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부터 쓰던 299리터 냉장고는, 지금은 LG의 G자에 그 흔적이 남아 있는 예전의 금성제품이다.

23년간이나 나와 생사고락을 함께 해 온 이 냉장고가 드디어 수명을 다했다. 동백꽃 떨어지듯 아무 예고없이 어느 한순간에 생명줄을 놓아버렸다. 그저께였다.

 

새 냉장고가 집으로 들어오기 전 급하게 마지막 모습을 사진기에 담았다.

 

 

딸아이가 초등학교 때 그린 토끼그림, 묵나물 해먹는 방법을 알려주는 종이, 신문에서 오린 간단한 레시피, 세계사 연표 등이 안쓰럽게 붙어 있다. 이 냉장고는 가족이었다. 냉동, 냉장 보관 기능에다 세계사의 굵직한 사건들에 대한 정보와 지식, 딸아이의 재롱까지 모두 담고 있는 듬직한 가족이었다. 23년 동안이나.

 

결혼 전 한때는, 내가 출근한 사이 새언니가 와서 냉장고 청소와 더불어 밑반찬을 해놓고 간 적도 있었다. 결혼 후, 시어머님과 함께 살 때는 시어머님의 고된 손길이 많이 닿았었다.

 

300리터에서 1리터가 모자라는 이 냉장고가 작다고 생각해본 적은 거의 없었다. 김치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는 김장김치도 다 수용했었으니, 김치냉장고를 사용한 후부터는 공간이 여유로울 때가 많았다.

 

80년대 초반 무렵, 그때는 전자제품하면 금성을 최고로 치던 시절이었다. 수명이 제일 오래간다고 해서 우리집에서는 무조건 금성제품만 사용했었다. 부모님 생각이 난다.....

 

 

잘가라. GoldS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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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4-09-26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저까지 서운한 마음이 들죠? 저도 친정에 가면 아직 GoldStar 로고가 있는 선풍기가 있어요. 엄마 말씀에 의하면 제 나이와 동갑이라더군요.
냉장고, 그만하면 오랜 동안 제 임무를 충실히 다 했네요.

nama 2014-09-27 08:16   좋아요 0 | URL
고등학교 때 배운 <조침문>이 내내 떠올랐어요. 바늘 하나 가지고도 사람 마음을 울릴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이상했었어요, 그 당시에는.
그게 이제는 이해가 되네요.

sabina 2014-09-26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GoldStar...오랫만에 보는 로고가 정겹게 느껴지네요.
올해 초, 저도 23살 딸아이와 동갑인 삼성 세탁기와 이별했죠. 기사분이 그러더군요.
부속을 구할 수 없고 더구나 삭아 구멍이 나서 물이 새는 상태라고.
이정도면 환갑 진갑 아니, 백수를 다한 셈이겠죠?
사람만큼은 아니래도 내곁에서 오래지낸 물건에게도 일말의 애정이 생기나 봅니다.
가끔은 못쓰게되어, 버린 물건들이 생각날 때가 있으니...

nama 2014-09-27 08:21   좋아요 0 | URL
삼성도 오래가네요. 어제 새것을 들여놓으면서 기사분에게 물었더니 요즘것은 수명이 7~8년이라고 하네요. 가격이 많이 내려간 대신 부품을 그에 맞게 저렴한 걸 사용한다나요.
사람은 살다보면 미울 때도 있는데, 오히려 그런 면에서는 이런 물건이 더 듬직할 때가 있어요. 늘 묵묵하게 인간한테 헌신하고 있으니까요.

qualia 2014-09-27 0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마음 아프셨겠어요. 〈23년간이나 나와 생사고락을 함께 해 온 이 냉장고가 드디어 수명을 다했다. 동백꽃 떨어지듯 아무 예고없이 어느 한순간에 생명줄을 놓아버렸다.〉 23년 동안이면 사람 마음이 깃들어서 냉장고도 사람이 다 되었을 텐데요. 사람한테 마음껏 베풀어주고 떠나가네요. 귀여운 토끼 그림도 넘 안타까워하는 듯해요.

저도 금성 GoldStar 전기밥솥을 한 20여년째 쓰고 있답니다. 보온이 안 돼 찬밥 먹을 때가 있긴 하지만 아직도 밥은 잘 돼요. 20여년 동안 쌀이 저 전기밥솥 몸속을 거쳐, 밥으로 제 몸속을 지나 에너지나 의식으로 연소되고, 다시 다른 물질이나 흙으로 돌아간 것이죠. 저 전기밥솥이 저한테 언제까지 밥을 해줄 수 있을지 살살 걱정돼요. 그렇지만, 동생이 사다준 새 전기밥솥 박스를 몇 년째 뜯지 않고/못하고 있어요.

nama 님 〈잘가라. Goldstar!〉 마지막 작별인사 때문에 마음 짠해지네요.

nama 2014-09-27 08:29   좋아요 0 | URL
GoldSta라는 단어를 들으니 왜 이렇게 정겨운지요...님의 전기밥솥도 장수하기를 빌어요^^ 물건을 수명이 다할 때까지 사용하는 건 아름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저는 아직도 현관문을 번호키가 아닌 예전 열쇠를 쓰고 있어요. 간혹 열쇠를 챙기지 못해 사단이 일어나기도 해서 늘 딸아이의 원성을 사고 있어요. 그럴 땐 제가 그러지요. ˝아직 열쇠가 살아있잖아.˝

수양 2014-09-27 0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냉장고란 이런 존재로군요! 이제 막 하나둘 살림 장만하기 시작한 예비새댁인데요 새삼 냉장고의 의미에 대해 곱씹다가 갑니다. 냉장고... 이거이거 함부로 살게 아니네요^^ 냉장고 사진 보며 아우라를 느껴보기는 첨입니다 *_*

nama 2014-09-27 08:38   좋아요 0 | URL
냉장고 아우라...이렇게나 감동적인 표현을...가슴이 벅차올랐어요.
제 생애 처음으로 구입한 냉장고여서 더욱 애정이 깊었었지요.
새 냉장고를 구입하려고 매장에 갔는데, 글쎄 모두 크고 비싼 냉장고만 진열되어 있었어요. 결국 저는 카타로그를 보고 주문해야 했어요. 작고 저렴하다는 이유로 매장에 진열 조차 되지 않는 냉장고지만, 우리집에서는 단연 눈에 띄는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어요.
반갑습니다.

hwan 2014-10-06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기계는 안써도 오래되면 고장이 쉽게 나더군요 qualia님! 새 전기밥솥 아끼지 말고 사용하세요

nama 2014-10-06 16:12   좋아요 0 | URL
쓰지 않고 모셔둔 새우산을 몇 년 지나 쓰려고 꺼내보았더니 만지는 순간 플라스틱부분이 부스러지던 경험이 있어요. 책을 며칠만 안 읽어도 문자에 낯설어지고, 영어발음을 며칠만 쉬어도 입안이 깔깔해져요. 하물며 기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