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고화질세트] 히스토리에 (총11권/미완결)
Hitoshi Iwaaki / 서울미디어코믹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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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수》로 유명한 이와아키 히토시의 역사만화. 배경은 세계사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즉위하기 직전의 그리스 세계다. 


주인공 에우메네스는 실제 역사 속의 '에우메네스'에서 따온 인물이다. 역사에서 에우메네스는 마케도니아 왕국에 협력한 그리스인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페르시아 원정에 따라 나섰고 대왕 사후 전개된 분열 속에서 마케도니아 장군 안티고노스에게 살해 당했다.


이 만화의 에우메네스는 아테네 계열의 식민시 칼데아에서 성장한 '그리스인'이지만 사실은 칼데아시의 유력자 히에로니무스가 어린 시절에 거둬들인 '스키타이인'으로 설정되었다. 문화적 정체성은 그리스인이며 다른 그 어떤 그리스인보다도 그리스의 신화와 역사에 빠삭하지만, 정작 외모와 신체는 스키타이인이다. 소프트웨어는 그리스인, 하드웨어는 스키타이인. 이 점에서 주인공 에우메네스가 그리스 사회에서 가지는 위치는 그리스인도 아니고, 바르바로이도 아닌, 둘이 뒤섞인 이방인에 가깝다. 그래서 1권에서 에우메네스가 아리스토텔레스와 만날 때,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스인과 바르바로이(야만인)의 차이점을 언급하는 장면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1-4권까지는 에우메네스의 과거 여정을 돌이켜본다. 에우메네스는 그리스인으로서 성장하여 그리스인이라 생각했으나, 그리스인이라는 정체성에 가려져 있던 스키타이인으로서의 본모습을 알게되고, 그리스와 스키타이가 뒤섞인 자신이 그리스 및 주변 사회 어디서든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에우메네스는 외친다. "날 속였어!" 


여정 중에 파플라고니아의 티오스 시 인근에 위치한 보아 부족의 마을에 잠깐 머무른 에우메네스는 티오스 시와 보아 부족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분노의 창끝을 돌리게 만드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나 그 대가로 떠돌이 신세가 된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자신이 성장한 곳인 칼데아 시로 돌아온다.


그곳에서 에우메네스는 칼데아 시를 포위한 마케도니아군과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2세를 만난다. 에우메네스는 필리포스 2세를 마치 외눈박이 거인 퀴클롭스 같다고 느낀다. (반면 에우메네스 본인은 자신을 오디세우스에 비유한다.) 4권부터 에우메네스는 그리스 사회를 떠나 그리스인들에게 바르바로이나 다름없던 마케도니아 왕국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에우메네스가 바라본 마케도니아는 마케도니아인, 그리스인이 뒤섞인 왕국이다. 어찌보면 에우메네스에게는 그리스 보다는 그나마 어울리기 쉬운 장소다. 


5권부터 11권까지는 관찰자 에우메네스의 시선에서 복잡하게 돌아가는 동지중해 지역의 정세가 드러난다. 한편에서는 마케도니아 왕가의 복잡한 암투가 펼쳐진다. 다른 한편에서는 그리스의 패권을 장악해 향후 페르시아 원정에 나서려는 필리포스의 야망이 펼쳐진다. 이 와중에 알렉산드로스는 점차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이 만화는 사실 역사적 고증과는 거리가 조금 있다. 고증대로라면 에우메네스는 그리스인이 되어야 할 것이지만, 이 만화의 에우메네스는 그리스 도시에서 자란 스키타이인이다. 게다가 필리포스 2세 및 알렉산드로스 대왕 밑에서 활약한 장군 안티고노스의 행적도 묘연하다. 


그렇지만 반대로 작가의 상상력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그리스라는 환상을 철저히 깨부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는 흔히 아테네의 민주정,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일찍이 서양 철학의 바탕을 이룬 지역, 야만과 구분되는 문명의 대표, 동방의 페르시아에 맞서는 서방의 대표자 등을 들 수 있다. 물론 이 같은 신화들은 지금까지 그리스 및 이 지역의 역사를 다룬 역사서들로 충분히 무너진 것들이다. 예컨대 그리스의 정치 제도는 여성, 외국인, 노예를 배제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을 잘 알면서도 실제 그리스의 폴리스에서 펼쳐진 광경이 어떠했는지는 잘 상상하지 못한다.


