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가보지 못한 길

고군산군도, 부안 내소사, 고창 선운사


어린이 날이 포함된 연휴라 아이들과 어디 놀러 갈까 하는 생각을 뒤늦게 했으나, 아이들은 이미 애들엄마와 놀러 갈 예정이라고 했다. 아, 한발 늦었구나. 나는 그냥 조용히 혼자 집에서 영화나 보고, 책이나 읽어야지 생각했다. 그런데 연휴 거의 직전에 친한 친구가 전북 고창에 귀농한 친한 형님을 보러 가자고 제안했다. 그 형님이 귀농하시기 전에 한동안 제법 친하게 지냈었는데, 몇 해 전에 귀농하신 이후로는 한번도 찾아뵙지 못했었다. 반면 놀러 가자고 제안했던 친구는 그 형님과 잘 알지 못했는데, 동네 등산 모임에서 어쩌다 그 형님과 친한 다른 사람 덕분에 그 집에 놀러 갔었다고 했다. 나는 이미 연휴에 집에서 조용히 지내야지 라는 생각을 했던 터라,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는데, 그 형님과 몇 해 동안 연락을 못 하고 지냈다는 점이 마음에 걸려서 연락을 드려봤다. 형님은 반갑게 전화를 받으시고는 언제든 편하게 놀러 오라고 하셨다. 일단 날을 잡고 나서 함께 놀러 갈 다른 사람들이 혹시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여행을 제안했던 친구는 사람들을 더 모아서 가려고 친한 사람들 중심으로 더 제안을 해봤는데, 거의 연휴 직전이어서 다들 이미 다른 일정이 있었다고 했다.


결국 그 친구와 단 둘이서 아침 일찍 만나서 출발했다. 여행 전날 밤에 악몽을 꾸느라 같은 악몽을 여러차례 반복해서 꾸면서 몇 번이나 잠을 깨서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상태로, 피곤한 몸으로 출발했다. 거기에 연휴 시작 시점부터 계속 얼굴에,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인한 통증이 심했다. 통증 부위가 살짝 더 부어올랐고, 여러 형태의 통증들이 계속 반복되어 나타나며 사람을 괴롭혔다. 게다가 통증 부위가 바로 눈 밑이라 눈을 뜨고 있기가 힘들었다. 그렇다고 눈을 감고 있으면 피곤한 상태에서 잠이 들어버릴까봐, 운전하는 사람 옆에서 혼자 잠드는 것은 예의가 아니기에 혼자 속으로만 통증을 견디며 보냈다. 


고창까지는 먼 길이다. 중간에 운전하던 녀석이 피곤하다며 휴게소에 들렸을 때, 운전 교대를 제안했다. 녀석 혼자 오가는 길을 다 운전하게 할 수는 없으니, 체면 상 내가 한 번 정도는 운전을 해야 할텐데, 돌아오는 길은 녀석에게 맡기기로 하고, 내려가는 길에 내가 운전을 한 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운전대를 잡았는데, 낯선 차에 익숙해지는데에도 시간이 필요했고, 계속되는 통증 때문에 운전에 집중하기가 어렵기도 했고, 통증이 자꾸 눈에 영향을 미쳐서 혹시라도 내가 실수를 하게 될까 여러모로 신경이 많이 쓰였다. 일단 핸들이 좀 빡빡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엑셀과 브레이크 유격에 익숙해지는데에도 시간이 제법 걸렸다. 그런데 이 와중에 옆에 앉은 친구는 코를 골면서 잠이 들었다. 나는 통증에 시달리면서, 눈이 불편해도 일부러 잠들지 않으려고 애를 썼건만.


