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만화 『기생수』는 이렇게 시작한다. 어느 날, 지구상에 정체 불명의 생물체가 나타난다. 생물체는 인간의 몸에 침투하여 뇌를 차지하고 그 사람 행세를 한다. 생물체들은 인간 사회에 녹아들어 인간을 포식하기 시작한다.


현실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외계인이나 지구상의 생물체이지만 미발견 상태인 생물체가 존재하지 않을거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으니까. 16세기까지 유럽, 특히 가톨릭교권에서 이런 생물체의 존재를 거론했다간 조르다노 브루노처럼 화형당했겠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도 아니고, 그런 유아론적인 대책이 통하는 시대도 아니니까(가끔 그런 대책이 논의되긴 하지만).


하지만 여기서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한다. 만화 『기생수』에 범접할만한, 오히려 그 보다 더 한 현실이 지구상에 일어나는 중이기 때문이다. 『기생수』에서는 기생수들이 인간을 죽이지만 사실 그 수는 그리 많지 않다. 처음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인간측이 대응에 나서자 기생수들이 소탕당하는 장면까지 나온다. 현실에서 인간보다 신체능력이 뛰어난 생물체들을 생각해보면 될 것이다. 사자, 호랑이, 고래처럼 인간보다 신체적으로 뛰어난 동물은 지구상에 많다. 그러나 그 생물체들은 인간 앞에서 무기력했고 인간의 보호를 받는 신세로 전락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속한 인간종의 현실은 『기생수』와 다르다. 우리의 현실은 20, 30년전 우리가 예측하거나 예언한 것들을 보란듯이 빗나가버렸다. 


20세기 후반 당시의 예측이나 예언은 크게 둘로 나뉜다. 첫째는 과학과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인간과 인간 사회가 직면한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장미빛 전망이었다. 이 같은 예측은 당연히 지금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물론 어떤 측면에서 그러한 전망이 들어맞은 지점도 있다. 예컨대 스마트폰이라던가. 그러나 완전히 들어맞은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같은 사상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기술적 특이점이 올 것'이라는 주장과 같은 식으로 여전히 그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어떻게 보면 구원자가 강림할 것이라는 식의 옛 종교적 믿음에서 구원자를 '기술'로 치환한게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든다. (당연히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건 단지 공통점만 따진 셈이니까) 그렇긴 하나, ai의 발전 속도나, 신석기 시대를 거치며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인간의 기술 발전 속도를 보면 갈수록 가속도가 붙었다는 확실한 근거가 있기 때문에 이 같은 주장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여기서 확실한 것은 기술의 발달이 한편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지만, 거기서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이다. 자동차가 적절한 사례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자동차가 보급되기 전 길거리에는 마차가 가득했다. 사람들은 선택해야 했다. 말똥과 그 악취로 도시가 뒤덮이느냐, 새로운 대체 수단을 찾느냐. 선택은 자동차였다. 자동차는 말똥을 남기지 않으니, 도시가 더럽혀질 일도 없었다. 그 대신 자동차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오염물질을 배출하는 새로운 문제를 낳았다.(교통사고는 마차나 기차만 다니던 시대에도 있었을테니까)


두 번째 범주에 속하는 것은 낙관론과 정반대되는 비관론적, 나아가 종말론에 가까운 예언이나 예측이었다. 어린 시절 환경 보호와 관련된 책을 읽으면 항상 나오는 이야기가 지구상의 인구가 너무나 빠르게 증가하여, 지구가 버틸 수 있는 수준을 넘고 말 것이라는 암울한 예언이었다. 그런 무시무시한 예언 뒤에는 인구 증가에 따른 환경파괴에 대한 묘사가 그에 뒤따랐다. 어떻게 보면 맬서스의 재림이라 할만한 수준의 주장들이었다. 


막상 부닥친 현실은 종말론과는 거리가 가까우면서도 멀었다. 미세먼지가 대표적인 사례다. 황사와 미세먼지는 겨울, 봄마다 한반도에 찾아오는 불청객이자 당연한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미세먼지를 보고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려니 하면서 마스크를 끼고 일상샐활을 하거나, 그냥 평소대로 생활할 뿐이다. 20세기 말 환경운동가가 봤으면 이 무슨 디스토피아인가하고 절규했을지도 모른다.


자, 이제 진짜 현실은? 물론 여기서 기후변화(혹은 위기)를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무시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단지 만화 『기생수』보다 더한 현실이 펼쳐지고 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자 할뿐이다. 


분명한 것은 기생수보다 더한 것이 현실의 우리들 사이에 퍼져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효과는 『기생수』의 기생수들이 인간을 포식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출산율(혹은 출생률) 이야기다. 한국의 90년대 생이 학교를 다닐 때는 한 반에 30, 40명이 있었던 반면, 00년대 생이 다닐 때는 20명으로 줄어들더니, 지금은 전국 각지에서 입학생 숫자가 두자리수를 못 채우고 한 자리 수에 머물다가 폐교되는 초등학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대학교들은 몇년 전부터 입학생 정원을 채우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사정이 나은 지방거점국립대학들 조차도 학과별로 정원 미달이 발생하여 대학 간의 통폐합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이 여파는 군대에 이미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고 취업시장에도 상당한 충격을 줄 것이다. 


『기생수』에 등장하는 히로카와 시장은 포식자로서 기생수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러나 히로카와 시장의 말처럼 기생수들이 아무리 기를 쓰고 인간의 개체수를 조절하려 들더라도, 한국에서 일어나는 사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것이다(그러려면 기생수의 개체수가 인간 전체의 개체수와 비교가 가능한 수준이 되거나, 기생수들이 국가 권력을 장악하고 인구를 통제하는 상황이 연출되어야할 것이다).


