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하게도 죽음에 관한 작품을 연속으로 읽었다. 이 작품 재미있으면서 의미심장하다. 좀 끔찍하긴 하지만.
옛 추억을 생각해서, 그들은 그 화요일 오후에 차를 몰고 도시를 떠났다. 바리톤 만에 있는 해변의 노래히는 모래 언덕을 마지막으로 찾기 위해. 그리고 유령을 물리치기 위해. 그러나 그들은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아니, 하마터면 시신마저 돌아오지 못할 뻔했다.- P9
그런데 하고 많은 부부들 중에 하필이면 그 두 사람이. 세상에 있을 법하지 않은 열정의, 세상에 있을 법하지 않은 희생자가 되어, 속옷도 입지 않은 채 두개골이 함몰된 그런 꼴로 발견되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만한 나이에 그만한 학식을 가진, 볼품이라곤 없는 남녀가 야외에서 섹스와, 그리고 살인과 맞닥뜨리게 될줄 어느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P9
여러분이나 나 같은 동물의 수명은 겨우 90년입니다. 거북보다 휠씬 짧지요. 우리는 거북보다 먼저 죽어야 합니다. 그건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거북보다 먼저 죽도록 프로그램되어 있으니까요. 우리의 탄생은 죽음으로 들어가는 관문일 뿐입니다. 갓난아기가 태어날 때 큰 소리로 우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지요. 이 말을 필기하지 마세요. 사람은 살기 시작하는 순간 죽기 시작합니다. 삶은 자궁에서 시작되는 내리막길, 정자가 난자를 만나 달라붙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내리막길입니다.- P48
우리가 어떤 철학적 주장을 하든지 간에 인류는 주변적인 존재에 불과해. 동물계의 자연 질서에서 우리 인류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우리가 없어도 자연계는 전혀 아쉬워하지 않을 거야. 작은 동물들은 우리처럼 자의식을 갖고 있지는 않을 거야. 기억도. 희망도, 양심도, 죽음에 대한 공포도 없겠지. 자기가 얼마나 강하고 멋진지도 모를 거야. 하지만 이 세상의 인간이 모두 죽고 우리 하수관과 가스 레인지와 디젤 엔진이 모두 화석이 되어도 곤충은 여전히 살아남을 거야. 틀림
없어. 번성하고 진화하고 분화하는 곤충은 우리보다 오래 살아남을거야.- P96
누구나 알고 있듯이, 좋은 날씨는 불운을 가저온다. 불운은 시계가 좋을 때 우리를 기습할 기능성이 가장 큰 송골매다. 죽음은 푸른 하늘을 좋아한다., 좋은 날씨는 장례식을 좋아한다. 현명하고 비과학적인 사람들은 그런 날에는 밖에 나오려 하지 않는다. 하다못해 나무 그늘에라도 숨으려 하고, 그 보호막을 벗어나 해안을 따라 걷는 따위의 어리석은 짓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동물학 박사들은 그것을 잘 알지 못했다. 자연계의 가혹함을 깨닫지 못했다. 톡토기도 해안의 변화를 견뎌내지 못했는데, 어떻게 그들이 살아남겠는가? 톡토기가 살아남지 못했다면, 무엇때문에 그들이 살아남아야 하는가?- P99
셀리스는 바보가 아니었다. 30년 동안의 소심한 태도가 터무니없었다는 것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화재는 그녀의 과거를 태워 숯으로 만들었다. 그녀는 그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남편과의 첫 만남, 남편의 노랫소리, 톡토기, 남편과의 첫 섹스를 회상하는 것조차 참을 수가 없었다. 그것을 희상하면 당장에 연기를 내뿜고 있는 연수원이 눈앞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페스타의 검게 탄얼굴, 노릇하게 구워진 머리카락, 그리고 녹아드는 것처럼 상냥한 페스타의 목소리도 함께 떠올랐다.- P151
