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새파랑 서재
재독 끝. 너무 좋다. 우울과 상실을 너무 잘 그린 작품.






내 모든 것은 끝장나게 만들어놓았으니, 인숙언니의 인생도 끝장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숙언니와 함께 보낸 몇 달이 모조리 배신을 위한 준비였다고 생각하면 더욱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처음으로 한 인간에게 살의를 느꼈다.- P87
나는 그녀로 인해 내가 잃은 것이 돈과 신뢰만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느끼고 있었다. 나는 삶과 화해하는 법을 잊은 것이었다. 삶이 나에게 등을 돌리자마자 나 역시 미련 없이 뒤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잘 벼린 오기 하나만을 단도처럼 가슴에 보듬은 채, 되려 제 칼날에 속살을 베이며 피 흘리고 있었다.- P115
"나를 도울 수 있는 건 없어."
명환의 음성은 불분명하게 잦아들어갔다.
"너도 마찬가지야. 나를 도울 수 없어."- P135
동결은 그 영동ㆍ태백선 통일호가 서는 역의 이름을 모두 꿰고 있었다. 태백선에서 가장 고도가 높은 추전역사를 지날 때 차창 밖에 일렁이는 어둠과, 묵호역과 옥계역을 잇는 광막한 해안선을 묘사할 때면 그의 눈은 이상스런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 P147
"그렇지만 동걸 오빠는 언제라도 우리를 버리고 떠날 꺼예요."- P172
떠나리라는 것 때문에 동걸은 견딜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세계에 속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강할 수 있었다. 단 한 번의 탈출로 자신의 인생을 완성시켜줄 야간열차가 있으므로 그는 어떤 완성된 인생도 선망할 필요가 없었다. 살아가며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오욕들에게도 그는 무신경할 수 있었다.- P175
다만 떠나는 것이 간단하다는 점만은 같았다. 나에게는 떠나는 일이나 머무르는 일이 다를 것이 없었다. 내가 어디에 있든 세상이야 달라질 것이 없었다.- P177
나는 차창 밖으로 멀어지는 여자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저 여자를 만나기 위헤 내가 이 열차를 탄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있디. 막연히 그 알지 못하는 여자가 그리워졌다.- P181
아버지를 비롯하여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나의 미래를 걱정했다. 니는 남들이 하는 취직 공부나 학점 관리에 마음을 써본 적이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P184
그때 떠오른 것이 고향이었다. 십수 년 동안 돌아갈 생각을 품어보지 않았던 고향이었는데, 막상 하행선에 오르자 정환의 마음은 설레었다. 때는 봄이었다. 정환의 고항은 종착역이었으므로 다소 방심한 채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고향의 변한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P240
언제나 깜박 잠이 들 무렵이면 녀석이 거기 서 있는 거요. 아부지 여긴 춥구 니무 한 그루 없어요 하고 말하는 것 같은 눈으로 말이오. 그때마다 난 말하오, 그래 보내주마 네가 그렇게 좋아하던 것들, 한 번도 그 사이로 뛰어다니지도 못한 네 나무들을 보내주마 하고.- P259
"제가 동영이 아버지를 주정뱅이리고 했이요. 정신이 나가서 물이 술인 줄 알고 뛰어든 거라구요. 저희 엄마 아빠도 그러시던걸요."- P288
동식은 어머니의 목마른 시선이 닿은 곳으로 성급히 몸을 돌렸다. 불타는 닻들이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한 사내의 검붉은 그림자가 그 속에서 너울너울 춤추며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P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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