한국만의 이야기는 아니다(한국이 대단히 극적인 변화를 보이긴 하고 있지만). 전세계 선진국들이 나날이 줄어가는 출산율 혹은 출생율로 인해  여러 대책을 세우고 있긴 하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등 전세계의 산업 중심지, 금융 중심지, 문화 중심지라 할만한 지역들에서 출산율이 감소함에도, 뚜렷한 대책이 없어서 이민(을 빙자한 타 국가로부터 인구 빼오기)에 의존하고 있다.


게다가 이는 선진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구 대국으로 알려진 중국, 인도, 나아가 종교적 영향력이 지대한 이슬람권 국가들도 출산율이 수십년 사이에 급락했다. 동남아 국가들은 아직 선진국도 되지 못했는데 벌써 출산율이 급락하고 있다는 우려가 터져 나온다. 선진국으로 이민 간 이민자들도 세대가 지날수록 현지 문화에 동화되어 2세대부터는 출산율이 현지인과 비슷한 수준으로 하락한다. 


앞으로의 전망에 따르면 아프리카 대륙 국가들을 제외한 나머지 대륙의 국가들은 출산율과 인구 감소로 인해 인구 성장이 정체되거나 심하면 감소할 것이라 한다. 그에 비례하여 타국의 이민자를 차지하려는 국가 간의 경쟁도 심화될 것이다. 


즉, 인구가 너무 늘어나서 지구가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언도 빗나가기 직전인 셈이다. 오히려 지구상의 국가들은 너도나도 확정된 미래, 그러니까 줄어드는 인구를 어떻게든 유지하려고 발악해야하는 상황이 되었다.(여기서 환경문제와 관련해 중요한 점은 인구라는 통계 수치보다는 개개인의 소비 패턴이 더 중요할 것이다. 전 세계인이 선진국 최상류층처럼 소비하고 다닌다고 가정해보자.)


이렇게 지난하게 인구 이야기를 한 이유는, 『기생수』의 기생수는 '따위'라고 만들만한 가공할만한 무언가가 이미 전 세계에 확산된 게 아닐까 하는, 간단한 의문에서 시작한 것이다.


'전염병 주식회사'라는 게임이 있다. 스마트폰으로도 가능한 게임이다.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각종 다양한 유형의 전염병을 발생시키고 변이시켜 지구상의 인간을 말살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물론 게임 상의 인간들도 가만있지 않는다. 어느 정도 전염이 확산되면 전염병을 인식하고(현실의 우리가 코로나 바이러스를 인식하였듯이) 대응에 나선다(현실의 백신 접종, 사회적 거리두기처럼). 이때 인간 사이에 전염병을 퍼뜨리는 매개체는 다음과 같다. 바이러스, 세균, 박테리아, 프리온, 기생충, 나노머신.


하지만 이런 매개체를 통해 퍼져나가는 질병은 그 실체가 있다. 감염된 사람들의 신체에 실제로 이상 증상이 나타난다. 체온이 높아지거나, 미각과 후각을 상실하거나 등등. 그러면 사람들은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는다. 『기생수』의 기생수들도 실체가 있다. 만화 상에서 그 식별법이 나온다. 사람으로 위장하지만 위장한 기생수의 머리카락을 뽑아보면 바로 판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마주해야하는 것은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다.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대부분의 기준이 이 것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그 점에서 정신병과는 다르다. 정신병 역시 구체적인 증상을 수반하는데, 이것은 그런 증상이 없기 때문이다. 감염된 사람이 감염되었는지, 그렇지 않은지도 모른다. 우리 주변, 바로 옆 사람, 지나가다 마주친 사람, 버스에서 옆 자리에 앉은 사람, 지하철에서 부대껴 가는 사람, 아니면 우리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정치인이나 기업가들, 그 한명 한명이 감염자일지, 정상인일지(비감염자가 더 적절할지도) 알 수 없다.


그럼 바이러스보다, 인간이 상상한 기생수보다 더 독한 이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영화 「인셉션」에서, 정보를 빼내려 사이토에게 접근한 주인공 돔 코브는 이런 말을 한다.


"가장 생명력이 강한 기생충은 무엇일까요? 박테리아? 바이러스? 장내 기생충? '생각'입니다. 일단 생각이 뇌에 자리잡으면 제거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 


'생각'


트럼프가 당선되었을 때를 떠올려보자. 그 당시 상황을 돌이켜보면, 트럼프가 당선되었다는 말은 트럼프가 내세우는 가치관, 세계관, 일련의 사상체계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전략적 승리를 거두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문제는 그로부터 발생하는 심리적 문제다. 즉, 한 번 투표를 했을 뿐인데, 그 결과를 보고나니 이웃집에 사는 스미스 씨는 트럼프의 생각을 받아들인 지지자일 수도 있다는 의심이 머리 속에 자리잡게 된다. 물론 그 반대도 가능하다. 스미스씨 입장에서는 이웃에 사는 존스 씨가 트럼프의 생각을 받아들인 지지자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할지도 모른다. 순식간에 엄청난 수의 사람들 머리 속에 의심이라는 감정과 그로부터 나오는 생각이 자리잡은 것이다. 그 어떤 전염병의 매개체보다도 빠른 속도로.


저기서 트럼프를 다른 나라나 미국 내의 다른 선거에 출마한 정치인으로 바꿔도 적용가능할 것이다. 


미국은 1950년대에 매카시즘이 유행했다. 누구나 소련의 스파이일 수 있었다. 지금 우리는 매카시즘을 보고 어떻게 저런게 유행했나 생각하겠지만, 그 당시 사람들 입장에 서보면 이해가 안가는 것은 아니다. 저 사람이 나와 생각이 다를 지도 모르는데(=다른 생각에 전염되었을 수 있는데=공산주의에 감염되었을지도 모르는데) 그 사실을 뭘로, 어떻게 판별한단 말인가? 