이 만화는 역사서와 다른 방식으로 우리의 상상된 신화를 깨부순다. 작가가 보여주는 만화적 상상력은 역사가들의 역사적 상상력보다는 작가들의 문학적 상상력에 더 가깝다. 아마 만화라는 매체의 가장 큰 장점이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작가는 상상력을 발휘해 그리스의 잔혹하면서도 어두운 모습을 우리에게 생생히 보여준다. 1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인과 바르바로이를 철저히 구별 짓는다. 그러나 이후 그리스인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든다. 이 만화는 독자들에게 그리스 군인들이 노예 사냥에 나서, 도시 인근 바르바로이 무리를 잔혹하게 살해하고 여자와 아이들을 붙잡아 상품 취급하는 장면을 가감없이 보여준다.(이외에도 잔인한 장면들이 가끔 등장한다.) 


한편 작가가 재해석한 에우메네스는 현대인이 감정이입하기 알맞은 주인공이다. 이 만화는 독자를 기원전 4세기 무렵의 그리스로 내던진다. 그곳에서 그리스인들은 그리스인들대로, 스키타이인들은 스키타이인들 대로, 마케도니아인들은 마케도니아인들대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이 고대 세계에서 독자는 이방인이다. 에우메네스는 앞서 말했듯이 그리스인이면서 그리스 사회에 끼지 못하는 스키타이인이라는 이방인이다. 이방인으로서 에우메네스가 보여주는 태도는 이 만화를 읽는 동안 과거라는 낯선 왕국을 여행해야하는 이방인으로서의 독자를 대변하기에 좋다. 나아가 에우메네스 자신이 이해 못할 다른 문화를 접할 때마다 내뱉는 말, "문화가 달라!"는 이 낯선 고대 세계에 발을 들인 독자들이라면 누구나 내뱉을 말이기도 하다.


다만 에우메네스라는 인물이 무리하게 부각되는 점도 있다. 예를 들어 한참 뒤에나 발명될 등자를 만들기도 한다. 어떤 상황에 부닥쳐 문제를 해결할 때 에우메네스가 너무 뛰어나다는 인상을 개인적으로 받기도 했다. 이 부분은 뒤로 갈수록 에우메네스라는 한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국가간의 정치, 외교, 전쟁, 암투, 수싸움이 전개되면서 어느 정도 중화되는 듯 하다.


또 다른 문제점을 꼽자면, 현재 마지막 권인 11권을 책으로 사서 읽은 지 몇 년은 된 듯 한데 아직도 후속 권이 안나왔다. 그만큼 연재 속도가 느리다. 에우메네스의 여정은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 그 후 펼쳐질 디아도코이들 간의 혼란 속에서 끝날텐데, 부디 작가가 에우메네스의 여정을 잘 마무리 지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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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10-04 13: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거 엄청 재밌게 읽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연재가 매우 뜸해서 7권까지인가...거기까지만 읽었습니다. 아직도 완결이 안났군요!! 완결되면 전집을 소장하고 싶은 작품^^

Heath 2023-10-04 13:39   좋아요 0 | URL
완결까지 얼마나 걸릴지 ... 그래도 기다려야겠죠^^
 

나는 진짜로 나이 든 사람을 볼 때 보부아르가 타자他者라 부른 것을 본다. 너무 낯설어서 하나의 "사물이자 불필요한 것"으로 보이는 사람. 저 사람 늙었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늙지 않았는데. 그리고 이 말에는 나는 절대로 늙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가 숨어 있다. 나도 이 말이 거짓말임을 안다. 하지만 유용한 거짓말이다. 이런 생각 덕분에 마르쿠스처럼 매일 아침 침대에서 나와 싸움을 계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438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가 말했듯이 우리가 노화 탓으로 돌리는 많은 결점은 사실 인성의 문제다. 노화는 새로운 성격 특성을 만들어낸다기보다는 기존의 특성을 더욱 증폭한다. 우리는 나이 들수록 더 강렬한 형태의 자기 자신이 된다. 이러한 변화는 보통 긍정적이지 않다. 돈 쓰는 데 신중한 젊은 남성은 늘 투덜대는 늙은 수전노가 된다. 감탄할 만큼 의지가 강한 젊은 여성은 짜증날 만큼 고집 센 할머니가 된다. 이런 성격의 강화는 늘 부정적인 쪽으로만 흘러가야 하는 걸까? 나이 들면서 그 궤도의 방향을 꺾을 수는 없는 걸까? 더 나은 모습의 나이 든 내가 될 수는 없을까? - P439