고창의 형님은 낮에 농사일과 소 키우는 일을 하셔야 해서 저녁이나 되어서야 만날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아침 7시쯤 출발했는데, 생각보다 많이 막히지 않아서 수월하게 군산까지 내려왔다. 친구는 우선 새만금 방조제로 연결된 고군산군도를 가보자고 했다. 녀석이 얼마 전에 다녀왔었는데, 제법 좋았다고 했다. 나는 사실 새만금 간척 사업 반대 운동에 참여했었다. 내가 공저자로 참여했던 첫 책 [100인의 책마을]에 실었던 원고에도 그 이야기를 썼었다. 당시 나는 새만금 투쟁이 결국 법정 싸움으로 옮겨졌다가 실패하면서 그 결과로 인해 우울증에 걸릴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었다. 그래서 그 투쟁 이후로 새만금을 직접 찾아가지 않았었다. 4공구 기습 점거 투쟁 이후 20년이 훌쩍 지났다. 나와 함께 간 친구는 방조제로 인한 환경오염과 다양한 문제들이 있지만, 한편으로 방조제 덕분에 고군산군도를 차로 쉽게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며, 나를 거기로 이끌었다. 군산에서 방조제로 조금 들어갔다가 선유도 방향으로 빠져서 신시도, 무녀도를 지나 선유도에 차를 대고 보행자 전용 다리인 스카이워크(왜 이름을 영어로 이렇게 촌스럽게 지었을까>)를 건너서 장자도로 들어갔다. 풍경이 멋졌다. 그곳에서 느긋하게 경치를 감상하며 걸으면서도 나는 그 옛날 새만금 4공구의 그 날이 문득 문득 떠올랐다.


새만금 간척사업의 전면 재검토를 공약으로 걸었던 노무현 정부는 환경파괴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커지자 막바지에 전국의 거의 대다수 덤프 트럭을 동원해 밤낮없이 바위와 흙을 퍼날라 부어서 원래 예정된 공사기일을 크게 앞당겨 물막이 공사를 끝낼 참이었다. 우리 활동가들은 전국적으로 비상선언을 하고 부안성당에 모였다. 구명조끼를 입고 바다에 뛰어들어 몸으로 물막이 공사를 막다가 끌려 나오는 등 다방면으로 노력을 했지만 결국 빠른 시간 안에 바위와 흙으로만 방조제 뼈대를 쌓아서 물막이 공사가 끝나버렸다. 이에 우리 활동가들은 전국에서 약 80여명의 활동가들을 모아 비상 작전을 실시했다. 4공구 기습 점거 및 해수유통 행동이었다. 전국에서 모인 활동가들은 밤까지 작은 읍내인 부안에 직접 들어오지 않고 인근에 잠복해 있다가 자정이 넘어서 부안성당에 모였다. 새벽에 새만금 개척사업에 반대하는 어민들의 협력을 얻어 어선 여러 대를 얻어 타고 4공구 물막이 공사가 막 끝난 방조제 위에 도착했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에 우리는 삽과 곡갱이로 바위와 흙을 파나가기 시작했다. 몇 시간이나 걸렸을까 해가 뜨고 사방이 밝아질 무렵 방조제 위쪽을 파내어 다시 해수를 유통 시켰다. 막혔던 물길을 임시로 다시 뚫었던 것이다. 그 무렵 소식을 접한 언론사 기자들과 시공사와 농어촌공사 직원들이 몰려왔다. 곧이어 전경들이 엄청나게 몰려왔고, 이어서 새만금 개발 추진협의회(새추협)라는 이름을 앞세운 용역 깡패들이 나타났다. 깡패들이 타고온 배는 물대포가 장착되어 있어서 바닷물을 강하게 뿌렸다. 경찰 물대포도 정통으로 맞으면 몸이 뒤로 밀리고 휘청거리듯이 그 해수 물대포도 엄청 강해서 정통으로 맞으면 몸이 휘청 거렸다. 얼굴이라도 맞으면 소금물이라 눈이 따갑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와중에 깡패들이 들이닥쳐서 우리를 바닷물에 빠뜨리려고 했다. 우리는 여성 활동가들을 안쪽으로 배치하고, 남성들이 여려겹으로 바깥에 둥글게 스크럼을 짜고 버텼다. 더러 머리채를 잡히거나 수염을 잡혀(중년의 남성 활동가들은 수염을 기른 이들이 제법 있었다.) 끌려 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이 깡패들이 대놓고 폭력을 휘두르는데도 전경들은 그 주위에 도열해 그 광경을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점심 무렵이 되어 전북환경연합에서 빵과 물 등 우리가 먹을 것들을 배로 싣고 왔는데, 깡패들이 이 음식들을 빼앗아 죄다 바다에 던져버렸다. 