'나'와, '나'가 속한 집단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같은 사람' ,'같은 부류', '같은 집단'으로 취급하지 않은 경우는 사실 인간 역사에서 늘상 있었던 일이니 새삼 지적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 사례를 일일이 들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같은 생각의 차이가 현실에서 일으키는 변화는 인간의 상상력을 한참 뛰어넘는다. 다시 인구 문제로 돌아가보자. 위에서 말했지만, 한때 인구가 무한히 불어나 지구가 급증하는 인구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는 맬서스적인 종말론이 유행했다. 현실은 반대로 가고 있다. 많은 나라들이 통계를 보고 인구 감소를 우려하며 여러 대책을 내놓는 중이다. 그러한 변화의 기저에, 여러가지 요인으로 인해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한국만 해도 한때는 나이가 들면 무조건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생각이  당연했지만, 지금 그런 생각은 당연하지 않다. 구시대의 사고방식은 신시대의 사고방식에 밀려났거나, 밀려날 예정이다. 게다가 지금은 구시대의 사고방식을 강요할 수단도 모조리 사라졌다(정책 결정권자들이 시대착오적인 결정이 가끔 내리긴 하지만). 게다가 인구 문제는 '올바른 생각'과 '그릇된 생각'을 구분해서 '그릇된 사고'를 가진 다른 사람을 탄압해서 통제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보통 '올바른 생각'을 강요하는 것은 사실 사슴보고 말이라 우기는 지록위마를 실천하는 사례가 될 수 있다).


그 같은 생각의 변화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은밀히 퍼져나가는 것처럼 보이고, 대다수 사람들이 변화를 눈치 챘을 때는 이미 변화가 상당 부분 진행된 이후다. 물론 그런 변화를 일찍이 눈치 채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의 수는 많지 않다.


어쨌거나, 현실은 늘 상상 이상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잉크냄새 2024-05-17 14: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생각을 유기체로 볼 수도 있군요.
지구를 유기체로 가정하면 인구 감소도 맬서스의 종말론에 대비하는 지구 자정작용의 하나일 수도 있겠네요. 현실은 늘 상상 이상이니까요.

Heath 2024-05-17 14:14   좋아요 0 | URL
현실만큼 알기 어려운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
 


『남겨진 것들의 기록』은 죽은 자의 흔적을 정리하는 유품 정리사의 책이다. 책을 읽다가 떠오른 생각들을 정리해본다. 


돌이켜보면, 인간은 자연 상태를 벗어나 사회를 이루면서 자연이 알아서 할 일을 인간이 도맡아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 꺼름칙한 일들, 불쾌한 일들, 혐오스러운 일들은 사람들의 입에 잘 오르내리지 않고, 눈에도 잘 띄지 않는다. 분명 이 사회를 이루는 한 부분인데도! 그 대표적인 사례가 누군가의 죽음 이후 남은 사람들이 맡는 일일 것이다.


그 사례를 들어보자. 일본의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사, 스튜디오 지브리의 대표 감독 하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다. 작년에는 하야오 감독의 최신작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가 개봉했다. 그런데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도 첫 장면은 주인공 마히토의 어머니가 죽음을 맞이하며 장면으로 시작된다. 


다만 여기서 묘사되는 그녀의 죽음은 많은 이야기에서 다뤄지는 '낭만화된' 죽음에 가깝다. 그녀의 시신은 나오지 않는다. 죽은 후의 모습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죽음을 맞이하는 마지막 순간만 기억에 남는다. 하야오 감독의 이전 작(무려 11년 전) 〈바람이 분다〉도 보면 비슷하게 '낭만화된' 죽음이 나온다.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은 사라지듯이 세상을 떠나고, 죽음을 기억하는 사람은 죽은 이를 마지막으로 본 순간만 기억한다.

 

비슷한 사례는 많다. 어느 신화든 간에 누군가가 죽고 그 시신을 수습했다는 식의 이야기보다는 누군가가 '승천'했다거나, '실종'되었다거나 하는 식으로 죽음을 신비롭게 표현하고 동시에 죽은 이의 시신을 처리한다거나 같은 현실적인 일은 대개 생략된다. 예를 들어 헤라클레스는 불 속으로 사라지고 그의 영혼은 올림푸스로 승천한다. 물론 그 반대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다시 지브리 이야기로 돌아가서, 지금은 세상을 떠난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 역시 스튜디오 지브리의 대표 감독이었다.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마지막 작품은 다케토리 이야기를 각색한 〈가구야공주 이야기〉였다. 썸네일은 아쉽게도 블루레이가 없어서 아트북으로 대체했다. 이 영화에는 하늘에서 아미타와 함께 천인들이 음악을 연주하며 내려오는 장면이 나온다. 해당 장면에 깔리는 배경음악은 신나고, 생동감이 넘치고, 흥겹다. 



해당 OST의 영상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 '가장 슬픈 장면에 가장 행복한 음악이 깔린다' 라거나, '어떻게 행복한 음악이 슬픔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라는 식으로 이 이 행복한 음악에 대한 감상을 알 수 있다.


하늘에서 천인들이 내려오는 장면이 인상적이어서, 그 후로도 뇌리에 남아있었다. 그 덕분에 우연히 다른 책을 읽을 때 '아! 그 장면이었구나'하는 부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일본의 정토종 예술에 있어서 선호 받는 테마는 '내영(來迎)', 즉 죽음의 순간에 있는 신도에게 구세주 아미타가 몸소 강림하는 것이었다.