조지프가 앞으로 걸어 나와 셀리스의 허리에 팔을 두르려고 했다. 하지만 셀리스는 손짓으로 그를 내쳤다. 이 화재, 이 죽음은 그녀의 책임일 뿐만 아니라 그의 책임이기도 했다. 사랑이 잘못이었다. 열정이 잘못이었다. 그들의 열정은 비록 짧았지만, 자연계의 균형을 뒤흔들고 자연계의 동시성을 시험할 만큼 강렬했다. 섹스가 있는 곳에 죽음이 있다. 섹스와 죽음은 하나의 직선 위에 있는 검은 좌표다. 슬픔은 에로틱해진 죽음이다. 그리고 섹스는 성교 후의 여생으로 곧장 뛰어들기 위해 때가 되기 전에 서둘러 속세의 번거로움 을 벗어 던질 뿐이다. 셀리스가 그렇게 아침 일찍 연수원을 뛰쳐나와 새로운 사랑을 잡기 위해 서두른 것이 화재의 원인이었다. 그것이 과학적인 견해다.- P152
이 남자가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이러는 것일까? 내가 얼마나 긴장해 있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하나? 그 오래전에 그가 진실을 말하지 않고, 또 내 허리를 쿡국 찌르면서 자백을 말린 것에 대해 내가 아직까지도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짐작도 못하나?- P154
그러나 사실상 그들의 불쾌감은 주로 기억 ㅡ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 ㅡ 으로 가득 찬 곳이 사라진다는 것 때문이었다. 셀리스는 그곳을 두려워했다. 그곳의 쌀쌀한 바람, 끊임없는 파도, 항상 연기로 가득 찬 것처럼 흐린 하늘을 두려워했다. 조지프는 셀리스와 결혼한 뒤 여러 번 그곳에 갔지만, 최근에는 가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19년 동안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더 젊었던 시절, 그가 그곳을 잘 알아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어쩌다 오후에 시간이 비면 은밀한 약속이라도 있는 것처럼 남의 눈을 피해서 아무도 모르게 혼자 차를 몰고 해안에 간 적도 있었다. 그럴 때면 쌍안경을 들고 오솔길을 걸으면서 해안을 조사했지만, 마지막에는 항상 모래 언덕에 가서 아내가 그를 유흑했던 일을 기억하고, 그 유혹을 상상 속에서 다시 체험하곤 했다.- P179
그는 언제나 아내와 함께 해안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당연하다. 첫 만남이 최고다. 바리톤만에 갑시다. 옛 추억을 위해서. 죽기 전에. 그는 수천 번이나 제의하곤 했다. 그러나 셀리스는 단 한 번도 동의하지 않았다. 조지프를 만난 그 주일과 그들의 첫 섹스를 회상하는 것조차 좋아하지 않았다. 그 주일을 생각하면 페스타와 화재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열정이 어떻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지, 사랑이 어떻게 불을 지를 수 있는지를 새삼 기억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P180
그들의 이력은 확정되있다. 앞으로 일어 날 일은 아무것도 없다. 덧붙일 것도 없다. 그들이 죽은 날짜는 기록되었고, 그것은 결코 지울 수 없다. 아무것도 바뀌거나 수정될 수 없다. 그것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죽지 않은 이들의 심정이나 그들이 지어내는 신화뿐이다. 그것이 세상이 존재하는 유일한 <최후의 심판일>이다. 뒷궁리가 주는 이익. 죽은 사람들 자신은 추억을 박탈당한다. 그들은 자신의 죽음을 이해할 필요가 없다.- P194
<행복한 죽음>을 그렇게 쉽사리 강탈당히는 결과를 자초한 것은 너무 무책임했다. 고통과 노년의 유동적인 세계에 도달할 때까지 기를 쓰고 나아갔어야 했다. 꿋꿋하게 참고 견뎌서, 침대에서의 편안한 죽음이라는 정당한 보상을 받으려고 애썼어야 했다.- P202
살인 사건이 일어난 지 아흐레째 되는 날 해질 녁에는 그곳에 뿌려진 생명과 사랑의 흔적들은 모두 사라졌다. 자연계가 홍수처럼 되돌아왔다. 우주의 화려함이 되돌아왔다. 모래 언덕에 잠시 머문 조지프와 셀리스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흙 속에 남아 있다 해도, 그것은
풀의 활기 찬 속삭임을 북돋워 줄 뿐이다.- P209