철학은 우리에게 생각할 내용이 아닌 생각하는 방법을 알려주며, 우리에게는 나이 듦에 대한 새로운 사고방식이 필요하다. 사실 우리는 노화에 대해 별 생각을 안 한다. 젊음을 유지하는 것만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나이 듦의 문화가 없다. 나이 든 사람들이 절박하게 매달리는 젊음의 문화만 있을 뿐이다.
노화는 질환이 아니다. 병이 아니다. 비정상이 아니다. 문제가 아니다. 노화는 연속체이며, 우리 모두 그 연속체 위에 있다. 우리 모두가 언제나 늙어가고 있다. - P440

고대 그리스에는 시간을 의미하는 단어가 두 개 있었다. 바로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다. 크로노스는 일반적인 시간이다. 시계 속의 분, 달력 속의 달이다. 카이로스는 딱 맞는 적절한 때를 의미한다. 무르익은 기회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나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카이로스를 의미하는 것이다. - P441

실존주의자들에게 사람은 곧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이다. 더 이상의 반박은 없다. 우리는 온전히 실현한 기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추상적인 개념의 사랑이란 없으며, 오로지 사랑하는 행동만이 있을 뿐이다. 천재란 없고, 천재적인 행동만이 있다. 우리는 자신의 행동을 통해 한 번에 한 붓질씩 자기 자화상을 그린다. 사르트르는 우리가 곧 그 자화상이며 "오로지 그 자화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더 이상 스스로를 찾기 위해 노력하지 말 것. 스스로를 그려나가기 시작할 것. - P445

사실성facticity은 또 다른 실존주의 용어다. 사실성은 우리가 선택하지 않는 삶의 요소를 의미한다. 우리는 이 시기에 이 나라에서 이 부모에게 태어나기로 선택하지 않았다. 우리는 사실성을 통제할 수 없다. 나는 다시 설명을 시작한다. 좋은 소식은, 우리가 사실성을 초월할 수 있고 자신의 사실성, 즉 자기 자신을 넘어설수 있다는 거야. - P446

보부아르가 보기에 노화는 타인이 내리는 문화적·사회적 판결이었다. 배심원이 없으면 판결도 없다. - P452

우리는 사회적 역할과 자신의 본질을 혼동한다. 사르트르는 우리가 "타인에게 사로잡혀 있으며 타인의 시선대로 스스로를 바라본다고 말한다. 우리는 자유를 박탈당했으며 진정성이 없다(진정성authenticity이라는 단어는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이우텐테스authentes에서 나왔다). - P458

우리는 습관을 필요로 한다. 습관이 없으면 우리 삶은 수백만 개의 무의미한 파편으로 산산조각 날지 모른다. 습관은 우리와 이 세계를, 우리 자신의 세계를 하나로 이어준다. 습관이 왜 생겨났는지를 기억하고 끊임없이 그 가치를 의심하기만 한다면 습관은 유용할 수 있다. 습관이 우리를 지배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습관을 지배해야 한다. - P469

죽음은 우리 모두를 철학자로 만든다. 가장 생각 없는 사람도 어느 시점에는 반드시 궁금해한다. 죽으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죽음은 두려워할 일인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지? 죽음은 진정한 철학을 가리는 테스트다. 인생에서 가장 중대하고 겁나는 사건에 대처할 수 있게 도와주지 못한다면 철학이 다 무슨 소용인가? 몽테뉴는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 모든 지혜와 이론의 핵심은 결국 바로 이것이다. 우리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
하지만 대부분의 철학자가 죽음을 대하는 방식은 우리가 죽음을 대하는 방식과 다르지 않다. 즉 무시하거나 겁낸다. - P482