코야산[高野山]에 있는 세 폭의 내영도(來迎圖)에서 나타난 것처럼 초기 '내영'의 방향은 마치 관찰자가 임종을 맞은 것처럼 관찰자를 향해 있었다. 여기서 커다란 아미타를 구름 위를 떠다니는 스물다섯 명의 보살이 수행하고 있는데, 그들은 관찰자를 바라보며 관찰자를 향해 오고 있다. 그들은 가운데 그림의 왼쪽과 꼭대기 뒤쪽에 자리 잡고 구름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들의 아래로는 자연풍경이 펼쳐지는데, 왼쪽 아래의 자연 풍경은 분명하게 드러나는 반면 오른쪽 자연풍경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자연풍경은 그림 전체에서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하며, 조심스럽게 한쪽 귀퉁이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는 상상 속의 장면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것이기라기보다는 도상학적 효과를 더 크게 지닌다. 각 인물의 세부묘사는 장식적인 디테일과 색감과 사실성의 뚜렷한 발전을 보여준다. 특히 음악을 연주하는 천사들이 흥미롭다. 그들은 자연 속에서 관찰하는 포즈로, 춤을 추거나 악기를 연주하고, 관악기를 부느라 뺨을 잔뜩 부풀리고 있다.......

내영(來迎)은 아마도 일본 예술에서 1053년, 교토에 있는 뵤도인[平等院] 사원의 본당인 봉황당(鳳凰堂)의 문에 처음으로 나타난 주제일 것이다. 내영도가 일본의 공헌이자 창조품이며, 어떤 믿음에 의해서라도 획득된 신격의 가장 시적인 장면들 중 하나를 나타내고 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밀교(密敎) 도상들의 비밀스럽고 금기적인 성격과는 대조적으로 내영도의 핵심적인 부분은 밀종의 태도를 역전시키며 붓다가 그를 보는 자에게 바로 온다는 것이다. 아미타는 단지 우리가 다가갈 수 있는 것만이 아니라, 그 자신이 보는 자에게 다가온다. 이 그림은 죽어가는 신도가 보게 되는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그 신도의 영혼은 붓다에 의해서 서방 정토로 받아들여지고 환영받는다. pp.278-279.


조지프 캠벨, 『신화의 이미지』



간단히 말해, 과거 일본인들이 상상한 죽음의 순간이었다. 구세주 아미타가 죽어가는 우리에게 다가오리라. 아미타가 그대를 응시할 것이니. 


어떻게 보면 '사람이 죽으면 먼저 가 있던 반려동물이 마중 나온다는 이야기가 있다'와도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한다. 맞이하러 오는 대상이 아미타와 천인들에서 반려동물이 되었을 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남은 사람들은 떠난 사람의 자리를 정리 해야 한다. 그게 가족의 손을 거치든, 아무런 연고 없는 타인의 손을 거치든 간에. 그렇지 않은 사회가 있다면, 아마 우리가 생각하는 사회와는 거리가 멀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리처드 도킨스의 『신, 만들어진 위험』의 리뷰를 작성하다가 너무 곁가지로 뻗어나가는 듯한 내용은 따로 정리해서 쓰기로 했다.




스티븐 그린블랫의 저작 『1417년, 근대의 탄생』은 르네상스 시대 초입 당시, 포초 브라촐리니라는 휴머니스트이자 책사냥꾼이 우연히 한 수도원에서 고대 로마의 시인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책을 발견하고 그 후 일어난 일을 다루는 책이다. 저자는 루크레티우스의 사상 이면에 존재한, 헬레니즘 철학 사조 중 하나인 에피쿠로스 학파의 유물론이, 중세 동안 잊혀졌다가 포초의 손을 통해 부활하여 마침내 우리가 아는 근대가 탄생하는 길을 열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린블랫이 묘사하는 이 과정은 웬만한 소설 이상의 흡입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흥미롭기까지 하다.


이 책에서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라는 이탈리아의 철학자의 글이 인용된다. 그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유피테르의 명에 따라서 오늘 정오에 프란치노 신부의 멜론 밭에서 멜론 2개가 완벽하게 익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사흘이 지나도록 아무도 따지 않아서 결국 땄을 때는 이미 먹기 좋은 상태가 지났을 것이다. 동시에 유피테르는 몬테 치칼라 산기슭에 있는 조반니 브루노의 집의 대추나무에서 30개의 잘 익은 대추를 따게 하라고 명하셨다. 그러나 몇몇은 채익지도 않은 푸른 상태로 땅에 떨어지게 하고 그중에 15개는 벌레가 먹게 하라고 하셨다. 한편, 알벤치오 사볼리노의 아내 바스타는 관자놀이 부분의 머리카락을 고불고불하게 말려다가 사용하던 철판이 너무 달궈져서 47가닥의 머리카락을 태우게 될 것이다. 그래도 두피를 데지는 않을 것이고 탄내를 맡고도 욕설을 내뱉지 않고 가만히 참을 것이다. 또한 바스타가 키우는 황소가 눈 똥에서 252마리의 쇠똥구리가 태어날 것인데, 그중에서 14마리는 알벤치오의 발에 밟혀서 죽게 될 것이고, 26마리는 뒤집혀서 죽게 될 것이다. 또 8마리는 뒷마당 근처를 순례자처럼 뱅뱅 돌 것이며, 22마리는 한쪽 구멍에, 42마리는 문 옆 돌 밑에 자리를 잡고 모여살게 될 것이다. 16마리는 쇠똥뭉치를 내키는 대로 끌고 다닐 것이고 나머지는 아무 데나 종종걸음으로 배회할 것이다. 