용역들이 몇 차례 우리를 뒤흔들어 놓다가 지쳤는지 빠져 있는 동안 이제는 전경들이 우리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우리는 소수였고, 전경들은 압도적으로 수가 많았으므로 밀려날 수 밖에 없었고, 우리가 전경들에게 밀려 뒤로 또 뒤로 물러나는 동안 저 멀리서 포크레인이 나타나더니 우리가 새벽에 몇 시간이나 걸려서 삽과 곡갱이로 파서 해수를 유통시켜 놓은 것을 다시 메우기 시작했다. 우리가 손으로 팔 때에는 몇 시간이나 걸렸지만, 포크레인은 채 몇 분이 걸리지도 않아 모두 원상태로 만들었다. 허무했다. 당시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이 혹은 시민사회 수석이 새만금 재검토 공약을 이행하겠다는 약속을 할 때까지 이 방조제를 점거하고 나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 각오로 새벽에 불시에 기습 작전을 벌였던 것이다. 하지만 채 24시간도 버티기 전에 많은 활동가들이 지치기는 했다. 용역 깡패들은 계속 폭력을 휘둘렀고, 여성 활동가 두 명이 그들이 던진 물병 등에 맞아 실신해서 병원으로 실려 나갔다. 그럼에도 전경들은 깡패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고 우리만 괴롭혔다. 깡패들이 빠지면 전경들이 달려들고, 전경들이 빠지면 다시 깡패들이 달려들었다. 밤새 삽질과 곡갱이질이라는 고된 노동을 하고, 계속 오락가락하는 비를 맞아 온 몸은 쫄딱 젖어 있었으며, 아침이 되자마자 깡패들과 전경들의 폭력에 번갈아 시달리며 몇 시간을 지나는 동안 다들 지치기는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나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비록 점심으로 전달 받으려던 빵과 물도 죄다 빼앗겨 버려졌지만, 우리는 더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청와대랑 소통하던 서울의 상황실에서는 청와대가 처음에는 당황하고 난처해하다가 시간이 갈 수록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며, 더 무리하지 말고 철수하라는 이야기를 전해왔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연차가 제법 있는 선배 활동가들은 다들 펄쩍 뛰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우리가 어떻게 여기 들어왔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아무런 성과도 없이 나갈 수는 없다고. 비록 밤이 춥더라도, 하루쯤 더 굶더라도 이렇게는 나갈 수 없다고 버티자고 하는 사람들이 다수였다. 나도 마찬가지 입장이었다. 하지만 협상은 우리 몫이 아니라 서울의 상황실에 맡겨진 임무라고 했다. 나갈 수 없다고 버티던 선배 활동가들도 결국 위에서 내린 결정이라는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나보다. 둘째날 저녁이 다 되어서 우리는 긴 방조제를 터덜터덜 걸어서 나갔다. 전경들은 우리가 자발적으로 나간다고 하니 친절하게 길을 터줬다. 용역들은 점심 시간에 배를 타고 나가서 밥을 먹고 돌아온 후로는 그렇게 심하게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다가 철수한 후였다. 오락가락 비를 계속 맞기도 했고, 안 하던 곡괭이질을 하느라 지치기도 했고, 거기에 용역 깡패들과 전경들에게 하루종일 시달린 탓에 너무 너무 힘들었지만, 그것보다도 이 고생을 하고도 아무런 성과도 없이 그냥 내 발로 멀고 먼 거리를 걸어서 방조제를 나가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허무하고 속상했다. 그때 그 감정은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고군산군도를 대충 둘러보고 차를 타고 나와서 다시 방조제 위를 지났다. 지도를 보며 내가 당시에 기습 점거했던 4공구가 어디쯤일지 가늠해보려고 했는데, 잘 모르겠더라. 부안에서 접근하는 방조제 입구에서 차로 얼마나 걸리는 곳일까? 당시 내가 걸어서 나오는데 얼마나 걸렸을까? 1시간쯤이었을까? 확실히 30분 보다는 길었던 것 같다. 방조제 위를 차로 지나며 계속 그날의 그 감정에 곱씹어 보았다. 씁쓸했다.