몽테뉴는 그런 회피에 너무 큰 대가가 따른다고 생각했다. 죽음을 회피하면 "다른 기쁨까지 전부 사라져버린다." 몽테뉴는 죽음을, 자기 자신의 죽음을 온전히 직면하지 않고선 삶을 온전히 살아낼 수 없다고 말한다. "죽음에서 낯선 느낌을 제거하고, 죽음을 알고, 죽음에 익숙해지자. 다른 무엇도 죽음만큼 자주 생각하지 말자. 매 순간 죽음의 모든 양상을 상상하자. - P489

"죽음은 우리가 타고난 조건이다. 우리의 일부다. 죽음에서 도망치는 건 자기 자신에게서 도망치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 쪽으로 방향을 재설정해야 한다. 죽음은 우리 밖에 있는 ‘무엇’이 아니며 우리는 죽음의 희생자가 아니다. - P493

몽테뉴 철학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자신을 믿을 것. 자신의 경험을 믿을 것. 자신의 의심도 믿을 것. 경험과 의심의 도움을 받아 인생을 헤쳐 나가고 죽음의 문턱을 향해 다가갈 것. 타인과 스스로에게 놀라워하는 능력을 기를 것. 스스로를 간질일 것. 가능성의 가능성에 마음을 활짝 열 것. 그리고 몽테뉴는 동포인 시몬 베유와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한다. 제발, 주의 좀 기울여. - P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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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 코너스가 영원히 반복되는 하루라는 축복이자 저주와 씨름할 때, 그는 철학의 주요 주제와 씨름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무엇이 도덕적 행위인가? 우리에겐 자유의지가 있는가, 아니면 정해진 운명대로 사는가? - P364

깊은 밤 한 악마가 찾아와 네게 이렇게 말한다고 상상해보라. "네가 지금 살고 있고 지금껏 살아온 삶을 반복해서 수없이 되풀이해야 한다. 그 삶에 새로운 것은 전혀 없고, 모든 고통과 기쁨과 생각과 한숨, 네 인생의 크고 작은 일 하나하나가 전부 똑같은 순서로 되돌아 온다. 이 거미도, 나무 사이로 비치는 달빛도, 이 순간도, 나 자신도 전부 다. 존재의 영원한 모래시계는 끝없이 다시 뒤집힐 것이다. 그 안에 있는 모래알 중 하나인 너 자신도!" - P369

니체는 이 생각에 영원회귀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생각은 니체의 마음을 송두리째 사로잡았다. - P369

"모든 진실은 구불구불하다." 니체가 말했다. 모든 삶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든 것이 지난 후에야 과거를 돌이켜보며 서사를 매끄럽게 다듬고 패턴과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모든 것이 지그재그다. 여백도 있다. 과거의 자신을 막 모습을 드러낸 미래의 자신과 갈라주는 텍스트 사이의 빈 공간. 이 여백은 무언가가 누락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여백은 무언의 과도기이며, 우리 삶의 흐름이 방향을 바꾸는 지점이다. - P372

니체가 보기에 춤추는 것과 생각하는 것은 비슷한 목표를 향한다. 바로 삶의 찬미다. 니체는 그 무엇도 입증하려 애쓰지 않는다. 그저 독자가 세상을 바라보기를, 자기 힘으로, 전과는 다르게 바라보기를 원할 뿐이다. - P378

과학적인 측면에서는 우리가 보는 것이 사실일 수도, 사실이 아닐 수도 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니체는 과학자가 아닌 예술가나 소설가의 진실을 보여준다. ‘마치 그런 것처럼‘ 접근법이다. 마치 눈에 보이는 표면 아래에 실재의 다른 차원, 예지체가 있는 것처럼 세상을 바라보라. 마치 인생이 끝없이 반복되는 것처럼 삶을 살아라.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라. 이런 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너의 세상을 환히 밝혀주는가? 좋다. 그렇다면 나름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세상을 다른 식으로 (그것이 허리를 굽혀서 다리사이로 세상을 바라보던 소로처럼 ‘부정확‘한 방식일지라도) 바라보는 것은 우리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 P378