라우렌차가 머리를 빗을 때 13가닥의 머리카락이 끊어지고 17가닥은 빠질 것이다. 빠진 자리 중에서 10개는 사흘 안에 다시 머리카락이 나겠지만 7개는 더는 머리카락이 자라지 않을 것이다. 또한 안토니오 사볼리노의 암캐는 5마리의 강아지를 밸 것인데 그중에 셋은 평균 수명만큼 살 것이나 둘은 태어나자마자 죽을 것이다. 살아남은 셋 중에서 첫째는 어미를 닮을 것이고, 둘째는 잡종일 것이며, 셋째는 그 아비를 부분적으로 닮되 폴리도로의 개도 약간 닮을 것이다. 바로 그 순간, 뻐꾸기가 라스타르차로부터 12번 울 것이니 그보다 더 많이도 더 적게도 울지 않으리라. 12번 울고 나면, 그곳을 떠나 치칼라 성의 폐허를 향해 11분간 날아갔다가 또 스카르바이타로 날아갈 것이다. 그 후에 생길 일에 대해서는 나중에 살펴보자꾸나.


마스트로 다나세가 천을 판에 대고 자를 것인데 제대로 재단이 되지 않아 옷단이 비뚤어질 것이다. 코스탄티노의 침대에서는 12마리의 빈대가 침대 널을 떠나서 베개를 향해 행진할 것인데 그중 7마리는 몸집이 크고 4마리는 작을 것이며 1마리는 중간 크기이다. 그리고 오늘밤 촛불이 켜질 때까지 살아남은 한 놈에 대해서는 나중에 또 살펴볼 것이다. 그로부터 15분 후에 피우룰로 댁 노부인이 혀를 입천장에 네 번 스치는 동안 아래 턱에 있는 오른쪽 세 번째 어금니를 잃게 될 것이다. 그러나 벌써 17개월 전부터 흔들리던 이빨인지라 피도 나지 않고 빠질 것이며 통증도 없을 것이다. 암브로조는 112번째 시도 끝에 마침내 아내와의 잠자리에 성공했으나 그녀를 임신시키지는 않는다. 그래도 방금 먹은 포도주 소스로 조리한 수수와 파는 정자로 변했을 것이고, 그 정자를 사용하긴 했다. 마르티넬로의 아들은 가슴팍에 털이 나고 목소리도 갈라지기 시작할 것이며, 파울리노는 부러진 바늘을 주우려고 몸을 숙이다가 속옷을 졸라매는 빨간 끈이 툭 끊어지게 될 것이다…….


조르다노 브루노, 『승리한 괴물의 축출』


위에서 길게 인용한 글은 유피테르(제우스)가 메르쿠리우스(헤르메스)에게 명령을 내리는 장면이다. 읽으면 알겠지만, 유피테르는 세상 만물이 어떻게 될지에 관해 명령을 내리고 있다. 그런데 그 명령을 따라야할 대상들은 위대한 영웅이나 뭔가 웅장하고 장엄한 대자연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 쇠똥구리, 빈대다. 그래서 시답잖다 못해 하찮다(물론 최근 역사나 과학에서는 유피테르가 구구절절 나열하는 이런 '하찮은' 행위들과 행위의 주체들이 중요한 연구 대상이다). 


유피테르 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진지하게 믿던 사람 입장에서, 브루노의 이 발칙한 상상은 대단히 불쾌하게 다가올 것이다. 유피테르(제우스)는 신들의 왕 아닌가? 그런 신이 이런 시시콜콜한 일이나 한다고? 그런데 그렇게 반응할 사람은 브루노가 살던 16세기로부터 천 년도 더 이전인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테오도시오스 황제 시대를 거치면서 거의 사라졌다. 따라서 브루노 당시 이 글을 읽고 “유피테르 신을 모독했다”고 분노할 사람이 당시 유럽에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신을 믿는 신자들, 당시 유럽의 기독교인들 입장에서 여기 나온 “유피테르”가 어떻게 다가올까?


이 글을 쓴 조르다노 브루노는 이탈리아의 철학자이자 신비주의자다. 로마 가톨릭의 도미니크회 수사였던 그는 가톨릭 교리에 의심을 품었으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받아들였고, 나아가 우주는 무한하며 지구 밖에도 생명체가 있을 것이라 주장했다. 당연히 영국, 프랑스 등지를 전전하다가 베네치아에서 들렀을 때 붙잡혀 로마에서 종교재판을 받고 화형 당했다.

 


국내에 번역된 브루노의 저작은 한 권 뿐이며 아쉽게도 품절이다.


21세기 기준 지구인에게 브루노의 이런 주장은 별다른 감흥 없이 다가올 것이다. 지금은 지옥에서 사탄이 세상을 벌하러 뛰쳐 나온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벤저스처럼 외계에서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한다는 이야기, 아니면 듄이나 아바타처럼 인류가 우주를 정복하거나 정복한 후의 이야기가 더 인기를 끄는 시대다. 


브루노가 활동하던 16세기 후반기는 지금과 달랐다. 알프스 이북의 유럽 국가들은 종교개혁 과정을 거쳐 로마 교황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던 시기였고, 반대로 프랑스, 스페인 등 가톨릭권에서는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탄압(예컨대 성 바톨로뮤 축일의 학살이나 스페인의 그 유명한 이단 재판)이 행해지던 시기였다. 


과학사의 측면에서 브루노가 활동하던 시기는 코페르니쿠스 이후의 시기이자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같은 시대이다. 이 시대하면 흔히 교황청이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재판하고 갈릴레오는 재판 받은 후에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발언을 했다고 잘 알려진 시대다(그가 이런 발언을 정말 했는지는 차차하고). 그런 시대에 브루노는 우주는 무한하며 지구 같은 곳이 더 있을 것이고 그곳에는 생명체도 있을 것이라는 말을 내뱉은 것이다. 


