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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터가 첫 소설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내서 프래너리 오코너 상을 받은 것이 2007년. 이후 지금까지 장편소설 <어떤 날들>과 소설집《사라진 것들》, 그리고 작년 2025년에 장편 <상상 속 인생 Imagined Life>를 출간했을 뿐이니 과작 작가인 건 확실하다. 이이는 저 북동부 펜실베이니아에서 출생해 뉴욕의 바시 칼리지, 아이오와 작가 워크숍을 졸업하고 지금은 텍사스주 샌안토니오에 있는 트리니티 영문과와 창작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작품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 우리나라에서 가히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사라진 것들》의 책소개에서도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 런던타임스로부터 “무시무시한 작품집”이라는 평을 들었다는 걸 강조할 정도였는데, 글쎄 정말 무시무시한 수준이었을까 싶기도 했다. 데뷔작이 이렇다면 작가는 긴장해야 마땅하다. 독자들은 다음 작품 역시 무시무시하기를 바랄 터이니까. 아니, 어쩌면 그 이상.
나라고 중뿔날 거 없어서 《사라진 것들》이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만큼 인상깊기를 바랐다. 포터가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를 발표한 것이 서른다섯 살 때. 《사라진 것들》은 30대 후반부터 40대 시절의 자신을 투영한 작품이다. 남자 나이 40대. 우리나라에서 시를 쓰는 허연이라는 사람은 40대를 이렇게 노래했다. “업무상 배임, 공금횡령, 변호사법 위반. 뭘 갖다 붙여도 다 어울린다. 때 묻은 나이.” 앤드루 포터의 이 시기는 어땠을까? 이게 이 책 《사라진 것들》을 읽는 포인트가 될 수 있다.
《사라진 것들》의 주인공들은, 극히 짧은 손바닥 소설을 제외하고, 모두 40대 남성이고 이름은 편편이 다 다르지만 한결같이 화자 ‘나’의 진술, 1인칭이다. 벌이가 시원치 않은 대학 강사 또는 교수일 수도 있고, 식당에서 아르바이트 직원일 경우도 있으며, 부모나 조부가 죽으면서 남겨준 재산을 까먹으며 나름대로 자기 일을 준비하는 룸펜 인텔리겐치아일 때도 있다. 많은 경우 혼자 살지는 않고 아이가 한 둘 있거나 없는 결혼생활을 하지만 부부/자식 간 까칠한 관계를 억지로 이어가고 있다. 주인공은 대부분의 작품에서 앤드루 포터처럼 텍사스의 샌안토니오에 살고 가끔은 뉴욕과 뉴욕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역에 거주하면서 텍사스로의 이주를 염두에 두고 있기도 하다. 무슨 말이냐 하면, 당연하겠지만 앤드루 포터의 지난 시절, 그리고 지금 생활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는 말이다.
제일 앞에 실린 <오스틴>은 텍사스주의 오스틴 시를 말한다. 우리나라 기업이 많이 입주해 있는 곳으로 귀를 쫑긋 세우면 뉴스 시간에 자주 언급하는 도시. 오스틴 외곽 웨스트레이크힐스에서 고등학교 동창생들의 파티를 스케치한 작품인데 마음에 들었다. 흠. 앤드루 포터, 여전하군. 하면서 나름대로 즐겁게 읽었다. 여유있는 편집에다 술술 읽히는 부담없는 내용. 부담이 없기는 없지만, 정말로 책 속 삶을 사는 동안에는 괴롭기 짝이 없겠다는 동감도 이끌어낸다. 단편 전문 작가답다. 내가 극도로 짧은 손바닥 소설을 좋아하지 않아, 이런 한 두 페이지 분량의 초단편이 나올 때마다 찡그리기는 했어도 그래도 술술 읽힌다. 나도 술술 읽는다. 오전에 치과 가서 임플란트 두 개 박고 와서도 그저 읽는다.
그러다가 잠깐. 이게 아니지 싶다.
하얀의 남편 허연이 말한대로 앤드루 포터의 주인공 ‘나’들 역시 이제 점점 업무상 배임, 공금횡령, 변호사법 위반, 이런 것들 가운데 뭘 갖다 붙여도 다 어울리는 거 아닐까, 싶은 마음이 든다. 허연의 시구를 떠올린 순간이 바로 이때다. 정말로 주인공들이 이런 경제 범죄를 일으킨다는 건 아니고, 세월의 때가 덮인 그냥 그런 인간이라는 의미다. 내가 이의를 제기하는 건, 그냥 그런 인물이라도 충분한데, 충분해도 작품의 주인공이 되기에 너무 충분하지만, 빛나고 무시무시한 책을 쓴 작가였으며, 트리니티 대학의 영문과 및 문예창작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니 적어도 지역의 대표적 지식인으로 추앙받고 있다고 부심 뿡뿡한 입장이라고 오해할 수 있는 작가가, 그냥 그런 인물을 그 남자 속에 뭔가 응축된 것이 있는 탁월한 자처럼 보이게 하려고 애쓰는 것 같은데, 이런 노력이 내 눈에는 오히려 그냥 보통의 사람인 주인공을 더 속화俗化 시켜 “업무상 배임, 공금횡령, 변호사법 위반, 이런 것들 가운데 뭘 갖다 붙여도 다 어울리는” 인간으로 만들어버리지 않았나 싶은 거였다.
실제로 작품 속 주인공, 숱한 1인칭 대명사 ‘나’들은 술도 마시고, 담배도, 마리화나도 피우고 그러지만 다른 작가의 작품 속에 숱하게 등장해 오히려 식상할 정도인 비행을 저지르지는 않는다. 그러니 읽기에 부담도 없다. 뭐 그렇다는 거다. 새삼스럽게 이이의 데뷔작인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읽고 어떤 독후감을 썼나 뒤져봤다. 요약해서 “읽고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읽을 때는 좋았지만 지금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수준이었다. 아쉽게도 《사라진 것들》 역시 하루 이틀만 더 지나도 비슷한 감상을 남기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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