영원회귀는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전부냐 전무냐, 둘 중 하나다. 인생이 하나의 패키지다. 당신의 삶은 정확히 똑같이 반복된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앞으로도, 뒤로도, 영원토록, 다른 것은 하나도 없다." 편집은 불가능하다. 모든 결함과 지루한 대화가 그대로 들어 있는 이 삶을 다시 살아야만 한다. - P381

완전 쇼펜하우어처럼 되어 우리가 "가능한 최악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결론 내릴 만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프리드리히 니체였다. 하지만 니체는 힘들고 너무 짧았던 자기 삶의 끝을 향해 다가가면서 인생 전체에 감사한다고 공표하고 쾌활한 다 카포!를 덧붙인다. 다시 한번. - P384

"성공은 어떤 모습이야?" 나는 니체가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할지 안다. 성공의 모습은 자기 운명을 철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성공의 모습은 시시포스의 행복이다. - P386

우리는 확실성이 아닌 정반대에서 즐거움을 찾기로 선택할 수 있다. 일단 그렇게 하면, 삶(외부인의 관점에서는 전과 똑같은 삶)은 꽤나 다르게 느껴진다. 불확실성에서 즐거움을 찾으면 낮에 회사에서 있었던 심란한 일은 하루의 끝에 이를 갈며 와인 한 잔을 더 마셔야 할 일이 아닌 축하할 일이 된다. - P388

이 베를린 지혜 프로젝트는 지혜를 규정하는 다섯 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사실적 지식, 절차적 지식, 인생 전체에 걸친 맥락주의, 가치 상대주의, 불확실성을 관리하는 능력이 그것이다.
나는 그중에서도 가장 마지막 기준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삶의 불확실성과 혼란을 관리해주겠다고 약속하는 알고리즘과 인공지능의 시대를 살아간다. 하지만 알고리즘과 인공지능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삶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예측 불가능하고 혼란스럽게 느껴진다.
스토아철학은 이 지점에서 빛을 발한다. 스토아철학의 핵심 교리(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고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여라)는 격동의 시기에 더욱 매력을 뽐낸다. - P399

스토아학파는 차가운 사람들이 아니다. 강렬한 감정을 억누르지도, 안으로는 벌벌 떨면서 겉으로만 용감한 표정을 짓지도 않는다. 이들은 모든 감정을 다 내던지지 않는다. 불안, 두려움, 질투, 분노, 그 밖의 다른 ‘정념‘처럼 오직 부정적인 감정만 내던진다(정념이라는 의미의 pathe는 ‘감정’과 가장 가까운 고대 그리스어 단어다). - P401

스토아학파는 이기적이지 않다. 이들은 다른 사람을 돕는다. 감상벽이나 동정심 때문이 아니라, 손가락이 손을 돕듯이 그렇게하는 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에 돕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겪는 불편, 심지어 고통까지도 기꺼이 감내한다. - P402

대부분이 자기 통제하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우리의 통제 밖에 있다. 부도 명성도 건강도 통제할 수 없다. 본인의 성공과 자식의 성공도 마찬가지다. - P404

스토아철학은 이처럼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는 상황과 성과를 "무관한 것"이라 칭한다. 이런 무관한 것들은 우리의 인성이나 행복에 티끌만큼도 보탬이 되지 않는다. 무관한 것들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그러므로 스토아철학은 무관한 것들에 ‘무관심‘하다. - P404

삶의 많은 것들이 우리의 통제 바깥에 있지만,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지배할 수 있다. 바로 우리의 생각과 충동, 욕망, 혐오감, 즉 우리의 정신적·감정적 삶이다. - P407

최초 정념에 반드시 동의해야 한다면 다른 방향으로 동의해보라고 에픽테토스는 제안한다. 정념에 다른 이름을 붙여라. 홀로 있을 때 느끼는 고독에 평온함이라는 이름을 붙여라. 사람들로 붐비는 장소에 가면 그 상황에 축제라는 이름을 붙이고 "모든 것을 만족스럽게 받아들여라." 정신승리라고? 물론 그렇지만, 이건 도움이 되는 정신승리다. 어차피 우리의 정신은 늘 현실에 농간을 부린다. 그런 농간을 잘 활용하면 좋지 않겠는가? - P412