그날은 어린이날이자 석가탄신일이었다. 우리는 내소사 앞 식당에서 산채비빔밥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내소사를 느긋하게 구경했다.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내소사는 처음 와봤는데 절이 참 좋았다. 특히 대웅전이 웅장하기도 하고 아기자기하게 예쁘기도 하고 정말 멋있었다. 예전부터 문화유산 답사도 다니고 하면서 절을 제법 다녀봤는데, 이렇게 멋진 대웅전은 몇 없었다고 생각했다. 내소사를 적당히 즐기는데 비가 오락가락 했다. 아까 장자도에 있을 때부터 비가 어중간하게 내리다가 그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우리는 차를 타고 다시 고창 선운사로 향했다. 선운사는 15년? 16년 전쯤에 어느 소설가와 시인의 결혼식 때문에 한 번 왔던 곳이었다. 당시 기억은 별로 남아있지 않았는데, 주차장에 차를 대고 진입로를 걸어가다 보니 조금씩 기억이 났다. 진입로의 기억과 풍경이 좋아서 비를 맞으면서도 기분이 괜찮았는데, 절에 들어서자마자 확 기분이 나빠졌다. 경내에서 조그맣게 무대를 만들어 조잡한 스피커로 뽕짝 반주를 틀어놓고 노래자랑 같은 행사를 하고 있었다. 스피커가 조잡하다 보니 반주의 음질이 형편없었고, 무대에 올라 노래 부르는 사람들의 노래 실력도 참 할 말이 없는 수준이었다. 좀 차분하게 조용하게 절을 즐기다 가고 싶었는데, 시끄러운 뽕짝 음악 때문에 견디기가 어려웠다. 서둘러 대웅전과 그 주위를 휘휘 돌아보고는 그냥 나왔다. 그 와중에 점점 더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다.  

 

대법원의 이례적으로 빠른 판결과 고등법원의 파기환송심 재판 연기


이번에 나와 함께 고창에 다녀온 친구는 지역 녹색당에서 함께 활동했던 녀석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재명을 지지하는 발언을 자주 해서 나와 언쟁을 벌이곤 했다. 나는 이 친구의 그런 성향 탓에 몇 차례 부딪힌 후로는 가능하면 민감한 주제를 피하곤 했는데, 이번에는 서울을 나서는 동안 라디오로 시사 프로그램을 틀어놓고 계속 이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나는 사실 이재명이나 저쪽 빨간당 후보들이나 큰 틀에서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번 판결에 대해 크게 불만은 없었다. 다만, 이례적으로 아니 말도 안되고 빠르게 판결을 내린 대법원의 태도는 무조건 비판 받을 만 했다고 여긴다. 내가 법조인은 아니니 2심의 판결과 대법원의 판결에 대해 따질 입장은 아니고, 그저 태도의 문제로서 비판하는 것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데, 대법관들이 이재명을 제거하려고 정치적 개입을 한 것이라고 비난하는 것까지는 납득하기 어렵다. 그가 뭐라고 떠들던 나는 그저 듣고 있었다. 앞서도 말했든 나는 잠을 못 자서 컨디션이 나빴고, 심지어 얼굴 통증이 심해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힘들었다.


연휴 내내 어디를 가도 이 이야기 밖에 없었다. 식당에 앉아 있을 때에도 옆 테이블과 그 옆 테이블 모두 이 이야기를 떠들고 있었고, 온라인에서도 다들 이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낮에 고등법원에서 파기환송심을 대선 이후로 연기하겠다는 입장을 냈다. 이제서야 조금은 열기가 가라앉으려나. 어쨌거나 김문수와 한덕수가 단일화를 하더라도 이재명이 당선되는 것을 막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그저 사회대전환 연대회의 권영국 후보가 무사히 후보 등록을 마치고 완주하여, 몇 퍼센트의 득표를 올릴 것인지가 이번 대선의 관전 포인트가 될 것 같다. 권영국 후보가 없었다면 이번에도 투표장에서 그냥 무효표를 만들어야 했을텐데, 그나마 찍을 사람이 생겨서 다행이다. 그가 기탁금을 잘 모아서 후보 등록을 잘 마친다면 말이다.