16세기 유럽이라는 시공간적 배경에서, 지구 외의 다른 장소에 신이 또 다른 생명체를 창조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생각해야할까? 단순히 허무맹랑한 주장을 펼치는 사람? 그렇다면 그 사실을 수록하지 않은 성경에 대해서는 무어라 말해야 할 것이고, 신이 창조했다는 인간과 역시 신이 창조했다는 그 외계 생명체와의 관계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인간의 상상력은 가끔 아주 발칙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 상상력도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16세기에 거대한 모래벌래가 사막을 헤집고다니는, 행성 전체가 사막인 아라키스나 인간보다 한참 큰 푸른 외계인들이 머무는 판도라 같은 위성을 상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물론 이는 상상력이 뻗어나가는 방향의 차이이지, 상상력의 질적 수준이 다르다는 의미는 아니다). 



브루노 당시 브루노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사례로는 카를로 진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에서 다루는 방앗간 주인 메노키오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메노키오는 태초에 우주는 구더기들이 기어다니는 치즈였다고 주장했다. 메노키오도 당연히 브루노처럼 재판 끝에 화형당했다. 진즈부르그는 메노키오가 어떤 텍스트를 접했기에 기독교 교회의 우주론과 전혀 닮은 구석이 없는 독창적인 우주론을 도출하였는지를 추적한다. 덧붙여 『치즈와 구더기』는 역사학의 한 분야인 미시사를 대표하는 연구서이기도 하다.



이보다 앞선 중세 유럽에서 펼쳐진 인간의 상상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고 싶으면 움베르토 에코의 장편 소설 『바우돌리노』를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중세 유럽인들이 상상한 별의별 기괴한 존재들이 등장한다. 아울러 에코의 소설치고는 읽기 쉬운 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0년 초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었을 무렵, 가만히 집에서 노느니 외국어 공부라도 하자 싶어서 적당한 외국어 학습 어플을 찾다가 듀오링고를 시작했다. 처음 선택한 것은 프랑스어였다. 몇 년 째 듀오링고로 학습하긴 했지만 그외의 매체로 프랑스어를 거의 접하지 않다 보니 누구 앞에서 자랑할만한 실력에 이르기는 멀어 보인다. 어쨌든 듀오링고는 별다른 비용 없이 외국어에 입문할 수 있는 수단이다. 인터넷 접속만 되면 누구나 수십 가지 언어를 공부할 수 있다(여기에는 나바호어나 왕좌의 게임에 나오는 언어들도 포함된다). 


듀오링고의 한국어 학습자 수는 한국어의 위상을 드러내는 근거로 가끔 이용된다. 듀오링고의 영어 사용자들 기준으로 가장 많이 학습하는 언어는 순서대로 스페인어(4270만 명), 프랑스어(2490만 명), 일본어(1950만 명), 한국어(1650만 명), 독일어(1610만 명)다. 듀오링고라는 커뮤니티에 한정되긴 하지만 한국어가 영어권 화자들 사이에서 독일어를 제치고 일본어 다음으로 학습되는 언어라는 점은 대단한 성과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왜 저 1650만 명의 영어 사용자들이 한국어를 선택했는가? 이다. 



알베르토 코스타의 『언어의 뇌과학』은 두 가지 언어를 사용하는 이중언어 구사자들의 두뇌 작용과 구조를 분석한 책이다. "과학서"이기 때문에 이중언어 구사자들의 두뇌에 관해서만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중 언어는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가?'가 대단히 중요한 문제를 자연스럽게 수반한다. 전 세계의 수 천 가지 언어 중 2가지 언어만 선택해야 한다면 무엇을 고르겠는가? 예를 들어, 영어와 중국어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아마지그어와 나바호어를 배울 것인가? 그에 관해 이 책은 아무런 답을 하지도 않고 할 필요도 없고, 할 수도 없다. 여기서 부터 '자연과학'이 아니라 우리가 인문학 혹은 사회과학 혹은 인문사회과학이라 부르는 영역의 문제여서다.



반대로 「마니에르 드 부아르」13호는 현실에서 인간의 언어 생활을 두고 다투는 여러 언어들의 권력 다툼을 조망한다. 여기서 『언어의 뇌과학』에서 다루는 '이중언어자의 두뇌 작용'에 관해서는 일언반구의 언급조차 찾을 수 없다. 대신 「마니에르 드 부아르」의 기고자들은 현실에서 벌어지는 언어들의 다양한 상호작용과 그 배경을 추적하고 제시한다. 「마니에르 드 부아르」13호에서 언어는 여러 요인에 의해 인위적으로 억제되어 권력을 잃거나, 반대로 권력을 획득하기도 한다. 현실에서 와닿는 사례를 들자면 국립국어원에서 주도하는 언어 순화 사업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짜장면→자장면, 피카츄→피카추, 닭도리탕→닭볶음탕 같은 경우도 있어서 그렇지.


「마니에르 드 부아르」가 가장 문제시하는 지점은 단연 영어다. 프랑스어권 매체라는 점의 특징이 여기서 잘 드러난다. 프랑스어조차도 나날이 커져가는 영어의 영향력 앞에서는 무기력을 느끼는 모양이다.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상징하는 에펠탑에 영어 슬로건이 내걸린 것은 영어의 영향력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영어의 권력은 압도적이다. 세계 공용어에 가장 가까운 언어가 영어 아닐까? 영어는 지식의 생산과 유통에서 필수적이다. 많은 과학자들이 「네이처」, 「사이언스」 같은 영어 학술지에 연구 성과를 영어로 발표한다. 많은 텍스트가 영어로 생산되어 다른 언어로 번역된다. 그 반대는 드물다. 한국어 학술지에 "영어" 논문이 게재되는 경우는 있어도 영어 학술지에 "한국어" 논문이 게재되는 경우는 아마 없을 것이다(한국어 논문이더라도 영문 초록은 써야 한다). 