스토아철학은 미래의 고난을 상상하는 것은 미래의 고난에 대해 걱정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걱정은 모호하고 애매한 것이다. 하지만 고난을 예상하는 것은 구체적인 행위이며, 더 구체적일수록 좋다. - P417

스토아철학의 핵심에는 깊은 숙명론이 있다. 우주는 내가 쓰지 않은 대본에 따라 움직인다. 언젠가는 직접 연출을 하고 싶겠지만 포기하는 게 좋다. 우리는 연기자다. 자기 역할을 받아들여야 한다. 에픽테토스는 "내가 나이팅게일이라면 나는 나이팅게일의 역할을 연기할 것이다. 내가 백조라면 백조의 역할을 연기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 P419

우리는 종종 자신의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혼동한다. 스토아철학은 헷갈릴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간단하다. 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 몸조차도 내 것이 아니다. 우리는 늘 빌릴 뿐, 절대로 소유하지 않는다. 해방감이 느껴진다. 잃어버릴 것이 없다면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할 것도 없다. - P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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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나곤은 한 길에만 머무르길 거부한다. 그녀는 "세련되고 우아한 것들"에서 "가치 없는 것들"로 방향을 꺾었다가 다시 "진정으로 훌륭한 것들"로 돌아온다. 쇼나곤이 길을 잃은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쇼나곤은 "붓 가는 대로 따라간다"는 뜻의 즈이히츠隨筆를 하고 있다. 즈이히츠는 일본의 글쓰기 기법 아닌 글쓰기 기법으로, 내 눈엔 책이 아닌 책을 쓰기에 완벽한 방식으로 보인다. 즈이히츠를 실천하는 작가는 주제하지 않고 자신의 느낌을 따라가 지적 가려움을 긁은 다음, 다시 돌아오기도 하고 돌아오지 않기도 한다. 글에 구조를 부여한다기보다는 구조가 스스로 나타나게 한다. - P336

나는 우리 모두가 조금 더 즈이히츠를 활용해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글쓰기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분명한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한다고, 자기계발서들은 조언한다. 이런 접근법은 우리가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목적지를 파악하고 있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인생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가끔 우리는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채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니 움직일 것. 지금 있는 곳에 - P336

서부터 움직이기 시작할 것. 일단 붓을 들고 붓이 어디로 향하는지 지켜볼 것.
쇼나곤은 세상을 묘사하지 않는다. 자기만의 세상을 묘사한다. 중립적인 관찰은 없다. 쇼나곤은 자신이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를 안다. 쇼나곤은 몇 세기 후 니체가 발전시킨 철학 이론인 관점주의를 따른다. 진실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다. 그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쇼나곤은 말한다. 너만의 것으로 만들어. - P337

세이 쇼나곤은 자기 렌즈가 투명하고 깨끗할 수 있도록, 자신의 생각이 온전히 자신만의 생각일 수 있도록 치열하게 노력했다. - P337

모든 것은 딱 좋거나 완전 글렀거나 둘 중 하나다. 1센티미터 삐끗하는 것은 1킬로미터 삐끗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 P339

쇼나곤이 진정한 기쁨이라 선언하는 것은 완벽할 필요는 없지만 반드시 알맞아야 한다. 분위기와 계절에 어울려야 한다. 본질에 들어맞아야 한다. 그러므로 "여름은 극도로 더울 때가 최고이며, 겨울은 지독히 추울 때가 최고다." - P339

쇼나곤은 우리에게 세상을, 자신의 세상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한다. 이것 좀 봐. 정말 놀랍지 않니? 너무 작고 너무 아름다워. 만약 니체의 말처럼 철학자의 일이 "삶을 더욱 좋아하도록 만드는 것"이라면, 쇼나곤은 철학자다. 쇼나곤의 글을 몇 시간 읽고 나면 색채가 더욱 선명해 보이고 음식은 더 맛있어진다.
쇼나곤의 철학에 함축된 의미는 다음과 같다. 우리의 정체성은 자기 주위에 무엇을 두기로 선택하느냐에 크게 좌우된다. 주변에 무엇을 두느냐는 선택이다. 철학은 우리가 내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선택을 겉으로 드러내 보인다. 어떤 것이 자신의 선택임을 깨닫는 것은 더 나은 선택으로 향하는 첫걸음이다. - P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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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원론적 문화에서 살아간다. 그것은 어떤 생각이나 사람들을 스펙트럼의 정반대 양쪽 끝에 나누어 놓고 식별하는 이분법적이고 계층화된 사고방식에 따라 살아가는 삶이다. - P325

