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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보지 못한 길

빠르게 걷기


아침에 걸어서 40분 정도 걸리는 곳에서 약속이 있었다. 버스로 가려면 한 번 갈아타야 하는데, 그 버스 노선이 한참을 밖으로 돌아가는 길이기도 하고, 자주 오는 노선이 아니기도 해서 걷는 것이나, 버스를 타는 것이나 시간으로 별 차이가 나지 않았다. 앱에서 알려준 기준으로 걸어서 47분, 버스 노선 2개를 갈아타고 가면 38분 정도. 하지만 이 동네에 오래 살았던 나는 가는 길을 대부분 걸어봤기 때문에 47분이 아니라 40분도 안 걸릴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괜히 멀리 빙 둘러서 버스를 탈 필요없이 그냥 바로 걸어가는 것이 더 빠르리라 생각했다. 덕분에 아이들 어렸을 때 살았던 동네를 오랜만에 걸었다. 내가 걸었던 시간이 딱 학생들 등교 시간이었다. 그 길에 중학교 2개와 고등학교 3개와 초등학교 3개가 차례대로 나왔는데, 중고등학생들은 친구들과 무리지어 가거나, 혼자 가는 모습이었지만, 초등학생들은 부모 손을 꼭 붙잡고 가는 아이들도 있었다. 한 젊은 아빠가 여자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우리 아이들이 예전에 졸업한 초등학교를 향해 걷는 모습을 보았다. 절로 옛날 생각이 났다. 이제 성인이 된 큰 아이와 아직 한창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작은 아이의 손을 잡고 아침에 학교에 데려다주고, 저녁에 방과후 교실에서 집을 데리고 왔던 날들이 생각났다. 그 시절의 나는 아마도 젊었겠지.  잠깐 추억에 잠겨 걷는 사이에 걸음이 느려졌다. 시간을 보니 약속 시간에 딱 맞출 수는 있어도, 조금 미리 도착하기는 어려운 것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도중에 만나는 작은 교차로에서 보행 신호 대기 시간이 너무 길어서 마음이 급해졌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신호를 무시하고 무단횡단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답답했다. 결국 신호가 바뀌면 뛰고 또 신호등을 만나면 대기하면서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했다. 뛰어가는 건 쉬운 일이지만, 간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빨리 걸어보니 이건 또 뛰는 거랑은 완전히 다른 어려운 일이더라. 약속 시간 5분 전에 도착하고 싶었지만, 내 계산보다 1분 늦은 4분 전에 도착했다.


약 1시간 가량 일을 마치고 일터로 돌아가는 길은 더 멀었다. 우리 집에서 일터까지는 천천히 걸어서 15분에서 20분 가량 걸린다. 그럼 약 1시간 가까이 걸리는 걸까? 지름길을 알기 때문에 그 정도는 아니리라 생각했다. 암튼 버스를 찾아볼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걸었다. 아침에 왕복한 것 만으로도 1만보를 넘게 걸었다. 달리기를 시작한 후로 시간 계산이 좀 이상해졌다. 1킬로미터 정도는 한 6분이 채 안되어 뛸 수 있다는 생각이 머리에 박힌 후로는 자꾸 거리 계산을 달리기 기준으로 하게 된다. 실제로는 어디를 가던 그 거리를 다 뛰지는 않고, 반 이상은 걸으면서도. 일터로 걸어서 돌아오는 길에 예전에 살았던 동네를 지나치며 보니 재개발 구역에 묶여 넓은 구역이 철거되어 있었다. 그 언덕 위 달동네를 살피며 우리 가족이 살았던 그 집도 철거 되어버린 건가 하며 한참을 머리를 굴려보았다. 위치 상으로 보니 확실히 철거된 것이 맞았다. 그 집 다음에 살았던 곳, 언덕 위에서 조금은 아래로 내려온 위치에 있는 다세대 주택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동네를 지나쳐 한 20분 이상 걸으면 이혼 한 후에 내가 살았던 집들이 위치한 골목들이 있었다. 그 집들도 여전히 그대로 있었다. 지금도 누군가 살고 있겠지. 새삼 이 동네에 참 오래 살았구나 싶었다. 20년을 훌쩍 넘겼으니. 지금 기준으로는 아직은 부산에 살았던 날들이 조금 더 많겠지만, 몇 해만 더 지나면 이젠 서울에 살았던 시간이 더 길어질 것이다. 지금 친하게 지내는 지인들 중 다수는 대학을 진학하면서 서울로 온 경우가 많아서 대부분 이미 고향에 살았던 시간보다 서울에 살았던 시간이 더 긴 사람들이다. 나는 대학을 부산에서 나왔고, 중간에 군대도 다녀왔고, 대학 졸업 후에 활동가의 삶을 시작한 것도 부산이었기에 서울에 올라온 시기가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늦었다. 아주 오랜만에 예전에 자주 걸어 다녔던 작은 골목들을 걷다 보니 우리집이었던 곳들 뿐 아니라, 친했던 지인들의 집들도 대부분 기억났다. 대부분 지금은 다른 곳으로 이사 간 사람들이었다. 골목길과 그 안의 낡은 건물들은 대부분 그대로였지만, 그 건물에 들어선 가게들은 거의 대부분 바뀌어 있어서 낯선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아주 가끔 예전 가게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 같은 곳도 있었다. 오래 전 버스 종점이었던 곳, 지금은 새 건물이 들어선 낯선 곳 맞은 편에 있는 낡은 중국집은 예전 간판 그대로였다. 과연 주인도 그대로일까? 맛은? 언젠가 다시 여기를 찾아와 옛 맛을 떠올리려 애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라고 생각하며 다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스타일