그 뿐인가? 살만 루슈디, 응구기 와 시응오 같은 비유럽권 작가, 제3세계 작가의 소설도 영어로 집필되어 영어권 독자들에게 읽히는 과정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누린다. 디페시 차크라바티 같이 서구중심주의를 비판하는 학자들의 글도 마찬가지다. 누구의 글이든 서구권, 특히 영미권에서 명성을 누릴 때 비로소 한국에 소개되는 경우가 많다. 


영어권에서 태어나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사람은 인종, 성별, 계급으로 대표되는 복잡한 계서제 속에서, 태어나면서부터 비영어권 화자들보다 높은 위계에 위치한다고 봐도 될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언어의 뇌과학』을 보면 인간은 "피부색"보다는 사용하는 "언어"에 더 호감을 느낀다는 실험 결과가 나온다. 이쯤에서 "언어"도 "인종, 성별, 계급"과 나란히 위치시켜야 하지 않을까?


모국어가 영어가 아니어서 제2외국어로 습득해야하는 입장에서는 순전히 영어 공부만을 위해 상당한 시간과 비용, 에너지를 투자해야한다. 영어 구사자는 영어를 습득해야 하는 과정에 수반되는 막대한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 반면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인이 초, 중등 교육과정과 고등교육과정에서까지 거의 십수년에 걸쳐 영단어를 외우고 영문법을 외우고 영어 텍스트를 읽더라도 결국 영어는 제2외국어로서 습득한 것이기 때문에 원어민을 따라가기엔 한계가 분명하다(영어 실력을 입증하기 위해 영어 시험을 치르는 것은 부수적인 결과다).


게다가 언어의 계서제에서 영어 만큼은 아니지만 그에 버금가는 중요한 언어들은 모두 영어가 탄생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유럽 언어들(프랑스어, 스페인어, 독일어 등)이다. 독일어는 영어와 같은 게르만어권에 속하고, 프랑스어는 로망스어권이지만 서양 중세사에서 잘 알려져 있듯이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정복한 이래 프랑스어는 귀족들의 언어로서 영어에 영향을 끼쳤다. 그 결과 프랑스어 역시 영어와 많은 어휘를 공유한다.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같은 로망스권 언어들은 프랑스어와 유사성이 많다. 게다가, 게르만/로망스어 모두 그 뿌리를 거슬러가면 인도-유럽어가 나온다.


그만큼 영어 구사자는 다른 유럽어를 배우기도 쉽다.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면 오펜하이머가 6주 동안 네덜란드어를 배워 네덜란드어로 강연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비유럽권 사람이 보기에 영화 상의 오펜하이머는 뛰어난 과학자인 것으로도 모자라 언어 습득 능력까지 뛰어난 천재로 보였을 것이다. 물론 영어가 모국어인 오펜하이머 입장에서 네덜란드어를 6주만에 습득하여 강연한 것은 대단한 일이다. 이를 지켜보던 이시도어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점이 이를 입증한다. 하지만 비유럽권 사람의 상상만큼 대단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여기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저 1650만 명의 영어 사용자들이 듀오링고로 한국어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몇 가지 답변이 제기될 수 있다. 그 중에서 먼저 떠올릴 수 있는 답안은 이른바 K-culture로 통칭되는 여러 한국 문화상품의 대대적인 흥행일 것이다(형용사가 되버린 저 'K'가 로마자이며 culture는 영단어지만 넘어가자). 여기에 한국 기업들의 약진, 한국이라는 국가 자체의 위상이 그간 꾸준히 상승하였다는 점이 답변으로 제시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한국어의 미래는 당분간은 그렇게 비관적이지 않을 것이다. 비록 여러 외국어들이 한국어에 침투하여 외래어로 자리잡고 있긴 하지만, 동시 한국어와 한국 문화도 퍼지고 있지 않은가? '누나,' '언니,' '오빠,' '김밥,' '학원,' '먹방,' 같은 한국어 어휘들이 옥스퍼드 사전에 등재된 사례들이 그렇다(여기에 '스킨쉽,' '파이팅' 같은 이른바 '콩글리시'도 등재되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외국인과의 소통하는 과정이 늘어나면서 서로 다른 언어들이 뒤섞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아닐까?  그러나 한국어가 쟁취한 지위, 그리고 한국어가 다른 언어들과 뒤섞이는 과정은 결국은 언어들의 계서제, 그리고 그와 결부된 지구상의 사회 구조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사실은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시우행 2024-02-29 04: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 젊은 시절, 어줍잖은 영어회화 실력으로 미8군에 파견된 군인이었고 이후 직장에선 국제금융을 전공하지 않은 순수 독학만으로도 전문가로 평가받았던 그때에 비하면 정말 한글의 위력이 엄청나게 상승된 모습입니다.

Heath 2024-02-29 11:06   좋아요 0 | URL
10년전, 20년전과 비교하면 정말 많이 변했구나 느끼게 됩니다.
 


입문서나 교양서는 전공서적에 비해 '인간적'이다. 전공서적은 무자비한 전문용어로 가득하며, 등장인물들도 인간미라고는 없어 보이는 선행 연구자들의 이름이 나열되고, 그들이 남긴 셀 수 없이 많은 연구들은 전공서적을 읽는 독자를 기겁하게 만든다. 