달리기 이야기


지지난 주에 달리기 모임에서 함께 달리는 형과 가볍게 30분 달리기를 하면서 하나 느낀 점이 있었다. 이 형이 꽤나 승부욕이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날 새삼 깨달았던 것이다. 둘이 종종 30분 동안 6킬로 정도 달리기를 하면 우리 보다 빠른 사람들을 만날 일은 별로 없었다. 내가 혼자 10킬로미터에서 20킬로미터 사이를 긴 시간 달리다보면 나보다 빠른 사람들을 제법 만나게 되는데, 신기하게 그 형이랑 달릴 때에는 그닥 보지 못했었다. 이 형은 본 실력은 나보다 훨 빠르지만, 나랑 같이 달릴 때에는 가볍게 거의 내 페이스에 맞춰 달리곤 했었다. 그러다 두어번 우리를 추월해가는 젊은 사람들을 만났었다. 그게 아마 3월 초였을 것이다. 우리가 3킬로 지점을 찍고 돌아오고 있을 때 아마 한 4킬로에서 5킬로 사이 정도에서 아주 빠르게 우리를 추월해 가는 키 크고 체격이 좋은 남성이 있었다. 그냥 보기에도 젊어 보였다. 그 형은 나를 돌아보면 "어떻게? 따라가 봐?" 하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형, 우리 못 따라가." 라고 말했다. 나는 겨울 동안 짧은 거리만 달리고 장거리 달리기를 쉬어서 그만큼 체력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내 보기에 그 형도 그리 달라보이지 않았다. 어쨌거나 우린 이제 다 늙은 사람들이라 젊은 사람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 형은 아마 혼자였다면 따라가봤을텐데, 내 눈치를 보느라 못 간 것이 아쉬웠는지 여러 차례 나를 돌아보며 눈짓을 보냈다. 나는 계속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러고 약 한 달 반 정도 지난 지지난 주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번에도 3킬로 지점을 찍고 돌아와 대충 4킬로 근처였다. 젊은 여성이었다. 우리를 추월하기는 했지만, 아주 크게 차이가 날 정도로 빠르지는 않았다. 그렇게 느껴졌다. 그런데 우리를 제친 후에 우리와 비슷한 속도로 조금 가다가 갑자기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이때 앞서 뛰던 이 형이 또 나를 돌아봤다. "어때? 이번엔 따라가 봐?" 라고 물었다. 나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으며 "형, 아마 우리 이번에도 못 따라갈 걸." 라고 말했다. 이 여성은 그렇게 빠르게 치고 나가다가 저 멀리서 다시 속도를 줄였다. 어쩌면 인터벌 훈련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분이 속도를 확 줄이자 우리가 금방 따라잡았다. 아마 형이 무의식 중에 속도를 조금 올렸으리라. 그렇게 한동안 비슷하게 가다가 갑자기 속도를 올렸다가 다시 속도를 줄이는 방식으로 그 분과 우리는 꽤 긴 거리를 비슷하게 달렸다. 우리는 우리 페이스에서 무리하지 않고 일정하게 달렸고, 그는 빠르게 뛰다가 속도를 확 줄이기를 반복했는데, 거의 비슷한 페이스가 나왔다. 그러다 아마 5.5 아니 한 5.3 정도 지점에서 이 분이 다시 빠르게 속도를 높였는데, 이 형이 앞에서 뭐라고 소리를 치더니 갑자기 속도를 올렸다. 뭐라고 하는지 듣지는 못했지만, 나도 속도를 높여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아, 근데 이 형의 속도가 보통이 아니었다. 이미 조금 지쳤던 나로서는 따라가기가 조금 버겁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렇게 전력질주 해보는 거 정말 오랜만이라고 생각하며 나도 신나게 달리기는 했다. 그리고 뒤쳐지지는 않았다. 그런 생각을 했다. 이 형 뒤를 따라다닌 것이 이제 7개월쯤 되려나? 겨울 동안 안 달렸으니 거기서 3달을 빼면 4개월? 이젠 이 형이 속도를 맘껏 내도 뒤쳐지지는 않고 따라갈 정도는 되었구나. 아직 이 형을 앞지르지는 못하겠지만. 그렇게 목적지까지 전력질주를 마치고 들어보니 아까 그 분을 따라가려고 속도를 냈던 것 같았다. 나는 갑자기 빨라진 형을 쫓느라 그 여성 분은 신경도 못 써서 어떻게 된 것인지 몰랐다.


