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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보지 못한 길


오랜만에 페이스북에 접속했더니 11년 전 오늘, 그러니까 2014년 4월 15일에 내가 페이스북에 아래 글을 올렸다고 알려줬다. 딱 보자마자 이 글에 쓴 그 순간이 기억났다. 그 무렵의 아이는 유독 나를 많이 따랐다. 시간을 되돌릴 수는 당연히 없겠지만, 큰 아이를 저렇게 안아 올릴 수 있는 시절로 딱 한 번만 돌아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문득 영화 [어바웃 타임]의 주인공이 부러워진다. 그 집안 남성들은 모두 자신의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는데. 그런 능력 나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이들 어렸을 때로 자주 돌아가서 더 많이 아껴주고 더 많이 사랑해주고 싶다.


딸과의 5분 데이트


점심 먹고 졸릴 무렵, 큰 아이에게 전화가 왔다.

학교 마치고 방과후교실 가는 중이라고, 아빠 보고 싶어서 전화했다고,

어디냐고 물었더니, 횡단보도 건너는 중이라고,

어딘지 딱 감 잡았다.

마침 일하는 곳에서 2~3분 거리다.

천천히 걸어가면 곧 아빠가 갈 거라고 말하고 뛰어나갔다.

아이는 멀리서 나를 보자마자 막 뛰어왔다.

만나자마자 번쩍 안아 들었다가 내렸다.

손잡고 천천히 걸어서 딱 5분 동안 데이트했다.

동네에서 일하니 이런 재미도 있구나.


2014년 3월에 나는 4년 넘게 일했던 출판사에서 해고 당했다. 잡지만 내던 잡지사였었는데, 단행본 출판을 위해 나를 영업자로 고용했던 곳이었다. 나는 심각한 적자였던 잡지를 정상적인 유통 체계를 구축해 흑자로 돌려줬고, 단행본을 꾸준히 내면서 흑자 폭을 크게 증가 시켰다. 초기에 사장은 나를 마치 구세주처럼 대했다. 그러다가 해가 가면서 유통망이 안정적으로 구축되고 나니, 사장은 이제 내가 불필요한 사람처럼 느꼈나 보다. 내가 내 모든 인맥과 능력을 총 동원해 잘 만들어 놓은 그 체계는 사실 내가 없으면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었다는 것을 나를 해고 하고 나서야 깨달았을 것이다. 그렇게 출판사를 그만두게 된 무렵에 나와 아주 친했던 동네 친구가 녹색당 구의원 후보로 출마를 결심했었다. 녹색당 창당에 함께한 후에 나는 녹색당 활동을 정말 열심히 했었다. 구의원으로 출마를 결심했던 그 친구는 정말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사람이 동네에서 정치를 한다면 정말 정치가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물론 나는 현실적인 사람이라 당연히 그 친구가 당선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당시 함께 활동했던 여러 당원들은 그 친구가 10% 이상 득표해서 선거 비용의 절반을 돌려받을 수 있을 거라고 믿기도 했지만, 나는 그것도 당연히 불가능 할 거라고 했다. 나중에 그 친구가 9.7% 였던가 암튼 9% 이상 득표율을 달성해서 내가 아는 소규모 진보 정당 후보 중에 가장 높은 득표율을 올린 것을 보고 놀라기는 했고, 조금만 더 나왔으면 정말 50%를 보전 받았을 텐데, 라고 아쉬워 하기는 했다.


암튼 3월에 출판사에서 해고를 당한 시점의 나는 구의원으로 출마하겠다는 친구에게 선거운동을 함께 해달라고, 구체적으로는 선거 사무실의 사무장을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하필 그 시점에 해고를 당하다니! 이건 선거운동을 하라는 하늘의 계시 같은 것일까 라고 생각하고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때까지 늘 대중교통으로 3~40분 이상 가야 하는 일터로 출근하다가, 바로 우리 동네에 있는 선거 사무실에 출근하게 되어 삶이 많이 달라졌다. 선거 사무실은 집에서 걸어서 1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리고 당시 큰 아이가 다니던 학교와는 5분 거리였다. 당시 아이는 학교를 마치고 공동육아 방과후 교실로 이동했는데, 가는 길에 아빠가 생각나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짧은 순간 아이가 걸어가는 경로를 머리 속으로 그렸고, 곧바로 사무실을 나서서 아이에게 뛰어나갔다. 아이는 멀리서 나를 보고 뛰어왔고, 나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이를 안아 올렸다. 사랑하는 딸과의 5분 데이트. 그날 하루종일 기분이 참 좋았다.


그리고 그 바로 다음날이 역사적인 16일이었다. 우리는 뉴스에서 뒤집혀진 배를 보면서 그래도 다행히 학생들을 대부분 구출했다는 오보를 믿었다. 사실은...... 사실은...... 아, 눈물이 나려고 한다. 우리는 선거운동을 하다가 식당에서 뉴스를 보았고, 오후 선거운동 일정을 모두 취소했다. 그리고 며칠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사무실로 출근을 하기는 했지만, 어느 누구도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왜 이런 일이 생겨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오늘 페이스북을 통해 저 글을 읽으며 행복했던 짧은 데이트를 떠올렸다가 곧바로 그 다음날이 그날이었구나 하고 깨닫는 순간 급 기분이 우울해졌다. 아, 이런 기분으로 다시 일하기 쉽지 않다. 끊어버린 담배가 다시 땡기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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