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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서재
  • 여수의 사랑
  • 한강
  • 14,400원 (10%800)
  • 2018-11-09
  • : 46,821
N25056

"그때 떠오른 것이 고향이었다. 십수 년 동안 돌아갈 생각을 품어보지 않았던 고향이었는데, 막상 하행선에 오르자 정환의 마음은 설레었다. 때는 봄이었다. 정환의 고항은 종착역이었으므로 다소 방심한 채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고향의 변한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한강작가님 작품 읽기를 계속하고 있다. 이번에 읽은 작품은 첫 단편집인 <여수의 사랑> 이다. 첫 단편집인 데다가 제목 때문에 최근 작품들보다는 가볍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작가님은 첫 작품때부터 이미 본연의 색깔이 있었었다. 이 작품 역시 우울 그 자체였다.


한강작가님 단편의 특성이라고 해야 할까? 이 단편집 역시 단 한사람의 불행한 인생이 아닌, 서로 연관이 없는 여러사람의 불행을 그린다. 그런데 그 불행은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지만 결국 이어진다. 우리의 인간관계처럼.


표제작 포함 총 여섯편의 작품 모두 좋았었는데, 특이하게도 이 작품집에 실린 모든 단편들은 고향과 가족의 상실을 다루고 있다. 고향과 가족이 우리 자신의 출발점이란 점을 생각해보면 뭔가 암시하는 메세지가 있는 듯 하다.


여섯편의 단편중 특히 인상깊었던 두 작품을 소개해 보자면,


1. 여수의 사랑

두명의 상처입은 사람이 등장한다. 한명은 어린시절 아버지와 동생의 동반자살에서 살아남은 '나'이고, 한명은 친부모에게서 버려진 자흔이다. 자취방을 함께 쓸 사람을 구하던 '나'는 우연히 자흔을 만난다. 그리고 함께 살게 된다. 첫 만남 당시 두 사람은 서로의 아픔을 알지 못했다.

[다만 신기한 것은 때때로 자흔의 얼굴에 떠오르는 웃음이었다. 모든 것에 지쳤으나 결코 모든 것을 버리지 않은 것 같은 무구하고도 빛나는 웃음이 순간순간 거짓말처럼 그녀의 어둠을 지워내버리곤 했다. 그런 자흔을 보면서 나는 종종 어떻게 사람이 저토록 희망 없이 세상을 긍정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의아해지곤 했던 것이었다.] P.33


게다가 두 사람은 전혀 성향이 전혀 달랐다. 나는 심하게 결벽증이 있었고, 반대로 자흔은 무던했다. 아니 무던하기 보다는 어떤것에도 얽매이지 않으면서 자기 자신을 함부러 다뤘다. 어느날 나의 고향이 여수라는걸 알게 되자 자흔은 반가움을 표시하면서 여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나는 과거의 나쁜기억 때문에 여수를 싫어했고 자흔과 여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자흔은 여수에 대한 사랑을 나에게 표현했다. 어떤 사연이 있었기에 그러는 걸까?

[어느 곳 하나 고향이 아니었어요. 모든 도시가 곧 떠나야 할 낯선 곳이었어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길을 잃은 기분이었죠. 여수에 가보기 전까지는 그랬어요.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어요.] P.44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은 결국 헤어지게 된다. 자흔이 떠난 후 나는 자흔이 너무 사랑했던, 자흔이 고향이라 믿었던 여수행 기차를 타고 떠난다. 나에게는 불행 그 자체였던 여수지만, 이번 방문을 통해 나의 불행한 과거를 조금은 지워낼 수 있을까? 나도 여수를 사랑으로 떠올릴 수 있을까?

[바로 거기가 내 고향이었던 거예요. 그때까지 나한테는 모든 곳이 낯선 곳이었는데, 그 순간 갑자기 가깝고 먼 모든 산과 바다가 내 고향하고 살을 맞대고 있는 거예요. 난 너무 기뻐서 바닷물에 몸을 던지고 싶을 지경이있이요, 죽는 게 무섭지 않다는 결 그때 난 처음 알았어요. 별게 아니있이요. 저 정다운 하들, 바람, 땅, 물과 섞이면 그만이었이요....이 거추장스러운 몸만 벗으면 나는 더 이상 외로울 필요가 없겠지요.] P.56




2. 야간열차

다시 돌아오지 않을, 어딘가로 떠날 곳을 정한 사람의 마음은 어떤걸까? 술에 취한 동걸은 청량리에서 동해로 떠나는 야간열차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곤 했다. 하지만 동걸이 실제로 타본적은 없는 야간열차. 나를 포함한 친구들은 동걸과 함께 야간 열차를 타기로 한다. 하지만 약속한 당일에 동걸은 나타나지 않는다. 왜그랬던걸까?