오랜만에 15 아니 거의 16킬로


연휴 내내 얼굴 통증에 시달리느라 달리기를 하지 못했다. 고창으로 출발하기 전에는 만약 통증이 좀 나아지고, 컨디션이 회복되면 짧게라도 달려보려고 런닝복을 따로 챙겨갔었는데, 꺼내보지도 못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오늘 저녁 8시에 일을 마치고 달리기를 하러 나섰다.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15 정도 달려볼 생각이었다. 컨디션이 아주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나쁘지도 않았다. 그리고 달리기를 제법 쉬었던 만큼 근육 피로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지난 11월 중순에 15에서 19 사이의 거리를 종종 뛰었던 것에 비하면 올해는 두 차례의 10킬로 대회를 제외하면 대부분 5~6 킬로 수준으로만 뛰었다. 딱 한 번 대회 직전에 8킬로를 뛰었던 것이 대회를 제외하면 가장 먼 거리였다.


오늘은 몇 차례 시도해다가 제대로 성공한 적이 없었던, 소위 말하는 존2 달리기, 혹은 LSD를 해볼 생각이었다. 시작부터 평소보다 훨씬 느긋하게 뛰었다. 심박수가 올라가지 않게, 호흡이 가빠지지 않게 신경쓰며 가볍게 뛰려고 했다. 평소 즐기던 롤링도 하지 않았다. 그냥 가볍게 툭툭 발을 옮겼다. 해가 떨어지고 바람이 불면서 날이 너무 추워졌다. 시작 전에 가볍게 몸을 풀면서 조금 떨렸는데, 딱 2킬로 정도 뛰니까 몸에 열이 나기 시작했다. 3킬로 지점부터는 땀이 나기 시작했다. 이때까지 계속 550 페이스를 유지했다. 평소 아무생각 없이 뛰면 거의 530 페이스가 나오는데, 이렇게 일부러 천천히 뛰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성향 상 일부러 느리게 뛰는 것이 어렵다고 느꼈다. 그래서 예전에 몇 차례 이 존2 훈련을 해보려다가도 실패하곤 했던 것. 거리가 늘어날 수록 속도를 올리지 않아도 조금씩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심박수가 빨라지길래 조금씩 속도를 더 줄였다. 이렇게 일부러 천천히 뛰니까 몸이 무거운 것처럼 느껴졌다. 암튼 6분대 페이스까지 느려졌을 때가 대략 5킬로미터를 지났을 때였다. 6과 7을 지나면서 다시 5분 후반 페이스로 돌아왔다. 7킬로를 지나 거의 8킬로가 다 되었을 지점에서 양화대교를 만났다. 여기를 찍고 돌아가면 15에서 16 사이 거리가 나온다. 조금만 더 갔다가 턴을 하면 16을 찍는데, 나는 그냥 여기서 돌기로 했다. 아주 잠시 하늘의 달을 찍느라 멈췄다가 다시 달렸다.


8을 찍고 9을 향해 달릴 무렵에 한 여성과 나란히 달리게 되었다. 그냥 보기엔 아주 가볍게 그렇게 빠르지 않은 속도로 달리는 것처럼 느꼈는데, 같이 달려보니 엄청 빨랐다. 와! 저렇게 조깅하듯이 뛰는데도 이렇게 빠르다고! 한동안 따라가보려고 속도를 높여보았다. 나는 지금까지 안 하던 롤링까지 하면서 속도를 올렸는데도 간신히 그 속도를 따라가는 정도였다. 신기했다. 롤링도 하지 않으면서 저렇게 빠른 자세라니. 저 분이 롤링을 하면서 더 속도를 높이면 대체 얼마나 더 빨라질까? 가늠이 되지 않았다. 한동안 그를 따라가면서 짧은 구간 좋은 런닝 메이트를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곧 턴을 해서 양화대교 방향으로 돌아가버렸다. 나는 뛰던 관성이 있으니 속도를 줄이지 않고 유지했다. 여기서부터 좀 신기했다. 앞서 말했듯이 한 7킬로 정도까지는 550 정도 페이스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9킬로 지점에서 갑자기 페이스가 확 빨라졌다고 앱이 알려줬다. 520 페이스라고? 내가 지금 그렇게 빠르다고? 긴 거리를 600에 가깝게 뛰었으므로 지금 종합해서 520이 나왔다는 것은 현재 페이스가 4분대 페이스라는 뜻일 것이다. 내가 지금 그 정도로 빠르게 뛰고 있다고? 그런데 왜 안 힘들지? 이상하게 크게 힘들다는 느낌이 없었다.


