살아가게 될 가능성도 적다. 이는 그들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들이 역사에 작용하곤 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어느 저자가 개진한 관념이 그 저작을 곧바로 대면한 청중들에 의해 수정되고 또 시간이 흘러 그때와는 달라진 지적 맥락 속에서 살아가는 미래의 세대들에 의해 어느 정 - P210

도 재발명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인정하는 일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지성사 연구자들은 한편으로는 과거 혹은 현재와 연관된 주제들을 다루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충분히 수긍한다. 동시에 그들은 과거에 또 현재도 계속해서 사람들의 지적인 삶을 형성하고 있는 역사의 여러 층위들을 알고 있기에, 과거 어떤 관념이 중요했던 이유와, 역사 속 행위자들 혹은 우리에게 열려 있는 가능성들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 P211

혹시 지성사가 스스로 과거의 저자에게서 혐오스러운 주장 혹은 관념을 발견한다고 해도 그것들을 비난할 필요는 없다. 요점은 왜 저자가 그런 관념을 세계에 내놓았는지, 그리고 당시의 맥락에 입각할 때 어떻게 그런 논변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는지 이해하는 데 있다. 이런 것들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과거의 상황을 좀 더 복합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되며, 더불어 당시에 해당 논변이 (설령 지금 우리들에게 매우 끔찍하다 할지라도) 어떤 이유에서 유효했는지 통찰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적어도 한 가지 측면에서는 텍스트를 평가하는 작업을 피할 수 없다. 지성사 연구자들이 역사적인 텍스트를 두고 피상적인 비평을 내놓을 뿐인 접근법을 공격하는 것은 타당하다.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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