[동결은 그 영동ㆍ태백선 통일호가 서는 역의 이름을 모두 꿰고 있었다. 태백선에서 가장 고도가 높은 추전역사를 지날 때 차창 밖에 일렁이는 어둠과, 묵호역과 옥계역을 잇는 광막한 해안선을 묘사할 때면 그의 눈은 이상스런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 P.147


동걸은 홀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평소에는 열심히 생활해서 완벽해 보이는 동걸이지만 술을 마시기만 하면 어딘지 모르게 외로운 모습을 보인다. 술에 취할 때마다 야간 열차를 타고 떠나겠다고 말하는 동걸, 하지만 한번도 야간열차를 타본적이 없는 동걸, 어떤 사연이 있는걸까?

["나는 야간열차를 타고 떠나겠어"라고 말하는 동걸의 취한 얼굴에는 녀석답지 않게 무언가 사는 일을 귀찮아하는 듯한 그늘이 어려 있었다. 밤 열한 시에 기차에 오르면 그만인 것에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를 나는 알 수 없었다. 환청으로까지 열차 소리를 들으면서 왜 떠나지 못하는가] P.152


동걸에 대한 동경 때문이었을까? 동걸이 입에 달고 살던 야간열차를 이제는 내가 타고싶어 하게 되었다. 동걸과 달리 안정적인 가정에서 자라 삶에 대한 별다른 열정이 없던 나는 제대후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던 중 우연히 동걸을 찾아가 함께 술을 마신다. 나는 동걸에게 야간열차를 기억하냐고 물었지만 동걸은 다 잊었다고 한다. 그날밤 나는 동걸의 집에서 자게 되고, 동걸에게 쌍둥이 남동생이 있다는걸 알게 된다. 친구에게도 숨긴 남동생의 존재, 의식이 없는 식물인간 상태의 남동생 동주가 동걸의 아픔이었고, 동걸이 야간열차를 타고 떠나고 싶어했던 이유였던 것이다.

[떠나리라는 것 때문에 동걸은 견딜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세계에 속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강할 수 있었다. 단 한 번의 탈출로 자신의 인생을 완성시켜줄 야간열차가 있으므로 그는 어떤 완성된 인생도 선망할 필요가 없었다. 살아가며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오욕들에게도 그는 무신경할 수 있었다.] P.175


그날 밤 나는 동걸 대신 동해행 야간열차를 탄다. 많은 불행을 짊어진 동걸과 다르게 아무것도 하는것 없이 그냥저냥 살아온 나. 동걸의 불행에 비할 수는 없지만 나 역시 불행했다. 삶의 목표가 없었기에, 인생에 대한 관심이 없었기에 말이다. 야간열치를 타고 돌아오면 나의 불행을 극복할 수 있을까? 언젠가는 동걸도 야간열차를 타고 떠날 수 있을까?

[아버지를 비롯하여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나의 미래를 걱정했다. 니는 남들이 하는 취직 공부나 학점 관리에 마음을 써본 적이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P.184




다른 작품도 다 인상적이었다. <어둠의 사육제>에서는 고향을 떠나와서 독립했지만 고향언니인 인숙언니에게 사기를 당해 독하게 살기로 한 나와, 교통사고로 인해 가족을 잃고나서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명환의 어둠을 평행하게 보여주고,

<질주>에서는 어릴적 동네아이들에게 맞아 죽은 동생 진규로 인해 그를 구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평생 살아온 인규와 잊으로고 했지만 언제나 마음속의 아픔으로 간직했던 어머니의 불행을 대비해서 보여준다.

<진달래 능선>에서는 가족을 버리고 고향에서 몰래 도망쳤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가족과 고향을 그리워하는 정환과 심장병으로 죽은 딸아이를 그리워 하며 매일 딸이 좋아하는 나무를 태우는 황씨 이야기를 그리고 있으며,

<붉은 닻>에서는 물에 빠져 죽은 아버지로 인해 괴롭게 살아가는 동영 동식 형제와 어머니의 상실과 치유를 보여준다.



누구에게나 말할 수 없는 아픔이 있다. 무게는 다르겠지만 아픔을 느끼는건 마찬가지다. 혼자서는 아픔을 벗어나기 힘들다. 하지만 서로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는 누군가가 곁에 있다면 그 아픔의 무게를 조금은 덜어낼 수 있을 것이다. 살아갈 이유를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함께 살아가야 하나보다. 나의 아픔과 당신의 아픔은 결코 다르지 않고 결국 이어진다.

이렇게 우울한 내용에서 희망을 볼 수 있다니 놀랍기만 하다. 과거가 현재를 구할 수 있는가는 작가님의 질문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던것 같다. 한강작가님의 이 단편집 너무 좋다. 완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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