어떤 분야의 전공서적은 비전공자 더러 책을 덮으라는 듯이 강요한다. 분명 일상 생활에서 쓰는 용어임에도 그 책에서는 다른 의미로 사용되어 독자의 시선을 단어 하나에 묶어버린다. 어떤 분야에서는 그래프, 수식, 도표를 잔뜩 늘어 놓아 독자의 기를 잔뜩 죽여 놓는다. 분명 첫 문장에서 "본 서는 이러이러한 목적 하에 작성되었으며"는 또렷이 기억하나, 그 다음부터 언급되는 내용들이 논리적으로 무슨 관계가 있는거지 라면서 뒷 문장을 계속 읽게 만든다.


반면 입문서나 교양서는 그 반대다. 전문용어도 이해하기 쉽게 풀어 써주고, 그래프, 수식, 도표는 지양하며, 독자를 끌어들이는 스토리텔링에 대단히 능숙하다. 다시 말해, '재미있다.'


이 같은 입문서나 교양서의 장점이자 특징을 하나 꼽자면, 전공서적에서는 비인간적으로 나타나는 유명인들이 입문서나 교양서에서는 아주 친절하고 인자한 인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바꿔말해 '인간적인' 면모가 부각된다. 잔악무도하여 많은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살해한 독재자조차 전기나 평전에서 해당 인물의 성장 내력, 일화, 인간적 면모만 따져보면 우리 주변에서 볼법한 평범한 인간이거나, 평범이라는 기준에도 미달인 인간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저 인간이 이래서 이랬구나...'라고 옹호까지는 아니더라도 이해는 가게 만드는 사례를 더러 찾을 수 있다.  


입문/교양서와 전공서 간의 차이점은 학부생이 만나는 교수님, 대학원생이 만나는 교수님에 빗댈 수 있겠다. 학부생이 만나는 교수님은 (가끔 '감히 내 수업에 A+을 받으려 하다니!'라면서 의도적으로 A+을 안주거나, '이 정도는 해야죠?' 라면서 과제 폭탄을 내는 교수도 더러 있지만) 친절하고 인자하며 인간미가 넘치시지만, 대학원생이 만나는 교수님은? 괜히 네이버 웹툰에서 '대학원 탈출일지'라는 웹툰이 순위권이겠는가. ("그들은 그저 잘못된 선택을 했을 뿐이야")


학부생 입장에서는 수업 시간에 마주하는 평범하고 사람 좋아보이는 교수님이 사실은 그렇게 대단한 교수님인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수업 시간에 그렇게 졸리는 강의를 하시는 교수님이 사실은 그 분야에서 유명한 책 저자라거나, 그 분야에서 알아주는 상을 탄 수상자라거나, 해당 분야를 일신시킬 만큼의 새로운 발견을 했다거나, 교수님의 지도 교수님이 그 분야에서 알아주는 대가이거나, 교수님이 국내외 유수의 명문대학들 중 한 곳에서 학위를 취득했다거나(뉴스에서 지나가듯이 2-3초 등장하여 한 두마디 발언하는 국내외의 전문가들도 같은 사례에 포함된다).


같은 사람이 경우에 따라 천의 얼굴, 천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걸 모두 포착하기는 힘들다. 많은 전기들이 벽돌책으로 나오는 이유도 여기 있다. 하나의 단순한 사건도 실은 무한한 측면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사건을 두고 끊임없이 다양한 관점에서 재해석이 반복되는데, 그 사건을 일으키고 다니는 인간의 한 평생을 책 하나로 모두 서술한다? 사람이 평생 보내는 시간 중 단 하루를 콕 집어서 24시간 중 수면 시간 8시간을 뺀 나머지 깨어 있는 시간 16시간 동안 일어난 모든 일과 그 사건들이 지니는 의미로 글을 하나 쓰라 하면 몇 십권짜리 전집도 쓸 수 있지 않을까?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에 등장하는 경제학자들은 딱 위에서 든 학부생이 보는 교수님과 대학원생이 보는 동일한 교수님의 이중적인 면모를 그대로 보여준다. 경제학이나 인접분야 전문가가 아닌 이상 책등의 두께와 책등에 써진 제목을 보기만 해도 읽고 싶다는 의욕을 감퇴시키게 만드는 이 무자비한 경제학자들이, 평범한 인간과는 종이 달라보이는 그들이, 이 책에 나온 일화만 보면 '이 사람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구나'라고 느끼게 된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 반대로 독자의 기를 죽이는 인물도 더러 있다. 유아기에 라틴어, 그리스어 작문까지 했다는 존 스튜어트 밀이라던가(다만 저자 토드 부크홀츠는 밀의 불행한 인생에 대해 연민을 보내긴 한다).


이 책을 비롯해 다른 분야의 입문/교양서들도 해당되는 사항을 하나 더 꼽자면, 대개 입문서나 교양서에서 언급되는 인물들은 그 분야의 아주 이름난 사람들이다. 그들의 업적은 대단하지만, 독자를 더 놀랍게 만드는 것은 그들이 업적을 이룬 시기다. 20대에 희대의 발견을 하거나, 20대에 학계의 패러다임을 뒤흔드는 대작을 쓴 경우가 (자주)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뭘 하고 있(었)지?'라는 자기 반성(?)과 마주하게 된다. 물론 일찍부터 주변인들과 '종류의 차이'를 드러내면서 예나 지금이나 독자들을 압도하는 천재들의 숫자 못지 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뒤늦게 빛을 본 유명 인사들도 많다. 그들을 보면서 위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얄라알라 2024-02-18 17: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ㅎㅎ 이런저런 얼굴들을 떠올리며 읽게 된 글입니다. 좋은 생각 나눠주셔서 감사드려요

Heath 2024-02-18 19:4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잉크냄새 2024-02-18 17: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문 용어까지 들어가지 않더라도 경제학이라는 보통 명사 앞에서도 기겁하게 됩니다.

Heath 2024-02-18 19:41   좋아요 0 | URL
그렇죠. 무서운 명사들이 많습니다 ㅎㅎ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