그리고 10을 넘어서서부터 조금씩 체력이 다 되었음을 느꼈다. 지쳤다. 그런데 좀 신기했던 것이 지난 주까지 그러니까 4월까지는 후반에 지치기 시작하면 자세부터 무너져서 체력도 다 되었는데 자세까지 무너져 더 나쁜 상황이 되었었다. 그런데 오늘은 좀 달랐다. 분명 지쳤고 힘들었는데, 자세는 무너지지 않았다. 심지어 페이스도 그닥 떨어지지 않고 비슷하게 유지했다. 그런데 크게 힘이 들지 않았다. 이거 뭐지? 이게 소위 말하는 '러너스 하이' 상태인 건가? 10이었나 11이었나 이쯤에서 심지어 종합 페이스가 510을 찍었다. 말도 안돼! 절반 이상을 일부러 천천히 달렸는데, 그럼에도 지난 4월 초 대회에서 죽어라 뛰었던 수준의 페이스가 나온다고? 이거 앱이 무슨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이후로는 제법 힘들었다. 하지만 아까 말한 것처럼 자세가 무너지지 않았고 그냥 아무 생각없이, 아주 조금씩 페이스가 느려지면서 달렸다. 13을 지나 14로 가면서부터 급격하게 발바닥이 아팠다. 물집이 생길 것 같은 느낌. 그제서야 내가 제대로 된 런닝화를 안 신고 평소 신는 저렴한 런닝화, 바닥이 두텁지 않은, 즉, 쿠션이 별로 없는 런닝화를 신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쿠션이 제대로 된 비싼 런닝화는 주로 10킬로 이상 뛸 때에만 신고, 평소 6에서 8킬로 정도 뛸 때에는 늘 이 신발을 신고 뛰었었다. 오늘은 아침에 나올 때 이렇게 본격적을 장거리를 뛸 생각이 없었기도 했고, 그냥 습관적으로 늘 신던 이 신발을 신었던 것이다. 이게 10킬로 미만일 때에는 발에 그렇게 충격이나 무리를 주지 않는데, 거리가 늘어나니 급속도로 발 상태가 나빠졌다. 그러고 보니 신발끈도 꽉 조이지 않았었네. 내 발보다 발볼이 조금 더 넓어서 신발 안에서 발이 조금씩 놀다보니 더 발바닥이 아픈 느낌이었다. 마지막 2킬로 정도는 정말 힘들었다. 여기서 페이스가 확 쳐졌다.


그래도 15.89킬로미터를 535 페이스로 뛰어서 1시간 28분에 들어왔다. 나중에 앱을 보니 10킬로미터 PB를 달성했더라. 기존 기록은 지난 4월 12일 양천마라톤 대회에서 50.29였는데, 오늘은 49.26으로 나왔다. 음, 이거 아무래도 오늘 앱이 좀 이상한 거 아닌가 의심이 들기는 하는데,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달리기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와 땀을 씻고 잠시 쉰 후에 이 글을 쓰고 있다. 실은 발바닥이 아파서 바로 집까지 걸어가기가 어려워 일부러 사무실에서 글을 쓰며 시간을 벌고 있는 것이다. 피곤하지만 기분은 좋다. 이제 발바닥이 좀 덜 아프니 집으로 돌아가야지. 가면서 뭔가 가볍게 먹을 것을 사서 얼른 먹고 쉬어야겠다.


오늘도 정말 기분 좋은 달리기였다. 충분히 쉬어 준 후에, 다음 주에는 20킬로미터에 도전해볼까나.


아, 오늘 강양구 기자 페이스북에서 본 책 두 권을 올려둬야지. 조만간 구매할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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