최근에 태양광 사업에 대해 상담을 하러 오신 분은 퇴직하신지 몇 해 지났다고 말씀하셨다. 즉, 거의 70세 정도 되신 분이라고 이해했다. 말씀하시는 말투나 태도가 기본적으로 겸손하고 예의를 잘 갖춘 분이라 생각했다. 한참 대화를 나누고 나중에 헤어지기 직전에 그 분이 다소 조심스러운 말투로 "혹시 연배가 어떻게 되시는지?" 라고 나에게 물었다. 그분 표현으로 내 얼굴은 젊어 보이는데, 풀어헤친 장발은 온통 흰 머리에, 수염도 흰 수염이 많으니 나이가 많은 것처럼 느껴지니, 젊은 사람이 맞는지 아니면 나이가 많은데 동안인 것인지 궁금하다는 이야기였다. 이제 곧 50입니다. 라고 말씀을 드리니, 그제서야 이해가 된다는 표정으로. 그럼 젊으신 분이 맞군요. 라고 하셨다. 아, 이 흰머리와 흰수염 때문에 나이 들어보인다는 말을 듣기는 했어도, 이 정도 일 줄 몰랐다. 그렇구나. 나 70대 어르신이 보기에도 헷갈릴 정도로 많이 나이 들어 보이는구나. 장발에 수염을 고수하는 일이 쉽지 않구나.


며칠 전에는 옷을 예쁘게 잘 입은 젊은 여성이 매장에 왔었다. 그 분은 매니저님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월차라서 왔다고 말했다. 일부러 찾아왔는데, 하필 그날은 매니저님 휴무일이었다. 하루종일 내가 혼자 매장을 보는 날이었다. 그 분이 처음에 약간 쭈뼛거리며 어색해 하시길래, 편하게 계시라고 하고 나는 일을 보려고 했다. 아마도 오랜만에 매장에 방문한 듯 최근에 새로 들여놓은 물품들을 신기한 듯 감탄사를 내며 살펴보길래, 하나 하나 설명을 해드렸다. 그렇게 좀 떠들고 나니 둘 다 조금은 어색함이 사라졌다. 그 분이 나를 좀 유심히 보시더니 문득, 스타일이 엄청 멋지세요. 라고 말을 했다. 멋지다는 말은 예의 상 한 말이겠지만,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독특한 스타일 인 것은 맞을 것이다. 그 말을 하고서는 내가 좀 더 편해졌는지, 이젠 내 눈치를 안 보고 매장 구석구석 꼼꼼하게 살펴보더라. 나는 편하게 구경하시고 혹시 필요한 것 있으면 말씀하세요. 라고 하고 일에 집중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또 다른 젊은 여성 손님이 들어왔다. 새로 들어온 분이 찾는 물품을 찾아드리고 질문에 답을 하고 어쩌고 하는 동안 이 예쁘게 옷을 잘 입은 분은 나에게 손짓으로 인사를 건네고 나가셨다. 매니저님께 말씀 전해드린다고, 누구라고 전할까요? 라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갑자기 나가셔서 놓치고 말았다. 나중에 매니저님께 전달했는데, 누군지 짐작이 안 간다고 했다.


최근에 여기저기서 매장으로 탐방을 와서 30분에서 1시간 사이로 우리 협동조합과 매장에 대해 설명을 할 일이 계속 생기고 있다. 탐방을 요청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동네 활동가들로 나와 친한 사람들이었다. 탐방을 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조합과 매장을 더 널리 알릴 수 있고, 우리의 활동을 홍보하면서 더 힘을 받을 수도 있을테니. 하지만, 아무리 말하는 것을 좋아하고, 말을 잘 하는 편인 나라도 연달아 계속 사람들을 맞이하고, 설명하고, 질의 응답하고, 웃으며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마냥 좋은 것 만은 아니다. 일단은 힘이 들고, 아무런 댓가도 없이 이렇게 열심히 설명하는 일이 쉽지 않다. 누군가는 그렇게 탐방을 오려면 적어도 최소한의 기준인 강사비 혹은 탐방비를 받아야 한다고 말을 하곤 하는데, 그게 참 애매하다. 오히려 잘 모르는 사이라면 그런 요구를 할 수 있겠지만, 다 친한 활동가들 사이에서 그런 요구는 어려운 일이다.


암튼 그래서 여기저기 여러 단위에서 찾아 올 때마다 짧은 강의와 질의응답을 여러 차례 했었다. 그때마다 나를 처음 보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어떤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장발에 수염이라는 외모에 대한 부분이 있을 거라고 본다. 흰머리와 흰수염도 한 몫 했을 것이고. 거기에 20년 넘게 활동가라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의 면모, 연구자나 이론가가 아닌 실천하는 사람으로서의 면모에 대한 어떤 느낌과 시선이 있을 거라고 본다.


지금의 나는 누가 봐도 눈에 확 잘 띄는 사람이 되었다. 예전에 좀 평범한 모습이었을 때에 비하면 정말 튀는 외모다. 그래서 더욱 바르게 행동하고 작은 실수라도 하지 않으려고 조심해야 한다. 이런 튀는 스타일로 잘못된 언행을 하면 쉽게 드러나고 오래 기억될 수 밖에 없다.


지지난 주에도 한 팀, 지난 주에도 한 팀, 오늘도 한 팀. 3주 연속 많은 사람들을 모시고 설명하고 떠들다보니 오늘은 좀 많이 지친다. 안 그래도 밤에 잠을 거의 자지 못해 피곤한 날이고, 일이 많은 날이었는데, 이래저래 사람들에게 시간을 자꾸 뺏기다 보니 해야할 일들은 또 하지도 못했다.


일은 남았는데, 다음 회의를 위해 다른 장소로 이동해야 한다. 일단 이 글을 마치고 다음 일은 이동하면서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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