우리는 타자를 적으로 보고 오만하게 우리만 ‘옳다‘거나 신은 우리 편이라고 말하면서 우리가 만들어낸 대립과 비판과 판단을 합리화한다.
양극화(polarization)라는 이 방식은, 지금껏 어떤 사람은 부유하고 강한 존재가 될 수 있게 보호하는 반면에 다른 쪽 사람들은 가난하고 무지하고 약한 상태로 두었다. 자기가 경멸하는 세계관이나 종교적 신념을 따르는 사람들보다 자신이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국수주의를 허용해 왔다. - P326

인간의 오만은 우리 모두가 생명의 연속체 속에서 공존하며 ‘우리 모두는 하나‘라는 사실을 보지 못하게 한다. - P325

가부장적 관계에서는 종교적 차원이건, 정치적 차원이건, 개인적 차원이건 오직 한 사람만이 최고의 지위에 있을 수 있다. 그래서 항상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있다. 지배적인 인물이 권력을 유지하려면 자신의 파트너를 한 단계 낮은 위치에 둘 필요가 있다. 이것은 한 사람은 지배자의 위치에 있기를 기대하고 다른 사람은 지배받기를 기대하는 특정한 사고방식을 창출한다. 이런 배합의 유형을 구체적 사물로 비유한다면 두 사람의 관계일 때는 시소와 같고 셋 이상의 관계일 때는 피라미드와 같다. - P330

인류 역사에 협력 관계가 중심인 사회들이 존재한 시기가 많았다. 그런 사회에서는 생명을 잉태하고 보살피는 신성성의 양상이 일상적 삶의 한 부분으로 숭배되었고, 종교적이거나 일상적인 일들을 수행하는 데에 성차별이 없었다. 서유럽의 구석기 시대 동굴과 차탈회위크와 하실라르의 무덤뿐만 아니라 크레타의 미노아 문명, 영지주의 기독교, 초기 켈트족, 아메리카 원주민들, 발리섬의 원주민들, 그밖에 많은 곳에서 이런 사회가 존재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 P336

우리는 지금 함께 여행하는 순례자들이다. 모든 생명의 존엄성—보이는 것이건 보이지 않는 것이건—을 존중하고 보존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여행 중이다. 그 안에 우리의 영웅적 힘이 있다. - P346

낡은 이야기는 끝났다. 영웅적 탐색의 신화는 진화의 나선 위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일시적인 명예에 불과한 직함이나 성취, 갈채, 부의 추구 같은 ‘본질이 아닌 것‘에 대한 탐색은 더는 타당하지 않다. 그 엉뚱한 탐색은 여성의 육체와 정신, 그리고 어머니 대지에 너무 비싼 통행세를 치르게 했다.
오늘날 여성 영웅은 자신을 과거에 묶어놓았던 자아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자신의 영혼이 추구하는 바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을 찾기 위한 분별의 칼을 들어야 한다. 어머니를 향한 분노를 놓아버리고 아버지를 비난하거나 우상화하는 것을 그만 두어야한다. 자신의 어둠을 대면할 용기를 찾아야 한다. 그녀의 그림자는 이름 지어주고 껴안아줘야 할 바로 자신의 것이다. 여성은 자신 안의 이 어둡고 그림자 진 공간에 명상, 미술, 시, 연극, 의식, 관계 맺기, 흙을 만지는 일을 함으로써 빛을 비춘다. - P347

오늘날의 여성 영웅에게 주어진 임무는 그녀 자신의 내면에서 은과 금을 캐내는 것이다. 그녀는 자기 내면의 ‘가슴을 가진 남성‘과 긍정적인 관계를 발달시키고 신성한 여성성과 소원해진 자신을 치유하도록 내면의 지혜로운 여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녀가 정신뿐만 아니라 몸과 영혼도 존중할 때 비로소 자신과 문화의 분리, 그리고 자신 안의 내적 분리가 치유된다. - P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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