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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서재
풋풋한 김연수 작가님의 초기 단편집. 그냥 글센스가 느껴진다. 역시 최고.






열심히 무슨 일을 하든, 아무 일도 하지 않든 스무 살은 곧 지나간다. 스무 살의 하늘과 스무 살의 바람과 스무 살의 눈빛은 우리를 세월 속으로 밀어넣고 저희끼리만 저만치 등뒤에 남는 것이다. 남몰래 흘리는 눈물보다도 더 빨리 우리 기억 속에서 마르는 스무살이 지나가고 나면, 스물한 살이 오는 것이 아니라 스무 살 이후가 온다.- P9
나는 시위 대열의 중간쯤에서 적당히 팔을 흔들며 구호나 외치다가 최루탄이 터지기 시작하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가는 놈이었다. 당시 대학교에는 나 같은 높들은 수천 명도 넘게 있었다. 중요한 사람들은 나 같은 녀석들이 아니라, 맨 앞에 있는 학생들이었다. 뒤도 안 돌아보고 뛴 이유는, 괜히 돌아봤다가 뒤에서 날아온 최루탄에 얼굴이 맞을까봐 걱정됐기 때문이었다. 뛰면서 항상 생각해 봤지만, 최루탄이 눈에 박히는 것보다는 뒤통수에 박히는편이 휠씬 나을 것 같았다.- P11
그 당시에 내게는 사귀는 여자애가 하나 있었다. 사권다기보다는 나는 주로 ‘오늘은 노을이 지는 곳까지 걸어가봤다‘ 운운하는 편지를 써보내고, 그 여자애는 그 편지를 읽는 그런 관계였다, 불문과에 다니던 그애와 나는, 내가 열 번 편지를 보내면 그애가 한번 데이트를 해주는 계약을 맺었다. 다들 마찬가지겠지만 그런 이유로 쓰는 편지라면 하루에 열 통씩이라도 보낼 수 있다. 매일 만나야만 했으니까. 그런 식으로 하루종일 편지를 쓰게 되면 나의 모든 것을 쓸 수밖에 없고, 그러다보면 나리는 인간은 마치 글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P23
재진의 말을 듣고 보니 살아오면서 내가 새소리를 들어보려고 귀를 기울인 건 많아야 서너 번뿐인 것 같았다. 스무 해 동안, 서너번뿐이라니! 그때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우리가 언제나 새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새소리를 들으려면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걸.- P34
세상에서 단 한 번 가까위졌다가 멀어지는 별들처럼 스무 살, 제일 가까워졌을 때로부터 다들 지금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이따금 먼 곳에 있는 그들의 안부가 궁금하기도 하다. 이 말 역시 우스운 말이지만, 부디 잘 살기를 바란다. 모두들.- P44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주로 다들 팔 생각이 없는 선풍기를 사고 있습니다. 파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해도 저는 사려고 합니다. 말하자면 외로운 구입이라도 하겠다는 뜻입니다."- P84
복권을 예로 들죠. 만 장 중에 당첨복권이 한 장들어 있다고 칩시다. 당첨번호를 발표하지 않는 한에는 모든 복권은 당첨확률이 만분의 일이 될 겁니다. 희귀본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야장 선생처럼 회귀본을 수집하는 사람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책이 있어야만 존재의의가 있는 것이지요.- P116
예컨대 선생 역시 불후의 소설을 쓰게 된다면. 그후에는 소설가로서 존재의의가 사라집니다. 불후의 소설을 이미 썼으니까요. 저라면 만약 불후의 소설을 쓰게 된다고 해도 그 소설을 발표하진 않을 겁니다. 자신의 존재의의를 스스로 없애버리는 우를 저지르고 싶진 않으니까요.- P116
괘종시계처럼 하루에도 열두번이 넘게 내 머릿속으로는 ‘바다로! 바다로!‘라는 말이 울렸어요. 모든 것은 끝이 나버렸고, 깜깜해. 바다로!- P127
모든 일시적인 관계는, 특허 우연한 만남이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진 경우라면, 잠에서 깨어나는 즉시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자기물건을 챙겨서 그 방을 빠저나오면 더이상 문제를 일으키진 않는다. 물론 그날 태섭이 챙겨서 가저외야 할 물건은 진영의 구두였다. 하지만 태섭은 새벽이 되자마자 방을 빠져나오지도 않았고, 진영이 방콕에서 친절한 아시아 남자에게 선물 받았다던 구두도 가져오지 않았다. 태섭은 한번 더 진영을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가면을 쓸 때 우리는 서로 딱 한 번 만날 수 있다. 그게 규칙이다. 만약 두번째로 만난다면, 둘 중 하니는 상대방의 가면을 벗기고 실제 얼굴을 보고 싶어할 것이다.- P141
"왜 다시 들어가려고 했는가?"라고 기자가 질문하자, 그가 대답했다. "터널 속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세상에는 그 대답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물론 나는 이해하는 사람이다.- P156
성승경에 대해 찍으면 찍을수록 성승경은 사라졌다. 인간 성숭경이 사라지고 열사 성승경이 탄생하게 되자 다큐멘터리는 극영화가 됐다. 그게 바로 재민을 비롯한 그의 세대들이 만들고 싶었던 것이었다. - P195
그간 나는 이 세계가 너무나 두려웠어요. 언제나 혼자라는 느낌뿐이었는데, 일단 나 자신을 구할 능력이 없다는 건 분명했지요. 당신 역시 나를 위해 무던히 노력했지만, 나는 선천적으로 나 외엔, 그 무엇으로부터도 단절되어 있는 아이였으니까. 고립. 뭐, 그런 단어의 영역에 속하는 사람이죠.-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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